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채(福債)가 기독교에 끼친 영향!!!.
한국 무속신앙(巫俗信仰)은 기복신앙입니다. 그러므로 무당들은 봄과 가을에 집안의 복(福)을 비는 재수 굿(㖌)을 빌어 줍니다. 굿에는 반듯이 복채가 따르게 됩니다. 복채(卜債)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궁금해 합니다. 복채(卜債)란 복(福)을 채가는 것이라 해서 복채라 합니다. 복채(福債)는 술객(術客)에게 궁금한 일이 있어 물어 보고 그 값으로 지불하는 것이다.
복채를 한자로는 복채(福債) 또는 복채(卜債)로 표기합니다. 전자는 천기누설을 하여 술객이 잃게 된 복(福)에 대한 보상으로 지불하는 뜻이고, 후자는 단순히 궁금증을 풀어준 댓가로써 지불되는 복채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예로부터 부모의 제사(祭祀) 비용과 자손의 돌잔치에 드는 비용, 그리고 복채, 이 세가지는 깍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복채(福債)로서의 의미가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전통적(傳統的)인 복채에는 복채(卜債)와 복채(福債)가 있습니다.
1, 복채(卜債)와 복채(福債)의 의미
1) 복채(卜債)
복채(卜債)란 궁금한 문제를 묻고 그 답을 얻음에 그 댓가로 내 놓는 돈(복채)을 의미 하는 합니다. 통상적으로 점치고 나서 내놓은 돈입니다. 갖는 責(책)으로 이루어져 금전(金錢)을 빌린다는 대차(貸借)의 뜻에 쓰이는 한자인데.. 그렇다면, 복채(卜債)가 무엇일까? 그런데, 복채(福釵)라고 하기도 하는데, 자신의 귀한 운명을 감정 받을 때 정성스럽게 금전을 내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2)복채(福債)
복채(福債)는 천기(天氣)를 누설하고 그로 인하여 상담한 사람이 천기누설을 하였음으로 인하여 그에 상담하는 댓가를 치루게 되는데, 그 댓가를 치루는 것에 대한 보상의 의미로 내놓은 돈(복채)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술객 사이에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라고 합니다. 얘기 인 즉, 북경에는 아주 묘한 점쟁이가 있어 100냥을 줄 때 마다 한마디 씩 해주며 더 듣고 싶으면 100냥을 더 내야만 한마디 해 주는 것입니다. 100냥의 돈을 지금의 화폐로 환산하기는 곤란하지만 상당히 큰 금액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한마디가 신기에 가까운 지라 꽤나 돈 있는 사람들이 다섯마디를 듣고자 500냥을 내고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신통하게 잘 맞추었는지 상상이 갑니다. 어느 떠돌이 장사꾼이 평소에 가 보고 싶어도 돈이 없어 못가고 벼르기만 했는데, 이날은 목돈을 손에 쥐고, 돌아오는 길에 드디어 술객을 찾아 가게 되었습니다. 100냥을 내고 한마디를 들었는데 그 한 마디가 "려즉포복(麗卽葡伏) 즉 예쁘면 기어라" 이었습니다.
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 장사꾼이 "도대체 무슨 말이오"하고 물었더니 그 술객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지라, 100냥을 더 내라는 눈치라 한 마디 더 듣자고 100냥을 더 내기는 아까운 지라 투덜거리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오랫동안 못 본 부인을 생각하며 집에 당도하니 아니 이게 웬일인가 예쁘게 분단장한 부인이 버선발로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허겁지겁 나오는 게 아닌가? 아니 내 마누라가 저렇게 어여뻤던가 생각하자, 어쩐지 그 낌새가 다른 날과는 다른지라 오늘 술객이 한 말이 언 뜻 떠올라 '예쁘면 기라' 했지. 그래 한번 기어 보자, 대문부터 기어가니 마루 밑에 숨어 있는 총각이 있는 게 아닌가, 불문곡직(不問曲直) 낫을 들고 나와 일을 저질렀는데 관아로 끌려간 장사꾼은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너는 어떻게 그 녀석이 마루 밑에 숨어 있는 것을 알았는가?" 사또의 추상같은 심문에 소상히 그 내력을 얘기할 수밖에, 사또 또한 신기한 마음이 들어서 그 술객을 불러 "네가 100냥을 더 내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고" 이에 술객 왈 "예, 인자유복(忍者有福)이라 일러 주려 했습니다. 복채란 점(占)을 보고 굿(㖌)을 하고 댓가로 내는 돈을 복채(卜債)라고 하는데, 맨입으로 보면 복이 달아난다고 하여 글자 그대로 복채(福債)라고 합니다.
2, 복채(卜債)와 헌금(獻金) 차이점
필자가 한 무속인과 대화중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복채(卜債)를 내는 손님의 모습이 천차만별(千差萬別)이라는 것입니다. 미리 준비한 봉투를 얌전히 내놓는 사람, 핸드백이나 지갑에서 돈(복채)을 꺼내면서 눈치를 살피는 사람, 여러 사람 봤으니까 깎아달라고 흥정하는 사람, 돈이 모자란다면서 외상 하자는 사람, 온 식구 사주(四柱)와 점(占)를 실컷 보고는 딸랑 한 사람 몫의 복채(卜債)를 내놓으면서 “내가 아는 사람 많으니까 손님 많이 소개 할 께요?” 라고 말하는 사람치고 손님을 데려오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람의 인격(人格)을 반영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필자가 교회를 시작했을 때 시골에 고향에서 어머님께서 교회 집사님이지만 오늘 교회 손님 많이 왔냐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즉 과거 무속적인 신앙에서 완전히 거듭나지 못한 모습이지요?
2004년도 한 조사 통계에 의하면 한국 기독교가 1년에 17조원을 헌금(獻金) 하고 있고, 무속신앙(巫俗信仰)인 무속(巫俗)인 역술(曆術)인들은 약 4조원 복채(卜債)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4조원의 명목을 보면 점(占)치고, 사주팔자(四柱八字)보고 내는 돈은 얼마 되지 않고 온통 부적(符籍)과 굿(㖌)(한(限); 살풀이)즉, 뭐든지 살이 끼어서 혹은 귀신(鬼神)의 해꼬지 때문이라고, 직장에 취업이 안되는 것도, 남편이 바람난 것도, 직장에서 짤린 것도, 자녀가 자꾸 대학에 낙방하는 것도 모두가 살이 끼고 혹은 귀신의 해꼬지. 조상귀신의 탓, 객귀(客鬼). 잡귀(雜鬼) 등등이 이유를 들여 “몇 백 만원, 몇 천 만원짜리 부적과, 굿을 해야 한다”고 해서 이것이 주 수입원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도 헌금(獻金)종류가 많다는 지적이 많이 있습니다. 부흥회도 순수한 목적보다도 헌금이 목적이 있다고 하는 생각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유명한 무당은 굿(㖌)판에서 복채(卜債)를 많이 걷는 것이 유명한 무당입니다. 스님도 마찬가지로 천도재, 불공에서 얼마나 염불을 슬프게 잘해서 저승 노자 돈을 많이 하게 하는 스님이 유명한 스님이라고 합니다. 한국교회도 그 범주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고 봅니다, 성경적 헌금은 시편 기자는 51: 12에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성경에서는 근본적(根本的)으로 우리의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존중해 주시며, 그 자유의지로 주님을 선택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금함으로서 주님을 섬기기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물질(物質)이 필요해서 우리에게 내어 놓으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행 17:25 말씀처럼 주님은 무엇이 부족하셔서 우리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헌금(獻金)생활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헌금(獻金)이 비판의 도마에 오르고 있는 이유는 헌금(獻金)제도 그 자체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헌금을 바르지 못하게 사용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헌금의 타당성(妥當性)을 증거 하는 말씀이 많이 나오며, 신약성경에서는 가난한 자의 구제를 위해 헌금이 쓰여 졌습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세인(世人)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이유 중에는 헌금을 드리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용 용도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구제(救濟)와 봉사(奉仕)에 쓰는 것에는 인색하면서 교회를 위해서는 너무 많이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헌금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강요(强要)나 조건적인 것은 성경적인 바른 헌금생활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4, 복채(卜債)(福債)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한국교회 헌금(獻金)에는 복채(헌금)와 같이 많으면 많을수록 많은 복(福)을 받을 것을 기대함도 무속신앙의 무당의 기능과 흡사합니다. 무속신앙의 “굿(㖌)판”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복채(卜債)가 뒤따릅니다. 그러므로 무당(巫堂) 굿은 거저 해주는 무당은 없습니다. 무당이 모신 신령은 많은 돈을 내놓아야만 굿을 잘해 줍니다. 교회 헌금은 감사의 뜻에서 기쁜 마음으로 부담이 없이 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복채(卜債)는 자기만 잘 봐 달라고 하는 뇌물(賂物)성 있는 댓가 성이 내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신도들의 헌금의 행태와 정서도 비슷하다고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교역자가 개인 개인 이름을 축원 해주기를 원하고 꼭 주보에 이름이 나와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복을 독점하려는 이기적 성향이 짙은 사람이라고 생각 합니다.
교회의 헌금(獻金)은 복채도 뇌물도 아닙니다. 기독교 복음의 중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없고 축복만 추구하는 것은 기독교의 참 모습이 아닙니다. 교회에 많은 것을 갖다 바지면 그 댓가로 현세의 복을 많 받는다고 조장하는 기복적 신앙은 옳지 않는 것입니다. 헌금은 억지로 권해서는 안되며 드리는 자의 자발성이 강조 되어야 합니다. 고후 9; 7에는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줄거 내는 자를 사랑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적 헌금의 정신이라고 생각 합니다. 성경에는 거저 받은 은혜, 거저 주고받는 신앙의 공동체 정신이, 샤머니즘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도들에게 되도록 많은 헌금을 요구하는 현상은 무속신앙(巫俗信仰)적인 가치관이나 행동양식과 유사하게 변질되어 가는 기독교문화의 성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재생목사/ 서울대현교회/ 불교 승려생활에서 개종
첫댓글 참으로 마음에 와닿는 말씀에 깊이 감사 드립니다
행복 하시고 건강 하시길 빕니다
댓글로 참여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댓글로 참여 감사드립니다.
좋은자료에 퍼갑니다.~~~감사합니다.
댓글로 참여 감사드립니다.
은혜의 자료 감사합니다.
자료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