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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영성
질문: 영적인 사람이 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이란, 이 세상에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경이와 신비와 생명이
있음을 알고서 감사와 기쁨으로 모든 것을 수용하는 존재를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신의 얼굴입니다. 미래의 어느 날에 일어날 것을 계속 기다린다면,
여러분은 단지 더 많은 내일과 더 많은 먼 훗날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
오늘이 바로 매일이며, ‘이날’이 바로 ‘모든 날’들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영적인 사람’으로 규정할 수 없었던 것은, 영적인 사람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일을 하지 않는가 하는 목록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그런 잣대로 재느라고 오랜 세월을 보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이런 과정을 충분히 거칠 경우, 자신이 ‘영적’이라고 규정한 기준대로 살 수 없다는 이해에 도달할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던 때가 있었는가 하면 성내고 분개한 때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대담하고 강인하고 힘이 넘치는 것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인생에 펼쳐지는 다양한 국면을 지나쳐 오면서 여러분은 영적인 사람이란 과연 어떤 사람인지를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생각으로 도저히 이런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순간, 여러분은 연민과 절망에 빠집니다.
여러분이 연민을 느끼는 것은 모두가 이런 혼돈을 안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며, 그 정황에서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며, 그 정황에서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연민은 자신도 할 수 없으면서 다른 사람이 항상 ‘영적인 존재’가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 가당치 않다는 자각에서도 우러나옵니다.
이와 함께 철저한 절망 역시 존재합니다. 나는 절망의 상태를 좋아합니다. 내가 말하는 절망은 자포자기나 낙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으로서는 삶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기본적 지혜 앞에 마침내 항복을 선언한 상태를 가리키지요.
여러분은 삶을 ‘이해’해 보려고 두통에 시달렸습니다. 누군가 여러분 마음에 상처를 입히면, 그것이 전생에 행한 잘못에서 연유한 업보의 산물이 아닌가 생각하며 걱정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런지 어떻게 알 수 있으며, 그렇다고 왜 걱정해야 할까요. 여러분이 다른 사람과 함께 어려운 생을 거쳐 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정 도움이 될까요?
나는 그런 생각이 여러분의 서글픔을 달래 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두통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요. 현재의 행동에 대한 핑계를 대기 위해 과거를 이용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다고 기분이 좋아질까요? 마음은 무언가를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행위를 합리화한 다음 이내 잊어버립니다.
친구들이여, 여러분이 자신에게 진정 솔직해진다면 사람들이 계속해서 자기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하지만 가슴속에 있는 한 가지 기본적인 선언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여러분은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에게 또다시 상처를 준다는 것을 결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선언이란 이런 것입니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 아니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그 형태가 어떻든 마음의 평화를 찾고 있다.” 여러분은 누군가에게서 상처를 받을 때 그것이 고의가 아님을 깨달음으로써, 자신은 물론 그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일부러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상처를 입히는 것은 앙심을 품은 증오에서 나오는 행동이 아닙니다. 무지와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마음으로 무언가를 이해하려 할 때, 오히려 무지해집니다.
여러분은 누군가와 적절한 인간관계를 맺으려고 시도합니다. 보통 자녀, 부모, 배우자 등을 대상으로 그런 시도를 하지요. 그때 여러분은 그 사람과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그렇게 해야 상처를 받지 않기 때문이죠. ‘마음’을 통해서는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없음을 명심하십시오. 그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닙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은 실로 광대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 거대한 실체인데,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다른 사람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보잘것없는 마음에게 기댈 이유가 있겠습니까? “내 마음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여러분이 가진 ‘거대함’을 계속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사람이란 이런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 오랜 세월 골몰해 온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요가 수행과 끝없는 영적. 심리적 수련을 해 왔고, 결국 ‘나는 나일뿐’임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건강이 좋아졌을 수도 있고 나빠졌을 수도 있습니다. 음식을 절제하다가 병든 사람도 있고 병이 나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 ‘거대함’에 이르는 정해진 규율이란 없습니다. 어떤 규율을 정하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마치 바다 끝에 서서 손을 들고 이렇게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파도야 멈춰라! 나는 파도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알고 있다. 내 명령을 따라 멈추어라.”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영적 이해를 지닌 사람이란 ‘나는 나일뿐’임을 자각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때의 ‘나’가 가리키는 게 에고가 아님을 압니다.
심오한 영적 가르침에 관해 구루나 마스터 혹은 신비가들은 여러분이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오랜 기간 명상을 하거나 금욕 수행을 충분히 할 경우, 마스터가 여러분 존재의 비밀을 풀어헤칠 비밀 열쇠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이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마스터는 알고 여러분은 모른다. 그는 비밀 열쇠를 갖고 있고 여러분은 갖고 있지 않다.’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깨달음을 관장하는 존재가 여러분입니까. 마스터입니까?
만일 마스터가 여러분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지요? 그 마스터가 여러분의 친구를 탐탁찮게 생각하고 여러분이 토요일 밤에 늦도록 돌아다니는 것을 언짢게 생각한다면? 여러분의 깨달음을 담당하고 있는 그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영원히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도록 한다면? 혹은 여러분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 다음 생에 또 태어나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세 번 더 태어나야 한다고 말하면 어쩌지요? 그런 말이 여러분을 강하고 능력 있는 존재, 혹은 의식과 하나 된 존재로 느끼도록 해줄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와는 달리, ‘비밀 열쇠’를 가진 이는 마스터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라고 해 봅시다. 여러분은 깨달음에 이르는 열쇠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런, 여러분은 그 열쇠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그것을 어떻게 찾을 생각입니까?
여러분은 마스터와 동일한 과정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금식과 명상과 독서를 더욱 열심히 한다면, 열쇠를 주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다시금 불가능한 상황에 봉착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으로부터 감추어 둔 것을 자신에게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우리가 잘못된 문제에 관해 논의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모르고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무언가 발견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이 순간이 아닌 다른 순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놓치고 있는 것, 자신에게 부족한 무언가가 있다고 계속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이처럼 ‘선형적인’ 사고를 한다면, 여러 생에 걸쳐 깨달음에 이르는 ‘비밀 열쇠’를 계속 찾아다닐 것입니다.
여러분의 에고는 수많은 토요일 밤의 파티를 기억할 것이고, 따라서 그런 ‘죄인’인 자신에 대해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에고는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걱정하지 마, 깨달음은 저쪽 모퉁이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어! 멋진 누군가가 너에게 다가와서 너는 깨닫게 된다고 말할 거야. 아니면, 다음번에 읽을 책 속에서 발견할 수도 있어.”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깨달음을 가져다주리라고 생각하는 한,
여러분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탐색자’로만 남을 것입니다. 아니면 ‘발견자’겠지요. 탐색자는 계속 찾아다닐 것이고, 발견자는 마음을 통해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런 이해에서 더 나아가. 그들이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수 있다는 생각,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이 이미 넉넉히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논의해야 할 신비란 바로 이것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순간순간을 사는 경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친구들이여, 삶이란 더 ‘나아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선물은, 더 이상 ‘나아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이해하십시오.
지금 이 순간이 신의 얼굴입니다. 미래의 어느 날에 일어날 것을 계속 기다린다면, 여러분은 단지 더 많은 내일과 더 많은 먼 훗날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 오늘이 바로 매일이며, ‘이날’이 바로 ‘모든 날’들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자기 뇌를 더 이상 발달시킬 수 없고, 자기 육체를 더 이상 단련시킬 수 없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과 알고 있는 방법을 열심히 시도해보다가 마침내 절망을 느낄 때, 에고는 항복합니다. 탐색 게임을 설정한 것도 에고이며, 게임에서 상을 탈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항복하는 것도 에고입니다.
이 지혜가 여러분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에고는 더 이상 힘을 얻지 못하고, 여러분을 자극하지도 못하며, 여러분을 삶의 질곡으로 몰아넣지도 못합니다. 에고는 손과 발을 내려놓고 항복합니다.
에고가 벌이는 최상의 게임은 영적 게임입니다. 이 게임은 놀라울 정도로 강력한 힘을 에고에게 제공해 줍니다. 왜냐하면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보다 자신을 더 우월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왜 우월하냐고요? 자신은 신을 찾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신을 찾는 것이 가장 선한 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신을 찾는 것이며, 힘과 지혜와 성스러움이 흘러넘치는 것을 느껴, 결국에는 주변 사람들이 여러분과 나란히 설 수 없을 정도가 됩니다. 여러분은 너무 거룩해서 그 모습만 봐도 사람들은 분노 혹은 죄의식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여러분의 에고가 온갖 기분과 판단을 만들어 내며 끝없이 게임을 벌인 결과입니다.
하지만 정해진 규칙이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깨달음은 일어날 때 그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규칙대로라면 여러분은 벌써 깨달음을 얻었을 것입니다. 만일 규칙이 효력을 발휘한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규칙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규칙이란 한 개인의 깨달음에 대한 경험을 기초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엄청나게 놀라운 사건에 대해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며 그와 같은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 사람들이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에 관한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런 체험을 한 사람은 진리가 말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말로 표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말이 글로 옮겨지는 순간, 사람들은 그것을 읽고 그것에 따라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러 생에 걸쳐 깨달음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더 우울한 일은, 만일 여러분이 신은 ‘지금’이 아닌 혹은 자신이 이 순간에 하고 있는 것이 아닌 다른 무엇이라는 생각을 계속 갖는 한 더 많은 생을 살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고결’해지려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것은 참으로 힘든 노력입니다. 그들에게 즐거움이란 없습니다. 신을 만나려면 즐거움을 그쳐야 한다는 생각을 키웁니다. 왜냐하면 신은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
여러분이 “나는 잘하고 있다, 도의 길을 꾸준히 걷고 있다. 모든 것이 절제되어 있고 내 삶은 순결하고 거룩하다.”고 말하는 지경에 있다면, 그것이 내게는 무언가 아주 잘못되었다는 인식을 줍니다. 여러분이 자기 삶을 이치에 맞게 끌고 간다면, 마음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삶에 맞는 이치란 없습니다.
아직도 모르고 있습니까? 삶이란 어떤 신이 만든 법칙에 따라 한 번 작동되면 수백 년 동안 쉬지 않고 움직이는 기계가 아닙니다. 삶은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신성은 자발적이고, 독창적이고, 역동적인 흐름입니다.
삶이 여러분이 정한 법칙에 따라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기계라면 자발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마음속에 그런 기계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면, 삶의 기본 질료가 기쁨임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기쁨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의 자발적이고 즉흥적인 율동에서 나옵니다. 자유는 그런 흐름에서 생겨납니다.
여러분이 어떤 존재가 되려는 시도를 그만두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신은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여러분의 악전고투는 멈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런 힘든 노력의 과정을 그만둔다면, ‘깨달음은 어떻게 얻는가.’ 하는 염려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설정한 역설을 보았습니까? 여러분은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잘못된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도 알고 있는 금세기의 위대한 현자 가운데 한 사람인 라마나 마하리쉬는 “여러분은 이미 깨달았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에 대해 여러분은 좋은 말이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실제로 그 말을 믿지는 않습니다. 먼 훗날 그 문제를 생각해 보겠다고 자신에게 말하면서 뒤로 미룹니다.
마하리쉬는 말합니다. “깨달음을 방해하는 유일한 장애물은 바로 자신이 깨닫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여러분은 “그렇다. 정말 좋은 말이다.”라고 말하지만 역시 믿지는 않습니다. 마하리쉬가 어리석게도 쓸데없는 거짓말을 하고 있든, 혹은 여러분이 결코 들어 보지 못했던 최고의 복음을 들려주든 둘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결정하십시오.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쪽으로 결정한다면, 깨달음에 이르는 유일한 장애물은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이라는 그의 말도 믿으십시오, 그의 말을 믿든지 아예 믿지 않든지 하십시오. 반쯤 믿어주는 식으로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그런 함정에 빠뜨리는 것은 바로 ‘마음-에고’라는 결합체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영적 탐구자로 여기는 데 빠져 있습니까? 자신을 그렇게 봄으로써 남보다 한 발 앞섰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에고의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영적인 탐구자는 무리의 가장 꼭대기에 있으며 모두가 그를 압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선한 존재로 느끼기 위해 이 게임을 벌입니다.
간혹 삶의 다른 영역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영적인 길에 들어섭니다. “나는 속세를 어지럽혔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영역에서는 무언가 좋은 일을 할 수 있겠지.” 불행하게도 속세와 그 다른 영역은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속세라는 세상을 뛰어넘어 차원 높은 의식 상태에 존재하는 천상의 구름 위에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깨달음이라는 광대한 지경으로 가는 가장 쉬운 길은,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이웃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받아 주는 것입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십시오. 스스로를 이웃보다 우월하다고 느낀다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생색입니다.
어떻게 사랑하시겠습니까? 그저 편안한 상태에서 지금 이 순간 온전히 존재하며 인식하십시오. 여러분 앞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모든 사람에 주의를 집중하면서 말입니다. 무언가를 바꾸겠다는 바람이나 욕구 없이 현재를 인식하십시오.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식하십시오. 지금 자기 자신이 되십시오.
친구들이여, 여러분이 엄숙해지기를 그만둔다면, 자신에게 엄격한 존재가 되기를 그만둔다면, 다른 사람에게 매몰찬 존재가 되는 것 또한 그만둘 것입니다. 세상이 자기 밑에 있다고 느끼는 사람, 타인이 부정적이고 비판받아 마땅하며 악하고 수행을 덜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에게서 결핍을 보아 온 사람임을 기억하십시오.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느끼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자신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세상에 투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신성하지 않은 질료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서로 나눌 대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이 이른바 ‘신성한 힘’에 의해 창조되었고, 지금도 창조되고 있으며, 유지되고 있다고 믿는다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을 신이 만들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자신에게 어떤 일이 발생하든 있는 그대로 두자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 여러분의 일과 신의 일, 두 종류가 있습니까?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 신의 일과 분리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낡은 생각입니다.
일단의 사람들이 한때 모여 이런 결정을 했습니다. 자발적인 삶도 좋지만 예측하기가 어려우므로 예측 능력을 좀 더 키워야 되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사람들은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게 되었고,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측할 수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 규칙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이전처럼 많은 어려움을 안기지 않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사람들은 골칫거리가 됩니다. 계속 변하는 그들을 의지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들은 ‘불편한’ 사람들입니다. 믿음도 안 가고, 신뢰할 수도 없으며, 책임감도 부족합니다. 그들이 변한다면 여러분도 변해야 하지만, 여러분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변화에 저항하게 되고, 사람들을 줄 세우기 위해 만들어 낸 위대한 ‘우주의 법칙들’을 모두 꺼냅니다. 여러분은 책임감 있는 존재여야 하며, 믿음직한 존재여야 하며, 사랑하는 존재여야 하는 등의 내용이 목록에 적혀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얼마나 엄격하게 통제되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 숨 쉬는 방법과 때, 생각할 것과 생각지 말아야 할 것 등을 결정해야 합니다.
친구들이여, 그것을 어떻게 실행할 작정입니까? 여러분은 스스로 엄청난 것들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철저한 속임수입니다.
여러분은 근본적인 전제를 계속해서 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신이다.”는 전제 말입니다. 모든 것이 다 신일 진데, 왜 어떤 것을 다른 것보다 더 선호하는 것입니까?
모든 것이 다 신이라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종교는 여러분에게 ‘악’이라는 행위가 있음을 가르칩니다. 그 ‘악’은 밤낮 구분 없이 쉬지 않고 싸워야 할 대상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악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악을 믿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믿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두려움이지요.
자기 안에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없지요. 그러나 두려움이 다음과 같은 무서운 말로 사랑을 가립니다. “사랑하는 존재가 되지 말라. 사랑하면 상처받기 쉽다. 사랑을 하면 누군가 너에게 상처를 입힐 것이다.” 상처를 그저 상처로만 받아들일 뿐 그 상처를 피하기 위해 자기 삶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다면, 여러분은 삶이 완전히 변하는 것을 지켜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상처받는 것조차도 허용할 수 있는 넉넉한 존재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상처받아 죽은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 모두가 상처를 받습니다. 그것도 끝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아직 여기 이렇게 살아서 불만까지 토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토록 애쓰며 도망치고 있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허깨비입니다. 여러분, 슬픔이 없이는 기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슬픔이 없이는 기쁨을 바랄 수도 없습니다. 슬픔이 없다면 얼마나 따분할까요.
사람들이 여러분에 관해, 혹은 여러분에게 ‘나쁜’ 말을 하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친구들이여, ‘언짢은’ 소리를 듣는 순간 여러분은 선택권을 갖게 됩니다. 그런 말에 대해 습관적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고 혹은 매순간을 즐기면서 대담하게 드라마를 끝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상관없습니다.
우울함과 낙심과 죄책감을 느끼록 싶다면, 앞의 경우를 택하십시오. 단, 힘과 열정과 원기를 갖고 담대하게 하십시오. 그것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십시오. 어려움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다고 말할 때 찾아옵니다. 자기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생각이 여러분을 상처받기 쉬운 존재로 만듭니다.
만일 자신의 삶이 선택으로 가득 찼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매순간 상황은 변할 것입니다. 여러분을 갉아먹는 것은 삶에 일어나는 사건들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여러분의 반응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을 질리도록 들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전 존재로서 진정 귀담아듣는다면, 이 말이 사실임을 이해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변에 있는 모든 것과 하나라는 느낌을 갖고 있습니까? 기쁨과 사랑과 약동하는 생명을 느끼고 있습니까? 이것들을 여러분에게서 떼어 놓는 것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주의 깊게 관찰한다면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붙들려 있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여러분의 생각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거와 미래라는 양극 사이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기 위해 고통스런 금욕을 행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금욕을 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것이지 금욕이 아닙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순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순간에 존재한다면 마음은 동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살아 있다면, 이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깨어 있다면, 여러분은 과거를 반추하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이 현재에 역동적으로 참여하면, 하늘도 여러분을 도울 것이며, 여러분은 모든 것을 좋게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굉장한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문화 속에는 좋다고 느껴서는 안 되는 윤리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어린아이들은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느낌을 갖고 시작합니다. 그런데 부모들은 너무 자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일찍부터 아이들은 그들이 무언가를 잘한다고 말하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과 만납니다. 여러분이 어디에서나 자기 내면의 능력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그것을 경험하라는 격려를 받지 못하며, 세상도 여러분에게 그것을 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여러분이 자기들보다 더 낫다고 느끼길 원치 않습니다. 세상도 주지 않고 여러분도 자신에게 주지 않는데 과연 어디서 자신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과 자신과 여러분의 삶,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수용하십시오. 그러면 자신을 남에게 맞추는 데 사용되어 왔던 에너지가 풀려나올 것입니다.
여러분은 너무 오랫동안 스스로를 삶의 벽에 세게 부딪쳐 왔습니다. 완벽해지려는 노력을 그만둘 때, 온 사방 벽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토록 찾던 평화와 밝음을 경험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창조한 존재가 신이라면, 여러분의 삶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이도 신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러분 모두가 생을 거듭하며 광대하고 아름다운, 살아 있는 ‘빛의 융단’을 짜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제한된 의식으로는 그 융단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인식 속에서 자신이 만들고 있는 작품을 볼 수 있을 정도의 초연함을 발견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이 거대한 융단은 여러분의 전체 삶과 같습니다.
여러분 중 많은 이들이 여러분 주변과 여러분 사이에서 움직이는 에너지의 실타래를 보는 경험을 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유지하고 키우는 굽이치는 빛의 길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실로 아름답고, 살아 있으며 역동적이고 심오하고 충만하고 심히 놀랍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에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 실을 짜는 데 너무 바쁘기 때문에, 융단 전체의 아름다움과 경이를 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 융단을 볼 수 있다면, 단 한 줄도 그 어느 사건도 단 한순간도 바꾸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완벽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전체의 한 부분임을 기쁘고 놀랍게 생각할 것입니다. 삶을 그런 시각으로 보도록 하십시오.
질문: 나의 에고는 깨닫기 위한 온갖 도구가 헛된 것임을,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소용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깊이 들여다본다면 여러분 모두가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끌어올려야 하며, 자신의 길을 만들고, 자신을 의지하며, 스스로를 돌보아야 한다는 낡은 사고방식을 지닌 채 오래 세월을 살아 왔습니다. 이 모두는 여러 생에 걸쳐온 굳은 고정관념입니다. 여러분이 과거나 미래를 조금도 기웃거리지 않고 순간에 산다면, 세상과 자신의 관계를 보게 될 것입니다.
고통이 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경험합니다. 고통이 지나갑니다. 감정과 생각이 밀려옵니다. 그것에 반응합니다. 그러고는 지나갑니다. 이 모든 것을 열린 마음과 자세로 관찰하면 여러분 주변에 다른 힘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관찰은 순간에서 여러 시간으로, 그리고 여러 날로 늘어나게 되고, 마지막에는 낡은 사고 패턴이 아예 나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까지 지혜롭고 영감에 찬 존재가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과거의 모든 것들이 여러분을 붙잡은 손을 놓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삶이 펼쳐지는 순간마다 더욱 큰 행복과 기쁨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일한 길은 순간에 사는 것입니다!
자신이 없애고 싶은 모든 생각을 ‘안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강렬한 의식으로 순간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거의 힘이 그랬듯 새로운 힘이 여러분을 점유할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 번의 생이 소요되는 일이 아닙니다.
순간에 머물기 시작할 때,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삶의 다른 관점, 다른 느낌이 여러분에게 생겨날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힘이 과거의 힘을 여의고 그 자리를 차지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여러분이 찰나에 머물면서 존재의 파워가 이 순간의 힘을 느낄 때, 이제껏 자신을 잘못 알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시간. 공간을 헤쳐 나가 작은 육체. 마음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여러분이 아닙니다. 여러분 존재 전체의 지극히 작은 조각에 불과하지요.
진정한 자아에 대한 깨달음은 순간의 힘으로부터 옵니다. 모든 규칙과 온갖 욕망들은 ‘진정한 자신’이라는 힘에 의해 뒷자리로 밀려납니다. 이 정보가 누구에게든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개념과 생각을 넘어서 수행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추천하는 유일한 수행은 순간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것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름답습니다. 멈추어 그 아름다움을 경험하십시오.
여러분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삶을 지루해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매순간이 새롭기 때문이지요.
항상 새로운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찰나마다 새롭게 경험할 것이 있음을 안다면 인생은 흥미로워집니다.
이 새로움에서 기쁨이 생겨납니다.
삶은 결코 나이를 먹지 않습니다.
삶은 늘 여러분이 태어날 때만큼이나 새롭고 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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