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6월 14일(금) 금요법회
금강경공부(제11 무위복숭분, 제12 존중정교분) 강의안
차례
1) 금강경법문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금강경의 죽비
2) 경전본문 - 번역(조계종 표준금강경)
3) 나제가의 경(잡아함경) - 깨달음의 즐거움
4) 백봉선생님의 강송
5) 야부(冶父)선사의 게송
1) 금강경법문 - 지금까지의 줄거리와 금강경의 죽비
부처님은 늘 밖에서 명상을 하시며 새벽에 잠깐 주무십니다. 오전 11시쯤에 탁발을 하십니다. 하루 한 끼를 드시는 부처님은 일곱 집을 들러 밥을 비시고는 정사에 돌아와 공양을 하시고는 발을 씻으시고 앉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제자들과 법담을 하거나 선정에 드십니다. 금강경은 이처럼 부처님의 여여한 일상을 보여줍니다. 여여한 모습은 사람에 따라 달리 보입니다.(제1 법회인유분)
수보리 장로는 부처님의 일상을 보며 찬탄합니다. ‘부처님은 모든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를 늘 보호하시며 격려하신다. 수행자의 최고의 가치는 일체 중생을 깨달음의 행복한 세계로 이끄는 것이다.’ 이어 수보리 장로는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일체 중생을 제도하여 열반으로 이끌려는 큰 원을 세운 보살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며, 어떻게 살아야합니까?’(제2 선현기청분)
부처님은 중생을 제도할 큰 원을 세운 보살은 먼저 수많은 중생을 제도해도 한 사람도 제도한 중생이 없다고 알아야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내가 중생을 제도한다거나 그 덕으로 다음 생에 좋은 집안에 태어나거나 수명이 다음 생으로 계속 이어지리라고 생각하면 깨달음에 들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제3 대승정종분)
수보리 장로가 금강경에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수보리는 늘 화평한 모습을 지켰으며 고요한 곳에 머물러 사람들에게 환희심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부자와 귀족들이 보시를 많이 했습니다. 이 점에서 수보리 장로는 가난한 사람에게 보시를 받은 가섭존자와 다릅니다. 그런 수보리에게 부처님이 이렇게 법문을 하시자, 수보리는 보시의 복덕으로 하늘에 태어나거나 다음 생에 좋은 집안에 태어나는 것은 당연한 인과가 아닌가 라고 의심을 합니다. 회의에 잠겨있는 수보리에게 부처님은 빛깔 소리 냄새 등에 마음을 두고 과보를 기대하는 보시는 집착을 일으키는 보시이다, 그래서 일체 모양에 머물지 않는 허공 같은 보시를 하라고 가르칩니다.(제4 묘행무주분)
그러자 수보리는 부처님이 얻는 최고의 복덕상인 32상도 과거 수많은 생에 걸쳐 몸과 재산을 모두 보시한 과보로 얻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32상은 모두 허망한 것이라고 말하며, 32상이 아닌 것으로 여래를 보아야 진짜 여래를 본다고 법문합니다.(제5 여리실견분)
부처님의 말씀에 놀란 수보리는 미래의 중생이 과연 이런 말씀을 믿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모든 중생은 32상으로 부처님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미래 중생이라도 계를 지키고 올바로 복을 지은 중생은 부처님의 법을 배우더라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내가 있다는 생각, 개아가 있다는 생각, 중생이 있다는 생각, 영혼이 있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 심지어 부처님의 법까지도 방편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을 일으키면 올바른 수행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불법은 모두 깨달음을 위한 방편이니 깨달음을 얻으면 모두 버리라고 강조합니다.(제6 정신희유분)
수보리 장로는 불법을 닦아서 얻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부처님의 법은 무엇을 얻는다고 정한 것이 없는 법이다, 그래서 성인과 현자는 모두 번뇌를 떠난 무위법을 얻은 것이다, 아상 인상 중생상의 업을 짓는 유위법과는 다르다’고 말씀합니다. 수행자가 부처님의 법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불법의 성격과 본질을 밝히고 있습니다. 모습놀이로 복을 짓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벼락같은 법문입니다.(제7 무득무설분)
부처님은 복덕도 그 성품이 없다고 말씀하시며, 이 금강경법문이야말로 모든 부처님의 깨달음이 나오는 근본경전이라고 강조합니다. 수행이나 복을 짓되 모습놀이에만 빠져있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문이기 때문입니다. (제8 의법출생분)
부처님은 모습놀이로 수행하는 사람에게 참다운 수행이 무엇인지 설법합니다. 참다운 수행은 공(空)도리를 떠나지 않는 수행입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까지 어떤 성인도 ‘내가 무엇을 얻었다’는 생각을 가지면 모두 유위법이라고 말씀합니다. 수보리도 부처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비록 부처님이 자기를 ‘수보리가 아라한도를 얻어 무쟁삼매를 얻었다’고 칭찬하시지만, 정작 자신은 무엇을 얻었다는 생각에 머물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제9 일상무상분)
제9 일상무상분에서 모든 수행자의 경지가 공(空)한 도리를 말했으니, 이제는 일반 보살들에게 말할 차례입니다. 일반 보살들은 탑과 절을 장엄하면서 화려하게 할수록 자신이 받는 과보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이런 생각이 보살들을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끌어 줄까요? 제10 장엄정토분에서는 이런 재가자의 미망을 다루고 있습니다. 즉 부처님 당신이 전생에 수많은 부처님들께 공양하며 부처님의 수기를 받았지만, 한 번도 큰 복을 얻은 바가 없었으며, 빛깔 소리 냄새에 집착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의 세계를 장엄하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장엄에 집착하는 마음이 있는 한, 공도리를 얻지 못하니 모두 오염된 마음입니다. (제10 장엄정토분)
금강경은 이렇게 수행하는 수행자나 장엄을 하는 보살들에게 벼락같은 법문을 하였습니다. 이제 수행자와 보살이 나아가야할 진정한 불도의 길은 무엇일까요? 부처님의 제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디에 머물려야 할까요?
오늘 공부하는 제11 무위복승분에서 우리는 부처님의 답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참다운 복덕이라고 말씀합니다. 장엄복덕을 지어 미래의 과보를 구하는 것은 해탈의 길과는 멀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복덕을 구하는 마음은 탐진치와 다름이 없습니다. 빛깔과 소리로서는 부처님을 볼 수 없다는 금강경의 게송이 비록 작은 시 한 구절에 불과하지만, 이 구절이 해탈을 이끌어 주기 때문에 이 구절을 외우는 것이 모든 수행의 표준입니다. (제11 무위복승분)
부처님의 혜명을 이어가는 길은 곧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올바른 가르침이 있는 곳이 부처님을 예배하는 진실한 곳이며, 모든 탑을 짓는 공덕보다 높습니다. 진정한 부처님과 제자들이 계신 곳은 형상을 새긴 탑이 아니라, 공도리가 살아 있는 곳입니다.(제12 존중정교분)
이렇게 수행자와 보살을 공도리로 모두 깨우치고 나서 부처님은 이 경의 이름을 금강경이라고 밝히며 지금까지의 설법을 모두 마무리합니다.(제13 여법수지분)
금강경은 말법시대의 불자들을 위해 출가자와 재가자의 잘못된 수행이나 신행을 일깨워 줍니다. 그래서 특히 이 금강경 11, 12분은 가장 들어가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야말로 불자들의 교만과 자만을 깨는 천둥이자 벼락이기 때문입니다. 이 천둥과 벼락은 일체만법이 공(空)한 도리입니다. 그러나 공도리는 지식이나 관념이 아니라 자신의 뿌리깊은 분별을 보고 참회할 때 그 수행의 깊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2) 경전본문 - 한역원문, 번역(조계종 표준금강경)
제11 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 - 무위법이 수승함)
“수보리여! 항하의 모래 수 만큼 항하가 있다면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이 모든 항하의 모래 수는 진정 많다고 하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항하들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하물며 그것의 모래이겠습니까?”
수보리여! 내가 지금 진실한 말로 그대에게 말한다. 선남자 선여인이 그 항하 모래 수만큼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 보시 한다면 그 복덕이 많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의 사구게만이라도 받고 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 준다면 이 복이 저 복보다 더 뛰어나다”
제 12 존중정교분(尊重正敎分 - 바른 가르침을 존중함)
“또한 수보리여! 이 경의 사구게만이라도 설해지는 곳곳마다 어디든지 모든 세상의 천신, 인간, 아수라가 마땅히 공양할 부처님의 탑묘임을 알아야 한다. 하물며 이 경 전체를 받고 지니고 읽고 외우는 사람이랴!
수보리여! 이 사람은 가장 높고 가장 경이로운 법을 성취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경전이 있는 곳은 부처님과 존경받는 제자들이 계시는 곳이다.”
3) 나제가의 경
어느 때 부처님께서 구살라(꼬살라)국 세간을 유람하시다가 일사능가라라고 하는 숲 속에 머무시고 계셨다. 그때 존자 나제가는 옛날부터 일사능가라 마을에 살아왔다.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사문과 바라문들은 사문 고따마께서 일사능가라 숲 속에 머물러 계신다는 말을 듣고는, 제각기 밥 한 솥을 마련해 문 앞에 놓고 이렇게 생각하였다.
‘내가 먼저 세존께 공양하리라.’
제각기 큰소리로 이렇게 외쳐댔다.
그때 세존께서 동산 숲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큰소리로 떠드는 것을 들으시고 존자 나제가에게 말씀하셨다.
“무슨 일로 동산 숲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큰소리로 저렇게 떠들어대느냐?”
존자 나제가가 부처님께 대답했다.
“세존이시여, 이 일사능가라 마을의 모든 찰리(끄샤뜨리야)와 바라문과 장자들이 제각기 한 솥의 밥을 지어 동산 숲 속에 가져다놓고 저마다 ‘내가 먼저 세존께 공양하리라.’고 하며 외치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세존께서는 저들의 밥을 받아주소서.”
부처님께서 나제가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이롭게 하려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이익을 구하지 않는다. 나를 칭찬하려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칭찬을 바라지 않는다. 나제가야, 만일 여래처럼 멀리 벗어남․고요함․깨달음의 즐거움을 얻었다면, 어떻게 그런 곳에서 생기는 즐거움을 맛보거나 구하려 하겠느냐?”
-『잡아함경』 제47권 나제가경(요약), 동국역경원
4) 백봉선생님의 강송
제 11. 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
항하(恒河)는 히말라야산으로부터 발원하여 인도의 북동쪽으로 흐르는 강물의 이름이란다. 그 하류의 연변에는 가는 모래가 많다는데 부처님은 항상 이 모래로 비유를 드셨다. 그런데 한 항하의 그 모래수도 무궁이라 하겠는데 이것도 오히려 모자라서 또 모래수와 같은 무진)한 항하의 그 모래수를 다시 드신 것은 한 성품 중에 무궁한 용법(用法)이 또다시 무진함을 드신 것이다. 이렇듯이 부처님의 말재주에 끌려든 붓은 앞을 다리니 무슨 까닭이냐. 법(法) 법(法)이 무궁무진하니 애오라지 다른 법이 없는 구나. 셈하여 가뭇도 없을 새 눈 앞에 한 법도 없는지라,
어즈버야! 허공으로 더불어서 아득할 뿐이로다. 이곳에서 모든 법을 끌어 잡아 보았던들 스스럼없는 본 고장의 풍광일러라. 붓을 돌려서, 모래수의 대계(大界)에 가득찬 칠보보시라도 마침내 유루(有漏) 곧 쇰인 복덕에 속하는 것이니 인천보(人天報)를 지어서 알맞은 쾌락을 누리어 봤든 생사업만은 못 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전에서 말씀하신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가져서 읽고 외우고 행하면 곧 보리도로서 이 바로가 자리이타를 겸한 무루(無漏) 곧 굄인 복덕을 이룸이니 어찌 생사업이 문제이겠는가. 이러므로 항하사수의 세계에 가득찬 칠보보시의 복덕인들 생사업을 쓸어내는 사구게(四句偈)의 공덕에 비교가 되겠느냐는 뜻이시다. 부처님은 어디까지라도 관념적이요 피동적이요 상대적인 유위 유상 유주(有住)인 곧 쇰인 복덕성은 실질적이요 부동적이요 절대적인 무위(無爲)․무상(無相)․무주(無住)인 무루(無漏) 곧 굄인 복덕성과의 비교가 안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시는 바이다.
고금(古今)의 성현들은 출세간사에 속합니까?
아니다. 세인이 일컫는 대개의 성현이란 착상인물(着相人物)로서 상대성인 세간사에 속하는 것이 보통이지마는 오직 무상의(無相義)를 깨치시고 호올로 절대성인 출세간사에 우뚝하신 분은 무위진인(無位眞人)이신 세존이시며, 따라 그 어른의 제자로 선지식인 무심진인들이시다. 이렇듯이 부처님은 모든 성현의 조종으로 삼계에 뚜렷하시고 그 제자들이 또한 사해에 의젓하시니 어찌 유심군자(有心君子)인 성현의 견줄 바이며 따를 바이겠는가.
선지식을 어떻게 알아봅니까?
남의 글귀나 말귀를 찾아서 헤매지 않고 자신의 살림살이를 말아내느니, 그 얼굴 빛깔은 맑고 그 눈빛은 차갑고 그 말소리에는 뼈가 있느니라.
끝으로 대근(大根)은 사흘 안에, 중근(中根)은 석달 안에, 하근(下根)은 삼년 안에 견성을 한다시는 고인의 말씀인데 무슨 까닭에 일년도, 오년도, 평생을 통하여서도 스스로가 간직하고 있는 성품을 보지 못합니까?
사상산(四相山)에서 은애해(恩愛海)에 떨어진 몸인지라 무상의(無相義)인 허현묘도(虛玄妙道)의 의취를 어찌 깨쳐 알겠는가. 다겁래의 업장에 찌들인 중생의 분으로는 마땋히 선지식의 계오(啓悟)를 기다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만약에 선지식 밑에서 정혜를 닦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마다가 간직하고 있는 스스로의 성품을 밝혀내지 못하는 경우라면 이것은 어딘가에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실로 죽고 삶은 남의 일이 아니고, 나의 일이 분명한 것이니 학인들은 이 모순을 하루 속히 밝혀내고 길을 바로 잡아서 만고에 한됨이 없게 하여야 한다.
이 소식에 금과 놋쇠는 안 바꾼다.
진인(眞人) 일명(一名)을 살리기 위하여 가인(假人) 만명(萬名)을 죽여도 시비가 없다더라.
쉬! 봉구제일주의(封口第一主義)다.
三界是幻福亦幻 삼계시환복역환 本非實故幻將滅 본비실고환장멸
幻滅眞性一圓明 환멸진성일원명 屹然獨走乾坤外 흘연독주건곤외
삼계라서 곡두런가 복덕또한 곡두로다
본래참이 아니러니 곡둔창차 꺼질것이
곡두라서 꺼지며는 성품뚜렷 밝으리니
우뚝스리 홀로가리 하늘땅의 그밖으로
제12 존중정교분
인간으로서의 존중할 바가 성현이라면 성현의 조종이라 하지 않겠는가. 이러므로 이 경(經)은 불(佛)과 성현의 조종이 되는 바이라, 그 수승함을 좋이 말할 수가 없으니 실로 경전의 존중함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이럴진대 불과 성현의 조종이 경전이라면 그 경의 조종(祖宗)은 마땅히 누구일까?
자! 학인(學人)들은 한마디 일러라.
이 대목도 건성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드높은 관문이니 사나운 정진으로 돌파하라.
슬기로운 사람은 몸을 한번 굴려서 삼천대천세계의 앞소식을 바탕으로 하고 인생을 밝혀내는 것이니 인생의 앞소식을 바탕으로 하여서 피아(彼我)를 걷어내고, 피아의 앞소식을 바탕으로 하여서 범성(凡聖)을 걷어내고, 범성의 앞소식을 바탕으로 하여서 시비를 걷어내고, 시비의 앞소식을 바탕으로 하여서 정사(正邪)를 걷어내고, 정사(正邪)의 앞소식을 바탕으로 하여서 미오(迷悟)를 걷어내고, 미오의 앞소식을 바탕으로 하여서 생사를 걷어내고, 생사의 앞소식을 바탕으로 하여서 천당과 지옥을 걷어낸다.
되돌아 모든 법의 뿌리가 비었음을 알 제, 피아(彼我)는 가지런하면서 범성(凡聖)을 굴리고, 범성은 가지런하면서 시비를 굴리고, 시비는 가지런하면서 정사를 굴리고, 정사(正邪)는 가지런하면서 미오를 굴리고, 미오(迷悟)는 가지런하면서 생사를 굴리고, 생사는 가지런하면서 천당과 지옥을 굴리게 되는 것이니, 이 당처인 어느 곳에서 피아(彼我)가 둘이며 범성(凡聖)이 둘이며 시비(是非)가 둘이며 정사(正邪)가 둘이며 미오(迷悟)가 둘이며 생사가 둘이며 천당과 지옥이 둘임을 찾아내겠는가.
다만 이(理)와 사(事)가 일여(一如)인 본래의 소식처로서 이 바로가 용(用)을 끌어잡고 체(體)로 돌리면서 표리가 공전(共轉)하는 풍광이라 이르지 않겠는가.
이 소식에 흰 구름은 푸른 뫼에 걸치었네.
권서(卷舒)가 자재(自在)하니 군마(群魔)가 자복(自伏)이요,
강산(江山)에 봄이 드니 곳곳마다 잣나무네
白雲不離在靑山 백운불이재청산
淸平世界添一景 청평세계첨일경
侍經草堂瑞氣長 시경초당서기장
三寶幽然從此來 삼보유연종차래
흰구름은 무삼일로 푸른산을 안여의노
맑고밝은 이세계에 한경치를 더함이네
이경전을 모신집에 사기는왜 서리었노
하늘땅에 제일가는 삼보님이 온다시네
5) 야부선사의 게송
第十一 無爲福勝分(무위복이 수승함)
[경전]
“수보리여! 항하의 모래 수 만큼 항하가 있다면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이 모든 항하의 모래 수는 진정 많다고 하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항하들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하물며 그것의 모래이겠습니까?”
야부
前三三後三三이로다
앞도 셋셋 뒤도 셋셋이로다.
야부
一二三四數河沙여 沙等恒河數更多로다 算盡目前無一法하야사 方能靜處薩婆訶하리라
하나 둘 셋 넷 끝없는 항하(갠지스 강)의 모래수여
모래 수와 같은 항하의 수가 더욱 많다네.
세는 일이 다하여 눈앞에 한 법도 없어야
비로소 고요한 곳에서 일체지(一切智)를 얻으리.
[경전]
수보리여! 내가 지금 진실한 말로 그대에게 말한다. 선남자 선여인이 그 항하 모래 수만큼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 보시 한다면 그 복덕이 많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의 사구게만이라도 받고 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 준다면 이 복이 저 복보다 더 뛰어나다”
야부
眞鍮로 不換金이로다
놋쇠는 금과 바꿀 수 없다.
야부
入海算沙徒費力이라 區區未免走紅塵이니(紅은 一作埃라) 爭如運出家珍寶하야 枯木生花別是春가
바다에 들어가 모래를 세는 일 헛된 수고라
구구히 세어본들 갈팡질팡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리.
차라리 내 집안 귀한 보배 꺼내어
고목에 꽃을 피워 별다른 봄을 맞이함이 낫다오.
第十二 尊重正敎分(바른 가르침을 존중함)
[경전]
수보리여! 이 경의 사구게만이라도 설해지는 곳곳마다 어디든지 모든 세상의 천신, 인간, 아수라가 마땅히 공양할 모처님의 탑묘임을 알아야 한다. 하물며 이 경 전체를 받고 지니고 읽고 외우는 사람이랴!
수보리여! 이 사람은 가장 높고 가장 경이로운 법을 성취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경전이 있는 곳은 부처님과 존경받는 제자들이 계시는 곳이다.”
야부
合如是로다
마땅히 이치가 이와 같도다.
야부
似海之深이요 如山之固로다 左旋右轉에 不去不住로다 出窟金毛獅子兒가 全威哮吼衆狐疑로다
深思不動干戈處에 直攝天魔外道歸로다
바다같이 깊고 태산처럼 든든하며
왼쪽으로 돌리고 오른 쪽으로 굴려도 가지도 머물지도 않도다
굴 밖으로 걸어 나온 금빛 사자가
큰 기세와 우렁찬 포효로 뭇 여우같은 의심을 물리치도다
깊은 생각으로 무기를 들지 않는 곳에
천마와 외도가 그 품에 들어 모두 귀의한다오
첫댓글 오늘은 금강경 제11 무위복승분, 제12 존중정교분 경문을 읽고 그 속에 담긴 수행의 의미를 공부했습니다. 금강경 중에서도 제11분과 12분은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이 대목은 수행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자칫 뜻풀이나 당위적인 해석에 그치기 쉽습니다.
4) 백봉선생님의 강송과 5) 야부송은 다음 법회(6월 28일)에서 공부합니다.
진지하게 경청해주신 도반님들께 합장합니다.
금강경의 바른 대의를 설해주시는 여운거사님께 합장드립니다._()_
여래처럼 멀리 벗어남, 고요함, 깨달음의 즐거움을 얻도록 정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