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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장 5절 6절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 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자, 우리는 지난 두 주간에 걸쳐서 기도란 무엇인가에 관한 개괄적 내용을 공부했죠?
프로슈코마이 (προσεύχομαι : proseuchomai).
기도라는 건 단순히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을 절대자, 나보다 힘이 센 어떤 그런 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의 뜻을 내 뜻으로 담아서 그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라 그랬죠? 그게 프로슈코마이 입니다.
기도라는 건 일차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로 흘러 오는 거예요.
원래 존재도 아니었더 그 죽은 흙들에게 원함이라는 개념은 가당치도 않은겁니다.
존재이지도 아닌 것들이 무엇을 원할 수 있다라는 것이, 이게 언어도단이라는 거예요.
원함이라는 것이 있기 위해서는 마음과 뜻이라는 것이 있어야 되는데 (물론 참 마음과 참 뜻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 인간이라는 존재는요 진리를 마음으로 갖기 전에는 짐승에 불과한 것이라 참 마음과 참 뜻이 있지 못하는 존재예요.
그래서 그들은 ‘원함’ 이라는 것 올바른 ‘원함,’ 올바른 ‘기도’ 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것이 이 세상 아담 군상들의 현실인거예요. 마음이 있어야 원함이 있을 수 있어요.
마음이 있어야 뜻이 있고 뜻이 있어야 원함이 있을 수 있다 말입니다.
물론 성경에 하나님께서 새 언약에 새 마음으로 바꾸어 주겠다라는 그런 말을 하시죠?
그래서 우리가 ‘그럼 헌 마음도 있지 않나’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헌 마음’ 이라는 건 없어요.
마음이라는거 자체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사랑. 그것이 마음의 실체거든요. 근데 그것이 없으면 그냥 죽은거예요. 그 마음이 없으면 .....기도라는 것, 원함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그 마음과 뜻이 그리고 거기서 발출된 그런 하나님의 원함이 먼저 있어야
그 원함에 의해서 그 원함, 속으로 이제 함몰 되어 들어간 어떤 존재들이 하나님의 그 원함을 자기의 원함으로 이렇게 전이 받아서, 왜? 그게 진리라는걸 이제 아니까 ‘아 그게 나의 원함이 되어야 되는 거구나’ 라고 그러한 하나님의 원함이 나의 원함으로 전이되는거란 말이예요.
그래서 그걸 그렇게 받아서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 또 자기 이웃에게 그것을 이렇게 흘려 보내는 그 원함의 내용, 그것이 바로 ‘기도’ 잖아요. 그래서 기도라는 걸 잘 보면, 성경에 나오는 기도라는걸 보면 자기에게 흘려 주는 기도가 있고, (시편이 대부분 그거죠?)
그리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하나님 이게 그건 거죠? 하나님의 뜻이라는게 그거 인거죠?’ 이렇게 하는거) 그 기도가 있고,
예수님이 하신 기도처럼 제자들에게 이렇게 흘려주는 기도가 있단 말이예요. 근데 그 내용은 전부 다 ‘진리’ 란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그 이름이라는 건 ‘말씀’ 이라고 바꾸어서 써도 돼요, 성경에서.
너희가 내 말씀으로 진리 안에서 구하는 건 아버지가 다 이루어 주신다, 그러는 거예요. 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으니까.
근데 그 원함을 내가 알아서 나의 원함으로 하나님께 아뢸 때 하나님이 왜 안 들어 주시겠냐, 라는거죠.
우리가 원하는 건, 뭐 열심히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 하늘도 감동할 만큼 그러한 어떤 열심을 부려서 기도를 하면 다 이루어준다 이런거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런 쓸데없는 짓 하지 마세요.그런 면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갖지 못한 자들의 그 기도는
성경이 말하는 그 ‘항상 기도하라’의 그 기도가 아닌거예요. 그냥 이 정의해 놓은 자기들의 기도인거죠.
그냥 짐승들의 육적 욕망에 의한 사악한 부르짖음일 뿐이예요. 성경이 말하는 기도가 아니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과 아무 상관 없는 이 세상 모든 종교의 기도라는 게 있습니다. 기도가 없는 종교는 없어요. 모든 종교에 기도가 있어요. 심지어 무신론자들도 무심결에 자기의 원함을 누군가에게 빌고는 하죠? 티비 드라마 같은데 이렇게 보면은 그냥 무심결에 ‘아이고, 하나님 아버지’ 그런다니까요, 사람들이. 무신론자들에게도 기도라는게 있어요.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모여 있다는 교회 안에서의 기도가 그들의 기도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요. 형식도 똑같고 내용도 똑같아요.
전부 기도하자고 그러면 눈 감고 앞으로 푹 이렇게 숙여요. 그러죠? 아니, ‘기도합시다’ 그러면 다 이렇게 그냥.
불교에서도 그러고 이슬람교에서도 그러고. 형식도 똑같고 심지어 모든 종교에 금식이 있죠?
그리고 모든 종교에 방언 기도가 있습니다. 그럼 기독교의 기도와 다른 종교의 기도가 뭐가 다른거냐고요.
성경이 성도들에게 그런 기도 하라고 그랬겠냐고요. ‘항상 기도하라’ 의 기도가 그런 기도겠냐고요, 여러분.
성경은 분명 인간이라는 존재 안에서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먼저 기도하지 않으면 너희들은 마땅히 기도할 바를 모르는 존재다’ 라고 이야기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님이 원하는 그런 기도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절대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도 모르는 그들이 하는 그 기도와 우리의 기도가 같으면 안되잖아요.그렇다면 성경이 틀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던지
이 세상의 기독교가 정의하고 있는 그 기도, 그것의 내용이 틀린 것이던지 둘 중의 하나 아니겠습니까?
그럼 전자는 아닐거고 후자란 말이예요. 당연히 이 세상 사람들, 특히
기독교가 정의하고 있는 기도라는 것의 개념이 잘못되어 있는 거예요.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가져서.... 그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그것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나와 내 이웃을 향해서 이렇게 들려주고 ‘너도 제발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내가 나에게, 내가 이웃에게. 그렇게 간절한 원함을 갖는 거. 그것이 기도예요. 그래서 나중에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여기에 이어지는게 주기도문이라는 거죠,
소위? 그래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내 안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주세요, 라는 기도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버지의 뜻이 내 뜻이 되게 해주세요,’ 그거. 그래서 시편의 기도들이 하나같이 다 복음을 담고 있는 것이고
그 기도는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독백의 형식을 갖기도 하고, 다른 이들에게 들려주는 그런 형식을 갖기도 하며,
하나님께 아뢰는 형식을 갖기도 하는 거예요.
기도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과 하나도 다른 것이 없이이 눈에 보이는 현상계에서의 그 자기 마음 (에피뚜미아 [ἐπιθυμία : epithumia], 그게 두 마음이라 그랬죠?), 그 자기 마음을 쫓아서 그 외적 세계 속에서의 (이 호 코스모스의 세계 속에서의) 그런 육신과 그 육신의 원함을 기도라는 것으로 내어 놓는 이들을 오늘 본문이 ‘외식하는 자’ 라고 일컫는 거예요. 그 기도를 하는 이들을 ‘외식하는 자’ 라고 한다니깐요. 주님은 ‘절대 그들처럼 기도하지 말라’ 그래요. 그건 기도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들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려고 기도를 한다, 그러죠? 그거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나 기도한다’ 라고 이렇게 자랑하기 위해 사람들이 잘 보이는 곳에서 기도한다, 라는 그런 내용이 아니라 그랬어요. 6장 1절에서 저희가 이미 공부를 했죠?
그거는 눈에 보이는 그 나타난 것으로, 그걸 의로 규정하여 그냥 그렇게, 그렇게 그냥 행해버리는 거.
이거를 ‘사람들의 눈에 보이려고 의를 행한다’ 라고 이렇게 썼다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의 눈에 보이려고 기도를 한다라는 건 뭐겠어요?
그런 이 호 코스모스의 이 외적 세계, 여기에만 그냥 창념하여 여기에 관한 것을 얻어내기 위해 아뢰고 그것을 가지고
‘이것이 기도야’ 라고 정의하고 있는 이 모든 게 ‘사람들의 눈에 보이려고 하는 기도’ 라는 어구가 갖고 있는 의미란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네 이웃을 사랑해라’ 라는 그런 성경의 진술을 문자적으로 그냥, 표피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이해를 해서
이 인간 세상이 정의해 놓은 그런 종류의 사랑을 할려고 이렇게 애쓰는 거, 그걸 성경이 ‘외식’ 이라 그래요.
물론, 그 아가페의 사랑, 그 진리를 흘려주는 그 사랑을 우리가 하기 위해서는 그런 필레오적인 사랑. 아니, 다른 이들에 대한
그런 어떤 사랑하는 마음이나 긍휼하는 마음이 있어야 그것도 전해주는 거지, 그거 없이 어떻게 그게 되겠어요.
물론 필요하지만 그것, 그 진리가 목적이 아닌 그냥 어떤 감정적인 흐름 이런 것들을 가지고 그냥 성경이 말하는 그 사랑을 할려고 하는 그것을 성경이 ‘외식’ 이라 그런다니깐요. 그리고 그게 마치 다인양 하는 거. 그걸 ‘외식’ 이라 그런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눈에 보이는 대로 봐서는 안되는 거예요.그 행간에 숨어 있는 메세지를 봐야된다고 제가 계속 누누히 말씀드리고 있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보이는 대로 읽어서 보이는 행위로 낳아버리면 그걸 외식이라 그래요.
사람들은 그걸 ‘의로운 행위’ 라고 우기지만, 주님은 ‘그런 거 하지마’ 라고 이야기 했단 말이예요. 그게 6장 1절이래니깐요.
사랑이라는 그 헬라어 단어 아가페는요. 항상 남성 명사로, 남성 고유 명사로 사용됩니다, 성경에서.
왜 성경이 그 사랑이라는 단어에 남성이라는 그 성(姓)을 붙였을까요? 왜 그 단어를 사용할까요, 여러분?
그냥 사랑. 그냥 중성으로 쓰면 되지 않아요?
근데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랑이라는 단어가 남성 고유 명사예요. 그건 사랑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내용이 어떤 감정이나
보이지 않는 실체의 어떤 그런 추상적인 이런 흐름. ‘사랑이 뭐야’ 그러면 얘기는 못하지만 막연히 갖고 있는 어떤 흐름이 있죠,
여러분? 그런 거를, 그런 추상 명사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사랑이라는게.
고유한 어떤 한 대상, 그리고 그 대상으로 인식 될 수 있는 하나의 이름을 가진 고유 명사, 그것이 사랑이다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사랑이라는 단어를 남성 고유 명사로 쓴다니깐요.
그런데 그 고유 명사로서의 그 사랑을 담고 있는게 성경이죠? 그 성경은 그 가리킴의 대상을 하나로 압축해버려요.
‘사랑은 하나님이다’ 그러잖아요, 요한일서에서.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그 ‘사랑하라’ 라는 말은 뭐겠어요? 사랑이신 (그 남성 고유 명사이신 그 사랑),
사랑의 실체이신 그 하나님으로 교제를 하라. 근데 그 하나님은 이 세상의 진리로, 말씀으로, 복음으로만 와 계시단 말이예요.
‘그것으로 교제하라’ 가 ‘사랑하라’ 예요. 그 하나님을 주어라’ 이것이 ‘사랑하라’ 라니깐요.
근데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도 열심히 사랑의 삶을 실천하겠다고들 부산을 떨고 있는 거예요.
성경은 그런 것을 ‘외식’ 이라고 한단 말이예요.
아가페 (ἀγάπη : agape)라는 그 헬라어 단어가 히브리어 아하바 (אַהֲבָה : ahabah)를 그대로 옮겨 적은 거거든요.
근데 아하바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전으로 전해지는 것을 의미해요. 아하바라는 단어 자체가, 그 의미가.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성전, 성전은 뭐예요?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주기 위해 이 땅의 것으로, 아랫 것으로 준 게 성전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실체는 보이지 않는 겁니다. 고걸 사랑이라 그래요.
그래서 성경도 사랑이고, 예수도 사랑이고, 성전도 사랑인거예요.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도 원래의 실체가 사랑이라니깐요.
근데 그걸 ‘사랑’ 으로 보지 못하면 그걸 죄라 그러고 악이라 그런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사랑, 아가페가 뭐예요?
하나님의 말을 성전으로 말하는게 사랑이라면 그 아가페는 그 진리의 말씀이라니깐요. 하나님이라니깐요, 사랑이.
그러니까 보세요. 헬라어라는 걸 히브리어로 끌고 가서 이해를 하지 못하면은 절대 그 헬라어 만으로도 그 진의를 이해 할 수가 없어요. 파테르 (πατήρ : patér) 라는 아버지라는 단어를 히브리어로 갖고 가서 아브 (אַב : ab) 라는 말에서 그 의미를 끌어내지 못하면 파테르라는 단어 자체, 그것으로 그 진의를 우리가 모른다니깐요. 그래서 원어의 의미로 계속 쫒아가서, 추적을 해서 공부를 하는 거예요, 여러분. 그러니까 사랑이 그런 거예요, 사랑이.
하나님의 말을 아래의 말로 준 거. 그래서 그것으로 교제하면 그걸 ‘사랑 한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예요, 성경이.
파테르, 아버지는 뭐라 그랬어요? 아브. 히브리어 사전의 첫 번째 단어, 아브. 하나님의 성전. 나예요 나.
그래서 내 안에 아버지, 진리가 들어오시면은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라고 이야기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감정의 개념 이전에 진리라는 컨텐츠로 이해를 할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성경을 처음 주셨을 때 왜 모음을 안 주셨다 그랬어요? 읽지 말라고요. 아니, 못 읽는 다니깐요, 모음이 없으면.
그럼 읽지 말라는 건 뭐예요? 니들이 소리로 읽어버리면 망한다는 거예요.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뜻으로, 메세지로, 진리로 이해하라고 준 거예요.
그건 성경은, 말씀은 읽어서 이해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타난 문자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내용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나중에는 히브리어, 헬라어, 문자, 다 필요 없다니깐요. 다 버릴거예요, 그거요.
근데 여러분에게 그 내용을 가르쳐 주기 위해 그 버릴 거를 공부하는 나는 뭐냐고. 다 몰라도 되는 거, 그거 버릴 거라니깐요,
그거 다. 히브리어고 나발이고 다 버릴 거라고, 그거는. 아무 소용 없는 거예요, 보이는 거는.
근데 자꾸 왜 문자로 공부해야 되냐고, 원어로 공부해야 되냐고. 아, 공부 안해도 돼요. 말만 잘 이해하시라니깐.
그 공부는 제가 해갖고 와갖고 여러분에게 설명 해드리면 되는 거니까. 뭘, 굳이 그거를 할라그래. 잘난척 하고 싶어 가지고.
그래서 제가 그 문자 뒤에 숨은 내용을 이렇게 찾아드리기 위해서 @하니(16:26) (무슨 단어인지 모르겠습니다) 뭐니 하면서
시간과 공을 들이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그거 마음으로 갖게 하기 위해서요.
제가 히브리어나 아랍어나 헬라어를 가지고 성경을 이렇게 분석하고 연구하고 공부하는 건
여러분이 이미 마음으로 갖고 계신 그 진리에 대한 증거를 대드리기 위함인 것이지
그것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라고 하는 거 아니예요.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에 의해 진리에 도달해요.
원어로 도달하는 거 아니라니깐요.근데 그들이 육을 입고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진리에 굳게 설 수가 없어요.
자꾸 의심이 가고 헷갈린단 말이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설교자들을 통해서 그 진리가 참 진리임을 반복하여 확증하게 하시거든요?
거기에 원어 연구도 필요한 거고 신학적 학습과 연습이 필요한 거란 말이예요,
그냥. 아니, 한글도 모르셨던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들이 예수천당 불신지옥. 그것만 갖고 천국 가셨단 말입니다.
그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에서 기인하는 거예요.
근데 현대에는요 이러저러한 이단 사설들이 너무 많이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비슷하게.
신학도 너무 많이 왜곡이 되어 있어서 진리가 홀대를 당하고 있단 말이예요. 오해 당하고 있다니깐요.
그래서 성경의 내용이 진짜 참 진리만을 설명하고 있다라는 것을 이렇게 설명 해 주기가 훨씬 힘들어졌어요, 지금이요.
워낙 인터넷이다 뭐다 해갖고 잡지식들을 많이 갖고 있어갖고 가르치기가 더 힘들어졌다니깐요.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시작하는 사람들이 쑥쑥 빨아들여요. 뭐 좀 어디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은 고거 깰려고 시간이 더 걸린다니까.
그러니까 인터넷 같은거 돌아다니지 좀 말아요, 그런거.
아, 나는 우리 그 웹사이트에 가끔 신천지들이 회원으로 가입해갖고 글을 그렇게 계속 올리는 걸 보면서 ‘아, 참 성실하다’ 라는 마음도 들지만 읽어보면 그럴듯 하다니깐요. 그리고 신천지라는 말이 얼마나 좋은 말인데 그들에게 뺏겨버렸잖아요, 그거.
그거 쓰면 마치 무슨 이단이 되는 것처럼. 아니, 새 하늘과 새 땅 그걸 그들에게 뺏겨버렸어, 그 단어를.
구원파 한테는 구원이라는 단어를 뺏겨버리고. 그러니까 그렇게 비슷하게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사람들도 보니까.
비슷하게 치고 들어오는 이단 사설들이 너무 많아서 고거를 ‘그런 거 아니고 참 진리는 이겁니다’ 라고 설명을 해주기 위해서
점점 더 깊이 들어가 증거를 찾아서 대 줄 수 밖에 없는 거라. 그래서 그런 것들이 필요한 겁니다, 여러분.
아무튼 그렇게 외식하는 기도에 대해서 엄중히 경고를 하신 주님께서 그 외식하는 기도가 행해지는 장소를 이야기 해 주세요
어떠한 메세지를 전하시는 거예요. 회당과 큰 길 모퉁이라 그러죠? 그 플라테이아 (πλατεῖα : plateia)는 성전 마당이라 그랬습니다. 회당은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으로 당시에 전해지는 장소였고 성전 마당 모퉁이는 가운데, 즉 이 지성소로 이해 되어지지 못하는 성전 마당적 말씀 이해를 상징하는 거예요.율법으로 오해 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게 ‘큰 길 모퉁이.’
나중에 살펴 보겠지만 성경은 모퉁이와 가운데를 정확하게 구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항상 ‘가운데 서셨다’ 라고 이렇게 성경이 표현을 해요, 원어를 보면은. 모퉁이적인 것은 전부 멸망에 이를 것으로 묘사가 되고 가운데 것이 생명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진술하고 있어요.
그렇게 회당과 성전 마당 모퉁이에서 사람들 눈에 보이기 위해 기도하는 그 외식하는 자들은 ‘자기의 상을 이미 받았다’ 그러죠?
그 상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얘, 너는 세상에서 니가 좋은 것을 받았잖아’ 에서 그 좋은 거예요. 세상에서 좋은 거.
너희들이 원했던 거. 그 자랑, 그 만족, 그 평가, 이런 거요. ‘상을 이미 받았잖니’ 의 그 좋은 거.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에 관심이 없는 이들은 온통 이 세상의 것에만 집중하여 살아 가잖아요.
그들이 구하는게 뭐겠어요. 뻔하죠, 이 세상 것이예요. 나 하나님 되기에 필요한 재료들. 그것만 구해요.
그게 외식하는 기도란 말입니다. 그러한 가짜 기도는 응답 받은 만큼 손해예요. 그렇잖아요,
나 하나님 되기의 재료를 에피뚜미아의 이 두 마음으로 인간들은 기도하게 되거든요.
그럼 기도해서 받은 만큼 그 인간들은 나 하나님 되기에 살을 붙이는 거예요. 받은 만큼 저주라니깐요.
진리를 알지 못하고 받은 응답, 기도 응답. 받은 만큼 저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기도가 그렇게 안 들어지는 거예요.
오해하지 마세요. 다들 기도 응답 제대로 받지도 못했으면서 그러면은 그냥 믿음 없는 사람으로 찍힐까봐 다 받았대.
사기들 좀 치지 마세요. 무슨 하나님이 그런 기도를 그렇게 응답을 해줘요.
재밌는 건 ‘이미 받았다’ 라고 번역이 된 그 헬라어 단어 아페쿠시 (ἀπέχω : apechó)는요
‘멀어졌다,’ ‘멀리 떠났다’ 라는 뜻을 함께 가져요.
우린 여기에서 이 세상에서 육적 차원의 상을 이미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상에서는 ‘그만큼 멀어지는 것이다’ 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거예요.
여기서 예수가 언급하고 계신 상은 생명 차원에서 최종적으로 나타나게 될 그 날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증여하시는 그 무한적 속성있죠 ? 영생이라고 부르는 그 무한적 속성, 그 하나님 생명으로의 그 참여,
이걸 ‘상’ 이라고 하는 거예요. 거기서 멀어지면? 죽음이예요, 그것이. 외식하는 기도를 하면 거기서 멀어진다니깐요.
그 상으로부터 멀리 떠난다는 건 우리 자신이 위선자들과 같이 그 땅의 차원에, 그 생명 차원의 그 말씀을 그냥 설정해버린다는 거예요. 우리는 결코 하나님 차원으로의 그 합류, 이른바 천국에 이를 수 없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은. 그러니까 이런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표피적으로, 그 인간들의 두 마음으로, 그 선악과 패러다임으로 오해를 해가지고 사랑과 구제와 기도등을
(지금 6장에서 이야기하는게 사랑, 구제, 기도잖아요? 다 같은 겁니다, 이걸) 땅의 차원의 것들로 그냥 행해버리면.
‘사랑하라’ 그러니까 자기들이 이해하고 있는 그 사랑으로 (땅의 차원의 것으로) 사랑해 버리고,
‘구제하라’ 그랬더니 땅의 차원의 것으로 그냥 구제 해버리고,
‘기도하라’ 그랬더니 그냥 다른 세상 사람들이 하는 그 기도로 그냥 기도 해버리면 그게 바로 오난과 같이
땅에다가 씨를 허비하여 배설해 버리는 그런 모습이라는 거예요, 그것이요. 그래서 죽었죠? 씨를 땅에다가 뿌리면 죽는다니깐요.
근데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 생명의 씨를 땅적인 것으로 이해를 해서 그것으로 행해버린다니깐요. 이게 오난이예요,
성경이 이야기하는. 근데 그러고도 자기들이 뭘 잘못하는지를 모르고 있단 말입니다.
지금 성경이 구제와 이 기도를, 6장에서 말하는 이 구제와 기도가 5장 말미에 그 사랑의 방법과 도구로 제시되고 있다라는 것을 놓치면 안돼요, 여러분. 살인 하지마, 간음 하지마, 거짓증거 하지마. 이걸 다 알아서 그걸 남에게 흘려주고
하나님께 ‘하나님, 이게 그거군요?’ 하면 그게 바로 이웃 사랑이고 하나님 사랑이야, 라고 이야기 했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된 그 사람이 바로 온전한 사람이다, 라고 이야기 했어요. 그게 5장 마지막 절이죠?
그리고는 그 사랑을 그럼 그렇게 흘려줄 때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걸 설명하기 위해 구제, 기도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거란 말이예요. 그러니까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를 하셔야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구제와 기도는 그 사랑이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를 해서... 제대로 흘려주는 것에 관한 이야기여야 하는 거예요.그러니까 그것이 아닌 땅적 차원의 것으로 그것을 곡해하고 흘려버리면 그것이 외식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구제 할 때 외식 하지마,’ ‘기도 할 때 외식하지마’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거는 진짜가 아니야’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그들의 가르침에만 경도되어 있었던 유대인들은 바로 이러한, 그 생명 본향에 이르도록 하는 이 생명의 말씀을 그저 땅의 차원에서 시작해서 땅의 차원으로 마무리 짓는 그런 일반론의 순환에만 머무르도록 했어요.
그리고 이러한 그 일반론의 순환을 통해서만 메시아, 그리스도를 대망하게 되는 그런 선민으로써의 자격을 얻게 되는 거야, 라고 가르쳤단 말이예요. 그게 율법주의란 말이예요. 지금의 기독교도 별반 다를 바 없고요.
주님은 바로 그러한 가르침을 휘포크리타이 (ὑποκριτής : hupokrités), ‘위선자들의 행패’ 라고 이야기 한거예요.
그렇게 기도는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는 세계로 순환이 되는 그런 단순한 배설의 역사가 아니고,
보이는 세계에서 시작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몰입되는 거룩한 그 영적 성숙에의 역사가 기도인 거예요.
기도를,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예수를 믿는다는 건 ‘그 말씀을 내가 마음으로 가졌다’ 라는 거잖아요. 그 예수를 믿고)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여 내어놓는다고 하는 것이 땅적인 것이면 땅에서 시작해서, 보이는 것에서 시작해서 보이는 것으로 귀결되는 거라니깐요. 그러면 그게 망하는 거란 말이예요.
보이는 말씀으로 시작해서 보이지 않는 영적 성숙에로의 그 역사. 기도가 거기에 소용되지 않으면 그거는 아무것도 아니예요.
그래서 주님은 ‘기도를 할려거든 골방으로 들어가라’ 이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성전 마당에서 너스레 떨지 말고 골방으로 들어가, 이렇게 이야기 한거죠.
이 말씀을 곡해해서 기도원마다 기도 굴을 파놓고 골방을 만들어 놓고 거기서 기도하면 마치 기도가 더 응답이 잘 된다고 사기치죠? 미국 같은데는 이제 집들이 넓고 방이 많으니까 심방가보면 집에 기도방이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여기에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거의 똑같애. 십자가 하나 벽에 탁 걸어 놓고 성경책 이따만한거 있죠? 그걸 딱 펴놓고 방석 하나 놓고. 근데 그 성경책은 언제 가도 항상 거기야. 내 넘어가는 걸 못 봤어. 먼지가 뽀얘요. 아니,
기도라는, 프로슈코마이라는 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말씀을 근거로 하여 흘리는 거래매요.
근데 말씀은 그렇게 홀대를 당하고,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고 그냥 방석만 너덜너덜 닳아 있다니깐요.
그러니까 말씀은 온데간데 없고 인간의 욕심만 가득 차있는 기도방. 그게 인간들의 골방이라니깐요.
성경이 말하는 골방은 그런 골방 아니예요.
여기서 골방이라고 번역이 된 타메이온 (ταμεῖον : tameion) 이라는건 성전 마당, 즉 현상계의 그 외부 세계와 대조되는
은밀한 내부 세계의 진리를 상징하는 개념이 골방이예요. 그래서 ‘회당’ 과 ‘큰 길 가 모퉁이’ 와 대조하여 ‘골방’ 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거예요. ‘밖에서, 성전 마당에서 너희들이 보고 행할 수 있는 건 희생 제사 밖에 없잖아. 그거 말고....
그걸 보고 그걸 흘리게 되면 그게 너희들의 육적 기도가 되는거야.
너희들은 골방 안으로 들어가서 그 내용을 알아야돼. 그래야 올바른 걸 흘릴 수 있어’ 라는 그런 말이예요.
그래서 등장하는 게 골방이란 말입니다. 성전 마당에서 율법적 신앙 행위로 외식하지 말고
은밀한 내부 세계, 진리의 가운데로 들어가라는 거예요.
그 타메이온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작은 방, 밀폐된 방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약국,’ ‘조제실’ 이라는 단어로 쓰이는 단어예요.
이제 그 스마트폰에다가 우리 교회 교인들도 원어 성경과 스트롱 사전을 가지고 다니는 분들이 꽤 있죠?
이희정 집사님이 깔아 줘 가지고. 찾아 보세요, 그 단어를. ‘약국,’ ‘조제실’ 이렇게 쓰여 있어요.
거 갑자기 왜 약국이 나와. 왜 조제라는 단어가 여기 나올까요? 타메이온. 성전에는요, 마당 안 쪽에 여러 개의 골방들이 있었어요.
그 골방에서는 성전에서 제사시에 사용하는 향이라든지 (향단에 향이 있어야 될 거 아니예요), 떡상의 떡이라든지 (어디서 만들어야 되잖아요. 그거 주문해서 갖다 놓은거 아니거든요. 제사장들이 만드는 겁니다. 어디 낙원떡집 이런데서 주문해다가 갖다 놓는게 아니라), 등대의 기름 (이것도 아무거나 쓰면 안됩니다), 요걸 조제해요. 누가? 제사장들이. 어디서? 골방 안에서요.
그래서 그 타메이온, 그 단어가 ‘약국,’ ‘조제실’ 이런 의미로 쓰이는 거예요.
그 향단의 향이라든지, 떡상 위의 떡이라든지, 등대의 그 등잔 불이 이제 나타난 모형으로 기능하는 거라면
골방에서의 그것을 조제하는 차서는 내용인 거예요.
그것이 그렇게 나타나기 위해서는 (성전에서 그렇게 어떤 기명들이나 그런 등대의 불, 향단의 향, 떡상의 떡 이런 것들)
이런 것들이 이렇게 놓여지는 것, 진설 되어 있는 것은 나타난 모양이지만
그 모양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것이 그렇게 지어지고
그것이 그렇게 나타난 것으로 완성될 때까지의 과정과 차서가 있을 거 아니예요. 그걸 내용이라고 그러죠?
그게 골방에서 이루어지는 거란 말이예요.
그러니까 너희들이 골방 안에서 그 내용을 보지도 못하고 드러난 것만 보고 그대로 행해버리면 그게 외식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외식하지 말고 골방으로 들어가,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멀리서, 마당에서 보고 ‘그건 그냥 그런 걸거야’ 라고 추측하지 말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떡상 위의 열두 개의 떡은요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이어야 됩니다. 멀리서 보면 모르죠?
그 골방에 들어가 봐야 ‘아, 이게 무교병이구나. 누룩 넣으면 안되는 거구나’ 알거 아니예요.
그거 열두 개예요. 왜 열두 개 일까요? 이스라엘이 열두 지파니까.
그리고 여섯 개씩 두 줄로 놔야 돼요. 왜 여섯 개 씩 두 줄 일까요? 여섯 개 씩,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여섯 여섯으로 나누어졌던 때가 언제입니까? 그리심 산, 에발산이죠? 축복과 저주가 선포 되었던 곳이예요. 왜? 하나님의 말씀을 법으로 받으면 저주예요. 에발.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으면 축복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28장에서 ‘내가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었다’ 라 그랬어요. 그건 같은 거예요.
바라크 (בָּרַך : barak)라는 단어 자체가 저주라는 의미를 같이 갖고 있다니깐요, 복이라는 단어인데.
그리고 죄라는 단어는 회개라는 단어. 의미를 같이 갖고 있어요. 히브리어가 그런다니깐요.
그러니까 둘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인데
그 하나를 아랫 것으로 보면 그것이 저주요, 거기에서 위엣 것을 찾아내면 그게 복이라는 의미예요.
그러면 그걸 알기 위해서는 골방에서 그 떡이 어떻게 만들어지며 그 내용은 무엇이며 왜, 그러니까 몇 개로 만들어지며
이걸 알아야 될 거 아니예요. 그래서 ‘그럼 골방에 들어가라. 떡만 보면 니들이 뭘 알어. 그건 니들이 육을 살찌우는 그냥 떡일 뿐이지. 내용을 알아야지’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골방으로 들어가라, 라고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누룩은 왜 안 넣어요? 예수님께서 그 열두 지파의 대표로 이 땅에 오시는데 죄가 없는 순수한, 순결한 진리 그 자체였잖아요.
그래서 누룩 없는 떡인거예요. 그 예수에 의해 ‘열둘은 아들이 되는거야’ 이걸 보여주는 거잖아요.
그건 골방에 들어가야 아는 거라니깐요. 그런데 그 골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내용을 알지 못하고)
성전 모퉁이에 (성전 마당 모퉁이에 서서) 표피적으로만 (땅적 차원의 것으로만) 말씀을 받게 되면
그것이 바로 멸망에 이르게 되는 외식이 된다는 거예요.
누가복음 12장 1절 보세요. 35:07
그동안에 무리 수 만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또 외식이 나와요.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감추인 것, 숨은 것이 뭐예요? 내용이죠? 진리죠? 그건 반드시 드러나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오이키아 [οἰκία : oikia], 성전 위에서) 말해져야 된다라고 이야기 하는거예요.
그럼 골방은 뭐하는 곳이다? 듣는 곳이란 말이예요. 골방에서 들어야 집 위에서 말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는 거예요, ‘골방에 들어가, 그리고 들어. 먼저 들어’ 그러는 것이예요.
그러니까 골방들의 총화는 결국 성전 한 가운데에 있는 골방, 지성소를 가리키는 거예요.
모든 골방들의 총화가 가운데 지성소란 말이예요. 그러면 우리는 이 시점에서 어디로 들어가야 돼요, 이제?
옛 성전은 이미 없어졌고. ‘골방으로 들어가라’ 라는 이 말씀을 우리가 성경으로 보잖아요. 눈으로 봤어요.
그럼 어디 들어가야 될 것 가입니까, 그 골방이 그 골방이 아니라면.
‘니 골방으로’ 라고 번역이 된 에이스토타미에온수오는 직역을 정확하게 하면 ‘니가 소유하고 있는 그 골방 안으로’ 라는 말이예요.
여러분이 골방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네요, 성경이. 그럼 여러분 안에 골방이 있어요?
말씀드린 것처럼 골방은 단지 보이는 골방, 혹은 아무도 보지 않는 외부세계의 그 장소를 언급하는 게 아니라.
지금 산상수훈의 메세지가 전해지고 있는 그 장소로서의 ‘산’ 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죠?
내가 참 성전에서 너희에게 참 진리를 이야기 할게. 그래서 ‘산’ 으로 올라오게 하는 것이거든요? 그게 예루살렘이니까. 산.
항상 ‘그 산’ 그러면 예루살렘밖에 없어요. 그것처럼
그런 영적 상징적 상징성과 같이 그 내부 세계의 그 신비, 그 진리로 가진 내 마음. 그걸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 골방 안으로 들어가. 니가 진리로 그 마음을 갖고 있다면 너는 그 안에 들어가서 그것을 통하여 봐야돼, 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기도해,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거기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니 안에 있는 그 지성소. 니 안에 진리의 영 있다매, 하나님 있다매, 성령 있다매. 그럼 거기가 골방이야, 지성소야.
그리로 들어가서 그 진리로 세상을 보라는 거예요. 그 진리로 성경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 진리로 예수를 보라는 거예요.
그러면 외식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거죠.
그 상태에서 그것을 흘려주면 그게 올바른 ‘구제’ 요, 올바른 ‘기도’ 요, 그것을 ‘사랑’ 이라고 이야기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이라고.
사실 우리가 그 내부 세계의 그 은밀한 골방으로 제대로 들어가게 되면 그 안에서 우리 이 유한의 존재는요
사실 외부 세계의 그 차원에 아무런 매력도 흥미도 느낄 수 없게 돼요. 물론 우리 육의 생명이 끝날 때나 완성 되는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에 조금씩 조금씩 깊이 들어가면 들어 갈수록 그 내면의 골방 안에서의 외부는 참으로 가치 없어보여요, 참으로.
나는 참 요즘 전 세계를 뭐 들었다 놨다하는 그 ‘말춤’ 이라는 거. 티비나 뭐 이런데서도 본 적이 없고 우리 막내가 인터넷 유튜브에서 뭘 이렇게 틀어주면서 ‘아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친구들에게 이렇게 부끄러워 해본 적이 없다’ 라고 아빠 이걸 보라고 해서 보여준게 그거였어요. 말춤. 그거 제목이 뭐라 그랬지? 예? 아, 강남, 강남스타일. 아, 알았어 근데. 그거를 우리 막내가, 음악을 굉장히 깊이 있게 듣는 애가 우리 막내예요. 셋 중에 가장 깊이 있게 음악을 듣는 애가 막내인데 자기가, 미국에 이제 미국 친구들이 있잖아요, 걔는. 그러니까 그 친구들에게 자기가 한국인이라는게 이렇게 부끄러워본 적이 이 강남스타일을 걔네들이 같이 보았을 때 였대요.
근데 저도 보니까 아 부끄러워 죽겠어 진짜, 사실 그게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그렇게 시청 앞에 모여서 그 수 많은 스케줄을 취소하고 온 국민이 열광을 해야 될 그런 겁니까? 아, 생각을 해보세요. 인간들의 세상이 이렇게 가볍대니깐요. 그러고 그 펄떡펄떡 뛰는게 뭔 가치가 있어요. 근데 사람들은 그걸 가치있다고 여겨요.
여러분 내부 세계의 은밀한 곳에 들어가서 세상과 하나님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에게 그것이 안중에나 있겠습니까?
아, 난 그 사람을 욕할려고 한 건 아닌데 아주 열심히 성실하게 잘 만들었더라고요, 하여튼. 마무리를 잘해야지 이게. 팬들이 있을지도 모르는데.그건 아무런 매력도 흥미도 없는 거예요.
우리가 날마다 죽는 그 죽음 안에서 그러한 묵시 속 성도의 현실을 문득 문득 경험 해야 돼요. 그리고 그렇게 됩니다.
그건 생명 차원으로 나아가게 되는 혹은 나아가고자 하는 존재가 내부 세계의 은밀함 안에 거하게 되면
당연히 경험 할 수 있는 거예요. 아니, 불가항력적으로 체험 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의 신비라니깐요, 그것은요.
땅의 차원, 그 인과율과 그 보응, 응보의 잔혹함만이 활개치는 이 토대에서
생명의 말씀을 이렇게 허비하고 설정해버리는 그런 이들은 절대 맛볼 수 없는 존재의 신비인거예요, 그것은요.
그들은 이러한 존재의 신비로부터는 철저하게 죽어 있는 거예요.
주님은 거기서 ‘사랑하라’ 그러는 거예요. 그걸 부활이라고 한다니깐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골방, 그 의미가 뭔지 아시겠죠? ‘그리로 들어가’ 라고 하신게.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 성전 마당적인 거, 율법. 거기에 머물러서 그것을 섬기느라 육의 행위에만 착념하지 말고
그 안의 은밀한 것, 그 내부 세계의 내용으로 들어가서 그 사랑이라는 인격을 만나라는 거예요. 그게 골방으로 들어가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두 번째 단어인 에이세르코마이 (εἰσέρχομαι : eiserchomai), ‘들어가라’ 라는 단어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죠.
이 에이세르코마이 (들어가라), 이 단어는 주님이 자주 쓰던 단어예요.
들어가라, 들어가라. 양의 문으로 들어가라. 어디로 들어가라. 뭐 여러번 나오는 거죠.
그리고 사도들도 서신서에서 아주 많이 쓰는 그런 단어입니다. 근데 그 단어와 함께 사용되는 단어들이 몇개 안돼요.
어느 곳으로 이렇게 들어가라, 에이세르코마이. 근데 그 ‘어느 곳’ 이 몇 개 안돼요.
그리고 그 몇 개 안되는 그것은 다 하나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거기로 들어가라예요, 거기로.몇 군데만 살펴 드리겠습니다.
히브리서 4장 4절 보세요.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셨으며
또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이게 에이세르코마이.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똑같은 단어 또 나오죠.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했으므로. 계속 나오죠?
에이세르코마이. 어디로 들어가라. 어디로 들어가라그래요? 안식으로 들어가라그래요.
근데 누가 그 안식으로 못 들어간다 그래요? 순종하지 않는 자는 못 들어간다 그러죠?
그러면 여러분 마음 속에 그런 마음이 들거예요. ‘거봐, 순종을 해야 들어가는거지.’ 그러면 그 순종이 뭔지를 알아야죠?
그래야 안식으로, 골방으로 들어가는데 우리가 필연적으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거예요.
그 순종하지 않으면 못 들어간다면서요. 그럼 들어가라그랬단 말이예요, 하나님이.
근데 히브리서에서 보니까 순종하지 않으면 못 들어간다 그래요. 그럼 순종 해야 되겠네요?
그럼 그 순종이 뭔지를 알아야 들어갈거 아니예요. 너무 친절하죠.
순종은 단순히 시키는 일에 복족하는 걸 말하는게 아니예요. 히브리어에서 순종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그 의미는 ‘들음’ 이예요.
우리도 그렇게 말 쓰죠? ‘너 내 말 잘 들어.’ 이게 말을 똑똑히 들으라는 거예요, ‘너 나의 뜻에 순종해’ 이렇게 쓰는 거예요?
‘내 말 잘 들어.’ 우리도 그렇게 쓰잖아요. 이게 이 히브리어도 마찬가지라니깐요. 순종은 들음과 연관된 단어예요.
아니, 그 단어 자체가 ‘들음,’ ‘듣다’ 라는 단어예요.
여러분이 너무 잘 아시는 사무엘상 15장으로 가서 안식에 들어 갈 수 없는 자의 ‘불순종’ 이 뭔지 한번 다시 보자구요.
사무엘상 15장 19절.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잘 듣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신 것을 행하였나이까. 왜 듣지 않고 행했습니까, 그러죠?
왜 듣지 않고 행했으며, 그럼 뭐하라는 거예요? 행하는 거 말고 먼저 들으라는 얘기예요.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들었다.’ 잘 들었다, 나는! 거짓말 하는거 아니예요.
‘나는 잘 들었어 그리고 그렇게 하라는 건 줄 알았어.’ 우리가 산상 수훈에서 그러죠. ‘너희가 이렇게 들었다.’
‘너희가 이렇게 들었으나’ 라고 하잖아요. ‘그게 들었다’ 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잘 들었다라는 거예요
. 우리는 그렇게 들을 수 밖에 없다라는 거예요. 우리의 한계예요. 육적 존재의 한계. 들었따. 난 잘 들었어.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을 진멸했다.
다 죽이라고 했는데 ‘나는 잘 들었다, 그래서 끌고 왔어’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할려고 양과 소를 취한 것 뿐이야. 다른 것도 아니야, 제사 할라고. 하나님 섬길라고. 하나님께 뭐 드릴라고 내가 뭐 몇 개 준비해온 것 뿐이야’ 이야기 했어요.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에 순종하는 것 같이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그래요. 목소리에 순종 하는 것. 순종은 목소리를 듣는거라는 이야기죠. 그 순종을 뭐하고 비교해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그 순종을 또 뭐라고 표현해요? ‘듣는 것’ 이라고 그러죠. 듣는 것이. 이 듣는 것, 이게 순종이라는 단어예요.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희생 제사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듣는 것이 너희의 행함, 너희의 제사. 그거보다 더 우선 되는 거야, 라고 하는 거예요.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사울은 잘 들었다, 나는 청종했다라고 하는데 사무엘은 ‘아니다, 니가 안 들었다, 너는 말을 버렸다’ 그래요.
너는 ‘진리를 버렸다’ 그래요.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시나이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자,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말을 소리로 이해하면, 표피적인 것으로 이해를 하면,
그리고 내 상식과 세상의 도덕 윤리와 사회 법 그 정도의 수준에서 이해를 해버리면, 그리고 행하면 말 안 들은 거예요.
성경 안 읽은 거예요, 그거요. 그리고 그걸, ‘불순종’ 이라 그래요. 불순종.
여기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의 그 샤마 (שָׁמַע : shama), 순종이라고 번역 된 샤마라는 단어가 ‘듣다’ 라는 단어예요, 듣다.
듣는 것이 제사보다 나은거야. 여기서 ‘낫다’ 라는 말이 뭐라 그랬어요. ‘제사는 아냐, 듣는거야’ 라는 말이라 그랬죠?
‘제사 아냐, 말 듣는거야.’
그럼 불순종은 ‘불신’ 이예요. 그럼 불순종과 불신은 뭐죠? ‘안 들음’ 이 아니라 ‘잘 못’ 들음이예요.
잘 못 듣고 행해버리면 그걸 불순종이라그래요. ‘아유, 잘 못 들었지만 열심히 했으니까 그 공로는 인정해 줄게’ 가 아니라니깐요.
잘 못 듣고 죽어라고 해서 지옥간다니깐요. 아, 그걸 불신이라고 그래요, 성경이.
불신은 하나님을 안 믿는게 아니라 잘 못 듣고 잘 못 믿는 걸 ‘불신’이라고 한다니깐요.
불순종은 하나님의 말을 안 듣는게 아니라 잘 못 듣고 열심히 행한 걸 불순종이라그래요.
그렇게 하면 어딜 못 들어간다 그래요? 다시 히브리서로. 안식에 못 들어 간다 그러죠? 당연하죠.
잘 못 들으면 죽어라고 뭔가를 해야되는데 어떻게 안식에 들어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못 들어갑니다.
그래서 ‘들어라’ 그러는 거예요. 잘 들어라. 순종해라, 그래야 안식에 들어간다.
그럼 골방으로는 어떻게 들어갈 수 있다? 잘 들어야. 아니, 골방으로 들어가는 자는 그 안에서 잘 듣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게 더 낫겠네요. 잘 듣는 거예요. 골방 안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못 듣고 열심히 땅적 차원의 일을 행위로 쏟아내 버리면 그게 곧 ‘불순종’ 이예요.
죽어라고 일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거예요.
따라서 골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쏟아내는 기도는 불순종이고 욕심이고 욕정이고 자기 하나님되기에 필요한 자원을 구하는 일 밖에, 사악한 일 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그거는 멸망의 기도예요.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은밀한 것을 잘 듣는 이들은
(은밀한 것이라는 것 자체가 그 내용이라는 뜻이잖아요. 그래서 은밀함 은밀함 이런 것이 이렇게 자주 나오는 거예요, 성경에),
그런 은밀한 것을 잘 듣는 사람은 절대 그런 외식적인 기도 안한다는 거예요. ‘그런거 하지마’ 그러는 거예요.
우리가 바로 위에서 공부한 ‘구제’ 도 그런 거였잖아요. 그 구제도 ‘은밀한 것으로 하라’ 그랬잖아요.
구제가 어떻게, 어떤 구제라 그랬어요?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라. 거기 ‘손’ 이라는 단어는 아예 없어요.
오른편이 하는 걸 왼편이 모르게하라. 그건 뭐라 그랬죠? 오른편이 하는 일은 왼편은 못 알아먹는 일이야, 라는 뜻이라 그랬죠?
오른손이 하는 일을 어떻게 모르게 하냐고, 얘를. 같이 가지고 다녀야 되는데. 그런 말이 아니란 말이예요.
오른편의 일은 왼편은 못 알아먹는 일이야, 이런 뜻이라 그랬잖아요. 그게 은밀한 거예요. 왼편이 못 알아 먹으니까,
염소들은 못 알아 먹으니까.
그런데 거기서도 ‘구제’ 라는 단어가 명사형으로 쓰였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소유격, 수 라는 단어가 쓰였고 해 라는 현재 가정법 동사가 쓰였어요.
그래서 그걸 직역하면, ‘지금 내가 소유하고 있는 그 구제를 하라’ 그래요. 여러분 안에 구제가 있대요.
구제는 동사가 아니라니깐요. 여러분 안에 구제가 있다는데 그거를 이웃에게 주라는데 그 구제가 뭐냐고요.
여러분은 어떻게 구제 됐습니까? 진리의 말씀으로 구제 됐죠? 복음으로 구제 됐죠?
그 모든 것. 그리고 그것을 알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적인 것, 아랫 것으로 준 모든 것이
여러분이 갖고 있는 구제예요, 여러분은 그걸 진리로 이해하고 있으니까.
그것으로 주라는 거예요. 진의를 담아. 그럼 그게 ‘구제 하라’ 예요. 네 안에 있는 그 구제를 주라, 이런단 말이예요, 성경이요.
그런데 그냥 그걸 도덕과 윤리적 차원에서 그냥 표피적으로 보게 되면
그냥 육신에 필요한 양식이나 편의를 제공해주는 일에 그냥 착념해 버리는 거죠. 그것만 하는 거예요.
그걸 뭐라 그래요? 그걸 외식이라 그래요.
다시 한번, 그거는 하지 말라는게 아닙니다. 하세요. 하는데, 신앙의 목적지가 그것이라고 착각하고 그것만 하면 안된다는 거예요.
그건 자기 하나님 되기의 일환이라니깐요. 진리를 모르고 행하는 그 선한 일은.
불교인들도 하고 이슬람 교회들도 하고 여호와증인도 하는 그거. 그건 기독교가 요구하는 행위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구제 할 때, 기도 할 때 은밀한 것으로 하라는 거예요, 은밀한 곳에 들어가서.
그런 구제를 신앙의 행위라고 착각하고 있는 자들에게 ‘불순종’ 이라는 판결을 내려서 유죄선고를 내려 죽여버리는게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예요. 당시 유대 남자들은 유대인의 삼대 절기에는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돼요.
그래서 그 예루살렘 (쪼끄만 도시예요, 그게요) 거기에 절기 때는 이백 만명의 남자들이 모였다 그래요. 어마어마 한거예요, 당시의 인구로는. 근데 그때는 교통편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디아스포라로 퍼져있던 유대인 남자들이, 보통 유월절에서 오순절까지가 오십일이죠? 한 달 조금 넘는 거예요. 고 기간 동안에 아예 거기서 머물러 버렸어요. 오십 일간의 노잣돈을 챙겨갖고 와서.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음으로 시작 된 유월절. 그것이 오순절에 끝났는데, 그러면 이제 집에 돌아가는 거예요.
오십일 동안의 노잣돈을 갖고 왔을 거 아니예요, 그 유대 디아스포라들이. 근데 성령이 확 와버렸네, 그때?
그리고는 진리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집에 갔겠어요, 안 갔겠어요? 안 갔어요.
그게 예루살렘 교회예요. 집에 안 가면 뭐해요? 문제는 이 사람들이 오십일치 노자 밖에 안 갖고 왔잖아요.
근데 거기 남아서 계속 그 말씀을 들어야 되니까 사도들이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데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니 내가 뉘게 가리오까. 안 간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거기서 머물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죠?
근데 진리를 들은 사람들이 내면의 어떤 것을 갖게 됐으니까 외부 세계의 그런 것들에 대해서 관심이 사라져야 맞는 거죠?
그걸 상징적으로 표현해 준게 땅과 집, 밭과 집을 팔아 교회를 섬겼다 라고 하는 거예요.
부동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팔아서 그들의 생활비를 댄 거예요.
근데 나중에 이제 스데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오자 그들이 삼삼오오 자기들의 집으로 이제 돌아간 거예요. 돌아가서 거기서 교회를 한건데 사도들은 거기를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한 거예요.
그래서 초대 교회 같은데 가보잖아요, 터기 같은데? 요만한 방 하나예요. 몇 명 안 들어가는. 초대 교회가 그랬다니깐요.
고린도 교회 이삼십명도 안 됐어요. 그러니까 고 사람들, 그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을 때 사람들이, 거기 예루살렘 사람들이, 부동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걸 팔아서 그들을 먹였단 말이예요.
그건 무슨 상징이냐면 성경에서 항상 집, 밭, 땅 이건 뭘 상징한다 그랬어요? 율법주의의 성전.
하나님의 진리를 받게 되자 그 율법주의의 성전, 내가 갖고 있는 그 율법주의를 다 팔아 교회를 섬기는 걸 모형하는 거였어요.
그리고 진짜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사도들로부터 전해지는 그들의 영적 양식, 하늘의 양식이 중요한 거였다니깐요.
그래서 나중에 우리가 공부하겠지만 주기도문에도 그 하늘의 빵, 하늘의 떡, 일용할 양식, 내일의 양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떡 세덩이 빌려줘’ 라는 비유가 붙어 있는 거고. 그 떡 얘기라니깐요.
근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인물이 그 대척점의 인물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리고 요쪽 라인의 대표는 요셉이라하는 바나바. 바나바는 여러분이 잘 아는 그 바나바예요. 근데 이름이 왜 ‘요셉’ 일까요?
이름을 일부러 썼어요, 거기다가. 그냥 딴데는 다 바나바 바나바인데. 자, 요셉이라는 인물은 예수의 아버지죠?
진리의 아들을 낳아야 하는 인물로, 그 요셉이라는 진리의 아들을 낳아야 하는 인물,
그가 진리를 받으면 바나바, 위로의 아들이라는 아들로 낳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가 땅과 집, 율법을 팔아 교회를 섬기를 자로 등장하는 거죠. 그런데 그건 신앙이 아니예요.
자기의 땅과 집을 팔아 교회를 먹여 살리고 구제한 건 신앙의 내용이 아니란 말이예요. 그건 하나의 상징이란 말이예요.
근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어떻게 했냐면 자기의 땅을 팔았는데 그 땅 판 돈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나와요. 그래서 감추는 거예요.
하나님을 의지하는게 아니라 그 땅을 의지하는, 여전히 의지하는 자인데 교회 안에서 어떤 이들이 어떤 행위를 하니까
그게 신앙의 본질인양 오해하여 ‘나도 그런 일을 해야 되겠다’ 라는 거예요. 그러니깐 나도 그런 사람으로, 위로의 아들이란 이름을 달라는 거죠. 그래서 행위를 해버렸어요. 근데 그게 뭐가 나쁜 일이예요, 겉으로만 보기에? 여기서 뭐 집 팔아서 땅 팔아서 반 헌금한 사람 있어요? 그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훨씬 나은거지. 근데 그게 왜 죽을 일이냐고요.
그게 신앙이라고 착각하면 그게 죽음이다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니가 성령을 속였다’ 그래요.
‘진리의 영, 그 말씀을 거짓말로 했다’ 이런 말이예요, 직역을 하면. 그건, ‘넌 진리를 거짓말로 들은 거야’ 이런 말이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하고도 죽은 거예요. 그래서 집 팔아서 헌금하고 지옥 간다니깐요.
아, 오늘 이사 가야되는데 클났네, 이거.
그런 거 아니란 말이에요. 그게 신앙 생활의 본질이 아니란 말이예요. 교회에 필요가 있으면 내야죠. 서로 도와야죠.
그러나 그것으로 내 의를 삼아버리면 그게 죽음이라는 거예요. 교회의 의는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뭐라 그러냐면 ‘그에게서 호흡이 나갔다’ 그래요. 네크프시코. 그 프시케 (ψυχή) 라는 단어가 거기서 나온 것이거든요. 호흡이, 그가 갖고 있던 그 호흡, 그의 생기는 가짜였다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호흡이 나갔다’ 그래요. ‘죽었다’ 라는 말 안하고.
그러니까 여러분의 안에 있는 그 말이 진짜 생기, 생령, 루와흐 (ר֫וּחַ : ruach)인지, 프뉴마 (πνεῦμα : pneuma)인지,
아니면 가짜 생기, 가짜 호흡인지 고민해 보셔야 된다니깐요. 안 그러면 집 팔아서 바치고 죽어요.
그에게 진짜 말씀, 진짜 생기, 진짜 호흡이 없었다는 그런 의미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 내용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겉에서 맴돌면 죽는 거예요.
반드시 골방으로 들어가야 돼요. 은밀함 안으로 들어가야 돼요. 양의 문 안으로 들어가셔야 돼요.
그래야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요. 그러면 문이 닫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골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라’ 그러죠?
골방으로 들어가면 뒤에서 문이 닫혀요. 그래서 성경에도 ‘열면 닫을자가 없고.’ 왜? 내 백성 들어와야 되니까.
그래서 옛 성전에 문은 아예 없어요. 입구는. 열어놓는 거예요. 들어오라는 것이죠. 들어오면 닫아버린다는 거.
마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자 홍해를 건너고 홍해를 막아버리는 거랑 똑같은 거예요. 못 돌아간다는 거예요, 다시는.
내가 광야에서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너는 애굽으로 절대 안 돌려보낸다라는 하나님의 의지거든요.
그래서 여러분이 이 광야에서 이렇게 죽고 있는 거예요, 지금. 안 돌려보내려고. 그 ‘열면 닫을자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는’ 거예요. 못 나간다니깐요. ‘아, 예수 믿는거 너무 힘들어서 나 물릴래.’ 안 물러져요. ‘차라리 내가 광야에서 죽일게 너’ 그러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래서 여러분이 골방에 들어가면 뒤에서 문이 닫혀요. 골방으로 들어가서 여러분은 그 하나님의 말을 잘 들어야 돼요.
근데 그 말이 나를 다나토스로 죽여가는 말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많이 힘든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거룩한 열심이예요.
그럼 그렇게 들어가서 뒤로 문이 닫히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다음 시간에.
기도 하겠습니다.
(K목사님 산상수훈33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