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이 직면한 고독, 불안, 실존의 고뇌를 표현한 조각가-알베르토 자코메티 (Alberto Giacomett)이다...1901년 10월 10일-사망1966년 01월 11일 국적..스위스로 --현대 서구인들이 직면한 고독, 불안, 공포를 형상화하여 인간 존재에 대한 진실을 추구했다. 알베르트 자코메티는 20세기 초 널리 유행한 실존의 고뇌를 공간 속에 고립된, 길게 늘인 형태의 인물 조각상으로 표현한다. 모든 존재와 사물의 비밀스러운 상처를 발견하고, 그 상처로 그들을 비추려는 듯 보인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자코메티는 1901년 10월 10일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국경 지방인 스탐파 보르고노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반니 자코메티는 스위스에서 명망을 떨치던 후기 인상파 화가였다. 화가이자 엄청난 서가를 가지고 있던 아버지는 어린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동생 디에고는 후일 가구 디자이너로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날렸으며, 또 다른 동생 브루노 역시 건축가로 성장했다.
자코메티는 10세 때부터 소묘와 그림을 그렸으며, 14세 때 동생 디에고를 모델로 하여 처음으로 실물 크기의 흉상을 만들었다. 그는 이때의 경험에 대해 후일 이렇게 말했다.“아버지의 작업실에 있는 작은 복제품 흉상들을 본 순간, 그것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설렘을 느꼈다.”18세 때 자코메티는 제네바 미술 공예학교에 들어갔으며, 19세 때 공부를 중단하고 아버지를 따라 베네치아 비엔날레를 보러 이탈리아로 떠났다. 아버지는 그가 로마, 피렌체 등지를 여행하며 대가들의 그림을 보고 느끼게 해 주었다. 그는 특히 조토와 치마부에, 벨라스케스의 그림에 큰 감동을 받았으며, 로마에서 자유롭게 조각 작품을 제작했다.
21세 때 자코메티는 파리로 건너가 그랑 쇼미에르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는 한편, 저녁에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작품을 제작했다. 아버지는 늘 그의 곁에서 함께 작업하는 동료이자, 그가 자신의 실력에 회의를 품을 때마다 독려해 주는 예술적 동지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수고 괴로워했으며, 자신의 실력에 항상 회의를 품었다고 한다.그는 파리에서 활동하면서 당시 입체주의 작가들에게 강한 흥미를 느꼈고, 특히 자크 립시츠각주1) , 앙리 로랑스각주2) 등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동시대 유럽 예술가들이 그랬듯 그 역시 아프리카 조각이나 민속 공예품에 영향을 받았다.1920년대에 그는 입체파와 아프리카 미술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제작했다.
그러면서 실제와 닮게 표현하는 것을 그만두고 추상 조각으로 나아갔다.〈입체파적 구성〉, 〈옥외의 세 인물〉, 〈인물상 1〉, 〈숟가락 여인〉, 〈커플〉 등이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커플〉과 〈숟가락 여인〉은 1927년 봄 살롱전에 출품해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스위스 바깥에서 명성을 얻지 못했던 아버지는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이때의 진정한 수확은 브랑쿠시의 〈공간 속의 새〉를 본 것이다. 자코메티는 ‘이 살롱의 유일한 성공작’이라며 완전히 흥분했다..
.1920년대 그는 유럽 아방가르드 미술가들 사이에서 단연코 눈에 띄는 존재였다. 초현실주의자들 역시 그의 작품에 관심을 보였다. 1929년, 자코메티는 초현실주의 그룹의 일원인 화가 앙드레 마송, 막스 에른스트와 교류하게 되었다. 그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에 호기심을 느끼고, 내면의 섹슈얼리티와 폭력을 형상화하는 데 몰두했다. 〈오전 4시의 궁전〉, 〈목 잘린 여인〉에는 이런 경향이 드러나 있다.
특히 초현실주의 운동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앙드레 브르통은 자코메티의 〈매달린 공〉을 본 순간 그에게 매료되어 열정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관계를 돈독히 했다. 브르통은 관계가 벌어진 이후인 1934년에도 자코메티의 〈보이지 않는 물체〉에 대해 엄청난 찬사를 보냈다.그러나 자코메티는 얼마 후 추상적인 형태에 회의를 품고 다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 시작했으며, 초현실주의에 대한 관심도 잃었다. 무엇보다 자코메티는 초현실주의 그룹의 독선적인 태도와 잘 맞지 않아 잦은 충돌을 일으켰고, 결국 1935년 초현주의 그룹에서 공식적으로 제명당했다.
그러나 초기에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 준 작품들은 재미있게도 초현실주의 작품들이었다.이 시기에 그는 장식 부조, 벽 장식, 연극 무대 장식 등 다양한 장식 미술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영향으로 문학, 철학, 연극 등을 매우 좋아했으며, 말년에 사무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 장치를 설계하기도 했다.자코메티의 〈개〉를 담은 1985년 발행된 프랑스 우표..자코메티의 〈개〉를 담은 1985년 발행된 프랑스 우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그는 파리에 잠시 남아 있다가 1942년 나치를 피해 고국 스위스로 돌아갔다. 전쟁이 끝난 후 파리로 돌아온 그는 어떤 미술 운동에도 가담하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이때부터 그는 서서히 길쭉하고 여윈 형상, 뼈대 형식의 인물상을 제작했다.
그는 이런 형상들을 단독으로, 혹은 여러 개 배치해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었다. 〈걷는 남자〉, 〈키가 큰 인물들〉, 〈도시의 광장〉, 〈전차〉, 〈가리키는 사람〉 등이 이런 유형의 대표적인 작품이다.작은 머리, 거대한 발, 길쭉한 뼈대만 있는 형상들은 모호하고 고독하며 위태로워 보이지만, 대지에 단단히 발을 붙이고 있다. 1950년 제작한 〈전차〉에는 간략히 표현된 전차 위에 작은 발판이 있고, 그 작은 발판에 여인이 위태롭게 서 있다. 발판 아래는 허공으로, 여인은 금방이라도 아래로 고꾸라질 듯하다.
왜 이런 형상을 제작했는지에 대해 자코메티는 이렇게 설명했다.“전차는 내가 원하는 높이에 여인을 두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나는 땅에 묵직하게 놓여 있는 밋밋하고 특징 없는 받침대가 아니라 여인의 발밑에 텅 빈 공간을 두고 싶었다.”실존주의 철학가 사르트르는 그의 〈걷는 남자〉에서 전쟁으로 인한 불안과 상실감, 절망, 실존적 고뇌를 읽었다. 그리고 사르트르가 자코메티의 작품론을 쓰면서, 이후 그의 형상들은 실존의 고뇌와 불안, 비관주의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말년에 그가 무대 설계를 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속 인물들은 그의 인물상에 다름 아니었다.
또한 그는 1950년대 에드먼드 후설, 메를로 퐁티 등의 현상학 이론에 많은 영향을 받기도 했다.전후 자코메티는 국제적으로 엄청난 명성과 부를 누렸으나 몽파르나스의 초라한 작업실에서 작업을 계속했다. 1951년 브라질 상파울로 국제전에서 조각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에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이듬해에는 베른에서 대규모의 회고전이 개최되었다. 1960년대에는 피츠버그 국제 조각 대상, 베네치아 비엔날레 조각 대상을 수상했으며, 런던, 덴마크, 뉴욕 등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개최되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아내 아네트, 애인이자 친구였던 캐롤린, 친구였던 디에고나 이사쿠 야나이하라 등의 두상이나 흉상을 많이 제작했다. 자코메티는 모델을 서 준 야나이하라에게 이렇게 말했다.“내가 당신의 얼굴을 그린다는 것은 아무도 가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한다는 의미요. 이것이 이집트 여행보다 더 위험하고 신기한 모험이라고 생각지 않소? 우리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큰 모험, 미지의 땅을 탐사하는 모험을 하려는 참이요.”자코메티는 1966년 1월 11일 숨을 거둘 때까지 계속해서 현대 서구인이 직면한 고독, 불안, 공포를 형상화했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인간 존재에 대한 진실을 추구하면서 오늘날에도 깊은 감동을 안겨 준다.
첫댓글 인간의 고독한 실존에서 벗어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