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시와시학》가을문예 당선작
송현상회(외 4편) / 김명희
보나르의식탁 (외 4편) / 김명은
송현상회 / 김명희
1
해장을 놓친 바람 하나 궁시렁, 평상에 앉는다.
간밤에 새로 붙은 동백아가씨를 안고서
늙은 담장은 오랜만에 화색이 돌고
깨진 유리창 끝으로 햇살이 걸려 칭얼거려도
구멍가게는 아침이 늦도록 열리지 않는다
어제 읍내 솜틀집 다녀온 엄마가 혀를 차더니,
진구네 엄마 자랑하던 양은냄비 계가 깨진 걸까
2
새마을운동을 눌러 쓴 동네 이장이
배급된 쥐약 몇 봉 들고 가게 입구를 기웃거린다.
하나둘 모여든 아이들은 제 몫의 만화책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반공방첩 담장 밑으로 고여 들고
겨울태양은, 제 몫의 산아제한을 붙든 채
홀쭉해진 골목 끝으로 체적을 좁히는 삼거리 한낮
일그러진 반합과 탄통을 밀고 온 엿장수가 가게 안을
어슬렁 살핀다, 남은 꽁초만 비며 끄며 천천히 떠난다
뒷간 포비아 등은 대낮에도 한참을 붉게 흔들렸다
우리는 논 가운데서 참새 한 마리 더 허탕 친 후에야
버짐처럼 까칠한 가게 문이 열렸다
3
진구랑 진구엄마는 어디로 간 걸까, 우리는 머리 위에서
뱅뱅 도는 미원과 미풍처럼 한동안 서로 눈만 껌뻑였다
그 후 나는 몇 번 더 아버지의 거북선 심부름에 떠밀려
그곳을 들르곤 했고 그때마다 미원은 하얀 제 속을
겨울햇살에 내어주곤, 모두들 아무 말이 없었다
귀걸이가 있는 풍경 / 김명희
소리의 방죽에 구멍이 뚫렸다,
전부터 미뤄 왔던 내 오랜 망설임이 무너지고
잠깐동안 양미간이 무너져 내리는 사이
나의 귓불을 몇 번 더듬적거리던 미용실 점원이 쿡,
소리의 한켠이 순간 화끈거리기 시작한다.
바늘이 통과한 깊이만큼 다리를 절며 들어오는 소리들
귀를 뚫는 일은, 소리의 모서리에 이정표 하나 세우는 일이다
둑 이쪽과 저쪽에 일상의 오솔길 하나 내는 일이며
청각의 농사만 경작했던 곳에 작은 사찰 하나 건축하는 일이다
예리한 통증과 맞바꾼 장식물을 손끝으로 확인하며
꾹 다문 입으로 방금 뚫린 거울 속을 갸웃 살핀다.
화농의 깊이로 젖었다가 귓속으로 들어오는 소리들
상처를 통과한 소리들은 뾰족하거나 날카롭다
화끈거리는 귀 언저리에 연고가 발라지고
당분간은 덧나기 쉬운 풍경에 하루 두 번씩 소독을 해야 한다
아침마다 수화기 저쪽으로 방류했던 무료함이 단속되고
얼마간은 소리의 농사도 흉년이 될 것이다
내 부주의함이 아직은 덜 아문 설법을 건드릴 때마다
방심에 찔린 듯 거울 앞으로 황급히 다가설 것이다
입 안 가득 얼얼한 침을 천천히 삼키며
인화성 짙은 여름, 조금은 미묘한 화엄(華嚴)의 거리로 나선다.
요강 / 김명희
벼룩시장에서 운 좋게 얻어온 항아리 하나
그 속엔 아주 오래된 강물 하나 살고 있는지
밤이면, 오래도록 잘 젖은 물소리들 걸어 나오곤 한다
그런 날이면
내 몸 안에서 서서히 고개 드는 조바심을 감추지 못하곤 했고
강물에 빠지거나 물을 엎지르곤 하는 눅눅한 꿈들에
나는 밤새 젖는 것이다
건너온 세월만큼이나 오래 묵은 이야기들로
거실 한켠을 지키고 있는 낡은 요강 하나
저 입구를 수없이 들렀다 갔을 이름 모를 불면들과
우리들의 배고픔을 수선하던 어머니의 오랜 뒤척임과
잔털이 돋기 시작한 오빠의 은밀한 성장들
그리고 언제부턴가, 요실금 같은 기억만 믿기 시작한
할머니의 슬픈 꽃잎까지도 요강은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
그런 밤, 밖에는 영하의 바람이 불었고
가끔은 겨울도,
그 안에다 육각형의 살얼음을 배설하곤 떠나갔다
백미러·2 / 김명희
북극성 하나 잠이 덜 깬 집 안쪽을 기웃거리고
한파를 이고 나온 새벽 뉴스가 거실을 뛰어다닌다.
아직 덜 끝낸 잠을 돌돌 말고 뒹굴던 소년기가 풀썩 깨어나고
마을입구 어디쯤 다다랐을 등교의 초침이 빨라진다.
한 장 남은 달력 앞에서 각질 같은 기억을 털어내다, 여자는
밖으로 나가 영하에 얼어붙은 자동차를 비틀어 깨운다.
희부연 그녀의 일상처럼
밤새 성에에 뒤덮인 유리를 말없이 긁어댄다.
겨울, 은색 살얼음을 들쓴 백미러는 즉석복권 같다
미끄럽게 넘어지던 빙판길처럼
착지점을 놓친 채 매번 아슬아슬하던 계절들이 있었다.
풀잎 같은 희망이 현란한 호기심에 미끄덩, 넘어지곤 하던
긁어도 긁어도 잡히지 않던 행운 저쪽의 낯선 숫자들
그런 날엔
동네의 개 짖는 소리도 홀수이거나 짝수이거나 꽝이었다.
머리 하나쯤 더 웃자란 아이에게
낡은 카셋 테이프를 건네는 그녀의 손은 무료하다
소년은
어릴적 문방구 한켠에서 익힌 익숙한 솜씨로
차가운 바람의 모서리를 재빨리 긁어대고
입김 때문이었을까, 유리에 붙은 은박의 세월 안쪽으로
동굴처럼 검은 구멍이 뚫린다.
마을 앞 삼거리를 실은 버스가 백미러 속으로 사라진 건
아주 잠깐이었고 돌아오는 길 코트주머니 속에는
지난 봄, 확인하지 못한 큰 아이의 입학금이 차게 구겨져 있다.
희망은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늘 가까이에 있다.
빈곳을 말하다 / 김명희
몇 개 뭉툭한 위로와 사무용 슬픔들이 첨부된 후,
이름은 곧바로 삭제되었고
동사무소 직원의 손에서 내게 넘어온 서류는 헐렁하다.
한사람 몫의 이승이 지워진 서류를 들고서 2월의 거리로 나선다.
음력의 추억들은 겨울바람처럼 흔들리기 시작하고
쉽사리 높낮이가 변하는 그래프처럼 온통 혼란스럽다.
아버지는 더 이상,
구름을 몰고 다니거나 위급한 근심들을 안겨주지 못할 것이다.
주인을 잃은 슬픔들은
기억 한켠에 그늘 한두 개쯤 더 장만하게 될 것이고 나는 지금
습관처럼 그의 집에 전화를 건다
순간, 날카로운 모서리에 찔리듯 화들짝 깨어나는 기억
아버지는 없다
밤마다 위급함을 이끌고 중환자실을 통과하던 사연들과
눈물을 빌리러 그의 머리맡을 찾곤 했던 내 오랜 습관들을
이제는 내려놓아야 한다
아, 되돌릴 수 없는 먹구름들
오늘 이후 나는, 되돌아올 것들에 대해선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한다
어떤 후회나 쓸쓸함은 모두 빈곳이 되었다
세상의 뒷면이 된 아버지는 깊은 산 속에 심겨졌고
이승의 휴일엔, 챙겨야 할 방문지가 하나 더 늘었다.
이제 내 안의 금요일쯤엔 폭설이 세상을 잠글 것이고, 빈곳은 한동안
고체처럼 단단해질 것이다.
김명희 시인
1968년 경기 양평 출생. 2006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 현재 한국서당문화협회 평택지부 사무국장,
보나르의 식탁 / 김명은
고마워요, 보나르
당신은 나를 위해 르 까테 마을에 그늘이 밀려나온 붉은 지붕 조그만 집을 샀죠
하얀 테이블보를 깔 수 있는 둥근 식탁을 들여놓았고
그 테이블보가 널려있는 빨랫줄이 길게 뻗어나가는 정원
정원 한 귀퉁이 연못에는 물옥잠화 밑으로 틸라피아가 헤엄쳐 들어가요 보나르
내가 있는 집으로 당신은 돌아오고
두근거리는 내 손이 하얀 문을 열어젖히자 주홍빛 벽에 문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요
그 소리에 나무로 만든 식탁의자에서 졸고 있던 고양이가 굴러 떨어질 뻔 했어요
당신이 강렬하고 진지한 얼굴로 들어서기 전까지
말라붙은 꽃무늬들이 당신이 그려놓은 크고 작은 과일들을 만지며 놀았죠
종려나무잎사귀가 당신이 껴안은 허리처럼 휘어졌어요
빛을 등지고 검은 스타킹을 벗는 남불 칸의 거리와 지중해가 보이는 르 보스크
지금은 해풍이 강하고 차가운 바다
푸른 입자 그 푸른 촉감 사이로 당신은 떠다녀요
함수초 샛노란 빛의 커튼 당신이 문을 두드리기 전에 문은 항상 열려있죠 보나르
아담한 우리 집 창문 밖은 그늘 진 숲이지만
당신 손에는 언제나 따뜻한 색, 눈부신 빛들이 가득해요
그 가득한 빛들이 하늘과 꽃을 마구 섞어버리면
황금처럼 쏟아지는 노을을 벽에 비스듬히 걸어둔 후 보나르
당신은 어두워진 바다를 담은 두 개의 커피 잔을 둥근 식탁 위에 놓으셨어요
윤곽이 뚜렷하지 않은 얼굴 반쪽이 잘려나간 다음, 절반의 말이 사라져요
나머지 절반은 붓자국이 남아있는 청록빛
나는 당신 오른쪽에 앉아 당신의 옆모습을 바라봐요
꽃을 꽂은 화병의 붉은 뺨으로 유채색으로 빛나는 작은 숲처럼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내 풍부한 표정으로
당신이 그렇게 거기 있는 동안
회기역10-1 플랫폼 / 김명은
그를 기다리다 베지밀을 샀어요
크로스 검은 가방 속에 나란히 누워있는 두 개의 베지밀
배낭을 진 중년 남녀 굵고 가는 연둣빛 소리가 섞이고
머리를 출렁이며 그들은 그들의 대화를 연신 쪼아먹고 있어요
한 남자가 건장한 몸을 가볍게 풀고 있는데
풀어 놓은 다리가 날개를 달고 수십 길은 오를 것 같아요
전동차가 통과할 때마다 사람들이 출구를 향해 빗겨가요
플랫폼 기둥에 기대어 건너편 사람들을 바라봐요
눈 마주치면 딱딱해지는 낯선 음식처럼
공기를 마셔도 숨이 막히고
겨우 남아있는 힘으로 고단한 그림자의 뒷모습이 역방향으로
그가 오고 있는 도시는 조명등 하나 없는 매복지대 같아요
가야할 방향을 향해 쭉 뻗어있는 선로
누군가는 그 방향을 틀어보기 위해 몸을 던지기도
손전등도 없이 지하세계로 내려가기도 해요
목덜미에 자꾸 달라붙은, 떼어내도 자꾸 돋아나는
푸른 잎사귀 같은 여자들이 걸어가요
개나리는 벌써 긴 팔과 목에 노란 리본을 매달기 시작해요
낡은 담벼락 뒤에 가려진 대낮에도 꿈꾸기 알맞은 방에서 나와요
지금 시간 오후 세시 반, 잠들지 말아요
배낭을 메고 어디로 가야하나
텅 빈 공간 삐거덕거리는 레일, 소리 들려요?
문이 열리면 첫걸음을 뗀 후 한두 걸음만 더 내디디면 돼요
투명한 것은 부딪치면 위험해요 가방 속의 두 개 유리병처럼
더 가야할 사람들은 창문에 뺨을 기대고 서 있고
나는 노란 정지선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아직 따뜻한 베지밀 전류처럼 주르르 흘러들어갈 거예요
햇빛이 오른 쪽으로 기우는 동안 눈꺼풀은 시들고
바짝 말라붙은 바닥이 구둣발에 짓밟혀요
밀치지 말아요 쇠별꽃이 굴러오는 소리, 그가 오고 있어요
하이, 하이눈 / 김명은
담쟁이 벽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 나는 쪽으로 미소를 보낸다
대답은 필 없다 먹이를 찾은 눈빛이 빛난다
모두들 달려가고 있다 휑 전속력으로
어디론가 가기 위해서 바삐 걸어와
좌회전신호가 직진 신호로
바뀌기를 기다린다 사람들은 신호등 앞에 몰려있다
검은 헬멧을 쓴 퀵서비스 오토바이 빠른 행렬이 이어진다
부드럽게 곡선을 긋고 몇 대의 승용차가 우회전을 한다
나는 부드러움에 약하다
부드럽게 떨리는 그의 부름에 안전선처럼 얌전하게 서 있다
몸을 구부려 벽 속으로 들어간 벽화처럼
벽을 등지고 보이지 않는 사방 신호등을 짐작한다
서로를 쓰러트리고 포옹한 채 죽어가고 싶은 백주(白晝)의 결투
피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숨겨두기에 알맞은 크기로
그가 나를 접을 것이다 부드럽게 접혀 있는 하얀 손수건처럼
녹아내리는 몸을, 완벽한 슬픔을 빨아들이려는 자세로
온통 햇빛에 젖어 번쩍거리는
직진하려는 버스보다
내가 먼저 길 위에서 지워진다 차창 밖에는
휘파람을 불던 도시의 새들이 날아간다
도플갱어 / 김명은
당신은 너무 멀어요
비가, 빠르게, 따라와요
플라스틱 의자를 굴리는 바람
앞서거니 뒤서거니,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도 이미 늦었죠
속도를 흠뻑 늦춰요 한번쯤
함께 비에 젖고 싶었어요
창가에 서면 빗줄기 같은 긴 한숨이 만져지곤 했죠
당신을 붙잡고 서 있는 어둠은?
일제히 바람을 타는 괭이갈매기들은 애써 피하는 법이 없죠
속도에 치인 차들이 상처 난 몸을 만져요
찢어진 차바퀴가 제 속을 들여다보는 동안
더러는 문을 닫고 서둘러 피할 곳을 찾고
물은 물 위를 달려요 후다닥 뛰어가는 물발자국을 보세요
익사체처럼 퉁퉁 불은 물을 질질 끌고 나와요
내 속에서 최초로 눈을 뜬 여자, 당신을 처음 발견한
그녀가 껴안고 있던 당신의 목을 원해요
우리는 몸을 섞어도 왜 하나일 수 없나요
당신과 나의 거리는? 모든 경계를 넘나들며 번지는 파문
내 한심한 잣대로는 잴 수가 없어요, 어쩌죠
거대한 태양이 시퍼런 물속에서 날개를 퍼덕여요
바다가 들썩여요 허우적거리는 수평선
두 날개 사이에서 하얗게 솟구치던 소리
오 이런, 벼락을 맞은 듯 유리창에 금이 가기 시작해요
머리가 깨친 거울처럼 젖은 당신이 마구 쪼개져요
모서리마다 날카롭게 포개져 있는
바닥에 쏟아진 퍼즐 조각을 맞춰요
오랫동안 참아온 부위가 얼굴을 붉히며
좁은 계곡 같은 깊은 틈이 조금씩 되살아나는지
톱니바퀴 툭 툭 끊어지는 소리가 지나가요
당신 같은 건 잊겠다고 버리겠다고
요동치던 물, 내 속에 차오르고 있어요
이제 물 위를 걸어
당신에게 닿을 수 있어요
완벽한 잠 / 김명은
반쯤 벗겨진 아랫도리
며칠 불면증에 시달려 너덜너덜 해진 거리
버스 몇 대가 성당 쪽으로 달려갔다
계단 옆, 그림자를 뉘고 잠든 여자
버스에서 내리던 여자들이
그 검은 구멍을 피해 달아난다
헤벌어진 입
군데군데 썩은 치아 사이에
고요한 한 세계가 숨어 있다
깊은 동굴로 들어가고 있는 꿈이 평온하다
축축한 곳
그늘보다 깊고 어둡다
그녀는 잠든 척 눈을 감고 그 실눈으로
세상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고 있을지 모른다
까맣게 모여든 파리 떼들
가늘게 내려쌓인 햇살 가닥가닥
낮잠을 파고드는 기억을 헤집어서
내게 불면의 손을 뻗치고 있는지 모른다
아무도 그녀의 잠 속으로 끼어들 수 없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노르스름한 꿈이 익어간다
길바닥에 누운 저 달콤한 낮잠
거긴 안으로 잠긴
그녀의 완벽한 방이다
등나무아래 모로 누워 몸을 뒤척이던 낙엽들
신호대기 중인 사람들을 빗금으로 바라본다
김명은 시인
1963년 전남 해남 출생. 천상병문학제 귀천문학상 수상. 경희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과 재학. '빈터'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