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의 채석장 / 전성훈
“쾅, 콰당” 채석장에서 들리는 다이너마이트 폭발 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듯했다. 거의 60년 전, 서울 종암동 경찰서 뒤편에는 커다란 돌산과 채석장이 있었다. 채석장과 돌산은 미아리고개와 연결되었고 채석장 옆으로는 정릉천이 흘렀다. 돌산과 채석장이 없어지자 단독주택과 아파트가 들어섰고 정릉천은 복개되어 도로로 바뀌었다. 그때는 미아리고개를 경계로 서울 시내와 변두리를 구분했다. 서울 북부 외곽인 수유리와 의정부로 나가는 길목이 미아리고개였다. 6.25 비극으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의 피를 토하는 애환을 말없이 지켜보았던 단장의 미아리고개, 고개를 넘으면 오른쪽은 채석장과 돌산이 있었던 종암동이고 왼쪽은 정릉이다. 북한산 계곡에서 흐르는 정릉천은 종암동 방향으로 흘러, 하월곡동 부근에서 중랑천을 만난다. 경기도 양주와 의정부를 거쳐 내려오는 중랑천과 합류하여 큰 강인 한강으로 흘러간다.
채석장은 모질고 힘든 세월을 살았던 사람들의 원망과 절망 그리고 한숨과 땀이 절절히 밴 삶의 현장이었다. 온종일 따가운 햇볕 속에서 검게 그을린 얼굴로 돌을 깨고 다듬어 생계를 꾸려가던 석수장이 아저씨,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들이 있었다. 그 옆에는 조금이라도 살림에 보태려고 잘게 부서진 자갈이나 돌멩이를 커다란 광주리나 대야에 넣고 머리에 이고지고 돌무더기로 옮기는 작업을 하면서 손이 부르트고 몸이 망가진 누나와 엄마들도 있었다.
어른들에게는 입에 풀칠하기 위한 고단하기 이를 데 없었던 채석장이었지만 내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그저 신나는 놀이터였다. 술래잡기와 구슬치기와 비석치기 그리고 땅따먹기 놀이를 질리도록 하였다. 돌을 캐고 나면 채석장에는 크고 작은 웅덩이가 생겼다. 여름철 비가 많이 내리면 흙탕물 웅덩이에서 헤엄을 치기도 했고 어떤 아이들은 다이빙을 한다고 멋진 폼을 잡고 거꾸로 물속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채석장 부근 정릉천에서 사내애들은 맨몸으로 여자아이들은 속옷을 입은 채 헤엄을 쳤고 큰 아이들은 물고기를 잡으며 놀았다.
채석장에서 다이너마이트를 매설하고 폭파작업을 할 때면 동네까지 들렸던 폭음 소리, 온 동네가 들썩들썩할 정도로 엄청난 굉음이 났던 그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자연의 파과와 창조를 위한 악마의 몸부림 같았던 그 소리를 잊을 수 없다.
한국전쟁의 피해로 배고팠던 그 시절, 부모들의 어렵고 힘들었을 고생스런 생활을 세세히 알 수는 없다. 그저 조각조각 어렴풋하게 기억할 뿐이다. 세월이 흘러 내가 노년이 되자, 온종일 채석장에서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희생한 그 분들의 노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때 채석장 한 구석에 내 가슴에 슬픔처럼 다가왔던 조그맣고 앙증스러운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가 피었던 게 생각난다. 두렵고 무섭게 느껴졌던 채석장이지만, 어린 시절 철없는 꿈을 찾아 놀던 추억속의 채석장이기도 하다. 채석장 주변에서 함께 뜀박질을 하거나 술래잡기를 하거나 정월대보름이면 깡통을 돌리며 쥐불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노인이 되어 지나간 과거를 곱씹으며 그리워할지, 아니면 벌써 다른 세상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때 그 시절이 불현듯 그립다. 어린 시절을 그리워할 만큼 늙어버린 내 자신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씁쓸하다. (2020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