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노래비 *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 삼학도 파도깊이 숨어드는데 /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
1930년대 가수
이난영씨가 불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노래 '목포의 눈물'이다. 1934년 조선일보사는 일제의 탄압으로 억눌려 있던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를
북돋우기 위한 문화사업의 하나로 향토 신민요 노래가사를 공모했는데, 목포 출신인 문일석씨의 가사가 당선되었고, 작곡가 손목인씨가 곡을 붙여
'목포의 눈물'노래가 탄생하게 되었다.
'목포의 눈물'은 음반이 출시되자마자 대히트를 기록하였으며 전국적으로 알려져 오늘날까지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부르는 대표적인 목포의 노래이다. 목포의 눈물 노래비는 바로 이 노래를 부른 목포 출신 가수 이난영씨와 작사가 문일석씨를
기념하기 위해, 1969년 예총 목포지부가 주관하여 세운 것으로 비의 높이는 211cm, 너비는 247cm이다.
* 목포의 상징,
유달산 *
유달산은 서울의 남산처럼 목포를 대표하는 상징이라 할 수 있어 목포를 처음 찾는 여행객이라면 꼭 한번 둘러보아야 하는 관광지라
하겠다. 목포의 눈물노래비는 바로 이 유달산중턱에 세워져 있다. 이곳에 오르면 푸른 바다에 둘러싸인 목포 시가지, 유달산의 수도하던 선비를
사모하던 세 처녀가 섬으로 변했다는 전설이 얽혀 있는 삼학도, 그리고 다도해의 절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저절로 목포의 눈물 노래 가락을
흥얼거리게 한다.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자리잡고 있는 유달산(해발 228m)은 전지역이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는 돌산이다. 소나무에 의해 조금 가려지기는 했지만, 유달산은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바위덩어리로 보이는데 산 입구에서부터 정상까지의 등산코스가 대부분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달산은 목포시민들이 즐겨찾는 곳으로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산 주변에는 2.7km의 유달산 일주도로가 개통되어 있어 접근하기에도 편리하다. 갖가지 모양의 기암괴석과 정자, 누각, 사찰 등이 산재해 있고, 산 아래에는 1만3,000여 평의 부지에 한국조각연구회 회원들의 작품 1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는 조각공원. 그리고 한국난, 동양난, 양난 등 250여 종의 난을 전시하고 있는 난 전시관 등이 있어 찾는 이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가을 문학예술기행의 목적지로 선택하기에 목포만큼 적합한 장소도 없을 것이다. 목포의 눈물 노래비 이외에도 목포에는
시원스레 펼쳐진 다도해의 절경을 배경으로 향토문화관, 박화성 문학기념관, 남농 기념관, 해양유물전시관 등 다양한 문화와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볼거리들이 풍성하기 때문이다. 목포의 눈물을 흥얼거리며 유달산 정상에 올라도 보고, 가을바다를 감상하며 예술인들의 숨결을 느껴 보고, 신선한
해물요리와 바닷가레스토랑에서의 커피한잔으로 여행을 마무리하는 것은 어떨까 추천해본다.
* 목포의 눈물, 이난영에 대하여
*
이난영 (본명 옥례)은 1916년 여름. 목포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양동의 초가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술주정과 가난에 시달리다 못한
어머니가 제주도로 가정부살이를 떠나버린 것은 그녀 나이 10세 무렵. 그 때부터 오빠가 다니는 솜공장(조선면화 공장)의일도 거들었다.
그러다가 북교 초등학교 4학년 때에 어머니가 계신 제주로 가게되어 학교도 중퇴했다. 엄마와 함께 제주도의 생활이 시작되고 극장을 경영하는 주인집의 아이를 돌보면서 흥얼거리는 노래소리를 높이 평가하게 된 집주인이 그녀를 소위 막간가수(영화나 연극이 시작 되기전 나와서 노래하는 가수)로 활동하게 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삼천리 가극단장의 권유로 특별 단원으로 채용된 것이 1932년 16세되던 해였다. 극단단원으로 일본 공연을 갔었으나 흥행에는 실패했다.우연히 OK레코드 이철 사장의 눈에 띄어 작곡가 손목인에게 소개되어 목포 출신문일석의 작사인 "목포의 눈물" 을 부르게 된것이 드디어 노래의 여왕 이난영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목포의 눈물은 이난영 특유의 목소리와 우리의 한이 서린가사로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이난영은 가수다. 목포 출생(1916년 6월 6일)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오빠(이봉룡)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오빠가 목포에서 운영하던 조그마한 악기점을 드나들며 노래에 흥미를 느꼈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마침 태양극단이 목포에 순회공연을 왔을 때 어머니와 오빠의 권유로 막간 무대에 나가 부른 노래 솜씨를 인정받아 입단하게 됐다. '난영'이란 예명은 단장 박승희가 지어 주었다.
데뷔곡으로 1933년 10월 선보인 '향수', 이듬해 11월 '불사조', '고적(孤寂)'이 거론된다. '불사조'에 이어 '과거몽', '홍등의 탄식', 신민요 '신강남'과 '밤의 언덕을 넘어', '봄맞이'로 인기를 이어갔다. 1934년 동경 히비야공회당에서 열린 전국 명가수 음악대회에 조선인으로 홀로 출전해 대갈채를 받았다.
이듬해인 1935년 그녀를 가요계의 샛별이자 여왕으로 떠 오르게한 '목포의 눈물'이 대중 앞에 나타났다. 그해 전국 가사모집에서 입선을 차지한 오빠의 친구 문일석의 가사에 손목인이 곡을 붙였다. 뒤이어 부른 '목포는 항구다(이봉룡 작곡)', '다방의 푸른 꿈(김해송 작곡)', '해조곡' 등으로 당대 최고의 가수가 됐다.
그런 그녀는 1965년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했다. 김해송과의 사이에 낳은 그녀의 딸들도 미국에서 김 씨스터즈, 김 보이스라는 이름으로 연예활동을 했다. 첫 무대인 1959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관객들을 사로 잡은 우리나라 걸그룹의 1세대다.
이난영을 있게 한 '목포의 눈물'은 지금도 전국민의 사랑을 받는 노래다. 우리 고유의 한(恨)을 품고 '비내리는 호남선'과 함께 호남의 한을 대변하기도 했다. 80, 90년대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의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응원가로 등장할 정도였다.
가수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을 기념하는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고 한다. 목포시가 유달산 중턱에 있는 목포의 눈물 노래비와 ‘마인계터로·보리마당 골목길·77계단과 송도골목길’을 하나로 묶는 목포골목길 등 2곳을 신규 문화유산 지정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시는 지난 6월 문화유산위원회를 개최해 2015년 하반기 조사에 대해 심의·가결하고, 신규 문화유산 조사 대상을 선정했다. ‘목포의 눈물 노래비’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 노래비다. 호남의 한에 더해 문화적 가치를 지닌 노래비의 문화유산 등재 추진은 의미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