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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미학: 스티비 스미스 시의 죽음예찬
2017. 11. 28. 21:35
정 영 희
I. 서론
아냐, 둘 중 하나만은 안돼,
No, not the one without the other,
언제나 둘은 함께 있는 거야,
But always the two together,
뜨고 지고, 지고 뜨고,
Rising fading, fading rising,
그래야 아름답다는 걸 깨닫는 건
It is really no surprising
정말 놀랄 일이 아냐.
To find this beautiful
(「아름다워라」“Beautiful”)
플로렌스 마가렛 스티비 스미스(Florence Margaret Stevie Smith)(1902-1972)의 모든 시집에는 죽음과 자살에 대한 시가 가득하다.1) 1990년대 이후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비평가들에게 각광받아온 그녀의 여성주의 시들은 당대의 지배담론이었던 전통설화에 담긴 가정(家庭) 이념이 낳은 남성의존적인 여성심상과, 모더니즘의 가부장적 남성중심주의와 형식적 권위의 시를 뒤집고 조롱하고 모사했다. 자살과 죽음을 다룬 그녀의 시들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인간에게 오랫동안 행사되어온 죽음의 전통적인 권위, 즉 위협과 공포와 허무의 대상으로서의 죽음이라는 고정관념을 순식간에 무너뜨린다.
영국 성공회 신자였던 그녀가 삶의 절망과 소외로 인해 한평생 죽음에 탐닉하면서도 집요하고 강열한 자살 욕구를 억누를 수 있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자살을 죄악시하는 기독교리2)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의 독특한 죽음관 덕분이었다. 그녀의 시에 나타난 죽음은 아집이 허물어지는 축복의 순간이며 자아의 닫힌 공간을 벗어나는 해방의 상태이다.
그녀에겐 죽음만이 삶의 모순과 부조리와 소외를 벗어나, 세계와 화해할 수 있는 영원한 ‘끝’(end)이다.
스티비 스미스의 죽음관에 대한 기존의 비평은 주로 전기적 비평과 정신 분석학적 비평의 혼합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임스 나자리안 (James Najarian) 이 스미스 시의 평들을 전기적 비평, 이론적 비평, 정치적 비평의 3단계로 분류한 바에 따르면(472-4) 스미스 시에 대한 ‘전기적 비평’은 스미스 시의 괴팍함 -여러 종류의 장르(동요, 전래동화, 삽화, 자장가의 운율, 놀이노래)에 걸쳐 시를 쓰고 아주 단순한 운율과 특이한 운을 사용한 점- 을 한 괴짜 시인의 삶과 성격의 초상화로 해석하는 것으로서, 샌포드 스턴리치(Sanford Sternlicht)와 캐더린 시벨로 (Catherine Civello) 의 비평이 이에 해당된다.
스턴리치는 스미스의 죽음관을 전기적 사실에 따라 분석하면서3) 그녀의 죽음관이 처음에는 단순하고 신학적 갈등이 없는 도피심리로 시작되다가, 차츰 철학적으로 성숙하며 신에 대한 회의로 갈등하다가, 마지막 시집에 이르러서는 운명의 덧없음과 생명의 종말에 대해 우울해하는 체념을 보인다고 평했다. (Sternlicht 1990)
스미스의 시에 대한 정신분석적 비평은 나자리안의 분류에서 전기적 비평에 포함시킬 수 있는데, 가장 본격적인 정신분석적 비평은 제시카 월쉬(Jessica Walsh)의 「스티비 스미스: 성장이 정지된 소녀」 (“Stevie Smith: Girl,Interrupted”)라 할 수 있다.
월시는 스미스와 죽음과의 사랑을 전기적․ 심리학적으로 분석하면서 결손 가정에서의 성장, 3년 동안의 요양원 생활, 사랑받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 때문에 그녀가 평생 동안 목가적인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와 우울증에 빠져서 ‘병과 유기(遺棄:abandonment), 감금과 죽음의 어린 시절’에 대한 시를 끊임없이 썼다고 분석했다.(57)
스미스 시에 대한 ‘이론적 비평’은 미하일 바흐친 (Mikhail Bakhin)의 대화론 (dialogical theory) 에 맞추어 스미스 시의 내용과 형식 사이의 이질성을 해석한 것이다. 바흐친에게 언어놀이는 말이 완전히 자유로운 놀이기간을 즐기면서 색다른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담론의 순간들을 뜻한다.
마틴 펌프리(Martin Pumphrey)는 스미스의 놀이성을 탐구하면서 스미스가 진지함과 놀이성의 경계선을 무너뜨려 문화담론과 언어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고 평했다 (SS 87). 셔릴 스티븐슨 (Sheryl Stevenson)과 로마나 훜(Romana Huk)도 스미스의 이질성을 바흐친의 대화론으로써 분석했다.
스미스의 시에 대한 ‘정치적 비평’은 스미스의 장난기를 전도적인 기능으로서 읽어낸 비평으로서 여성주의적인 비평이 이에 해당될 것인바 로라 세버린(Laura Severin), 크리스틴 브루멀(Kristen Bluemel), 로마나 훜, 마틴 펌프리의 스미스 비평이 이에 속한다.
앞서 말했듯이 지금까지 스티비 스미스의 죽음관에 대해 나온 비평은 주로 전기적 비평과 정신분석적 비평을 합친 것으로서, 그녀의 죽음관을, 그녀의 종교관과 관련지어,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한 비평은 아직 없었다.
본 논문은 그녀의 자살과 죽음의 시에 나타난 그녀의 자살 욕망을 여성주의적인 관점으로 분석하고, 그녀의 죽음관을 포스트 모던 여성주의적인 관점으로 분석하고자 했다.4)
그녀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포스트모던 여성주의의 입장에서 짚어본다면, 죽음에 대한 가부장적인 고정관념, 즉 죽음을 삶과 분리된 어둡고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을 뛰어넘어, 죽음을 자의식으로부터의 해방으로 긍정시하여 친밀화한 점을 들 수 있겠다. 그녀는 죽음을 삶의 종말로 보는 점에서 무신론자에 가까운 불가지론자였지만, 죽음에 의한 자아소멸을 자아해방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환영하였다.
본 논문은 그녀가 1)자살과 죽음에 탐닉하는 태도를 가부장적 사회의 산물로서의 여성 우울증과 관련지어 분석하고, 2)삶의 고통을 참아낸 사람만이 죽을 자격이 있다고 보면서 죽음을 삶의 버팀목으로 삼은 그녀의 극기적인 죽음관을 살펴보고, 3)기독교의 권위적인 내세관과 무신론의 허무적인 죽음관이 강화시키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무너뜨리고 죽음을 친밀화한 점을 포스트모던 여성주의와 관련지어 해석했다.
그녀에게 죽음은 삶의 절망과 소외를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이었으므로 그녀의 시에는 죽음에 대한 고민이나 갈등보다는 주로 죽음에 대한 탐닉과 삶에 대한 고민, 즉 인간관계에서의 의사불통과 소외, 삶의 절망과 외로움, 기독교에 대한 회의가 나타난다.
따라서 본 논문은 그녀의 죽음에 대한 고민이나 갈등보다는 그녀의 죽음찬미의 특성과 형성요인을 여성주의 비평의 시각으로 분석하는데 글의 초점을 맞출 것임을 밝혀둔다.
1) 그녀의 첫 번째 시집(『누구에게나 한때 좋은 시절이 있었지』A good time was had by all)에선 10편 정도였던 죽음과 자살에 대한 시가 죽음의 시집이라고 불리는 2집(『오직 한 사람에게만 부드럽게』Tender only to one)에선 시집의 절반을 채웠고 죽음의 내용도 좀 더 탐닉적이고 여성주의적이 되었다.
3집(『엄마, 남자가 뭐예요?』Mother, What is Man?)에선 죽음의 유혹을 극기주의적인 삶의 자세로 극복하려는 달관한 죽음관(“Study to deserve to death”)이 나타났으나 마녀의 시집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혼란스런 시들이 나타난 4집(『해롤드의 도약』Harold's Leap)에선 도피적인 죽음의 시가 많아졌다.
소외와 죽음의 시집인 5집(『손을 흔든 게 아니라 허우적댄 거야』Not Waving but Drowning)과 종교적인 시집인 6집(『개구리 왕자 외 다수』The Frog Prince and Other Poems)에 와서 그녀의 죽음관은 종교와 철학적 상념으로 성숙되어 죽음은 일종의 깨달음과 같은 것으로 정화되어 나타났다.
그녀가 뇌종양으로 죽은 다음 해에 출간된 7집『전갈 외 다수』 Scorpion and Other Poems)에선 죽기 직전의 시집답게, 거의 모든 시가 죽음에 대한 것이었다. 한평생 죽음의 시를 쓰며 홀린 듯 자살욕망에 빠져들었던 스티비 스미스였지만 그녀가 자살을 시도한 것은 51살 때 단 한번 뿐이었다.
오랫동안 이모를 병구완하며 직장을 다니느라 몸과 마음이 지쳐있던 그녀는 1953년 7월 1일 직장 사무실에서 면도칼로 손목을 그었다, 이 자살 사건은 그녀가 30년 가까이 다니던 잡지사 비서직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서평가 겸 문인으로 살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Spalding 213)
2)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413-426년 사이에 기독교적 공동체 이론서인「신국록」에서 중세교회의 도덕적 기초를 세웠다. 그는 모든 살인에 대해 모살(謀殺)이라는 이름으로 유죄판결을 내렸다.
자신을 죽인 인간도 모살을 한 것이므로 유죄이다. 그 사람은 자결(自決)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인 사람이다. 자살은 십계명을 어긴 것이며 자살한 사람은 주님의 나라에 대한 책임을 저버렸으므로 주님의 나라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인들이 초기 기독교의 한 종파였던 자살종파의 현혹을 뿌리치게 하려고 자살자를 “악마에 미친 자”라고 했다. 자살자는 모살죄보다 더 중범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사후까지 지속될 영원한 재앙이 자살자를 기다린다. 자살한 자는 축복받은 땅에 묻혀서는 안 된다. 자살자의 자살 동기는 교회의 엄중한 감찰아래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중세교회는 자포자기의 자살을 자살 가운데서도 가장 옳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3) 스미스는 그녀가 태어나자마자 집을 나가버린 아버지에 대한 상실감과 자책, 어렸을 때부터 병약하여 요양원에서 지내면서 병과 외로움과 소외에서 생겨난 우울증과 조숙함으로 말미암아 삶과 사회에 적극적으로 소속되지 못한데서 오는 삶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죽음에 의지하고 탐닉하면서 삶을 회피하며 살았고 말년에 내생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없는 불가지론자로 생을 마감했다.
4) 스티비 스미스의 여성주의는 포스트모던 여성주의의 태도, 즉 여성성을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자아정체의 핵심으로 옹호할 만큼 여성적 육체와 정신의 진정한 가치가 다양성, 다원성, 유연성임을 아는 사람의 태도로 평가할 수 있다.
I. 여성주의 시각에서 본 여성의 우울증:
이중부정 방식의 여성성 형성과 죄의식
스티비 스미스의 전기에 의하면 스미스는 별안간 심한 우울 발작에 잘 빠졌다(B&M 95). 그녀의 수많은 시에 나타나는 그녀의 자살에 대한 강박관념과 죽음에 대한 탐닉은 그녀가 한평생 우울증에 시달렸음을 말해준다. 그녀가 결혼을 전제로 한 사랑을 거절하고 독신을 고집한 것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유달리 약한 몸에 힘겨운 가사와 육아의 책임이 따르는 결혼생활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부장제의 여성억압적인 가정생활로부터 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일생동안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는 자기보호적인 경계지역을 삶의 주변부에 설정해놓고 그 안에서만 사는 삶의 방관자에 머물렀다.5)
"내 시엔 삶에 대한 공포가 끔찍하게 많아요. 난 삶을 사랑해요.
삶을 숭배하지만 그건 단지 내가 삶의 가장자리에 무사히 잘 머무를 때만 이에요. 난 어떤 것에도 언질을 주지 않아요. 내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난 빠져나갈 수 있어요.
. . .창피하지만 난 그래요.** 난 죽음을 사랑해요. 죽음은 가장 신나는 일이죠.
. .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지요.
. . . 당신을 이 끔찍한 우울증에서 끌어내는 건 죽음이 당신 손안에 있다는 것, 원하면 끝장낼 수 있다는 생각이지요. . . . 살아있다는 것은 적진에 들어가 있는 것 같기 때문이에요. (SS 162)"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스미스의 삶에 대한 공포는 여느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는 우울증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처음부터 그녀에게 죽음은 삶의 공포로부터의 도피처였고 달콤한 잠과 같은 휴식이었으며 절망으로부터의 구원이었다. 「오라, 죽음이여(1)」 “Come, Death(1)”)에서 화자는 “왜 사람들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가?” (“Why should man more fear Death than fear to live?”)라고 의아해한다.
5) 스미스가 그녀의 호랑이 이모가 병들어 죽을 때까지 그녀를 사랑하고 돌봤던 점을 생각하면 스미스의 사랑과 결혼에 대한 책임회피는 자기보호적인 피해의식의 소산이라고 생각된다.
죽음이여, 그대는 왜 오다말고 우물쭈물하며 늦장 부리는가?
내가 기도하고 눈물 흘리며 불렀는데 왜
그대는 지체하는가?
죽음이여, 당장 와서 내 영혼을 데려가주오.
불렀는데도 안 올 건가? 그대가 내 슬픔에
어서 관심 갖도록 내 강제로 힘을 써야 되겠는가?
내 그대의 외투를 한 손으로 잡고서,
그대를 놓아주게 않을 걸세.
Why dost thou dally, Death, and tarry on the way?
When I have summoned thee with prayers and tears, why
dost thou stay?
Come, Death, and carry now my soul away.
Wilt thou not come for calling, must I show
Force to constrain thy quick attention to my woe?
I have a hand upon thy Coat, and will
Not let thee go. (CP 108)
「아네모네 공주에 대한 목소리들」“Voices about the Princess Anemone”에서 삶의 두려움은 곧바로 죽음의 탐닉으로 이어진다.
그녀는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말을 써서
그걸 목에 건 사람이죠.
그녀는 황량한 숲 속으로 뛰어 들어가
그곳에 누워 다시는 웃지 않았죠.
탄식하며 말했죠, 오! 두려움이라는 나의 말이여,
너만이 내 유일한 애인일지니.
She was the first who ever wrote
The word of fear, and tied it round her throat
She ran into the forest wild
And there she lay and never smiled.
Sighing, Oh my word of fear
You shall be my only dear.(CP 295)
그녀가 삶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사랑한 이유는 그녀의 삶이 절망 위에 선 고독과 소외의 삶이기 때문이다.
가부장적 남성, 결혼, 가정생활에 대한 그녀의 부정적 견해와 인간관계에 구속되길 거부하는 독립적이면서 고독한 성격 때문에 스미스는 고독을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절망의 순간 삶의 공포와 분노가 외로운 그녀에게 덤벼들면 그녀에겐 죽음이 친구라는 생각이 찾아들었고 (MA 110) 절망과 함께 밤마다 죽음이 찾아왔다. 죽음은 그녀에게 있어 결코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고뇌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절망과 소외로부터 그녀를 구해줄 수 있는 최선의 구원책이었다.
죽음은 「오라, 죽음이여」 (“Come, Death(1)”)에서는 애타게 기다려도 오지 않는 애인으로, 「오직 한 사람에게만 다정하게」 (“Tender only to one”) 에서는 미래의 애인으로 나타난다.
너니? 너니? 너니?
오직 한 사람에게만 다정하게,
마지막 꽃잎의 마지막 숨길이
크게 외치네
얼음 같은 수의를 입은
그이 이름은, 그이의 이름은 죽음이란다.
Is it you, or you, or you?
Tender only to one,
Last petal's latest breath
Cries out aloud
From the icy shroud
His name, his name is Death. (CP 93)
죽음욕망은 우울증의 증상 가운데 하나로서 현실도피 기제이다. 우울증 환자는, 프로이트에 의하면, 파열과 상실이 존재하기 이전의 존재상태인 어린시절이나 죽음으로 귀환하려 한다. 죽음욕망은 태아가 세상에 태어나기전 어머니의 자궁에서 가졌던 어머니와의 일체감과 정지성의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퇴행현상으로 여겨진다.6) 순간적인 울적 감정은 순간적인 자아 퇴행이고, 자기 존경심의 상실이 따르는 정신병적 울증은 지속적이고 파급 효과가 큰 자아 퇴행으로 정의된다(라이트 100).
한때 울증은 본능의 퇴행으로 여겨졌으나 (Abraham, 1982[1924]) 오늘날에는 미국의 자아 심리학의 영향을 받아 기본적 자아의 반작용으로 파악된다.(Bibring, 1953)
울증(melancholia)은, 프로이트(1917)에 의하면, 애도(mourning)와 비슷한 현상으로 둘 다 세상에 대한 관심을 상실하는 심적 태도이지만, 우울증은 애도와 달리 자기존경심의 저하현상을 수반한다.7)
애도의 원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데 있는 반면, 우울증의 원인은 사랑하는 이에게 배척당해 자애(나르시시즘 narcissism)8)가 손상된 데 있다.
우울증 환자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하여 사랑과 증오라는 양면적인 감정을 강화시킨다.
그의 해결되지 못한 성 본능(리비도 libido)은 새로운 대상을 구하지 않고 자신에게 투사되어(자기애) 잃어버린 사랑의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잃어버린 사랑의 대상은 우울증 환자의 자아 속에 자아의 대행자로서 자리 잡고 앉아 그의 자아를 제약한다.
우울증은 결국 자아를 두 번, 한번은 사랑의 대상에 의해서, 또 한번은 자신에 의해서 부정하는 것이다. 이처럼 잃어버린 사랑의 대상이 자아에 합체되는 것이 우울증의 기제이다.
울적 상태에서는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사랑과 증오가 자아에게 투사되므로 울증은 자아의 파괴성을 수반하게 된다. 애도의 경우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으로 세상에 대한 관심을 상실하므로 외부세계가 황폐화되나, 우울증의 경우 자기 존경심의 상실로 자아가 황폐화된다.
6) 월시는 1938년 36살의 스미스가 시 낭송회에서 특유의 낮은 음조로 노래하듯 읽는 천주교식 낭송법으로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낭송회에서 여학생 복장을 하고 어리광부리는 말투를 쓰기 시작한 것은 사랑받지 못했던 어린시절을 보상받으려는 듯 사랑받는 아이의 역할을 연출한 것으로 한편으로
는 인기에 대한 불안 때문이고, 한편으로는 일종의 퇴행현상이라고 본다(61).
그녀의 모든 시집마다 어린시절의 고통스러웠던 경험에 대한 여러 편의 시가 나타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파악된다. 스미스에게는 여성억압적인 가부장제에 반대해서 홀로 자아를 추구하는 강한 자아만큼이나 강력하게 따뜻한 사랑에 의존하려는 유아적인 자아가 공존한다. 「떠돌이」("The Wanderer", CP 257)는 그녀의 분열된 두 자아가 교차하는 시이다.
7) 프로이트는 그의 「애도와 우울증」 (“Mourning and Melancholia”)(1917)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보이는 주체의 두 반응을 설명한다. 프로이트는 이 논문에서 그의 「나르시시즘에 관하여: 개요」(1914)의 중심논의였던 자아형성 과정을 발전시켜 대상에 대한 사랑(대상애)도 자아형성에 중요하게 작용함을 강조한다. 우울증의 기제는 잃은 사랑의 대상이 자아에 합체되는 것이다. 「나르시시즘에 관하여: 개요」에서 인간본능은 자아본능(ego instinct)과 성본능(sexual instinct)으로 나뉘고 이것이 후에 일차적 자애와 대상애로 나뉜다. 「애도와 우울증」에서는 대상애의 영향이 강조된다, 우울증은 대상애 시기 후에 자애로 되돌아가는 퇴행적 동일시로 설명된다. 사랑의 대상을 잃으면 애도나 우울증이 나타나는데 애도보다는 우울증이 자아 형성이나 여성성의 구성과 연결된다. (“Mourning is regularly the reaction to the loss of a loved person, or to the loss of some abstraction which has taken the place of one. . . . As an effect of the same influences, melancholia instead of a state of grief develops in some people, whom we consequently suspect of a morbid pathological disposition.”)
8) 자애(narcissism)는 자신의 이미지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소년 나르시스 (Narcissus)는 사랑의 대상인 숲의 요정 에코 (Echo:메아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물 위에 비친 자신의 얼굴만을 사랑하여 한숨쉬며 바라보다가 물에 빠져 죽고 만다(Ovid, Metamorphoses 3, 359-519)
「과부신세 또는 로스 귀부인의 귀향」 (“Widowhood or The Home-Coming of Lady Ross,” CP 459-60)은 과부가 되어서야 비로소 강압적인 남편과 그의 의견에서 벗어나 홀로 선 한 미망인에 대한 시이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생각을 발설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 심장은 얼어붙은 덩어리,
난 죽음만을 손꼽아 기다리죠,
해롤드가 여기 없어서
지금 날 못 보는 게 다행이에요.
- - -
그는 호텔에 묵는 것을 좋아했죠, 그는 그곳에 묵는 걸 좋아했어요.
난 지금 바닷가에 홀로 사는데
예전엔 결코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없어요,
해롤드, 날 용서해줄 수 있나요?
내 친정식구들은 사교성이 별로 없었죠.
- - -
오, 해롤드, 우리 집이 오늘 따라 아주 아름다워 보여요,
왜 당신은 항상 떠나고 싶어 했나요?
My heart is a frozen lump,
I look forward to nothing but Death,
I am glad Harold is not here
To see me now.
- - -
He loved staying in hotels, he loved staying in 'em.
Now I live alone by the sea
And I am happy as never I used to be,
Harold, can you forgive me?
My family were never much good in company.
- - -
Oh Harold, our house looks so beautiful today,
Why did you always want to go away?(CP 459-60)
로스 귀부인(Ross는 loss (상실)을 연상시킨다)이 홀로 사는 삶은 한편으로는 죽음만이 위로가 되는 늙은 과부의 외롭고 우울한 삶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생전의 어떤 순간보다 행복한, 고요하고 평온한 삶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도 죽은 남편의 판단기준에 자신을 종속시키며 죄의식을 느낀다. 스티비 스미스의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로스 부인의 자아에는 잃은 사랑의 대상인 남편이 합체되어 있다.
이 시에는 로스 귀부인의 독백이외에도 호텔 종업원의 목소리 -“저렇게 늙는다는 건 정말 끔직해, 많이 울었나봐, 볼에 저 끔직한 눈물자국좀 봐”- 가 들어있어서 그녀의 객관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우울증 환자의 자아 이중부정 방식은 여성성 형성의 이중부정방식과 유사해서 여성성은 여성의 우울증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다. 여성성은 사회적, 심리적 성(gender) 의 형성화이므로 여성성의 형성에 있어서 가부장제의 영향력은 아주 크다고 말할 수 있다.
라이트(101-5)에 의하면 스페인과 미국의 의생태학적 연구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두 배 더 울증을 겪고 있다는 결론이 나왔으며(Boyd and Weissmann, 1981;Hirschfield and Cross,1982) 몇몇 여성분석가들은 사회적 여성성의 개념과 울증의 특성 사이엔 비슷한 점이 있고 우울증의 씨앗은 이미 여성성의 발전과정 속에 들어있음을강조했다.(Notman, 1989; Bleichmar,1991).
프로이트가 남근이 결핍된 여성의 신체적 정체성 속에 여성의 신경증세가 내재되어있다고 본 반면,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의 정체성이 사회적인 형성과정을 거치는 동안 사회로부터 여성우울증의 원인인 죄의식이 제공된다고 생각한다. 남자아이의 경우, 남성성을 일회 부정의 방식에 의해 얻는 반면에, 여자아이는 여성성을 이중 부정의 방식으로 얻는다는 것이다. 즉 남자아이는 최초의 애정의 대상인 어머니의 거세사실을 인식한 후 어머니를 부정하고 아버지와의 동일시의해 남성성을 얻으며 그가 부정한 어머니의 대안으로서 다른 여성을 욕망의 대상으로 얻을 수 있는 반면에, 여자아이는 최초의 애정의 대상인 어머니에 대한 사랑 이후, 어머니를 부정하고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고, 근친상간의 금기 때문에 아버지를 부정하고 다시 어머니와의 동일시에 의해 여성성을 얻는다.9)
여자아이의 경우 남자아이와 달리 ‘미래의 아내’라는 대체할 어머니라는 보상 없이 어머니와 분리되므로 남자아이보다 더욱 죄의식이 강화된다.(Julia Kristeva, 1989[1987])10)
결국 우울증이란 사회적 여성성의 형성에 의해 여성에게 내면화된 죄의식 때문에 여성에게 더 걸리기 쉬운 병인 셈이다.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의 죄의식은 사회에 의해 주입된 자기부정방식이라고 공격한다. 스미스의 죄의식은 자신의 탄생과 존재의 부정으로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탄생과 존재를 거부당했던 깊은 정신적 상흔 때문에 어린 시절에 대한 슬픈 시를 한평생 주기적으로 되풀이해서 썼는데, 그녀의 어린시절에 대한 시 쓰기는 거부당한 사랑에 대한 갈망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유아」(“Infant”)에서 갓 태어난 아기는 아버지가 자신과 어머니를 버렸음에 냉소하며, 「슬픈 마음」 (“The Sad Heart”)에서 시의 화자는 “내 어머니가 나를 낳으신 것은 애석한 일이다” (Tis pity that ever my mother bore me, CP 184) 라고 한탄하며「아빠는 아가를 사랑해」(“Papa Love Baby”)에서 시의 화자는 자신이 태어난 지 2주 만에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바다로 도망간 것은 자신이 아버지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며 자신을 나무란다.11)
난 유모차에 똑바로 앉아
엄마가 그처럼 어리석은 결혼을 안했더라면 생각했지.
그걸 숨기려 애썼지만 운 나쁘게 내 눈에 드러났고
두 주일 후 아빤 바다로 달아났어.
그는 휴가 때면 집에 왔었지만
항상 마찬가지였어
난 슬퍼하지 않았어
허지만 어느 정도는 내 탓이라고 생각해
I sat upright in my baby carriage
And wished mama hadn't made such a foolish marriage.
I tried to hide it, bu it showed in my eyes unfortunately
And a fortnight later papa ran away to sea.
He used to come home on leave
It was always the same
I could not grieve
But I think I was somewhat to blame (CP 16).
위의 시에서 화자는 아빠는 딸인 자신을 좋아했지만 자신은 아빠를 싫어했노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스미스는 당시 유행하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조롱하고 있다. 여성주의자들은 프로이트의 남성중심적인 정신분석이론이 주로 여성인 정신분석환자들에게 가부장적인 횡포를 휘둘렀으므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을 여성 억압적 이념으로 간주하고, 정신분석이 여성을 비하하면서 이성애와 가부장 제도를 강화시키는 과정을 파헤치는 데 주력하였다. 「정신분석환자」(“Analysand”)(CP 54)에서 화자는 고백과 자기분석이라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치료법은 환자가 스스로를 증오하게 만들어 결국은 자살로 이끈다고 비난한다.
스미스 역시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자살충동을 자주 느꼈고 죽음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죄의식을 해소시켜줄 위안이자 해결책이었다.12)
9) 프로이트의 남근숭배적인 정신분석학과 이후의 여성주의적인 정신분석학 에서도 원초적 장면에서 여자아이는 어머니를 아버지와 같이 거세하는 인물로 경험하므로 어머니와의 동일시로 자신이 아버지의 남근을 삼킬 수도 있다는 공포심을 갖게되고 이 환상에 의해 생겨난 여성특유의 죄의식이 후년의 삶에 정서적 지적 장애요
인(울적 반작용)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본인은 성적인 측면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여성우울증 정신분석에는 의문을 품는다.
10) 여자아이가 사회적 여성성을 형성하는 방식은 프로이트의 병리적인 여성성이거나 어네스트 존스의 남근 소멸(privation) 의 공포에 대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죄의식에서 나온 여성고유의 여성성이거나 모두 이중부정의 과정을 거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프로이트의 성 이론을 기초로 하면서도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어머니를 강조하며 여성우호적인 성 이론을 제시했다.
11) 그녀가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는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해군입대라는 낭만적인 도피책을 택했고 그 후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 자신의 탄생 직후에 있었던 아버지의 무책임한 가정방기 때문에 그녀는 아버지가 가정을 버린 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죄의식과 함께 남성, 결혼생활과 가부장적 가정제도 전체에 대한 불신과 회의를 갖게 되었다.
12) 스미스는 자신의 신체적 허약과 정신적 무력감에 대해서도 죄의식과 자책감에 시달렸다. 그녀는 “피곤하면 절대적인 부적합성, 부족감, 결핍감이라는 죽은 순간으로 들어갔고 이러한 순간은, 생명에 대한 어떤 위대한 느낌을 잃어버려 생명과 소외되므로, 비록 자연과 동물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해도 삶은 고통스러워져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신의 생명을 신이 씹어 먹고 최대한으로 이용하도록 이런, 저런 신께 바치는 일 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하다”고 말했다.(MG 116) 그녀는 너무 피곤해서 말도 못하고 글도 못쓸 상태가 되면 그런 자신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죽고 싶었고 이럴 때 죽음은 위안으로 다가왔다.(MG 112)
크리스테바는 여성의 우울증을 여성성 형성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어머니의 대체물을 얻을 수 없는 여자아이 특유의 상실의 경험을 강조하면서 제도적인 금지와 복종의 증후군이라 정의했다(Walsh 62 재인용).13) 또한 사회제도적인 금지와 복종도 여성에게 더 많이 강요되기 마련이므로 자연히 여성의 죄의식과 자책감이 남성보다 더 골이 깊어진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죽음본능은 문화적 규범과 법칙에 대한 죄의식과 쾌락에 대한 자기도취적 욕망에서 나온다. 여성에게 있어 문화적 규범에 대한 죄의식은 가부장제 사회가 요구하는 금지와 복종에 의해 형성되거나, 사회가 요구하는 금지와 복종에 따르지 않을 때 나타나는 내면에 형성되어 자신을 지배하는 자기부정이나 죄의식, 자책과 같은 심리적 증후군이다.
당대 가부장제 사회의 가정이념이 규정해놓은 여성상에 맞추어 살지 않고 ‘고통 받는 한 사람으로서 살고자’ 했던 스미스처럼 여성적 주체성을 갖고 독립적으로 사는 여성들에게 사회 곳곳에서 사회적 죄의식이 강요된다. 여성의 가정복귀와 남성에의 종속을 주도했던 양차대전사이와 이차대전 후의 사회에서 스미스는 그녀가 다니던 여성잡지사와 대중매체들이 주도했던 낭만적인 결혼관의 허상과 여성의 전통적 역할의 텅 빈 진상을 노골적으로 폭로했다.
「심하게 병적인」(“Deeply Morbid,” CP 296-98)에서 스미스는 노처녀는 외롭고 불행하고 불모라는 문화신화의 전복을 시도했다.(Civello 61) 이 시에서 미혼녀 타이피스트 조안(Joan)은 터너(Turner) 그림 속으로 사라짐으로써 근심걱정에서 해방되는 모험가 또는 창조주로 묘사된다.
그녀는 사무실 동료와 헤어질건가
그녀는 퇴근 후의 즐거움을 버릴건가
다정한 사무실에서의 노고
후 여가시간으로 달아나던 것을?
철저히 혼자서 온통 혼자서
그림 앞에 선 그녀는 돌이 되어 버린 듯
- - -
그림 속에는 그녀를 흡족케 해주는
불타는 듯한 환상의 해안이 열려있었다
- - -
그녀는 그림속의 해변가로 들어갔다
이제 그녀는 그곳에서 영원히 걷는다
아주 행복해서
햇살처럼 빛나며
행복하고 행복한 빛 속에서
온통 혼자서
Will she leave her office colleagues
Will she leave her evening pleasures
Toil within a friendly bureau
Running later in her leisure?
All Alone all alone
Before the pictures she seems turned to stone.
- - -
There the burning coasts of fancy
Open to her pleasure lay.
- - -
She went upon the painted shore
And there she walks for ever more
Happy quite
Beaming bright
In a happy happy light
All alone.
13) 프로이트는 우울상태는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책망을 자신에게 돌리는 자책이라고 분석했는데 이와 유사한 크리스테바의 우울상태는 불가능한 폐쇄에 대한 지속적, 고통스런 추구일 뿐 아무런 해결책이 없다.
Ⅱ. 자살과 극기주의
스티비의 자살욕망이 절망과 우울에 대한 일차적인 반사적 반응에 머물지 않고 극기주의적인 인생관으로 발전되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SS106) 그녀가 인간에게 자살선택권이 주어져있다는 사실, 즉 실존적인 인간의 자유 의지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강인한 태도는 그녀가 8살 때 자살을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난 8살 때 처음으로 자살을 생각했다. 그 생각은 나를 놀랄 만큼 기운 나게 해주어 정말로 내 목숨을 구해주었다. 왜냐면 언제라도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다면 왜 꼭 지금이어야 되겠는가?
I actually thought of suicide for the first time when I was eight. The thought cheered me up wonderfully and quite saved my life. For if one can remove oneself at any time from the world, why particularly now?(SS 17)"
적의 영토에 홀로 내팽개쳐있는 듯한 삶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원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자신의 의지로써 끝낼 수 있다는 생각은 마치 자살수단으로서 몸에 항상 지니고 다니는 테러리스트의 청산가리처럼 그녀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자신이 삶과 죽음의 선택권을 쥐고 있으며 죽음으로써 삶에 대항할 수 있다는 인식은 그녀를 삶의 수동적 피해자로부터, 죽음이 제 발로 찾아올 때까지 삶을 꿋꿋하게 견뎌내는 능동적 주체자로 변모시켰다.
「난 말하지 않아요」(“I do not Speak” )에서 시의 화자는 “신께 죽게 해달라고 빌지 않겠다.”(“I do not pray to God to let me die,”CP 57)고 선언한다.
스티비의 비관적 극기주의는 19 세기말의 영국 시인 하우스만(A. E. Houseman), 더 올라가서 로마시대의 세네카에 영향 받은 것으로「죽을 자격을 갖추도록 애써라」(“Study to Deserve Death,”CP 185)에는 죽음에 대한 유혹과 싸우는 극기적인 자세가 나타나 있고, 「외박허가」(“Exeat,”CP 414)에서 죽음은 더 이상 삶의 도피처가 아니라 삶의 고통에 의해 정신적으로 성숙해진 사람만이 받는 선물, 즉 군인이 포상으로 받는 외박허가이다.
허나 시인이나 다른 누군가가
오래 살아 즐거움도 슬픔도 다 겪은 후
이제 약해져 나라에 부담이 되고
더 이상 아무런 결정도 내릴 수 없게 되는 때가 올 때
삶이 다정하게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고 상상해보기를.
네게 죽음을 줄만큼 우린 이제 친한 친구지 라고
그러면 그는 자살해도 돼, 그러면
그는 가도 돼.
Yet a time may come when a poet or any person
Having a long life behind him, pleasure and sorrow,
But feeble now and expensive to his country
And on the point of no longer being able to make a decision
May fancy Life comes to him with love and says:
We are friends enough now for me to give you death;
Then he may commit suicide, then
He may go.
위의 시의 화자에게서 보듯 스미스는 더 이상 죽음의 편안함을 탐하지 않고, 삶의 고통을 참아내려는 인고의 자세를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극기적인 삶의 자세로써 삶의 주인이 된 그녀는 언젠가는 삶을 접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삶의 고통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녀에겐 죽음이야말로 힘든 삶을 버텨낼 수 있는 원동력 (‘a fortifying thought, good enough to carry me to a ripe old age’ SS 242)이었다.
자살로써 힘든 삶을 끝낼 수도 있지만 스스로 삶을 선택했다는 자각은 자기 연민을 없애주고, 돈 주앙이 말했듯이, 삶의 어려움에 대해 ‘전사처럼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구디슨 314-5)
삶에서 상처받아 위안과 사랑이 필요할 때마다 그녀는 죽음으로 달려가 힘과 위안을 얻었다. 죽음은 그녀의 비상식량이며, 구원이며 삶의 고통을 잊기위한 피난처였다.
Ⅲ. 죽음의 친밀화: 지옥 교리와 죽음 공포의 뒤집기
죽음과 여성성은 다같이 서양문화에서 수수께끼 또는 타자성으로 즐겨 사용되는 비유어이다. 이는 죽음을 삶과 대립된, 이해할 수 없는 경험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죽음에 대한 가부장적/이원론적 접근은 죽음을 삶과 분리된 세계로 고정시키고, 종교나 정신분석이론을 통해서만 포착될 수 있다고 봄으로써 죽음을 삶의 경험과 단절시켜 왔다.(구디슨 357) 그러나 삶과 죽음을 하나로 연결시킬 수 있다면 삶은 얼마나 신비로워질 수 있고 죽음은 얼마나 평온해질 수 있겠는가?
스미스는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타자화하던 전통적인 인식을 그녀의 긍정적인 죽음에 대한 인식으로써 무너뜨림으로써 죽음의 문제뿐만 아니라 삶의 문제도 풀어낼 수 있었다.
스티비 스미스의 죽음의 미학은, 감정과 이성의 전통적인 이분법적 해석을 뒤집은 니체의 해체주의처럼, 삶과 죽음에 대한 이분법적 해석이나 종교적 해석을 거부하고, ‘반(反)기독교’인의 입장 혹은 불가지론자의 입장14)에서, 죽음을 자아소멸이면서 또한 의식으로부터의 해방이라 파악했다.
죽음은 그저 생명의 끝일뿐이나 죽은 후 인간의 자아는 해체되어 의식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그녀의 죽음관은 종말의 최종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긍정적으로 만들어준다.15)
그녀의 죽음의 시들은, 그녀의 여성주의적인 시들이 당대의 지배담론을 뒤집어 전통설화의 가정이념적인 여성상과, 모더니즘의 남성중심주의와 형식적 권위의 시를 패러디한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죽음에 대한 기독교적․
무신론적인 지배담론을 뒤집음으로써 죽음의 공포 위에 자리 잡은, 종교와 죽음의 권위를 무너뜨린다.
인간에게 태초 이래 행사되어온 종교와 죽음의 권위는 소멸, 파멸, 위협, 공포, 허무, 더럽고 썩는 대상으로서의 죽음관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가부장적 사회제도의 횡포에 의해 받는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그녀는 자아해체/자아해방의 죽음관으로써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다.
14) 그녀는 죽음의 불가사의성에 대한 드라이든 (Dryden)의 시구 “죽은 후 뭔가 있든지 없든지 (無)” (“That something, or that nothing, after death”)를 자주 인용했다(SS242)
15) 스티비 스미스의 죽음관은 포우이스(J. C. Powys)의 『문학의 즐거움』에 영향 받았다고 스폴딩은 주장한다. 포우이스의 휘트먼 평에는 죽음과 사랑은 자아를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있고, 죽음과 사랑이 힘을 합치면 천박하고 어리석은 세계보다 강하다는 글이 들어있다.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enson)의 하나님이 가부장제의 하나님이라 한다면 스티비 스미스의 하나님은 지옥과 증오의 하나님이라 말할 수 있다.
1957년 11월 20일 케임브리지 인문학회 (Cambridge Humanist Society)에서 강연한 「불신의 필연성」(“The Necessity of Not Believing”)에서 그녀는 자신이 본래 영국 성공회 (Anglican-Catholic) 신자였으나 지옥의 영원한 벌을 강조하는 잔인한 증오로 가득 찬 교리와, 영생이라는 달콤한 기만의 내세관을 용납할 수 없어 기독교를 떠났다고 밝혔다. (SS 233-41)
다음은 이 강연에 추가한 그녀의 자칭 ‘반(反)종교적’인 시 「기독교의 영원한 지옥 교리에 대한 몇몇 생각들」(“Thoughts about the Christian Doctrine of Eternal Hell”)의 일부이다.
기독 신앙의 종교란
달콤함과 잔인함으로 뒤섞여있으니
이 달콤함을 뿌리쳐라, 왜냐면 그것은
지옥의 불에서 나온 그을린 옷을 입고 있으니
- - -
이 신을 기독교인들은 진열해 놓는다.
그를 놔버려, 그를 놔버려, 가게 해줘.
The religion of Christianity
is mixed of sweetness and cruelty
Reject this sweetness, for she wears
A smoky dress out of hell fires.
- - -
This god the Christians show
Out with him, out with him, let him go.
보통 죽음 앞에서 기독교인들은 지옥을 두려워하고, 무신론자들은 자아의 소멸에 대해 두려워한다. 위시에서 스미스는 기독교인들은 불필요하게 지옥에 대해 두려워하며 지옥의 영원한 고통에서 벗어나려 쓸데없이 애쓴다고 조롱하면서, 지옥 공포 때문에 영생이라는 달콤하고 기만적인 교리에 매달리지 말기를 요구한다.
다음은 그녀가 기독교 정신의 정수인 “잔인함과 달콤함”을 구현했다고 비판한 ‘끔직한(dreadful)’ 찬송가이다.
다른 모든 것들 위에 있는 신앙의 나무여
Sweetest weight is hung on thee. (MA 154)
그대의 친구들이 잎이 나지 않고 꽃피지 않으며
열매 맺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대에겐 가장 달콤한 십자가와 가장 달콤한 못
가장 달콤한 분이 매달려있네.
Faithful tree above all others
One and only holy tree
None in foliage, none in blossom,
None in fruit thy peer may be,
Sweetest wood and sweetest iron
Sweetest weight is hung on thee. (MA 154)
이 찬송가에 의해 그녀가 깨달은 기독교의 잔인함이란 기독교인들에게는 신앙심의 대가로 천당을 약속하고,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지옥으로 협박하는 독선적 교리로서, 기독교인들이 선민의식에 젖어 다른 이들에 대한 사랑보다 자신의 구원을 우선시하는 태도이다.
스미스는 그녀의 글「기독교 신앙의 몇 가지 장애물」(“Some Impediments to Christian Commitment” MA 153-70)에서도 기독교리의 잔인함과 비도덕성을 비난하며 진정한 종교라면 “증오”가 아니라 사랑의 신(“God
of Love”)이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가 일이차대전 후 많은 사람들이 다시 기독교에 귀의한 것에 대해 사람들이 신경과민, 신경이상, 공포증, 소심증 때문에 정신적으로 타락한 것이라고 비난한(B&M 215)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종교 본래의 사랑과 자비의 정신에 철저해서 제도 종교의 기만적인 증오와 비도덕성을 용납할 수 없었으므로 그녀를 외로운 삶 가운데서 위로해주었던 성공회 신앙을 뿌리쳤다. 기독교리의 비도덕성에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믿고 의지했던 기독교를 버리고 반(反)기독교인이 되었다.
기독교 교리 가운데서 그녀가 가장 혐오했던 것 가운데 하나는 내세관이었다.
「쓰레기통 가운데서, 어머니와 함께」(“Mother, among the Dustbins”)에서 시의 화자는, 기독교의 내세관이란 유한성에 “항의하는 인간의 죽지 않으려는 허영심일 뿐”이라고 말한다(Naught but the vanity of a protesting mind/ That would not die. CP 118)
스미스는 영혼의 영생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신앙인들과 정반대로 죽은 후 삶과 자아의식이 아주 끝나버린다는 데에 큰 위안을 얻었고 더 나아가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 생각했다(“But the fact is some people do not want eternal life; they would rather, if possible, 'storm back through the gates of birth.' MA 203). 스미스가 죽음에 의한 자아해체에서 얻는 위안은 죽음이 그녀의 삶의 고통을 끝내줄 것이라는 단순하고도 소극적인 기대에 머물지 않는다. 그녀는 ‘달콤하고(sweet)’, ‘친절한(kind)’ 죽음 속에서 인간의 이기적이며 닫힌 자아는 허물어져서, 자아의 개별성에서 오는 자의식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자아의 폐쇄성에 기인한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의 단절이라는 고통스러운 문제가 ‘정지될 수’ 또는 ‘끝날 수’ 있다고 보았다. 스미스에게 자아는 사랑과 평화의 가장 커다란 적으로 생각되었고 죽음으로써만 인간은 개체성의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SS 290)
죽음 자체의 특성 가운데에 평등과 타애심이 있다는 것은 누구라도 조금만 진지하게 자신의 죽음을 상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이 세상을 떠나야하는 죽음 앞에서 인간은 평등심을 얻고 이기적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져 다른 이들에게 관대해질 수 있다. 설사 그가 무신론자라해도 죽음을 눈앞에 두고 인간의 유한성을 생각해보는 순간만큼은 자아, 자애, 자의식의 닫힌 공간에서 조금이라도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다.
이점에서 죽음은 사랑과 비슷한 자아 해방자이며, 죽음에 의해 소자아의 구속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죽음 자체에 어느 정도 깨달음의 요소가 들어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혼자일 때」(“When one”)에서 죽음은 인간의 틀을 산산이 흩어버리므로, 신처럼 고마운 존재로 찬양된다.
왜 난 죽음을 친구로
생각하는가?
왜냐면 그는 흩어버리는 자이므로,
그는 인간이라는 틀,
신경과민과 심한 고통을 흩어버려
신선하고 신선한 공기 속으로 던져버리니
이제 그것은 어디에도 없네.
달콤한 죽음만이 이렇게 할 수 있네,
달콤한 죽음이여, 친절한 죽음이여,
수많은 신들 가운데 당신이 최고야.
What do I think of Death
As a friend?
It is because he is a scatterer,
He scatters the human frame
The nerviness and the great pain,
Throws it on the fresh fresh air
And now it is nowhere.
Only sweet Death does this,
Sweet Death, kind Death,
Of all the gods you are best. (MA 231)
그녀의 자아해체로서의 죽음관은 기독교와 불가지론과 무신론 사이를 오가는 다소 유동적인 것으로서, 그녀에게서 하나의 끝으로서의 죽음은 신의 초월적 사랑과 본질에 있어 다소 비슷하기까지 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 모든 사랑의 출처와 운명은 신의 사랑, 위대한 사랑, 인간의 양상을 넘어서는 사랑에 있다.
허나 내가 모든 축복 가운데 가장 커다란 축복이라고 자주 말했던 것은 인간의 양상을 다 흩뜨려버리는 죽음, 하나의 종말로서의 죽음이다.
… all love seeks its source and its destiny in Love, in the idea of some great Love,
that is beyond the human pattern. But what I have often written of as the greatest of all blessings: Death as a scattering of the human pattern altogether, as an End. (SS 242-3)"
스미스의 죽음의 세계에서 인간은 불안한 개체로서의 자아소외(개체성)를 벗어나 전체성에 다소 다가갈 수 있다. 「나귀」(“The Donkey”)에서 울타리 쳐진 경주로에서만 달렸던 나귀가 죽은 후 탁 트인 초원에서 달릴 때 느끼는 달콤한 해방감 내지 초월감을, 인간은 죽은 후 맛볼 수 있다. 여기서 울타리는 개체성의 닫힌 자아를 뜻한다.
울타리로 두른 길은 이 나귀 앞엔 더 이상 없네
무정부상태의 달콤한 초원만 놓여있을 뿐.
- - -
내 마음을 북돋우는 한 생각,
죽음이라는 정말 기묘한 무정부상태에 의해, 마침내
우리네 형상이 모조리 부셔질 거라는 생각.
나귀여, 우리 비록 이 순간 소중할지라도,
난 부셔지길 열망하네.
No hedged track lay before this donkey longer
But the sweet prairies of anarchy.
- - -
And the thought that keeps my heart up
That at last, in Death's odder anarchy,
Our pattern will be broken all up.
Though precious we are momentarily, donkey,
I aspire to be broken up. (CP 535)
스미스는 욕망의 좌절로 겪는 괴로움 뿐 아니라 욕망의 충족으로 얻는 즐거움까지도 포함해서, 모든 감각과 개체의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의 길임을 알고 있었다.16) 위의 시에서 “달콤한 무정부상태의 초원”(the sweet prairies of anarchy)”으로 표현된 죽음의 세계는 우리가 이생에서 애지중지하던 자신을 벗어던진 세계 이다.
스미스는 기독교의 권위적인 지옥론을 그녀 자신의 사랑(의 신)으로써 붕괴시키고, 기독교의 내세관인 영원한 생명을 자아해체/자아해방의 죽음관으로써 전복시킨다. 그녀의 시에서 자아소멸은 허무가 아니라 감각과 자의식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축복으로 전복되어 나타남으로써 죽음의 공포는 약화된다. 그녀에게 죽음은 삶과 분리된 세계가 아니라 삶의 경험과 연결된 세계이면서, 삶처럼 예쁘고 밝고 행복한, 한 과정이다.
「검은 3월」(“Black March,” CP 567)에서는 죽음은 “세상 끝에 있는 친구”(“a friend / At the end/Of the world”)이자 “당신을 위해 상쾌하게 살랑거리는 바람, 변화./ 미래.”(“abreath/ Of fresh air for you, a change./ By and by.”)이며, 죽음의 눈은 “3월에/ 검은 나뭇가지 위에 매달려있는 빗방울만큼이나/ 예쁘고 밝다”(“As pretty and bright/As raindrops on black twigs/ In March,”). 「오 고마운 색깔이여, 빛나는 모습이여」(“Oh grateful colors, bright looks,” CP 546)에서는 죽음의 세계의 풍경도 삶의 세계처럼 빛나는 색이 있다. 그녀에게서 종말로서의 죽음은 인간에게 주어진 커다란 축복으로 찬양된다.
스미스가 생각하는, 죽은 후의 자아해체 상태는 자아가 절대신이나 세상 만물과 완전한 조화나 공감(일심동체/동체대비)를 이루는 종교적인 내세관과 는 아주 다르다.
「전갈」(“Scorpion”)에는 그녀가 꿈꾸는 무(無)자아 상태가 어렴풋이 나타난다. 그녀의 죽음의 세계는 의식에서 해방된 그녀 혼자와 자연만이 함께 하는 지점이다.
누가 나에게 내 영혼을 요구하면 좋으련만, 그래서
푸른 바다에 다다를 때까지 풀밭을 건너 떠돌았으면
난 풀밭이 좋아, 언제나 그랬지, 허나
소도, 사람도, 집도 보이지 않아야해.
바다도 풀밭도 아주 텅 비어야하고
다른 영혼들은 다른 곳을 찾을 수 있겠지.
I should like my soul to be required of me, so as
To waft over grass till it comes to the blue sea
I am very fond of grass, I always have been, but there must
Be no cow, person or house to be seen.
Sea and grass must be quite empty
Other souls can find somewhere else. (CP 513)
화자의 죽음의 세계에서 화자는 다른 이들과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사라져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스미스는 시를 씀으로써 외롭게 고립된 사람이 피를 흘리며 자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처럼(MA 126),
죽음도 자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고 보았다. 죽음은 한 존재의 막다른 끝이지만, 개체의식의 닫힌 벽이 무너져서 육체와 자아로부터 해방된 상태일 뿐 의식의 확장이라는 변모는 보이지 않는다.
스미스가 타자성으로서의 죽음을 삶 속으로 끌어들여 일원화, 친밀화하고 죽음의 자아해체성을 사랑의 구원력과 동일시하다시피 한 점은, 죽음을 삶과 동떨어진 별개의 세계로 보는 기존의 관념을 뒤집는 것이다.
「아름다워라」(“Beautiful", MA 232)에서 삶이 아름다운 것은 죽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며 죽음이 아름다운 것은 삶이 죽음을 바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화가 에드바르드 뭉크(Edvard Munch)처럼 스티비 스미스도 죽음에 대한 강박증이 있었지만 뭉크가 죽음을 두려워했던 반면에 그녀는 죽음을 사랑했다.
그녀가 죽음을 수용하는 자세는 죽음마저도 삶의 경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여성특유의 친화력에서 나온 것으로서 포스트모던 여성주의적인 태도이다.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가치관이 단일성, 일관성, 원칙성, 이원론적인 배타성과 경직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과 달리 포스트모던 여성주의적인 가치관은 다양성, 다원성, 적응성, 일원론적인 포괄성과 유연성을 중심으로 해서 기존의 남성주의적인 가치관을 해체하고 여성의 새로운 역할을 구성한다. 스티비 스미스의 죽음의 미학은, 니체가 서구 형이상학에서 푸대접받아온 감성적인 것을 긍정함으로써 삶을 긍정했듯이, 죽음을 긍정함으로써 삶을 긍정하고 있다. 기존의 권위적인 죽음 심상은 그녀의 포스트모던 여성주의적인 죽음관에 의해 패러디되어 해체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위덕대)
16) “난 죽음을 사랑해요, 죽음은 인간의 형상을 부수고 우릴 세상의 고통에서 뿐만 아니라 너무 오래 끌어온 쾌락으로부터도 자유롭게 해주니까요”. (“I love death because he breaks the human pattern and frees us from pleasures too prolonged as well as from the pains of this world.” MA 129)
주요어: 스티비 스미스, 여성주의, 포스트모던 여성주의, 여성성, 죽음, 자아해체, 우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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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Aesthetics of Death:
The Eulogy of Death in the Poetry of Stevie Smith
Younghee Jung
The poetry of death by Florence Margaret-Stevie Smith breaks up at once the authority of death as an object of fear and nothingness. The fact that death is an end, was received as a kind of blessing by her because she thought human ego can be liberated from his/her suffering self-consciousness. Her vision of death somewhat fluctuates in between Christianity, agnosticism, and atheism.
This paper aims to explore the Smith's indulgence in suicide and death in relation to narcissism and feminine (women) melancholia, using the perspective of feminist psychological criticism. The double negation mode in melancholia is similar to that in the gender formation of femininity. so that melancholia can be one of the crucial factors explaining femininity. Women are more vulnerable to melancholia because of their guiltiness internalized in the double negation process of gender formation.
Her eulogy of death recognizes death, “the greatest of all the blessings") as almost unselfish as the great Love of God because the latter(the great Love of God) is “beyond the human pattern”; the former(death) “a scattering of human pattern altogether, as an End.” Her perception of death as a process of living, is also interpreted in relation to post-modern feminism: the human fear of death, which has been strengthened all the more by the hell doctrine of Christianity, may be weakened or sedated by her feminine receptive attitude toward death.
The traditional patriarchal dualistic view of death that death is a completely separated negative experience from life is overturned by the Smith's vision of death as a saving force for living. Her attitude of recognizing death is analyzed to come from the feminine affinity. In short, the man-centered fixations of death is parodied and deconstructed by her post-modern feminist view of death.
Key words: Stevie Smith, feminism, feminity, melancholia, self-deconstruction, death, postmodern feminism
논문투고일: 2005년 10월 3일
심사완료일: 2005년 10월 24일
게재확정일: 2005년 11월 12일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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