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밤
6개월 후인 다음해 2월, 하와이의 해변도로를 한 사내가 달려가고
있었다. 조깅복 차림으로 가쁜 숨을 뱉으면서 달리던 그는 내리막
길에 접어들자 속력을 냈다. 셔츠는 땀에 흠뻑 젖은데다가 얼굴도
붉게 상기되어 있었지만 그는 바다를 끼고 맹렬하게 달려 내려갔
다. 햇살이 따가운 이른 오후였다. 인적이 드문 곳이어서 길 위에
는 차량 한 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평지에 닿은 그는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곧장 모래사장 위를 달렸다. 앞쪽은 파도가 밀려
오는 바다였다. 바다로 뛰어든 그는 한동안 파도를 뒤집어쓰면서
서 있었다. 몸을 돌린 그가 모래사장으로 나왔을 때 한 사내가 그
를 맞았다.
「피에르, 이젠 완전히 회복되었군.」
사내는 50대쯤으로 회색 머리칼에 마른 체격이었다. 그가 피에
르에게 수건을 던져주었다.
「오늘은 자네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 .」
그들은 바다를 향해 나란히 앉았다. 사내는CEA의 부국장보 월
슨이다. 카이로에서 중상을 입은 피에르는 하와이로 실려왔던 것
이다. 월슨이 입을 열었다.
「프랑스와의 문제는 잊는 게 좋아, 피에르. 개인이 국가를 상대
로 싸울 수는 없는 노룻이야.」
「알고 있습니다. 이젠 잊었습니다. 」
피에르가 물에 젖은 셔츠를 벗었다. 어깨와 가슴에 총탄 흔적이
희미하게 나 있었다.
「나도 받은 만큼은 돌려주었으니까요.」
「예외없는 법이 없듯이 국가간의 협상에도 조건이 꼭 따른다
Ifl .」
월슨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토 회원국인 프랑스도 리비아에 미라주에 부착할 전자장비
를 판 것처럼 미국도 비밀리에 미사일을 팔았어 .」
시선이 마주친 그가 빙긋 웃었다.
「자네도 아마 들었을걸?.
「리비아측 사람들한테서 들었습니다. 」
「미국 대통령도 군수산업체의 로비를 감당하기 힘들다네.어쨌
든 그 자들이 내는 세금도 엄청난데다 고용인원이 수백만이야.」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그쪽 일을 해줘야겠어 .」
「어떤 일 말입니까?.
「미국 군수산업체의 대리인.」
정색한 월슨이 말을 이었다.
「러시아가 한국에 무기를 팔려고 갖은 수단을 동원하고 있어 .
자네는 그들과 마주치게 될 거야.」
「수십억불이 걸린 사업이야 러시아는 마피아 조직을 앞세우고
있는데 그들이 러시아 무기산업의 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
이지 그래서 우리는그들에게 맞설 사람이 필요하네.」
월슨이 다시 얼굴에 사람 좋아보이는 웃음을 띠었다.
「피에르 김, 자네는 행동적이고 냉철한데다 지적수준을 갖춘
한국인이야. 우리는 자네를 이 일의 적임자로 생각하고 있어 .」
게이트무역의 이정일 사장이 서초동'사무실에 들어선 것은 아
침 9시 정각이었다. 그가 테이블에 앉자마자 방으로 박태신 전무
가 들oi섰다.
「사장님 , 어젯밤에 장용호가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
앞쪽 의자에 앉은 그가 말을 이었다.
「지금 해운대의 로얄비치호텔에 묵고 있습니다. 」
「누가 또 배를 타고 오는 모양이지?.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
박태신은 육군대령 출신으로 군에 있는 동안 군수업무만 맡아
온 군수통이다. 그가 각진 얼굴을 들었다.
「장용호가 요즘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
장용호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무역업을 하는 신호무역의 사장이
다. 그러나 게이트무역이 미국 군수업체의 대리인인 반면에 신호
무역은 러시아 군수업체를 맡고 있었다. 당연히 경쟁사였고 상대
방의 동향에 서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
「S-300의 조건이 우리보다 나아. 게다가 놈들의 로비도 탄탄하
고 .」
혼자소리처럼 말한 이정일이 입맛을다셨다.
한국 정부가 내년에 구입할 지대공 미사일은 미국제 패트리어
트와 러시아제 S-300두 종류로 압축되어 있었다. 구입규모가 10
억불이 넘는 대형 오더였으므로 미국과 러시아는 치열한 경쟁을
하는 중이었다. 이것도 전쟁이다 오더를 수주하기 위해 양쪽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동서냉전의 시대는 구소련의 와해
로 풀렸으나 이제 시작된 상업전쟁에서 러시아는 절대로 양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것은 국가의 운명이 걸려 있는 일인 것
이다.
박태신이 생각난 듯 물었다.
「사장님 , 전의원과는 약속하셨습니까?.
「못했어 , 그 친구도 몸을 사리는 모양이야. 다음에 연락을 주겠
다는군.」
「장용호가 압력을 넣은 겁니다. 」
박태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약점을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으니까요. 전의원은 장
용호한테서 감시받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
전일환은 여당의 4선의원으로 국회 상임위인 국방위원장이다.
국방위원장은 무기선정에 직접 간여할 수는 없지만 군부에 막강
한 영향력을 가진 위치인 것이다. 박태신이 흘낏 이정일을 바라보
았다
「지난번 사건의 영향이 큽니다, 사장님 .」
이정일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지난번 사건이란 미국 보잉
사의 로비스트인 한국계 미국인 조나단 김이 강남에서 총격을 받
아 살해된 일을 말하는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차에 오르던 그는
네 발의 총격을 받고 현장에서 사망했는데 한낮에 일어난 일이었
지만 범인은 잡지 못했다. 경찰은 원한에 의한 사건으로 추정하고
있었으나 그후로 한국항공은 거의 계약 직전까지 이르렀던 보잉
7775대의 도입을 보류시켰다.
이정일측이 보기에는 러시아의 무력시위였던 것이다. 그들은
러시아제 최신기종 여객기인 수호이 88이 보잉 777보다 모든 면에
서 우수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벽시계를 올려다본 이정일이 자
리에서 일어섰다.
「약속이 있어 .」
저고리를 집어든 그가 박태신을 향해 웃어보였다.
「어쨌든 우리도 가만 있을 수는 없지 .」
타워호텔의 객실에서는 남산의 한쪽 기슭이 내려다보였다. 음
지에는 아직 녹지 않은 횐눈이 보였고 잎 떨어진 나무들이 황량했
다. 시선을 돌린 피에르는 강남으로 뻗은 도로를 바라보았다 차
도를 가득 메운 차량들은 활기찬 도시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파리나 유럽의 다른 도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도시였다.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렸으므로 몸을 돌린 그는 문으로 다가갔
다. 문을 열자 반백의 사내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서 있었다. 단
정한 양복차림이다.
「안녕하십니까? 게이트무역의 이정일입니다.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피에르는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김 한입 니 다. 」
이제부터 그는 한국명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들은 창가에 놓인
의자에 마주앉았다.
「어제 메이슨 씨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
이정일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들고 왔던
가죽가방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현재까지의 진행상황과 한국내의 구매조직, 거기에다 담당자
들의 가족, 성격 , 환경까지를 모두 기록한 서류입니다. 」
그가 손끝으로 가방을 두드러며 운음을 띠었다.
「그리고 신호무역의 활동에 대해서도 갖고 있는 정보는 모두
가져왔습니다. 물론 그쪽 조직원의 신상명세도.」
머리를 끄덕인 김한이 가방을 집어 탁자 밑에 내려놓았다.
「저는 독자적으로 행동합니다. 알고 계시지요?.
「메이슨 씨한테 들었습니다. 」
「제가 활동한다는 것은 이사장님만 알고 계셔야 합니다. 」
「물론이지 요.」
이정 일이 정색을 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김선생과 나는 전혀 만나지도, 알
지도 못한 사이로 되어 있어야 하는 것도 압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
드뎌 모국이로구나!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ㅈㄷ
rt
감사합니다
ㅈ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