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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룸펜대장인 셈, 共産黨員 태반이 共자도 몰랐다"
[남재희 칼럼]<19> 50주기 맞아 竹山 曺奉岩 선생을 생각한다
7월 31일로 죽산 조봉암 선생이 법살(司法殺人)된 지 50주년이 된다. 오전 11시부터 망우리 묘지에서 추모행사가 있다. 50년 전, 젊은 신경림 시인은 죽산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는 <그 날>(시집 <농무>에 수록)이라는 시를 써서 당시의 살벌한 분위기를 묘사했는데 이번에는 노령이 되어 50주기 추모시를 써서 낭송한다.
그날
- 신경림
젊은 여자가 혼자서
상여 뒤를 따르며 운다
만장도 요령도 없는 장렬
연기가 깔린 저녁길에
도깨비 같은 그림자들
문과 창이 없는 거리
바람은 나뭇잎을 날리고
사람들은 가로수와
전봇대 뒤에 숨어서 본다
아무도 죽은 이의
이름을 모른다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그날
50주기를 맞아 기념사업회,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여러 곳에서 기념세미나를 하였고 또 할 예정으로 있다. 진보당 사건의 피고인으로 법정에서의 사진이 신문에 났던 인사들 중 막내 격인 정태영 씨가 몇 달 전에 별세하여 이제 생존인물은 없다.
50주기를 맞아 당시의 분위기를 느껴보기 위해 죽산 생시의 인터뷰를 찾아보았다(<주간 희망> 1956. 11.23).
▲ 죽산 조봉암(1898. 9. 25 - 1959. 7. 31)
죽산은 일제 하에 조선공산당을 조직했을 때 당원이 108명인데 태반이 공산주의의 공(共)자도 모르는 사람들이었고, 80%가 양반층이었다며 "그때는 공산주의보다도 독립운동에 더 큰 목적이 있었다"고 말한다.
또한 진보당 창당 당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직업을 빼앗길까봐 못 들어왔다며 "진보당에 들어온 사람은 룸펜(lumpen)이어야 한다, 이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룸펜대장인 셈이지요"라고 익살로 말하기도 했다.
진보당에 대한 지지가 어느 정도였냐 하는 것은 1956년의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알 수 있다. 그때 이승만 504만 표에 조봉암 216만 표(총 유효투표의 30%)였는데, 주로 부정개표로 엄청나게 많은 표가 도둑 맞았다고 요즘까지도 주변에서 가끔 증언을 들을 수 있다.
특히 재미있는 이야기는 국회의원 선거운동에서 사전선거운동금지 조항이 생겨난 것은 진보당의 진출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대화문화아카데미의 세미나에서 서울대 법대의 송석윤 교수는 당시 이기붕과 그 참모들이 급상승하는 진보당을 견제하기 위해 낸 꾀가 사전선거운동금지 조항이었다고 말하였다. 마치 노동관계법에서 제3자개입금지 조항을 두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학생시절에 학우의 소개로 죽산과 동암(東庵) 서상일(徐相日) 을 각각 자택으로 방문한 일이 있다. 죽산은 초면임에도 행동매뉴얼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동암은 도의론만을 말한 듯하여 기억에 남는 게 없다.
죽산의 손은 일제에 의한 수난의 역사를 말해준다. 악수 하려 내민 손, 분명히 엄지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은 온전하게 남아있고 가운데 세 손가락은 첫 번째 마디가 없다. 일제의 고문과 감방에서의 동상으로 단절된 것이다.
명동의 극장에서 열린 진보당 창당대회도 참관하였다. 시골장터 약장사 악단과 같은 음악 반주와 박지수 시인의 열렬한 시 낭송이 기억에 남는다.
진보당을 생각할 때 고위 당직자는 아니었지만 죽산의 측근이었던 전세룡 씨의 회고담이 되살아난다. 그의 글에 의하면 진보당사에 나오는 사람들의 1/3은 진보계이고 1/3은 동암계이며 나머지 1/3은 각종 정보기관원인 '정보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선거 때 지방에서 선거운동을 거의 못했다는 증언이다. 신문지에 쓴 벽보 약간 붙여놓고 한 지역에서 잠깐 연설을 하다가 경찰들에 억류될까봐 급히 다른 지역으로 옮겨야만 했던 그런 떠돌이식 엉성한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죽산의 정당운동을 음미해볼 때 두 가지가 특히 관심을 끈다.
첫째는 자유당이 이승만 박사의 3선을 위해 4사5입 개헌이라는 무리수를 두었을 때 야측은 범야 연합전선의 신당(나중에 민주당이 됨)을 추진하였다. 그때 죽산은 그 신당에 참여하기로 한 것이다. 진보당을 독자 창당하려 한 것이 아니라 범야 대동단결의 정당에 그 구성원으로 들어가기로 한 중요한 노선상의 판단이다. 그때 서상일 등의 혁신파는 지지하였으나 김준연, 조병옥 등 보수파가 죽산의 공산당 전력을 들어 한사코 반대하여 그의 가입은 좌절되고 말았다.
둘째는 그후 서상일 씨 등 혁신파와 죽산계가 진보정당을 만들기로 하였으나 어처구니 없게도 실패하여 동암계는 민주혁신당(민혁당)으로, 죽산계는 진보당으로 나뉘게 된다.
표면상은 동암계와 정책상의 노선이 달라 당을 같이 할 수 없었다고 죽산조차 그렇게 언급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범야 대동단결에 참여하기로 한 바로 앞선 태도와 전혀 맞지를 않는다.
죽산의 일급참모였으며 일본에 망명하여 <통일일보>를 발행하던 창정(蒼丁) 이영근(李榮根) 씨는 그때 "죽산이 동암이라는 갓을 썼더라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고 한탄하곤 했다. 한민당의 8총무 가운데 하나이며 대구의 프린스로 불리었던 동암과 굳게 손잡았더라면 자유당이 그렇게 쉽사리 음모를 꾸며 법살 할 수 있었겠느냐는 상상이다.
이영근 씨의 설명은 죽산을 둘러싼 이른바 약수동파라는, 지역색을 강하게 띤 파당이, 동암을 '지주반동' 한민당 출신이라고 배격하여 모욕적 언사를 계속 하였다는 것이다. (내가 죽산을 만난 것은 사직동의 이른바 도정궁에서였는데 그후 약수동으로 이사했다)
지금의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은 진보당 때와는 매우 다른 상황이다. 6월항쟁과 민주노동운동의 강화 이후 국면이 달라졌다. 죽산도 룸펜대장이라고 자학을 했지만 그때는 8할이 농민이었고 노동계층은 거의 형성되지 못했었다. 그래도 지금은 주먹구구로 말하여 반 이상을 노동계층에 기반하고 있는 게 아닌가.
개혁세력과 진보세력을 편의상 구별하여 말한다면, 진보세력이 연합할 것인가(죽산의 첫 번째 방식), 또는 독자 행동할 것인가(죽산의 두 번째 방식)의 노선 상의 중대문제가 있다. 미국에서는, 물론 군소정당이 있기는 하지만, 진보세력이 민주당과 연합한 셈이다. (미네소타 주에서는 아직도 당명이 민주-농민-노동당이다) 유럽에서는 사회민주정당이 큰 정당으로 있으며 집권당이 되는 경우도 대단히 많다.
정강정책의 차원에서 진보당은 맑시즘에서 벗어났다고 보여진다. 이동화, 신도성 씨등 동경제국대학 출신의 진보적 학자들이 작업에 참여했었으나 지향했던 것은 민주사회주의적인 '복지사회의 건설'이었고 좀 선동적인 캐치프레이즈는 '수탈 없는 경제'였다.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것은 '평화 통일'을 들고 나온 것이다. 지금은 누구나가 말하고 있어 진부한 느낌이지만 자유당 정권이 '북진 통일'을 외치고 있을 때 '평화 통일'로 받아친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했다. 그것이 국민을 크게 움직였다고 보여진다.
지금의 진보정당에 예를 들어 아직도 국유화론ㆍ계획경제론 등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생각해 볼 일이다. 어렵고 까다로운 얘기지만 국민의 실생활에서 출발하는 것이 원칙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북한과의 문제다. 죽산은 제헌의원이 되었고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토지개혁을 단행하는 데 기여하는 등 대한민국을 크게 긍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그런데도 냉전적인 국제상황과 독재정치의 제물이 되어 2중간첩의 조작된 증언에 희생물이 되었다. 살얼음판이었다.
민노당과 진보신당 사이에 종북주의 운운을 두고 싸움을 하고 분당사태가 났다. 북은 분명 실패한 체제이다. 괴멸하는 것보다 연명시켜 스스로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 긴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여 죽산사건과 같은 제2의 법살이 우려되기도 하고, 아니 진짜 간첩사건이 생길까봐 걱정되기도 하는 것이다.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죽산사건이 법살임을 인정하고 국가가 사과하고 피해구제와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하는 결정을 내린 바 있다.
그리고 죽산의 신원(伸寃)을 위한 대법원의 재심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원혜영ㆍ박상은 등 국회의원과 이부영 씨 등 여러 사회 저명 인사들이 발벗고 나서 조속한 대법원의 재심을 재촉하는 성명을 30일에 냈다. 망우리 산마루 죽산 묘소의 묘비는 뒷면이 이제껏 백면(白面)으로 있다. 차마 참혹하고 억울한 법살을 기록할 수 없어서이다.
/남재희 언론인 전 노동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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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에게 '조봉암'은 무슨 의미인가
[화제의 책] 정태영의 <조봉암과 진보당>
지금으로부터 47년 전인 1959년 7월 31일 진보당의 조봉암은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대법원이 재심 신청을 기각한 바로 다음날이었다. 죄명은 간첩죄였다. 조봉암이 국군방첩대(HID) 소속으로 북한을 오가던 양명산을 통해 북한으로부터 지령과 자금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대표적 '조작사건'이자 '사법살인'으로 간주되는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국가의 공식기구에 의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조봉암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그가 분단체제 하에서 독재정권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라는 점에 머물지 않는다. 그에 대한 우리의 더 큰 관심은 한국의 현대역사 속에서 그가 실천하고자 했던 역사의 길에 있다. 즉 일제 식민지배에 저항했던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해방 후 분단의 과정에서, 그리고 전후 1950년대 한국정치의 과정에서 그가 밟았던 삶의 궤적은 역사현실의 구체적 조건 속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역사의 한 대안적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공산주의자에서 혁신파까지…현실에 발을 딛고 선 정치
이번에 발간된 정태영의 <조봉암과 진보당>(후마니타스 펴냄)은 조봉암이 살았던 삶의 궤적을 추적하고, 그 궤적을 통해 조봉암이 추구했던 역사의 길을 탐색하고 있다. 진보당원으로서 역사의 현장에 직접 참여했고 뒤늦게 진보당 연구에 매진해 온 저자에 따르면, 그 길은 비미비소(非美非蘇)의 한국적 제3의 길, 사회민주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의의 한국적 길이라는 것이다.
일제 치하에서 조봉암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나온 엘리트 공산주의자였고, 7년 이상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였다. 그럼에도 그는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의 박헌영과 결별하고 민주주의 독립전선을 통해 중간파의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남북한에 분단정부가 수립되는 상황에서는 중간파의 다수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불참했던 것과 달리 남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승만 정부에서 농림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조봉암의 선택은 그를 현실 영합주의자로 평가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명분론에 얽매이지 않고 주어진 현실에 바탕을 두고 행동했던 것이 바로 그의 장점이자 특징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기본적으로 현실주의자였고 참여자였다.
그러나 그를 현실주의자이자 참여자로 규정하는 것은 그에 대한 절반의 평가일 뿐이다. 그는 현실에 참여하면서 그 참여를 통해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했다. 이와 같은 그의 시도는 1950년대 후반에 가장 잘 드러났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에 맞서 무려 216만 표를 얻었던 그는 혁신 야당인 진보당을 결성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노선을 실천하고자 했다.
조봉암이 추구했던 노선이란 "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배격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여 책임 있는 혁신정치의 실현을 기하는"(진보당 강령)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미비소(非美非蘇)의 한국적 제3의 길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의 노선이 본격적으로 실천되기도 전에 그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처형됐다. 그리고 그 진상조차 규명되지 않은 채 반 세기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서야 다시 빛을 발하는 조봉암
나는 전후의 분단체제에서 때 이르게 제기된, 그 결과 시대의 한계를 넘기 어려웠던 조봉암의 노선이 어쩌면 민주화와 탈냉전, 그리고 세계화의 현 상황에서 더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국가사회주의의 공산독재 체제도 이미 붕괴했거나 그 의미를 갖기 어렵게 됐다. 또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속에서 시장과 자본가의 힘은 더욱 강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사회민주주의 또는 민주사회주의 노선을 재검토해야 할 필요성은 매우 크다. 또한 탈냉전과 더불어 남북한 평화통일의 길은 특정 강대국에 기대는 태도가 아니라 강대국들 사이에서 자주적이고 균형 잡힌 태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실의 조건을 인정하고 그 현실에 대한 참여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했던 조봉암의 태도는 현실적 진보주의자로서 우리의 귀감이 될지도 모른다. 이제 시간은 흘러 조봉암 시대에는 허락되지 않았던 진보주의가 우리 사회에서도 점차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자주 경험하듯이, 진보주의는 현실을 무시하기 쉽다. 그 결과 진보주의란 현실에 책임을 지지 않는 한낱 추상적인 비판론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진보주의가 진정 현실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현실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조봉암의 삶은 바로 그 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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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 52년만에 '무죄'
…팔순 넘은 장녀 "이제 내가 죽어도…"
대법원 "늦게라도 재심 해 잘못을 바로 잡았다"
죽산 조봉암 선생의 간첩 누명이 52년 만에 풀렸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시환 대법관)는 이날 전원합의로 이승만 정권 당시 국가변란과 간첩 혐의로 기소돼 사형 선고를 받은 조봉암 선생 재심 사건을 원심 파기하고 무죄 선고를 했다.
재판부는 사형선고 당시 유죄로 인정한 세 가지 혐의 중 국가변란과 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로, 불법 무기소지 혐의는 선고유예로 판결했다.
"조봉암, 간첩 아니다"
재판부는 선고문을 통해 "피고 조봉암은 진보당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국가변란 죄가 적용됐지만 진보당은 체제를 전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며 "또한 진보당의 평화통일 정책이 북한의 위장통일과 일맥상통하다는 이유로 국가변란을 꾀했다고 하지만 이것은 서로 같지 않다고 판단했다"고 판시했다.
또한 재판부는 "진보당이 국가변란을 위해 만들어졌다며 당시 재판부는 국가보안법을 적용했지만 진보당의 강령 등을 보면 사유제와 시장제를 전면부정하지도 않을 뿐더러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등 사회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며 "체제 전복 등을 실제적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간첩 혐의를 두고도 "유일한 증거인 증인 양이섭의 진술은 일반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부대가 증인을 영장 없이 연행, 수사하는 등 불법으로 확보해 믿기 어렵다"며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단 재판부는 권총과 실탄을 소지한 것을 두고는 "불법 무기소지에 해당한다"며 유죄를 인정했으나 선고를 유예했다. 재판부는 "진보당을 창당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했지만 뒤늦게라도 재심을 진행해 잘못을 바로 잡는다"며 "공소사실이 무죄라는 것을 전원 일치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승만 정권, 정적 조봉암 누명 씌워 제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2007년 8월 대법원에 재심을 청구, 2010년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동시에 정리위원회는 조봉암 선생 사건을 '위협적인 정적(政敵)을 제거하기 위한 이승만 정권의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으로 규정하고 국가 차원의 사과와 피해 구제 및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권고했다.
재심을 청구 받은 재판부는 2년간의 심리 끝에 "조봉암 선생은 군인ㆍ군속이 아닌 일반인인데도 수사 권한이 없는 국군정보기관인 육군 특무부대가 수사하는 등 수사과정의 범죄 사실이 증명됐다"며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었다.
1898년 인천 출신인 조봉암 선생은 YMCA 중학부에서 수학 중이던 1919년 3ㆍ1운동에 참가했다가 첫 옥살이를 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후 고려공산청년회 대표로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총회에도 참석하는 등 소련, 중국, 만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했었다.
해방 후 좌우합작 운동과 남북협상 노선을 걸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 대한민국 제1대 농림부장관과 제2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했다. 1952년과 195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조봉암 선생은 각각 80만여 표 200여만 표 등을 받았다.
그렇게 대중적 지지를 넓혀가던 조봉암 선생은 1956년 11월 진보당을 창당했고 3대 대선에서 30%의 지지율을 얻어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위협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 선생을 진보당을 창당해 국가 전복을 꾀했다는 이유로 간첩죄를 적용 1958년 구속했고, 조봉암 선생은 사형을 선고 받은 뒤 1959년 처형 당했다.
"이젠 죽어서 아버지 볼 수 있겠다"
조봉암 선생의 장녀 조호정 여사는 무죄 선고 이후 "이제 내가 죽어도 아버지를 볼 수 있겠다 싶다"며 "그동안 도와주신 여러 분에게 감사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조 여사는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돌아가신 뒤 50년 동안 가족들은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며 "그래도 세상이 조금은 바뀐 거 같아 다행"이라고 말했다.
조 여사는 "앞으로 이런 일은 다시 반복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무죄가 되면 쓰려고 비워 놓은 아버지 비문을 지인 분들과 상의한 뒤에 새겨 넣겠다. 정적을 이렇게 죽이는 건 말 이 안 된다"고 말했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은 "이제야 역사가 판단을 내린 것"이라며 "앞으로 인천에 조봉암 선생의 동상을 세우는 일 등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허환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