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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교회/낮-20200726
시선을 고정합시다
요21:15-23
코로나만 해도 힘든데 지난 주에는 비가 많이 왔습니다. 부산에서는 폭우로 인해 몇 명이 죽고, 실종도 되고,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하는 뉴스도 들었습니다.
대구도 계속 비가 왔고, 지금도 비가 오고 있습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고, 엎친데 덮친다고. 또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화는 꼭 혼자 오지 않고 다른 화를 불러 가지고 더 어렵게 하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기를 축원합니다.
코로나가 장기화 되면서부터 사람들의 생각이 깊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인생도 생각하고, 죽음도 생각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철학자가 되어져 가고 있다. 그런 얘기를 합니다.
또 코로나로 인해서 사람들의 말 수가 줄어들고 있다고 그럽니다. 코로나 때문이기도 하고, 또 마스크. 마스크로 인해서 사람들이 말을 좀 적게 한다고 합니다.
시편141편3절에 보게 되면 다윗이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그랬던 것처럼, 이 마스크가 파수꾼의 역할을 지금 감당하고 있어요.
그래서 말 두 마디를 할 것을 한 마디만 하는. 말의 실수가 많이 줄어들고 있다. 그런 얘기를 합니다.
힘들어도 우리에게 지금 이 시간은 너무 중요합니다. 지금 이 시간이 우리 생애에 있어서 앞으로 가장 젊은 시간입니다. 지금보다 더 젊어질 수는 없습니다.
지금이 기회이고. 겸손할 수 있는 기회이고. 또 시편73편28절에 있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그런 좋은 기회입니다. 지금이 행복한 시간이고, 기쁜 시간이고, 보람 있는 시간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남은 시간이 생각보다 짧을 수 있습니다. 교회 올 수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짧을 수 있고,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짧을 수 있고.
또 우리가 걷고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또 우리가 살아 있는 시간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짧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을 놓치지 않고 귀하게 생각하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들 꼭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 아주 열정적인 사람입니다. 열 두 제자 가운데서도 열정 있고, 성질도 급하고, 시원시원한. 그런 사람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마태복음16장16절에.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기도 했고, 또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주를 부인한다 할지라도 나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마태복음26장33절에. 아주 장담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근데 그 시간이 조금 지나가자 마자 어린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어요. 마태복음26장70절,72절,74절에 보게 되면 예수님을 부인하고, 두 번째는 맹세하고 부인하고,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했다. 삼중 부인했던 이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은 예수님 앞에 체면을 다 구겼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스스로 생각해도 ‘나는 제자될 자격이 없다.’
또 다른 사람이 생각할 때도 ‘아. 저 베드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사람. 네가 무슨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런 비난과 손가락질로 인해서 더 이상 주님 앞에 있을 수가 없어서 옛날 직업.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직업으로 돌아가서. 이제는 갈릴리 바다에 나가서 그물을 던지고 있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생선을 굽고, 떡을 만들어서 베드로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A/S. After-Service. A/S를 완전히 해 주셨어요. 새로운 베드로로 만들어 주셨어요. 우리도 눈이 근시도 있고, 원시도 있고, 난시도 있고, 백내장도 있고, 녹내장도 있고, 눈이 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베드로의 시선을 완전히 고쳐주셨어요. 몸도, 마음도, 시선도, 태도도, 신앙도 완전히 A/S 해주셔서 주님의 좋은 제자로 만드셨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A/S. 어루만져 주시고, 고쳐주셔서, 이 시대에 베드로처럼 주님 앞에 귀하게 쓰임받는 우리 모든 성도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 번째 주님을 사랑합시다.
본문 15절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얼떨결에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죄책감을 가지고 다시 갈릴리 바닷가로 가서 고기를 잡는 베드로를 주님께서 찾아가셨습니다. 찾아가셔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셨어요.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사랑하느냐’에 사랑은 ‘아가파오’ 입니다. 아가파오. 통상적으로 우리는 ‘아가페.’ 그렇게 얘기하기도 합니다.
아가파오는 하나님의 사랑, 신적인 사랑, 숭고한 사랑, 헌신적인 사랑, 완전히 이타적인. 그러한 사랑. 이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얘기합니다.
‘네가 그러한 사랑을 하느냐?’ 에로스적인. 너 중심적인, 이기적인. 그런 사랑이 아니고, 주님을 전적으로, 헌신적으로.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게 주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아이들이 잘못할 때마다 때리고 갖다 버린다면 집에 애들이 있어요?없어요? 하나도 없습니다. 교인들이 실수할 때마다 교인들을 책망하고, 교회 밖으로 쫓아버린다면 교회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주님께서 다 용서해주시고, 감싸주시고.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부인했을 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막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성질내고. ‘너한테 실망했다. 너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 그려셨다면 베드로와 같은. 그러한 제자는 없었을 것이고,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주님은 실패한 그 현장에 찾아가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하느냐? 사랑하느냐?’ 그렇게 세 번을 물으시고, 베드로에게 사랑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어느 큰 교회 목사님이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오전에 장례식을 두 군데나 했습니다. 장례식 두 가정을 해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근데 오후에. 오후에 결혼식이 있었는데 그냥 별로 생각없이 입에서 말이 툭 나왔어요.
결혼식 주례를 하면서 ‘장례식에 오신 여러분. 얼마나 슬프냐?’고. 그랬습니다. 별로 생각없이 오전에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서 입에서 그냥 툭 튀어나온 겁니다.
그랬을 때 반응이 세 가지였다는 겁니다. 첫째는 ‘왜 저래. 왜 저래. 우리 목사님. 왜 저래. 이제는 안 되겠구먼.’ 그냥 비난하고 비판하는. 그런 사람이 있었고.
두 번째는 ‘아이구. 우리 목사님도 사람이네. 실수하네. 우리나 목사님이나 똑같네.’ 그렇게 반응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세 번째 ‘우리 목사님. 유머가 대단해.’ ‘유머가 대단해. 이렇게 웃음없는 때에 이렇게 웃음을 주시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이해하고 배려해 주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더라 하는 얘깁니다.
이 세부류의 사람들 중에 여러분은 어디에 해당하십니까? 일번입니까? 이번입니까? 삼번입니까?
옛날에 어떤 아이가 성적표를 가지고 왔는데. 옛날에는 수우미양가. 이렇게 성적을 매겼잖아요? 수우미양가. 근데 이 아이가 ‘다’ 가예요. 가. 다 ‘가’인데 그 중에 ‘양’이 하나가 있습니다.
‘양.’ 그게 뭐냐 하면 체육. 체육만 ‘양’이야. 부모님이 성적표를 받아보니까 한심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이에게 얘기합니다. ‘내 아들아. 네가 한 가지 과목에만 너무 치중했구나.’
‘한 가지 과목에만 너무 치중해서 양을 받았구나. 다음에는 한 가지에 치중하지 말고, 골고루 좀 잘 해봐라.’ 그래서 용기를 얻어서 조금씩 조금씩 잘하게 되어서 그 아이가 나중에는 공부도 잘 하고, 성공도 하게 되었다.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문제 부모가 있는 거지 문제 아이는 없다.’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부모가 문제지 문제인 자녀가 없다. 부모가 잘 하면 자녀들도 잘 한다. 그런 얘깁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거.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거. 자녀들 가운데. 교인들 가운데. 도저히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거. 이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배푸신 사랑이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우리가 뭐 똑똑하고 잘나고, 거룩하고 의롭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사랑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했던. 예수님이 버려도 열 번. 백 번. 더 버릴 수 있는. 그런 상황 속에서 찾아오셔서 사랑하셨던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증거는 주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이 너무너무 많이 있지만, 죄보다 허물보다 더 많은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감싸주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의로워지고,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다 참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다 덮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무엇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선이 미움의 시선이 아니고, 비난의 시선이 아니라 이제는 사랑의 시선으로 바꿔져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볼 때 미움과 비난의 시선으로 보았지만, 이제는 이 시선을 버리고 사랑의 시선으로. 차가운 시선이 따스한 시선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눈이, 시선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이 사랑의 시선으로 바뀌어지게 된다면 나에게 놀라운 변화가 나타나게 되고, 기적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줄 믿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다른 사람이 복을 받는 것보다는 내가 먼저 복을 받습니다.
내가 사랑의 시선이 되면 내 마음이 편하고, 내 건강이 좋아지고, 내 관계가 다 풀려지고, 그리고 스트레스도, 아픔도, 상처도 다 사라지게 되는 겁니다.
내가 사랑의 시선을 가지면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예수님께서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베드로를 사랑의 사람으로.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시고,
그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것처럼 사랑의 시선으로, 사랑의 마음으로, 사랑의 삶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주님의 양을 먹입시다
본문 17절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고 했잖아요? 마태복음26장 70절, 72절, 74절에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오늘 요한복음21장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어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래서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세 번 얘기했을 때 주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머이라.’ 그렇게 세 번 말씀하셨어요.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그래서 양을 치라 하는 얘기는 몽둥이로 때리라. 치라. 그런 얘기가 아니고, 잘 돌봐라. 캐어(care). 잘 양육해라. 돌봐라. 그런 말씀입니다.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한 이후에 그에게 사명을 주셨어요. 사랑 없으면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랑 없으면 사명이 귀한 줄 모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를 귀중하게 여기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도 우리가 귀중하게 생각합니다.
사랑과 사명은 정비례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것만큼 사명을 귀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근데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에 보게 되면 ‘내 양을 먹이라’ 세 번이나 말씀하셨는데. 그냥 만난 김에 생각이 나서 ‘내 양을 먹이라’ 하신 것이 아니고,
아주 정중하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확인한 후에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정중하게 부탁을 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귀한 사명을 주셨어요. ‘내 양을 잘 먹이라. 내 양을 잘 캐어하라. 내 양들이 힘들고 어렵지 않도록. 험한 세상. 힘든 세상. 어려운 세상 속에서 내 양들이 힘들어하지 않도록 네가 최선을 다해서 내 양들을, 교회를 잘 섬겨라.’ 그런 사명을 베드로에게 주셨어요.
옛날에 제가 아주 어릴 때 이 평리동 일 대가 아주 시골이었습니다. 논밭 천지였고, 저기 중리 시장이나 중리 초등학교 정도는 여기 우리 집에서 아주 먼 거리였습니다.
어릴 때 과수원이나, 밭에 채소나, 과일 같은 것이 있으면 지나가다가 하나 뚝 따가지고 먹고 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서리해 먹었다.’ 그럽니다. 그 옛날에는 밭 주인이나, 과수원 주인들은 으레 그러려니 하고 그냥 용납하고, 넘어가는 분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근데 어느 마을에 과수원 주인이 욕심이 많았어요. 철저하게. ‘내 수박은 하나도 낭비하지 않는다. 서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다 내가 거둔다.’ 그렇게 생각하고.
과수원에 있는 곳에다가 크게 팻말을 써서 붙여놨어요. ‘이 많은 수박 가운데 한 통에다가 농약을 집어 넣어놨다. 누군가가 그것을 먹고 죽어도 나는 책임이 없습니다.’ 그렇게 크게 팻말에다가 써 놨어요.
애들이 겁나지요. 수박 안 먹으면 안 먹었지. 그 수박 잘못 먹고 죽으면 안 되니까. 아이들이 그 수박 밭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본 이 과수원 주인은 ‘야. 내가 잘했다. 나는 한 통의 수박도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는다. 잃어버리지 않는다. 내 것은 내가 지킨다.’ 그렇게 자기를 아주 대견하게, 똑똑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아. 근데 며칠 후에 보니까. 자기가 써놓은 팻말. 그 옆에 더 큰 팻말이 하나 써 있는데 뭐라고 써 있나 하면 ‘수박 넣은 수박 외에 또 한 통의 수박에 농약을 집어 넣었다.’
주인이 수박 하나에 농약을 집어 넣었는데. 주인이 모르는 내가. 주인이 농약을 집어넣은 수박 외에 내가 또 다른 수박에 농약을 집어 넣었다. 그래서 주인도 어떤 수박에 농약이 들어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먹을 수도 없고, 또 그것을 팔 수도 없고. 결국에는 그 많은 수박을 다 갈아엎게 되었다. 그런 이야깁니다.
다 내가 먹으려고. 나만 먹으려고.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은 내가 용납할 수 없다. 나는 하나도 빼앗기지 않는다. 내 것은 한 통이라도 나른 사람에게 줄 수 없다. 그러면서 욕심 부리는 사람은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 얘깁니다.
그래서 야고보서1장15절에 보게 되면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갈라디아서5장24절에 보게 되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랬습니다.
욕심이 있으면 다 잃어버립니다. ‘내 혼자 다 먹겠다. 나 혼자 다 갖겠다.’ 욕심 부리면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배가 고팠어요. 한 어린아이가 자기가 먹어야 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갖다 드렸어요.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홀딱 드시지 아니하시고,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무리들을 백 명씩, 오십 명씩. 잔디 위에 앉히고. 질서를 지키게 한 후에 나눠주게 했어요.
다 나누어 주고, 남자만 오천 명. 다 먹이시고 남은 부스러기를 예수님이 거두셨는데 열 두 바구니에.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 자기 바구니에 거두게 하셔서 열 두 바구니가 남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천 명이 먹어야 될 것을 혼자 먹는. 욕심 사나운. 그런 분이 아닙니다. 나는 굶어도 오천 명을 먹이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주님이 먼저 먹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먹이시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먼저 나누어 주시는. 나눔과 섬김의 모범을 보여 주신 분.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보인다는 거. 배고픈 사람들이 보인다는 거. 나의 이웃이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보다 나의 도움을 기다리는. 강도 만나서 죽어가는 그 사람이 보이는 거. 그 사람의 소리가 들려지는 거. 누워 있는 모습이 보이는 거. 보이는 거.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마음. 감동이 생기는 거.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나눠주는. 나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내 것을 나눠 주는. 이런 사랑의 시선. 나눔의 시선. 섬김의 시선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 주님을 따릅시다.
본문 22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오늘 말씀에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사명을 주시고, 그 다음에 순교할 것이다. ‘네가 지금은 이곳 저곳 마음대로 다니지만. 그러나 후에는 다른 사람들이 너를 잡을 것이다. 그래서 네 마음대로 네가 하지 못할 것이다. 순교할 것이다.’
주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고, 베드로는 그 말씀대로 64년 7월에 네로 황제에 의해서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서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나는 순교한다.’ 그랬는데. 젊은 요한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었어요.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 그러면 이 제일 어린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한도 순교하는 거지요?’
‘요한도 순교해야 됩니다.’ 그런 뜻으로, ‘나만 순교할 수 없습니다. 요한도 순교해야 됩니다.’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는 얘기는 ‘나뿐만 아니라 요한을 비롯한 다른 제자들도 다 순교를 해야 됩니다.’ 그런 뜻으로 얘기했을 때 예수님께서 강하게 말씀하셨어요.
‘그게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순교하고. 요한은 순교하지 않는다할지라도. 예수님이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 요한을 살려두신다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요한은 요한의 길을 가고, 너는 너의 길을 가라’ 요한은 로마서12장1절에 있는 말씀처럼 ‘삶의 순교.’ 매일매일 순교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게 순교잖아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그게 순교잖아요.
‘남의 길을 생각하지 말고, 너는 너의 길을 생각하며 나를 따르라.’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순교하고 안 하고가 큰 차이가 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시간에서 볼 때는 차이가 없습니다. 배구에서 보면. 배구에서 공을 띄우면 그때 스파이크를 합니다. 공을 띄우자마자 공을 때리는 것을 ‘숏공’이라 하고, 다른 말로 ‘시간차 공격’이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리고 공을 띄우자마자 공을 때리는 거. 숏공한다. 시간차공격 한다. 바로 때리는 거하고, 올라가서 때리는 거하고는 약간의 시간차가 있지만 1, 2초 차이입니다. 1, 2초 차이. 엄청난 차이 같지만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오래 살고, 짧게 살고. 잠깐입니다. 시간차. 잠깐의 시간이 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각자 위치에서 살다가 마지막 사명 잘 감당하고 나서 하나님 앞에 가는 거. 천국 중앙에서 만나는 거.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코로나가 사그러들지 않고, 장기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저께 뉴스를 보니까 국내 확진자보다 국외 입국자 확진자가 훨씬 많아졌고, 앞으로 세 자리로 올라갈 수 있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소모임 집회를 금지하는 규제가 지난 금요일 저녁부터 풀렸지만 전국 교회 한 두 곳에서 지금 코로나 확진자가 나오고 있습니다. 방역을 철저히 하고 모임을 하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장기적인 코로나로 인해서 건강에 이상이 있는 분, 정신적을 이상이 있는 분, 또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 예배드리는 거 어렵고, 학교, 유치원, 직장의 어려움.
또 가족들 가운데 외국에 나가 있는 분들, 군대에 가 있는 분들, 또 병원, 요양시설, 이런 데는 면회도 상당히 어렵습니다. 이러한 것들에 우리와 관계가 없는 분들은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부모상을 당했는데, 소식을 듣고 빨리 귀국했지만 코로나 검사로 시간이 지연되고, 그래서 결국 부모 장례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뉴스. 얼마나 가슴 아픈 얘깁니까?
그래서 지금 이런 저런 다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어려움이 없는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못살겠어. 죽겠어.’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죽을만큼 힘들고 어렵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피할 길을 주시고,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죽겠다가 아니라 살겠다. 모든 것이 주께 있다. 모든 것이 다 주님께 있습니다. 전도서9장1절에 보게 되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그랬습니다. 모든 것이 다 주님 손 안에 있습니다.
출애굽기17장15절에 보면 ‘여호와 닛시.’ 창세기22장14절에 보면 ‘여호와 이레.’ 사무엘상7장12절에 보게 되면 ‘에벤에셀’ 하나님이 도우신다.
빌립보서4장6절7절에 보게 되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 앞에 다 맡기는 여러분 꼭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간증꺼리가 될 수 있도록 모든 것들을 반드시 좋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북이와 토끼의 경주해서 누가 이겼습니까? 거북이가 이긴 거. 다 알고 계시죠? 거북이하고, 토끼가 경주에서 경주를 했는데 거북이가 이겼습니다.
토끼는 거북이와 경쟁했어요. 거북이를 상대하니까 낮잠을 자는 거예요. 근데 거북이는 토끼와 경쟁하지 않고 결승점을 목표로 삼고, 그 목표를 바라봤어요.
토끼가 저 앞에 갔지만 토끼 생각을 하지 않고, 목표점을 바라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히 가서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주위에 잘 뛰는 토끼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누구는 이렇대. 누구는 돈 벌었대. 주식을 돈 벌었대. 부동산으로 돈 벌었대. 누구는 출세했대. 누구는 뭐했대.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모릅니다. 어리둥절합니다.
우리 주위에 토끼가 많아요. 그 토끼들을 이렇게 보다가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그거 보다가 시궁창에 빠져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거북이가 토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목표지점을 바라보고 한 걸음 한 걸음 갔던 것처럼 우리 모두는 이 어려운 때에 다른 것을 볼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
주님의 사랑을 바라봐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의 사랑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고. ‘내 양을 먹이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사명에 시선을 고정하고.
그리고 ‘너는 나를 따르라. 비교하지 말고, 네 갈 길을 가라.’ 그 길에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이 잘못되었다면 시선을 교정해서 주님에게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주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이 어려운 때에. 코로나가 있지만. 이런 저런 어려움과 시험과 역경이 많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코로나 속에서도 주님에게 우리의 시선을 고정해서 조금도 변질 되지 않는 우리 교회와 사랑하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거룩한 성전에 불러 주시고, 복음의 기쁨을 간직하게 하시고, 날마다 주님을 전하며, 시인하고, 간증하며 삶에서 주님을 나타내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을 부인하였던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주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사명을 주시며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오직 주님만을 따르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도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살게 하시고,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 잘 감당하며 살게 하시고, 오직 주님만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을 늘 누리며 사는 축복이 성도들과 가정과 우리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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