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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
*김덕령(金德齡) 1567년(선조 즉위)∼1596년(선조 29).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광주 출신.
시호: 충장(忠壯) 危身奉上曰忠。武能持重曰壯。정조 12년(1788) 증시
자신이 위태로우면서도 임금을 받드는 것을 충(忠)이라하고
무예에 능하고 행동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을 장(壯)이라한다.
시장: 병조판서 서유린(徐有隣) 찬
제향처: 광주 벽진서원(碧津書院) 의열사(義烈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수(景樹).
아버지는 붕섭(鵬燮)이며, 어머니는 남평반씨(南平潘氏)로 직장(直長) 계종(繼宗)의 딸이다.
20세에 형 김덕홍(金德弘)과 함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의 막하에서 전라도 경내로 침입하는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주에 이르렀을 때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귀향하였다.
1593년 어머니 상중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그 세력이 크게 떨치자, 선조로부터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 세자의 분조(分朝)로 세워진 무군사(撫軍司)에 지략과 용맹이 알려져 세자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칭호를 받고 이어서 선조로부터 다시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그뒤 최담년(崔聃年)을 별장으로 하여 남원에 머물다가 다시 진주로 옮겼는데, 이때 조정에서는 작전상의 통솔과 군량조달의 문제로 각처의 의병을 통합, 충용군에 속하도록 하였으며, 이로써 의병장이 되어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영남서부지역의 방어임무를 맡았다.
왜적의 전라도 침입을 막기 위하여 진해‧고성 사이에 주둔하며 적과 대치하였으나 이때 강화회담이 진행중이어서 별다른 전투상황도 없고, 또 군량의 부족으로 그 예하 3천여명 가운데 호남 출신 5백여명만 남기고 모두 귀농시켰다.
그해 10월 거제도의 왜적을 수륙양면으로 공격할 때 선봉장으로 활약하여 이를 크게 무찌르고 이어서 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왜적을 기습, 격퇴하였다.
그뒤 진주에 둔전을 설치하는 등 장기전에 대비하여 출전의 차비를 갖추었지만, 강화의 추진으로 출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울화가 생겨 과음을 하고 군법을 엄하게 함에 막료‧군졸간에 불평의 소리가 높았고, 조정에서도 실망한 나머지 그에 대한 논의가 빈번히 제기되었다.
1596년에는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복을 장살하여 투옥되었으나 영남유생들의 상소와 정탁(鄭琢)의 변호로 곧 석방되었다. 그해 7월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원수 권율의 명을 받아 진주에서 운봉(雲峰)까지 진군하였다가, 난이 이미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해 진주로 돌아왔다.
이때 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충청도체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과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무고로 최담년‧곽재우‧고언백(高彦伯)‧홍계남(洪季男)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에 정탁‧김응남(金應南) 등이 그의 무관함을 힘써 변명하였으나 20일 동안에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체구가 작지만 날래고 민첩하며 신용(神勇)이 있었다고 하여 용력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다.
1661년(현종 2)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681년(숙종 7)에 다시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1710년에 봉사손(奉祀孫)인 수신(守信)도 녹용되었다.
1788년(정조 12)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되고 부조특명(不祧特命)이 내려졌다. 죽기 전에 지었다는 〈춘산곡(春山曲)〉 시조 한 수가 전한다.
1678년(숙종 4) 광주의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는데 이듬해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되었다.
김덕령은륜비(金德齡恩綸碑)
유명조선국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시충장행통정대부승정원승지충용장군김공덕령은륜비(有明朝鮮國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諡忠壯行通政大夫承政院承旨忠勇將軍金公德齡恩綸碑)
정조 대왕 을사년(정조 9, 1785년) 시호를 의논하라는 전교
충용군(忠勇軍)의 절의(節義)는 즉 여자와 어린 아이들도 알고 있는 바이고 비록 전해오는 말로 보더라도 위엄이 늠름하여 사람을 기가 죽게 만든다. 이미 증직의 은전이 시행되었고 다시 사당을 건립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열성조(列聖朝)에서 충신을 칭찬하고 장려하는 성스러운 뜻을 우러러 알 수가 있다. 다만 원통한 누명을 회복한지 얼마 되지 않아 시호를 내릴 겨를이 없었다. 더구나 그 형과 그 아우의 절행이 또 이처럼 매우 뛰어나니 포상하고 증직하는 것이 또한 지나친 일이 아니다. 이것이 어찌 다만 한 고을 많은 선비들의 공의(公議)일 뿐이겠는가? 아울러 시호를 의논하여 조정에서 높이고 장려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무신년(정조 12, 1788년) 의열사(義烈祠)에 배향할 때의 전교
충장공 삼형제의 절의와 충용은 늠름하게 살아있는 곳과 같구나.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어제서야 비로소 거행하였으니 어찌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추가로 서원에 제향하고 함께 모셔 제사를 받들어 조정에서 시대를 넘어 감동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시호를 내릴 때의 전교
김충장공의 의로운 이름은 풀과 나무도 모두 알고 섬나라 오랑캐가 아직도 두려워한다. 돌아보니 지금 같은 때에 어떻게 이와 같은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거록(鉅鹿 : 항우가 진나라를 대패시킨 곳)의 생각이 매번 끼니때에만 있는 것은 아니로구나. 그 울적하고 답답한 기운이 생각건대 꽉 막혀 풀리지 못한 것이 있을 것인데 열성조께서 포상을 내려주시고 특별히 관작을 증직하셨으며 이제 또 시호를 내리고 제향을 받드니 혹시라도 눈을 감기 힘든 원통함에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사제문(賜祭文)
임진란의 전역(戰役)에 의거를 일으킨 병사들 매우 많았도다.
비록 매우 많았으나 익호장군(翼虎將軍 : 광해군이 세자시절에 내린 칭호)보다 나은 무공은 없었네.
힘은 능히 큰 솥을 들어 올리고 충성은 분연히 떨쳐 임금을 보위하였도다.
남쪽 지방에서 짧은 격문을 돌려 의병 오천을 모집했네.
저 좋은 전답을 팔고 강력한 쇠뇌를 예리하게 갈아서
산음에서 밤중에 북을 울리고 교활한 적들의 간담을 두렵게 하였네.
위용은 용도(龍鞱 : 주나라 여상이 지은 병서 육도의 편명, 즉 병법에 뛰어남)가 있다고 알려지고 자태는 연함(燕頷 : 위용이 있는 장군의 관상이다. 관상가가 후한의 명장 반초(班超)가 어릴 때 관상을 보고 ‘연함호경(燕頷虎頸)’의 모습이라고 하였다.)을 보겠구나.
초상화를 그려 오니 오히려 범하기 어려움을 알겠구나.
누가 화친을 주장하는가! 전쟁이 중도에 그쳤네.
전쟁의 공로 새겨지지 않았는데 참소의 말이 이미 틈을 타고 들어왔네.
춘산곡(春山曲 : 죽기전에 지은 시조이름) 한 수 읊고 눈물 흘리는 영웅이여,
벽혈(충신의 푸른 피)로 화하기 전에 흰 광채가 무지개를 꿰뚫었네.
술을 따라 서로 축하하니 적을 도와주어 유리하게 하였구나.
백 년도 못 되어 공론을 들어보니 모두 같구나.
효종께서 가엽게 여기시어 사후의 영예를 지극히 융성하게 하시니
넓적다리를 어루만지며 탄식하니 나는 항상 경을 생각하네.
시호를 내리는 특별한 은전은 천고의 아름다운 이름이니
그 보답하는 것이 어찌 유감이겠는가.
나아가고 물러감에는 변치 않는 도리가 있는 것이라네.
장차 시호를 내리는 글을 선포하며 대신 제사를 올리니
은총의 광영을 흠향하여 나의 남방을 진무(鎭撫)하기 바라노라.
고을에 정표할 때의 윤음.
어제 이제독(李提督 : 이여송)의 사당기(祠堂記)를 지었고 오늘은 임충민(林忠愍 : 임경업)의 사당에 편액을 하사하고 고을에 정표하라는 윤음을 내렸다. 경연석상에서 물러나 원(院)으로 미처 돌아가지 않았을 때 김충장(金忠壯)에게 시호를 베풀고 사제(賜祭)하러 갔던 관원이 보고하면서 그 집안에 보관하고 있던 유고(遺稿)와 수적(手蹟)을 가지고 와서 바쳤으니, 일이 마치 한꺼번에 모여드는 것 같아 우연이 아닌 듯하다. 내가 가져다가 그 글을 읽어 보고 그 필적을 보았는데 책을 펼치자마자 곧 생동감이 있어 마치 그 사람을 보는 듯 하였다. 글자 하나를 보고 한 번씩 감탄하여 책을 다 읽고도 한참 동안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그 후손의 마음과 그 지방 선비들의 감동에 있어서는 어떠하겠는가.
일찍이 듣건대 우리나라는 접역(鰈域 : 가자미가 나는 지역이란 뜻으로 우리나라를 이름)에 위치하여 있어 풍기(風氣)가 국한되고 생각 또한 옹졸한데 게다가 ‘당사(黨私)’를 어진 이를 해치고 정도를 손상시키는 무기로 삼아서 나와 상대편중 채찍을 누가 먼저 잡는 가에 따라 연슬(淵膝 : 추연가슬(墜淵加膝), 즉 미우면 못에 떨어뜨리고 좋으면 무릎에 앉힌다, 형세가 좋고 나쁨)이 크게 달라진다고 하니 나도 곧 이러한 풍기에 이러한 당사가 있으면 비록 기(夔), 설(卨), 관중(管仲), 제갈량(諸葛亮)과 같은 인재로 하여금 다시 세상에 나오게 하더라도 세상에 용납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충장공이 화를 당한 것만이 취향을 달리하는 소인에게서 연유한 것일 뿐 아니라 충무공이나 충민공도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었고 학문(學問)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린 사람에 이르러도 역시 그러하였고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린 사람도 역시 그러하였으며 경륜과 사업(事業)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린 사람도 또한 그러하였다. 그 원인을 찾아보면 소인들의 당사(黨私)에 있으니 어찌 통탄스럽고 한스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없어지지 않는 것은 공의(公議)이고 어두워지지 않는 것은 영웅의 업적이다. 천세의 세월이 앞에 있었고 백세가 뒤에 있어 이치가 굽혀진 것은 반드시 펴지고 원통함은 언제고 풀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혹여 충신과 지사를 위로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는가? 만약 충장공의 영혼으로 하여금 알게 한다면 영웅의 눈물은 반드시 주체할 수 없이 흐를 것이다. 충장공 김덕령의 유고와 수적(手蹟)을 전라도 관찰사로 하여금 베끼고 새겨 도내에 반포하고 판본은 충장공의 서원에 보관하도록 하라.
임충민공 부부의 충렬(忠烈)이 쌍을 이루어 어제 이미 그 고을에 정표하였거니와 더구나 충장공 형제의 지극한 효성은 나라에 충성을 바치는 근본이 되었고 그 부인의 효성과 충성은 아름다움에 짝하여 완전하게 갖추었다. 형제와 부부가 몸을 던져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우뚝하고 늠름한 행적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이목에 오르내리는데 아직까지 그 정표(旌表)하는 은전이 없었으니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지방관으로 하여금 그 마을에 ‘증 병조판서 충장공 김덕령 증 정경부인 흥양이씨 충효지리(贈兵曹判書忠壯公金德齡贈貞敬夫人興陽李氏忠孝之里)’라는 비석을 세워 정표하게 하라. 이어 그 형 충신 증 지평 김덕홍(金德弘)도 함께 비기(碑記)에 실어 조정에서 영원히 잊지 않고 후히 보답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기유년(정조 13, 1789년)에 좌찬성을 추증하고 제사를 주관할 사람을 별도로 정하라는 전교
예제(禮制)에는 경도(經道)도 있고 권도(權道)도 있다. 전례를 참고하면 성삼문(成三問)과 김천일(金千鎰) 등의 일이 혹 의거할 만한 단서가 될 것이다. 이미 만들었다가 이내 묻는 것은 변례(變禮)에 속한다. 사손(嗣孫)이 없으면 제사를 주관할 사람을 정하여 주는 것은 일찍이 그런 예가 많았다. 특별히 그 문중(門中)에 명하여 별도로 제사를 주관할 사람을 정하여 향화(香火)가 끊이지 않도록 하라.
병진년(정조 19, 1795년) 유사(遺事)를 발간할 때의 서문
공동산(崆峒山) 북쪽의 싸늘한 달빛이나 연(燕)나라, 조(趙)나라의 비장한 노래(연과 조에 세상을 비관하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우국의 지사를 의미함) 여운같지만 한 개인이나 한 집안의 문헌이 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는 것이 이 책이니 내가 어떻게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지만 그가 한 말과 사공(事功)이 모두 이 책에 실려 있으니 내가 중언부언하고 싶지는 않거니와 부득이 말을 한다면 반드시 그의 언어와 사공의 근본을 말하리라.
대체로 특출한 기운을 받아 어진 이가 되고 기를 모아 영걸이 되는 것은 모두 기(氣)가 하는 일이니 언어도 사공도 기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그 기운이 때를 만나 크게 행해지면 그 공로를 적은 명(銘)이 기상(旂常 : 용과 해·달을 그린 깃발로 국가에 공로 있는 사람의 이름도 쓴다)에 써지고 정이(鼎彝 : 종묘의 제기로 공신의 이름을 쓴다)에 새겨지며 혜택이 당대에 미치고 사적이 역사에 전해지니 언어가 곧 그 일이요, 일이 곧 그 공적이 되는 것이다. 그 혹시라도 불행하여 기와 때가 서로 만나지 못하면 펴 보지 못하고 쌓인 답답함과 맺힌 속마음이 왕왕 언어로 나타나거나 문자에 표현되니 그가 논의하여 결행하고자 했던 사공(事功)을 이를 통해 만분의 일이나마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또한 집안에 전해지는 문헌이 국사(國史)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이 되거니와 뜻있는 선비와 영웅의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두루 뿌려지고 있는 까닭인 것이다.
아아! 충장공(忠壯公) 같은 분은 어찌 그리도 불행한가? 충장공이 태어난 것은 선조대왕의 융성한 때였으니 당시 인재의 배출은 거의 십란(十亂 : 주나라 무왕을 도운 10명의 공신)같은 경우에 버금갔다. 그가 그 뛰어난 용력과 세상에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칼을 집고 초승군(超乘軍 : 도원수 권율이 내려준 군호)을 통솔하는데 익호장군(翼虎將軍), 충용장군(忠勇將軍)의 호를 주었으니 조정에서 그를 중히 여기는 것이 어떠했으며 진장(眞將 : 참장군, 가등청정이 김덕령장군의 화상을 보고 진장이라 하였다), 석저장군(石底將軍 : 석저는 장군의 고향)이라고 부르며 적국(敵國)에서 두려워 하는 것이 어떠했는가? 그 강대(剛大)하고도 충만한 기운을 절월(節鉞)을 잡고 군사를 지휘하는 데 조금이라도 써 보게 하였다면 연연산(燕然山 : 후한의 두헌竇憲이 선우單于를 패배시키고 연연산에 올라 공적을 돌에 새겼다)에다 공적을 새길 만도 하고, 능연각(凌煙閣 : 당나라 태종의 공신각 이름)에 화상이 걸릴 만도 했을 것이니 임진왜란 때 어찌 8년 동안의 치욕을 받았겠는가? 애석하게도 하늘이 그를 내셨는데 사람은 재앙을 주고, 재주는 타고났는데 쓰이는 것은 인색하여 결국 무목왕(武穆王 : 남송의 장군 악비岳飛)이 억울하게 죽자 금나라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축하를 하는 것처럼 되었다.
다만 조화의 정기와 산악의 빛나는 영기를 어렴풋하게 그 언어와 문자 사이에서 볼 수 있으니 백세가 지난 후에도 외우고 읊으며 탄식하노라면 희미하게 그 모습이 그림처럼 나타나고 목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어째서인가? 기(氣)가 참되기 때문이다. 이 역시 사공(事功)인 것이니 어째서 사공이 되는가? 내가 보기에 천하에 언어나 사공이 후세에 전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역사책에 남겨진 것이나 미진한 기록이라도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그것을 본 후에야 참된 기운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으니 이 책도 반드시 전해지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아! 드문 일이니 내가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이러한 말을 하여 ‘김충장유사(金忠壯遺事)’의 서(序)로 삼는다.
김덕령은 전라도 광주사람이니 저술은 시문(詩文)과 연보(年譜), 기전(紀傳), 비찬(碑贊) 등 3권이다. 그의 형 증(贈) 지평(持平) 김덕홍(金德弘)과 그의 아우 증(贈) 집의(執義) 김덕보(金德普)의 유적과 유고를 이 책 뒤에다 붙여 인쇄한 후 세상에 내놓는다.
내(정조)가 즉위한 20년(정조 19, 1795년) 가을 9월
성상이 즉위한 8년 황명(皇命) 영력(永曆) 네 번째 임인년(헌종 8, 1842년) 에 세움
통훈대부 광주목사 신 조철영(趙徹永)이 삼가 만동묘비(萬東廟碑)의 글자를 모방하여 쓴다.
忠勇將軍贈兵曹判書金公諡狀
上之九年乙巳湖南儒生奇錫周等上言萬曆島夷之難故忠勇將軍臣金德齡奮自布衣擧義討賊雄勇威略爲一時諸軍之冠功未及就竟中蜚語以死粵在先朝憫其冤誣贈官予祠而國人悲之至
今未已乞賜美諡以表忠臣上敎曰德齡忠勇節義婦孺所知覽其遺傳凜凜奪魄可依其所請鳴呼國家所以慰奬忠義者蓋至是而無以加矣謹按公字景樹光州人高祖諱文孫贈兵曹參判曾祖諱珝戶曹正郞祖諱允孝宣務卽考諱鵬變習讀妣南平潘氏直長季宗女公以隆慶戊辰生甫弱冠倜儻有大志常以忠孝自勵壬辰倭大擧入寇連陷湖嶺州郡直犯京師上幸義州是時公伯兄諱德弘已擧義兵與高公敬命軍合公亦在其軍中行到全州公兄謂公曰老母在季弟尙幼吾與若俱死王事誰可顧養者遂遣公歸獨與高公進擊賊錦山兵敗死之明年皇朝提督李如松克平壤賊悉撤諸路兵還據嶺南諸郡謀再搶官軍及諸義兵皆奔潰時公方家居守母服觀察使李公廷馣薦公可將而潭陽府使李公景麟長城縣監李公貴及女兄婿金應會俱以大義勉公遂以墨縗募兵得五千人傳檄湖嶺到南原聞邑人崔聃齡有勇略召爲別將進兵咸陽受都元帥權公慓節度權公標其軍曰超乘世子方駐全州又賜號翼虎將軍事聞行在上遣使奬諭更名曰忠勇軍公愈自奮勵遂會郭公再祐進軍宜寧賊夜刦郭公營公設伏夾擊大破之賊將淸正潛購公像見之愕然曰眞將軍也稍幷其小屯爲三大壘據險固守當是時諸將環寇而壁者且十數而忠勇軍最爲賊所畏服上聞而嘉之命諸義兵悉屬公公欲乘銳進勦會皇朝遣沈惟敬議封貢戒我母得交兵公乃留箚晉州益治戰具屯田積粟屢請出戰朝廷不許而不悅者群起沮撓公知事不可爲日飮酒感憤成疾言者又誣以濫戮軍吏遂被建問賴大臣力救乃解頃之李夢鶴叛湖西憚公等威名乃宣言公及崔聃齡洪季男郭再祐高彦伯皆與之通謀季男彦伯亦當時良將也時公承元帥檄討夢鶴至雲峯聞賊平還軍晉州忠淸兵使李時言慶尙兵使金景瑞素忌公卽密啓公有叛狀而領議政柳成龍從中主之上問群臣德齡叛事當如何皆曰此猛將可以計擒有隣先祖忠肅公方爲承旨獨曰此人萬萬無叛理一武士足以縳之行詐不可上因顧曰汝其往捕至則公已自就獄及置對公慷慨曰臣受國厚恩寧肯從逆賊叛耶臣忘哀起義將欲爲國家剪狂寇擁兵數年未始樹寸功不伸於忠反屈於孝是宜死且臣已矣惟願勿殺無辜崔聃齡大臣鄭公琢金公應南皆白其冤柳相曰彼素號驍勇今縱之後可擒乎遂酷加拷掠竟死獄中時年二十九諸義兵聞之莫不解體而倭酋皆動色相賀公爲人短小精悍目光烔烔射人能辨十里外物勇力絶倫常使大刀長數丈又用雙鐵椎重各百斤每走馬山谷中上下馳驟揮霍跳盪樹木爲之披靡嘗有猛虎在竹林公持鎗獨往徑前刺之虎帖尾不敢動性至孝事親承顔怡愉終日無違十四丁習讀公憂哀毁幾不能全奉慈母能盡其養母嘗遘疾公聞晉州有良醫往邀之醫言病已危雖往無及公泣請乃許卽躬執鞭以從疾馳三百里到家日未午遂賴其藥以瘳又嘗讀書山齋同舍有聞喪而奔者川水方漲不可渡公哀之卽挾其人亂流而濟往來水上若履平地見者感歎不獨神勇然也然公務自難晦折節謹飭不露鋒角卽之溫然端士也好讀書善屬文十七擧鄕解旣又遊牛溪成先生之門有志聖賢之學先生亟許之蓋其仗義校忠以赴國家之急者亦由平日之所養云顯宗二年道臣啓請伸雪上下大臣議領中樞李公景奭擧忠肅公當日所奏爲證諸大臣亦同聲訟冤命贈兵曹參議肅宗七年加贈兵曹判書賜祠額曰義烈公無子配潭陽李氏公死之三年丁酉避兵秋月山遇賊不屈死弟別座諱德普痛二兄之死隱居力學與安公邦俊爲道義交丁卯之難約安公擧義勤王會病不能行貽書爲訣辭氣激烈不愧爲公之弟也當奇錫周等上言竝陳公兄弟節行命各贈官有隣嘗讀公所歌春山火燃之曲竊悲其所遭方公之始起痛念宗國奮不顧身釋纕仗釰豪傑四應何其壯也顧其志豈肯以一死動毫髮哉然今觀其詞意牢愁鬱悒若有所不釋然者又何其悲也當公之時倡義諸公如趙公憲金公千鎰或身冒白刃力盡孤城以殉國難生爲忠臣死爲毅魄而公獨抱幽枉竟罹禍殃死雖欲與公侔亦不可得等是死耳抑又有幸不幸焉此公所以重自悲也雖然我聖朝崇奬節義扶植風敎至于今日褒贈之典殆無遜於殉國諸公王言渙發志士增感則公之死雖勿之悲焉亦可也奇錫周等以有隣職忝館閣且爲忠肅公後孫托以諡狀義不可辭謹摭其遺事而論次之以論于太常氏
正憲大夫行龍驤衛副司直兼知經筵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世子右副賓客徐有隣謹狀
乾隆五十三年四月照訖
忠愍[주:危身奉上曰忠落使民悲傷曰愍點]
忠壯[주:忠上同武能持重曰壯]
忠烈[주:忠上同强而能斷曰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