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인을 위한 인문학은 어떻게 시작 되었을까
<빵·인문학> 클레멘트 코스를 만나다
모든 일이 그렇듯 성프란시스대학 역시 헌신적으로 노력한 몇몇 사람들의 의지로 설립되었다.
그 중심에 있었던 사람이 성공회 사제 임영인 신부였다.
임영인 신부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일을 홀로 밀어붙여 마침내 주위 사람들의 동의와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젊은 시절 학생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임 신부는 일찍이 공단지역에서 야학활동을 하는 등 소외계층을 위한 교육활동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수원 나눔의 집’에서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공부방을 운영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 같은 관심의 일환이었던 셈이었다.
임영인 신부의 시선은 언제나 낮은 곳, 즉 가난한 사람들의 척박한 삶에 머물러 있었다.
특히 노숙인 문제에 관심이 많던 그가 노숙인 다시서기 지원센터의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인문학 과정 설립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마침 그 무렵 TV에서 ‘클레멘트 코스’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다.
클레멘트 코스는 한 끼의 식사나 하룻밤의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으로는 노숙인을 자활로 이끌 수 없다는 임영인 신부의 생각에 확신을 불어넣어주는 계기가 됐다.
클레멘트 코스(홈리스 인문학)의 창시자 얼 쇼리스(주1)는 '인문학 교육을 통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이 노숙인 스스로 자활의 길로 향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가장 먼저 알고 몸소 실천한 사람이었다.
얼 쇼리스가 클레멘트 코스를 개설하게 된 데는 특별한 동기가 있었다. 1
995년, 얼 쇼리스가 빈곤문제와 관련한 글을 쓰기 위해 뉴욕의 한 교도소에서 수감자를 취재하던 중 살인사건에 연루돼 8년째 복역 중인 여죄수를 만나 질문을 던졌던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사람들이 왜 가난하다고 생각하느냐?”
얼 쇼리스의 질문에 20대의 여죄수는 의미심장한 대답을 내놓는다.
“우리가 가난한 건 정신적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의외의 대답에 놀란 얼 쇼리스는 “정신적 삶이 대체 무엇이냐?”고 되묻는다.
여죄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저기 저 곳에 있는 극장과 연주회, 박물관, 강연 같은 거죠.”라고 대답한다.
거기서 얼 쇼리스는 하나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단순하게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 건 물질적 충족일 것’이라고 생각해오던 그에게 여죄수의 엉뚱한 대답은 뜻밖의 가르침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들에게 빵과 잠자리가 필요한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들이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건 아니다.
가난에 찌들어 가장 먼저 망가지는 건 물론 ‘몸’이지만 표 나지 않게 더욱 황폐해지는 건 ‘정신’인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황폐해진 정신을 추스를 수 있는 게 과연 뭘까?
그런 물음에서 출발해 마침내 도달한 결론이 바로 ‘인문학 교육을 통해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깨달음은 곧 ‘클레멘트 코스’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1995년부터 뉴욕 인근의 노숙인, 마약중독자, 죄수 등을 대상으로 윤리철학, 예술, 역사, 논리학 등을 강의했던 클레멘트 코스는 현재 5대륙에서 50여개 코스가 개설돼, 한 해 신입생이 1,200명에 이르는 규모로 커졌다.
‘클레멘트 코스’는 이후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다.
코스를 이수한 홈리스들 가운데 더 많은 공부를 위해 대학에 진학하는 이가 나왔고, 그 중에선 변호사나 치과의사가 된 이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인문학 과정을 통해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던 ‘무력의 포위망’을 벗어나게 되었고, 이후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으로 변화하게 되었다.(얼 쇼리스 저, 《희망의 인문학》 참고)
노숙인의 자활을 돕는 데 관심을 갖고 있던 임영인 신부는 클레멘트 코스를 접한 뒤 주위사람들과 의견을 나누면서 점차 인문학 코스에 대한 확신을 갖기 시작했고, 이어 구체적인 설립 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한국형 클레멘트 코스’ 설립운동은 그때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결정을 내린 이후로도 임영인 신부는 지인들과의 상의를 중단하지 않았다.
지지자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 다니기도 했다.
어렵고 힘든 일이었지만 의외로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은 문제는 예산확보와 강의할 공간, 교수진을 구성하는 등의 기술적인 문제였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때마침 (주)삼성코닝의 조연백 사회복지사가 임 신부의 취지에 공감, 의기투합하면서 자사 사회공헌예산을 통한 코스 운영비 지원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제 강의할 장소와 교수진을 구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서울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모 대학에 강의실을 제공해 달라고 도움을 요청해 봤지만 대상이 노숙인이라는 말에 대학은 난색을 표했다.
예상됐던 일이었다.
돈을 들일 수도,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면 교회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 임 신부가 방안을 마련했다.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에 찾아가 부탁했던 것.
그렇게 성프란시스대학의 역사적인 첫 강의는 광화문에 소재한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대성당의 세미나실에서 이루어졌다.
이어 강의구성. 논의 끝에 '철학'과 '글쓰기'를 기본과목으로 놓고, 거기에 '역사'와 '문학', '예술사'를 접목하는 것으로 강의과목을 구성하기로 했다.
교수진 섭외 역시 전적으로 임 신부가 맡았다.
그러나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막상 제안하면 흔쾌히 나서주질 않았다.
말이 그렇지, 노숙인 앞에서 강의한다는 게 그리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굉장히 떨리고 긴장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결국 임 신부는 지인들 중에서 강의할 사람을 고르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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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얼 쇼리스(Earl Shorris) : 클레멘트코스 설립자. 시카고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언론인, 사회비평가, 대학강사,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1972년부터 '하퍼스'지의 편집자로 일했다.
저서로는 『뉴 아메리칸 블루스』, 『위대한 영혼의 죽음』 등 다수가 있다.
얼 쇼리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인문학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1995년 노숙자, 빈민, 죄수 등의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정규 대학 수준의 인문학을 가르치는 교육과정인 클레멘트 코스를 만들었다.
최준영 (오마이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