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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세계
침묵은 무(無)가 아니다. 침묵은 생각은 하되 말을 참는 것이다. 말없는 침묵이 말함보다 더 많은 말을 하는지도 모른다. 소리 내지 않고 말하는 것이다. 말하지 않는다고 침묵하는 것은 아니다. 침묵은 보이는 세계에서 눈을 돌려 보이지 않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는 것이다. 말이 빛이면 침묵은 어둠.
빛은 어둠속에서 멀리 간다. 빛은 어둠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말이 많으면 소음이 된다. 침묵은 소음을 잡아먹는 하마다. 말은 침묵의 발자국이다. 침묵 속으로 사라진다. 침묵은 벽돌 한 장도 쌓지 못한다. 어쩌면 단단한 벽돌집을 허무는 것이다. 침묵은 묶여있는 것, 짜여있는 것을 풀어 헤치고.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여, 맹신한 것을 해체하는 것이다. 음식물을 씹을 때, 침이 섞이는 것처럼, 말과 말 사이 침묵이 필요하다. 깊어진다. 침묵은 말의 배경이다. 말이 바람이라면, 침묵은 돌이다. 말이 위태로움이라면, 침묵은 단단히 땅을 밟고 있는 것이다. 말을 하고 있지 않더라도 마음이 흔들리면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말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침묵 속에서 나온 말은 젖은 말이다. 물기 있는 말이다. 세수한 것같이 깨끗하다. 많은 말, 쉴 새가 없는 말은 먼지 묻은 얼굴이다. 시인은 침묵 속에서 언어를 낚는 사람이다. 시를 이해하려면 고기를 물에 놓아주듯이 언어를 침묵 속으로 내보내야 한다.
아는 사람과의 대화, 지금껏 자신이 보여 왔던 자세를 유지하려한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을 인식하는 사람이 보는 그 사람이다. 침묵을 잃은 말은 허공에 뜬 몸 같다. 안정감도, 믿음도 없다. 침묵과 동행해야 비틀거리지 않고. 걸을 수 있다. 낱말과 낱말 사이 침묵이 놓여있다. 한 문장, 한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의 침묵.
하루와 하루 사이의 침묵, 너와 나 사이 침묵은 우리를 더욱 단단하게 결속시킨다. 침묵이 우리 사이에 존재하면 두려울 것이 없다. 아무리 많은 사람 앞에서도 떨리지 않는다. 자연은, 사물은 침묵한다. 그들은 우리보다 의젓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어떤 것도 얻지 못했다. 쉽게 묻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있지.
말 하지 못하고, 물을 수 없는 것도 침묵의 일종이다. 침묵까지 다 묻고, 말해 버리면 침묵은 설 자리를 잃어버린다. 곁에 있는 사물들은 서로 이야기하고 있을까?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서로 말하고. 손잡을 수 있는 사람은 서로 손을 잡는다. 말하지 않는 것은 알 지 못한다. 말을 들었다고 해도, 그 말을 전부 믿지 못하고.
최선을 다해 말해도 다는 전달되지 못한다. 거짓말한다면, 얼마만큼의 거짓이 섞였는지 알 지 못한다. 자신은 자신을 알지 못한다. 물건을 사고파는 것만 거래가 아니다. 만남 자체가 거래이다. 다른 사람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몸을 움직여 만나는 것도, 전화를 하고, 심지어 생각하는 것도 거래다.
사람들이 똑같은 침묵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처럼 마음속에 같은 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가만히 있어도 수많은 말 하고 있다. 눈으로, 마음으로, 몸으로, 생각으로 계속 말한다. 침묵은, 시간은 우리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밀어낸다. 한 시간, 한 시간, 하루하루가 우리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 사랑받는 사람이 그럴만한 이유가 있듯이.
미움 받는 사람도 그럴 사정이 있다. 액자 속에 그림이 있다. 그림을 보면서 화가가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알 지 못한다. 어디서 잤는지도 알 지 못한다. 할 말이 없어서 말하지 않는 것이 침묵일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침묵일까? 자연은 몸으로 말한다. 자연의 입술은 어디인가?
사람은 입으로 말하지만, 몸으로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두 사람이 걷고 있다. 말없이 걷는 사람. 침묵하면, 옆 사람 숨소리, 발자국 소리 들을 수 있다. 집들은 창문과 문을 닫고 침묵하고 있다. 화장도 말이다. 립스틱 색도, 향수냄새도, 머리카락 변화도 말이다. 장사, 거래도 말이다. 아무도 사려오지 않고.
아무도 팔려하지 않는다.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창문 열고 내다보지도 않는다. 눈을 뜨고 밖을 보다가, 눈 감으면 침묵. 한 사람, 한 사람만의 침묵, 두 사람, 두 사람 사이의 침묵, 세 사람, 여러 사람 사이의 침묵. 나뭇가지에서 싹이 트는 소리. 중얼거림, 신음은 자연의 소리다. 들어서 이해할 수 있어야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바람 소리 같은 지나가는 소리이다. 자주 나오던 사람이 소식 없고, 얼굴 보이지 않으면 침묵하는 것이다. 영원히 그럴 수 있다. 그 사람을 보았던 사람. 그 사람, 서로 침묵하는 것이다. 망각될 것이다. 침묵 속에서 말이 태어난다. 입에서 나온 말은 떠돌다가, 흔들리다가, 맴돌다가, 힘을 잃고.
다시 침묵으로 돌아간다. 시는 말이 아니다. 시는 침묵도 아니다. 시는 말과 침묵 사이를 떠도는 방랑자이다. 침묵은 말하지 않는 것 보다 한 차원 위다. 몸과 마음을 더 낮게 침잠시킨다. 그림 같은 말, 음악 같은 말, 꽃 같은 말, 시 같은 말, 소음 같은 말, 신음 같은 말, 고통 같은 말, 칼끝 같은 말. 내가 다가가면, 너는 움츠렸지.
내가 말을 하면, 너는 침묵했지. 네가 전화를 하면, 나는 망설였고. 단절이 길어진 만큼, 너와 나의 거리는 멀어졌다. 모습 보이지 않고, 목소리 들리지 않고, 그렇게 시간만 흘러갔다. 오해에 오해가 쌓이고, 또 그 위에 쌓인다. 끝도 없이. 혼자 있을 때, 혼자 걸을 때, 침묵은 내 곁에 와서.
2017. 06. 07 이상훈
첫댓글 소리로 대화하는걸 더 좋아합니다만
오랜시간이 만들어준 침묵의 대화도 가끔씩 필요한듯해요.^^
침묵은 되돌아보는 것, 침묵은 참는 것, 침묵은 다져 밟는 발걸음.
말을 많이 하면, 불필요한 말을 하게 되고, 침묵을 길어지면, 화를 내거나 싫어하는 것
같이 보이고. 그래도 우리 곁에 침묵이 있어서 깊어집니다. 침묵은 다가갈 수 없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 ^^
무겁군요..무겁기에 그 존재를 더 인지할수 있는듯합니다. 이글을 보고나니 옛 어르신들의 어깨가 무거워진다는 말이 왠지 침묵과 닮아보입니다.
많은 생각이 닮긴글 감사드립니다.
예,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