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의 심각한 왜곡
권 녕 하 (시인, 문화평론가)
악법도 법이다?
소크라테스가 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위문(?)을 간 제자 등에게 “악법도 법이다.”라고 하며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앞두고 과연 그렇게 말을 했을까?
이런 의문점을 갖는 것은, 데카르트 스타일의 사치스런 생각 때문이 절대 아니다. 말[言]이란 것은, 말을 하다보면 전달자의 생각이 섞이고, 그 말을 듣고 또 전하는 과정에서 감정이 이입되곤 한다. 또한 글[文]로 기록하는 과정에서도 본질이 윤색되고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오류 중의 하나’라는 것을 이 글에서 적시한 것일 뿐이다.
고대 그리스의 인문학에도 물음표(?)와 느낌표(!)는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소크라테스가 한 말에 “악법도 법이다?”라고 조롱조가 섞여있었음에도, 이 말을 들은 제자 등이 ‘위대한 스승께서 그럴 리가?’ 하는 생각으로 대화를 이어갔다면, 그리하여 이 말을 듣고 전달하고 기록한 자와 옮긴 자들이 그 말을 마침표(.)로 인지했다면, 이는 인류사의 심각한 왜곡이 되고 만다. 이어서 그래∼ “악법도 법이니까 법이다!”라며 푸념과 탄식조로 말을 했다고 전했음에도, 이 말을 들은 통치자가 “그럼, 그렇지!”하며 ‘법치주의의 옹호’ 발언으로 용도변경(?)하여 적극 활용 했다면, 이를 이제 와서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할 것인가. 사람은 이미 죽고, 땡! 끝인데.
얼마 전, 가수 나훈아의 대중가요 〈테스형〉이 방송을 타며 울적한 민심을 긁어댄 일이 있다. 노래의 가사 내용은 소크라테스를 형이라고 부르며, 국민들에게 ‘또 독배를 받을 것인가’ 에둘러 묻고 있었다. 이런 판국에 부정선거 증거가 명약관화한 ‘투표용지에 관한 끔찍한 의혹’을 어느 법관이 ‘형상기억종이’라는 천재적인 발상으로 죽을 잘 쑤었다. 그런데 욕심을 너무 부린 해당 기관이 그 죽사발에 ‘공동체’의 억지를 다 끌어 담으려다가 땅바닥에 질질 흘리며 쏟고 말았다. 그 상황을 인지하게 된 백성들은 그 순간! ‘선거할 권리’가 서서히 ‘선거해야할 의무’로 변질되어 가는 기막힌 그림이 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그림은 마치 밀레의 〈만종〉같아 보였는데, (언제)저녁녘, (어디서)사방이 탁 트인 들판에서, (누가)농노로 보이는 부부가, (왜)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종소리를 듣고, 때가 됐음을 알고, (무엇을)불에 끄슬린 종이뭉치를, (어떻게)땅에 파묻는 광경이었다. 이런 상황의 결말은 늘∼ ‘목격자가 없’거나, ‘나서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가 보통이겠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방이 완벽하게 개방된 공간에서는, 감시자의 의심을 피하기 수월했을 것이고, 텅 빈 들판에 CCTV 같은 장비가 있을 리도 만무지만, 러프에 빠진 골프공도 식별해낸다는 저고도 위성은 이 순간도 놓치지 않고 보았을 것이다. 마치 신神의 눈처럼.
전생前生을 기억하는 물질
‘형상기억’이란 단어의 용도(?)를 법률용어로 활용(?)한 그 처지가 참! 어처구니없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 말이 품고 있는 진정한 매카니즘은 우주 전체에 특허등록해도 될 만큼 정신세계의 특허감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이를 지구에 사는 한국인이 인간세계에서 공식적으로 문서화(?) 했다는 점이다. 솔로몬을 불목하니로 삼아도 될 만큼 천재적 발상을 한 명판名判이 한국인이고, 문서작성을 ‘한글’로 21세기에 했다는 점을 꼭 주목해야 한다. 한편 훈민정음 창제를 어쩔 수없이 독식(?)하게 된 왕조 시대의 세종대왕처럼, 백성의 처지에서 생존(?)을 위한 법관의 순발력은 가히 메타버스 시대에도 능히 살아남을 정도로 기상천외한 요무령要務令이었음은 솔직히 인정해줘야 한다.
다시 말해, ‘우주적 정신세계의 특허감’이란 판단은 ‘형상기억종이’라는 명칭이 붙은 종이는 ‘투표용지’였고, 투표용지로 쓰임(?)을 받은 이 종이는 ‘과거를 기억하고 복원하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인데, 이는 바로 ‘전생前生을 기억하는 물질’ 아니겠는가. 이 과정에서 진정한 엑스타시는 이렇게 대단한 우주적 원리를 발견(?)한 대한국민의 발상을 대한민국이 신속하게 대못을 때려 박듯, 법[法, 정신]으로 확정(?)지었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돌아온 축구선수 박지성이 인터뷰에서 “축구에서∼ 반칙도 축구다”라는 말에 뭉클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화려함 뒤에, 고생이 많았 구나! 그 말을 듣고 난 후 ‘성실한 박지성’ 이미지에 ‘성숙한 박지성’이 더 해졌다. 그렇다고 반칙도 정당한 행위라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명백한 오심을 저지른 배구 주심이 자신의 권위를 앞세워 오심을 밀어붙이자 “식빵”이란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 속이 다 후련했다. 헤드기어가 훌러덩 벗겨질 정도로 두부를 가격했음에도, 전자장비의 인식 오류 등 치졸한 판정으로 승리를 도둑질해간 태권도 주심도 있었다. 근본적으로 가정교 육을 잘 못 받았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바로잡으려 하지를 않고, 일정부분 용인하는 듯 한 사후 처리과정을 목도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는 진실, 사실 보다 권위를 앞세운 정반합적 정의(?)가 더 필요했구나! 그래서 심판들도 그랬구나! 그랬기에 고대의 왕정국가 그리스가 선전, 선동, 조작, 매수, 동원, 왜곡이 가능한 직접민주주의 통치를 선호했고, 이를 ‘숭고한 법치 주의 수호’라는 미명으로 호도했겠구나. 이해는 했지만, 그래도 봄은 온다. 자연은 법이나 왕이나 신보다 절대적이다.
“봄이 오면/ 겨우내 숨죽이던 DNA가/ 큰 숨을 몰아쉬고 되살아나 // 봄이 오면/ 죽음의 찬 기운 날빛에 녹아/ 언 땅 밀쳐내고 생명을 틔우리니// 봄이 오면/ 새 날, 새 바람에 깨우친 꿈/ 굴종하던 육신 다 시 일으켜// 봄이 오면/ 배냇 부터 익혀둔/ 형상을 기억하여 되살리려 니// 봄이 오면/ 이 세상 모든 씨앗들이/ 본태를 회복하는 날이 되어 // 봄이 오면/ 그 부름에 이끌려/ 전생의 염원 복원하리니// 오, 대한국민/ 아, 대한민국/ 봄이 오면.” -권녕하 〈봄이 오면〉 전문
역사는 정반합된 사실
역사는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목격했거나 그 정보를 입수한 기록자가 여론을 참작하여 기록했거나 주관적으로 이해하거나 하여 문자로 남겨놓은, 오류도 뒤섞여 있는 문서가 맞다. 신화는 위와 같은 상황을 세대를 거치며 후대에 말[言]로 전하다 보니 사실에 대한 정확성 보다는 시대적 판단력이 가미되고 집단적 소망이 가미되곤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판단이다.
이는 문화적으로 미성숙한 사회일수록 윤색과 왜곡이 심하게 나타날 터인즉, 이를 국가 또는 종족, 정치집단의 이익 추구를 목적으로 의도적인 왜곡을 자행하는 경우가 21세기 동북아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연구가 부족한 수많은 논문을 인터넷에 물량공세로 도배해 놓고, 클릭 횟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인용자의 숫자가 많고 적음에 따라, 논문 내용의 진위 또는 충실성을 판별하고자 하는 물량공세 행위는 학문적 비도덕을 넘어 인류사에 대한 범죄와 다름없다. 비열한 민족적 욕망은 타국, 타 종족, 이웃 문화권에 누대에 걸쳐 직접적 피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최근의 이러한 현상을 ‘대한민국에, 오히려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다. 까닭은 해방 이후 친일파 단죄가 선택적이고 미진했기에 일제의 식민사관을 답습한 학맥이 주도권을 쥐게 됐고, 이를 방어하기 위한 일이라면 ‘적의 적은 동지’라는 개념으로 결탁도 서슴치 않았다. 또한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북공정 등은 그나마도 국내 학자의 참여가 제한받는 가운데, 자국의 역사관을 합리화 하려는 조작과 허위를 일삼고 있다.
그 바람에 ‘자국의 예산을 퍼부어 우리 조상의 역사를 낱낱이 밝혀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예의상(?) ‘차라리 고맙다!’고 해야 될 것 같다.
매국노와 친일 동조자, 친일 부역자 등을 나름대로 가려냈던 건국 직후의 ‘과거사 청산(?)’ 과정을 상기해보면, 대상만 바뀌었을 뿐 현재진행형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적폐청산’ 또한 이와 다름없을 터인데, 보는 시각, 관점의 차이만으로도 ‘좌광우도’가 ‘우광좌도’가 된 사례가 곳곳에서 인지되고 있다. 4.19, 5.16을 거쳐 민주화의 길에 참여했던 모 인사는 타의에 의해 최근 ‘꼴통보수’가 돼있었고, 군부독재에 격렬하게 항거 했던 모 인사는 ‘변절자’로 낙인찍혀 있었다. 최근 비공개를 전제조건으 로 나눈 대화에서 “난 초심 그대로인데, 그들이 민주화 과정을 독식하려 한다”, “내 민주와 그 민주가 다르다”며, 강도 높은 불만을 토로한다. 역사를 새롭게 기록하고 싶은 사람들! 그들에게 절실하고 신속한 방책은 오직 혁명적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홍건적이 됐든 홍위병이 됐든 문화혁명이 됐든 사상혁명이 됐든 사회구조를 뿌리부터 바꾸고 싶어 하는 그 열망을 감추지 않는다. 이미 그들이 성취한 ‘교육감 선출’ 시스템은 어린 새싹들을 물들일 교과서 편집, 채택, 공급과정을 장악하였으니, 일정한 소득은 거두었겠다. 다만, 곡간이 넉넉해져 등 따습고 배가 부르면 딴 생각이 난다는데, 조직의 와해는 예외 없이 교만에서 부터 출발한다. 이 세상의 절반씩을 구성하고 있는 남녀간의 교류(?)에서 교만이 불거지 는데, 역사를 보면, 기가 막히게! 꼭 허리 아래, 은밀한 내부에서부터 시 작되곤 했다. 교만의 출발점이 생각을 지배하는 두뇌나 생명의 상징인 심장이 아닌 점이 참 이상스럽다. 교만의 끝은 심정지? ‘심정지’는 ‘숨 안 쉬는 사람은 죽’었다는 의학적 용어일 뿐인데~ 그리하여, 이제 잠이 들면 다시 꼭 깨어난다는 것을 믿겠느냐? 교만은 절대 금물이다.
음식과 섹스, 탐미적 고통
사회기강을 바로 세우려면, ‘공직자의 공소시효는 무기한’이라야 한다 는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선거철만 되면 신정부 집권 예정자들에게 아양 떨며 ‘정치기생’을 자처하는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단체들. 그 수많은 단체들이 획득하고 소비하는 예산이, 무시하지 못할 단계임을 알 사람은 다 아는 세상이 됐다.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이들에게 기준선을 제시하고 통제하며 자숙하게 만들어줄 도덕률이 과연 오늘날 존재라도 하는 것일까. 사후 처벌만이 최상일까.
‘음식은 상하기 직전에 제일 맛있다’고 한다. 섹스도 클라이막스에 올라 엑스타시를 느끼는 과정이 지나면, 바람 빠진 풍선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권력은 과연 어떨까? 겪어본 사람만이 알 일이다. 적폐고 사정이고 감옥이고 재판이고 모두 죄 짓고 사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일 뿐 이지만, 그 탐미적 고통을 향해 달려 나가는 부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학계에 이어 문화예술계도 그 뒤를 바짝 뒤따르고 있어 한숨이 나올 뿐 이다.
누구보다 더 앞자리에 있어도 시원찮을 신분(?)의 문사가 폭탄주 술시중이나 들고 있는 세상이 됐으니! 기생이 별거더냐! 소전체로 멋있게~ 족보에 올려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