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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평화교회
 
 
 
카페 게시글
기독 교리 연구 스크랩 교회의 사명(목적)
그리여 *_* 추천 0 조회 432 10.01.20 02: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사람이 무엇이 관대의 책중에서>

 

 

교회의 사명 (목적)


교회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하고 이제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 상고하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더 큰 은혜를 사모합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만물을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창조한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내가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신 주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  분명한 목적이 있었고 그 목적이 이끌어가는 교회에게는 그 목적에 맞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무엇인가?

예배? 복음전도? 성장? 배고픈 자들을 먹이는 것? 퇴폐와 비 윤리에 저항하는 것?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정체성이나 사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이보다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교회 출석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고 교회의 일꾼들은 성도를 돌보게 하려고 고용된 전문 교역자들인가? 교회의 성장은 교인수를 가리키는가? 교회다운 교회는 어떤 교회일가?

현대인은 자기취향에 맞는 교회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미국인들 중에는 교회에 다니는 이유를 자기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자기 마음의 평화와 정신적인 안정을 위하여, 내적 심리적 보상을 기대하고 교회에 다닌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C.S.루이스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교회를 찾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안락함을 느끼기 위해 종교를 원한다면 나는 결코 기독교를 권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분명한 사명의 종류는 예배(worship)와 전도(evangelism) 그리고 교육(Didache, discipleship), 친교(Koynonia, fellowship), 봉사(Diakonia, ministry)로 나눌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특징은 이 5가지 측면을 잘 조화하여 균형 잡힌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릭 워렌 목사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5가지 목적을 위대한 계명과 위대한 명령에서 찾았습니다.

위대한 계명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6_40)--예배와 섬김(봉사).

위대한 명령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전도와 교제와 훈련.



1. 예배의 사명.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1:11).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힘써 그 이름을 높이세”(시34:3).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4:10).

예배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던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는 것은 교회의 영광입니다. 예배시간은 이 땅에서 드릴 수 있는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사랑입니다. 엡1:5-6절 에는 죄인 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케 하려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배의 의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서 사람 측에서 보면 사랑과 순종의 결단입니다. 이는 의무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원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설교와 찬송, 기도와 헌금, 그리고 축도와 성례전 등을 그 요소로 하여 하나님과 만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감사드리며 성령님과의 교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면서 선포되는 말씀을 예배 자들이 듣고 그 말씀에 아멘하며 그 말씀대로 살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말씀이 선포되어질 때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사건이 현재적으로 체험되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 선포는 죄인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이므로 이 예배는 교회의 첫째 사명인 것입니다.

이 말씀 선포는 순수한 말씀으로 순도가 높을수록 좋으며 성경적 테마를 가져야하는 것은 필수적이고 듣는 사람에게 필요한 영양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듣는 사람들의 문제와 관심을 알아야 맛을 낼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전할 때 말과 얼굴과 건물과 환경등 분위기가 중요합니다. 오디오지역과 비디오지역은 다르게 표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 선포는 학문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모든 요소는 모두가 하나님께 드리는 순서로서 모두가 동일하게 중요합니다. 예배에 대하여는 다시 논할 것 입니다.



2.  전도의 사명


복된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교회에 분명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는 영혼 구원하심과 그 구원받아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 또 다른 교회로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온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찬양하며 영광 돌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주의 제자들을 향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을 기다리라.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행1:4). 교회는 주님 말씀대로 모여 힘을 다하여 합심기도를 계속하였습니다(행1:14). 오순절 날에 교회안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몇날이 못되어 약속하신데로 전무후무한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처음 경험하는 성령의 충만이 성령의 세례로 나타났으며 16개국에서 모인 디아스포라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방언은 복음 증거였습니다. 십자가의 승리와 부활의 승리를 땅 끝까지 전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큰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큰일은 주님의 마지막 支上명령(the great commission) 즉 증인으로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탄생하면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하신 주님께서 성령 충만을 주시고는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1:8). 베드로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 충만으로 복음을 전할 때  완고한 유대인 3000명이 회개하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히브리 민족을 선택하셔서 특별히 훈련시키시고 사랑하시면서 복의 근원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민의식에만 빠져있었고 하나님의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자 상징적으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마르게 하셨고, 부활하셔서 이방을 향한 전도를 명령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일(행2:11)입니다.


선교는 교회의 사명이며 존재 이유입니다. 선교를 논할 때 예수님처럼 포괄적으로 접근하여야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 나라의 주권적 통치가 우주적 영역으로 시행될 것을 목표로 선교를 말하고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선교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수직적인 관계와 수평적인 관계를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John R.W.Stott)는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은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행하는 복음 활동과 사회활동을 다 포함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세계속의 기독교적 봉사로서 복음전도와 사회활동을 포함하는 이 넒은 의미의 선교에 대한 개념을 받아 수용한다면 즉 우리 주님의 지상 선교를 모델로 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선교관을 가진다면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위한 복음 활동과 사회활동으로서 보다 큰 영향, 우리의 수적 능력과 또한 그리스도의 위임의 엄청난 요구에 상응하는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지상명령 즉 선교는 포괄적인 사역입니다.




전도와 선교


1966년 제네바에서 열린 '교회와 사회에 대한 세계회의'에서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결론으로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 즉 억눌린 자들을 해방시키는 일을 추진하는 것이 사명이다 고 천명하였습니다. 1973년 '8차 세계 선교 대회'에서 선교는 "오늘의 구원" 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선교(mission)와 전도(evangelism)의 차이


Mission은 라틴어 mitto에서 유래되었는데 그 의미는 <보낸다, 파송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헬라어 아포스텔로(신약에서 135회)와 펨포(80회)에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선교란 그리스도께서 복음전파와 그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그의 백성들에게 포괄적 임무를 부여하여 파송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Evangelism은 신약성경의 원어에서 유앙게리조(막1:15,행21:8,딤후4:5,엡4:11)로 사용하였고 그 뜻은 '나는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케루소(마4:23)는 '나는 전파한다'는 뜻이며 디다스코(마9:35)는 '나는 가르친다'는 뜻이며 말투스(행1:8)는 '증인'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마데테스(마28:19)는 '제자'라는 뜻입니다. 제자(마28:19), 그리스도를 증거함(행1:8), 사람을 낚음(막1:17), 세상의 소금이 됨(마5:13), 세상의 빛이 됨(마5;14), 열매 맺음(요15:8), 그리스도의 향기됨(고후2:15), 화해의 사역(고후5:18-21),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전파(벧전2;9-10)등으로 복음전도의 뜻으로 넓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전도와 선교는 처음에는 같은 뜻으로 사용하였으나 그 후에 지리적, 신학적, 문화적으로  구분하였으며 본국이냐 타국이냐, 불신자와 맹목적인 교인이냐, 미전도 지역이냐 미전도 종족이냐, 동일문화권이냐 타문화권이냐 로 구분하였습니다.


교회의 포괄적 사역으로 선교를 이해할 때, 복음만 전하는 것을 전도라고 하고 복음과 교육, 봉사, 구제, 의료등이 같이 사역되는 것을 선교라고 구분하는 것이 가장 잘된 구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도는 선교의 핵심적 요소이며 선교는 복음전도를 뛰어넘어 더 깊은 개념인 하나님 나라의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역은 지역, 문화, 신학적 구분이 없이 포괄적인 선교를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선교는 교회가 행하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공적으로 전도하기 위하여 교회는 영적인 교회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마귀의 목적은 교회가 성령을 소멸하도록 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데 슬프게도 그것이 먹혀들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인간적으로 체면과 예절에 따라 고정관념과 습관과 형식으로 매끄럽게 행하면서도 생명이 없고 따뜻함이 없으며 능력이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성공적으로 선교하기 위하여 교회는 불신자, 이방인들을 노엽게 해서는 안 되며(고10:23), 예배가 건전하고 질서가 있어야하며(고14:23), 증인들이 선행을 해야 하며(벧전2:15), 정직해야하고(살전 4:12), 지혜롭게 처신해야하며(골4:5), 세상 사람들에게 선한 증거를 얻어야한다(딤전3:7)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선교의 목적


개혁주의 신학에서 선교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선교의 포괄적인 목적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목표가 교회의 설립(마16:18, 엡1:13, 2:21-22, 골3:11)입니다. 또한 이방의 회심(골1;13, 고후5:17)입니다. 성도들의 다양한 섬김과 봉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도록 하는 데 선교의 목적이 있습니다.



선교의 동력


선교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며 교회는 수종을 들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선교를 하므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됩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12:30,눅11:2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교를 등한히 하는 교회는 쇠약해지며 내적인 불화로 붕괴될 것입니다. 전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지 내가 했다고 생색낼 것이 못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며'(고전2:4).


선교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끊을 수 없는 사랑, 주권적 사랑, 희생적 사랑, 구원적 사랑, 보편적 사랑에 대한 확신이 선교로 표명되어야 합니다.


예레미야 같이 불붙는 마음으로 선교해야 합니다(렘20:9).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 같아 전한다고 했습니다(고전9:16).


선교의 동기는 순수한 동기와 불순한 동기가 있습니다.

순수한 동기들은 영광의 동기(the doxological motive)와 순종의 동기(the obedience motive), 사랑과 자비와 동정의 동기(the motive of love,mercy,pity)와 하나님 나라의 동기(the Kingdom motive), 종말로적 동기(the eschatological motive)와 교회론적 동기(the ecclesiological motive), 서두름의 동기(the motive of haste)와 개인적 동기(the personal motive)를 들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선교의 동기가 사랑과 자비와 동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후5:14).


불순한동기는 제국주의(imperialism)와 문화적 동기(the cultural motive), 상업적 동기(the commercial motive)와 식민주의동기(the motive of ecclesiastical colonialism), 낭만주의(romanticism)와 해방과 인도주의 동기(liberation and humanization as motives)를 들 수 있습니다.



선교의 도전 세력


그리스도를 미워했던 세상은 항상 선교하는 교회를 미워하게 마련입니다(계12:1-6).

인본주의 철학, 우상숭배, 이단이 교회에 침투하여 선교를 방해합니다(계2:6). 그리고 세상 행복의 유혹으로 인해 교회의 신앙이 변질되는 것이 선교의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폐쇄적 전통주의(계2:4), 인본주의로 변질(계2:20;계3:20), 타성적 형식주의(계3:17)가 오늘날 선교의 가장 큰 적입니다. 주님은 회개하고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 분별할 것을 경고하고 계십니다(계2:4,16,21;계3:3,18,19).





중동선교의 실제


이슬람과 무슬림의 정의


이슬람과 무슬림은 최근에 많이 듣는 용어입니다. 이슬람은 아랍어이며 평화 또는 순복을 뜻하고 종교적 이념과 신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슬람적이라고 할 때는 이념적이며 교리적인 차원을 가리킵니다. 무슬림 또는 모슬렘은 알라신에게 순복하는 사람을 의미하며 이슬람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무슬림적이라고 할 때는 무슬림들의 인식이나 경험등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스람교의 성장세


최근의 성장률이 지속된다면 이슬람이 2060년에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가 된다고 할만큼 성장세가 대단합니다. 현재는 예수를 인정하는 모든 기독교(천주교포함)인 수가 32.54% 를 차지하고 무슬림들이 21.09%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 증가율은 기독교가 1.43%이며 무슬림이 2.17%입니다. 이슬람이 20세기초에 12%이었으나 20세기말에 21%를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전 세계의 무슬림들의 80%이상이 결코 복음을 들어 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개신교 선교 인력의 2%만이 무슬림 가운데서 일하고 있습니다. 무슬림 대 개신교 선교사 비율은 백만명당 1명 꼴이라고 합니다. 힌두교인 대상 사역 선교사 수는 무슬림 대상 선교사 수보다 2배 이상이나 많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용기 있는 이들로 인하여 이슬람 지역의 성도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희소식이 있습니다. 이슬람 지도자들의 반대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슬림들은 복음에 반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풀러 신학교 선교대학원장 더들리 우드베리는 "우리는 오늘날 이전에는 결코 본적이 없는 큰 약진을 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선교운동의 세계화 현황


세계선교운동이 세계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선교 세력은 다문화 다국적입니다. 가장 많은 선교사를 해외에 파송한 국가는 아직도 미국이 1위입니다. 46,000명을 넘었고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미국에 복을 주시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다음으로 한국이 영국을 앞서서 10,000명 초과하여 해외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3번째가 브라질이고 4번째가 필리핀입니다. 그러나 이슬람은 더 강력하게 밀물처럼 밀려들고 있습니다.


무슬림과 테러


미국 뉴욕 멘하탄의 세계무역센타 쌍둥이 건물과 워싱턴의 국방성 건물 펜타곤이 동시 다발적으로 테러를 당하였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은 그들을 우리의 이준 열사, 안중근 의사 정도가 아니라 성전 순교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이 1948년 5월14일에 옛 땅인 팔레스타인 땅에 나라를 건설하였습니다. 미국은 매년 30억 달라(약4조원)의 예산을 이스라엘지원을 위하여 무조건적으로 편성하여 예산을 해마다 통과 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미국의 52번째 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 국회에서 통과 될 때마다 단 한번도 반대 의견이 없었다고 합니다.


무슬림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의 이복형인 이스마엘의 후손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삭의 후손임을 자랑하고 선민의식을 항상 가지고 다닙니다. 무슬림은 <알아끄사 사원>자리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받친 자리가 아니라 그의 장자 이스라멜을 바쳤던 곳이라고 주장합니다. 코란에는 이삭이 아니라 장자 이스마엘을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코란은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장자임을 크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르단 왕국의 고 후세인은 자신의 별장을 팔아 그 사원의 돔에 엄청난 량의 황금을 입혔으며 장자 집안임을 과시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사원자리가 그들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쳤던 자리요 솔로몬의 성전이 있던 자리요 스룹바벨과 헤롯왕이 성전을 재건한 자리임을 역사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로마 황제의 아들 디도장군에 의하여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이후 무슬림들에 의해서 <알 아끄사>라는 이름의 이슬람 사원이 세워진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 남은 벽 곧 통곡의 벽에서 통곡기도하면서 성전 재건의 꿈을 다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평화롭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무함마드는 AD700년경에 살았던 인물인데 이스마엘의 후예라는 그 열등의식이 그에게 전달된 것은 신구약성경 때문입니다.

이런 역사상황에서 미국이 예산 편성하여 이스라엘을 도우고 있으니 말리는 시누이처럼 더 미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국의 문명을 타락한 것으로 매도하며 자기들은 거룩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도우는 것도 성경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지도자는 돼지 대가리 앞에서 머리를 숙이며 엄숙해지는데 미국은 성경위에 손을 얹고 엄숙히 선서하는 나라입니다. 미국은 유대인들이 지배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무슬림은 이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종교적 충돌은 주님 오시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테러는 마치 북한 김정일이 핵무기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라고 한 것처럼 테러는 약한 무슬림들의 선택이요 과거처럼 코란의 전파를 위해 칼을 정당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동의 선교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과거의 선교에서 회심운동과 복음전도의 역사는 항상 문화와 세계관의 접촉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이라는 전통의 옷을 벗겨냄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개혁을 이루었고, 루터는 로마의 전통 문화의 옷을 벗기는 개혁으로 진정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데 일조를 했습니다. 현재는 서구화의 기독교 전통이 복음의 본질인양 왜곡되어 있는 서구식 기독교의 전통의 옷을 벗어야 중동에 진정한 선교가 이루어질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서구식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을 역사적으로 세대주의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세대주의자들은 이스라엘이 회복되면 가나안 땅 전부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유대인 성전을 재건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신약의 영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땅에 세워진 구약의 이스라엘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혁주의는 아브라함의 자손은 예수이후 예수를 믿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씀을 믿고 성경예언의 성취의 주인공은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교회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진 이후 부름 받은 땅은 가나안이 아니라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하나님 통치영역인 하나님 나라이며 하나님의 관심은 예루살렘에 새 성전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전 인 우리 속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인가 아닌가 이삭의 후예인가 이스마엘의 후손인가는 이제 중요하지 않는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약속대로 유업을 받을 자인 것입니다(갈3:28-29). 율법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르는 자들인 것입니다.

신약시대는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구원받을 때요 은혜의 날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재림 예수로 구원받아 그와 더불어 유다왕국을 이룰 것이라고 주장하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아랍계 팔레스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세대주의적 신학체계는 결코 용납될 수없고 혈과 육의 싸움을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세대주의자가 아니십니다. 세대주의적 신앙으로 접근한다면 선교는 요원한 것입니다.

중동의 선교는 그들의 세계관을 이해하는데서 출발해야합니다. 그들의 정신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구가 필요합니다. 그들의 신은 숙명적으로 살도록 인간을 방치하므로 <알라>는 인간의 현실적이고도 실제적인 삶에서 멀리 떨어져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에게는 진정한 자유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에 관심을 가지신 인격적인 하나님을 소개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절망적일 때 기도로 치유하시는 하나님, 나의 필요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한다면 그리고 선행으로 예수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갖도록 함으로 그리고 이슬람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 부분들을 지혜롭게 줌으로서 그들의 맹목적이고 전통적인 세계관의 패러다임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나라의 오랜 불교문화 세력 앞에 나타난 선교사들처럼 어쩌면 선교제한 지역이었던 우리나라의 상황과 흡사하게 대처한다면 가능하다고 봅니다.

선교사의 말에 의하면 이슬람은 낮은 종교적 믿음과 의식이 공존하고 있고 혼합주의 적인 현상은 거의 모든 무슬림 사회에서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선교 비젼이 존재합니다. 이슬람 안에도 복음만이 해결할 수 있는 수많은 질문들과 혼돈이 가득차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백성도 한 가족이 예수와 부처를 같이 믿으면 화가 온다고 하는 것처럼 수세기를 한 전통 속에서 살아온 사람은 누구나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이슬람은 더 심해서 가족이 버리고 그 사회가 버립니다. 그러나 믿는 자의 수는 늘어가고 있습니다. '메시아파 무슬림' 또는 '메시아 이사'(Isa the Messiah)를 따르는 무슬림 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들과 교류를 강화하여 그들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사역 보조를 단기 선교사들을 통하여 해야 하며 장기선교사를 통하여 한국에 정기적으로 초청하여 가르치고 지원하여야 할 것입니다.

테러가 난무하는 이 시대는 더 이상 안전지대가 없습니다. 지상낙원인 미국도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닙니다. 이슬람에 진짜 복음이 들어가지 않고 계속 알라신을 확장해 가도록 버려둔다면 앞으로의 세계는 더 큰 불안을 만들 것입니다. 선교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입니다. 우리가 선교명령에 순종만 한다면 이 문제도 해결해 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3. 교육(디다케:Didache)의 사명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8:29).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을 세우고, 교육하여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돕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영적으로 성숙(maturity)하도록 돕는 일은 교회의 큰 사명입니다.

교육과 양육은 교회에 주신 중요 사명입니다. 교회는 전도하여 새 가족으로 구성된 교인을 정성을 다해 교육과 양육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성도로 세우도록 계획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언행의 일치로 참된 교육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제자훈련(discipleship)은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미래지향적인 방법입니다.

위대한 교육자이셨던 예수님의 교육 과정은 소명-교육-제자화-파송-제자의 재생산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이 교육 과정을 그대로 수행해야 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 훈련받은 베드로를 보내실 때 베드로 자신을 닮은 사람을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도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제자로 훈련되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예배자는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온전한 자는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주님의 목표와 표준인 위대한 계명과 위대한 명령을 순종하는 제자로 만들어진 것을 말합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참다운 기독교인이 되게 하기 위한 교육이 절실했습니다. 새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유대인이거나 이방인이거나를 무론하고 옛 삶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사람으로 살려고 할 때에는 일정한 기간 동안 교육을 받고 또 자기 삶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새롭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로 살 수 있는가의 여부는 주로 그들이 받는 교육이 얼마나 철저한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신실한 신앙을 가진 증거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가는 최초교회의 존속여부가 달려있었습니다.

교회가 예배와 전도만 있고 양육이 없다면 계속 유지될 수 없습니다.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Gemeinschaft mit Christus)이라는 단어를 평생에 걸친 성화의 과정에서 이룩해야 하는 과제라고 하였습니다.

옛 사람이 죽고(mortification), 새로운 생명에 참여하는 순간부터(vivification)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칼빈은 교회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로 초대하고, 그 연합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세워진 기관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 강요 초판에서부터 루터와는 다르게 ‘성화’가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칼빈은 인간이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사는 한 연약하고 미숙한 존재로 보았고  “infirmitas"(연약함, 부족함)는 그가 신자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단어가 되었습니다. 신자는 모두 부족하고 연약하여 도움이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연약한 인간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외적 수단으로 교회가 양육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교회 안에 ‘양육’은 주변적 문제가 아니라 핵심적 문제입니다. 칼빈은 가시적 교회를 ‘어머니’라고 정의함으로써 가시적 교회의 필요성이 신자를 잉태하고 양육하는 것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칼빈은 교회의 교육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양육하시는 통로이고, 교회를 움직이는 원인(causa efficiens)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교회의 교육은 인간 교사를 선택하지만 철저히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야하고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골1,29) 일 해야 하며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일해야 하며(고전 23,9),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인 것’을 믿는 믿음으로 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사람의 지성을 조명하고 심정을 새롭게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이 이 두가지 일의 일부라도 자기의 공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된다‘ 고 하였습니다.

칼빈은 설교가 하나님 말씀의 대언이요, 교육은 인간적 책임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설교뿐 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세운 사역자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가르치시는 하나님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가르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부패되지 않도록, 선한 지체가 악한 지체로 인하여 타락하지 않도록 그리고 잘못된 자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하기 위함도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시행되는 모든 교육의 프로그램과 교육 방법은 예수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나님의 주권에 맡겨야 합니다. 피교육자에게 좋은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으며 반대로 자만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셀교회론에서 셀 그룹과 성경교육과 훈련을 두 기둥으로 보고 있습니다. 만약에 정규적이고도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성경교육과 훈련을 가볍게 생각한다면 셀 그룹의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실패할 것입니다. 교육은 양육으로 양육은 훈련으로 훈련은 전도와 선교로 선교는 순교로 연결되는데 주저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4. 친교(코이노니아:Koinonia)의 사명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5).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3:1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5). '우리가 보고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요한1서 1:3).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친교는 교회의 필수가 된 것입니다. 코이노니아(Koinonia)의 본래적 뜻은 어떤 물건을 공동으로 나누어 가진다든지, 경험을 서로 공유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성도가 그리스도와 성령과 관계를 가짐을 뜻하며, 성도와 성도끼리 서로 사랑의 교제를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친교는 수직적인 관계와 수평적인 관계를 종합한 표현입니다.

예수를 중심으로 한 관계이며, 기술적 사회적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만약 교회에서의 친교가 인간적 사귐의 차원에서만 머무른다면 그것은 올바른 의미의 친교로

볼 수 없습니다. 셀 교회론에서 중요시 하는 셀그룹은 친교의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교회는 분명 하나님의 집이며 그렇기 때문에 교인들 간에는 서로 형제자매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 실체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과 같은 관계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입니다. 성도는 가족관계를 실질적으로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셀교회의 셀그룹은 중요한 교회의 프로그램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너무 치중하여 교육과 양육과 훈련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5. 봉사(디아코니아:Diakonia)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봉사하라"(벧전4:10).


주님의 성육신 사건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헌신과 봉사와 섬김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 은혜에 참예한 성도들은 의무나 부득이 하는 봉사가 아니라 속죄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세로 보답하는 자세로 하는 봉사입니다. '디아코니아'(Diakonia)는 식탁에서 일을 도우며 봉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의 가야할 삶의 근본적인 방향과 교회가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일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말로 사용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실제로 교회를 위하여 이러한 봉사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함이라'

주님은 일생 동안 세상을 섬기며 봉사적 직무를 다 하셨습니다.


교회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는 훈련을 통하여 서로를 섬기며,

교회는 선교를 통하여 세계를 섬기는 것입니다.






1) 봉사의 본질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면 봉사의 본질은 사랑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속죄양이 되셔서 친히 고난과 죽음의 자원봉사를 우리에게 아끼지 않으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의 동기 때문입니다(요3:16). 사랑의 외적 표현이 봉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처럼 봉사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셨습니다(요13:34). 모든 봉사의 동기가 사랑에 근거한 봉사 이어야지, 의무감이나 공로로 하는 봉사는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봉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순종한 것 이외 자신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 희생이 오직 우리를 위해 하신 섬김이었습니다.



2) 그리스도의 성육신 원리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과 동일 본질 이시면서도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는 내용이 성육신(成肉身)의 진리입니다(빌2:6,7). 창조주께서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다는 것입니다(요1:14).

높은 신분의 포기, 기득권의 포기, 자기희생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황금만능주의(mammonism)가 성도들의 삶 속에 까지 침투되어 불평등의 유혹에 빠져있으며 가난한 자를 멸시하고 영혼의 문제보다 물질의 풍요와 안락을 더욱 중요시 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 가고 있습니다. 교회에도 영성보다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아무리 신앙을 가지고 살아도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이 있어야 교회에서도 행세를 하고 무시를 당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가난한 자와 객의 하나님(레 23:22)이 기대하시는 믿음이 아닙니다. 가난하든 부하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사람은 그들을 지으신 자를 멸시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잠 14:31).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봉사할 때 자기가 가진 것의 한 부분을 조금 떼어 주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봉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모든 우월감과 자존심이 사라지고 우리 자신이 그들과 똑같이 되어

그들과 하나 된 모습으로 행동하는 것, 그런 봉사의 모습을 원하십니다.

진정한 봉사는 성육신의 봉사이며, 성육신의 원리에 기초한 봉사가 되어야 합니다.




3)  봉사 원리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12).

교회의 질서는 지배를 위한 질서가 아니라 봉사를 위한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많이 섬기는 자가 큰 자이며 종으로 봉사하는 자가 으뜸 된 자입니다(막10:43,44). 마가의 복음서 주제는 이 세상을 향하여 종으로 오신 그리스도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여호와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고난 속에서 성취되었다는 점입니다. 성육신의 종, 십자가의 종, 고난의 종은 고난과 죽음을 받아야 할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고난을 받았고 죽으신 완전한 봉사를 행하신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교회는 하나님과 자신과 이웃, 그리고 국가에 대하여 제사장으로 봉사할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4) 봉사의 동력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이 그의 사도로서의 봉사 동력이 <하나님의 은혜>에 있었다고 고백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모든 봉사 능력의 원천도 오직 은혜 안에서 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일생을 '봉사의 삶'으로 이끌어 가는 요인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감격과 감사‘ 때문입니다.



5) 봉사의 방법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마6:3,4).

개인 봉사의 방법은 은밀하게 하는 방법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개인 이름이 아닌 교회 이름으로 하는 것은 공개적으로 해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자기 이름을 낼 수없으며 익명적 헌신과 봉사가 십자가의 봉사입니다. 직분을 얻기 위하여 명예를 위하여 자기를 광고하기 위하여 그리고 일회용 행사로 감사패 사진찍기 자랑하기 등은 세속화된 증거이며 주님이 말씀하시는 봉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것은 봉사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봉사의 방법은 은사를 따라 해야 합니다(벧전4:10). 은사를 따라 하되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봉사는 상대의 인격을 존중히 하며, 그의 이익을 위하여 하는 것이니 겸손하게 복음을 전한 바울과 같이 해야 합니다. 바리새인처럼 종교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소개하신 사마리아 사람처럼 생활종교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봉사의 방법은 온 삶을 통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롬12:1). 그리스도인의 삶은 봉사의 삶이기 때문에 그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산제사 즉 영적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6) 봉사하는 자의 받을 상급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12:26).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14:18).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며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주님이 목자가 되어주시는 영원한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계7:15-17).




7) 교회 봉사에 관한 정리


교회본질 회복 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교회의 봉사가 단순한 사회봉사나 구제가 아니라 성경적인 세계관에 기초한 주님의 사랑을 지역사회에 증거하고 전인적인 섬김을 통해 지역을 제자 삼는 교회본질 회복 운동입니다.


봉사의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행하는 봉사는 교만으로 진행될 우려가 많습니다. 진정한 참된 섬김은 기분이 섬김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섬김이 기분을 훈련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자기 의의 섬김은 남을 이용하는 자기 영광 중심이지만 참된 섬김은 공동체를 튼튼하게 만들어 줍니다. 섬김의 훈련을 체험하지 않고 섬김의 기술을 익힌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봉사 정신을 그대로 승계한 것이므로 교회의 모든 봉사 활동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가능합니다. 교회의 봉사가 다른 봉사와 차이가 있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봉사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집니다.

봉사를 하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므로 성도가 봉사하는 것은 하나님께 사랑으로 응답하는 결과가 되며 순종하는 결과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과 물질과 감사를 다해 사랑 하며 봉사해야하고

동시에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마음과 물질로 봉사해야 하고, 우리를 세상에 거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빛과 소금으로 사회에 대한 봉사 역시 성실하게 수행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봉사 행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예산의 30%·70% 이상을 전도와 선교와 구제에 사용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 예산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외부로 표현될 때 교회는 부흥하게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골1:18,24), 산업이요(시28:9), 빛이며(마5:14), 향기이며(고후2:15) 편지이기 때문입니다(고후3:3).




사람이 무엇이 관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일 먼저 찾으신 것은 교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셨으며 제자 외에 만나는 일은 하나님의 계획에 없었습니다. 교회를 세우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관심이 가장 많았고 교회를 찾으시되 여러 번 찾아오셔서 부활을 확인 시켜 주셨습니다. 처음 만남이 시작되었던 디베랴 바닷가에 찾아오셔서 실망한 제자들에게 평소와 같이 잡은 고기를 구워 드시면서 대화를 나누며 부활체를 보여주심으로 그들에게 확신을 심어 주셨습니다. 교회 속으로 오셔서 부활을 재확인 시켜주시고 그들과 교제를 나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도망하고 부인하던 그 행위를 질책하지 아니하심으로 용서하시고 그들을 회복시키시는 봉사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가장 필요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 없는 예배, 사랑 없는 교제, 사랑 없는 교육, 사랑 없는 섬김, 사랑 없는 선교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사랑으로 시작하고 사랑으로 마무리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는 말씀은 교회 사명의 원리를 제시해주신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먹이고 치는 것이며 증인으로서 땅 끝까지 선교하는 것임을 마지막 까지 가르치셨습니다.


교회는 카리스마적인 인물이나 인간적인 지식과 능력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받아 세워지는 수동적 조직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질문하시고 사명을 주신 그 질문과 위대한 명령이 교회를 지탱하게 하고 확장시키게 하는 것입니다. 이점을 명심하도록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디베랴 바다까지 찾아오셨고, 최고의 관심사가 교회의 원리와 사명이었습니다.


교회사에서 교회의 부흥 운동은 성령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 곧 위대한 성령의 권능과 놀라운 경험과 순종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백년도 못되어 교리등 논쟁하는데 모든 시간을 낭비하고 지성의 문제만 남고 사명을 잃어버리자 무미건조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 그들은 그것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그것을 화제로 삼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주님을 만난 교회는 복음전파와 교육, 전도와 선교 그리고 봉사와 친교에 균형을 잡고 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칭찬받는 교회가 됩니다.


교회에 주신 사명 즉 주님의 멍에는 쉽고 가벼운 것입니다. 부담을 가져서는 아니 됩니다.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릴 수 있고 음부의 권세가 해하지 못하는 교회, 이 교회를 우리에게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성령님이 임재하신 영광스러운 예배 공동체,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랑으로 교제하는 공동체, 예수님의 비젼과 인격을 닮는 제자 공동체, 사랑으로 교회와 사회를 섬기는 공동체, 생명을 살리는 복음을 전파하는 축복의 공동체를 주셔서 찬양하며 천상의 생활을 지상에서 누리게 하신 은혜의 주님을 소리 높여 찬양합니다. 




(찬송가 249장)

주 사랑하는 자 다 찬송할 때에 그 보좌 앞에 둘러서 그 보좌 앞에 둘러서 큰 영광 돌리세

큰 영광 돌리세

주 믿지 않는 자 다 찬송 못하나 천부의 자녀 된자들 천부의 자녀된자들 그 기쁨 전하세

그 기쁨 전하세

저 하늘 황금길 나 이르기 전에 시온성 언덕 위에서 시온성 언덕 위에서 수많은 천사들

날 인도하리라

내 눈물 다 씻고 늘 찬송 부르리 저 임마누엘 주 앞에 저 임마누엘 주 앞에 나 영광 누리리

나 영광 누리리

[후렴]

저 밝고도 묘한 시온성 향하여 가세 내 주의 찬란한 성에 찬송하며 올라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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