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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재계하고 달빛아래 정화수(井華水) 한 그릇 떠놓고 천지신명 산천초목 신(神)께 천일(千日) 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손바닥이 닳도록 기도를 올렸소
천지신명께서 기구한 사정을 알고 늙은 어미의 기도를 들어주시길 간절히 빌었소
어느 과거객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를 상상하며...
*(과거길이나 유배길, 보부상 관련해서 글은 영남대로길, 삼남대로길 참고 하시고)
인구 65만 명이 사이좋게 살아가는 전라북도 전주는 조선 왕실의 근본이자 발원지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전라 감영의 소재지로써 전주성(城)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출입문이 있었으나 모두 소실되고 지금은 남쪽의 풍남문(豊南門) 하나만 남아 옛 시절의 모습을 그리며 서있다
이번 천리길 걸음은 이곳 전주성 풍남문에서 시작이다.
뜻하지 않게 백두대간을 한번 더 가려했건만 천문(天門)을 보니 5월에는 사흘이 멀다 하고 비가 올 듯하고, 그리고 회사에 발목이 잡혀 많은 날을 얻지 못해 결국 일주일간의 시간을 벌어 통영대로 길을 떠나본다.
통영대로는 아래지도 참고하시면 좋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남 통영에서 고성-사천-진주-원지-산청-함양-인월-운봉 백두대간 입망치-남원-임실-전주까지 233km는 통영 우로 길인데
이후로는 땅끝에서 올라오는 삼남(충남, 전남, 경남) 길을 통해서 한양으로 이어진다
통영에서 경북 상주까지 올라가는 길은 고성-마산 진동-함안-창원 남지-영산-창녕-현풍-고령-성주-김천-상주까지 250km 이후길은
부산에서 올라오는 영남대로길과 함께 한양으로 이어지고
8일간 시간이 허락하니 하루 60km 이상 걸으면 될 것 같아 전주에서 통영으로 내려와 다시 통영에서 상주까지 480km 걸음을 해보기로 하고 배낭을 꾸려 전주로 향한다.
18세기 무렵의 조선 10대간 선도로
1로 의주대로 의주에서-평양-개경- 한양
2로 경흥대로 경흥-서수라-경흥-회령-경성-북청-원산-회양- 한양
3로 평해대로는 동해안으로 오는 평애-울진-강릉-진부-원주- 한양
4로 영남대로(좌로) 부산-밀양-대구-상주-문경 -새재-충주-음성-용인-한양
5로 영남(통영)대로( 우로) 통영-고성-함안-현풍-성주-김천-상주-영남대로와 동일
6로 통영대로 통영-고성-함양-운봉-전주-삼례-공주-차령-천안-수원-과천-동작나루-한양
7로.삼남대로의 삼남대로 제주-해남-나주-장성-노령-정읍-전주ㅡ삼례ㅡ익산-논산--이후는 통영대로와 동일
8로 충남 보령 오천항- 예산(신례원)-천안-한양
9로 강화대로는 강화도에서 김포를 지나 한양이 조선시대 9대 간선도로인데 조선초 이성계가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면서
전국 주요 도로망이 한양을 중심으로 X자로 이루어진다.
영남대로. 삼남대로. 통영대로. 의주대로. 경흥대로는 거의 천리길이며 나머지는 거리가 조금 짧다
그 외 29개의 주요 지선도로가 있었다.
통영대로 우로길의 주요 고개로는 호남정맥의 슬치재가 있고 남원으로 가는 길에 성수지맥길의 말치재,천황 지맥길의 밤티재-백두대간 입망치를 넘어야 하고, 경남 고성 직전에 지루하게 이어지는 와룡지맥의 감티재를 넘어야 한다.
하천으로는 섬진강, 오수천, 요천, 남강, 양천을 건너야 하고
지도 참고
택시 기사님께서 인증 사진 담아 주셨고
길이란 오래전에는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었다면
근현대사에 들어와 면(面)과 면(面)을 이어주었다가 자동차가 많아지면서 굽은 길은 다림질하듯 일직선으로 내었기에
군(郡)과 군(郡)을 연결하였고 지금은 도(道)와 도(道)를 연결하는 가장 빠른 길을 만들어 놓아 예전의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던 길을 찾기란 쉽지 않다.
지나간 경로
전주-임실-남원-운봉-인월-함양-생초-산청-원지-진주-사천-고성-통영
통영-고성-마산진동-함안-낙동강-남지-영산-창녕-현풍-낙동강-고령-성주-김천-상주
하루 평균 65km 진행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로마네이크 양식의 전동성당 앞을 지나며
태조 이성계 어진이 모셔져 있는 경기전
경기전 모습
경기전안으로 대부분 베트남에서 온 관광객들인데
한복인듯 하면서 아닌듯한 한복
어디서 만든 옷인지 모르겠으나 전통한복과는 거리가 멀고 어떠한 규제는 있어야할것 같다
한복은 뭐니 뭐니 해도 우리나라 사람이 입어야 가장 잘 어울리고 아름답다
전주 사고지
세계기록 문화유산인 조선 왕조 실록을 보관했던 곳
태조 이성계로부터 철종 때까지 총 25대 472년간 조선의 역사를 연월일의 순서에 따라 기록한 것으로 분량은 888 책 1893권이다
책에는 정치, 역사, 경제 사회 문화, 천문 풍속 조선의 모든 모습을 기록했다
실록의 안전한 보존을 위하여 지방의 충주, 상주, 전주에 사고를 지어 보관했으며
1592년 임란으로 전주사고본을 제외한 실록 전체가 화를 당하자 정족산, 태백산, 묘향산(후에 무주 적상산으로 이동)
오대산 산간지역에 지방 사고를 짓고 실록을 보관해 왔다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는 지역 유생들이 내장산 용굴에 보관하여 화를 면했다
경기전 앞의 하마비(下馬碑)
이곳의 하마비는 다른 사찰 입구나 향교, 서원 앞에 서있는 비(碑)와는 다르게 쌍사자 등에 비석이 올려져 있으며
"니가 뭐 하는 사람인지 몰라도 여기서는 점잖게 내려라"며 두 눈을 부릅뜨고 서있다.
전주 향교와 350년 이상된 학자나무(學子木)인 은행이 좌, 우에 서있고
때마침 결혼식을 올리는 남, 여 한쌍이 가족 친지로부터 축하를 받는 모습이다.
향교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각 지방에 설치된 국립 교육기관으로 성현에 대한 제사와 유학 교육을 담당하는 곳
이곳 전주 향교는 고려 공민왕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며 본래는 경기전 북쪽에 있었으나 조선 태종 10년에 태조 어진을 모시는
경기전이 들어서면서 향교에서 들리는 글 읽는 소리와 공부 못하는 녀석들 때리는 회초리 소리가 시끄럽다 하여 서쪽으로 옮겼다가 정유재란때 소실되고 이후에 지금의 자리에 들어섰다.
명륜당과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향교에서는 필수적으로 심는데 바로 선비정신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병충해에 강하고 벌레를 타지 않아 일명 선비나무로 불리는데 선비란 자고로 어떠한 유혹에도 결탁하지 않고,
탐관오리가 되지 말고, 성실한 사람이 되라는 선비정신과 같은 상징성을 부여받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조선이란 나라는 양반만 잘 사는 나라였으니 은행이 말을 한다.
"좋은 건 다 갔다 붙여줘서 고마우나 나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어 자빠지겠구나!"라고
조선 양반의 상징인 전주 향교의 명륜당
기원전 6세기말에서 7세기경에 지구에는 인류의 미래를 인도할 거대한 문명이 태동하니
철학 100 문장의 노자의 도덕경에서 시작해서
동양에는 공자의 유교
인도에는 붓다의 불교
그리스에는 소크라테스의 그리스 사상
중동에는 예수의 유대교가 깨어난다
이분들 중에서 세계 4대성인으로는 노자, 붓다, 소크라테스 예수가 있으나 섭섭하게도 공자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함에도 조선시대 때는 공자만 죽어라 모셨으니(개인적인 생각이니 딴지는 걸지 마시고...)
전주 향교는 다른 향교와 다르게 몇 백 년 된 오래된 은행나무 3그루와 규모가 큰 것이 특징인데 입장이 자유롭다.
한벽당
한벽당에서 본 전주천
만경강의 지류인 전주천은 전북 임실군 관촌면 슬치리 산 140번지에서 발원해 완주군-전주시 덕진구 전미동에서
만경강에 합류하는 34km의 하천인데 전주천의 최장 발원지로는 모악산 남봉 장근재 인근에서 발원하는 계월천(삼천)이 슬치재 인근에서 내려오는 원 발원지 보다 5km가량 더 길다.
한벽당(寒碧堂)
송암산 기슭 전주천 강가에 자리 잡은 누각은 조선 건국에 공이 큰 최상이 태종 4년에 별장으로 지은 건물이다.
누각 아래로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흘러 바위에 부딪혀 옥처럼 흩어지는 물이 시리도록 차다는 뜻에서
한벽당이란 이름을 붙였다
한벽당에서 길 따라 올라가다 보면 좁은목 약수터가 나온다.
남원에서 임실군을 거쳐 전주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좌측에는 고덕산, 우측에는 송암산이 버티고 있으며 그 가운데 전주천이 흐르는 전략적 요충지인 곳이다.
그리고 통일신라시대 때 후백제군이 적군을 방어하던 진지였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 이정란이 곰치를 넘어 이곳으로 오던 왜군을 협공작전으로 물리쳐 전주성을 지켜낸곳이기도 하고 전주에서 임실이나 남원으로 가는 길 중 가장 빠른 길이다.
전주천 상류는 나름 맑은 곳이다.
길은 전주에서 남원으로 이어지는 17번 춘향로와 우회도로가 생기기 전 2차선 도로길을 번갈아가며 진행
전북 완주군 상관면에 들러
때늦은 점심이나 저녁 겸 그리고 내일 아침까지 곁들여서 한술 뜨고
필요한 것 몇 가지 사서 배낭에 더 넣으니 배낭은 묵직한게 골병은 들겠지만 짊어지고 갈만하다.
남원까지 44km라...
내일 점심 무렵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지만
조선시대 때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나름의 오르막이라는 슬치재와 밤재를 넘어야 하니 과거에 낙방한 선비들의 발걸음은 또 얼마나 무거웠을지...
길이란?
한 사람이 지나고
또 한 사람이 지나면서 길이 생기는데
그 길 위에 그다음길에 생기고 마을이 생긴다
해는 어둑어둑 넘어가고 차들은 쌩쌩 달리고... 남관진 창건비에 도착한다.
원래 위치는 이곳이 아닌 완주군 상관면 용암리 철로 주변에 있었으나 전주 남원 간 도로가 확장되면서 지금의 자리에 옮겨진
비석인데 고종 10년에 세워진 비석으로 창건 년대와 위치 규모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호남지방의 군사요충지에 세운 관방으로
만마관을 운영 관리하는 역할을 하다가 순종 때(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해산에 따라 자연스럽게 해체된 것이다.
남관진에 기록된 만마관을 알리는 표지판이 길가에 보이고
순조 11년에 전주부 만마동에 축조된 관방이다.(군사적 목적의 시설물)
만마관은 도로와 철로를 내면서 흔적은 사라졌고 이곳이 만마관이라는 안내판만 외롭게 서있다.
옆으로는 전주천이 흐르고 좌, 우측으로는 마을의 불빛마저도 보이지 않은 길 따라 오르면
호남정맥길에 만나는 슬치재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이 점차 고도를 올린다.
상관면 용암리 산정마을 앞의 200년 된 느티나무가 서 있는데
옛날 전라감사가 잠깐 쉬었다 간 나무라 하며 나무에 잎이 일시에 피면 비가 많이 내리고
그렇지 않으면 비가 적어 가뭄이 든다는...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다
임실군 관촌면 호남정맥 마루금상에 만나는 슬치재다
오늘은 이곳 슬치마을 유리 보호막이 있는 4각 정자에서 하룻밤 유숙하고 내일 새벽 일찍 길을 떠나야
저녁 무렵에 백두대간 입망치를 넘어 인월에(80km지점) 도착할 것 같다.
슬치마을 비석이 보이고
마을 안으로 좀 더 들어가면
슬치마을 정자가 나오는데 어느 마을이나 대부분 노인분들만 사시느라 마을은 조용하기만 하다.
조용히 들어가 잠깐동안 잠만 자고 새벽 일찍 나와 어둠 속으로 다시 스며든다
천리길을 떠나면 보통 20kg의 배낭을 짊어지고 나오는데
이럴 때는 하루에 60-70km를 걸어야 해서 새벽 2시에 일어나 저녁 7시까지 걷는다.
밥 먹고 쉬는 시간은 평균 1시간 30분 정도이며 그 외 엉덩이를 땅에 붙이는 일은 없다
잠이 오거나 , 짐이 무겁거나, 몸이 피곤하거나, 그 외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지만
발바닥의 미더덕(물집)은 크거나 작거나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따른다.
이번 걸음에 아스팔트가 녹아내리거나, 비가 얼마든지 와도 상관없으나 물집만은 제발 생기지 않도록 천지신명께 빌어본다.
새벽 2시 정각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또 오늘이니
조각난 달이 먼저 말을 건넨다.
고난의 땅에 온 걸 환영한다! 며
차량 이동은 뜸하고 길가 산속에서는 소쩍새 울음소리가 처량하고
앞으로 8일간 새벽녘에 소쩍새 소리를 매일 들어야 하니 그 구슬픈 소리를 어찌 듣는단 말인가
터벅터벅 걷는 발걸음이 가냘플 정도고, 집 나온지 아직 만 하루가 되지 않았건만 벌써 정신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뿐이니...
임실군 관촌면으로 들어오니 임실의 특산품인듯한 빨간 고추가 보인다.
새벽 고추는 하늘을 보며 서야 하건만
어째 매가리가 없이 쪼그라져 있고 그렇거나 말거나 만사 오케이 라며 동그랗게 말려있다.
혹시나 편의점이 있을까 싶어 도로 가운데로 팔자걸음으로 걸어 가보지만
기대는 기대일 뿐 영 아니올시다
너무 조용하니 나 역시 발걸음소리 나지 않게 조용히 지난다
아름다운 섬진강
섬진강은 진안군 백운면 원신암 마을을 지나 마령, 관촌, 운암댐(섬진강댐), 임실덕치. 남원 대강. 곡성, 구례, 하동, 광양만까지
흐르는 도중에 크고 작은 지류 265개와 합류하면서 전북, 전남, 경남 12개郡(군)을 거쳐 223km 총 530리 섬진강
물길을 이루며 남해 바다로 흘러든다.
산이나 하천은 서로 비비고 버무려야 사람이 모여들고 살기가 좋아지는데
요즘은 대형 마트나 큰 병원이 가까이 있어야 살기 좋은 곳이니
산이나 하천을 벗어난 도심에 살아야 잘 사는 것 같고
아름다운 산과 맑은 하천은 잠시 여가를 즐기기에 존재하는 듯하다.
사선대 (四仙大) 관문을 지나며
진안의 마이산에 살던 신선(神仙) 두 분과 임실땅 운수산에 살던 신선 두 분께서 강가에서 목욕을 즐기시거나 풍류를 즐길 때
하늘나라 선녀 네 명이 내려와 신선들을 꼬드겨 데리고 갔다는 아름다운 전설이 있는 곳이다.
간략하게 요약하지만 신선과 선녀의 미팅인 셈인데
궁금하신 분들께서는 한번 가보시기 바랍니다.
관촌역 뒷길을 지나며 담장 너머로 한 장 담고
불 꺼진 임실역 앞을 지나고
임실 치즈마을 앞도 지나고
임실군청 안으로 들어와 읍내로 가서 이른 새벽에 문을 연 주막이 있을까 하여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지만 있을리 만무하고
양반은 굶어 죽어도 이른 아침에 컵라면 따위는 먹지 않는다! 며 물만 사서 나온다.
다음길은 오수개로 유명한 고을 오수면으로 넘어가는 옛길인 지맥길의 말치재로 향하며
소쩍새 울던 밤은 그렇게 지나가고
싱그런 아침이 찾아온다.
우측으로는 군부대가 길게 자리하고
저짜!~ 지맥길에 만나는 말치재가 보이고
언놈 한놈 있으면 나 잡아봐라며 미친 듯 풀밭으로 돌아 댕기겠는데
잡을 놈도 없고 그렇다고 도망갈 일도 없고
말치재와 군부대 철조망이 봉화산으로 길게 이어지고
말치재 정상의 선정비군인데 비석은 있는지 없는지 내 눈에만 안 보이는 건지 주위를 돌아다녀봐도 없다
현감 원세철 영세 불망비
현감 민영대 영세불망비
현감 이문저 영세불망비
전 참봉 진재석
박기순 시해 불망비가 기록되어 있다.
말치재에서 막무가내 다음 마을인 한판 크게 할 수 있다는 대판마을로 이어지는 말치재골로 가야 했지만
이슬 가득한 풀 밭으로 진행하기에는 명문가 집안의 양반이 할 짓이 아니라 생각되어 임도길을 따른다.
해야 떠라!~
조선시대 길이란 과거객들이나 유배인, 보부상들에게는 죽을 때까지 몸으로 표현해야 했던 곳이기에
몸으로 표현하는 길에 한계란 없다며 걸었던 길이다.
고개 넘어 임실군 오수땅은 임실 , 순창 남원, 곡성땅을 잇는 군사적 전략적 요충지로 땅이 기름지고
사람이 살기 좋았지만 지금은 애기 울움소리가 그친 지 오래된 곳이다.
소멸 지역이란 뜻인데 어느 지역에는 농협 하나로 마트에 아기들 기저귀가 없다고 한다.
임도길 좋고 경치 좋고
한판 크게라는 대판 마을로 내려와야 했지만 길이 없어 봉산마을까지 임도길 따라와서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길 띠지가 보이고
오수 지명의 유래가 써진 오수의 개 와 주인장이 서 있으나
할배께서 술 한잔 적게 드셨으면 개도 죽을 일 없었을 것인데
요즘개도 과연 그럴까?
개가 죽을라치면 사람이 개를 구하는 세상 아닌가
집사가 주는 사료 먹는 개는 절대 그럴 일 없을 거야! 라며 다음 마을로 이어간다.
오수천 지류인 둔남천을 건너며
물 때깔이 마음에 안 들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 같고
오수면 버스 터미널 앞을 지나
마트에 들러 빵 몇 개 사서 나온다.
오수 공원
의견비석
때는 신라시대, 술 한잔 거하게 드신 아재께서 풀밭에 누워 잠들었는데 때마침 불이나 주인을 구하고자 개는 냇가로 뛰어들어
온몸에 물을 묻혀서 아재 주변의 불을 끄길 수백 번 반복하다 지치고 불에 그을려 죽었다는 의견 이야기다.
술이 깬 아재가 자기 목숨을 구해준 개를 위해 지팡이를 무덤 주위에 꽂아 두었는데 싹이 트고 줄기가 나고 큰 나무로 자랏
다는데 워낙 오래되어 지금은 개 무덤도 지팡이 나무도 없다.
글은 읽어 보시고
위의 내용과 비슷한 이야기로는 경북 구미시 선산읍 해평면에 의구총(義狗塚)이 있다
주인을 구한 의로운 개 무덤
선산해평 산양에 사는 김성원 혹은 노성원으로 전하는 이의 집에 황구를 한 마리 길렀는데 하루는 주인인 이웃 마을에서 술을 거하게 마시고 월파정 북쪽 길가에 잠이 들고 말았다
이때 불이 나서 주인이 위험하게 되자 개가 낙동강에 뛰어가 몸에 물을 적셔 주인을 구하고, 죽고 말았는데 개 때문에 살아난
주인이 감동하여 관을 갖추고 매장하고 무덤을 만들었다
개는 그저 사람과 같은 밥을 먹어야 공감대가 형성되고 이렇듯 주인을 위해 목숨도 버리는가 보다.
오수 동산의 선정비
관찰사 선정비 2기
남원 부사 선정비 3기
오수 찰방 선정비 5기
깨진 파비 (破碑) 2기가 인근에 흩어져 있던 것을 모아 놓았다.
대부분 1600년도부터 1800년도 무렵의 선정비들인데
임실군 오수면은 고려시대 때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오수 역참이 운영되었으며
전라도 오수부의 수부(首府)로써 문관 6품 외관직 찰방이 부임하여 11개 역 남원, 인월, 순천, 여수, 구례, 광양, 익산을 관할한 곳이다.
오수천은 묘복산 북봉에서 발원해 장수군 산서리-임실군 지사면-오수면-삼계리-순창군 동계면-적성면을 지나
섬진강에 합류하는 40km의 강이다.
아침에 강태공께서 한수 하신다고 미끼를 달고 계시는데
물속이 흐리니 물고기는 어딨는지 보이지 않고 태공과 물고기와의 신경전이 하루종일 이어질 것 같다.
이순신 백의종군길인데 남원시 운봉까지 이어지는 길이라
장군의 길 따라 33km 이동한다.
임실땅은 끝나고
춘향과 이도령 보다 더 마음에 드는 찐사랑 커플 향단이와 방자의 고향인 남원골에 들어서니
신임 사또한테 수청들지 않은 어여쁜 춘향이를 살리고자 편지 한 통 품에 넣고 바쁜 걸음으로 한양으로 올라가던 방자의 숨 가쁜
모습이 그려진다.
"이놈의 이도령"...
장군의 길
인구 소멸지역인 남원시 덕과면에 들어서서
덕과면 사매 초증학교 앞으로
한낮으로 향하는 시간이 되니 뜨거운 하루가 될 것 같고
이곳 덕과면에는 인구 소멸지역이라 그런지 식당이 안 보인다.
길을 가다가 어느 대도시에서 살다가 귀촌하신 뽀얀 아주머니께서 "길가는 나그네를 잡고 이야기 좀 하자"해서 잠시 이야기합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저짜와 아서 이짝핀으로 가구요
식사는 어떻게 해결하느냐! 있으면 먹고 없으면 말구요
잠은 어디서 자느냐! 잠은 노숙을 하지만 휴대폰 충전 문제로 이틀에 한 번은 여관에서 자는데 새벽 2시에 나와야 해서 잠은 거의 못 잔다고 말씀드린다.
해지기전에 백두대간을 넘어야 해서 양해를 구하고 갈길간다.
이도령 오르막길이라는데
과거에 급제한 이도령이 밤재만 넘으면 남원땅이라 오매불망 기다릴 춘향이를 그리며 숨을 헐떡이며 올랐을 길
그나마 과거에 급제했으니 남원땅에라도 내려가지
밤재 오르는 길에 한복곱게 입은 춘향이 그네를 힘차게 타고 있는 모습이다
"아이고 잘한다" 라며 혼잣말로 칭찬해 주고
뻐근한 다리로 올라온 지맥길인 밤재에서
이도령이 온다니 맨살 드러내고 줄지어 서있는 백일홍이 반갑고
옛길인 만큼 차량이 없고 길가에 오래된 백일홍 나무가 길 양쪽으로 수백 그루 자라고 있어
백일홍이 곱게 핀다면 많은 사람들이 찾을 것 같다.
백일홍 나무가 줄지어 서있는 길 따라오다가 잠시 산으로 들어와 진행
역시나 산은 편안하다.
충렬사
정유재란 때 남원성에서 순절한 충혼들과 임진 정유 양란 때 창의 (倡義)하여 왜적들과 맞서 나라를 지키는데 목숨을 바친 충혼들의 숭고한 호국 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조선 선비들의 살아있는 배경이된 향교
남원 향교 진강루 누각 모서리가 창공을 향해 날아갈듯 서있고
쪽문이 열려있어 들어가 본다.
명륜당
인간 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라는 뜻의 명륜
후학들을 가르치는 곳이다.
어딜 가나 말 안 듣는 녀석들이 있기 마련이니
그런 녀석들은 회초리로 패야...
향교 모습
남원 향교는 1400년도 초에 창건되었으나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 때 완전히 불타 없어져
이후에 다시 만든 건물이다.
대성전
공자를 모신 사당이죠
조선왕조는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나라에서 각 지방에 향교를 세우고 그 안에 대성전을 두어 유학을 장려하였다.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쩌렁쩌렁 들릴듯한데 공자의 가르침대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걸 많이 배워 실천하는 그런 덕목인 듯하다.
일부 선비들은 마른오징어도 짜면 물이 나오는 방법을 연구하는...
2층 누각인 진강루에 올라와 본 천정 모습
화려한 단청이 특징인듯한데 이곳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낮잠이나 자고 갔으면 좋겠는데
불교 사찰인듯한 모습이다
천정에 용 몇 마리가 상량에 옹기종기 고개를 내밀고 있다
전주에 왔으면 꼭 찾아야 할 곳
만인의총을 찾아가며
만인의총
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왜적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민, 관, 군 1만여명의 의로운 충혼을 합장해서 모신 무덤이다
답답하고 애절한 심정으로 두번 절하고 일어나 무거운 발길을 다시 남원성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남원 읍성은 통일신라시대때 부터 지방 행정 중심이던 소경(小京:지방의 작은 서울 개념)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에 따른 성곽이 있었는데 중국식 읍성을 본 따 만든 네모난 성이 특징인데 지금 남아있는 성터는 불과 얼마 되지 않는다..
임진왜란 때 전라도를 지켜 냈지만 진주성 2차 싸움에서 이겼지만 많은 병력 손실로 왜적은 한동안 부산성에 머물다가
원균이 칠전량에서 대패한 후 남해바다를 지나 섬진강으로 들어와 남원으로 향하는 밤재를 넘어 남원에 도착
1507년 7월 말 6만명의 병력으로 전략적 요충지였던 남원성을 공격한다.
조선군은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의 1천명의 관군
명나라 원군 3천명
남원에 살던 민간인 6천명등 모두 1만 명이 8월 13일부터 17일까지 4일간 맞서 싸웠으나 수적 열새를 극복하지 못하고
남원성 함락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성곽의 모습은 조선말까지 유지되었으나 남문 위에 완월루라는 장대한 누각이 있었으나 갑오농민 혁명때 동문과 함께 불에 타
소실되었고, 일제 강점기 때 서문과 북문을 헐고 철도를 개설하고 남원역을 만들었다
남아있는 성터 흔적은 불과 100미터 남짓이다.
만인의총과 읍성을 보고 이제 춘향이를 만나러 광한루로...
광한루 북문으로 입장권을 사서 들어오면 두 줄로 서있는 비석들을 만날 수 있는데
과거에 남원과 인연을 맺은 부사, 관찰사, 어사(御史)들의 사적비 및 선정비(善政碑)가 줄지어 서있다.
오래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비석을 모두 한 곳에 모아두어 관리하는 듯하다.
조선시대 5대 명제상중 한분이셨던 황희 정승께서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건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라 그늘진 곳에는 관광객분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땡볕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 혼자뿐인 듯
이쯤에서 이몽룡이 나와야 하겠지만 춘향이와 어딜 가고 없고
춘향전 이야기는 다들 아시니 넘어가고
남원땅을 적시는 맑은 하천인 요천 80km
원 발원지는 금, 호남정맥 팔공산 분기봉에서 갈라지는 장수땅 천황지맥 상서산(809m) 남, 동쪽 계곡이고
최장 발원지는 금, 호남 정맥길 장안산 서쪽 계곡에서 발원해 덕산저수지- 방화동 계곡-용림천이다
해지기 전에 인월땅까지 들어가야 하는데 남원에서 간단하게 한 끼 때우고 백두대간 입망치로 진행한다.
이백면에서 운봉읍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 입망치냐! 여원재냐!인데
여원재는 길이 잘 포장되어 있으나 입망치(갓바라재)는 산 길이다.
오래전에 남원에서 운봉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여원재보다 입망치가 약 2km가량 짧아 그 길을 이용했을 것 같아 입망치로 향한다
여원재 옛길은 가보지 않아 모르겠으나 입망치 길은 지난해 가을에 미리 답사를 한 곳이다.
입망치로 올라가는 길에 입촌마을을 지나며
오래전에 남원에서 운봉으로 갈 때 어떠한 길을 이용했는지 궁금한 것들을 여쭈어 보고
백두대간 갓바래산에 이어지는 줄기가 보이고
마을 안을 지나 끝까지 들어와 본 남원의 교룡산(교룡이란 새끼 용을 일컫는 말)이 보이고
비포장 산길로 들어와 첫번째 정자를 지나
나무 의자가 놓여있는 두번째 쉼터에서 잠시 휴식을 하다가 정신줄이 나갔는지 입망치 방향으로 오르지 않고
곧장 산으로 오른다.
생고생을 해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무슨 생각으로 ...
길 없는 산길이 처음이 아니건만 그렇게 돌아다녀도 늘 처음 같은 느낌이 드니... 언제쯤 산을 알까
여기가 아닌데 하면서 끝까지 고집부려 길도 없는 산속을 막무가내로 기어올라 백두대간 갓바래로 올라와... 아주 시겁을 했네
땀은 줄줄 흐르고
그러나 백두에 다시 서게 되는 행운을 누리며 가벼운 마음으로 입망치로 향한다.
입망치에 서서
조금 전에 쉬던 입망치 갈림길에서 오르면 이런 수렛길이 계속 이어진다.
대간길이여 잘 있어라!~며 한마디 건네고
운봉으로 향하는 길에
무논에는 어린 벼들이 심어져 있고
개구리 소리가 서서히 들리기 시작한다.
운봉리 행정리 마을에 들어와
잡목 빼곡한 갓바래 산으로 오르며 아주 고생 고생 생고생했던 터라
어느 할매댁에 들어가 양해를 구한 뒤 씻고 옷도 갈아입고
이제 점잖은 양반님네들처럼 운봉으로 향한다
운봉읍에 들어와 곰도 100일간 국수를 먹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잔치 국수 한 그릇 먹고
인원로 향한다
그러고 보니 오늘 두 끼 찾아먹었네!~
길을 걸으며 어떻게든 찾아 먹고
어떻게든 걸었을 길
과거 보러 한양으로 올라가는 나그네들은
성리학의 주요 경전인 사서삼경을 줄줄 외우는데
이것 말고 중국에서는 춘추좌전과 예기를 더 넣어 사서오경이 되는데 글자 수가 무려 47만 자다
공자의 사상은 한마디로 인(仁)이라 말하는데 논어책에는 인(仁)이란 글자가 107번이나 나온다.
맹자는 의를(義)를 중요시하였고
대학은 지도자가 지켜야 할 덕목을
중용은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지켜야 할 자세와 태도
시경은 주나라 전국시대까지 민간 왕실 신화를 시(詩)로 모아 만든 책
서경 은나라-상나라 왕실 공문서 모음집
역경(주역) 우주만물의 이치를 풀 수 있는 책)
예기 왕조의 제도와 상복 그리고 예의에 대한 책
춘추좌전 노나라 역사서
이러한 책들을 읽고 외우고 써서 한나라의 이름난 관리가 되겠지만
대부분 백성을 쥐어짜는 기술에 이용할 뿐이다.
무논에는 건강함이 느껴지는 입 큰 개구리와 개구리 왕눈이 양가의 짝짓기 소리가 요란한데
이 시기에 저녁부터 새벽까지 몸서리 처지게 들린다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에 개구리울음소리가 포함되어 있으니 가까운 논가에 가서 들어 직접 보시기 바라고
처음에는 듣기 좋았으나 천군만마가 지나갈듯한 우렁찬 소리는 융단 폭격이라도 할 듯 시끄럽기만 하다
1부 마치고
첫댓글 필시 고생하셨을 걸음이셨을텐데..
걸음하시고 남겨주신 글은.. 웃기기도 했다가.. 씁쓸하기도 했다가..
기저귀를 판매하지 않는 마트라니..
인류의 소멸이라니.. 씁쓸하기도 하고..
개구리는 종마다 다르나..
한번에 수백개에서 수천개의 알을 낳는다는데..
입이 큰 개구리와 개구리 왕눈이 양가의 잔칫날 다녀오신 방장님..
아무래도 기저귀는 거기서 팔아야 대박일듯 합니다..ㅋ
음.. 그리고.. 사료먹는 저희집 강아지는..
주인도 나 몰라라 할테니..ㅜ
막걸리는 멀리해야겠습니다 ㅜ
입큰개구리파와 왕눈이파의 결혼식은 3부에 나올것 같으니 기대해 주시구요
토욜 비온다네요 매마른 대지에 촉촉한 비가 많이 오면...
정맥길 잘 다녀오세요
방장님 걸음을 보면 조선시대 10대로 중
갈수없는 2개소를 제외한 나머지 8대로를
모두 걸으실 요량인가 봅니다.
걸으시는 지역의 자랑거리 및 특징을 콕 집어주시니
또 다른 새로움을 접하는 느낌입니다.
늘 평안할 발걸음 하세요.
이제 몇개 남지 않아 묶어서 진행하면 두번이면 끝날것 같습니다.
공부 많이되어 좋은데 힘은 드네요
글 감사드리구요,정맥길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요
항상 방장님 글을 보면 어떻게 글을 쓰시는지 궁금합니다. 길 걸으며 메모장에 그 순간 감정을 적으시는지요! 암튼 글에 감정이 느껴져 저도 따라하고 싶습니다. 다음 2부 기대됩니다.ㅎㅎ
길을 걸으며 늘 생각을 적어놓습니다.
그렇게 하지않으면 잊어버리거든요
글 감사드리구요 많은관심 부탁드립니다
@배병만 넵! 감사합니다.ㅎㅎ
옛날 사람들 산 넘고 배타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다니는 길이 꽤 있었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남쪽 길은 언젠가는 꼭 걸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던 작은 재,그리고 오솔길을 지나 목적지까지 걸었을 조상님들
지금은 길은 좋은데 인구가 적어 소멸 지역도 많습니다.
글 감사합니다
역사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그시대의
기초적인 발걸음을 재현해보고 느끼고 이시대의 새로움을 추구하는 개척자 입니다
긴시간 수고많이 하셨습니다
대로길을 걸으며 몇달간 공부를 하고 가니
그나마 이해하는데 좋았습니다
구미에 갈일이 있으니 그때 연락 드리겠습니다
향교에서 글을 읽으며 다들 한마리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하려
예전, 그 옛날 옛날부터 얼마나 애들을 썼을까~
고막을 울려대는 개구리 소리도
지나고 나면 또한 그리워질테고요.
걸을 때는 힘들어도 지나고 나면
또 그런 걸음이 그리워지니...
소멸되지 않게 오늘도 내일도 또리또리~~
힘내서 건강하자구요.
방장님 걷느라 후기글 작성하시느라 욕 많이 보셨습니다.
개보다 못한 삶은 살지 말아야겠다
다짐해봅니당^^ 멍멍~
덕운봉 지나 수정봉 오름이 정말 힘들었던 기억잉 있네요.
입망치 내려서서 갓바래봉 오름은 다소 수월했던 것 같네요.
방장님은 대간길 아닌 곳에서 올라 힘든곳으로 오른듯하네요.
긴긴 대로 걷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물속에 드러난 해넘이가 아름답고요
보기는 좋은데 마음은 무겁습니다
다음 여정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