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버트 그레이프
이수자
당신은 삶이 힘들다고 생각될 때 어디서 누구에게 혹은 무엇으로 위안을 받는가? 그렇다 위안이 필요하다. 우리는 먼 하늘에 떠 있는 구름만 바라보기에는 너무나 동적인 인간이다, 가슴을 타고 내리는 한 잔의 술, 마냥 애교를 부리는 개냥이와의 교감, 허공을 가르며 푸른 연기로 사라지는 끽연, 등줄기에 땀이 흐를 때 까지 무작정 달리기, 가방을 들고 집을 떠나보기, 카드를 들고 나가 한도 끝 질러보기, 그것도 성에 차지 않으면 성적인 일탈은 어떤가?
나에게 위안은 독한 술과 농담 그리고 깔깔거리는 웃음이다. 몸이 힘들어도 한 잔의 술을 마시며 릴렉스한 기분에 몰두한다. 맛있는 반찬을 보아도 한 잔의 술을 찾고 짜장면 한 그릇에도 양념처럼 상위에 올려지는 한 잔의 술, 해질녘 거리로 밀려나오는 군침 도는 치킨 내음에는 더욱 더 한 잔 술의 유혹을 져버리지 않았다. 위안을 찾아 그 시간 그 밤을 견디어야 좀 더 가벼운 내일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는 이겨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연민을 이렇게 밖에 달랠 줄을 모른다.
식료품가게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길버트 그레이프는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는 굴레에서 벗어 날 수 없는 가정환경에 갇혀 있다. 어머니는 남편이 자살하자 그 충격으로 칩거 생활을 하다가 230kg의 초거대 비만으로 변해버렸다. 나름 직장생활을 하다가 일자리를 잃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보는 노처녀 누나, 뻑 하면 사고를 치지만 맑고 순수한 영혼의 지적장애인인 18세의 남동생, 오빠를 도우려고 아르바이트를 하여 생활비에 보탬을 주려는 15세 사춘기 소녀인 여동생 등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지적장애인 남동생은 집에서 위험한 장난과 문제들을 일으키고 여동생 역시 지적장애인인 오빠를 돌보기보다 쥐어박거나 밀치는 사춘기소녀의 반항기질을 가지고 있다. 동네 사람들은 초거대비만인 어머니를 구경거리로 여기며 엿보거나 놀리기 다반사였다. 그러나 남동생이 경찰서에 갇혀있자 그녀는 230kg의 거대한 몸을 움직여 경찰서로 가서 남동생을 데리고 오지만 온 도시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되어버린다. 남동생은 생일전날 밤 누나가 만들어놓은 생일 케이크를 먹어버리고 화가 난 길버트 그레이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가버린다. 그가 그 곳을 도망쳐 숨 쉴 수 있는 순간은 이웃의 유부녀와의 성적인 일탈뿐이었다.
길버트 그레이프는 집을 나가 자유 분망한 또래 베키를 만나면서 어머니와 화해도 하고 베키와는 연인사이가 되었다. 이어진 엄마의 죽음을 두고 가족들은 결정을 해야 했다. 그녀의 주검을 두고 동네사람들의 놀림이 될까봐 염려하였다. 결국 어머니를 집과 함께 태워 버리고 동생들을 데리고 그곳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그레이프의 굴레가 벗겨지는 순간이었을까. 단 한순간도 떠나 버릴 수 없는 상황에서 그레이프는 엄청난 스트레스로 잠깐씩 탈출에 대한 갈등을 보이지만 꿋꿋하게 견디며 참으로 성실하게 가족을 돌보는 모습은 존경스럽고 애처롭게도 여겨졌다. 그들이 도시를 떠날 때 길버트 그레이프의 억눌린 그림자도 벗겨지는 것을 느꼈던 영화였다.
실화를 소재로 한 이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는 혈기 왕성한 20대 청년의 출구 없는 일상을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부모로부터 보호 받아야 하지만 생활고를 책임지고 오히려 짐이 되고 수치심을 견뎌야하는 초거대비만의 어머니, 끊임없이 돌보아야 하는 지적 장애인 남동생, 아직 어린 사춘기 여동생, 그나마 어머니를 돌보며 함께 짊어지고 가고 있는 누나로 구성된 가족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신상이 그러하여도 자식에 대한 사랑을 듬뿍 뿜어내주었고 형제애를 져버리지 않는 누이와 해맑은 영혼을 가진 남동생과의 끈끈한 가족애는 길버트가 끝까지 버틸 수 있는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구도 그렇게 힘겨운 가족의 불행을 원하지 않지만 외면할 수 없는 일들은 일어난다. 평온한 일상이 이어질 것처럼 잔잔하던 날들에도 가슴 밑바닥에 술렁이던 갈등이 출렁이며 일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나는 길버트 그레이프를 떠 올린다. 홀로 어디론가 나아가야 할 때, 가족들에 대한 선택을 해야 할 때, 수많은 결정의 순간이 올 때. 그런 순간에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할 때면 잠깐 눈을 감고 그 청년을 떠올린다. 20대의 길버트 그레이프는 끊임없이 돌보아야하는 가족에 대하여 인내하였고, 갑갑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갈등을 처연하게 견뎠다. 이 영화를 접 한지 30여년이 흘렀다. 술로 위안을 삼은 지는 더 오랜 세월이 흘렀다. 수많은 감동적인 영화를 보았지만 길버트 그레이프는 갈등의 그 언저리에서 나를 단단히 붙잡아 매어주는 매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