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사의 대표적인 건물인 '가운루'는 계곡 바닥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나무기둥을 세워 거대한 '루'를 떠받치고
있다. 공민왕의 친필 현판이 걸려있다.
의성 고운사 대웅전을 마주 바라보고 있는 연수전은 조선 왕실의 계보를 적은 어첩을 봉안하기 위한 건물이다.
의성 고운사는 속세에서 저만치 비켜 있는 청정수행도량임을 들머리에서부터 느낄 수 있다.
길의 시작 말고는 온통 정적이다. 천천히 걸어도 20분이면 넉넉할 주차장에서 일주문까지의 1㎞ 남짓한 숲길은 심연으로
들어가는 낭하처럼 좁고 깊다.
굴참나무와 금강송이 터널을 이룬 잘 다져진 흙길을 느릿느릿 천 년의 시공을 넘듯 걸으며 사색을 즐기기에는 그만인 도도한
길이다. 연두색 새잎이 돋는 봄은 봄대로, 녹음으로 빛나는 여름은 여름대로, 단풍 들고 낙엽 지는 가을엔 절 이름처럼 더욱
맑고 외로워진다.
절 입구에 ‘법계도림’이란 안내판이 보인다. ‘화엄일승법계도’를 4천평 만다라 숲으로 조성해 놓았다.
법계도는 의상대사가 자신이 바라본 극락을 도식화한 문양으로 정사각형에 가까운 미로의 모습을 띠고 있다.
한 사람이 걸을만한 길로 법계도림의 처음과 끝이 하나로 만나는 숲길에는 세상을 견디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타인과 소통하지 않고 세상과 소통하지 않는 자아의 관점은 참으로 맹랑한 것임을 깨우친다.
그 숲이 묻는다. ‘너는 누구냐?’ ‘작은 티끌 안에 우주가 들어 있다. 일희일비하지 말고 둥글게 살아라.
살았다고 잘된 것 아니요 죽었다고 끝난 것 아니다.’ 조화로운 화엄의 세계다.
고운사는 큰절이면 으레 있기 마련인 사하촌이 형성되지 않아 풍경이 거의 상하지 않았다.
부석사와 봉정사 등 60여 말사를 거느린 조계종 16교구 본사이지만 주차료나 입장료 한 푼 받지 않는다.
무신경하고 성질 급한 사람을 위해 냅다 차로 절집 한가운데까지 진입도록 내버려두는 것조차 부처님의 인자함으로 느껴진다.
알려진 대로 최고의 명당답게 숲길을 걸어 일주문쯤에 당도하면 반쯤 핀 연꽃을 닮은 산봉우리가 절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
눈에 확 들어온다.
이렇게 ‘부용반개형상’(연꽃이 반쯤 핀 모습)의 터에 자리 잡은 고운사는 신라 신문왕 원년(681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
이다.
경북 북부지역의 중심 사찰인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의성 고운사 등은 모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는데, 신라시대 큰 사찰은
종교적 역할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 경제의 중심 역할을 하였으므로 이 지역을 하나의 벨트로 형성하여 거점 역할을 하지 않았
을까 추측된다.
고운사는 의상이 창건했지만, 최치원에 관한 전설이 더 많이 남아있다. 신라 말기 최치원이 고운사에 머물면서 절을 중건하였
고 절 이름도 그의 호 고운(孤雲)을 따서 지었다.
고운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문화재가 바로 최치원이 건축에 힘을 보탠 가운루(駕雲樓ㆍ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51호)와
우화루이다. 일주문과 사천왕문을 지나면 개울을 가로지르며 계곡바닥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다시 나무기둥을 세워 루를
떠받치고 있는 길이 16m, 높이 13m에 달하는 팔작지붕의 장중한 건물이 바로 가운루이다.
기둥의 길이가 조금씩 다른 데도 마침맞게 균형을 이뤘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현재의 가운루는 1668년에 중수한 것이고, 지금은 새로 난 다리와 복개한 길이 있어 제 모습과 가치는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형상 자체만으로도 특이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최치원이 지었던 원래 이름은 가허루이다. 허(虛)는 불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멍에를 쓰듯(駕) 불성을 짊어지고 가란다.
가(駕)는 평생토록 오롯이 간직해야 할 계율과 습의를 가리킨다.
청아하되 허술하지 않고 고독하되 청승 떨지 말지어다. 누각 위에서 순수하고 굳센 자연을 본받으라는 교시가 담긴 문자다.
지금의 ‘駕雲樓’ 현판 글씨는 고려 공민왕의 어필이다.
공민왕은 두 번의 내란을 겪고 노국공주가 죽자 실의에 빠져 전국을 유람할 때 고운사를 찾아 구름에 몸을 싣고 만사를 잊고
선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염원을 담아 현판의 글씨를 남겼다.
가운루와 인접해 개울을 비켜 앉은 누각이 우화루인데, 사찰에서 우화루라는 이름은 흔하다. 우화등선(羽化登仙)에서 따온
말로써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된다는 뜻이다.
특이한 것은 고운사 우화루에는 현판이 두 개 달려있는데, 밖에는 신선이 된다는 도교적인 우화루(羽化樓)라는 현판을 달고
있고, 누각 안에는 불교적 용어인 꽃 비가 내린다는 뜻을 가진 우화루(雨花樓)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지금은 개울을 복개해
계곡물이 말랐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봄날 우화루에 앉아 흐르는 계곡물과 가운루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만개한 벚꽃이
우수수 꽃 비로 뿌려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한편 우화루 서쪽 벽면에는 유명한 호랑이 벽화가 있다. 지금은 공양 간 벽에 진품이 따로 전시 보관되어 있고 이것은 가품
이다.
이리저리 호랑이 눈빛을 벗어나고자 자리를 옮겨 봐도 호랑이의 매서운 눈을 피할 길이 없다. 아무리 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이야기다.
‘가허(駕虛)’에 의상이 지향했던 모범이 아로새겨졌다면, 우화(羽化)엔 ‘박제된 천재’의 대명사인 최치원의 장탄식이 숨 쉰다.
시대의 불운에 밀려난 그가 대업 대신에 꿈꾼 대몽이다. 지금은 누구라도 차를 마실 수 있도록 다실로 개방해두고 있다.
고운사에는 유교적이고 도교적인 색채가 많이 가미되어 있다.
우화루 뒤편에 들어서면 사찰에서는 드물게 솟을대문에 ‘만세문’이라는 현판이 걸린 특이한 건물을 볼 수 있다. 조선 영조가
왕실의 계보를 적은 어첩을 봉안하던 연수전(문화재자료 444호)이 눅눅한 세월의 티를 내고 있다. ‘연수’는 ‘늘일延’에 ‘목숨壽’
로 고종황제의 만수무강을 기도하기 위해 특별히 마련한 유교적 전각이다. 사방 3칸의 작은 규모지만 황제를 위한 곳이라 온갖
정성을 다해지었다.
단청은 푸른색이 감돌며 사찰에서 보는 연꽃 등의 문양이 아니라 왕실에서 주로 사용하는 태극문양과 왕을 상징하는 용과 봉황
이 그려져 있다. 안내판에는 ‘불교를 억누르고 유교를 떠받들던 시대에 사찰 안에 이렇듯 왕실과 관련되는 건물이 지어졌다는
사실이 이채롭다’고 적혀 있다. 연수전 터는 명당 중의 명당이면서 나침반의 바늘이 꼼짝달싹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기가 센 곳
이라 한다.
고운사에서 가장 비중 있는 문화재는 보물 제246호로 지정된 약사전 안의 석불좌상이다.
높이 79㎝의 불상으로 대좌와 광배를 모두 갖추고 있고, 사각형 얼굴에 인중이 뚜렷하며 작은 입은 굳게 다물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인 도선국사가 나한전 앞의 삼층석탑(경북 문화재자료 제28호)과 더불어 9세기에 조성한 불상이다.
시대적으로 최치원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며 도선국사가 고운사를 크게 일으킬 무렵이었다. 고운사는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승군의 전방기지로 식량을 비축하고 부상당한 승병의 뒷바라지를 하였으며, 석학으로 이름난 함흥선사가 이곳에서
후학을 지도할 때는 무려 500명의 대중 스님이 수행한 도량으로 유명하다.
무엇보다 고운사가 유교적인 풍취를 물씬 느끼게 하는 것은 신라 최고의 문장가이며 사상가인 최치원의 영향이라 하겠다.
봉인된 천 년의 바람엔 고운의 체취가 사무치게 서려 있다. 그는 스스로 유학자를 자처했으나 그의 사상은 유불선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가허루나 우화루도 기실 도교의 신선이 타고 다니는 비행체의 이름이 아니던가. 그렇듯 고운은 유불선 3교의
통합사상가였다.
통합사상은 신라가 날로 국운이 기울어져 가고 있었기에 이념을 통일하여 다시 한 번 국가의 재통일을 이루고자 한데 그 목적
이 있었다. 길은 각각 다르나 도착지는 같다는 생각으로 모든 사상, 종교, 집단이 대립과 갈등 없이 서로 아우르고 화합하는 것
을 이상으로 여겼다. 지금 고운사의 절집 분위기가 그의 생각을 많이 닮아 있다. 포교와 수행의 중심도량으로 거듭나기 위해
다양한 시도와 더불어 소통과 통합에 기울이는 노력들이 그것이다. 고운사 인근에 그의 사상과 문학을 기리는 최치원 문학관도
곧 세울 계획이라고 한다. ‘가을바람에 괴로이 읊조리나니 세상에 날 알아주는 이 없네. 창밖엔 밤 깊도록 비만 내리는데 등불
앞에 마음은 만리 밖을 내닫네' 최치원의 ‘추야우중(秋夜雨中)’이란 시다.
신라 골품제의 벽에 막혀 일찍이 12세에 당으로 조기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토황소격문’ 등으로 이름을 떨치고 명성을 얻은 후
귀국하였지만 다시 현실의 태생적 한계에 부딪힌다. 진성여왕에게 골품제 폐지를 골자로 한 국정쇄신안을 담은 시무책 10조를
건의했다가 여지없이 퇴짜를 맞았다.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그는 42세의 나이에 모든 벼슬을 버리고 풍류객으로 산천을 떠돌다 가야산으로 들어가고
만다. 해인사에 은거하면서도 전국 각지를 방랑하며 많은 전설과 일화를 남겼다.
그가 역사에 남긴 눈부신 글귀들은 결국 좌절의 산물이다. 그는 붓을 휘둘러 난을 토벌할 정도로 붓의 강한 힘을 지녔지만 결국
실패했기 때문에 빛날 수 있었다. 하지만 908년 52세 때 역사에서 그의 자취는 사라지고 만다. 이후의 종적이 묘연해 언제 죽었
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고려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에 해인사에서 은거하던 최치원이 어느 날 아침 일찍 문을 열고 밖에 나간 뒤 온데간데없
이 사라져버리고 그가 신던 신발과 그 쓰던 갓만이 숲 속에 버려져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가 죽지 않고
신선이 되었을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최치원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친 주옥같은 시와 글도 많이 남겼으나 ‘계원필경’ 20권
등을 제외하면 전해오는 작품은 적은 편이다. 대신 방방곡곡 그의 족흔이 베인 곳은 많다.
경상도와 전북 일대에는 지금도 최치원의 행적이 전해진다.
옥구군에 있는 바위에는 최치원이 먹을 갈던 곳과 무릎 자국이 남아있다고 하며, 해운대 동백섬에는 도술로 바위에 자신의 또
다른 호 해운을 새긴 ‘海雲臺’ 석각이 절벽 한켠에 남아있다. 유적뿐 아니라 출생설화를 비롯하여 전설도 많이 전해진다.
최치원은 비록 신라를 다시 부흥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자신이 진정한 풍류객의 길을 걸었고, 뛰어난 필치로 화랑의 정신을
후세에 전했다는 점에서 신라의 마지막 화랑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고운사가 다른 절집 분위기와 사뭇 다른 이유는 가운루와 우화루를 중심으로 최치원의 사상과 그 기운이 가득 감돌기 때문이란
것을 알았다. 그래서 오래된 숲 속에 있는 고운사는 가장 절다운 절로 사람을 묵상케 한다. 오랜 시간 터를 지켜온 절집 앞에서
두 손을 모아 본다.
권순진/시인ㆍ칼럼니스트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