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 호 : 132 / 145 등록일 : 2000년 09월 27일 10:44
등록자 : ZBWHY 조 회 : 11 건
제 목 : [대본] 세월이 가면 / 우현종 作
세월이 가면
우 현 종 作
극단「청년극장」 제69회 정기공연 및
제18회 전국연극제 참가작품
세월이 가면
명동야화(明洞夜花 明洞野話)
"우리 문단에도 해방 이후에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가장 자유로웠던, 좌/우의 구별이 없던,
몽마르트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김수영
"명동은 1945년 8.15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대한민국의
문화촌이었다."
윤석산
"사실상 문학이 사회적 여건으로 우대 받은 것은 50년대까지
뿐이었다."
고 은
작의
1950년대를 전·후한 우리 나라는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극심한 혼돈의
시기라 정의한다. 동족상잔의 분단의 비극과 함께 그것을 인정하고 저마다
살기 위한 몸부림의 시기였다.
도올 김용옥은「新韓國紀」에서 "남/북 분단의 고착화를 가져온 민족상쟁의
비극이라는 고식적 이해방식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20세기에 있어서 우리사
회에 가장 거대한 변혁을 일으킨 사건이라는 사회 사상적 시각을 도입"하면
서 "6.25라는 우리 삶의 파괴는 결과적으로 우리사회에 잔존하던 '왕정구조'
에 치명타를 입힘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을 열었으며, 6.25가 없었더라
면 아마도 우리사회의 신분질서의 파괴라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의
견을 내놓는다. 따라서 6.25를 부정적으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긍정성을
적극적으로 유도시킨다.
이 시대에 자유로울 수 없었던 예술계의 선배들은, 자신의 작품에 매달렸고
그 보다 더 치열하게 자신의 궁핍한 생활과 예술환경과 싸워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시를 쓰려면, 아니 예술계에 입문하려면 먼저 술과 담배부터 배워야
한다는 예술가의 첫 번째 강령이 이 시기에부터 기인한 것이다. 문제는 시대
와 환경에 상관없이 이러한 분위기만이 유전되어 오늘날 예술계가 정체되어
있는, 환경 적인 부분에서 중요한 문제점의 하나로 남게 되었다.
이 시기의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향유하거나 즐길 수 없는, 독자와 관
객 없는 시와 소설과 연극과 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이들은 가난
했고 외로
웠고 극심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예술가들의 몸짓은 오늘날 미약한 우리 예술계의 초석을
다져놓았다. 서양의 최신이론들과 양식들이 이 시기에 급속도로 들어왔으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우리의 이론들을 대입시키기 힘들만큼 이 점에서도
혼돈의 시기였다.
작가는 이 예술사적인 혼돈의 시기를 주목한다. 술 마시고 멋 부리고 담배
만 열심히 피던 우리의 선배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너무도
퇴색해 버린 예술가의 양심과 자세를 다시금 생각해보고자 하는 촌스러운
마음이 울컥 들었기 때문이다.
줄거리
전체 극의 구성은 이봉구와 작가인 심현규의 현재 시점에서 이봉구의 회상
형식으로 읽혀질 수도 있고 이 둘의 대화 즉, 이봉구와 심현규 또한 연극 속
의 인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막이 오르면 명동백작 이봉구가 명동에 대한 설명과 함께 50, 60년대의 명
동을 설명한다. 동경의 긴자(銀座)보다 뉴욕의 브로드웨이보다 더 멋진 시대
가 있었다는, 우리 현대예술의 찬란한 꽃을 피웠던 그 때의 명동이야기를 시
작한다.
검은 머플러와 검은 눈동자의 막걸리 잘 마시고 담배도 잘 폈던 전혜린, 처
자 있는 이성과의 사랑 때문에 고민하는 남궁연, 당장 먹고 마실 돈은 없어
도 늘 자신의 옷차림과 시인의 품위를 잃지 않았던 명동신사 박인환의 일화
들이 보여진다.
하지만, 사실은 이러한 극 진행이 이봉구의 상상으로 밝혀지게 되며, 이봉
구는 작가이자 제자인 심현규를 만나서 이 시대의 명동을 희곡화하기를 부
탁한다. 심현규는 그 시대의 예술사적 의의는 인정하지만, 너무나도 다양한
인물과 그들을 하나로 엮을 수 있는 주제의식의 방만함으로 어렵다는 뜻을
전하지만 결국, 이봉구의 강력하며 때로는 간절한 부탁을 받아들이게 된다.
전후의 폐허가 된 명동, 그리고 그 안의 다방. 당시 연락할 방도가 미비하
고 무엇보다도 가난했던 예술가들은 자주 다니는 다방에 모여 연락을 하고
그들의 만남의 장소로, 그리고 심지어 그들의 집필 장소로까지 이용하게 되
었다.
당장의 생활비가 없어도 값싸게 먹을 수 있었던 근처의 선술집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도 이 때의 당연한 행로였던 것이다. 또한 토론 문화가 발달했던
것도 이 시기였고, 급기야 말싸움으로 옮기는 것은 너무나 자주 보던 풍경이
었다.
카페 은성에서는, 자꾸만 영화와 텔레비전에 옮아가는 기성과 젊은 연극인
들을 보면서 자조적으로 맥주를 마시던 이해랑은, 남궁연에게 비뚤어진 사랑
에 대한 열정을 연극으로 쏟으라고 충고한다. 남궁연은 체홉을 해야 할 때가
왔다는 이해랑의 말을 듣고 갈매기에서 니나를 죽게 한다면 해볼 마음이 있
노라고 말을 한다. 이때 술에 취한 취객이 이해랑을 알아보고 이 카페에서
연극을 해 보라 하는데, 주위의 말림에도 불구하고 남궁연은 삼류 관객에 맞
는 삼류 남궁연의 연기를 보여주겠노라고 하면서 갈매기의 극중 극의 한 부
분을 격정적으로 연기한다.
한편 제자인 한민수 교수를 만나러 온 이봉구는 여느 때 같지 않고 뜸을
들이는 제자에게 어떤 강의냐를 묻고, 이번에는 늘 자신이 해오던 해방전후
사의 문학사가 아니라 현재 신인작가의 성향에 대한 특강부탁에 의아하게
생각한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제자인 한민수는, 예전에 하던 강의를 김수형 선생
에게 맡긴다는 말을 한다. 이봉구와 동년배인 김수형은 그때 당시 이봉구와
그 주변의 예술인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으로, 이
봉구 역시 그를 진정한 예술인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잠시 후, 한민수와 이봉구의 만남이 극중 극으로 밝혀지고 이봉구는 심현규
에게 희곡 초안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한다. 특히, 김수형이란 인물의 등장이
마땅치 않은 것이다.
하지만, 심현규 또한, 더 이상 물러나지 않고 급기야 그 때 당시의 예술계
선배들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기까지 이른다. 그리고 인후암이라는 얘기를 사
모님을 통해서 들었고 어서 병원에 입원하시라고 종용한다.
격노한 이봉구는 급기야 쓰러지고 휠체어에 실려 나가게 된다.
이봉구가 없는 다방에서 전혜린과 박인환은 각기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시
를 짓고 노래를 부르다 퇴장한다.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를 여배우가 읊으
면서 박인환의 장례식이 거행되고 이봉구는 그것이 마치 실제 한 듯이 참담
한 기분으로 급기야 흐느낀다.
환상인가? 그런 이봉구에게 김수형이 난데없이 등장한다. 그리고 자신의 내
적 고백을 하게되고 결국에는 이봉구와 김수형이 화해의 건배를 하게 된다.
김수형이 퇴장하면 이봉구 혼자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 심현규는 극장 대관
이 되었고 기획자가 잡히고 최고의 제작여건에서 공연할 수 있다고 흥분된
어조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봉구는 이 희곡의 공연을 반대하고, 나중에는 이제라도 자신이
물러나야 되겠다는 말을 한다. 설득에 실패한 심현규가 퇴장하면 처음장면과
같이 가림 막이 쳐진 상태에서 이봉구는 관객들에게 이제는 변한 명동에 대
해서 말
한다. 그리고 한 때 찬란히 폈던 명동의 예술가들을 꽃으로 비유하면
서 그들을 명동야화에 비유한다. 그의 얘기가 끝날 즈음, 가림 막 뒤에서 명
동의 꽃들이 한 명씩 등장하고 마지막에 소년이 등장한 후, 김수형이 등장하
여 전에 고백 못한 심정을 이야기한다. 이제는 모두들 퇴장한 지금, 이봉구
는 마지막 강의를 하겠노라고 하면서, 이 시대의 예술가의 역할에 대해서 열
변을 토하며 퇴장한다.
등장인물
이봉구 : 일명 명동백작. 명동을 잊지 못하는 만년의 노 작가
심현규 : 희곡, 텔레비전, 시나리오 작가
김수형 : 일명 객관적, 이봉구와 동년배 작가
박인환 : 시인, 영화평론가
전혜린 : 시인, 수필가, 소설가
남궁연 : 비련(悲戀)의 배우
이진섭 : 작곡가
임만섭 : 성악가
이해랑 : 연극연출가
마 담 : 모나리자/은성 다방
소 년 : 담배와 꽃을 파는
한민수 : 극중 극에서 명동백작의 제자, 국문과 교수.
명동백작 : 극중 극의 이봉구, 국문과 정년 퇴임 교수.
감 독 : 만년 삼류 조감독
강 사 : 감독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을 가진
취 객 : 현재와 과거의
조명화 : 시인
김상주 : 시인
손님1 : 화가
손님2 : 소설가
손님3 : 수필가
손님4 : 춤꾼
대학생1 : 여학생
대학생2 : 남학생
그 외에 현재와 과거의 명동야화(明洞夜花)들……
때
현대와 1950/60년대의 명동.....
무대
극장은 중극장이 적당하겠다.
1950년대, 명동에 있는 모나리자 다방과 카페 은성의 실내 모습과 현재의
명동의 모습이 효과적으로 교차되어 보여주어야 한다.
비고
실존인물에 대한 인물구축은 그들의 행적과 자료를 통하여 사실적으로 접
근하였으며 다만 극적 구성에 따라 실존 인물에 대한 시대배경과 인물관계
에 있어서 부분적으로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음을 밝힌다.
프롤로그
관객들 입장이 끝나면, 요란한 음악과 젊은이들이 객석으로 음악에 맞춰 춤을 추
며 등장한다.
DDR을 하는 무리들.
옷을 사는 무리들.
머리의 염색을 하고 나오는 무리들
미니스커트의 아가씨.
심지어 동성애를 암시하는 듯한 커플도 보인다.
이들은 각기 어느 건물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변해야 되고 이들의 행동은 음악의
템포에 어울려야 한다.
잠시 후,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가로등의 불이 하나씩 켜지면, 무대 후면으로
각기 퇴장한다.
어느덧 등장한 작가인 심현규는 마지막 퇴장하는 젊은이까지 호기심있게 쳐다본
다.
한참을 등지고 있던 심현규는 한쪽의 벤치에 앉아 무언가 급히 적고 있다.
1장 / 명동백작
노신사가 지팡이를 짚으며 천천히 무대 앞으로 등장한다. 중절모를 쓰고 파이프에
담배연기를 내뿜기도 한다. 1950년대 유석 조병옥 박사 같은 명동의 멋쟁이들이
즐겨 입었던 차림이다.
(이 노신사는 일명 명동백작이라 일컬었던 이봉구의 역할과 부분적으로 해설자의
기능을 하기도 한다.)
이봉구가 자리를 이동할 때, 당시의 사회상(일상 생활적인 부분)을 중심으로 영사
된다. 초창기에 나온 시에프 장면, 이승만의 연설하는 모습, 해공과 유석선생의 장
례식 모습, 꿀꿀이죽과 양갈보의 모습이 영사되고, 당시 성황리에 상영되었던 외국
산 영화들이 영사된다.
잠시 후, 프랑스 영화 고리키의 "밤주막"이 작은 볼륨의 대사가 들리면서 영사되
면 이봉구가 대사를 시작하게 된다.
이봉구 : 프랑스 영화에 고리키의 소설을 영화화한 "밤주막"이 있었죠. 주인
공인 남작이 몰락해서 룸펜들이 우글거리는 술집으로 찾아가는 장
면이 나옵니다.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고개를 숙인 채 갈지자걸음으로 걷는 주연
배우 루이 주베의 걸음걸이와 내 걸음걸이가 비슷하다고 해서 문인
들이 별명을 붙여 주더군요. 명동 백작이라고요.
(웃으며) 처음엔 명동남작이라 했다가 이왕이면 백작이 낫지 않겠
느냐고 의견이 모아졌다고 해요.
이봉구는 자신의 주변으로 분주히 어디론가 바삐 움직이는 행인들과 함께 명동을
돌아다본다.
심현규는 한쪽에서 등장해 노트를 들고 역시 명동 주변을 돌아다본다.
이봉구의 대사에 따라 무대 위에 현재의 명동이 형상화된다.
이봉구 : 명동은 행정구역상으로 중구 명동1가와 2가, 충무로 1가와 저동1가
와 남산동 1,2,3가를 안고 있습니다. 넓이라고 해봤자, 0.429평방킬로
미터정도인데, 참으로 오밀조밀하게 밀집해 있습니다. 이 곳의 유동
인구는..... (웃음) 제대로 파악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세상
이 좋아졌는지 어느 신문에 약 이백만명이라고 하기는 합니다.
저기 롯데백화점에서 앞으로 건너다 보이는 골목이 바로 명동의
정문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가장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유네스코회관, 명동파출소를 지나 명동성당, 삼일로까지는
소위 말하는 명동의 노른자라고 합니다. 바로 이 명동으로 해서 북
쪽은 을지로, 남쪽은 충무로로 통합니다.
무대 안쪽에서 마치 천상에서 들려 오는 듯, 아련한 목소리가 들린다.
전혜린 : 선생님!
박인환 : 선생님!
이봉구는 듣지 못하고 계속해서,
이봉구 : 이쯤이면 아마도 명동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설명을 한 것 같군요.
사실, 충분하죠.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맞습니다. 현재 명동은 만원입니다.
명동의 밤거리에 몰려든 아베크족과 화려한 네온사인의 명동야경이 펼쳐진다.
밤에는 몰려드는 사람들과 그들을 유혹하는 온갖 옷가게들과 술
집들로 불야성을 이룹니다.
유행의 메카! 안타깝게도 그전부터 유일하게 내려오고 있는 명동
의 이름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가림막 안의 전혜린이 의자에 앉는다.
검은 머플러에 검은 색 양장, 그리고 유난히 검은 눈동자와 검은 머릿결에 단발머
리를 하고 있다.
임만섭이 라파로마를 부르며 역시 의자를 들고 들어와 앉는다. 지금은 때가 끼고
주름이 많지만, 한때는 가장 고급스러웠었던 연미복장을 하고 있다.
무대에는 서서히 화려한 현재의 명동에서 50년대, 폐허의 명동의 모습으로 바뀌어
나간다. 그곳에 예술인들이 등장한다.
이봉구 : 무엇보다도 명동은 문화의 거리입니다. 아니 예술인들의 거리였습
니다. 예술가들의 만남의 장소였고 그들의 작업실이었습니다.
(작은 한숨) 저의 소중한 청춘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현대예
술의 청춘시절이었습니다. 현대예술의 시작이었고 꽃도 피웠던 절정
이기도 했습니다. 그 수많은 꽃들을 감상하는 것으로도 저는 충분히
취했습니다. 황홀했었고, 가슴이 저리고, 정말이지 한끼의 밥보다 그
들과 나누는 쓴 커피한잔과 소주한잔으로 충분히 배불렀던 시기였
습니다.
(강연하는 말투로) 그렇습니다! 동경의 긴자(銀座)가 뉴욕의 브로드
웨이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라면 명동은 긴자의 축소판이었습니다.
하지만, 명동은 동경의 긴자나 뉴욕의 브로드웨이보다 훨씬 멋진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봉구는 눈을 감으며 회상에 젖는 듯 하다.
갑자기 비행기의 굉음과 폭발음 소리가 들리면서 조명이 어두워진다.
2장 / 명동의 꽃 Ⅰ
현인이 부르는 "신라의 달밤"이 흘러나오면서 무대에 서서히 조명이 들어온다.
어느덧 '모나리자' 다방의 간판이 보이면서 50년대의 다방 모습이 꾸며졌다.
담배를 꼬나 문 전혜린이 앉은 테이블과 반대쪽에 이봉구는 혼자 앉아있고 주변으
로 진지하게 토론을 하고 있는 무리들이 보인다.
전혜린은 마침 옆 테이블에 차를 건네주고 지나가는 마담을 붙들어 세우며,
전혜린 : 유행가뿐이에요? 이 집은?
마담은 전혜린의 느닷없는 질문에 당황하지만 여전히 친절하게,
마 담 : 네, 명곡은 좀 지루해서요.
전혜린 : 마담의 교양이 의심스럽군요.
마 담 : 교양이라고요?
전혜린 : 교양의 척도를 알 수 있단 말이에요. 다시 말하면 무식하다는 거
죠.
마담의 얼굴빛이 변하며,
마 담 : 원래 저는 무식한 사람이에요
전혜린 : 무식하다는 게 자랑인가요? 무식한 줄 알면 공부를 해야죠. 모나리
자에 갑자기 유행가가 뭡니까? 이럴수록 손님이 더 오지 않잖아요.
미안해요. 너무 떠들어서. 선생님, 나가십시다. 은성에 가서 막걸리
라도 마시는 편이 좋겠어요.
그 모습을 반대편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봉구는 잠꼬대를 하듯, 혜린의 이름을 부
른다.
이봉구 : 혜린아!
약간 기분이 상한 듯, 모나리자 마담이 이봉구 앞으로 다가온다.
마 담 : 이름이 뭐라고 해요?
이봉구 : (계속 꿈을 꾸듯) 혜린이, 전혜린.
마 담 : 전혜린? 저 여자가 법대에 다니나요?
이봉구 : 그렇지.
마 담 : 머리가 지나치게 똑똑한 것 같아요. 오늘은 꼼짝 못하고 호령을 들
었어요. 내일이라도 이곳에 나오면 제가 차 한잔 대접해야겠어요.
유행가는 끄고 모르는 것은 배워야죠.
어딜 잘 나가죠 그 여대생?
이봉구 : 돌체라는 순 명곡 다방.
마 담 : 그렇군요. 여간 보통내기는 넘는 여대생이에요. 정말 제가 슬슬 비
위를 맞춰야 하겠어요. 진정이에요 그 아가씨가 우리 다방에 나오는
거, 환영이에요.
모나리자 마담은 다시 카운터로 향한다.
전혜린은 이봉구 옆에 자리하고 은성 마담이 막걸리와 두부안주를 내놓는다.
이봉구는 앉은자리에서 관객을 향하여
이봉구 : 검은 눈동자의 무서운 소녀!
혜린의 기억은 이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리 어둠 속
에서라도 그녀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으니까요. 그것도 무섭게....
여대생이 드물던 서울대 법대에 다니던 혜린은 막걸리 잘 마시고
담배도 잘 폈습니다. 또한 박식하고 직설적인 말투는 나이를 떠나서
무섭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녀가 무섭다는 것이 아니라, 삶을 무섭도록 처절하게 살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한참을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던 전혜린이 관심 있는 기사를 읽는다.
전혜린 : (여전히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18세란 젊은 나이에 "슬픔이여 안
녕"을 써서 세계적인 유행작가가 된 프랑스와즈 사강도 벌써 마흔
살의 고개를 넘었어요. 스피드 광이었고 도박에 미쳤었던 그녀도,
지금은 아주 변해버렸어요. 새빨간 로스타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
는 일도 가끔씩 밖엔 하지 않게 되었고, 루우레트 도박도 이제는 안
녕이라는군요.
파리의 룩셈부르크 공원 가까이에 있는 벤치에서, 열 두 살 난 외아
들 도니와 함께, 이제는 중년 여인의 생활을 하고 있데요.
여기 옵서버 誌에 나와 있네요.
선생님!
사강의 작품 읽어보셨어요?
이봉구 : 사강?
전혜린 : 네. "어떤 미소"
이봉구 : 아직......
전혜린 : 전 요즘 원문으로 읽었어요. 꼭 번역을 해서 책을 내고 싶어요.
이봉구 : 귀신이로군.
전혜린 : 뭐가요?
이봉구 : 못하는 외국어가 없으니.
전혜린 : 좀 아는 정도예요. 이번에 서독에 가면 한번 지독하게 해봐야겠어
요.
이봉구 : 뭐를?
전혜린 : 바람도 쏘이고 파리 세느강도 가보고, 연애도 해보고.
이봉구 : 부러운데......
전혜린 : 그러치만 말고 한번 오세요.
이봉구 : 허 내가 어떻게.
전혜린 : 명동
백작 작위를 벗어버리고 명동 거리에서 탈출!
이봉구 : 벼르기만 하다가 그냥 가고 말거야.
전혜린 : 에이 또 그런 말씀이셔.
이봉구 : 혜린이 돌아오는 날이나 기다리는 거지.
전혜린 : 그게 언제쯤 될까요?
저도 언젠가는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아내로서 어미로서의 삶을
살겠죠?
이봉구 : 그럼 혜린이는 잘 해낼 거야.
전혜린 : 저도 잘 해낼 자신 있어요.
그런데 그런 그림들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자꾸만 제 영혼은 밑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아요.
아세요?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지금도 바로 선생님 옆에서 절 물끄러미 쳐
다보고 있다는 것을.....
이봉구 : 그럼 나는 앞에 있는 혜린보다 옆에 있는 혜린이랑 술을 마셔야
되겠네.
이봉구는 자신의 옆에 사람이 있는 양, 잔을 권한다.
전혜린 : 그렇죠? 선생님도 그런 혜린을 사랑하시죠?
대신 저는 그거 한번에 드시면 카르코의 시를 읊어 드릴게요.
이봉구와 전혜린이 술잔을 부딪치고 서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잔을 비운다.
이봉구 : 자! 그럼 혜린의 시 낭송 솜씨 좀 들어볼까.
이봉구가 눈을 감자,
전혜린은 카르코의 시를 읊으며 퇴장한다.
전혜린 :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흘러도
비용은 가서 없고
베를렌느 또한 없다.
천천히 눈을 뜨는 이봉구는 전혜린의 빈 공간을 쳐다보지 않고 그저 느끼며,
이봉구 : 카르코의 시는 그만입니다. 더군다나 그 기분을 아는 전혜린도 그
만이고요.
박인환과 남궁연이 등장한다.
지금 명동에는 창고극장 하나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때 당시에는 시공관을 비롯해서 부민관, 수도극장 등이 있어 배
우들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남궁연은 푸시킨의 시를 줄줄 외울 정도로 문학 소녀적인
교양도 있었습니다.
박인환은 때 이른 혹은 늦은 겨울코트를 입고 머리 전체를 빗어 넘겼으며,
남궁연은 세련된 양장을 입었다.
둘은 이봉구의 자리로 앉는다.
박인환의 질문에,
남궁연 : 에잇 나만 그런가, 김양춘이는 처자 있는 이서향과 심영, 두 사람
속에 끼어 사랑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데.
박인환 : 내일이 공연인데 괜찮겠어?
남궁연 : 내일이 공연인데 몸을 아껴야지. 그렇지?.
에이 그렇지 않다면 속상한 데 한잔 마시고.
박인환 : 물론 그렇지 않지, 물으나 마나야!
남궁연 : 취해 있는 동안은 잊을 수 있지만 이거 참 큰일 났어.
박인환 : 뭐가?
남궁연 : 처자 있는 사람과의 사랑, 즉 내 신세 때문에....
박인환 : 웬만하면 끊어버리지.
남궁연 : 그럴 수도 없고.
박인환 : 그러면 윤심덕처럼 정사를 해버리든지.
남궁연 : 죽을 수도 없고.
박인환 : 이거 뭐 이토록 시시해. 그럼 죽기가 싫거든 안기영, 김현순이처럼
어디로 멀리 달아나 버리든지.
남궁연 : 달아날 형편도 못 되고.
박인환 : 아니 이거 정말 꼴불견이네. 못나 빠진 꼴 보기 싫다. 집어치워라.
남궁연 : 그래 네 말대로 남궁연은 시시한 여자다. 집어치우자, 끊지도 못하
고 죽지도 못하고 도망도 못치는 이 바보!
내 마음을 아는 바커스여! 대답을 하라.
테이블에 있는 조니워커병을 위로 치켜들며,
남궁연 : 이 조니워커를 한 번에 다 마시면 제가 이 술값을 내겠어요.
박인환 : (혼잣말처럼) 가난한 시인에게 조니워커는 부담스러운데......
남궁연이 쉽게 조니워커병을 비우고 자신의 머리에 남은 방울들을 뿌리며,
남궁연 : 시시한 연애 얘기는 집어치우고 우리 그 날의 8.15로 돌아갑시다.
저희 마음대로 삼팔선을 그어 국토를 양단 시켜 놓고 이제 미소공
동위원회(美蘇共同委元會)란 무슨 수작이냐.
고하(古下) 송진우 선생은 해방된 조국 땅에 동족의 손에 쓰러지고
이거 안되겠어 우리 8.15 그날의 감격으로 돌아갑시다!
주위에서 박수소리가 들린다.
남궁연 : 우리 오아시스로 가죠!
이봉구 : 위스키 마시고 오아시스라...
남궁연 : 속을 식혀야죠. 오아시스는 찬 커피 맛이 그만이거든요.
남궁연의 성화에 못 이겨, 이봉구와 박인환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반대편에서 담배와 꽃을 잔뜩 안은 소년이 등장한다.
소 년 : 담배사세요! 꽃 사세요!
소년은 다른 손님에게 몇 갑의 담배를 팔지만, 꽃은 기어코 팔지 못한다.
이윽고 소년은 남궁연을 발견하고 앞에 다가서며,
소 년 : 아줌마! 꽃 하나 팔아주세요.
남궁연 : 꽃?
소 년 : 네! 저는 아줌마가 제일 좋아요.
남궁연 : 얘가 왜 이래?
이봉구 : 남궁연의 가장 어린 팬이네.
박인환 : 가장 어린 연인일 수도 있죠.
남궁연이 박인환을 향하여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취 객 : 내가 봤을 땐 장사수단은 어른인데.
소 년 : 아니 정말이에요.
남궁연 : 그래 나의 어디가 좋으냐?
소 년 : 다 좋아요.
모두들 소년의 천진함에 웃는다.
남궁연 : 얘가 정말 보통 단수가 아닌데?
소 년 : 장삿속이 아니고 진정이라니 까요.
박인환 : 진정이라..... 이거 큰일 났구나. 내 말이 점점 맞아떨어지는데.
소 년 : 아줌마가 외는 푸쉬킨의 시를 참 좋아한다구요.
취 객 : 푸쉬킨의 어느 시? 만약 이 소년이 푸쉬킨의 시를 암송한다면 아
름다운 남궁연씨에게 위스키 한 병을 사리라.
주위에서 박수소리가 이어진 후, 조용해진다.
소년, 잠시 동안 생각하고 나서, 남궁연의 연기를 흉내내듯이 멋들어진 배우의 흉
내를 내며,
소 년 : 삶이 당신을 저버린다 해도 서러워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은 끝까지 참고 견뎌라.
그러면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라
마음은 미래를 바라지만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은 그리움으로 남게 되리니.
남궁연 : 제법인데.
소 년 : 기분이 좋지 않으면 오늘은 그만두시고 다음날 팔아주세요.
마담이 남궁연이 앉은 테이블로 위스키 한 병을 갖다 준다.
남궁연 : 기분! 기왕이면 오늘 팔아주지.
소년이 한 다발 이상의 커다란 꽃 뭉치를 남궁연에게 안겨준다.
소 년 : 그 꽃은 아줌마 애인에게 드리세요.
남궁연 : .....뭐라고?
소 년 : 아줌마 같은 분에게 애인이 없을라구요.
주위가 온통 웃음바다다.
다만 남궁연 혼자 표정이 점차 굳어진다.
박인환 : 자! 이제 오아시스로 갈까?
남궁연은 다시 앞에 놓여진 위스키를 병 채 들이킨다.
남궁연 : 잠깐! 아직 오아시스의 찬 커피를 마시기엔 더운술이 더 필요해요.
여기 더운 위스키! 뜨거운 위스키 한 병 줘요!
박인환 : 자금이 딸리는데...
남궁연 : 술값 걱정은 마. 이 집은 내가 얼마든지 통하는 집이니까.
남궁연의 눈은 어느덧 젖어 있다.
이제는 취한 듯, 힘들게 일어선 남궁연은 다른 손님에게 꽃을 팔려다 실패하고 이
제 퇴장하려는 소년을 급히 부른다.
남궁연 : 헤이 플라워 보이!
소 년 : 네? 저요?
남궁연 : 지금 밖에 비가 오니?
해가 지고 있지만, 비가 오지 않음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소 년 : 아줌마가 원하시면요.
남궁연 : 그건 내 물음에 답이 안돼.
소 년 : 아줌마가 원하시는 만큼 오고 있어요.
남궁연에게만 비가 내린다. 함께 추적스런 빗소리가 따른다.
남궁연 : 좋았어.
남궁연은 근처의 술병을 들어 자신의 머리에 쏟아 분다.
남궁연 : 여러분! 비가 오고 있어요.
자! 다시 그날의 8.15, 그 감격으로 돌아갑시다.
손 님 : 정치적 언사는 집어치웁시다.
남궁연 : 무식하면 침묵이 제일. 이것은 김기림의 시 "우리들의 8월로 돌아
가자"예요.
이봉구 : 김기림 좋지.
남궁연 : 김영수 선생도 혈맥에서 원칠의 대사에 이 시를 인용하고 있다고
요.
박인환 : 자! 우리 비련의 배우 남궁연에게서 김기림의 시를 들읍시다.
주위에서 다시 박수소리가 이어지고, 기분이 들뜬 남궁연은 탁자 위에 올라가 시
를 읊는다.
시를 읊으면서 감정이 격해지며, 나중에는 시낭송조가 아니라, 연설조에서 탄성으
로 급기야 통곡으로 바뀐다.
(남궁연의 연기에 따라 해방전후와 한국전쟁 등의 영상이 비춰지며, 가끔씩 천둥
이 치기도 한다.)
남궁연 : 들과 거리, 바다와 기업도
모두 다 바치어 새나라 세워가리라
한낱 벌거숭이로 돌아가 이 나라 주춧돌 괴는 다만 조약돌이고자
원하던
오- 우리들의 8월로 돌아가자
명예도 지위도 호사스런 살림 다 버리고
구름같이 휘날리는 조국의 깃발 아래
다만 헐벗고 정성스런 종이고자 맹세하던
오- 우리들의 8월로 돌아가자
어찌 닭 울기 전 세 번뿐이랴, 다섯 번, 일곱 번,
그를 모른다 하던 욕된 그날이 아파
땅에 쓰러져 얼굴 부비며 끊는 눈물 눈 뿌리 태우던 우리들의 8월
오- 8월로 돌아가자
나의 창세기 에워싸던 향기로운 계절로
썩은 연기 벽돌더미 먼지 속에서
연꽃처럼 혼란히 피어나던 팔월
오- 우리들의 8월로 돌아가자.
주위의 박수를 받으며 남궁연은 커튼 콜 후, 뜨거운 감격을 안고 퇴장하는 배우처
럼 비와 비 소리와 함께 홀연히 사라진다.
주위의 사람들은 다시 앉지만 이봉구 혼자, 남궁연이 퇴장한 곳을 바라보며 그대
로 서 있다.
이때 한쪽에서 술에 취한 박인환이 일어서서 나가려 하자, 이봉구는 여유 있고 다
정한 목소리로 그를 부른다.
이봉구 : 인환아!
박인환 : 네 명동백작님.
이봉구 : 자네는 아직 퇴장하면 안되네.
박인환 : 뭐라고요? 하하하, 저는 퇴장이 아니라 커트백 되어서 다시 오겠습
니다.
다시 나가려는 박인환을 붙들어 앉히며,
이봉구 : 아직 아니라니까. 내게 명동샹송을 들려줘야 되잖아.
박인환 : 노래가 듣고 싶으시다고요? 신라의 달밤을 불러드릴까요?
아아아아아....... 신라의 밤이여....
이봉구 : 아니, 자네의 노랠 듣고 싶어.
박인환 : 참 선생님도, 저는 시인입니다. 노래는 가수한테 들으셔야죠.
박인환은 프론트 근처에서 역시 술에 취한 채, 어느덧 흐르는 베토벤의 9번 교향
곡 "합창"을 지휘하고 있는 임만섭을 보고,
박인환 : 어이 만섭이!
임만섭 : 명동신사께서 왜 그러시나?
박인환 : 자네의 노래를 명동백작께서 듣고 싶으시다네.
임만섭 : 역시 명동 백작님은 예술을 즐기실 줄 아시는 구만.
자, 뭐든지 신청하십시오!
이봉구 : 가수도 있으니 이제 곡만 붙이면 되겠네.
임만섭 : 네?
박인환 : 뭐라고요? 곡만 붙이면 된다고요?
어디에 곡을 붙입니까?
이봉구 : 그거야 당연히 시인인 자네가 시를 써야지.
자! 여기 이진섭이도 오지 않았나?
이진섭이 다가온다.
박인환 : 오 진섭이! 자네가 나의 시에다 곡을 붙일 텐가?
이진섭 : 내가 자네의 시에다 곡을 붙인다고? 그건 언어도단일세. 내 곡에
자네 시를 끼워 넣어야 그나마 어줍잖은 노래가 나오지.
임만섭은 박인환과 이진섭의 대화에 기분 나빠하며.
임만섭 : 야 임마들아! 그럼 그렇게 붙인 시와 곡을 나는 또 어떻게 부르라
는 얘기야!
이봉구 : 자자 임만섭이 자네는 잠시만 기다리게. 아직 자네가 나설 차례가
아니야.
박인환 : 좋습니다. 그럼 선생님이 제목을 지으십시오.
이봉구 :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지. 세월이 가면......
이봉구가 '세월이 가면'을 외치면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박인환 작시 이진섭 작곡의
"세월이 가면"이 경음악으로 연주된다.
이봉구가 음악에 취해 있으면 모두들 서서히 퇴장한다.
3장 / 명동을 무대로
어느덧 등장한 제자인 작가 심현규가 등장해 있다.
아직도 환영에 잡혀있는 이봉구를 거의 깨우다시피 어깨를 흔든다.
심현규 : 선생님 식사는 하셨어요?
이봉구 : (환영에서 깨어난 것이 못내 아쉬운 듯) 한 육십년 넘게 먹었더니
질렸어.
심현규 : 그러시면서 술은 꾸준하시네요. 그것도 꼭 맥주만......
이봉구 : 그건 그렇고 글은 잘 되가나?
심현규 : .....선생님, 그때 얘기는 지금에 안 맞아요.
이봉구 : 뭐가 안 맞아. 지금의 얘기들이 그때 다 들어가 있는데!?
심현규 : 어떻게 드라마로 엮어요. 어떻게 갈등을 만드냐고요. 인물들이 너
무 많잖아요.
이봉구 : 그 시대자체가 갈등이고 드라마야. 그리고 각기 인물들 자체가 소
재고 주제고 갈등이야. 인물이 많은 만큼 갈등도 많고 소재도 많고
좀 좋아?
심현규 : 그러니까 제가 드리는 말씀은 그걸 어떻게 희곡으로 쓰냐고요.
이봉구 : 그건 희곡작가가 알아서 할 일이지. 왜 나한테 묻나?
심현규 : 저 역시 예술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의 하나였다고도 생각해요.
이봉구 : 그런데?
심현규 : 다만 희곡으로는 어렵다는 거예요. 인물이나 소재들이 너무 다양해
서 두 시간 안에 그 얘기를 하기가 힘들다고요. 더군다나 그 시대
적 배경에서 단순히 예술가들 얘기만 꺼내면 오해받을 수도 있다고
요.
아무튼, 소설이나 다른 장르라면 몰라도 희곡은 정말 어렵습니다.
이봉구는 참았다는 듯이 맥주 한잔을 쉬지 않고 비운다.
이봉구 : 자네.... 바쁘나?
심현규 : 예?
이봉구 : 요즈음에 텔레비전도 하고 영화 시나리오도 쓴다면서.
심현규 : 먹고살려면 하는 수 없어요. 그리고 꼭 먹고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
라, 지금은 각기 매체에 매력이 있어요. 선생님도 대중매체의 중요
성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이 있잖아요.
이봉구 : 그래 바쁘구나. 이제는 고리타분한 연극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
앞으로 개인적으로 면대하기가 힘들겠군. 아니 그럴 필요가 없지.
가만히 안방에 누워만 있으면 자네의 작품이 나오는데 일부러 이렇
게 사서 고생할 필요가 없지.
심현규 : 선생님!
이봉구 : 이건 연극으로 해야된다니까. 직접 배우들이 연기하고 그것을 관객
들이 봐야한다니까. 그래야 알 수 있어. 처절했고 고독했고 절망했
지만 한 끝자락의 가능성이라도 큰 희망으로 보았던....
그건 배우들이 직접 연기하고 관객들이 극장 안에서 같이 숨쉬면
서 느껴야 돼.
이봉구, 심현규의 눈치를 보며 그만 일어서려는 시늉을 한다.
이봉구 : 안되겠구먼. 누가 연극 잘하나?
심현규 : 예?
이봉구 : 연극쟁이 누구 소개 시켜 주라.
누가 있나? 이진순, 이해랑 다음에 누가 있어!
급기야 이봉구는 화가 나서 일어설 작정이다.
심현규 : (이봉구를 급히 말리며) 졌습니다. 제가 써볼게요.
이봉구 : (표정이 바뀌며) 언제까지 되겠어?
심현규 : 아시잖아요. 저 구상하는데 시간 걸리는 거. 그 동안 생각만 많았
지,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가닥을 잡은 적은 없어요.
이봉구 : 그거 그리 오래해도 안 좋다. 당장 내일부터 써라.
심현규 : 선생님!
명동에 대해서 어르신들과 인터뷰도 좀 해야 되고 자료수집도 해
야되고......
이봉구 : 그리고 처음에는 이렇게 했으면 한다.
심현규는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심현규 : 참 나, 벌써 선생님이 다 구상해놓으셨군요.
이봉구 : 그래, 뭐 까짓 거 내가 말로 해서 자네가 나중에 총괄 각색해라.
심현규 : 좋습니다. 선생님이 구술하시고 저는 옮겨 적고 부분적으로 짜 맞
추기만 하는 겁니다?
그럼 첫 장면은 생각해 두셨겠네요?
이봉구는 잠시 생각에 빠지며, 마치 실제로 그 모습이 보이는 듯이 설명을 한다.
이봉구 : 한 노작가가 무대에 등장한다.
심현규는 급히 노트와 펜을 꺼내 메모해 나간다.
그는 고리끼의 "밤주막"에 나왔던 루이 주베의 갈지자 걸음걸이를
하며 등장한다. 그래서 자신의 젊었을 때 이야기를 좀 하겠노라고
설을 푼다.
심현규 : 그리고요?
이봉구 : 그리고는 명동의 예술가들을 한 명씩 불러들이는 거지.
심현규 : 그래서요?
이봉구 : 그때의 일화들을 하나씩, 하나씩 들려주는 거다.
심현규는 한참 메모하다 멈춘다.
심현규 : 결말은요?
이봉구 : 뭐 벌써 결말이야. 할 얘기가 아직도 얼마나 많은데......
심현규 : (작은 한숨) 네 좋습니다. 그럼 이 연극의 주제가 뭐예요?
이봉구 : 명동이지.
심현규 : 명동 하면 요즈음 사람들 그저 사람 붐비는 곳 정도로밖에 기억
못해요. 그리고 땅값 제일 비싸다는 곳 정도라고요.
이봉구 : 사람들이 알고 있는 모든 예술가들이 그때 젊은 시절이었어. 시,
소설, 연극, 영화인들, 지금의 틀을 그때 당시 명동에서, 이곳 다방
에서 다 만들어 놓은 거야. 그것만큼 의미 있는 시기와 장소가 어디
있어.
심현규 : 그건 의미이고요. 주제로서는 너무 방만해요. 좋아요.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노작가가 말로써 다 설명하고 결론까지 내리면 아까 말씀
드렸듯이 연극성이 없어요.
이봉구 : 왜 연극성이 없나?
심현규 : 좋은 강의도 길게 하면 지루하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이봉구 : 아! 재미.....? 그러니까, 좀 지루하다 싶으면 그때 성악가를 등장시
키는 거야. 임만섭이가 등장해서 중간 중간에 노래 부르면 지루하
지 않을 거야.
심현규 : (황당해하며) 그럼 뮤지컬을 원하세요?
이봉구 : 뮤지컬? 라보엠 정도면 괜찮지. 그래! 뮤지컬보다는 오페라가 낫겠
다.
심현규 : 그럼 저는 안되겠군요. 오페라 대본은 음악을 알아야 돼요. 저는
음악을 몰라서 안되겠군요.
이봉구 : ......바쁘나?
심현규도 이제는 자신의 불편한 심정을 솔직하게 얘기한다.
심현규 : 오페라 대본은 음악을 좀 알아야 된다고요.
이봉구 : 누가 오페라 쓰랬나? 말이 그렇다는 거지. 다들 나와서 노래 부르
는 건 아니야. 임만섭이만 나와서 가끔 부르는 거야.
심현규 : 가끔 이요?
이봉구 : 아니 그저 한 서너곡.....
이봉구는 심현규의 눈치를 본다.
이봉구 : 아니 한 두어 곡 정도 부르면 돼지 뭐.
심현규 : (웃으며) 알았습니다.
둘의 웃음이 정겹다.
이봉구 : 그리고 이 책 갖고 가라.
내가 쓴 책 "명동야화"다. 말로 못한 것도 여기 다 적혀 있다.
심현규 :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선생님한테는 제가 안되겠습니다.
(나가다가 돌아서며) 그런데 그 노작가는 선생님이죠?
이봉구 : (머쓱하며) 어?
심현규 : 루이 주베의 갈지자걸음은 선생님 트레이드마크 아닙니까?
이봉구 : 왜 내가 직접 연기할까?
심현규 : 그러시죠 사실 감 나게.
심현규가 퇴장하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봉구가 맥주를 한 잔 들이키면,
갑자기 주위에서 박수소리와 환호성이 들린다.
이봉구는 무대 우측에 마련된 교탁으로 자리를 옮긴다.
4장 / 명동의 꽃 Ⅱ
이 장은 이봉구가 강연 중에 하나씩 에피소드들을 말하는 장면이다.
교탁으로 자리를 옮긴 이봉구는 배우들의 연기를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임만섭이 데스크에서 주위를 향해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다.
푸치니의 "라보엠" 중 로돌프의 '그대의 찬손'을 부른다.
임만섭 : 그대의 차디찬 손 내가 녹여 주리다.
이 어둠 속에서는 찾아도 쓸데없소.
다행히 달은 밝고, 또 가까이 있소.
내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는지 말하리다.
나는 꿈을 그리는 시인이라오.
다만, 시를 읊으며, 가난하나 기쁘게 부자같이 지내오.
시와 사랑의 노래, 아름다운 꿈과 이상의 낙원에서 마음만은 백만
장자처럼.....
빛나는 그대의 눈동자가 조용한 내 마음에 불길을 던져주오.
사랑스러운 그대의 눈길이 나의 꿈. 애 타는 마음을 흔들어 주고
있소.
잘 모르지만, 아마 사랑의 싹이 트고 있는 까닭인가 봅니다. 내 말
을 들었으니, 이번엔 당신 차례입니다.
임만섭이 이진섭이 있는 자리에 앉는다.
잠시 후, 급하게 박인환이 등장한다.
박인환 : 어서 겨울이 왔으면 좋겠어. 이게 뭐야? 여름은 통속적이고 거지
지. 겨울이 빨리 와야 두툼한 양복도 입고, 버버리도 걸치고, 머플러
도 날리고, 모자도 쓸게 아니야. 모두 노타이 차림으로 똑같이 다녀
야 하는 여름은 너무 통속적이야!
이진섭 : 홈스턴과 버버리와 머플러가 뭐 말라 비틀어진 거야!
진피스, 하이빌, 조니워커 따위를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는 것이 어
째서 우리의 수치란 말인가? 장꼭또의 시시껄렁한 재담한마디에 왜
우리가 흥분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이런 따위에 열을 올려서 소리치
고 흥분하고 탄식하는 인간이란, 속물치고도 아예 구제가 불가능 할
정도의 악성질환에 걸린 속물들이라고!
이봉구 : 박인환은 키가 백팔십센티였고, 얼굴도 작고 곱상하게 생겨서 웬만
한 영화배우 뺨치는 외모를 지녔습니다.
임만섭 : 김인수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박인환 : 김인수 그 친구, 죽기는 왜 죽어 살고 볼일이지.
이진섭 : 죽고 싶어 죽었나, 자기도 모르게 쓰러져간 것인데.
박인환 : 그게 뭐야 싱겁게 죽다니.
임만섭 : 술잔을 든 채 술집에서 죽었으니 원은 풀었잖아?
이진섭 : 김인수 원은 그게 아니야. 연주자요 지휘자인데 연주 장에서 연주
를 하다 쓰러져야 마땅하지. 당치도 않은 대포 집에서 쓰러지다니,
그건 음악가의 최후라곤 말할 수 없어.
임만섭 : 김인수 자신도 그렇게 속절없이 죽을 줄은 몰랐을 거야. 그러고
보
니 나도 비슷한 것 같은데 무대를 떠나 있으니.
박인환 : 꼭 무대가 있어야 노래 부르나, 그건 귀족사회에서나 하는 형식이
지. 다미아처럼, 미스 탕케트처럼 골목 어귀에서 술집에서 함께 부
르며 울며 웃는 게 진짜 노래요 예술이지!
이진섭 : 그래 바로 그거야!
임만섭 : 김인수를 위해 라파로마를 부를까?
박인환 : 라파로마에서 다음에 카르멘까지.
이진섭 : 야 그런데 임만섭이 술집에서 툭하면 노래를 부른다고 타락을 했
느니 뭐니 비난을 하는 자들이 있는데 또 말이 나겠군.
박인환 : 노래는 꼭 그 거추장스러운 복장을 하고 무대에서 불러야만 하나.
화려한 귀족들 앞에서 노리개처럼 불러야만 하는 그런 가수는 이제
생각을 다시 해야 할 필요가 있단 말이야.
임만섭 : 맞아! 샹송이 명동 거리를 흔들고 집의 꼬마들 입에서까지 샹송이
흘러나오고 있는 이때, 음악은 좀 더 대중 속으로 파고 들어가 그
들과 친해져야만 해.
이진섭 : 그럼, 돌체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명곡 감상만 한다는 정영일도, 임
만섭 자네의 노래엔 아무런 이의가 없다고 술잔까지 내밀었잖아?
이진섭이 자신의 대사와 함께 술잔을 내밀자,
박인환 : 그런 의미에서 한 곡조 꽝!
임만섭 : (라파로마를 부른다.)
일행은 즐겁게 잔을 부딪치며 임만섭의 노래에 맟춰서 흥얼거린다.
이봉구 : 그 시대의 소위 문화인들 가운데 대다수가 걸려있었던 유행병이
있었습니다. 샹송이 흘러나오기만 하면 가사의 내용도 모르는 주제
에 무조건 심취한 표정을 짓고, 서양에서 평이 좋은 영화만 들어 왔
다하면 '우' 몰려가서 감탄사를 연발하고, 단 한번도 읽지는 않으면
서 어딜 갈 때 면 꼭 불어로 쓰여진 책을 들고 다녔던 거죠.
이런 부류의 꽃들이 잔뜩 모여서 명동이라는 거대한 허영의 도시
를 탄생시켜 놓았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얼굴도 작고 곱상하게 생겼고 험프리 보가트 머리 모
양으로 상고머리를 한 박인환이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밉지는 않았습니다.
카페 은성이 밝아지면서 술을 내놓는 마담이 보인다.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구레나룻을 한 영화감독과 여성스럽게 무릎을 붙이고 술
을 마시는 강사의 모습이 보인다.
마 담 : 우리 집에 처음 오시는 분이신 데?
감 독 : 문화인들이 많이 모여드는 술집이라 하기에 왔습니다.
마 담 : 문화인이 따로 있나요, 다 문화인이지. 그렇지 않아요?
영화감독은 마담을 의식하며 멋지게 담배를 하나 꺼내 피운다.
마 담 : 그런데 뭐 하는 분이세요?
감 독 : 지금은 시나리오를 쓰고 있지만 앞으로는 감독을 해볼 생각입니다.
문화인과 그들의 분위기가 그리워서 매일 올 것 같소.
손님 중의 일부가 돈을 지불하고 나간다.
마 담 : 문화인이고 분위기고 제발 속만 썩이지 마세요. 술값이나 잘 내시
고 너무 큰소리로 기염을 토하지만 않으면 우리 집은 정말 순정지
대의 주막 같을 거예요.
감 독 : 마담 말씀이 그대로 영화 셰리프 같은데요. 순정지대의 주막, 영화
제목으로도 그만인데.
자 그런 뜻에서 한 잔 더!
마 담 : 오늘은 과하신 데.......
감 독 : 순정 지대의 주막에서 술의 제약이 있어서야 됩니까? 뻗거나 넙치
가 되거나 그날 밤 기분 여하로 주량이 결정되어야 하는 거지.
비가 내린다.
감 독 : 눈이 와야 기분이 나는데.....
마 담 : 국산 영화 경기가 절정이라면 서요? 자유부인을 보세요! 돈은 모조
리 영화관에서 돈다는데, 이런 때 빨리 하나 만들어내셔야지.
그래야 저도 덕을 보잖아요.
감 독 : 마담께서 무슨 덕을?
마 담 : 공구경 하는 정도 말이에요.
감 독 : 난 또, 겨우 공구경 정도로.
마 담 : 그것도 과분하지요.
감독은 다 핀 담배를 끄고 다시 한 대를 피워 문다.
마 담 : 누런 봉투를 끼고 명동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모두가 시나리오
쓰는 사람들이라면서요?
감 독 : 그만큼 많다는데서 나온 말이겠지요. 뭐, 어떤 입이 건 친구는 감독
만도 오십 명이 넘는다고 하더구먼. 그건 뻥일 게고 어쨌든 한 고
비지요.
마 담 : 선생님도 이 찬스를 놓치지 마시고 재미를 보셔야죠.
감 독 : 재미라니요? 그건 어폐가 있는 말씀이신 데, 예술을 장사의 재미로
보신다면 마담에 대한 인식을 달리해야겠습니다.
마 담 : 멋진 영화를 만들어 재미를 보시라는 거예요. 형편없는 것을 만들
어 일주일도 못 가 극장에서 걷어 치게 되고 제작자에게 빚만 태
산처럼 지우지 말란 말이에요.
감 독 : 그런 뜻의 재미, 이거 내가 암만해도 마담의 센스를 못 따라가겠군
요.
이때 대학강사가,
강 사 : 나는 영화인은 아니지만, 우리 나라에선 왜 "철도원(카사블랑카)"이
나 "세일즈맨의 죽음" 같은 영화가 못 나옵니까? 밤낮 간지럽게 눈
물만 짜내는 신파 쪽 영화뿐이니 이것은 결국 두뇌문제일 겝니다.
감 독 : 결국 두뇌문제라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그 책임의 일부를 나보고
져야 한다는 겁니까!
강 사 : 아니 그건 선생의 착각과 지나친 과대망상에서 나오는 말씀이고!
감 독 : 과대망상!?
강 사 : 그러면 뭡니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선생 자신이 뭘 하신다 하니까
그런가 하는 거지 활자화된 것도 본 기억이 없고, 그런데 무슨 책
임을!
급기야 감독과 강사는 서로의 멱살을 부여잡고 한창 싸울 기세다.
마 담 : 끝에 가서 이럴 줄 알았어요. 참 환장하겠어. 뜨물 같은 술을 마시
고 취해 저렇게 흥분을 하시니 건강에도 해로울 텐데. 이 장사를 그
만 둬야지.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옆 테이블의 이해랑이 남궁연에게 술을 따르며,
이해랑 : 참으로 수준 낮은 이들과 같이 못 있겠네. 그까짓 활동사진을 보고
어떻게 느꼈는지는 몰라도, 세일즈맨의 죽음은 연극으로 봐야지!
이해랑의 비록 지나가는 말이지만 단호한 말투에 감독과 강사는 기가 죽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봉구가 껄껄 웃으며,
이봉구 : 이해랑에 대해서는 그의 이름에 대한 재미있는 기억이 있습니다.
부산 피난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카리에스로 병석에 누워 있던
한노단 형의 부인은, 자기 남편이 해랑이와 술을 마시고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어느 날 문병을 간 유치친씨 부인에게 신열로 홍조된
얼굴을 돌리며 이런 질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해랑이란 여자 이뿐 여자예요?"
이봉구는 자신의 얘기를 듣고 스스로 흐뭇해하며 한참을 웃는다.
이해랑과 남궁연이 앉은 테이블에 조명이 밝아진다.
이해랑 : 연극이 오늘처럼 부진한 책임은 정통연극을 이끌어나가야 할 나잇
살을 더 먹은 기성 연극인들에게 있는 거야. 그들은 자신들이 바라
고 찾던 리얼리즘을 제대로 한번도 추구해보지 못하고 당초에는 아
르바이트로 시작한 활동사진에 입맛을 붙이고 거기에 빠져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잖아?
남궁연 : 그래도 배우들은 영화 매체에 관심이 많아요. 일면 신기한 것도 있
지만, 보다 대중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에 흥미가 많은가 봐요
이해랑 : 승호를 얘기하는 건가? 그 친구는 이 자리에 더 이상 설자리가 없
으니까, 그리로 간 거 아니야!
그 친구는 아까운 재능을 엉뚱한 곳에다 쏟아 붓고 있는 거라고.
그래, 자네도 활동사진에 출연하고 싶은 거로군.
남궁연 : 이동극장을 만드시니까, 함께 하자고 그랬잖아요?
이해랑 : 나한테는 아직 확실한 답변을 안한 것 같은데....
김승호의 얘기가 나오자, 다시 심각해지는 남궁연의 모습을 보고,
자네는 자네의 감성을 다스리지 못해.
남궁연 : 그것이 마음대로만 된다면 수녀원으로 갔거나, 선생님같이 연출을
하죠.
저는 천상 배우예요. 저주받은 배우.....
이해랑 : 또 그런 소리! 배우니까 그래야 한다는 거야. 자네는 당분간 무대
에 그 저주받은 감성을 쏟아 붓게나.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주체할
수 없게 돼.
남궁연 : (술을 한 잔 마신 후) 어제 그분이 출연한 영화를 봤어요. 지금은
다른 여자와 함께 산 다죠?
이해랑 : 자네하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야. 그건 자네도 인정했잖아?
남궁연 : 저는 버림받은 존재예요. 왜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다들 짝이 있는
거죠. 왜죠?
그 동안 아이도 한 명 지웠어요. 그리고 이제 정말 배우만 하면서
살 작정이었는데.....
들키지 않게 남궁연은 눈가의 눈물을 스스로 지운다.
이해랑 : 남궁연! 자네를 보면 갈매기 같애.
남궁연 : 체홉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해랑 : (반가와 하며) 그래! 이제 우리도 체홉을 할 때가 되었어! 자네가
니나를 맡게나.
남궁연 : 거절하겠어요. 만약 니나를 죽인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말이에요.
(갑자기 감정이 북받치며) 왜 뜨레블레프가 죽죠? 왜 체홉은 그런
니나는 살려두면서 정작 이제 촉망받는 젊은 작가를 죽이는 거죠?
왜 그 미친년은 뜨레블레프를 앞에 두고 뜨리고린을 사랑했다고 고
백하는 거예요? 제가 니나를 맡는 다면 저는 아마도 무대에서 죽어
버릴 거예요.
급기야 남궁연은 테이블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고 있다.
그런 남궁연을 시원스레 안아주지 못하고 이해랑은 씁쓸히 맥주를 들이키며 자조
적으로 말한다.
이해랑 :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춘희에 미친 아르 망을 달래는 아버지의
간절한 심정을 안고, 언제까지나 동굴에 비친 그림자 속에서 꼭두각
시놀음만 하지 말고 다시 무대에, 4차원의 진실한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권유했으나 이제는 그들의 마음을 돌릴
길이 없구나.
그런데 또 무대에 겨우 발이 붙을까 말까 한 젊은 연극인들이 텔
레비전에 팔려 놀아나고 있어.
현대의 연극에는 이들의 발목을 붙잡아 매놓을 만한 힘이 없는 것
이 안타깝기만 하구나.....
이해랑과 남궁연이 있는 테이블을 보고 있던 손님이, 둘이 사랑싸움을 하고 있는
것으로 오인하여 끼여든다.
손님1 : 이해랑 선생! 당신이 하는 연극은 신파극이나 신극이랑은 다르다
고 들었소. 그런데 연애는 꼭 삼류, 사류 신파시구만. 당신은 이미
처자가 있는 몸으로 알고 있는데, 저런 젊은 후배 배우를 울리다
니. 이거 실망이요.
더욱 더 기가 찬 건 내가 알기론, 꼭 연인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그 남궁연이라는 배우와 붙었다니.
이거 한국 연극은 다시 뒷걸음치는 거 아니오!
마담과 주위에서 술에 취한 손님을 말린다.
손님2 : 듣자하니, 이동극장을 만들어 공연하신 다는데, 한번 여기서 당신
의 연극을 좀 봅시다. 배우도 있겠다. 관객도 있겠다. 뭐가 두려운
것이오?
남궁연은 손님을 똑바로 쳐다보며 천천히 일어선다.
남궁연 : 이해랑 선생의 작품은 취객들의 구미에 맞지 않으니, 삼류 관객에
맞는 삼류 남궁연의 연기는 보여드리리다.
남궁연은 이해랑이 말리는데도 아랑곳 않고, 갑자기 조용해진 좌중의 분위기를 살
피며 테이블 위로 올라가 연기 준비를 한다.
손님은 남궁연의 의외의 반응에 엉겁결에 자리에 앉아, 주위의 분위기를 살피는데,
남궁연 : (손님을 가리키며) 거기!
손님1 : 나 말이오?
남궁연 : 불을 껐다가 켜 주시오.
손님1 : 그거야 어렵지 않지.
손님이 스위치가 있는 곳을 찾으러 움직일 때, 마담이 제지하며 자신이 하겠노라
고 사인을 보낸다.
잠시 후, 무대 전체가 어두워지면서 정적이 흐른다. 가끔씩 조심스런 기침소리와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불이 갑자기 밝아지면, 남궁연은 스카프로 얼굴을
감싸고 눈빛에서부터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안톤체홉의 갈매기에서 극중 극의 한 부분을 연기한다.
남궁연을 중심으로 환상적인 무대가 연출되어야 한다.
남궁연 : 인간도, 사자도, 독수리도, 뇌조도, 뿔 달린 사슴도, 거위도, 거미도,
물 속에 사는 말없는 물고기도, 바다에 사는 불가사리도, 사람 눈에
보이지 않던 미생물들도, 다시 말해서 모든 생물, 생명이라는 생명
은 모두 슬픈 순환을 마치고 사라져 버렸도다. 이미 수천 세기 동안
지구는 무엇 하나 생물을 싣지를 않았으며, 저 가련한 달만이 허무
한 등불을 켜고 있도다. 이제 목장엔 잠에서 깬 학의 울음소리도 그
쳤도다. 보리수 숲에는 딱정벌레마저 찾아오지 않는구나.
남궁연이 몸을 감싸며 연기를 끝냈을 때에도, 아무도 끝났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다음에 이어질 대사를 기다리고 있다.
이해랑이 조심스럽게 남궁연에게 다가가, 그녀를 살며시 껴안으면, 주위에서 하나
둘씩 시작된 박수소리가 점차 고조된다.
물론 한쪽에서 바라보고 있던 이봉구의 박수소리가 유난히 크다.
이봉구 : (어느덧 젖은 눈을 숨기지 못하며) 남궁연은 6.25 이후 명동거리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당시 북쪽에서의 연극인에 대한 대우와
정책이 좋았기 때문에, 그때 당시 이념하고는 아무런 상관없이 많은
예술가들이 북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오늘 해방전후문학사에 대한 특강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심현규는 자신의 대사가 끝나고 두 개의 대본을 들고 이봉구에게 어렵게 발걸음을
향한다.
5장 / 제3의 인물
가림 막이 올라가면서 휠체어를 타고 테이블에 다가오는 명동백작. 그 앞으로 맥
주와 간단한 안주가 놓여진다.
한쪽에서 이봉구와 심현규가 등장한다. 심현규는 자신이 써온 희곡을 이봉구에게
건네고 설명을 한다.
심현규 : 명동백작을 국문학과 정년 퇴임 교수로 설정했습니다. 제자를 만나
면서 극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명동백작 : 제가 오늘 명동에 나온 이유는 제자를 만나기 위해 섭니다. 그
동안 정년 퇴임한 이후에도 여러 번 특강을 부탁했는데, 아마 오늘
도 그 건인가 봅니다.
심심지 않게 특강 비를 쳐주면 그 날은 밤새 술을 마십니다. 혜린
의 눈동자를 생각하기도하고 인환이의 멋진 외투 깃을 생각하며
"세월이 가면"을 흥얼거립니다.
명동백작이 "세월이 가면"을 흥얼거리면 한민수가 등장한다.
한민수 : 선생님! 오늘도 취하셨군요?
명동백작 : 오 자네 왔는가? 그래 자네의 제자들은 잘 있고?
한민수 : 그럼요. 그런데 선생님, 대낮에는 술 좀 자제하시라고 그랬잖아요.
몸도 좋지 않으시면서.
명동백작 : 이 사람아 결자해지라 했어. 술놈이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걸, 술
놈이 어떻게 해야지.
한민수 : 그러니까 술을 끊으셔야 된다고요.
명동백작 : 정말 그러길 원하나?
한민수 : 그럼요.
명동백작 : 자네 목숨보다 더?
한민수 : 네?
명동백작 : 인생 말년은 청춘의 추억으로 산다 그랬나? 이렇게 술을 마주
대하면 지나간 사람들이 가만히 말을 걸어오는데, 그걸 마다하라고.
자네들은 우리 같은 노땅들은 그저 술만 마시고 다니는 취객들로
보이겠지만, 그때는 예술을 하려고 마신게 아니야. 취해서 그 취기
로 놀아보자는 것도 아니었어. 당장 내일 쌀 한 톨 값이 없어도 구
걸하며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단 말이야.
한민수 : 폐허가 된 땅에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암담한 현실 앞에서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까지 그러시면 안되죠.
명동백작 : 그렇지 않아도 오늘이 마지막 술이네. 내일부터 술을 끊기로 했
어.
한민수 : 정말이요?
명동백작 : 자네에게 거짓말 할 사람인가? 내가?
한민수 : 누구한테라도 물어보세요? 지금
맛나게 술 먹고 있는 사람이 나
내일부터 금주한다고 하면 누가 믿겠어요?
명동백작 : 지금 날 희롱하는 건가? 내가 담배끊는다고 했을 때, 어떻게 했
나?
잠시 사이.
한민수 : 정말이군요 선생님! 올해의 문단 특종이네요. 주점 이봉구가... 아니
주점 이봉구 선생이 금주를 했다고 문학잡지에 특집 토론프로그램
좀 마련해야 되겠는데요.
명동백작 : 자네 날 놀리나? 아무리 교수라도 내 제자라는 것은 잊지 말아
야지.
한민수 : 그걸 제가 어떻게 잊습니까? 선생님 기분도 그런데 맥주 좀 더 시
킬까요?
명동백작 : 그럴까?
둘의 웃음이 정겹다.
한쪽에서 이봉구와 심현규의 웃음소리도 들려온다.
한민수 : 선생님 오늘 뵙자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특강을 부탁하려고요
명동백작 : 허 이 친구 어디 그거 한 두 번인가. 왜 이렇게 뜸을 드려. 그래
주제가 뭔가?
한민수 : 그게.... 최근 젊은 작가들의 주제의식에 대해 섭니다.
명동백작 : 허 이제 최신 것도 맡기는 구만. 이거 퇴물 너무 이용해 먹는 거
아니야.
한민수 : 그리고 참고로 마주치실까봐, 미리 말씀드리는 건데요.
이번 특강은 매년 학기초에 주로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국문
과 초청강연인데...
1부는 선생님이 하셨던 해방 전·후의 문학의 흐름이고요, 2부가 지
금 말씀드린 최근 젊은 작가들의 주제의식에 대해서입니다.
명동백작: 그럼 내가 1부, 2부 다하라는 거야. 그러면...
한민수 : 1부를 다른 선생님에게 부탁했습니다.
명동백작 : 어 그래? 누군데? 내가 아는 사람인가?
한민수 : 저.... 김수형선생님입니다.
명동백작 : ......김수형?
한민수 : 네.
명동백작 : 김수형을 시킨다...... 지난번의 내 강의가 좋지 못했나?
한민수 : 그럴 리가 있습니까? 학생들도 좋아 하는 거 보셨잖아요.
명동백작 : (발끈 화를 내며) 그런데 왜 그 놈을 시켜?
한민수 : 그 분이 그 시대배경으로 논문도 쓰셨고, 또 선생님과 같이 그 시
대에 젊은 시절을 보내셨으니까......
명
동백작 : 그 친구가 그 시대를 살았다고? 그 친구는 그때 미국에 있었어.
명동 근처에 나와 봤는 줄 아나?
한민수 : 그 분이 그래서 좀 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실 수도 있지 않
습니까?
명동백작 : 무슨 얼어죽을 놈의 객관적. 예술이 제 삼자가 만드나?
내가 만드는 거야. 자기가 쓰고 자기가 연기하고 연출하는 거야. 제
삼자 누가 써 줘! 누가 연기하고? 누가 연출해 줘?
한민수 : 선생님이 이해 좀 해주십시오.
명동백작 : 종이 위에 철학자가 되는 건 쉽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은 거야!
한민수 : 또 체홉이군요?
그럼 다음 달 첫 번째 토요일 강당에서 뵙겠습니다. 그때쯤 다시
연락 드릴게요.
명동백작 : 일없네. 그리고 나는 요즘 애들 책 안 읽어. 도대체 이건 어디서
배웠는지. 다 자기네들 하소연이야. 그냥 머리에서 나온 대로 갈겨
쓴 꼴이라니까. 내가 강의할건 욕밖에 없네.
선생님! 그럼 토요일 날 뵙는 걸로 하고 저는 그만 약속이 있어서
갑니다.
한민수 퇴장.
혼자 남은 명동백작, 점차 표정이 밝아지며 관객을 향한다.
명동백작 : 사실 전 이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읽습니다. 또 젊은 작가
들이 많이 나왔잖아요? 매달 잡지에 신간 평을 맡은 것도 있지만,
자연스럽게 깨끗한 표지를 고르듯이 싱싱한 그들의 글을 읽습니다.
놀랐습니다. 우리 세대들이 고민했던 것들, 그래서 글보다는 술과
담배로 풀었던 소소한 얘기까지 그들은 정확한 표현으로 짚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부지런히들 글을 씁니다.
명동백작은 밝은 표정을 짓는다.
김수형이란 놈. 참 글을 잘 씁니다.
우리들이 모두다 어설피 들어온 외국의 이론 하나를 가지고 진짜
네 거짓이네 하고 떠들 때, 그 놈은 정확한 사실과 함께 앞으로의
방향성까지 제시한 놈입니다. 또 그 녀석의 글은 참으로 빈틈이 없
습니다. 브레히트가 그랬던가요? 망명론자는 가장 변증론자라고.
그 녀석은 외국에서 우리들이 허덕였던 현실을 정말 객관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참 밉습니다. 우리들 스스로 객관화시켜 놓은 자신들은, 결
국 폐허 위에서 이 시대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예술가들의
자괴감을 더욱 확인 시켜줄 뿐이었는데, 김수형은 너무나 쉽게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은 오히려 예술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고, 함께 술과 담배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옆에서 그것을 보고 있던 이봉구가 앞에 놓여진 책을 짚어 던진다.
이봉구는 앞에 놓여진 잔을 깊게 마시며 기분 좋지 않은 표정을 짓는다.
떨어진 책을 주우며,
심현규 : 선생님 왜 그러십니까? 선생님 말씀대로 크게 벗어나지 않았어요.
이봉구 : 김수형이란 놈은 이 연극과 어울리지 않아!
심현규 : 제3의 인물이죠. 이것만은 선생님께서 양보해주셔야 됩니다. 그들
의 얘기를 하는데, 분명히 현재와 연결될 수 있는 고리가 필요하다
고요.
이봉구 : 그때 얘기 자체가 현재라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심현규 : 지금도 예술환경이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그때 같은 감상적인 태
도는 벗어나야 합니다.
이봉구 : 감상적이라고?
심현규 : 이광수도 이미 20년대 창조 8호에 작가의 속성에 대해서 언급했더
군요.
예술가들은 학교를 졸업하지 말 것, 술에 탐닉할 것, 반드시 연애
를 논할 것, 두발과 의복을 야롯이 할 것, 신경쇠약성 빈혈성 용모
를 가질 것, 불규칙, 불합리한 생활을 할 것.....
왜 예술가는 술과 담배에 절어야 합니까? 왜 다방에서 눈치보며
만나 어디 공술 얻어 먹을까하고 눈을 부라립니까? 그렇게 바탕이
된 시나 소설이나 연극이나 영화들은 이제 안 봐요!
너무 무거워서 너무 재미없어서 더 이상 독자나 관객들이 없어요!
아무도 이 연극 보러오지 않는다구요!
이봉구 : 자네한테 부탁한 게 잘못이었군.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고, 당시 전쟁을 몸으로 겪어보지 못한 자
네들이 그렇게 쉽게 단
정지을 수 있을까? 시대에 의한 강요에 의해
서 자신의 의지와 전혀 다른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
을 간과해서는 안되네. 단지 그 시절을 겪지 않았다는 사실만으
로.....
이 사람아! 예술가들은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자신의 예술 하나
밖에 모르는 순진한 사람들이야. 그들은 독립투사들이 아니었다고.
함세덕이 어떻게 죽은 줄 아나?
1948년 봄 월북하였다가, 6.25동란 때 인민군 선봉대로 서울로 입
성했었어.
연천 부근에서 그는 폭탄 껍데기가 쌓인 더미 위에 올라가 큰소리
로 외쳤어.
"이런 것 때문에 왜 죽어야 합니까? 대답할 자 누구 없소?"
그 순간 터지지 않은 폭탄 하나가 그를 순식간에 삼켜 버렸던 거야.
함세덕을 왜 그 동안 금지시켰나? 이런 세상을 자네가 아나? 자네
가 이해한다고? 자네가 재단한다고?
심현규의 눈에 어느덧 눈물이 맺혔다.
심현규 : 여기 다른 희곡이 있습니다. 정말 선생님의 의도대로 썼어요.
제가 왜 그렇게 밖에 쓸 수 없었는지, 선생님은 아시잖아요?
왜 제가 모른다고 생각하세요!
이봉구는 스스로 감정을 추스른다.
이봉구 : (보다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리고 말이야, 노교수가 휠체어를 타고
나올 이유가 없는 것 같애. 전에도 말했듯이 루이 주베의 흉내를 내
면서 갈지자로 등장하는 것이 재미있잖아?
그리고 명동백작이라는 별명을 설명하는데 있어서도 보다 직접적
이고 연결이 되잖아.
잠시 사이.
심현규 : (힘겹게) 선생님을 모델로 했으니까요.
이봉구 : ..... 그건 무슨 말이야?
심현규 : (목소리가 잠긴다.) 어서 병원으로 가시죠.
심현규는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낀다.
어색한 침묵.
이봉구 : 됐네. 이제 가보게.
심현규 : ......인후암이라면 서요?
어제 사모님이랑 통화했습니다. 저랑 만나신 이후부터 기분이 좋다
고 술을 더 드신다고요. 그러시면서 저한테 급기야 우시면서 말씀
하시더라고요.
왜 제게 거짓말을 하셨어요? 술 끊으셨다면서요!
이봉구 : 이제 가보라니까!
이봉구는 일어서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급히 약병을 꺼내 입안에 털어 넣는다.
심현규 : 제발 명동에서 이제 그만 벗어나세요!
이봉구는 자신의 잔을 비운 다음, 그 잔을 유심히 쳐다본다.
이봉구 : 수주 변영로 선생이 급기야 술로 병이 났어.
(힘겹게) 죽을병이었어. 나와 같은 인후암이었지.
심현규 : 그럼 선생님도 알고 계셨군요?
이봉구 : 수주도 그때는 놀랐는지, 정말 믿어지지 않게 그 다음부터 술을 끊
었어. 다른 술, 선후배들은 수주가 없는 술자리에 앉으면서 아쉽기
도 하면서 결국 나타나지 않는 수주를 다행이라 생각했지. 그런데
어느 날 수주가 그 자리에 나타난 거야. 나는 반가우면서 또 그렇지
도 않은 거야. 일단 자리에 앉는 수주를 보면서 걱정스럽게 내가 물
었어. "선생님, 여기에 오시면 안되잖아요?"
그러니, 수주가 뭐라 그랬는 줄 아나?
"술 냄새 맡으러 왔어...."
그때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자넨 이해 못할 거야.
잠시 감회에 젖는다.
아무튼, 그때 이후로 수주는 다시 술을 마시게 됐고, 훨씬 오래 살
았어.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이봉구는 화제를 전환한다.
이봉구 : 그리고 혜린과 인환이가 더 보여줘야 돼. 그들은 명동의 꽃이었어.
심현규 : 저는 반댑니다. 실제로 그들은 일찍 죽었고, 생활에서의 끼는 있었
지만, 문학적인 업적은 너무 미미해요.
이봉구 :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 죽었기 때문에 못한 거야.
심현규 : 솔직히 술 때문에 죽었잖아요. 자신을 비관해서 이기지 못하고 죽
은 거예요. 다른 예술가들은 그대로 치열하게 살아남았다고요.
박인환이 왜 죽었습니까? 정운삼이 왜 죽었어요. 김인수는 어떻고,
전봉래는 어떻습니까? 그들은 정작 자신의 예술세계는 펼쳐보지 못
한 채 죽었어요.
이봉구 : 할만큼 한 거야. 그 친구들 운명이야.
나야말로 이렇게 못난 재주만 가져서 제자한테 훈계나 들으며 끈
덕지게 살아가고 있는 거고.
자네에게 애초에 부탁한 게 잘못이었어.
자넨 이미 순수함을 잃었어!
심현규 : 네?
이봉구 : 썩었다고!
심현규 : 썩은 건 그때 예술계 선배들이에요.
이봉구 : 뭐라고!
심현규 : 술과 담배에 속까지 썩었고, 혼란한 시대에 정신까지 썩었어요. 그
래서 우리의 현대예술까지 아픔과 고통으로 섞어 기초를 다졌다고
요
저는 이 희곡을 꼭 완성할겁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부
르짖을 겁니다. 건강한 정신과 육체로 밝게 다시 시작해야 한
다고...
갑자기 이봉구는 자신의 분을 삭이지 못하고 쓰러진다.
심현규는 이봉구를 부축하고 퇴장한다.
6장 / 명동의 꽃이 지다.
무대 한쪽에 휠체어에 앉아 있는 이봉구가 보인다.
1막2장과 같이 혜린은 검은 머플러를 하고 어느덧 테이블에 앉는다.
혜린의 눈에는 이봉구가 앞에 앉아 있는 것으로 설정한다.
전혜린 : 선생님! 멋진 시 한편 읽어 드릴까요?
이봉구 : 어?!
혜린은 원고지를 꺼내더니 만년필로 써 내려간다.
이봉구는 그 모습을 가슴 아프게 보면서 힘겹게 대사를 한다.
이봉구 : 누구의 시인데?
전혜린 : 작자를 꼭 아셔야만 돼요? 시만 좋으면 됐지. 또 전혜린의 작이라
고 해도 좋고요.
이봉구 : (무의식적으로) 그래 어디 혜린의 시 낭송 솜씨 좀 들어볼까?
(소스라치게 깨어나며) 아니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물론 뒤의 대사는 혜린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전혜린은 마침내 쓰기를 다 마치고서 유난히 크고 투명한 목소리로 낭송한다.
전혜린 : 몹시 괴로워지거든 어느 일요일에 죽어버리자.
그때 당신이 돌아온다 해도 나는 이미 살아 있지 않으리라.
당신의 여인이여, 무서워할 것은 없노라.
다시는 당신을 볼 수 없을지라도 나의 혼은 당신과 함께 있노라.
다시는 사랑하면서 촛불은 거세게 희망과도 같이 타오르고 있으리
라.
당신을 보기 위해 나의 눈은 멍하니 떠 있을지도 모른다.
이봉구 : 그만해! 그만 하라니까!
이봉구는 계속해서 혜린의 시 낭송을 저지하지만, 마침내 낭송을 마친 혜린은,
전혜린 : 이 원고는 태우기로 해요. 죽음과 슬픈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참다 못한 이봉구는 휠체어를 끌며 쪽지를 받아서 태운다.
전혜린 : 하하하, 죽음의 화형식! 선생님 브라보! 브라보!
재가 돼 버린 종이 쪽지를 입으로 불어 치운다.
잠시 후, 전혜린 주변으로 불꽃이 일렁이더니 커진다.
전혜린 : 장 아제 베도!
내가 '원소로 환원'하지 않도록 도와 줘! 정말 너의 도움이 필요해.
나는 생명 있는 뜨거운 몸이고 싶어. 가능하면 생명을 지속하고 싶
어. 그런데 가끔가끔 그 줄이 끊어지려고 하는 때가 있어. 그럴 때
면 나는 미치고 말아. 내 속에 있는 이 악마를 나도 싫어하고 두려
워하고 있어.
악마를 쫓아 줄 사람은 너야. 나를 살게 해 줘.!
선생님! 내 가슴 깊이 천착해 들어가 생각해 보았어요. 그리고 결
심했어요. 사랑한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은 단지 이 두 가지 중의 하나일 뿐이에요.
저는 사랑을 선택하겠어요.
이봉구 : 헤린아! 그래도 살아나가야 돼. 네가 원하는 사랑을 조금만 나눠주
면 되잖아. 그러면서 살아가는 거야!
혜린은 불꽃과 함께 사라진다.
반대쪽에서 박인환과 이진섭, 임만섭이 보인다.
이봉구는 반대쪽에서 두툼한 겨울 외투를 입은 박인환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이 장면 역시 1막 2장의 장면과 같이 진행된다. 다만 이봉구만이 그 테이블에서
따로 떨어져 대사만 한다. 따라서 주위의 인물들은 마치 옆에, 그리고 앞에 이봉구
가 있다고 설정을 하여 연기를 하여야 한다.)
술에 취한 박인환이 일어서서 나가려 하자,
이봉구 : 인환아!
박인환 : 네 명동백작님!
이봉구 : 자네는 아직 퇴장하면 안되네.
박인환 : 뭐라고요? 저는 퇴장이 아니라 커트백 되어서 다시 오겠습니다.
다시 나가려는 박인환을 붙들어 앉히며,
이봉구 : 아직 아니라니까. 내게 명동샹송을 들려줘야 되잖아.
박인환 : 노래가 듣고 싶으시다고요. 신라의 달밤을 불러드릴까요?
이봉구 : 아니, 자네의 노랠 듣고 싶어.
박인환 : 저는 시인입니다. 노래는 가수한테 들으셔야죠.
역시 술에 취해 어느덧 흐르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을 지휘하고 있는 임만
섭을 보고
박인환 : 어이 만섭이!
임만섭 : 명동신사께서 왜 그러시나.
박인환 : 자네의 노래를 명동백작께서 듣고 싶으시다네.
임만섭 : 역시 선생은 예술을 즐기실 줄 아시는 구만.
이봉구 : 가수도 있으니 이제 곡만 붙이면 되겠네.
박인환 : 뭐라고요? 곡만 붙이면 된다니, 어디에 곡을 붙입니까?
이봉구 : 자네가 시를 써야지. 자 여기 이진섭이 데리고 왔네.
박인환 : 오 진섭이 자네가 나의 시에다 곡을 붙일 텐가?
이진섭 : 내가 자네의 시에다 곡을 붙인다고? 그건 언어도단일세. 내 곡에
자네 시를 끼워 넣어야 그나마 어줍잖은 노래가 나오지.
임만섭 : 야 임마들아! 그럼 그렇게 붙인 시와 곡을 나는 또 어떻게 부르라
는 얘기냐.
이봉구 : 자자 임만섭이 자네는 잠시만 기다리게 아직 자네가 나설 차례가
아니야.
박인환 : 좋습니다. 그럼 선생이 제목을 지으쇼!
이봉구 :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지.
(무의식적으로) 세월이 가면......
박인환 : 뭐라고요?
이봉구 : 응? 아니네.
박인환 : 아니 뭐라고 말씀을 하셨잖아요?
이봉구 : 이 사람아! 좀 내용이나 알아야 제목을 붙이든 부제를 붙이든 할거
아닌가?
임만섭 : 그 말씀은 맞네.
박인환이 미리 적어 두었던 노트를 찢어 이진섭과 임만섭에게 보여 주며 운을 띄
운다.
박인환 :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
네
이진섭 :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박인환 :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
을 잊지 못하지
임만섭 :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박인환 :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수가 가을의 공원/
이봉구 :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박인환 :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자! 이봉구 선생님! 제목을 지으쇼!
이봉구 : 세월이 가면으로 하면 어떨까?
잠시 침묵.
박인환 : 좋습니다.
자! 친구들이 괜찮다면 나는 이 노래를 나의 우상 쟝콕또에게 바치
리라.
만섭이! 이제 자네가 주인공이네.
이진섭 : (만섭에게 악보를 주며) 날림치고는 부를 만은 할걸세. 시가 좀 너
무 감상적인 게 흠이지만,
임만섭이 일어서서 자리를 잡고, 한 때는 화려했지만 지금은 낡은 연미복을 가다
듬으며, "세월이 가면"을 부른다. 어느덧 주위의 사람들이 모여든다.
누군가 통기타 반주를 하고 있다.
임만섭 :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비가 올 때도/나는 저 유리창 밖/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수가 가을의 공원//
지금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
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
네.///
주위엔 아무런 말없이 조용하다.
누군가 그 침묵을 깬다.
손님 : 야 그 노래 눈물난다.
마담 : 인환이 어쩔 라고 그런 노래를 지었노.
이봉구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맺혔다.
박인환 : 술 좀 더 가져와!
마 담 : 또 외상이야?
박인환 : 갚으면 되잖아!
마 담 : 그때가 언제고?
박인환 : 꽃피기 전에 갚으면 되지.
마 담 : 꽃 피기 전에 죽으면 어떡하누?
박인환 : (신경질적으로 화를 내며) 에이! 명태 좀 더 가져와!
이봉구는 그 모습을 안타깝게 쳐다보며,
이봉구 : (마치 관객에게 변명을 하듯이) 인환이는 원래 술을 안마셨어요.
결혼하기 전에도 신혼 때까지도!
다 전쟁 때문이야. 폐허가 된 빌어먹을 세상 때문이었다고!
이진섭 : 인환이 너 정말 속 좀 썩이지 마라.
박인환은 혼자서 은성을 나서려한다.
마 담 : 인환이 어디가?
박인환 : 볼일이 있어.
이진섭 : 무슨 볼일인데?
박인환 : 중대한 문제로.
임만섭 : 뭐가 중대야. 술이겠지.
이진섭 : 자 우리 같이 가서 그 중대한 문제를 노래로 만들자고.
거리에서
박인환 : 만섭이! 진섭이! 우리 진짜 샹송을 들으러 가세!
이진섭 : 어디서 진짜 샹송을 듣는단 말이야?
박인환 : 샹송을 참말로 잘 하는 사람은 김훈이 밖에 없어. 김훈이 한테 가
자고. 이곳은 무식해서 살 수 없다고 하루 빨리 파리로 가야겠다고
흥분하지 않았나.
임만섭 : 아 그 그림쟁이. 자네들이나 가서 많이 듣게나. 나는 집으로 들어
가야겠네.
임만섭이 바삐 퇴장한다.
이진섭 : 만섭이 삐쳐서 갔네. 자 모나리자로 가세.
박인환 : 내버려 둬!
올페! 나도 장콕또의 올페같은 영화를 만들어야겠어.
이진섭과 박인환은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마담을 부르며 모나리자로 들어선다.
박인환 : 마담! 여기 맥주 좀 줘!
마 담 : 어디서 이렇게 곤드레 만드레가 되었어?
박인환 : 빨리 가져와!
마 담 : 여긴 모나리자야. 은성이 아니라고!
박인환 : 여어! 조명화! 김상주! 뭐 잴거 없잖아!
김상주 : 저 어린 게 왜 까불어. 커피나 마시고 가라.
조명화 : 야 인환아! 술 취했으면 조용히 있어라.
박인환 : 흥! 나더러 까분다고? 조용히 있으라고?
뭐가 까부는 거냐!?
조명화와 김광주는 급기야 박인환에 대들 자세다.
나 오늘 이상이 때문에 마셨다. 그리고 우리들 청춘의 고독 때문에
마셨다. 너희들이 이상을 알고 고독을 알어?
조명화와 김상주가 박인환에게 달려들자, 주위의 사람들이 말린다.
한쪽에 남겨진 박인환의 옷차림은 전과 달리 몹시 흐트러져 있다.
마담 : 명동신사가 오늘은 매너가 빵점이다
박인환 : 돈 좀 가지고 집에 들어가야겠는데......
박인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쌀이 떨어졌어! 누가 오늘까지 돌려준다고 했는데.....
세 아이와 처가 있는 가장이 되어서, 쌀값 없이 집으로 들어가는 마
음을 누가 알아!
박인환이 술에 취한 채 무섭게 뛰어나간다.
이봉구 : 인환아! 여기 쌀값 있다. 네 술값 있다. 이거 받아가라.
이진섭 : 인환아! 인환아!
이진섭이 박인환을 쫓아 퇴장한다.
이봉구 : 진섭이! 인환이 보내면 안되네.
인환아! 이 돈 갖고 집으로 돌아가라 인환아.....
쇠잔한 기운을 이끌고 힘겹게 이봉구는 대사를 한다.
이봉구 : 누구보다도 멋있게 살고 멋있게 시를 쓰고 언제나 어린애와 같은
흥분 속에서도 인생을 살아 온 명동신사, 인환이였습니다.
세탁소에 맡긴 스프링코트 찾을 돈이 없어, 봄이 오고 꽃이 피고,
그 꽃이 지고 여름이 왔는데도 무겁고 두툼한 겨울 외투를 그대로
입은 채, 그렇게 마지막으로.....
(흐느끼며) 인환아! 네가 없는 명동, 네가 없는 술집, 다방, 영화관....
(더욱 고조되며) 인환아! 너는 참으로 정들다만 애인처럼 소리 없이
가는 구나.
잠시 후,
박인희가 읊었던 "목마와 숙녀"의 배경음악이 흐르면서 퇴폐적인 상복을 입은 여
배우가 당시의 카바레에서 쓰던 유선 마이크를 들고 목마와 숙녀를 읊는다.
(그녀의 음유吟遊와 함께 박인환을 비롯한 이 시대 예술가들의 장례 장면이 연출
된다.)
여배우 :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
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
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
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
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
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은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
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장례행렬은 이내 무덤 가를 둘러싸고 누군가가 추모 시를 읊는 듯하다.
이봉구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서 마치 실재한 듯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
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잠시 후, 장례 행렬은 사라지고 이봉구의 조명도 어두워진다.
7장 / 명동백작과 객관적
조명이 들어오면 무대 전체가 희미해진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테이블 곳곳에 배우들이 앉아 있다. 마치 주검 같기도 하고 마
네킹 같기도 하다.
이봉구는 박인환의 죽음과 지난날, 명동의 꽃들이 지고 있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
다. 이봉구가 한창 괴로워하고 있을 때, 김수형이 흰 양복을 입고 지팡이를 짚으며
등장한다.
김수형 : 오랜만이네.
이봉구 : (그때서야 고개를 들며) 누구.....?
김수형 : 나 김수형이네.
이봉구 : (냉소적으로) 어, 객관적!
김수형 : 자네의 희곡에 내가 나와서 무척 언짢겠구먼.
이봉구 : 말해서 뭣하나.
김수형 : 자네가 강의하는 것을 들었네. 젊은 작가들에 대한 시각이 의외로
긍정적이더구만.
물론 그것이 자네의 큰 장점이었지만 말이야. 젊은 예술가들에 대
한 무한한 기대와 격려...... 다만 너무 천재라는 말을 남발했지만
말이야.
이봉구 : 이제 거기에 대한 객관적인 비평을 하려는 건가?
김수형 : 아니, 자네가 결국 옳았다고 생각해. 뭐 사실 이 바닥이 무슨 정답
이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 동안 무슨 주의니 이즘이란 잣대로 작품을 하나 하나 쪼개 놓으
니까, 이제 더 이상 바닥이 났어.
김수형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앞에 놓여진 담배를 피운다.
이봉구 : (자조적으로 웃으며) 담배를 폈었나? 담배를 피면 객관적인 시각이
흐려질텐데?
김수형 : (자조적으로 웃으며) 유학시절에 배웠지.
그런데 왜 박인환인가?
이봉구 : 박인환뿐만 아니라, 그때 명동의 예술가들이 모두 나오지.
김수형 : 모두 나온다고? 박인환, 전혜린을 말하는 거야?
이봉구 : 그들뿐인가? 이해랑, 남궁연, 이진섭, 임만섭도 나오지.
김수형 :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 중의 하나네. 그
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
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기 때문이네. 지금에 와서도
그가 무슨 요절한 천재인 듯한 시인으로 꾸미는 건 반대네.
이봉구 : 자네는 피해의식에 잡혀있어. 선배로써 너그럽게 받아들이게.
김수형 : 자네처럼?
박인환의 대표작이라는 목마와 숙녀도 이미 20여년 전에 무수히
써먹었던 낡은 말들이야. 그 겉멋 든 유물을 청산하기까지 얼마나
걸렸는 줄 아나?
프랑스, 미국문화의 사대주의. 그는 걸신들린 듯 그들의 것을 인용
했어.
이봉구 : 명동시대 때, 누구보다 자주 기웃거렸던 게 자네 아니었던가? 그들
틈에서 끼어 보고 싶었던 게 자네 아니었어?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스스로 고고한 아웃사이더인 기질을 발휘하
는 구만.
김수
형 : 명동시대는 짧았지만, 우리 문단에 중요한 시기였다고 생각해. 좌,
우가 없었고 이름과 명예보다 작품을 발표하지 않는 것을 더 영광
으로 생각했던, 참으로 순수했고 자유로웠던 시기였어.
이봉구 : 자네는 어디 있었는데? 당장 가장으로써 쌀값이 없어 집에 들어가
지 못하고 빈속에 독한 술을 입에 털어 넣었을 때, 자네는 어디 있
었는데?
인환의 요절은 그때 우리 예술청년의 좌절과 절망이었어!
김수형 : 아니 박인환 개인의 좌절과 절망과 죽음이었어!
내가 어디 있었냐고?
담배 한 모금을 길게 내뱉는다.
다들 내가 미국으로 보기 좋게 유학을 갔다고 생각했지만, 나 역시
그럴 형편이 못되었어. 더 이상 명동의 칙칙한 분위기가 싫어, 고향
에서 칩거했어.
하지만, 나 역시 명동을 오래 벗어나지 못했지.
얼마 후에 올라와서 명동을 기웃거렸어. 자네들이 없는 곳만......
어느덧 김수형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고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흐른다.
힘겹게 이봉구가 내미는 술잔에 김수형은 가볍게 부딪친다.
멀리서 심현규의 목소리가 들리면, 김수형에게 비치던 조명이 어두워진다.
8장 / 예술가는 천형(天刑)의 죄인인가?
김수형은 이봉구와 심현규의 대화를 멀리서 보고 있다.
휠체어에 앉은 이봉구는 혼자서 맥주를 조금씩 들이킨다.
급히 들어오는 심현규, 그의 표정은 상기되어 있다.
심현규 : (흥분된 목소리로) 선생님! 극장대관 신청을 해놨습니다. 예술의 전
당에 대관을 해놨습니다. 기획자가 다섯 명이나 나섰어요! 우리 나
라 최고의 스탶과 연기자로 구성할 겁니다. 벌써부터 제작발표회를
해야되지 않겠냐고 난리입니다.
이봉구 : 그 연극....... 그만 두면 안될까?
심현규 : 네?
이봉구 : 그들을 불러들인다면, 우리 예술계가 다시 뒷걸음칠 거야.
심현규 : 선생님 무슨 말씀이세요?
이봉구 :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더 이상 부각시키면 안돼. 이런 야화들로는
그저 자네 말대로 야화밖에는 안돼. 작품으로 얘기가 돼야돼. 더 이
상 시정잡배들이나 소곤 되는 얘깃거리들로, 말장난으로, 이 바닥을
더럽히고 싶지는 않아.
심현규는 이봉구가 마시는 맥주를 뺏는다.
심현규 : 이제 돌아가실 때가 되니까, 변하신 겁니까? 이제 포기하신 겁니
까?
선생님이 꿈에 그리던 명동시대를 무대에 올린다구요!
이봉구 : 사람이 물러설 때를 알아야지.......
훗훗, 무슨 정치하는 사람의 말투가 나오네.
심현규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아니 이 사람! 자네의 오해야. 나는 지금 너무나 행복해.
이런 얘기는 나 혼자 간직하고 떠나면 돼.
지금은 자네들 세상이야. 자네들 방식이 있어.
심현규 : 지금 많은 예술가들이 동요하고 있어요. 전혜린, 박인환을 무대에
서 볼 수 있다고 벌써부터 이 연극을 보겠다는 사람들이 나서고 있
다고요.
이봉구 : 그럼 자네에게 부탁하겠네. 나는 더 이상 관여 안 하겠네. 다만, 그
때의 얘기들을 하데, 오늘, 현재를 얘기하게.
심현규 : 선생님!
이봉구 : (힘겹게) 이제 고백하겠네. 나의 솔직한 심정을 말일세.
우리는 시인을 흔히 천형(天刑)의 죄인이라고 하지 않나? 하늘이 내
린 벌을 받은 사람. 시라는 예술작품이 곧 인간의 아픈 고뇌와 갈등
의 소산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지 않겠어?
물론 시인뿐인가, 이 예술이라는 빌어먹을 곳에 붙어 있는 사람 모
두에게 해당되지. 그래서 우리 때에
는 많은 예술가들의 생활이 가난
했었고, 또 그들의 생애는 불우했지.
몇몇 예술가들의 자살장면이 연출되며 유서가 낭독된다.
이렇듯 우리 때에는 젊은 나이에 가난과 병마로 시달리다 고생스러
운 생애를 마친 예술가들은 이 외에도 상당히 많았어. 선 병적인 체
질과 무절제한 생활, 신경질적인 내적 소모, 예민한 신경. 그런가 하
면 어디에도 구속되고 또 규격화되기를 거부하는 이들의 자유분방한
기질, 자신의 내면과 미끄러지듯 괴리되는 현실, 이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 등에 의해서 빚어진 결과였어.
우리들은 결국, 실패자였어. 다만 위대한 실패자였으면 하는 데.....
심현규 : (조심스럽게)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는 예술가
들은 곧 광기 어린 무능력자와 같이 인식되어 온 것 아닙니까?
예술가는 일정한 직업도 가질 줄 모르는 사람이며, 가난하고 불우
한 생애를 사는 사람인 양 이야기되어 온 것이고요.
둘을 내내 보고 있던 김수형이 이봉구가 앉은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으면서,
김수형 : 그래, 바로 그런 현상이 우리가 겪은 시대적인 불행인 거야. 그러
니, 가난에 쪼들렸던 우리의 부모들은 이런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풍
문으로 듣고 예술을 하고 싶은 아들과 딸들에게 말을 하는 거야.
예술가가 되면 가난하다고 하더라, 가난할 뿐만 아니라, 일찍 죽는
다더라. 그러니 너는 예술가가 될 생각은 아예 말아라. 예술가가 되
지 말고 의사나 검사가 되면 얼마나 좋겠니. 대학은 상대나 법대, 공
대나 의대에 가도록 해라.
이러한 간곡한 부모들의 이야기가 예술가가 되고자 하는 우리 젊은
날의 꿈을 지금까지 무거운 중압감으로 눌러오곤 했던 거야.
김수형이 천천히 다가와 이봉구와 가볍게 악수한다. 옆에서 심현규는 그 둘을 행
복하게 바라보고 있으면 조명이 어두워진다..
가림 막이 내려온다.
9장 / 명동야화(明洞夜花, 明洞野話)
이봉구가 천천히 휠체어를 끌며 무대 앞으로 나오면, 그에게만 조명이 떨어진다.
1막1장과 같은 장면이다. 이봉구의 뒤쪽으로 가림 막이 쳐져있다.
이봉구는 잠시 관객들을 훑어보고 나서 대사를 시작한다. 격정적인 이후의 차분한
목소리다.
이봉구 : (긴 한숨을 관객들 모르게 내쉰 후) 오늘, 명동을 지켜나가는 힘의
원천은 다름 아닌 돈입니다. 70여개의 금융기관이 몰려있고 하루에
11조원이 거래된다고 하는군요. 또한 명동은 우리 나라의 가장 큰
사채시장이기도 한데, 20여개의 증권회사와 맞먹는 돈이 넘나든 다
는군요.
그렇습니다. 이제 명동은 가난한 예술가들의 흔적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들은 어쩌면 잠깐 피던 꽃들이었습니다. 밤에
만 잠시 폈다가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현혹시킨 후, 다음날 아무 말
없이 사라진 밤에만 잠시 피었다 졌던 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도 이름 없이 끈끈이 살아나가고 있는 많은 들꽃들의 이름을 뺏어
갔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래도 그들은 그렇게 피어서 어둡고 삭막한 시대
를 밝혀주었습니다.
이봉구가 휠체어를 끌며 반대편으로 퇴장하려고 하는데, 가림막 뒤에서 한 사람씩
조명이 들어온다.
남궁연 : (탁자 위에 올라 격정적으로) 인간도, 사자도, 독수리도, 뇌조도, 뿔
달린 사슴도, 거위도, 거미도, 물 속에 사는 말없는 물고기도, 바다
에 사는 불가사리도, 사람 눈에 보이지 않던 미생물들도......
이봉구는 이제, 편안한 음성으로 명동의 꽃들을 맞는다.
이봉구 : 남궁연! 자네는 어디로 사라진 건가?
자네의 니나 연기를 꼭 보고 싶었는데....
이진섭이 옆에서 지휘를 하고 임만섭이 자세를 잡으며,
임만섭 : 그대의 차디찬 손 내가 녹여 주리다.
이 어둠 속에서는 찾아도 쓸데없소.
다행히 달은 밝고, 또 가까이 있소.
내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는지 말하리다.
나는 꿈을 그리는 시인이라오.......
이봉구 : 진섭이! 만섭이! 자네는 행동하는 예술가였어!
이해랑이 남궁연에게 자조적인 말투로,
이해랑 :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춘희에 미친 아르 망을 달래는 아버지의
간절한 심정을 안고 언제까지나 동굴에 비친 그림자 속에서 꼭두각
시놀음만 하지 말고 다시 무대에, 4차원의 진실한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권유했으나 이제는 그들의 마음을 돌릴
길이 없구나.
그런데 또 무대에 겨우 발이 붙을까 말까 한 젊은 연극인들이 텔
레비전에 팔려 놀아나고 있다.
현대의 연극에는 이들의 발목을 붙잡아 매놓을 만한 힘이 없는 것
이 안타깝기만 하구나.....
이봉구 : 이해랑 선생! 나는 아직까지 당신의 이아고 연기를 잊지 못하오!
전혜린 :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흘러도.....
이봉구 : 비용은 가서 없고
베를렌느 또한 없다.
전혜린이 묘한 미소를 지으면 이봉구도 따라 미소를 보낸다.
한쪽에 박인환이 카메라를 들고 주위를 마치 촬영하듯이 자세를 잡는다.
모든 배우들이 등장하여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을 부른다.
합창 :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비가 올 때도/나는 저 유리창 밖/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
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수가 가을의 공원//
지금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
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환은 합창을 하고 있는 명동야화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카메라 뷰파인더로 바
라보고 있다.
박인환 : 선생님! 저는 시적 영화를 만들 겁니다. 물론 장꼭또보다 더 훌륭
하게요.
이봉구 : 자네는 누구보다도 솔직했어, 어두운 현실에서 늘 화려하고 아름다
운 꿈을 꾸는 것을 죄스럽게 생각할 때, 자네는 영화를 선택했어!
자네는 바로 1950년대의 이카루스였어!
박인환은 카메라와 함께 서서히 굳어지고, 이봉구는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이봉구 : 여러분! 바로 이들이 명동야화였습니다.
가림 막이 올라가고. 모든 배우들의 노래와 음악이 멎는다.
무대에 삭막한 정적이 흐른다. 이대로 연극이 끝마치려는 분위기에서 간혹 객석에
서 박수소리가 날 수도 있겠다.
이때, 갑자기 그 침묵을 깨고, 소년이 담배와 꽃을 들고 무대에 급히 등장한다
소 년 : 말보로, 럭키 스트라이크, 살렘, 카멜, 사슴 있어요!
이봉구는 갑작스런 적막에 어쩔 줄 모르고 주위의 시선을 어지럽게 둘 때, 김수형
이 등장한다.
김수형 : 여기 사슴 한 갑 줄래!
사슴을 받아든 김수형은,
김수형 : 저기 남궁연 아줌마에게는 꽃 한 다발을 주려무나!
김수형은 소년에게 실제 값보다 많은 돈을 지불한다.
소년은 마치 마네킹 같이 서있는 남궁연에게 꽃을 안겨준다.
다시 한번 김수형에게 인사하고 퇴장하려는 소년을 보고는,
김수형 : 내게 푸쉬킨의 시를 들려줄 수 있겠니?
소 년 : 그럼요!
소년의 시낭송과 김수형의 대사가 같이 맞물릴 수도 있다.
삶이 당신을 저버린다 해도 서러워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은 끝까지 참고 견뎌라.
그러면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라
마음은 미래를 바라지만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은 그리움으로 남게 되리니.
김수형과 함께 이봉구만이 열렬히 박수를 친다.
이윽고, 소년은 둘에게 인사하고 퇴장한다.
김수형 : (소년에게 다가가며) 명동백작! 나는 아직도 이 신문 파는 불쌍한
아이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자책감에서 헤어날 길이 없었어. 그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볼 때마다 왜 저 애들은 내 자식만큼도 행복하
지 못한가 하는 막다른 수치감. 그래! 나는 그때 문자 그대로 피해
살기만 했었어.
이봉구 : 자네뿐이었나? 예술이라는 명목으로 우리들은 철저하게 유희적인
생활만 했어.
김수형 : 봉구! 요즈음에 어머니의 말씀이 자주 생각나. 판사나 검사가 되지
않고 예술 나부랭이를 했다고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나를
꾸짖었어. 그 아무짝에도 써먹지 못하는 것을 무엇 하려고 하느냐?
그 질문은 아직까지도 나를 떠나지 않고 나를 괴롭혀.
아무짝에도 써먹지 못한다!......
김수형은 지팡이가 흔들릴 만큼 감정이 격해진다.
중세기처럼 문학을 하는 것이 권력에 가까이 가는 길도 아니며, 문
학을 해 가지고 아무나 돈을 크게 벌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
다고 식민지 치하의 몇몇 작가들처럼 모두들 지사로서 대접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도 문학을 한다?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그리고 그것
은 그것을 할 만한 가치를 그 자체 내에 갖고 있는가? 문학이란 아
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비난은 아직까지 나의 화두야!
김수형이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이봉구는 그에게 다가가려 한다.
다시 급히 가림 막이 쳐진다.
잠시 동안 멍하니 있던 이봉구는 관객을 응시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음악이 이봉구의 대사의 톤에 따라 고조된다.
이봉구 : 여러분!
문학은 아니, 예술은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
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
간을 억압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필요
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예술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
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
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인 힘을 인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 부정
적 힘의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는 당위성을 느끼게 해주는 겁니다.
예술가의 가슴은 뜨거워야 합니다. 뜨겁디뜨거워서 세상을 밝혀주
고 따뜻하게 감싸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 명동야화같이 하루살이 한해살이 꽃이어서는 안됩
니다.
예술청년들이여! 당신들은 이 시대를 구원하는 가슴을 지녀야 합니
다!
이봉구는 관객들의 박수를 받으며 그들에게 천천히 손을 흔들며 퇴장한다.
가림 막이 올라가면서 마네킹처럼 서있는 명동야화들이 희미하게 보이다 점차 밝
게 비춰진다.
- 幕 -
■ 희곡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
이봉구
1916년 1월 16일 경기도 안성 출생.
1933년 안성보통학교를 거쳐 중동학교 중퇴
1938년 오장환, 김광균, 서정주 등과 "시인부락""풍림""자오선"동인으로 활약.
1983년 사망
박인환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 출생.
1944년 재령 명신 중학교 졸업. 관립 평양 의학 전문 학교에 입학.
1945년 학업을 중단하고 서울로 상경. 서점 "마리서사" 경영.
1956년 3월 20일 밤 9시, 31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다.
전혜린
1934년 1월1일, 평남 순천 출생. 1952년 경기여중·고 졸업, 서울 법대 입학
1959년 법대 재학중 渡獨 이후 서울대학교 범과 대학 및 이화여자대학교, 성균관대학
교 강
사 역임.
1965년 1월 10일 31세를 一期 생을 마감.
변영로
호는 변영복(卞榮福), 수주(樹州)
1897년 5월 9일 서울 출생
1909년 중앙학교 입학
1920년 일본 동경에 머물며 "廢墟"동인으로 활약.
1961년 3월 14일 인후암으로 사망
한노단
1912년 6월 27일 서울 출생.
1934년 단막극 "어머니"를 신동아에 발표함으로써 데뷔.
1938년 와세다 대학 영문과 졸업
1946년 서울대 사대, 부산대 등의 교수 역임
이서향 출생 연대
미상
1930년 희곡 "제방을 넘는 곳"을 발표하면서 등단.
1945년 해방직후 조선문학가 동맹에 가담했다가 월북.
■ 참고 또는 인용한 자료들
최남진,『명동야화』, 서울:신원문화사, 1982.
"막걸리에서 모닝커피까지", 『명동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서울:신원문화
사, 1994.
김시철, "격랑과 낭만",『자유문학과 명동(동방싸롱)』, 서울:청아, 1999.
고 은,『1950년대』, 서울:청하, 1989.
고설봉,『빙하시대의 연극마당 배우세상』, 서울:이가책, 1996.
김수영,『김수영전집2』, 서울:민음사, 1981.
김 현,『한국문학의 위상』, 서울:문학과 지성사, 198.
이덕희,『아! 전혜린』, 서울:홍성사, 1985.
『전혜린 이야기』, 서울:예하, 1988.
정공채,『전혜린 평전』, 서울:문학예술사, 1982.
김윤식, "전혜린에 대하여",『김윤식 전집』, 서울:민음사. 1985.
전혜린,『목마른 계절』, 서울:범우사, 1976.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울:민서출판사, 1985.
정도상,『그 여자 전혜린』, 서울:두리, 1993.
윤석산,『박인환 평전』, 서울:오늘, 1983.
강진호 엮음,『한국 문단의 이면사』, 서울:깊은샘, 1999.
조병화, 『명동시대』, 대한일보 1969년 4월9일부터 1970년 11월 10일자.
KBS 영상실록(1945-1960)
중앙일보 1999년 6월 25일자 33면, 『시장은 살아있다 - 명동편』.
작가의 글
흔히들 지금까지 1950년을 전·후한 우리 나라를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극심한
혼돈의 시기라 정의한다. 또한 동족상잔의 분단의 비극과 함께 그것을 인정하고 저
마다 살기 위한 몸부림의 시기였다는 것이 일반론이다.
하지만, 도올 김용옥은 「新韓國紀」에서 "남/북 분단의 고착화를 가져온 민족상쟁
의 비극이라는 고식적 이해방식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20세기에 있어서 우리사회에
가장 거대한 변혁을 일으킨 사건이라는 사회 사상적 시각을 도입"하면서 "6.25라는
우리 삶의 파괴는 결과적으로 우리사회에 잔존하던 '왕정구조'에 치명타를 입힘으로
써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을 열었으며, 6.25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우리사회의 신분질
서의 파괴라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는다. 따라서 6.25를 부정적
으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긍정성을 적극적으로 유도시킨다.
이 시대에 자유로울 수 없었던 예술계의 선배들은, 자신의 작품에 매달렸고 그 보
다 더 치열하게 자신의 궁핍한 생활과 예술환경과 싸워야 했다.
따라서 시를 쓰려면, 아니 예술계에 입문하려면 먼저 술과 담배부터 배워야 한다
는 예술가의 첫 번째 강령이 이 시기부터 기인한 것이다. 문제는 시대와 환경에 상
관없이 이러한 분위기만이 유전되어 오늘날 예술계가 정체되어 있는, 환경적인 부
분에서 중요한 문제점의 하나로 남게 되었다.
이 시기의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향유하거나 즐길 수
없는, 독자와 관객 없는
시와 소설과 연극과 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이들은 가난했고 외로웠고 극심한 자
기 자신과의 싸움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예술가들의 몸짓은 오늘날 미약한 우리 예술계의 초석을 다져
놓았다. 서양의 최신이론들과 양식들이 이 시기에 급속도로 들어왔으며, 그것을 받
아들이는 것과 우리의 것들을 대입시키기 힘들만큼 이 점에서도 혼돈의 시기였다.
작가는 이 예술사적인 혼돈의 시기를 주목한다.
술 마시고 멋 부리고 담배만 열심히 피던 우리의 선배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
니라, 지금은 너무도 퇴색해 버린 예술가의 양심과 자세를 다시금 생각해보고자 하
는 촌스러운 마음이 울컥 들었기 때문이다.
독회의 기회를 주신 이강백 선생님과 당시 명동시대를 증언해 주시고 일려주신 차
범석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초안부터 많은 의견과 비판과 격려를 해주신,
이창구 교수님!
당신의 60회 생신에 이 조그만 작품을 감히 바칩니다.
♥ 독회의 기회를 주신 이강백 선생님과 당시 명동시대를 증언해 주시고 일러주신 여
러 선
생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초안부터 많은 의견과 비판과 격려를 해주신 이창구 교수님!
당신의 60회 생신에 이 조그만 작품을 감히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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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2.04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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