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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巖 李元禎 先生 交遊 人物錄
귀암 선생의 문집에 수록된 시. 서. 만사. 제문과 부록에 귀암 선생에 대한 제문 만사를 지은 분들과 그 외 문집을 통하여 선생에게 준 글이 있는 분들을 인적 사항을 찾아보았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면서 안타깝게 생각되는 것은 선생의 억울한 죽음과 늦은 신원으로 많은 자료가 유실되어 타 문집에 수록 된 글이 많지 않음입니다.
후일 자료가 찾아지는 데로 보완하도록 하겠습니다.
인동 장달수 근지
이원정(李元禎)1622년(광해군 14)∼1680년(숙종 6).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징(士徵), 호는 귀암(歸巖).
아버지는 응교 낙촌 도장(道長)이며, 어머니는 판서 하담 김시양(金時讓)의 딸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큰 학자였던 조부 석담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학가재(學稼齋) 이주(李주) 문인.
1648년(인조 26) 사마시를 거쳐 1652년(효종 3)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검열·교리를 지내고 1660년(현종 1)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동래부사가 되었다.
1670년 청나라에 사은부사로 다녀왔으며, 1673년 도승지, 1677년(숙종 3) 대사간·형조판서를 지냈다.
1680년 이조판서로 있을 때에 경신옥사로 초산에 유배 가던 도중에 불려와 심한고문으로 운명 하였다.
9년 뒤인 1689년 신원되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신원된 뒤에도 여러 차례 정국의 변화에 따라 추탈(追奪)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귀암문집》이 있으며, 편저에는 《경산지(京山志)》가 있다.
시호: 문익(文翼) 勤學好問曰文。思慮深遠曰翼。고종 8년(1871) 증시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함을 문(文)이라 하고
생각과 용려(用慮)함이 깊고 먼 것이 익(翼)이라 한다
시장: 이조판서 이의익(李宜翼) 찬
귀암 선생 교유 인물 목차
*이서(李𥳕)1566년(명종 21)∼1651년(효종 2). 성주 출신.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이직(以直), 호는 동호(東湖).
*이언영(李彦英)1568년(선조 1)∼1639년(인조 17).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군현(君顯), 호는 완정(浣石亭).
*배상룡(裵尙龍)1574년(선조 7)∼1655년(효종 6). 성주 출신.
본관은 성산(星山).자는 자장(子章), 호는 등암(藤庵).
*이찬(李燦)1575년(선조 8)∼1654년(효종 5). 예천 용궁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중명(仲明). 호는 국창(菊牕)
*이대규(李大圭) 1583년(선조 16)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혼성(渾成)
*이광규(李光圭) 1607년(선조 40)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울장(蔚章)
*이지화(李之華)1588년(선조 21)∼1666년(현종 7). 대구 출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이실(而實), 호는 다포(茶圃)·부강거사(浮江居士)
*이충민(李忠民) 1588년선조 21)∼1673년(현종 14)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여직(汝直), 호는 모암(慕巖),
*이민구(李敏求)1589년(선조 22)∼1670년(현종 11). 서울 출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시(子時), 호는 동주(東洲)·관해(觀海).
*이정(李淀)1589년(선조 22)∼1668년(현종 9).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종호(淙薃). 자는 노천(老泉).
*강대수(姜大遂)1591년(선조 24)∼1658년(효종 9). 합천 출신
본관은 진주. 초명은 대진(大進), 자는 면재(勉哉)·학안(學顔), 호는 춘간(春磵)·한사(寒沙)
*한득일(韓得一) 1591년(선조 24) 원주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수보(壽甫)
*이도(李蒤) 1593년(선조 26) 京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소(子韶)
*권이급(權以伋) 1596년(선조 29)~1660년(현종 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중(師中)
*조수익(趙壽益)1596년(선조 29)∼1674년(현종 15).
본관은 순창(淳昌). 자는 사정(士靜), 호는 만한(晩閑).
*목성선(睦性善)1597년(선조 30)∼1647년(인조 25).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성지(性之), 호는 병산(甁山).
*민응협(閔應協)1597년(선조 30)∼1663년(현종 4).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인보(寅甫), 호는 명고(嗚皐).
*곽의창(郭宜昌)
본관은 현풍. 자는 덕우(德優)
*도신수(都愼修)1598년(선조 31)∼1650년(효종 1).
본관은 성주(星州). 호는 지암(止巖).
*류원지(柳元之)1598년(선조 31)∼1678년(숙종 4).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경현(景顯). 자는 장경(長卿), 호는 졸재(拙齋).
*이진(李袗) 1600년(선조 33)∼미상.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회(子晦), 호는 고산(孤山)·포산(匏山).
*최문활(崔文活)1600년(선조 33)∼미상.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달원(達源).
*이완(李浣)1602년(선조 35)∼1674년(현종 15).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징지(澄之), 호는 매죽헌(梅竹軒).
*정태화(鄭太和)1602년(선조 35)∼1673년(현종 14).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유춘(囿春), 호는 양파(陽坡).
*남노성(南老星)1603년(선조 36)∼1667년(현종 8).
본관은 의령. 자는 명서(明瑞), 호는 운곡(雲谷).
*도신여(都愼與) 1605년(선조 38)~1675년(숙종 1)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명숙(明叔), 호는 휘헌(撝軒).
*엄정구(嚴鼎耈)1605년(선조 38)∼1670년(현종 11).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중숙(重叔), 호는 창랑(滄浪).
*정시걸(丁時傑) 1606년(선조 39)~1670년(현종 11)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대로(大老) 호는 관운(觀雲),
*홍주원(洪柱元)1606년(선조 39)∼1672년(현종 13).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건중(建中), 호는 무하당(無何堂).
*이괴(李襘)1607년(선조 40)∼1666년(현종 7).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방(子方).
*김구(金球)1608년(선조 41)~1669년(현종 10)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명수(鳴叟), 호는 설악당(雪嶽堂).
*여효주(呂孝周)1608년(선조 41)∼1654년(효종 5). 성주(星州)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달부(達夫), 호는 남계(南溪).
*오정일(吳挺一)1610년(광해군 2)∼1670년(현종 11).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두남(斗南), 호는 구사(龜沙).
*장해(張海 每+水) 1610년(광해2)~1677년(숙종 3) 인동.
본관 인동(仁同). 자는 거원(巨源). 호는 삼우당(三優堂)
*허적(許積)1610년(광해군 2)∼1680년(숙종 6).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여차(汝車), 호는 묵재(默齋)·휴옹(休翁).
*나염(羅袡) 1611년(광해군 3)~1661년(현종 2) 나주 출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상(子尙)
*나진(羅袗) 1616년(광해 8) 나주 출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화(子華)
*남일성(南一星) 1611년(광해군 3)~1665년(현종 6)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덕휘(德輝)
*정필달(鄭必達)1611년(광해군 3)∼1693년(숙종 19).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가행(可行), 호는 팔송(八松).
*권대운(權大運)1612년(광해군 4)∼1699년(숙종 25). 서울 출신
본관은 안동. 자는 시회(時會), 호는 석담(石潭).
*홍중보(洪重普)1612년(광해군 4)∼1671년(현종 12).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원백(遠伯), 호는 이천(梨川).
*송시진(宋時振) 1613년(광해군5) 성주 고산.
본관은 야성(冶城). 자는 사달(士達). 호는 매은(梅隱)
*이정기(李廷機)1613년(광해군 5)∼1669년(현종 10). 의성 산운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자신(子愼), 호는 만옹(漫翁).
*조제창(曹悌昌)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이순(而順)
*권목(權穆)1614년(광해군 6)∼1663년(현종 4). 성주
본관은 안동. 자는 태화(泰和).
*민희(閔熙) 1614년(광해군 6)∼1687년(숙종 13).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호여(皞如), 호는 설루(雪樓) 또는 석호(石湖).
*서필원(徐必遠)1614년(광해군 6)∼1671년(현종 12).
본관은 부여(扶餘). 자는 재이(載邇), 호는 육곡(六谷).
*오정원(吳挺垣) 1614년(광해군 6)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중보(仲輔)
*장학(張澩)1614년(광해군 6)∼1669년(현종 10). 인동 출신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성원(聖源)이고, 호는 남파(南坡)
*허강(許堈) 1614년(광해군 6) 합천 가수(陜川 嘉樹)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사정(士正) 호는 회계(晦溪)
*강욱(姜頊) 1615년(광해군 7)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신백(愼伯)
*목내선(睦來善)1617년(광해군 9)∼1704년(숙종 30). 서울 출신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내지(來之), 호는 수옹(睡翁)·수헌(睡軒).
*이경휘(李慶徽)1617년(광해군 9)∼1669년(현종 10).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군미(君美), 호는 묵호(默好) 또는 춘전거사(春田居士).
*윤휴(尹鑴)1617년(광해군 9)∼1680년(숙종 6).
본관은 남원(南原). 초명은 갱(鍞), 자는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하헌(夏軒).
*이관징(李觀徵)1618년(광해군 10)∼1695년(숙종 21). 서울 출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국빈(國賓), 호는 근옹(芹翁)·근곡(芹谷).
*이영세(李榮世)1618년(광해군 10)∼1698년(숙종 24). 칠곡 출신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영백(榮伯)이고, 호는 일휴정(日休亭)
*정도응(鄭道應)1618년(광해군 10)∼1667년(현종 8). 상주 출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봉휘(鳳輝), 호는 무첨(無忝).
*정석교(鄭錫僑)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희백(熙伯) 호는 호는 환성재(喚惺齋)
*이창진(李昌鎭) 1619년(광해군 11)∼1684년(숙종 10) 칠곡(漆谷)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운장(雲長), 호는 창주(滄洲),
*신류(申瀏)1619년(광해군 11)∼1680년(숙종 6). 인동(仁同) 출신.
본관은 평산(平山).
*정석(鄭晳)1619년(광해군 11)∼미상.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백야(白也), 호는 악남(岳南).
*권대재(權大載)1620년(광해군 12)∼1689년(숙종 15).
본관은 안동. 자는 중거(仲車), 호는 소천(蘇川).
*권두망(權斗望) 1620년(광해군 12) 단성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첨(子瞻)
*이경억(李慶億)1620년(광해군 12)∼1673년(현종 14).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석이(錫而), 호는 화곡(華谷). 서울 출생.
*이연년(李延年) 1620년(광해군 12)∼1672년(현종 13).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익(子益), 호는 탄은(灘隱).
*이운근(李雲根) 1620년(광해군 12) 충주 출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덕배(德培)
*홍여하(洪汝河)1620년(광해군 12)∼1674년(현종 15).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백원(百源), 호는 목재(木齋)·산택재(山澤齋).
*정박(鄭樸)1621년(광해군 13)∼1692년(숙종 18).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문(子文)
*홍주삼(洪柱三)1621년(광해군 13)∼1682년(숙종 8).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정경(鼎卿), 호는 월탄(月灘).
*장영(張銢) 1622년(광해군 14)∼1705년(숙종 31). 인동 남산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명세(鳴世), 호는 소매당(訴梅堂).
*김방걸(金邦杰)1623년(인조 1)∼1695년(숙종 21). 안동 지레
본관은 의성. 자는 사흥(士興), 호는 지촌(芝村).
*원만석(元萬石)1623년(인조 1)∼1667년(현종 8).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군옥(君玉), 호는 고산(孤山).
*이두광(李杜光) 1623년(인조 1) 성주(星州)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경휘(景輝)
*이유상(李有相)1623년(인조 1)∼1673년(현종 14).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세경(世卿), 호는 동둔(東芚).
*정회(鄭澮) 1623년(인조 1) 성주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심원(深源)
*심재(沈梓)1624년(인조 2)∼1693년(숙종 19).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문숙(文叔), 호는 양졸재(養拙齋).
*윤우갑(尹遇甲) 1624년(인조 2)
본관은 칠원(漆原). 자는 계형(季衡)
*김태기(金泰基) 1625년(인조 3)∼1700년(숙종 26). 안동 출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안안(安安). 호는 무위당(無爲堂.)
*이복(李馥) 1626년(인조 4)∼1688년(숙종 14))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면여(勉餘), 호는 양계(陽溪),
*이화진(李華鎭)1626년(인조 4)∼1696년(숙종 22).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서(子西), 호는 묵졸재(默拙齋)·묵재(默齋).
*이석규(李碩揆) 1627년(인조 5)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거공(鉅公)
*이현일(李玄逸)1627년(인조 5)∼1704년(숙종 30). 영해 출신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승(翼昇), 호는 갈암(葛庵).
*송광벽(宋光璧)1628년(인조 6)∼1701년(숙종 27). 영주 출신
본관은 야성(冶城). 자는 문성(文星), 호는 응봉(鷹峯).
*윤이제(尹以濟)1628년(인조 6)∼1701년(숙종 27).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여즙(汝楫).
*최영세(崔永世) 1628년(인조 6)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향숙(享叔)
*김추만(金秋萬) 1629년(인조 7)~1673년(현종 14) 서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춘일(春一)
*이보(李簠) 1629년(인조 7)∼1710년(숙종 36))
본관은 진성(眞城). 자(字)는 신고(信古), 호(號)는 경옥(景玉),
*안여석(安如石)1630년(인조 8)∼1695년(숙종 21). 영주 출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주국(柱國).
*강석빈(姜碩賓)1631년(인조 9)∼1691년(숙종 17).
본관은 진주. 자는 위사(渭師).
*민안도(閔安道)1631년(인조 9)∼미상.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여행(汝行).
*유하익(兪夏益)1631년(인조 9)∼1699년(숙종 25).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사겸(士謙), 호는 백인당(百忍堂).
*이언직(李言直) 1631년(인조 9)∼1698년(숙종 24)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자진(子愼), 호는 명호(明湖),
*정중휘(鄭重徽)1631년(인조 9)∼미상.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신백(愼白), 호는 돈곡(敦谷).
*강세구(姜世龜)1632년(인조 10)∼1703년(숙종 29).
본관은 진주. 자는 중보(重寶), 호는 삼휴당(三休堂).
*김구만(金龜萬) 1632년(인조 10)~1700년(숙종 26)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원서(元瑞)
*정유악(鄭維嶽)1632년(인조 10)∼미상.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길보(吉甫), 호는 구계(癯溪)·동촌(東村).
*김시현(金時鉉) 1633년(인조 11) 충주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시(重時)
*김총(金璁) 1633년(인조 11)∼1678년(숙종 4) 안동 예안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휘(仲輝), 호는 우헌(迂軒),
*민취도(閔就道)1633년(인조 11)∼1698년(숙종 24).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정숙(正叔).
*유명천(柳命天)1633년(인조 11)∼1705년(숙종 31).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사원(士元), 호는 퇴당(退堂).
*김덕원(金德遠)1634년(인조 12)∼1704년(숙종 30).
본관은 원주. 자는 자장(子長), 호는 휴곡(休谷).
*목임유(睦林儒)1634년(인조 12)∼미상.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사아(士雅).
*김남일(金南一)1635년(인조 13)∼1696년(숙종 22) 영주 출신
본관은 선성(宣城). 자는 중백(重伯), 호는 지남(砥南),
*엄집(嚴緝)1635년(인조 13)∼1710년(숙종 36).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경지(敬止), 호는 만회(晩悔).
*이우정(李宇鼎)1635년(인조 13)∼1692년(숙종 18).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백(重伯).
*장진(張瑱)1635년(인조 13)∼1707년(숙종 33). 영주 출신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군옥(君玉), 호는 모암(茅菴).
*홍득기(洪得箕)1635년(인조 13)∼1673년(현종 10). 효종의 부마(駙馬).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자범(子範), 호는 월호(月湖).
*권환(權瑍)1636년(인조 14)∼1716년(숙종 42).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장(仲章), 호는 제남(濟南).
*민암(閔黯)1636년(인조 14)∼1694년(숙종 20). 서울 출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장유(長孺), 호는 차호(叉湖).
*신후재(申厚載)1636년(인조 14)∼1699년(숙종 25).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덕부(德夫), 호는 규정(葵亭)·서암(恕庵).
*윤이후(尹爾厚) 1636년(인조 14)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재경(載卿)
*이태구(李泰龜)1636년(인조 14)∼1724년(경종 4).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수(汝守)
*이형련(李亨連) 1636년(인조 14)~ 1664년(현종 5) 성주(星州)
본관 경산(京山). 초명 형재(亨載). 자는 성세(聖世) 호는 암재(岩齋)
*이일정(李日井) 1637년(인조 15)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하(子夏)
*오시복(吳始復)1637년(인조 15)∼미상.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중초(仲初), 호는 휴곡(休谷).
*이하신(李夏臣)
본관은 경주(慶州)1664년(현종 5) 사옹원 참봉(司饔參奉)이 되었다.
*정창지(鄭昌址) 성주 출신
본관은 청주(淸州)증조부는 한강 정구(鄭逑). 조부는 정장(鄭樟). 아버지는 정유희(鄭惟熙)
*김성좌(金聖佐) 1639년(인조 17)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임경(任卿)
*김해일(金海一)1640년(인조 18)∼1691년(숙종 17).
본관은 예안. 자는 종백(宗伯), 호는 단곡(檀谷).
*이우진(李宇晋) 1640년(인조 18)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진백(晋伯)
*김준상(金儁相) 1641년(인조 19)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거경(巨卿)
*이시만(李蓍晩)1641년(인조 19)∼1708년(숙종 34).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정응(定應), 호는 동애(東厓).
*이양(李暘) 1641년(인조 19) 성주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하경(夏卿)
*이옥(李沃)1641년(인조 19)∼1698년(숙종 24). 서울/상주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문약(文若), 호는 박천(博泉).
*박세신(朴世臣) 1642년(인조 20)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신재(臣哉)
*성관(成瓘) 1643년(인조 21)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옥여(玉汝)
*권두인(權斗寅) 1643년(인조 21)~1719년(숙종 45) 안동 유곡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춘경(春卿). 호는 하당(荷塘), 설창(雪窓)
*손만웅(孫萬雄)1643년(인조 21)∼1712년(숙종 38). 경주 양동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적만(敵萬), 호는 야촌(野村).
*정내상(鄭來祥)1643년(인조 21)∼1717년(숙종 43).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대숙(大叔)
*권흠(權歆)1644년(인조 22)∼미상.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형(子馨).
*박경후(朴慶後)1644년(인조 22)∼미상.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휴경(休卿), 호는 취옹(醉翁)·만오(晩悟).
*신경제(申慶濟) 1644년(인조 22) 청주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회(聖會)
*이동근(李東根) 1644년(인조 22) 안동 소호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진백(震伯)
*강선(姜銑)1645년(인조 23)∼미상.
본관은 진주. 자는 자화(子和).
*목창명(睦昌明)1645년(인조 23)∼1695년(숙종 21). 서울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제세(際世), 호는 취원(翠園).
*신학(申㶅)1645년(인조 23)∼미상. 청주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도원(道源), 호는 만회당(晩悔堂)·만천(晩川).
*심단(沈檀)1645년(인조 23)∼1730년(영조 6).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덕여(德輿), 호는 약현(藥峴)·추우당(追尤堂).
*심벌(沈橃)1645년(인조 23)∼1711년(숙종 37).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군섭(君涉).
*권만제(權萬濟) 1646년(인조 2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세경(世卿)
*정시윤(丁時潤)1646년(인조 24)∼1713년(숙종 39). 원주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우(子雨), 호는 두호(斗湖).
*최경중(崔敬中) 1646년(인조 24) 서울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일강(日强)
*이현석(李玄錫)1647년(인조 25)∼1703년(숙종 29).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하서(夏瑞), 호는 유재(游齋). 서울 출생.
*이현기(李玄紀)1647년(인조 25)∼1714년(숙종 40).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원방(元方), 호는 졸재(拙齋).
*홍만수(洪萬遂)1647년(인조 25)∼1695년(숙종 21).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중(成中), 호는 채봉(彩峰).
*이의징(李義徵)미상∼1695년(숙종 21).
본관은 전주(全州). 판서 응시(應蓍)의 아들
*권규(權珪)1648년(인조 26)∼1723년(경종 3).
본관은 안동. 자는 국서(國瑞)·덕장(德章), 호는 남록(南麓).
*정재륜(鄭載崙)1648년(인조 26)∼1723년(경종 3). 효종의 부마.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수원(秀遠), 호는 죽헌(竹軒).
*김세흠(金世欽)1649년(인조 27)∼1721년(경종 1). 안동 내앞.
본관은 의성. 자는 천약(天若), 호는 칠탄(七灘).
*홍중정(洪重鼎) 1649년(인조 27)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상지(象之)
*여성거(呂聖擧) 1649년(인조 27)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우(子遇) 호는 나은(蘿隱)
*이후영(李後榮)1649년(인조 27)∼1712년(숙종 38).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사구(士久).
*강현(姜鋧)1650년(효종 1)∼1733년(영조 9).
본관은 진주. 자는 자정(子精), 호는 백각(白閣)·경암(敬庵).
*송유룡(宋儒龍) 1650년(효종 1)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덕보(德甫)
*허경(許熲)1650년(효종 1)∼1719년(숙종 45).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요부(堯夫), 호는 빙호(氷湖).
*홍만기(洪萬紀) 1650년(효종 1)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여장(汝張)
*이만원(李萬元)1651년(효종 2)∼1708년(숙종 34).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백춘(伯春), 호는 이우당(二憂堂).
*김문하(金文夏) 1652년(효종 3)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성기(聖起)
*성준(成儁) 1653년(효종 4)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천정(天挺)
*성임(成任) 1662년(현종 3)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중(汝重)
*김만주(金萬柱) 1653년(효종 4) 예안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중능(仲能)
*김일기(金一夔) 1653년(효종 4)~1711년(숙종 37)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순경(舜卿) 호는 도암(道庵)
*박행의(朴行義) 1653년(효종 4)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도언(道彦)
*이윤수(李允修) 1653년(효종 4)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면숙(勉叔)
*민창도(閔昌道)1654년(효종 5)∼미상.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사회(士會), 호는 화은(化隱).
*이현조(李玄祚)1654년(효종 5)∼1710년(숙종 36).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계상(啓商), 호는 경연당(景淵堂).
*이이만(李頤晩) 1654년(효종 5)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정수(正叟). 호는 오헌(悟軒)
*송정규(宋廷奎)1656년(효종 7)∼미상.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원경(元卿), 호는 우수(迂叟).
*이진휴(李震休)1657년(효종 8)∼1710년(숙종 36).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백기(伯起), 호는 성재(省齋)·성암(省菴).
*권중경(權重經)1658년(효종 9)∼1728년(영조 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도일(道一), 호는 손재(巽齋)·정묵당(靜默堂).
*나학천(羅學川)1658년(효종 9)∼1731년(영조 7).
본관은 수성(壽城). 자는 사도(師道), 호는 창주(滄洲). 영주 출신.
*금 섬(琴暹)1659(효종 10,)∼1695(숙종 21,). 봉화
본관은 봉화(奉化0. 자는 중서(仲舒).
*김정익(金庭翊) 1659년(효종 10) 성주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익경(翼卿)
*손덕승(孫德升)1659년(효종 10)∼1725년(영조 1).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현수(玄叟), 호는 매호(梅湖).
*채성윤(蔡成胤) 1659년(효종 10)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중미(仲美)
*김여건(金汝鍵)1660년(현종 1)∼1697년(숙종 23). 봉화 해저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천개(天開).
*홍중현(洪重鉉)1660년(현종 1)∼1726년(영조 2).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대옥(大玉), 호는 천일재(天一齋).
*이주천(李柱天) 1662년(현종 3)~1711년(숙종 34) 성주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이능(爾能)
*심최량(沈最良) 1669년(현종 10)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백미(伯眉)
*채팽윤(蔡彭胤)1669년(현종 10)∼1731년(영조 7). 보령출신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중기(仲耆), 호는 희암(希菴)·은와(恩窩).
*정기윤(鄭岐胤) 안의
본관은 초계(草溪)
조부는 이조참판 동계(桐溪) 온(蘊). 아버지는 창모(昌謨) 처부는 미수 허목.
160명
이서(李𥳕) 1566년(명종 21)∼1651년(효종 2).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이직(以直), 호는 동호(東湖).
아버지는 진천현감 홍우(弘宇)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晋州姜氏)로 동부참봉 개(漑)의 딸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05년(선조 38)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한 뒤 천거를 받아 황산찰방에 잠시 재직하였다. 이어 스승이 권신(權臣)의 배척을 받아 향리로 돌아가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성주에서 스승과 함께 학문을 강론하면서 송대 유학자들의 예설(禮說)을 담은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을 편집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스승이 타계하자 심상(心喪) 3년을 입고 회연서원(檜淵書院)과 비각을 세우는 한편, 《한강집(寒岡集)》을 간행하였다.
1626년(인조 4) 사축서별제에 임명되고 이듬해에 일어난 정묘호란에 임금을 호위한 공로로 6품에 승진하였으며, 얼마 뒤 활인서별제와 의금부도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만년에는 고향인 승호(承湖)에서 후진교육에 힘쓰는 한편, 스승의 《한강언행록(寒岡言行錄)》을 편집하였다.
사후에 문인들이 ‘덕요선생(德耀先生)’이라 칭하였으며 스승·아버지 등과 더불어 성주의 회연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동호문집》 3권 2책이 있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東湖李公 ○辛卯 1651년(효종 2) 輓 後學判書李元禎(동호집)
奕世詩書業。名家孝友傳。鯉庭曾奉對。鱣席更周旋。德義薰陶洽。眞純稟賦全。
華要應列宿。茁壯驗乘田。殃慶休言理。竆通信在天。嗣王申令典。優渥侈高年。
三品朝中貴。八旬地上仙。江湖終斂跡。鄕黨共推賢。王父心期合。先君愛慕偏。
登門慚客右。發藥荷人先。戀想音容久。睽違歲月綿。訃傳淸洛日。悲繞瑟山煙。
後死將安倣。殘生秖自憐。篁䕺餘舊色。梅蘂獨新姸。冠屨藏玄宅。精靈陟檜淵。
蕉荔酹哭罷。斜日照荒阡。
*祭東湖李公文 癸巳 1651년(효종 4) 祭文 後學判書李元禎(동호집)
嗚乎。士修於己。其備也難。和未必莊。毅鮮能寬。兼而有之。我於公觀。公有景行。小人所艾。公有令德。君子攸愛。稟固已厚。功豈可誣。龍門夙御。鯉庭早趨。是以有譽。士望日隆。方來朱紱。何有於躳。睠彼白屋。樂在其中。下有流水。上有靑山。於焉考槃。十畞閒閒。煙霞素性。罇酒餘年。留意典墳。對越聖賢。人間歡戚。迭催于前。理遣順應。所保者天。優老有典。報施不虛。官三品貴。壽八耋餘。厭世溷濁。一夢長辭。公應無憾。我又何悲。公與王父。淡水心期。共撤皋比。胥資麗澤。婚姻之好。先子是託。容我後生。世義之故。不天孤露。偏荷眷顧。時承誨語。如見祖父。呼寐喚醒。若相於瞽。自訟不敏。踵門莫頻。一夕承凶。似夢非眞。時赴洛師。未卽撫殮。于後一哭。始在永窆。寒暑攸遷。已屆琴祥。餘生何處。更覿淸光。親賓咸造。昔日升堂。微踵獨後。抱痾增傷。辜負幽明。無辭可飾。玆因迷弟。敬陳菲薄。至哀無文。言不必長。不昧者存。來格洋洋。(嗚呼哀哉)
東湖先生文集 附錄
祭文 後學判書李元禎 귀암집에 미수록
嗚呼公病而我未能候公殮而我夫能憑雖緣事故之宂疊實坐誠意之淺薄我實自愧公豈肯恕嗚呼夙趨鯉庭旣正蒙養之功旋御龍門又資講磨之益灰心榮利栖迹林泉寔惟先輩之所服何待後生之容議念吾王父早結魯衛之情惟我先人更託秦晉之好齠齕之年我已拜公孤露之餘公益憐我公今已矣我誰依哉嗚呼年踰八旬位躋三品生而聞道死而得正公歸卽安我又何悲靈辰不留祖道將啓一觴擧哀千古永訣
이언영(李彦英) 1568년(선조 1)∼1639년(인조 17).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군현(君顯), 호는 완정(浣石亭).
증조부는 진사 인손(麟孫). 조부는 운(運). 아버지는 문과 공조좌랑 이등림(李鄧林)
외조부는 최호(崔湖). 처부는 성균관 사성 죽재(竹齋) 곽간(郭趕). 권사성(權思性)
1591년(선조 24) 생원이 되고,
1603년 식년문과에 장원을 하여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호조정랑·태복시첨정(太僕寺僉正)을 거쳐 다음해 사간원 정언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원사(寃死)를 주장하는 정온(鄭蘊)을 변호하였다가 삼사의 탄핵으로 삭직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인조의 특별한 부름을 받아 성균관직강·사예(司藝)·내자시정(內資寺正)·사헌부장령을 거쳐 1625년 승정원 좌부승지가 되었으며, 그뒤 밀양목사·청주목사·선산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를 도와 10여년 동안 국방에 힘썼으며, 만년에 낙동강가에 정자를 짓고 여생을 보냈다.
저서에 《완정문집》이 있다.
*祭外舅浣石亭李先生遷葬時文 甲午 祭文 女壻李元禎 歸巖(완정집)
嗚呼。氣和者未必色莊。外柔者未必內剛。兼有之者難得。豈獨衰叔世之爲然哉。恭惟我聘君。藹然風噓而氣之和也得之。凝然川渟而色之莊也似之。和積於中則發於外而爲柔。莊重於外則主乎內者爲剛。故其治之心身者。敬義而夾持。措諸事業者。直方以爲用。富貴不能淫。威武不能屈。當世之知聘君者。自能記其行而壽其蹟。固非小子一二談所可得形容者也。嗚呼。公有通變之智而處之若愚。公有傲世之見而守之以恭。公有懸河之辯而不違於理。嘐嘐然慕古而尙節。每與世抹摋而不合。此亦常衆人所難能。而何足以議公之彷彿也耶。若其孝友之行於家。忠義之著於國。恂恂處鄕之道。斬斬正家之法。接物有容之量。居官廉㓗之操。稟之厚而養之者深。道之正而成之者粹。則其所以紹文獻於家庭。薰德性於師友者。不已多乎。嗚呼。薇垣讜議。保姱節於昏朝。銀臺嵬論。激衆怒於明時。屛伏十載。益堅其素所守。棲遑三邑。無入而不自得。此則古之君子尙或難之。若吾聘君。猶欿然未肯以自大也。然則擢第一於漢庭。作納言於虞朝。固不足爲聘君之得。學未展於一世。位不踰於三品。又未足爲聘君之失。嗚呼。王父志符心契。幼而鍊玉則同隊。長而採蓮則同榜。在鄕在京。影響相隨。處竆處達。終始不渝。箴䂓切磨。面講書質。反異而歸同。交須而共濟。盖不惟義分之特厚。抑由於臭味之相合也。先子幼歲。從公受業。久立門外之雪。慣承座間之風。訓誨成立之恩。在聘君則餘事。而生三事一之誠。乃先子之平生。在今余小子。慙非衛玠之玉潤。叨陪樂廣之氷淸。襲蘭言而心醉。佩玉音而腹飽。燕爾之初。遽嬰痘疾。將攝之中。重貽憂念。多方藥餌。至誠救護。幾殊而獲甦。入死而出生。得至今日。公賜是賴。此恩如山。何可忘也。二載軒屛。誘掖諄至。一心仰德。愛慕彌深。自惟魯質。雖不克有所感發。每承善誨。竊庶幾無或墜失。奉以周旋。期百年之莫逆。何天不憗。奄一夕而長終。山頹當日。哀纏心肺。孤露如今。悲慕轉切。嗚呼哀哉。已矣已矣。顧惟不敏。重以昏惰。浪過時月。罕尋書史。公用嗟惜。反復敎詔。玉而不琢。器不可成。才而不學。名何以立。頑愚之甚。竟未有遂。㬥棄之恨。至今在中。頃試有司。誣衒虛名。屢魁於解額。亞元於金牓。聘君有知。必爲之嘉悅。白蓮丹桂。雖極一時之榮耀。感舊悲今。其奈九原之難作。新恩之日。旋遭喪亂。官備之奠。未及來薦。當時之恨。豈其涯也。噫四璧幷秀。咸稱謝庭之寶樹。一郞年來。重患趙嬰之心疾。使西陵下馬之地。有中野啓土之擧。若堂震驚。冥途失寧。不謂十六載壙訣之後。重有今日之憑棺。我心匪石。何以爲懷。惟是新卜佳城。實遵治命。祔從先塋。可奉萬歲之晨昏。夫人同原。復諧百年之琴瑟。縱未安於旣往。庶永寧於方來。倘垂冥佑。啓廸後嗣。噫文不可以盡吾之言。言不可以盡吾之情。無寧隱默。說向泉臺。夫孰知我懷之悲也。
배상룡(裵尙龍) 1574년(선조 7)∼1655년(효종 6). 성주 출신.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자장(子章), 호는 등암(藤庵).
사재감정(司宰監正) 배덕문(裵德文)의 손자로, 영남수군절도사 배설개(裵楔皆)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야로송씨 충순위(忠順衛) 송원(宋源)의 딸이고, 부인은 사재감정 신인서(愼仁恕)의 딸이다.
한강 정구(鄭逑)와 여헌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여러 차례 그의 공거문(公車文: 應試·應製·疏章 등의 詩文)이 뽑혔으나 아버지가 비명으로 죽자 과거에 응하지 않고 어머니를 봉양했으며, 동생을 열심히 가르쳐 태학에 올렸으나 일찍이 죽자 더욱더 인사(人事)에 뜻을 잃고 몇 번 천거되었음에도 거절하였다.
또한 끝까지 추만(推挽)하는 자 없이 죽기를 원하였다.
1631년(인조 9) 권대진(權大進) 등이 영남의 최현(崔睍)·승려 천식(天植)과 함께 일으키려고 했던 모역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금부도사에게 붙잡혀 추국을 당하기도 하였다.
1637년 천거로 선교랑의 벼슬이 내렸으나 받지 않고 임종 때 벼슬을 쓰지 말고 ‘숭정처사(崇禎處士)’라고만 쓰라 했다.
1774년(영조 50)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에 증직되고, 1785년(정조 9) 유림들이 세운 성주의 도천향사(道川鄕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등암집》이 있다.
歸巖先生文集
祭文
*祭藤庵裵公 尙龍 文 丁酉 1657년(효종 8) 대상 시 祭文 侍生 李元禎(등암집)
嗚乎哀哉。公病而我未候。公窆而我不臨。幽明之間。負愧良多。寒暑攸遷。再期忽迫。而一酌之奠。尙不得躳薦。未知尊靈垂恕而屑歆耶。嗚乎哀哉。平生蓼莪之慟。半世荊華之樂。出於孝友之天賦。而亦衆人之所共服。則形容盛德。以圖不朽者。世必有其人。何待小子之蕪辭哉。惟其周詳經遠之智。宏厚鎭物之量。博通不器之才。堅確難奪之操。宜若有爲於世。而遭家不造。卒無所施。則旣生之。又廢之者。是誠何心哉。此實天道之不可知。而人不能無憾者也。嗚乎哀哉。嶷嶷莊重之容。恢恢坦蕩之度。怡怡和悅之色。款款接人之誠。其可得而復見之耶。公與王父。妙歲投分。周旋泗水。共襲座間之風。追隨鄕井。相照歲寒之襟。推厥契義。施及先子。交遊父子之間。不啻骨肉之情。不肖險釁。早遘大殃。公所以矜恤余敎誨余者。蓋無所不用其極。而我實無似。忘恩負義。洛水容舠。旣不能源源躳造。塵冗多掣。又不克頻頻書候。頃歲踵門。實在久離之餘。謂我來遲。苦道江渭之戀。晤語終宵。離懷猶惡。孰謂此別。奄成今古之訣耶。嗚乎哀哉。鄕黨耆舊。今也則無。疑無所質。固後死之均痛。過無我規。卽小子之偏傷。安得不爲之深戚也耶。奠雖代手。哭不借於人聲。靈如有知。庶昭格於心香。(嗚呼哀哉)
이찬(李燦) 1575년(선조 8)∼1654년(효종 5). 예천 용궁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중명(仲明). 호는 국창(菊牕)
고려 태학사(太學士) 행(行)의 8대손이며, 서애 류성룡(柳成龍)의 생질.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의 사위
젊어서 자주 병을 얻었으므로 스스로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독학으로 의술을 연구하여 명의(名醫)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그는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기 위하여 모든 힘을 기울였다.
한밤중에 환자가 찾아오거나 그를 데리러 와도 조금도 귀찮게 여기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치료도 하고 또한 천리길도 멀다 하지 않고 왕진을 가기도 하였다.
1632년(인조 10) 어의(御醫)의 치료에도 효험을 얻지 못한 인조의 병을 고치니 어의들이 부끄러워하였다. 왕의 특명으로 익위사사어(翊衛司司御)로 등용되고, 이어서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공조좌랑·군위현감을 역임하고 병으로 사임하였다.
다시 왕의 특명으로 내의원(內醫院)에 나가 어약(御藥)을 바치다가 공조정랑에 기용되고 이어서 김산현감를 지냈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李菊牕 燦○甲午 1654년
山河淑氣專南服。有斐先生聚炳靈。雅操冲襟霜冽冽。溫姿美質玉亭亭。談間涇渭氷生壑。皮裏春秋刃發硎。騎老遺風聯累世。厓門襲馥自齠齡。竆溟蜃伏高搴彩。邃谷蘭幽遠播馨。北闕名懸膺紫誥。南金價重溢靑萍。衛生區扁軒歧訣。觀理詩書易禮經。王父妙年初托契。丈人當日已忘形。先君就藥淹旬月。小子承華近戶庭。幾歲睽離頭欲白。前春相對眼俱靑。伊時精力猶欣旺。今夕凶音可忍聆。寂寞池臺餘故宅。蒼茫煙樹鎖虛廳。賢孫繩武徵餘慶。繼胤傳家喜典刑。九曲武夷平楚外。江流聲咽不堪聽。
이대규(李大圭) 1583년(선조 16) 상주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혼성(渾成)
아버지는 문간공(文簡公) 창석(蒼石) 이준(李埈)
광해군(光海君) 10년(1618) 진사시에 합격
1638년(인조 16) 용궁현감(龍宮)이 되었다.(계암일록)
歸巖先生文集
詩
挽李龍宮 大圭
寄誄惠連纔浹歲。更堪題挽送靈輀。剛標不被凡塵累。魯質偏蒙世義推。
一子才華看構穫。二城仁愛燕煢嫠。龍州奉袂渾如夢。回首西風不盡悲。
이지화(李之華)1588년(선조 21)∼1666년(현종 7). 대구 출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이실(而實), 호는 다포(茶圃)·부강거사(浮江居士)·동계(東溪). 이경두(李慶斗)의 손자로, 현감 이종문(李宗文)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전경창(全慶昌)의 딸이다. 여헌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1610년(광해군 2)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3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설서·검열·대교를 역임하고 1621년에 정언으로 있을 때 이이첨(李爾瞻)을 탄핵하다가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다시 등용되어 예천군수가 되고, 계속하여 정주·김해·창원·파주의 목사를 지냈다.
그뒤 병조참의·예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장현광의 막하에서 군량의 조달에 힘썼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의병을 지휘하여 왕을 호종(扈從)하기도 하였다.
1654년(효종 5) 함양군수로 있다가 안렴사(按廉使)의 배척을 받고 영해에 유배되었다가 풀린 뒤로는 벼슬을 하지 않고 다산(茶山)에 머물며 한적하게 지냈다.
다포집(茶圃集)○附錄
輓詞 折衝將軍副司直李元禎 귀암집에는 미수록
鄕隣契義夙相親幾踵龍門接後塵棣萼輝連聲望赫貂蟬官貴寵光新八旬壽享人間福一子才稱席上珍千里無由鷄酒奠不堪回首倍傷神
이충민(李忠民) 1588년선조 21)∼1673년(현종 14)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여직(汝直), 호는 모암(慕巖),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두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과거를 단념하고, 받들어 모시기에 낙으로 삼았다. 또 우애가 지극하여 형의 죽음을 슬퍼하기 친상과 같이 하였으며, 조카형제가 재질이 둔했으나 성심껏 교육하고 전토(田土)를 나누어주어 생계를 돕게 하였다. 수직(壽職)으로 부호군(副護軍)이 되어 동중추(同中樞)에 올랐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李慕巖 忠民
天之始何爲。賦公才之美。天之又何爲。嗇公祿與位。所以滋余惑。誰能究此理。昔公在妙齡。令聞溢鄕里。泗陽觀道德。軒上撤皋比。王父偏奬許。眷愛猶子視。丈人佩警誨。景仰心常醉。先君托襟期。小子叨契義。幼從上舍遊。情親卽同氣。夤緣三世好。顚沛與相恃。梅院當年盛。鄰居凡有幾。聯袂互追逐。昕夕不知止。春山頻賞花。秋水屢膾鯉。修明呂氏約。蘭亭追古事。聚散忽驚心。閒忙路各異。自我牽世務。睽離今十禩。南望久戀憀。前期正屈指。簡札承屬耳。凶問傳何自。往歲拜牀下。精華曾不瘁。是知仁者壽。惟冀享遐祉。聖渥侈高年。人爵隨而至。家聲有賢嗣。積善驗在此。夫人恪蘩蘋。閨範稱女士。琴調一室中。劒合重泉裏。柳車同時駕。雙旌遵洛涘。親賓集祖道。行路共掩淚。宜羨不須悲。此事世無二。耆舊今也無。感念增涕泗。吾方日下趨。幽窆未經紀。靈辰聞已近。含哀強寄誄。
이민구(李敏求) 1589년(선조 22)∼1670년(현종 11). 서울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시(子時), 호는 동주(東洲)·관해(觀海).
이조판서 지봉 수광(睟光)의 아들이다.
1609년(광해군 1) 사마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12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수찬으로 등용되었다. 이어서 예조·병조좌랑이 되었고, 1622년 지평이 되고, 이듬해 선위사(宣慰使)로 일본사신을 접대하였다.
교리·응교 등을 거쳐 1623년(인조 1) 사가독서를 하였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 장만(張晩)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626년 대사간이 되고, 이듬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병조참의가 되어 세자를 모시고 남쪽으로 난을 피하였다. 그해 승지가 되었다가 외직인 임천군수로 나갔다.
1636년 이조참판·동지경연사(同知經莚事)를 역임하고 이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도검찰부사(江都檢察副使)가 되어 왕을 강화에 모시기 위하여 배편을 준비하였으나 적군의 진격이 빨라 어가의 길을 막았으므로 왕이 부득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소임을 완수할 수 없었다.
난이 끝난 뒤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다는 죄로 아산에 유배되었다가 영변으로 옮겨졌다. 유배지에서 책임을 통감하면서 날마다 눈물로 자책을 하다가 1649년에 풀려났다.
그뒤 부제학·대사성·도승지·예조참판 등을 지냈다.
문장에 뛰어나고 사부(詞賦)에 능하였을 뿐 아니라 저술을 좋아해서 평생에 쓴 책이 4,000권이 되었으나 병화에 거의 타버렸다.
저서로는 《동주집》·《독사수필 讀史隨筆》·《간언귀감 諫言龜鑑》·《당률광선(唐律廣選)》 등이 있다.
歸巖先生文集
祭文
祭東洲李公 敏求 文 庚戌 1670년(현종 11)
嗚乎。才俊之生。豈非天哉。扶輿淸淑之所萃。光岳精英之所鍾。進可以黼黻乎皇猷。退可以維持乎世道。則才俊之生。豈非天哉。嗚乎。以蚌珠璀璨之資。奉鯉庭詩禮之對。時値昏亂。韞櫝而守。世際休明。纓冠而進。騁逸軌於長途。駕大於滄波。天之生公。蓋有意也。天之所生。天豈廢之。而國運中否。時事大變。初非受人之牛羊。只是遇事之不幸。而浮毁交口。衆狺同聲。投杼之疑。忽起於慈母。駭機之發。轉深於身後。經綸之手。竟未得大施於世矣。典雅之文。其止爲不平之鳴矣。抑公之所不遇者時耶。所不能者人耶。嗚乎。人有高世之才者。固自受之於天。不是取之於人。而愛慕者常少。猜忌者皆是。洞庭波闊。出沒侍郞之舟。淸淮風急。摧折學士之棹。虞卿沒於竆愁。太史就於蠶室。荀子賦詩而抑憤。屈原懷沙而不悔。抱奇才而蒙厚辱者。曾不知其幾多。固知自外至者。不足爲公之榮辱矣。然則天之於公也。其所以廢之者。乃所以成之也。何者。其竆愈甚。故其得愈多。多積博發。閎中肆外。龍飛鳳翥。而文章之妙得之。日光玉潔而文章之麗得之。運造化於硏思。倒峽水於詞源。操觚之士。咸取軌範。受簡之彥。率循典型。所謂旁行於一時。下達於千世。雖其怨敵。不敢議也者。正在於公也。執此而言之。則天之不廢於公者。亦可謂富矣。吾何遽戚戚於公耶。雖然文章是一藝耳。何足以盡公之平生乎。惟其孝友之行。愷悌之德。溫雅之襟。高潔之標。貫古該今之識。河決駟駕之論。古亦罕儔。今何復見。幸因先分之特厚。不遺後生之無似。出入門牆。已多年矣。先墓顯刻之文。實有榮於華袞。小子感德之忱。益自浹於深髓。雖緣宦故多端。公居且僻。不得源源奉袂。而每一造拜。輒承殊款。探吐幽隱。亹亹不厭。開導昏慵。諄諄不掇。條暢理達。面命耳提。親炙金玉之表。穩聽珠璣之音。竆厄怨尤之意。未始形於色辭。安閒貞固之操。不少變於終始。淸光射人。不覺煩胷之爽然。瑞彩盈室。頓絶塵念之自生。人中之鶴。古聞其語。地上之仙。今見其人。士林倚以宗匠。騷壇立其大幟。年齡雖高。精華猶贍。謂神扶之不爽。乃天奪之還遽。奎星晦彩。藝苑無主。業于何而問焉。疑從誰而質諸。天乎天乎。已矣已矣。靈辰不留。柳車旣飾。屋樑殘月。依俙平日之眉目。祖道春風。彷彿昔時之謦欬。一觴奉奠。千古永訣。伏惟尊靈。庶賜降格。
이정(李淀) 1589년(선조 22)∼1668년(현종 9). 서울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종호(淙薃). 자는 노천(老泉).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수일(守日)의 아들이다.
1612년(광해군 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9년 금오랑(金吾郞)에 제수되었다. 당시 세력가인 이이첨(李爾瞻)이 그를 그의 당(黨)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그뒤 직장으로 승진하였는데 행신(倖臣)의 서자와 같은 벼슬이라 하여 관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뒤 거창현감으로 발탁되고,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아버지를 도와 반군(叛軍)을 막았다.
그뒤 여러 고을의 수령을 거쳐 상주목사로 임명되었으나 나이를 핑계로 사양하였고, 이어 장례원판결사로 임용되었다.
1661년(현종 2) 노비의 일이 궁액(宮掖)으로 확대되어 왕과 마찰을 빚자 파직되고, 1668년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받고 경림군(慶林君)에 습봉(襲封)되었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慶林君李 淀
山西勳閥盛雞林。儒素將身世共欽。政務養民名勒石。恩推優老秩橫金。
元戎季弟師中吉。擁節兒郞閫外臨。家慶似公堪可詫。永懷先好自霑襟。
강대수(姜大遂) 1591년(선조 24)∼1658년(효종 9). 합천
본관은 진주. 초명은 대진(大進), 자는 면재(勉哉)·학안(學顔), 호는 춘간(春磵)·한사(寒沙)·정와(靜窩). 사간 익문(翼文)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합천이씨(陜川李氏)이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문인
1610년(광해군 2) 생원·진사시를 거쳐 1612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설서(說書)·사서(司書)를 역임하였고, 이듬해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614년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자 정온(鄭蘊)이 간언하다가 유배되었는데, 그는 정온을 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평소에 반목하던 정인홍(鄭仁弘)의 모함으로 삭직당하고 회양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영변부판관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그뒤 호조좌랑·예조정랑에 올랐다. 다음해 사헌부정언·지평·장령을 역임하였다.
1627년(인조 5)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정경세(鄭經世)를 따라서 영남에 가서 의병을 모집하였으나, 3월에 청나라와 화친하자 돌아와 사간·주부를 지냈다.
1628년 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631년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이 되고, 이어 수찬·부교리 겸 경연시독관·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1637년 부응교를 지내고 1639년 통정대부가 되었으나, 1641년 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 진주에서 살다가 1644년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이 되고, 이어 우승지·병조참지·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651년 전주부윤이 되어 1년 동안 지낸 다음, 관직에서 물러나 여러 차례에 걸친 임금의 소명에도 불구하고 관도에 오르지 않았다.
생시에 학문하는 사람들을 생각하여 석천서재(石泉書齋)를 지었으며, 또 유학자들을 위하여 이연서원(伊淵書院)과 덕곡서원(德谷書院)을 지었다.
저서로는 《한사집》 7권 3책이 있다. 합천의 도연서원(道淵書院)에 제향되었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姜寒沙 大遂 1658년(효종 9)
三朝事業璧無玼。藝苑聲名世共推。早以諫官恢讜議。逮登前席討論思。
霜蹄夙展行將遠。草露先晞理莫知。最是九原難瞑目。倚閭猶望暮歸兒。
한득일(韓得一) 1591년(선조 24) 원주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수보(壽甫)
아버지는 인천부사 유겸(有謙)
인조(仁祖) 8년(1630) 생원시에 합격.
인조 21년 천거로 북부주부. 24년 귀후서별제. 26년 신창현감. 효종 4년 감찰.
동년 12월 예안현감이 되었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韓禮安 得一
造席非無願。尋羶苦恨遲。三州稱製錦。七耋報騎箕。
朱紱傳家遠。靑山相地宜。世緣歸大夢。薤露謾增悲。
이도(李蒤) 1593년(선조 26) 서울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소(子韶)
아버지는 참봉 세량(世良)
광해군(光海君) 10년(1618) 생원시 합격
인조 26년 자여도찰방(自如察訪)이되었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李察訪 蒤
早知名下士無虛。傾蓋于今十載餘。原憲終貧空菽水。鄭玄強記富詩書。
一官祿位天何嗇。七耋光陰病未除。自古文章憎命達。最憐身後寂門閭。
하홍도(河弘度)1593년(선조 26)∼1666년(현종 7). 하동 옥종(河東 玉宗)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중원(重遠), 호는 겸재(謙齋).
아버지는 하광국(河光國)이며, 어머니는 강양이씨(江陽李氏)로 이광우(李光友)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고현(古賢)과 같이 되겠다는 큰 뜻을 가지고 벽에 겸괘(謙卦)의 단상도(彖象圖)를 그려 놓고 스스로 ‘겸재’라 하였다.
몸과 집을 엄정하게 다스려 촌부(村婦)들의 경박한 행동이 있으면 노복을 시켜 한 우물을 먹지 못하게 하였고, 이웃사람 중에 강상(綱常)의 죄를 범한 자가 있으면 그곳을 지날 때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처음 성균관의 유생이 되어 동료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광해군의 실정을 개탄하여 벼슬길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와 오로지 경사(經史) 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여러 차례 불렸으나 사양하고 암천(巖泉)의 산재(山齋)에 살며 학문에만 힘썼다.
1662년(현종 3) 어사 남구만(南九萬)이 안계(安溪)로 그를 방문하여 앞서 조정에서 있었던 예론(禮論)을 토의한 뒤, 그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여 현종에게 아뢰어 후한 상을 하사하였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고 끝내 받지 않았다.
또한,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일월성신(日月星辰)의 도수를 추정하여 시행되는 역법(曆法)을 시정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겸재집》이 있다.
宗川書院奉安文 李元禎
伏以眷玆嶺南。俗醇詩禮。仁賢率敎。自羅而麗。我朝有大。文昌運啓。惟晉一邦。僻在遐裔。脩名景行。接武長弟。薰沈響絶。嗟今幾歲。有覺先生。奮起叔世。不煩師誨。此志已銳。幼而矜持。長益砥礪。德尙直方。行本孝悌。道以身殉。學由心契。二儀錯綜。萬事根柢。理何不窮。疑則必稽。探索之勤。明辨之晢。篤于踐履。深於造詣。勑目雖頻。守操愈勵。驥蹄未展。鴻逵竟滯。何生之豐。而施之泥。一統久紊。萬口拑制。片言破綻。不威而厲。世敎是扶。後學是惠。惟此鄕井。杖屨所憩。遺風如昨。宛若奉袂。淸廟旣搆。華名隨揭。士樂敦事。工思殫藝。載涓吉辰。亦蠲牲醴。禮儀洋洋。縫掖濟濟。弘我佑我。永世無替。
권이급(權以伋) 1596년(선조 29)~1660년(현종 1) 서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중(師中)
조부는 찰방 권경호(權景虎) 아버지는 우봉현령 권순(權淳)
인조(仁祖) 5년(1627) 생원시 합격.
인조 17년 천거로 사산감역이 되고, 1648년(인조 26) 금정찰방(金井察訪)이 되었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權察訪 以伋○庚子
識面雖遲世義深。燕京歸路便開襟。一官潦倒身全老。萬事蹉跎病又侵。
劒合重泉終繾綣。氈傳嗣子豈淪沉。鴒原至痛須休問。想見王猷擲地琴。
조수익(趙壽益) 1596년(선조 29)∼1674년(현종 15). 여주(驪州)
본관은 순창(淳昌). 자는 사정(士靜), 호는 만한(晩閑).
아버지는 직(稙)이며, 어머니는 서애 류성룡(柳成龍)의 딸이다.
1624년(인조 2)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이듬해 세마(洗馬)가 되었다. 찰방으로 오른 뒤 163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간원정언을 거쳐, 1635년 평안도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피고 돌아와 다시 정언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扈從)하였으며, 인조가 다시 강화도로 가려고 할 때 채유후(蔡裕後)와 더불어 적에게 발견될 위험이 있다 하여 이를 만류하였다.
최명길(崔鳴吉) 등이 주화론을 제창하자 끝까지 싸울 것을 삼사와 더불어 극간하였으며, 이듬해 헌납을 거쳐 이조좌랑·부수찬을 역임하였다.
1638년에는 이조정랑에 올랐으며, 이후 다시 언관직으로 돌아와 응교·집의·사간을 지냈다.
1645년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사은 겸 주청사(謝恩兼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연경에 다녀온 뒤 동부승지를 거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이어 경직(京職)으로 복귀하여 대사간·부제학·대사성 등을 지낸 뒤 1651년(효종 2)에는 이조참의로서 《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다시 대사간이 되었으며, 이어 대사성·대사헌·이조참판·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660년(현종 1) 호조참판을 지내고 이듬해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이때 예론(禮論)이 일어나 남인과 서인의 대립이 본격화하자 남인인 권시(權諰)·조경(趙絅)을 비호하는 소를 여러 차례 올렸다.
1663년 병조참판으로 전임되었으나, 남인의 실세(失勢)를 보고 스스로 사직하였다.
이듬해 다시 한성부우윤으로 재기용되었고, 형조·예조참판, 한성부좌윤을 역임한 뒤 1674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판서에 추증되었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趙參判 壽益
妙歲聲華冠搢紳。厓門宅相有斯人。三朝經幄陪興運。十載江湖作逸民。
時宰莫能容直道。聖君猶未替恩綸。偏傷先執凋零盡。題罷哀詞淚滿巾。
목성선(睦性善) 1597년(선조 30)∼1647년(인조 25). 서울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성지(性之), 호는 병산(甁山).
아버지는 장흠(長欽)이다.
1624년(인조 2) 유학(幼學)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625년 검열(檢閱)이 되어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문제로 찬축(竄逐)되어 있던 인성군(仁城君) 공(珙)이 죄가 없다는 소를 올려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뒤 봉교(奉敎)·정언(正言)을 지냈으나 앞의 상소문제로 양사(兩司)의 탄핵을 계속 받아 체직되었다.
1629년에 예조정랑이 되었으나 대간들의 계속된 탄핵으로 중앙에서 밀려나 죽산현감(竹山縣監)으로 나아갔다. 그곳에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치적을 쌓아 1634년 경기암행어사로부터 훌륭한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뒤 1638년 다시 부교리를 거쳐 집의(執義)·교리·우승지·동부승지·좌승지·전라감사·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47년 전라감사로 있었을 때 치적을 인정받았던 그는 남쪽지방이 불안하여지자 경상도감사로 제수되어 그곳에 도착한 뒤 곧 죽었다.
그가 인성군 공을 두호한 것은 파당을 초월한 것으로서, 단지 왕의 처사를 올바르게 하기 위한 직언이었다는 것이 인조에게 평가되어, 대간들의 많은 논핵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무난하게 관계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능력과 기량을 갖춘 재능있는 관료라는 평가를 받았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睦監司 性善○戊子 1648년(인조 26)
家世傳儒素。山河孕淑精。蜚英當盛際。緩步會明庭。直諫霜凝筆。高譚刃發硎。頹波識砥柱。前席講遺經。三路恩威著。雙碑父子名。生前無甔石。身後有螟蛉。緬昔吾王父。惟先大亞卿。襟期玉雪泂。出處枯榮幷。先子與吾丈。知心卽弟兄。六年先後長。半世爾余情。哀樂須臾促。存亡曩日驚。登龍雖阻迹。仰斗尙深誠。攬轡行初駐。趨軒計未成。旋聞嬰疾恙。豈意夢瓌瓊。宸極悲亡鑑。儒林痛失型。星軺變素幔。玉節換丹旌。江漢歸魂泣。嶠雲去路暝。不亡應有氣。爲國壯藩屛。
민응협(閔應協)1597년(선조 30)∼1663년(현종 4). 서울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인보(寅甫), 호는 명고(嗚皐). 영(韺)의 아들이다.
1633년(인조 1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지평을 역임하고, 1635년 홍문록에 올랐다.
1638년 필선·사간·수찬·장령·교리를 거쳐, 1644년 광주목사가 되어 외직으로 나아갔다. 다음해 내직으로 다시 돌아왔으나 이내 접위관(接慰官)으로 동래에 파견되어 왜신 접대를 수행하였다.
그 결과 1646년 동래부사가 되었으며, 부사로서 형률 집행에 매우 근엄하고, 모든 일을 잘 처리하여 크게 명성을 얻었다.
이때 왜관(倭館)의 담이 헐리자 왜인들이 이를 이용, 왜관을 넓혀줄 것을 강청하였으나, 그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그들의 세를 꺾었다.
1649년 동래부사에서 안변부사로 전임하였으며, 이듬해 경상감사가 되었다.
그뒤 내직으로 들어와 대사성·대사간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653년(효종 4) 왕조실록을 춘추관과 사사고(四史庫)에 분장(分藏)할 때 어명으로 5인 중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이를 보살폈다.
1655년 도승지가 되고, 다음해 함경감사를 거쳐, 1657년(효종 8) 강화유수를 역임하였다.
그뒤 다시 대사성·대사헌·병조참판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663년(현종 4) 대사헌의 직을 사퇴하고, 그해에 죽었다.
歸巖先生文集
祭文
祭大司憲閔公 應協 文 乙巳 1665년(현종 6)
嗚乎。士之於世。生而無怍於心。死而不虧其名者固難也。生而人皆愛慕之。死而衆共悼惜焉者尤難也。生而士林倚而爲重。死而後學無所考德者。此又難之尤難者也。先生一身之存亡。而向所謂三難者並焉。則吾不暇爲公慟。而直爲世道慟也。嗚乎。昔吾外祖早結秦晉之好。亦粤先君深托魯衛之情。不天孤露。夙遭愍凶。公常以不忘故人之念。款款於故人之子。小子又以追慕先君之心。惓惓於先君之友。恩深情篤。父事子視。山頹樑折。形孤影隻。則又不暇爲世道慟。而直爲吾私慟也。嗚乎。慈詳愷悌之德。寬裕溫毅之度。淸癯金玉之相。簡潔氷檗之操。不復見於今之世矣。若其守己之靜專。接人之誠愨。莅官之廉謹。處事之周詳。特公之餘事。而至如玉署銀臺之踐履。薇垣柏府之歷敭。留藻鑑於銓衡。宣德化於方岳。曾何足爲公之輕重也耶。蜚英盛際。名益顯而心益恭。重厄湘纍。身則困而意則閒。體若不勝衣而事功未始不擧。言若不出口而涇渭自爾立辨。此豈多見於人者哉。而若公猶欿然未肯以自大也。六十七歲之光陰。雖非大耋之壽。二子一孫之顯揚。實是希世之慶。末胤之才之學。亦將大有所成就。庭植三槐。門容駟馬。則可見其不大施於身者。必有以食厚報於後也。又何遽戚戚於公之亡耶。嗚乎。惟公孝友之刑於家庭。忠信之驗於蠻貊。平生出處大致。立朝事業始終。自有國乘存焉。况形容盛德。以圖不朽者。世必有其人。小子何敢誄公乎。始廢伏於鄕關。旋佩綬於湖邑。歿不憑棺。葬未執紼。此生之恨。豈其涯哉。而滔滔者歲月。朞已再周矣。一酌之奠。始在今日。倘尊靈其肯恕余之罪而諒余之衷曲也耶。
도신수(都愼修) 1598년(선조 31)∼1650년(효종 1). 대구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영숙(永叔). 호는 지암(止巖).
악재 서사원(徐思遠). 한강 정구(鄭逑) 문인
1624년(인조 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7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함흥수령으로 재임할 때 공무를 신속히 처리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며, 만년에는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달성의 용호서원(龍湖書院)에 배향되었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止巖都公 愼修○辛卯 1651년(효종 2)
先子平生友。惟公分最冞。論心眞莫逆。鍊業慣相隨。夜榻連衾日。春郊慶席時。世緣歸大夢。人事適深悲。孝友人無間。忠良衆所推。英聲當日洽。文學妙年期。鴈塔題名早。鵬程闊步遲。北關初製錦。南嶺再分麾。未展霜蹄騁。先催隙駟馳。朱幡變素翣。紫海返靈輀。堂有王孫母。庭留謝氏兒。善人今已矣。天道柰如斯。自顧頑愚質。多蒙厚誼規。齠年資警誨。塵世幾睽離。襲馥心常醉。尋羶腹不飢。高風無處覿。長慟有誰知。抱病違臨穴。無文強寄詞。猶欣諸玉樹。佇見大門楣。
祭止巖都公文 辛卯
嗚乎哀哉。先務功公。德積于躳。身未有施。食報宜隆。胚胎前光。篤生我公。充然其氣。粹然其容。望之嶷嶷。卽之雍雍。孝悌爲主。忠信自持。龍門執經。鯉庭誦詩。修之旣吉。華聞乃隨。蜚英藝苑。科名摘髭。高鶱鵬翼。特秀桂枝。才優製錦。南北分憂。咸爲名都。蔚是大州。吏畏民懷。威行惠流。來暮興謠。去思有碑。運値出震。職除儒師。爲親奉檄。嶺海千里。反哺深誠。榮達外事。萱華向晩。一懼一喜。春暉未報。朝露先晞。民心如喪。行路沾衣。矧我情親。何以堪悲。哀哀旅櫬。慘慘潘輿。返自海國。來指鄕閭。靈辰莫駐。若堂載封。天胡漠漠。理何夢夢。儀容雖閟。典刑嗣世。龍三范室。多材多藝。荀五韓苑。善述善繼。是爲不死。又何深恫。念吾先君。惟曁我公。夙歲交遊。道合志同。山齋鍊業。蕭寺做工。麗澤胥資。德業相礱。於鄕於京。在竆在達。情均骨肉。分深膠漆。余因奉袂。粤自齠齔。玆身積釁。早遘愍凶。公視猶子。我依卽翁。奉以周旋。百歲爲期。那知一夕。天不憗遺。年來人事。適增悽怛。先人舊執。相繼淪沒。存其有幾。惟公尙康。惟德之厚。宜壽之長。何神之酷。而奪之忙。顧瞻今世。我其靡倚。孤危蹤跡。動輒顚躓。疑從何質。過賴誰庇。興言及此。不禁哀淚。賤疾沈綿。已閱數月。尙難出門。况堪臨穴。殮不憑棺。葬未執紼。負愧幽明。無辭可飾。生固有涯。恨其曷極。玆因迷弟。敬陳泂酌。奠雖代躳。哭不借聲。靈如有知。庶歆鄙誠。
류원지(柳元之) 1598년(선조 31)∼1678년(숙종 4). 안동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경현(景顯). 자는 장경(長卿), 호는 졸재(拙齋).
영의정 서애 류성룡(柳成龍)의 손자로, 장령 여(袽)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군자감정 세찬(世贊)의 딸이다. 조부와 숙부 수암 진(袗)에게서 수학하였다.
일찍이 황간·진안 등지의 현감을 역임하였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안동 지방의 의병장 수은 이홍조(李弘祚)와 함께 활약하였다.
학문에 열중하여 사서오경과 제자백가에 능하였으며, 특히 성리(性理)·이기(理氣)·상수(象數)·천문·지리·예설 등에 통달하였다.
이기설에 있어서 주로 퇴계의 이발기발설(理發氣發說)에 동조하는 입장을 취하고 율곡의 설을 반박하였으며, 예설에 있어서는 효종의 복상문제(服喪問題)에 송시열(宋時烈)이 의정(議定)한 기복제(朞服制)를 부인하고 3년설을 주장하였다.
안동의 화천서원(花川書院)에 봉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졸재집》 14권 7책이 있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柳拙齋 元之 1678년(숙종 4)
三韓千載挺儒賢。人免爲夷國以延。詩禮當年庭有訓。聲華少日世無肩。
身將道屈休言理。命與時違柰彼天。湖外逢迎成永訣。哀詞題罷涕漣漣。
이진(李袗) 1600년(선조 33) 서울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회(子晦), 호는 고산(孤山)·포산(匏山).
양주목사 창정(昌庭)의 아들이다.
1635년(인조 13)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37년에 정언이 되었으나, 홍문관에서 양사가 언관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다 하여 대사헌·대사간과 함께 체차(遞差)되었다가 다시 정언을 거쳐 지평에 올랐다. 이후 부교리·수찬을 지내고, 세자시강원문학이 되어 1643년 8월 청나라 태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고애사(告哀使)로 심양에 다녀왔다.
1645년 3도의 조세운송 등을 독촉하고 감독하기 위하여 각 도에 독운사(督運使)를 파견할 때에 호서어사(湖西御史)에 제수되었고, 이재(吏才)가 있다는 이조의 수망(首望)을 받아 수찬이 되었다.
1649년 사간이 되어 사간원의 다른 관원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독단으로 일을 처리한다는 간원의 탄핵으로 체차되었으나, 다음해 도목정사(都目政事)에 의거하여 충원현감에서 부수찬으로 제수되었다.
그러나 비변사에서 그의 충원현감으로서의 치적과 출대(出代)의 시기가 농번기라는 점 및 한황(旱蝗)이 겹쳤다는 이유를 들어 충원현감에 유임시킬 것을 간청하여 허락되었다.
1654년(효종 5) 교리로 김홍욱(金弘郁)의 특사를 청하는 상소에서, 왕자로서의 치정(治政) 및 당시의 우의정 심지원(沈之源)과 이조판서 정유성(鄭維城)이 인척으로서 전형(詮衡)을 좌우하는 폐단을 논하였다. 이후 집의·사간·부응교·세자시강원보덕 등을 거쳐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나아가 백성들에게 회부향미(會簿餉米)를 나누어주었다.
1660년(현종 1) 동부승지·병조참의·병조참지를 거쳐 다음해 예조참의로 청나라 세조(世祖)의 죽음에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의 일원으로 연경에 다녀왔다.
1663년 대사간으로 균역을 위한 양전(量田)의 개선책을 상계하여 시행하게 되었다.
즉, 양전은 지품(地品)을 등급으로 나눔으로써 민역(民役)을 균등하게 하되, 땅의 비옥도를 살펴 등급을 정하여야 한다고 역설하고, 아울러 양전에 있어서 엄격한 등급의 구분보다는 결부(結負)의 증가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병조참의·호조참의 등을 두루 거쳐 1667년 도목정사에 의하여 강원감사로 나아갔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李觀察 袗
美價南金重。高名北斗懸。簪纓傳素業。詩禮續靑氈。棣萼難爲弟。瓊枝總是賢。厲廉回濁俗。耽學考遺篇。供奉銀臺詔。優遊玉署筵。承流周召伯。納約范忠宣。誠著羣臣表。恩霑近侍先。分憂湖嶺外。留愛峴山邊。霜肅乘驄府。春明種秫田。門常稀馬迹。豆不掩豚肩。謂有神明佑。云胡疾病纏。荊枯哀未已。蘭襲痛無緣。幸賴孤兒在。方期積慶緜。樑摧纔半月。蕙折奄重泉。顚倒天難必。幽冥鬼亦偏。通家三世誼。撤席廿年前。忽忽悲歡促。悠悠聚散牽。音塵時阻闊。講肆互翩旋。尙憶曾陪杖。何由更執鞭。平生知己感。題挽淚如川。
최문활(崔文活) 1600년(선조 33)∼미상.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달원(達源).
조부는 경상(景祥), 아버지는 기벽(基鐴)이다. 1630년(인조 8)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6위로 급제했다. 이때에 동생 최문식(崔文湜)과 함께 급제하여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관직은 금교찰방. 공조정랑. 함경도사. 예조정랑. 현종 5년 함안군수(咸安郡守)로 나갔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崔咸陽 文活
由來厚義薄夫敦。發藥曾蒙辱一言。奉對鯉庭詩與禮。題名鴈塔弟幷昆。
金章隨處仁聲洽。玉樹傳家善慶繁。莫怪區區哀悼切。先君同榜幾人存。
김시성(金是聲) 1602년(선조 35)∼1676년(숙종 2)
본관은 청도(淸道). 자는 문원(聞遠), 호는 금포(錦浦),
손처눌(孫處訥)과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배웠다.
1636년(인조 14) 별과에 급제하여 주사랑이 되었다. 이듬해 익위사익찬으로서 병자호란의 결과 심양으로 끌려가게 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배종하여 심양에 간 후 3년 동안 충의로 섬겼다. 1639년 귀국 후 호분위사과가 되었고, 이듬해 황주판관이 되었다. 1644년(인조 22) 용천부사에 이어 이듬해는 강계부사가 되었다. 1648년 감경남도병사, 1649년 충무위부호군, 1651년 경상좌도병사, 1652년 회령부사, 1655년 훈련원도정, 1656년 함경북도병사, 1657년 포도대장, 1662년 삼도통제사가 되었다. 그후 금위좌별장, 춘천부사 등을 역임했다.
금포실기(錦浦實紀)
* 귀암선생에게 보낸 답장이 있다(答李承旨[元禎])
이완(李浣) 1602년(선조 35)∼1674년(현종 15). 서울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징지(澄之), 호는 매죽헌(梅竹軒).
인조반정공신 수일(守一)의 아들이다.
1624년(인조 2) 무과급제. 병마절도사. 한성우윤. 포도대장. 훈련대장. 공조판서. 형조판서.
한성판윤. 병조판서. 수어사. 우의정 역임. 시호는 정익(貞翼)이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李右相 浣 1674년(현종 15)
間氣生人傑。名門積慶隆。穿楊傳妙技。投筆慕長風。偉略滄溟窄。高才宇宙空。氷壺元自勵。書史儘旁通。玉帳煙塵靜。銀臺雨露融。羽林監猛士。樞府作元戎。密勿無遺策。勤勞敢愛躳。莊嚴威可畏。卓犖氣愈充。美讓違司馬。平章屬匪熊。民心須緩急。朝議仗公忠。星隕驚邦瘁。樑摧隱聖衷。金城悲掃堞。梅鼎想銘功。石畫餘緘血。雄圖未掛弓。鴻泥看渺渺。駒隙恨怱怱。素紼川原外。哀詞涕淚中。公私不盡慟。無路問蒼穹。
정태화(鄭太和) 1602년(선조 35)∼1673년(현종 14). 서울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유춘(囿春), 호는 양파(陽坡).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5대손으로, 형조판서 광성(廣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좌의정 치화(致和)와 예조참판 만화(萬和)의 형이다.
1624년(인조 2)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 162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영의정을 지냈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뒤에 忠翼으로 바꿈.).
歸巖先生文集
詩
挽鄭領相 太和 1673년(현종 14)
屈指吾東碩輔良。首稱文翼又林塘。高追二祖光愈烈。歷相三朝道益昌。喬嶽泰山元靜鎭。瑞芝威鳳自休祥。怡怡壇宇寬仍妥。凜凜神觀抑若揚。白面已專經濟望。靑雲無礙利名場。明廷獻替聲華聳。方岳旬宣惠澤長。盤錯試餘知器業。艱屯過後際平康。班陞鼎鼐羣僚冠。身係安危兩紀強。折屐圍棊推雅量。垂紳正笏領頹綱。門欄燀爀傾今古。王謝風流愧頡頏。拚桂紫宮衣並綵。調梅黃閣鴈成行。庭前玉樹看趨鯉。樓上瓊簫喜引凰。五福人間公最備。三尊天下孰能當。廬陵釋位身猶健。魏國忘私病不妨。共訝木氷新作稼。誰知薤露遽晞陽。台躔夜報天光坼。箕宿晨驚縹氣彰。未涉江河先去楫。將支廈屋忽摧樑。宸衷痛衋絲綸切。朝士咨嗟涕淚滂。適是去來關運會。休言疾病在膏肓。南城曉月靈車遠。回首槐陰尙鬱蒼。
祭鄭領相 太和 文 1673년(현종 14)
嗚乎。自古長治久安之國。値艱危憂恤之會。則必有世德積慶之家。克生才猷忠智之人。于以鎭國勢而延國脈。于以濟民生而固民心。使天意不懈於眷佑。邦運獲保於靈長。公朝之祿。私家之福。相與之終始。此豈偶然哉。恭惟相國。篤生仁賢之門。際會淸明之朝。當邊事危急之秋。早著籌策之良。逮朝紳疑懼之日。大有保護之功。遂總百揆。歷事三朝。佩國家之安危。任朝野之休戚者。垂于玆三十年矣。默運神機。丕贊王猷。入告我后于內。出乃順之于外。動而未見其有爲。而功利之及物者博。靜而不果於作事。而德施之入人者深。譬則泰山喬嶽。無意鎭壓。而倚之爲重者不在佗。長江大海。不事浸灌。而資之爲澤者必於是。棟樑支廣廈而自不至於傾撓。舟楫濟巨川而終以免於胥溺。則公之生世。非由於天之意乎。天之生公。非所以幸國家乎。嗚乎。洪鍾大鏞。是其器也。淵涵瀆渟。是其量也。景星之煌煌。是其高明也。和風之習習。是其氣像也。四世五公。方之袁氏而有加。衆子諸孫。可與郭公而齊稱。黃扉赤舃。昆仲迭居。帶犀衣緋。元季並美。豈獨今世之所未聞。抑亦往乘之所絶無。而儉約退巽之戒。每篤於燕申之中。持循謹飭之操。不弛於造次之頃。位益尊而心益下。有若無而實若虛。惟其種德之旣厚。是以食報之不嗇。則福善之理。果可誣乎。若其超卓之識。動合機宜。邃遠之智。逆覩未萌。邦家賴以解棼。鄰敵以之戢禍。人所不可幾及。而公猶未肯自多者。自有國人之耳目。史家之載錄。何待小子之一二談耶。論事廟堂。有如燭照而龜卜。敷對前席。不啻條暢而理達。攀援古事。損益時宜。調劑震撼之力。日用而不知。解舒盤錯之效。歲計而有餘。求之今世。如公者幾人哉。曾忝疏決之任。猥廁諸彥之後。簿書疑亂。几閣盈溢。雖自謂練達通敏之才。莫不有蓬心駭矚之憂。而公獨瞥眼暫過。片言卽析。泛應曲當。河決駟馳。滿座斂容於下風。四聰傾耳於巍論。此又古罕今獨。而不足爲相公之輕重者也。嗚乎。念昔壬午之歲。吾先君以疾退休已有年矣。惟時相公。以嶺南之節。訪于鄕曲。各紓雲樹之戀。穩吐宿昔之懷。載言載笑。竟晷竟夕。蓋其同席之分。初非泛交之比也。洎余登朝之後。猥蒙一顧之恩。出入門牆。多歷年所。都尉赴燕之歲。叨膺副貳之命。聯駕比軒。共賞原隰之勞。傾情倒意。遂結骨肉之懽。因將愛都尉之心。益勤慕相公之德。奉以周旋。將期百年之莫違。何天不弔。奄然一老之不憗。嗚乎痛哉。此何爲哉。龍亡大澤。虎逝深山。民其誰庇。國將疇倚。邦無蓍龜矣。士失典型矣。朝家有大事。其孰從而咨之。聖主有大疑。又孰從而稽之。天乎天乎。已矣已矣。古人所謂上而爲邦家慟。下以哭吾私者。正爲小子今日道也。靈辰不留。若堂已卜。一聲長號。萬古永訣。伏惟尊靈。庶賜降格。
남노성(南老星) 1603년(선조 36)∼1667년(현종 8). 서울
본관은 의령. 자는 명서(明瑞), 호는 운곡(雲谷).
아버지는 생원 호학(好學), 어머니는 안동 김씨로서 상용(尙容)의 딸이다.
1631년(인조 9) 황감제(黃柑製)에서 3위,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전을 받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34년 검열이 되고 봉교를 거쳐 1636년 정언으로 문과중시에 갑과로 급제, 교리가 되었다.
1638년 수찬이 된 뒤 지평·이조좌랑·문학·이조정랑·사인·집의·보덕·응교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647년 동부승지, 1650년(효종 1) 대사간·승지 등을 거쳐 이듬해 이조참의가 되었다.
1657년 함경도관찰사가 되고, 1659년(현종 즉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개성유수가 되었다.
1661년에 동지의금부사, 1664년에 병조참판·호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다시 동지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南參判 老星○戊申 1668년(현종 9)
長陵昔造士。衎衎漸鴻逵。先子洎丈人。聯翩步玉墀。生年同癸卯。氣味乃相宜。芝蘭如入室。孰云路多歧。薄劣叨世義。磊落欽風期。夤緣陪杖屨。實荷先後之。平生許與分。海岳尙可移。丈人從政初。朝廷多蓍龜。翰苑得俊才。良史波濤馳。天官水鏡稱。選道公於斯。是以有譽處。多士共伸眉。中書與集賢。國論動見推。屢陞考功堂。出擁朔方麾。排風北溟翼。歷塊崑崙姿。雲雨喜翻覆。世路晩還崎。昔賢貴中淸。剛標豈磷緇。悠悠任薄俗。炯炯憂明時。獨步四十年。肯自投卑卑。竟孤朝野望。此理吾問誰。作善知有報。餘慶在孤兒。
도신여(都愼與) 1605년(선조 38)~1675년(숙종 1) 대구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명숙(明叔), 호는 휘헌(撝軒).
아버지는 여유(汝兪)이며, 어머니는 여흥이씨(驪興李氏)로 우겸(友謙)의 딸이다. 종숙 성유(聖兪)에게 입양되었으며, 정구(鄭逑)·서사원(徐思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5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창락찰방(昌樂察訪)·성균관전적·사헌부지평·예조좌랑·용담현령(龍潭縣令) 등을 역임하였다. 1659년 예조정랑에 재임하면서 자의대비(慈懿大妃) 기년복(朞年服)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사직하였다. 이듬해 다시 예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이때 또 기년설을 반대하는 소를 올려 황간으로 유배되었다. 1675년 숙종이 즉위하자 다시 기용되어 성균관사예를 지냈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都撝軒 愼與 1675년(숙종 1)
鄕鄰契義夙相親。幾踵龍門接後塵。棣萼輝連聲望赫。貂蟬官貴寵光新。
八旬壽享人間福。一子才稱席上珍。千里無由雞酒奠。不堪回首倍傷神。
휘헌선생문집 (撝軒先生文集)
*귀암 선생이 보낸 편지 귀암집에는 미수록
懸慕政勤。遠札遽辱。就審政候啓居有相。禎喪患憂患。戚戚無悰。思歸未歸。一味愁苦。紅塵有力一至此哉。只自憐歎而已。金述初以殿最評峻。至於被拿。而因極擇其代之敎。閣叔偏蒙其害。世道至此。謂之柰何。稍待凉生。定計還鄕。儻値休暇之時。又洪汝河天以黃溪爲嶺之長沙。尊烏得獨逭其數。伏歎且呵。伏惟冬寒斗緊。尊寓屨起居神相。傾泝切切。頃擬趨拜。緣有經紀改厝之擧。玆未果意。今復退定臘月。其前當往還中山。轉抵寓下。是計。
엄정구(嚴鼎耈) 1605년(선조 38)∼1670년(현종 11).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중숙(重叔), 호는 창랑(滄浪).
동지중추부사 황(愰)의 아들이다.
1630년(인조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의 권지(權知)에 보직되고 예절이 밝아 인조의 사랑을 받았다. 정언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 때에 시강원설서로 남한산성에 왕을 호종하였다.
이듬해 돌아와 지평이 되고 1638년 충청도염문사(忠淸道廉問使)를 거쳐, 수찬·평안도도사에 이어 다시 수찬·의성현령·부교리·지평·교리·헌납 등을 역임한 뒤 1647년 이조좌랑에 올랐다.
1649년(효종 즉위) 응교를 거쳐, 집의로 있을 때 붕당조성을 비호하였다는 혐의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서용되었다.
1651년(효종 2) 좌승지로 재직중 김자점(金自點)이 처형되고 그 일당이 제거될 때 평소 그와 안면이 있다 하여 극형을 선고받았으나 좌의정 한흥일(韓興一)이 과거 전랑(銓郞)으로 있을 때 김자점 일당의 천거를 거부한 사실을 들어 구명을 호소하여 면천에 부처(付處)되는 것으로 그쳤다.
그뒤 등용되어 태복시정(太僕寺正)·홍문관교리를 거쳐 승지에 오르고 한성부좌윤에 이르렀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嚴左尹 鼎耉 大夫人
庭萱寂寞薤歌傳。寒雨凄風暗舊阡。嘉錫已膺封誥寵。貞儀早配大夫賢。
共榮烏哺三牲養。猶慰猿膓九曲煎。忍見門前來弔鶴。白頭啼血最酸然。
*挽嚴左尹 鼎耉○庚戌 1670년(현종 11)
昔際文昌會。長陵造士時。丈人早發軔。羽儀進鴻逵。先君聯步武。歲晏指襟期。出處顚沛間。切磨又箴規。小子叨世分。猥荷不鄙夷。公憐我孤露。感舊幾增悲。我服公厚誼。踵門每恨遲。情好仍特地。海嶽謂可移。憶公策名初。偏承聖主知。臺端頻獻替。經幄佇論思。天曹郞宿煥。中書筆硯推。名論傾前輩。行藏璧無玼。平生才與學。從此可大施。霜蹄展未半。世路値多崎。不容亦何病。末俗任澆漓。宿痾縱彌留。神精尙未衰。屬我奉璧日。黯然惜分離。薊門三千路。音容夢依依。歸來鴨水畔。凶問信兼疑。神明謂保佑。天何不憗遺。山河斂淑氣。吾黨失蓍龜。幽儀動薤露。親朋集素帷。危蹤獨閉戶。無由送靈輀。存亡今已闊。一哭鬢千絲。
정시걸(丁時傑) 1606년(선조 39)~1670년(현종 11) 서울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대로(大老) 호는 관운(觀雲),
아버지는 증 승지 언규(彦珪)
1643년(인조 21) 학행으로 童蒙敎官이 되고 사헌부감찰. 창녕, 영광, 현감 (昌寧, 靈光, 縣監) 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의 금부도사(義禁府都事),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을 지내고, 稷山縣監 平壤判官, 龍仁縣令 등을 지내고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에서 加平郡守로 나갔다
아들 昌燾가 감사가 되어 嘉善大夫에 戶曹參判에 증직되었다. 「丁氏述先錄」을 지었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丁加平 時傑 1670년(현종 11)
少日文名擅席珍。長程闊步竟無伸。銀章莅郡仁聲洽。玉樹傳家瑞色新。
靑眼逢迎情最密。碧蹄留別迹成陳。賢郞早結平生好。哭向靈輀倍愴神。
홍주원(洪柱元) 1606년(선조 39)∼1672년(현종 13). 서울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건중(建中), 호는 무하당(無何堂).
대사헌 이상(履祥)의 손자로 예조참판 영(靈)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좌의정 월사 이정구(李廷龜)의 딸이다. 외할아버지와 김류(金瑬)로부터 수학하였다.
1623년(인조 1) 선조의 딸 정명공주(貞明公主)에게 장가들어 영안위(永安尉)에 봉하여졌다.
1647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가서 시헌력(時憲曆)을 구입해서 귀국, 새로운 역법의 시행을 건의하였고, 1649년(효종 즉위) 고부청시청승습사(告訃請諡請承襲使)로, 1653년 사은사로, 1661년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각각 청나라를 다녀왔다.
천성이 온순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형제간에 우애가 두터웠다. 또한, 문학을 즐기고 선비들과 명승지를 찾아 놀기를 좋아하였으며, 특히 조석윤(趙錫胤)·박장원(朴長遠)과의 우정이 깊었다.
저서로는 《무하당집》 6권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歸巖先生文集
祭文
祭永安尉洪公 柱元 文 1672년(현종 13)
嗚乎哀哉。人亦有言。福履難備。食厭三牲。罔或高位。踏遍九級。未必多子。多子皆賢。高位无陂。求古亦罕。在今誰是。兼而有之。公獨能此。持盈以謙。宜受厚畀。善豈無驗。始信此理。家傳詩禮。世植圭璋。月沙宅相。慕堂義方。亦粤先公。垂緖彌昌。公繩厥武。有蔚其章。南金價溢。北闕名懸。釐降之命。聖祖是宣。休休雅量。燁燁脩娟。荀羨退巽。竇固好賢。翩翩濁世。華譽誰先。延賓下士。酒罍詩篇。平生行樂。世莫與肩。壽近七耋。慶耀三槐。肅雝偕老。琴調瑟諧。終迺全歸。而又何哀。秖是一恨。玉樹先摧。理不可極。情宜自寬。泉路逢迎。倘同人間。撫頂造膝。應敍悲歡。興言及此。况也永嘆。念我踈慵。猥荷不鄙。忝拜軒屛。今幾年矣。時屈高車。寔推世誼。冥行屢躓。多忤寡與。諒余樸愚。公獨不拒。謬辱奬許。實感心膂。煩冗旣牽。陋居且僻。恒勤慕義。間阻襲馥。公不替眷。我則負德。殮未憑棺。窆已卜宅。崇朝相望。一哭未展。環顧平昔。寧不靦面。挽轝祖道。敬陳菲奠。文不盡言。心有餘悲。尊靈不昧。庶幾格思。
이광규(李光圭) 1607년(선조 40)~1653년(효종 4) 상주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울장(蔚章)
아버지는 문간공(文簡公) 창석(蒼石) 이준(李埈)
인조(仁祖) 26년(1648) 생원시 합격
歸巖先生文集
詩
挽李進士 光圭○癸巳 1653년(효종 4)
家庭傳素業。詩禮襲靑氈。強記今元順。談經古鄭玄。承華人恐後。馳譽孰居先。十五年前拜。尋常夢裏懸。知心契三世。司馬榜同年。禍福休言理。竆通莫問天。霜蹄期萬里。玉樹遽重泉。辜負生蒭奠。不堪涕潸然。
이괴(李襘) 1607년(선조 40)∼1666년(현종 7).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방(子方).
경종(慶宗)의 증손으로, 조부는 주(澍)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창정(昌庭)이며, 어머니는 이응명(李應明)의 딸이다.
1631년(인조 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대교 등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세자시강원사서로서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인질로 청나라에 갈 때 따라갔다. 이때 심양에서 채유후(蔡裕後)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중국의 시인 유신(庾信)이 지었다는 애강남부(哀江南賦)를 읊으며 서로 통곡한 일이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돌아온 뒤에 벌을 받아 일시 파직되었다.
청군에 의하여 강화도가 함락되었을 때, 대신 윤방(尹昉)이 묘사제조(廟社提調)로서 신주를 분실하고 자기 몸만 피해 갔다 하여 이를 탄핵, 유배당하게 하였다.
그뒤 지제교·정언·지평·장령 등을 지낸 다음, 각 지방의 수령을 역임하고, 1648년 강릉부사로 있을 때 치적이 뛰어나 모범관리로 표창받았다.
그뒤 1664년(현종 5) 광주부윤(廣州府尹)을 끝으로 관직을 떠났다. 제주 귤림서원(橘林書院) 별사(別祠)에 제향되었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李府尹 襘○丙午 1666년(현종 7)
昭代蜚英自妙年。棣華聲價士爭傳。忝叨契義連三世。誰謂音容隔九泉。
隨處金章才已著。留庭玉樹慶應緜。傷心先執凋零盡。獨立秋風涕泗漣。
김구(金球) 1608년(선조 41)~1669년(현종 10) 예천(醴泉)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명수(鳴叟), 호는 설악당(雪嶽堂)이다.
1633년 사마시에 합격, 1644년 성균관에 들어가 장의에 추대되었다. 1653년에는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절하고 고향에 돌아가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수은 이홍조(李弘祚)·졸재(拙齋) 유원지(柳元之)· 반초당 이명익(李溟翼) 등과 교유하였다.
雪嶽堂先生逸稿
答李判書[元禎]
洛城一別。居然作隔歲顔範。嶺路悠悠。奉接似未易。如之何勿思。去時一書。果無洪喬之歎耶。仍審秋淸。旅履保重。遠慰遠慰。球命途崎險。遭服喪明。悲憂度日。少無寄世之况。柰何柰何。示中作客酸苦。徒以羈縻之欲。恒事困頓。切想高明。以盛年英銳之氣。蓄儲旣久。展步亨衢。有何難事。須勿損天和也。泮中爻象。近至何樣。疏中諸賢之觀光一款。斑駁有多云。士之出處。其亦難矣。重兄以講經連畫之故。朘出抄選。而近得如意否。
여효주(呂孝周) 1608년(선조 41)∼1654년(효종 5). 성주(星州)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달부(達夫), 호는 남계(南溪).
아버지는 제용감판관(濟用監判官) 여훤(呂烜)이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과 우복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도덕과 의리를 닦는 데 힘썼다.
1642년(인조 20) 식년시 생원과 진사에 각각 2등 11위, 3등 20위로 합격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일으켰지만 임금이 청나라와 화친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며 돌아왔다.
1645년(인조 23)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시문집으로 《남계집(南溪集)》이 전하는데, 병자호란 때 비분강개하며 지은 〈부강변(扶綱辯)〉과 삼학사(三學士)의 충절을 읊은 제문 등이 실려 있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呂南溪 孝周○乙未 1655년(효종 6) 소상시
氷霜標致繡心肺。學海工程自妙年。楚璞英華咸拭目。荊金聲價罕隨肩。
靈襟儘自天資得。雅韻寧容俗累牽。髦俊聯裾紛恐後。卿宰解榻最居先。
任他得失心愈確。外視竆通業益專。司馬科名非慶譽。寢郞官位又迍邅。
霜蹄猶許行將遠。隙駟還催病未痊。愷悌休言神所勞。文詞空見世爭傳。
斯人已死而誰與。賤子平生幸宿緣。連世交情眞莫逆。同場翰墨幾周旋。
懷書璇闕慚珠側。待詔金門愧粃前。白石題名今在矣。靑坡襲馥夢依然。
餘生忍向秦京道。陳迹行尋漢水堧。鄕黨鮮能推郢巧。踈慵無復奏牙絃。
奇才自古嗟無命。令德如何不弔天。報罷玉樓開紫極。憐深瓊樹閉黃泉。
人間朝暮孀慈望。地下悲歡胤子賢。賴有典刑紹素業。應知報施在靑氈。
新原䕺檟迎新候。舊宅蒔梅減舊姸。千古存亡從此闊。薤歌聲裏涕漣漣。
오정일(吳挺一) 1610년(광해군 2)∼1670년(현종 11). 서울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두남(斗南), 호는 구사(龜沙).
아버지는 관찰사 단(端)이다.
1627년(인조 5)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36년,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들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추진하자, 성균관유생으로서 반대하는 상소를 주도하였다가 성균관에서 축출당하였다.
1639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43년부터 1646년 사이에 정언·헌납·이조좌랑·사간·이조정랑 등을 거듭 역임하였다.
1645년 도당록(都堂錄)에 올랐으며, 164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한 뒤 집의·부응교·응교 등을 거쳐 1648년 승지에 이르렀다. 이어 황해도와 경기도의 관찰사 등을 지냈다.
1652년(효종 3) 자기집에 매부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였을 때의 일을 빌미로 일어난 옥사에 연루되었으나 무고임이 밝혀졌다.
1655년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도승지를 거쳐 1657년 이조참판·대사헌, 1659년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1660년(현종 1) 도승지로서 《효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663년 형조판서·판윤을 거쳐, 1670년 호조판서에 올랐다.
歸巖先生文集
祭文
祭吳判書 挺一 文 辛亥 1671년(현종 12)
嗚乎慟哉。古道一缺。俗習已隳。士無簡靜。人多詭隨。同趨者榮。反是則危。滔滔一世。孰奮頹波。公獨恥之。末路遂蹉。當今之勢。公實早知。病在夏畦。何忍自欺。寧忤於時。無怍於中。朝議雖苛。士望愈隆。以此較彼。孰爲得失。公應無憾。曾是爲屈。顯允大家。世德之懿。有積其慶。有趾其美。逮于觀察。受報彌彰。繁枝並秀。總是圭璋。繄公之生。實稟淑氣。淸氷生壑。芙蓉出水。皎皎英爽。燁燁脩娟。孝友天得。詩禮家傳。南金價重。北斗名懸。一試有司。弱冠靑蓮。泮宮橫議。勢若奔川。公乃慨然。倡于羣賢。辭直義正。一疏叫天。綸音嘉奬。士趨不迷。逢時之怒。遂爲厲階。豈有文鱗。久於塵泥。暫掣風翮。高步雲梯。待詔金門。再花丹桂。其進衎衎。長路無滯。銓衡藻鑑。中書筆硯。薇垣柏府。玉署喉院。搢紳之範。士林之光。三路褰帷。威惠甘棠。再撫松京。父子流芳。載出載入。亹亹歷敭。時當泰來。運際文昌。三朝殊眷。一節匪躳。八座之簡。出自聖衷。忠著終始。契合昭融。遭遇雖盛。世道已誤。寒梅忌潔。芳蘭見妒。物自爲怪。任彼讒懼。幸借恩光。無替雨露。庶大厥施。庇民尊主。彼蒼者天。奪之何速。痛均朝野。悲纏宸極。惠連之歿。曾幾何年。不謂公亡。又不少延。春暉已暮。朝露溘先。泉裏相從。倘同人間。應對賢仲。共敍悲歡。嗟公存歿。關數盛衰。儒無典型。邦失蓍龜。其來有自。去必有爲。或化風雨。以蘇羣生。或爲松柏。以守其貞。豈若凡夫。澌盡一場。悲夫悲夫。萬事亡羊。念我識公。始在戊寅。公年甚壯。玉立長身。瑞彩傍耀。望若天人。自我視公。樗櫟楩楠。公許後塵。我則不堪。惟此投分。世誼之故。聚散無定。雲泥殊路。丙申之春。我自南方。公長銀臺。余直春坊。禁裏過從。朝趨夕往。兇忭之誣。禍起鉤黨。公於是時。首罹于網。余驚若墜。顚倒就訪。謂人落落。何君耿耿。抱冤席藁。莫保性命。龍光曲照。虺毒未逞。恩遇彌篤。忠赤益炳。我昧時好。步武屢蹶。嶺海千里。每多離別。佐貳秋曹。謬蒙咨決。余也不才。焉有少助。不謂無似。枉加推許。自卜東鄰。情好益密。過賴公規。疑隨公質。披肝露膽。常對一室。駱峯之山。境僻而幽。領得閒趣。城裏別區。禽鳥啾啁。花木玲瓏。芒鞋竹杖。從以冠童。永日遨遊。要我與同。余有所適。不言於僮。僮來尋我。知必從公。公命家人。爲客戒爨。家人不問。知余爲伴。春晝遲遲。留待日傾。冬夜漫漫。坐度參橫。陶陶此樂。逾四五年。寧容數日。曠不周旋。扈蹕溫泉。俱總禁旅。止則同館。行則作侶。未始與公。相捨而處。知我素貧。未饒行槖。有得必分。無甘不析。特公餘事。在我難忘。我又未幾。顚沛還鄕。値公西出。未得握手。嵩雲秦樹。幾回搔首。屢得簡札。云我戀憀。後叨恩除。來返京居。亦旣覯止。歡言如初。受任疏決。同按簿書。仰體欽恤。何枉不紓。始在直廬。天和暫愆。謂是偶患。勿藥可痊。沈綿累月。往往而劇。儀容玉瘦。精華猶昔。燕塞黃雲。余膺奉璧。親朋咸至。共慰遠征。獨卧牀褥。有愴公情。夜就告別。開戶欣迎。秉燭穩敍。漏下三更。辭說悲苦。秖是心誠。臨分強起。送至東楹。執袂繾綣。不忍遽捨。魂消意長。有淚欲瀉。尙幸公病。視昔猶輕。愷悌宜福。所冀神明。十步一顧。言至鴨綠。忽得京信。證又危篤。當食失匙。淚下沾臆。伊時軀命。我亦難保。只有一念。向公默禱。殆死館裏。扶曳就道。回到遼左。奄聞凶報。夢耶眞耶。心焉欲裂。別時茫茫。爲是永訣。公心則靈。自爾耿結。我謂前期。當在回轍。追思痛割。如受劒鋒。一哭來門。若堂已封。池臺寂寞。莫覿丰容。嫠婦叩胷。鶴髮在堂。公何不念。脩夜不暘。荊華失春。欒棘叫天。公何不顧。掩彼重泉。大運有常。去難追耶。厭世溷濁。遂長辭耶。玉色金聲。竟何之耶。人事到此。天道堪嗟。喟人短期。有誰久視。始必終之。生則死矣。貴賤同歸。脩短一致。年踰耳順。位列上卿。縱隕厥身。不埋其名。全而歸之。斯亦壽祉。奚慟之長。猶不自已。豈徒私歟。諒爲國耳。亮采之選。其途有二。文雅爲重。才諝其次。纔長於此。或短于彼。兼而有之。我於公觀。非我言誣。世人共看。倘卒其用。領紳鵷班。小人所畏。君子所安。誰將大手。縮之袖間。旣降之豐。而畁之嗇。天不可詰。理不可測。幸留諸子。之才之德。庭庇槐陰。門容駟車。未盡之應。豈其虛徐。有鬱佳城。背陰面陽。人亦太甚。胥起譸張。生而拘持。有何不饜。更將餘慍。謀毁幽窆。十手所指。公議莫掩。永言安之。慶流苗裔。惟是昏慵。猥托深契。我倚爲兄。公視猶弟。將期永歲。聽公磨礪。那知一夕。忽焉厭世。譬彼山澤。虎逝龍亡。孤蹤踽踽。隻影凉凉。愆孰我繩。善孰我臧。興言及此。只增永傷。公亡幾日。已過朞祥。殮旣未憑。窆又莫臨。一酌之奠。始在于今。幽明之間。負愧良深。靈其垂恕。庶賜降歆。
장해(張海 每+水) 1610년(광해2)~1677년(숙종 3) 인동.
본관 인동(仁同). 자는 거원(巨源). 호는 삼우당(三優堂)
만회당 경우(慶遇)의 아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문인.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아버지와 스승의 훈도에 따라의병장이 되어 상주 북천에 이르러 강화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왔다.
인조(仁祖) 20년 (164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합격하여
여러번 천거를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張三優堂 ○丁巳 1677년(숙종 3)
磻溪梅院幾逢迎。二祖襟期卽弟兄。撤席師門曾考德。採蓮王國又知名。
年垂七耋天無憾。春滿三槐理亦明。立馬嚴程孤執紼。自慚情義負平生。
허적(許積) 1610년(광해군 2)∼1680년(숙종 6). 충원(忠原)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여차(汝車), 호는 묵재(默齋)·휴옹(休翁).
조부는 성주목사. 지중추. 허잠. 아버지는 부사 한(僩)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부수찬을 지내고, 1641년 의주부윤으로 관향사(管餉使)를 겸하였다.
1645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647년 일본사신 다이라(平成辛)를 위법으로 접대하여 파직되었다.
그뒤 다시 기용되어 1653년(효종 4) 호조참판, 1655년 호조판서, 1659년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해 효종이 죽어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일어나자 남인으로서 서인의 기년설(朞年說)에 대하여 3년설을 주장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그뒤 호조·형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662년(현종 3)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64년에 우의정이 되었다. 이해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 좌의정을 거쳐, 1671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송시열(宋時烈)의 논척을 받아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1674년(숙종 즉위)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어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다시 일어나자 서인의 대공설(大功說)을 반대하고 기년설을 주장하여 채택됨으로써 다시 영의정에 복직하여 남인정권을 이룩하였다.
그뒤 집권한 남인 사이에 송시열의 처벌문제로 청남(淸南)·탁남(濁南)으로 분열되자 탁남의 영수가 되어 왕의 신임을 받아 청남을 밀어내고 집권자로 등장하였다.
1676년 사은 겸 진주변무사(謝恩兼陳奏辨誣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오도도체찰사가 되고, 1678년 재정의 고갈을 막기 위하여 상평통보를 주조, 통용하게 하였다. 왕의 신임을 받아 궤장(几杖)이 하사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680년 할아버지 잠(潛)이 시호를 받게 되어 그 축하연을 베풀 때 궁중의 유악(帷幄)을 함부로 사용하여 대죄하던 중 서자 견(堅)의 모역사건으로 사사(賜死)되었다.
1689년 숙종이 그의 애매한 죽음을 알게 되어 무고한 김익훈(金益勳)·이사명(李師命) 등을 죽이고, 그의 관작을 추복하였다. 식견이 넓고 총명한 재질로서 선왕으로부터 탁고(托孤)의 명을 받고 충성을 다하였으며, 수상이 되어 자기에게 내리는 은사(恩賜)는 친구들에게 돌리고 녹봉으로 친구들을 구제하였다.
일찍이 사헌부에 있을 때에는 당시 이조판서 이경석(李景奭), 병조판서 이시백(李時白)이 인사행정에 부정이 있다고 탄핵, 그들을 사형에 처하라고 주청하여 백관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남인으로서 서인의 송시열 등과 가까이 지냈다.
歸巖先生文集
書
與許尙書 積○己亥 1659년(효종 10)
置散未幾。旋入劇地。閒忙之相隨。若是其速耶。不竢駕之行。想已入洛矣。氣體起居何如。區區遠慕。不弛夙宵。元禎二載朱墨。一味勞拙。佗何說哉。日者弊邑士民輩作叫閽之行。而時値執事在鄕。未獲以書先容。卽今原疏想已啓下籌司。輿議未知如何。夫三萬四千之糶糴。非十室兩邑之所堪。禎之淺見。若循方伯之請。全付耗穀於兩邑。勿令增息於每年。則雖有目前轉輸之弊。保無日後尾大之患。斯亦可久之圖也。苟爲經費之計。而惜其全減耗穀。則莫如仍存舊規。無所紛更之爲得也。禎是漆谷之人。熟知山城之害。架山軍餉。未及玆城之半。每歲改色。不過三分之一。郡縣之合力者。又至於八邑。而陸輸之苦。民且不堪。今以倍蓰之穀。歲糶其半。欲使兩邑之民。獨當改色。而官需歲入。曾不少蠲。年又年而漸息。耗之耗而取贏。則十年之內。便增二萬斛矣。果是可繼之道乎。逆旅官舍。坐待解綬。自爲計則得矣。而旣守是邦。不敢越視。古人於一日所居。常爲百歲之計者。良有以也。可否回啓之際。如蒙宣力。則一言之重。泰山爲輕。邑民之幸。宜何量哉。且禎之所望。又有大焉。戊戌耗除出三分者是已。此事裁決。專在執事。而得失之間。所關非細。蓋往者山城之穀。自廵營磨斟而已。初不入於該曹會付中。纔因方伯狀啓。始有依元穀例會錄之令。故今以戊戌現數。成冊送呈。而旣倣元穀之例。則計除三分之耗。歸之本府。自是應行之規。玆就耗米一千五百餘石中一千石則入於會付。五百石則分作官耗。始事之初。儻得準許。則定式之後。可期永久。其於濟官用紓民力。豈曰少補之哉。似聞佗城之穀。不許官耗。蓋爲軍餉聚峙之地也。此城之米已至三萬四千石之多。足爲三千名二年有半之粮。而城屬之卒僅止千人。雖使聚會民兵。難可充三千。設令對壘持久。似不至二年。人少穀多。最爲此城鉅弊。除耗給官。實爲兩便於公私。幸勿留難。準報磨勘如何。大抵此府之所賴以成形者。只有此山城耗穀。而厥數頗優。故前後守宰之干譽者。減剋官需。苟悅民心。邑入漸薄。殆不成樣。今復並其官耗而失之。則利不遺於錙銖。害不止於倍蓰。路傍弊邑。決難自支。不以此時有所變通。則後來繼之者。孰不曰始之爲府使者。不能周旋。噤無一言。而貽弊於無竆也哉。執事之再判地部。適在今日。此正弊府永賴之秋。不避煩猥。敢玆縷縷。惟增竢罪之至。
與許尙書 壬寅 1662년(현종 3)
特膺寵簡。蔚爲邦國之光。而脫濕歸田。不得數月之閒。一賀而一慰也。乞解之章。旣未蒙兪。肅謝之行。必已屆洛。伏未審體中起居如何。嚮慕之忱。不任區區。元禎粗保守塞。而鄕家消息。種種憂惱。海徼心事。去去難堪。無足仰喩。廟堂不諒邊情。惟以防啓爲能事。拘束邊臣。使不得一事如意。坐令狡奴一向濡滯。食盡饑民之膏血。此何意哉。仰屋而已。閔弟釋褐。快副一家之望。欣聳之情。殆不自勝。原州丈白首爲吏。酷被醜誣。孟門太行。可謂平地。吾儕誰人。終免一次輪回耶。世道至此。惟恐入山之不深。
與許尙書
再昨撥便。伏承去月二十六日下覆書。憑審趨朝供劇。氣體有相。燕山奉璧。出於格外。一慰一慮。無任下誠。灣尹之事。驚心則極矣。而非繫宗社安危。則請處囊中。無乃過乎。長府事備在推緘。不必縷陳。城內移倉。出於朝命。旣撤倉庫。而露置米穀。任其潦雨之所朽。盜賊之所竊。則方可謂能勝其任乎。不得已面議於方伯。加糶於民戶。秋捧之耗。箇箇公用。糶陳糴新。賑餓莩而厚保障。息耗取贏。備器械而完鉅役。未知玆事害於國乎。病於民乎。年前長倅輕播逋欠之說。盛傳中外。當繡衣査覈之日。必欲以逋爲過。實其前言。而光牧爲差員。詳査實數。有賸無縮。故長倅羞其言之不售。乃於啓下公事之外。搜出己亥分給文書。生事於無事之中。原其本意。非必欲陷我也。不過一時無聊之致。而旋卽悔恨。使吏輩訟冤於繡衣。指陳別備之數。蓋耗米盡歸於別備價故也。繡衣亦頗後悔。捧別備成冊意。欲申解於書啓云。縛之解之。果出一手。則亦可見其公心。而夫豈易哉。初免就理。專荷首揆之德。雖非有私於元禎。而惟邊事之是重。席藁之中。禍機稍緩。人非木石。寧不知感。倭人之利。專在釜山。雖日鞭撻而驅之。日設宴而請之。斷無移佗之理。初不敢直請堂船。假借釜城。以爲換面之語。終不忍無端還島。降請熊浦。欲爲遮面之資。其間情態。明若觀火。元禎之前後狀啓中。備陳其形勢。試取而考之。則其詳可得也。兩差所供凡百浮費。姑舍勿論。一月米穀。通計粮料與魚價而三百有餘石。八朔之用。已至於二千五百四十六石。列邑財力。旣已竭矣。本府庫儲。亦已罄矣。馬島一種。無非商賈。雖出沒風濤。備嘗危險。一年之利。能幾何哉。而今乃偃卧淨館。白得厚利。安有速還之意哉。三浦土兵。逼居館側。男女交淫。言語相慣。漏我機事。捷於影響。探我動靜。速於置郵。雖嚴法刻刑。日誅一人。奸細成風。懲戢無路。脫有邊警。則釜山之民。擧將相率而爲敵向導。其爲寒心。不特不可使聞於鄰國而已也。彼雖不欲棄舊而就新。我宜速令撤此而移彼。使約束申明。防禁稍嚴。然後可以有爲也。直患其詐請移館。而實非眞情耳。苟其眞情。實欲移設。則釜城堡障。雖難輕許。熊浦空地。乃其舊基。又何重難而堅持至此耶。今姑快許。促令移去。待彼懇請仍存然後。不得已而停止則容或可也。彼自爲請而我反牢塞。經歲相持。重困民力。爲盜齎粮。亦已多矣。一邊年少之輩。或以爲彼以詐而請之。我以權而許之。則甚非待強鄰忠信之道。羣非衆訾。媒孼其短。廟堂亦不得不動於淸議云。古人所謂束之高閣。竢天下太平者。正爲此輩發也。諸葛武侯忠信智武。豈不及於今世之淸流。而猶曰兵不厭詐。則待鄰敵之道。其可徒經而無權乎。桓溫上疏。請遷都洛陽。自永嘉之亂。播流江表者。一切北徙。以實河南。朝廷畏溫。不敢爲異。至欲遣侍中止之。王述獨言溫欲以虛辭威朝廷。非事實也。但從之。自無所至。詔從其計。溫果不行。今以酬應外敵。比之節制強臣。則權經取舍。宜如何也。以移設倭館。比之遷都徙民。則事體輕重。又如何哉。而王述之策。當時賴以爲便。後世不以爲非。况玆化外殊俗。不可以中國之治治之者乎。且元禎之所謂當許者。非必以權許爲得也。許之而彼果移去則可飭邊關之舊禁。許之而彼自中止則猶不失爲今日。以此言之則權許之可也。眞許之亦可也。何必徒權哉。初斥僭妄。不許館接。一如元禎所云。則深得事體。了無勞費。而廟堂不惟不施。至欲加以重罪。催送侍從。顚倒迎接。使其驕氣倍增。妄心益肆。然後卽今所以處之者。斷其歸路。使不得還。不啻若縶之維之。於焉嘉客。而乃以不能開諭速送。欲罪邊臣。爲邊臣者。不亦冤乎。夫邊臣之所建明。有所施行而不效則罪之可也。廟堂之所指揮。有所違越而僨事則罪之可也。今也不然。前後建請。率被沮格。終無一事如意。片言半辭。皆禀廟堂而酬酢。以此爲罪則其肯心服乎。最後回下措語尤緊。有曰今見李某狀啓。有似旣發難止者然。殊未曉其所以云。其所謂旣發難止者何謂也。抑以爲朝廷之所不許而邊臣輕自先發於彼人。難於結局之意耶。我國邊臣雖一動一靜之微。亦難擅便。矧玆大段所爭。而輕發朝廷所不許之言耶。不愚不狂。不蹈河而入海。則不當如許也。廟堂之意。終以爲勞費不暇計。熊浦不可許。則雖欲開諭防塞。業已辭竭計竆。有何新語可以動彼狡心。惟撤去日供之需。召還接慰之官。以杜覬覦之望。永絶希冀之路。使其去留決在一著。亦或一道也。何用曠日持久。苟冀回聽使之擧踵引頸。有若痿人之不忘起者哉。當此之時。領台與執事。幷有萬里之行。前頭可虞之勢。不待思量而可想。欲趁星軺未發之前。以還送首譯。面稟備局之意。啓聞于朝。因送金謹行於京中。細陳曲折。得以停當。則口達必詳於文字。須將此意。商議於領台。趁卽回示如何。
與許領相 乙卯 1675년(숙종 1)
聖上臨御之初。大統歸正。萬物咸覩。羣賢接武。會朝淸明。千載一時。若使朝家擧措。一循公議。則失志怏怏之輩。外雖怨詛。內宜愧屈。爲國家長遠之慮。爲士類久安之計。莫急於此。亦莫善於此。而近日之事。大失所望。聞來憂惙。中夜無寐。身罹巨創。方在死生之濱者。寧有一念暇及世間是非。而至於關國家存亡。繫士類安危者。終何忍袖手旁觀。以爲非我所知乎。玆將瞽說。敢溷仁聽。閤下苟以愚僭而罪之。則元禎亦不敢辭矣。兩宋貶降宗統之罪。不須言也。阿附之徒。驟蒙顯擢。朝廷公器。視爲己私者。最是公議之所深怒也。旣以是爲宋之一大罪。則今宜一反其所爲。而非徒不反。乃反效之。非徒效之。又有甚焉。若是則古人何以曰無諸己而後可以非諸人乎。至若各擧所親於幼主之前。以爲某也可加資級。某也某也可以特除玉堂。有若紛紜請托於無風力之銓官者然。益可寒心。萬科之設。光海之末政也。以昏朝之末政。援爲盛世之初政。此已謬矣。丁丑山城庭試之後。無賴之徒。半於都下。偸盜殺越之變。比比有之。器遠稔凶。以此爲恃。天命未絶。宗社默祐。幸而得免於顚覆。而元魏虎賁之變。麗朝仲夫之禍。猶爲識者之隱憂矣。又幸而數十年來。變亂不作。山城出身。老死殆盡。何苦而設此科以續之耶。若依御營出身之例。聚置都下。則可憂之勢。非復往者之比。若令任其閒住。則緩急之際。不足爲力。又有大可畏而深可慮者。彼輩旣得科名。則必冀爵祿之榮。不得爵祿則必懷怨國之心。怨國之卒。動以萬數。則以今日國綱人心。何事不生。今計莫若稍峻殿試之規。俾不太濫。亦勿失信。恐或得矣。如何如何。大抵自有春榜生進以來。選擧爲人所鄙。自有近日超敍之後。爵秩爲人所輕。名器之賤。有同沙泥。常調之流。擧生妄心。雖以父兄爲子弟之情。希望科擧。仕宦之念。頓減於前。卽此而揆之。則國脈必促。士類必敗。念及于此。豈不凜然。且聞都民之興怨。有甚於曩時。各司之點退高重。吏胥之奸騙操縱。大起中外之謗。而外方特甚。此雖有司之事。民情所係。不輕而重矣。閤下身都上相。佐撫新化。一事之有失。一民之不獲。無非其責。有所不聞。聞必衋傷。中情所激。言不知裁。惟增惶悚。
나염(羅袡) 1611년(광해군 3)~1661년(현종 2) 나주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상(子尙)
조부는 현감 덕준(德峻). 아버지는 경주부윤 위소(緯素).
인조(仁祖) 20년(1642) 생원시 합격.
음서로 봉사가 되고, 인조 23년 은진현감(恩津縣監). 인조 25년 공조정랑. 효종 6년 금구현령. 의금부도사를 지냈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羅正郞 袡○辛丑 1661년(현종 2)
通家三世舊。情義弟兄均。忽忽悲歡促。悠悠聚散頻。一心惟悃愊。萬事只純眞。豈獨朝中鮮。端宜席上珍。含章肯炫耀。遇物絶緇磷。孝友今無間。慈明古罕倫。有才兼有德。憂道不憂貧。作宰治聲洽。爲郞令譽新。咸期千里展。孰謂半途迍。榮悴雖天定。膏肓柰日臻。粃前常負愧。塵後忝依仁。鍊玉曾聯榻。剖符幸比鄰。完城同按簿。阿縣且傾囷。鼇府停車夜。燕都奉璧辰。山川勞夢想。雲樹斷翔鱗。分藥纔箱裏。傳凶遽海濱。遙憐留二子。尙忍訣雙親。琴破將誰和。荊枯便失春。光儀猶在眼。陳迹傷神。守塞違臨穴。題辭淚滿巾。
나진(羅袗) 1616년(광해 8) 나주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화(子華)
아버지는 군수 계소(繼素). 생부는 경주부윤 위소(緯素).
효종(孝宗) 1년(1650) 생원시 합격.
효종 3년 음보로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이 되고, 그 뒤 의금부 도사를 지냈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羅都事 袗
詩禮家聲久。金蘭世義敦。偏憐名位屈。常愛德容溫。
緬邈風流地。凄凉水竹村。典刑留寶樹。餘慶佇看繁。
남일성(南一星) 1611년(광해군 3)~1664년(현종 5) 서울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덕휘(德輝)
아버지는 평강현령 식(烒)
통례원인의. 현종 4년 금성현령(金城縣令)
아들은 영의정(領議政) 남구만(南九萬). 사위는 서계 박세당
묘갈은 동춘당 송준길이 지었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南金城 一星○甲辰 1664년(현종 5)
踵門當日荷傾情。屈指星霜已十更。自古高人耽麴櫱。向來巖邑厭趨迎。
槐庭雅望師儒貴。荊樹聲華吏部榮。家慶似公堪可詫。茫茫脩短不須評。
도신징(都愼徵) 1611년(광해군 3)∼1678년(숙종 4). 성주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휴숙(休叔), 호는 죽헌(竹軒).
증조부는 도흠조(都欽祖)이고, 조부는 도원결(都元結)이며, 아버지는 도여유(都汝兪)이다. 외조부는 여주이씨 이우겸(李友謙)이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예제(禮制)에 밝았다.
1674년(현종 15)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에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입어야 할 상복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나 대공복(大功服)을 입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어지자, 유생의 신분으로 소(疏)를 올려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함으로써, 김수흥(金壽興) 등 서인 일파를 축출하게 하였다.
뒤에 남인의 천거로 1675년(숙종 1) 강릉참봉이 되고, 이어 주부를 거쳐 용궁현감(龍宮縣監)으로 나가 치적을 올림으로써 통훈대부의 품계에 올랐다.
竹軒先生文集
諸賢書牘
*귀암 선생이 보낸 편지 귀암집에는 미수록
前承左顧、迨今感幸。日月不居、仲戚丈襄奉奄過、悲悼之懷無以自勝。伏問此時政履起居何如。瞻泝區區元禎苟延頑命、時序又換攀擗之慟益無所逮、而舍仲家八歲女阿猝死於數日之前、慘割之情無異長殤。奈何柰何。女昏定行於今十三、前諾花席時未見惠、或應朱墨倥傯之中遺卻愆期、玆敢專馳一書、又恐見阻於閽人耳。
정필달(鄭必達) 1611년(광해군 3)∼1693년(숙종 19). 거창(居昌)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가행(可行), 호는 팔송(八松).
준후(俊後)의 아들이다. 정온(鄭蘊)·조경(趙絅)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33년(인조 11) 생원이 되고, 1645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재감참봉·봉상시직장을 거쳐, 1650년(효종 1) 전적이 되어 서학교수(西學敎授)를 겸임하였다. 이어 사헌부감찰·예조좌랑을 지내던 중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문성후(文誠後)와 함께 팔송정(八松亭)을 세우고 후진양성에 힘써 팔송선생(八松先生)이라 불리었다.
1657년 예조좌랑으로 다시 등용되었고, 현종 때는 여러 관직을 거쳐 단양군수·사예를 지냈다.
숙종 때에는 직강·봉상시부정·사예를 여러 차례 제수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하다가, 1691년에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팔송집(八松集)》이 있다.
八松先生文集
詩
送李長城士徵 元禎 以從事官之燕京
沛邑遷官未一年 長城歸路又幽燕 明時簡拔須專對 王事驅馳奈獨賢
紫塞天連遼海月 靑州地接薊門烟 桑弧萬里男兒志 收拾春風待子篇
輓李判書 元禎 遷葬 귀암집에 미수록
帝天不欲祚淸時忍聽庚申殄瘁詩白日旋回魑魅照孤忠曾荷聖明知十年正見還珠喜三尺新開宿草悲同病向來芝蕙慟一哀追輓並公私
권대운(權大運) 1612년(광해군 4)∼1699년(숙종 25). 서울
본관은 안동. 자는 시회(時會), 호는 석담(石潭).
조부는 예조판서 협(悏)이며, 아버지는 사어(司禦) 근중(謹中)이다.
1642년(인조 20)에 진사가 되고, 1649년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이 되었다. 이후 지평(持平)·헌납(獻納)·이조정랑·응교·사간 등의 청요직을 거쳐 승지가 되었다. 이후 형조·병조·예조의 참의와 좌승지·한성부우윤·형조참판·개성유수 등을 거쳐 1666년(현종 7)에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이어 대사간·함경도관찰사를 거쳐 1670년에는 호조판서로 발탁되었으며, 그뒤 형조판서를 거쳐 우참찬이 되고 판의금부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1674년에 숙종이 즉위하자 예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병조판서를 거쳐서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득세하게 되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밀려났다가 파직당하고 영일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그뒤 1689년에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다시 등용되어 영의정에 올랐다.
이때 그는 유배중인 서인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을 사사하도록 하였다. 이어 치사하고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러나 1694년에 남인이 숙종의 폐비인 민씨(閔氏)의 복위운동을 일으킨 소론을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폐비사건을 후회하고 있던 숙종의 미움을 받아 화를 당하게 되는 갑술환국으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절도(絶島)에 안치되었다. 이듬해 80세가 넘는 고령이라 하여 풀려나 귀향하게 되었다.
과격파 남인으로 당쟁에 휘말렸으나 생활이 검소하고 청렴하여 명망이 높았는데, 죽고 난 뒤 왕의 특명으로 직첩이 환급되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權大運]
宦海追隨四十年。由來禍福總關天。貞珉閱火君先隕。衰柳經霜我獨全。
世故紛紜多變態。親知搖落盡重泉。牛眠又報幽堂改。哭向南雲老淚偏。
홍중보(洪重普) 1612년(광해군 4)∼1671년(현종 12). 서울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원백(遠伯), 호는 이천(梨川).
아버지는 평안도관찰사 명구(明耉)이며, 어머니는 참판 신감(申鑑)의 딸이다.
1635년(인조 13) 진사시에 합격하고, 1641년 영릉참봉(英陵參奉)을 거쳐 동궁시직(東宮侍直)이 되었다.
164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보직되었고, 이어 춘추관·세자시강원·사헌부·사간원 등에서 관직을 지낸 뒤 성산현감(城山縣監)을 지냈다.
1650년(효종 1) 수찬으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뒤 병조·공조·형조·예조의 참판을 지내고, 수원부사를 거쳐, 도승지를 네번, 대사헌을 세번, 대사간을 두번이나 지냈다.
1664년(현종 5) 지경연사(知經筵事)가 되고 호조와 병조의 판서, 우참찬·판의금부사 등을 거쳐 1669년 우의정이 되었다.
일찍이, 그는 숙위(宿衛)가 허술한 것을 우려하여 정초군(精抄軍)을 조직하여 왕이 거둥할 때에 호위하게 하였는데, 이는 숙종 때에 와서 금위영(禁衛營)으로 개칭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歸巖先生文集
答洪都憲 重普○庚子 1660년(현종 1)
離懷耿結。十步一顧。惠問鄭重。隻字千金。憑審獻替有相。起居萬福。區區感豁。如獲更拜。元禎昨投龍灣。明渡鴨江。離親去國。情境可想。而幸陪都尉。逐日團圓。羇懷少寬。賴有此耳。典戎之簡。雖協輿望。王事獨賢。亦旣勞止。可慰不須賀也。餘冀對時益衛。以副賤忱。
詩
挽洪右相 重普○辛亥 1671년(현종 12)
相國才之德。恭惟伯王佐。小少作乘黃。凡馬徒碎瑣。裒然爲榜首。黃紙書名大。蓬萊足雲氣。洪波駕長柁。州郡民懷惠。臺省風生座。克詰中兵務。歷試無不可。聖主虛鼎席。朝多得賢賀。王道貴無偏。弊俗定一破。談笑遏橫流。濁滓不敢涴。人言亦已甚。組織工遮邏。燒城有赤舌。燭幽無爝火。淳風期季世。公計亦太過。襟懷自坦蕩。簧巧焉足个。屛居東湖上。白鳥日伴我。宸念軫時艱。紫誥起閒卧。萬手新加額。台躔忽中墮。仁壽理無徵。天何不悔禍。况丁歲大侵。富者亦呼餓。邦國日殄瘁。扶顚竟無那。跡公平生事。事往名益播。千秋滄海上。金石屹不挫。大度容踈賤。良御無駑跛。自從升偃室。幾年資切磋。浮沉是非途。機栝實吾坐。萬事長已矣。幽儀啓單舸。強扶坎壈蹤。哭送來道左。
祭洪右相 重普 文 癸丑 1673년(현종 14)
伏以家傳簪組。世植圭璋。猗尙書勳業之浴日。洎觀察節義之凌霜。爰啓佑於後嗣。寔胚胎乎前光。如山岳不壓而鎭俗者重。猶江河不灌而澤物者長。仁粹之容。寬裕之度。端宜百僚之儀式。坦蕩之襟。淸曠之懷。寧有一毫之蔽藏。和易平順之中。自有果確之守。造次應酬之間。不變規範之常。不惟搢紳之徒。皆倚庇民而尊主。凡在草茅之士。咸仰論道而經邦。端委廟堂之上。忠謨弘遠。屢掌司馬之選。公道恢張。若其州郡之惠化。與夫名途之歷敭。特是推公之緖餘。焉足爲公而揄揚。伏念元禎。猥將樗櫟之材。叨承鎚琢之章。初升偃室。已蒙情義之眷眷。中遊宦海。頻辱警誨之琅琅。仰惟王相之明。奚取譾劣。秖是婁公之德。特容愚狂。頃受選士之任。獲佐下風。旋遭索瘢之譖。斷無佗腸。朱勃知馬援之抱冤。訟薏苡之非珠。韓子辨歐陽之無罪。開螮蝀之掩陽。無偏陂而遵道。志專爲忠。拯坎窞而抵平。恩何敢忘。人亦太甚於捃摭。公又深被其中傷。白地巧誣。起靑蠅營營之謗。赤舃重來。副蒼生顒顒之望。襲馥心醉。期永歲之莫違。居肓病逼。奄脩夜之不暘。台躔報坼。失中流之舟楫。典刑驚墜。摧大廈之棟樑。楓宸氷淚。幾軫霖雨之思。玉鉉金鼎。長謝調劑之方。哀日月之川流。朞而又朞。幸名義之山高。亡亦不亡。緬懷座上之風。永隔千秋。聊瀉弸中之悲。敬薦一觴。想英靈之昭昭。庶降格之洋洋。
곽의창(郭宜昌) 1613년(광해군 5)~1647년(인조 25)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덕우(德優)
증조부는 승지 규(赳). 아버지는 소계(蘇溪) 주(澍)
효자로 정려되고 별검에 증직되었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郭德優 宜昌○戊子 1648년(인조 26)
謝家生寶樹。符彩暎瓊枝。孝友人無間。溫良衆共推。童孩終禮制。神感竟扶持。譽洽驅流輩。行高出醜夷。鄕鄰當日望。儒學早年期。脩短天難詰。竆通理莫知。靑春芽尙茁。白露草先萎。閨裏鸞奩血。門前鶴髮悲。慶餘徵積善。身後有諸兒。濫辱仁言誨。多蒙厚義規。邇年驚聚散。樑月幾盈虧。久抱同心恨。空勞兩地思。佳期計未遂。凶問信兼疑。往躅皆爲古。餘生又仗誰。追懷神已索。寄誄語還癡。欲問平生事。請看峴首碑。
송시진(宋時振) 1613년(광해군5)~1663년(현종 4) 성주 고산.
본관은 야성(冶城). 자는 사달(士達). 호는 매은(梅隱)
야계(倻溪) 희규의 현손. 용계(龍溪) 광계(光啓)의 아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문인
회당 장석영이 찬한 공의 행장에 “모친의 명으로 부지암을 왕래하며 강마하였다” 하였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宋士達 時振
詩禮家聲舊。金蘭世義親。逢場頻倒屣。襲馥幾傾囷。
城裏三秋別。山陽一掬塵。從今仁壽理。不欲問蒼旻。
이정기(李廷機) 1613년(광해군 5)∼1669년(현종 10). 의성 산운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자신(子愼), 호는 만옹(漫翁).
참판 민환(民寏)의 아들로 좌승지 민성(民宬)에게 입양되었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1635년(인조 13) 사마시에 합격하여 참봉을 지내다가, 164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춘추관기주관이 되었다.
1658년(효종 9) 정랑에 오르고 이어 서흥부사·충주목사를 지낸 뒤 사직, 귀향하여 독서로 여생을 보냈다.
歸巖先生文集
挽李通禮 廷機
昔公在妙齡。英聲海外傾。不佞甫垂髫。久已聞姓名。道途稍間阻。無由早識荊。先君方退休。公來自武城。夤緣得御李。鄙吝覺不萌。江山輸逸韻。來聚雙眸明。高義薄層雲。冲襟超世情。風神眞灑落。論議四座驚。固知名不虛。所以大其鳴。平交盡髦俊。連袂皆耆英。旣忝聯派分。仍叨歲寒盟。屈指猶如昨。星霜三十更。依瞻出諸父。玉雪視親甥。人事悲歡劇。雲樹少合幷。科場先後登。仕路共陂平。出處顚沛間。日邁而月征。馹騎頻左顧。維歲之丙丁。江齋洎池館。秉燭幾參橫。屬公出宰日。我從宦于京。相思不相見。江月屢虧盈。水重山亦長。書札時憑伻。初秋逢洛社。儀容頓羸淸。尙恃精神旺。不虞鬼祟獰。孰謂未浹旬。奄忽隔死生。衋傷遍士友。湖海泣遺氓。始公生斯世。端爲邦國楨。之才與之德。何往則不亨。玉塞合典戎。金鼎期調羹。苟使展厥武。世道可重輕。時命嗟大謬。驥足淹長程。外焉棲百里。內而滯九卿。壽祿竟無徵。居然夢瑰瓊。長衾半已空。華髮留二兄。斯人止於斯。誰云仁則榮。典刑看嗣世。不應泯家聲。自我視夫公。蟲鵠不足評。粃前恒負愧。塵後喜隨行。一自哭公後。霜鬢添數莖。靈辰不可住。旅櫬指舊塋。親朋集素幔。那忍送丹旌。嶺外偏蕭索。孤蹤轉睘睘。存亡從此訣。哀誄和淚成。
조제창(曹悌昌)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이순(而順)
여헌 선생의 처남 고헌(孤軒) 송후창(宋後昌)의 손서
歸巖先生文集
詩
挽曺而順 悌昌
弱齡梅院幸追塵。屈指如今二十春。素業共期錐穎出。靑陽那料璧沈湮。
心肝吐露言猶在。弧矢經營志未伸。他日趨庭奉對處。誰將愉色慰嚴椿。
권목(權穆) 1614년(광해군 6)∼1663년(현종 4). 성주
본관은 안동. 자는 태화(泰和).
아버지는 종길(宗吉)이다.
1639년(인조 17) 진사시에 합격, 1649년 빙고별검(氷庫別檢)이 되었다.
그뒤 호조좌랑에 이어 함흥판관이 되어 외직에 나갔다. 재임기간에 농상(農桑)·군정·송사 등에 혜정(惠政)을 베풀어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는데, 특히 부결(部決)에 유능하여 일반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곧 돌아와 호조정랑을 역임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마음이 착하고 후덕하였을 뿐만 아니라 담론(談論)을 잘하여 그가 사귄 사람들은 당대의 유명한 인사들이었고, 현명한 인품은 모든 사람들의 존경의 대상이었다.
歸巖先生文集
序
送權上舍泰如 穆 歸漢城序 己丑 1649년(인조 27)
星山。泰如鄕也。其先世有若觀察公,同樞公卜築焉。督郵公,郡守公往來焉。及泰如之身而遭丙子之亂。挈家奔竄。開拓廢址。結數椽而居焉。亭臺物色。欣欣然若有得也。鄕之士友咸以爲觀察之有後於玆土。玆土之幸也。今者泰如以雙親之春秋寖高。千里之晨昏多曠。攜眷還京。噫由觀察而卜築者數世。自督郵而往來者數世。及泰如而家焉者十有三年。而今且將歸。地之一興而一廢也。人之或往而或來也。莫非有數存於其閒。則今日之後。又安知泰如之不復於此地。而向之開拓者。今還廢矣。向之欣欣然若有得者。今復戚戚焉如有失。則今日之送泰如者。孰不惘然黯然之難堪。而友人漢南李士徵其最也。別時茫茫。與之酒而爲之語曰。始余與子相逢於戊寅之春。傾蓋若舊。便許知己者。十年于玆有餘矣。子有發越之氣而我固陋。子有洪大之量而我狹隘。子有忠厚之質而我偏躁。三者之於吾與子。無一之不相反。而子之所以遇我之親。我之所以愛子之深。有非尋常交契之比。蓋於相反之中。有相合者在耳。然則子之與我。不特爲知己之人也。固將以子之有餘。補我之不足。故箴規氣質之偏而我必受之。警責率爾之失而我必信之。胥資而相濟。反異而同歸。遂結兄弟之義。交遊父子之閒。先人之所親愛。固無右於吾子。吾子之所慕悅。又實在於先子。卜鄰之時。樂陶陶於永夕。臨絶之日。情戀戀於片札。思之心裂。子豈忍忘。余以險釁。夙遭巨創。子於是時。痛若在躳。勤勤匍匐於急難之際。眷眷周顧於死生之濱。此又高義之末事。情契之當然。而感泣於棘欒之中。歆豔於敦厚之風者。實吾心之所不能自已者也。今子之歸也。氣質之偏。誰或箴之。率爾之失。誰或警之。疑從何質。過賴何規。况於急難之際。死生之濱。誰復匍匐之勤勤。周顧之眷眷也。吾於子之歸。所以惘然黯然之爲最。而雖欲強不作兒女懷。不可得也。因此而抑又有感焉。子之與克家子寬。早有膠漆之分。同爲淪落之客。義氣相傾。造次相隨。而如我不佞。亦蒙不鄙。不問一日之長。猥隨三子之後。塵世悠悠。聚散無定。當時之恨。尙亦多矣。而浮生忽忽。悲歡遽促。此日之情。又何極耶。子寬已爲異物。而泰如又作京洛人。九原漠漠。幽明永隔。則逝者固難追也。千里渺渺。山川脩阻。則生者亦胥遠矣。死別生離。古人今人。吾安得不傷心於此日。而未知克家又作何如懷耶。嗚乎。人之贐子也以物。我之贐子也以言。泰如聽之哉。子之入洛也。所與遊者皆正士也。子雖欲不賢不可得也。比之匪人。不亦傷乎。泰如戒之哉。嶺嶠千里。氷雪載路。泰如愼之哉。歸驂難駐。征袂莫挽。泰如行矣哉。
민희(閔熙) 1614년(광해군 6)∼1687년(숙종 13). 서울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호여(皞如), 호는 설루(雪樓) 또는 석호(石湖).
참판 응협(應協)의 아들이며, 암(黯)이 형이다.
1650년(효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지평과 장령을 거쳐 1657년 보덕(輔德)으로 승진하여 집의(執義)를 거쳐 1661년(현종 2)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당시 경상도는 2만7000여명에 달하는 기황민(饑荒民)과 여병(癘病)에 신음하는 3,600여명의 환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곤민을 급히 진여곡을 풀어서 구제하니 도민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이듬해 승지가 되었고, 1663년 양주목사가 되었으나 석실서원(石室書院)의 사액치제(賜額致祭)때 전례(典禮)에 잘못이 있다 하여 파직되었다.
그뒤 곧 좌부승지로 복직되어 형조참의를 지내고, 1666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1668년 호조참판으로서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한성부판윤·관상감제조와 공조·이조·형조의 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670년 청사(淸使)를 보내는 반송사(伴送使)가 되었으며, 1671년 강화부유수를 지내고 1675년(숙종 1) 국장도감당상(國葬都監堂上)이 되었다. 이어 우참찬·대사헌·판의금부사·예조판서를 역임한 뒤 1677년 우찬성, 이듬해 우의정을 거쳐, 1680년 좌의정에 이르렀다.
원래 남인이었던 그는 숙종의 즉위 이후 남인의 득세로 그의 정계에서의 활약은 컸다.
특히, 송시열(宋時烈)을 영수로 하는 서인에 대한 의견차로 그는 허적(許積)을 중심으로 하는 탁남(濁南)이 되어 더욱 조정에 중용되었다.
그러나 1680년의 경신환국 당시 남인이 실각할 때 관작을 삭탈당하고 위리안치되었다.
그뒤 1686년 전리(田里)에 방귀(放歸)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신원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歸巖先生文集
書
與閔方伯皥如 煕○壬寅 1662년(현종 3)
再昨撥便。付呈謝書。其已得達耶。甘雨支離。變作苦雨。伏未審旬宣氣體起居如何。馳慕區區。元禎鄕家消息。種種憂惱。古人所謂尙寐無聰。正爲今日道也。狀草未妥則只據實狀。改其措語。要之的當。豈不好哉。沿江之獨當作米。無謂莫甚。限江海二日程分定。猶愈於上道之踰嶺數日。達于可興也。一年迤至三年。此特一時周旋之事。非永久之圖。雖限五年。實爲無竆之役。除非大歉。則以應捧六斗而倍徵十二斗之役。逐年偏責於江海之民。不亦冤苦之甚乎。但近日廟堂全昧事理當否。只以防啓爲能事。不有士民呈訴。或繡衣書啓。而廵相直爲啓聞。則其不見沮戲難矣。別差倭事。幾至結末。而又緣廟堂不許熊浦。更申釜城之請。而益加恐嚇。前頭遲速。有不可知。坐奪一道飢民之食。以繼富於外人。而曾不顧念。維攻斥邊臣之是急。此何等廟謨也。痛嘆痛嘆。作米船運軍。以留布變通。最爲長策。頃者繡衣之見亦如是。若以一朔二十名定式。而每收三匹之木。給代運入。則凶年減捧之時。雖似有餘。而不至太濫。豐年畢捧之時。雖似不足。而亦可推移。當與釜僉同議回報矣。
서필원(徐必遠) 1614년(광해군 6)∼1671년(현종 12). 서울
본관은 부여(扶餘). 자는 재이(載邇), 호는 육곡(六谷).
아버지는 운기(雲驥)이다.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김집(金集)과 정홍명(鄭弘溟)에게 수학하였다.
1643년(인조 21)에 관직에 올라 창릉참봉·사옹원봉사가 되었으며, 1648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관을 거쳐 검열과 설서(說書)를 역임하고 1654년(효종 5) 부수찬이 되었으며 그뒤 헌납·이조좌랑·평안도어사가 되었다.
1656년 수찬을 비롯하여 지평·교리·이조정랑 등을 거쳐 충청도관찰사가 되어서는 서원의 폐단을 보고하고 그 개혁을 청하였다.
1658년 대사간과 승지를 거쳐 전남도감사가 되었을 때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에 찬동하여 전남도대동사목(全南道大同事目)을 반포하였으며, 기민(飢民)을 구휼하기 위하여 왕대비의 삭선(朔膳)을 감할 것을 청하였다가 추고되었다.
1659년 진휼을 위하여 속미(贖米)를 받고 중죄인을 석방하였다가 파직당하였다. 현종 초년 병조참의·승지·대사성·예조참의·이조참의 등을 거쳐, 1663년(현종 4) 대사간·승지·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목면재배를 권장하고 구휼사업에 힘썼으며, 특히 육진혁막제조(六鎭革瘼諸條)를 올려 그 지방의 폐단을 개혁하는 데에 앞장섰다.
1665년에 강화유수가 되었고 그뒤 형조참판, 1669년 형조판서를 거쳐 1671년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그해 죽었다.
민생을 구휼하고 지방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한 실질적인 사업을 많이 하였다. 왕에게 직언을 잘하기로 이름이 나서 그 시대 이상진(李尙眞) 등과 함께 오직(五直)이라 불리었다.
저서로 《육곡유고》가 있다. 시호는 정헌(貞憲)이다.
歸巖先生文集
祭文
祭徐判書 必遠 文 壬子 1672년(현종 13)
嗚乎哀哉。世已末矣。風已澆矣。嫺飾矯行。務合於時者。豈非福利之所萃。而公獨恥之。特立不苟。無怍於心者。正是釁孼之所隨。而公則安焉。豈公好惡之性。與人殊哉。公之不欺者天也。欲忠者主耳。不然則以公名論之重。時望之著。奮鴻逵之逸翰。駕鯨波之大帆。運際文昌。路豁通衢。世間是非。孰到公邊。而公不肯枉道而從彼。亦不可勢回而威屈。故浮毁交口。衆狺同聲。被佗組織。不暫而久。惟是一脈之公議未泯。九重之眷注愈隆。擢畁司馬之長。並試文武之途。知公秉直。斷無佗也。謂公事業。可立致也。孰意主恩未報。朝露先晞。奄使遠邇之士。空吟殄瘁之詩耶。始公早失所怙。恭承慈訓。移之事君。推孝爲忠。洞洞屬屬。而至誠無間於死生。謇謇諤諤而一節不變於始終。居家立朝。此其大致。若其從政贍敏之稱。莅官廉潔之操。不足爲公之輕重。何况榮塗歷敭之遍。方岳委寄之重。又可爲公而稱道耶。顧惟魯質。早豔華聞。丙申禁直之日。始副一識之願。嶷嶷莊重之容。恢恢坦蕩之度。已知爲君子人矣。適會承乏。佐幕完山。公於是歲。兼莅大尹。遂以無似之身。便承莫逆之遇。公有事則必詢於我。我有疑則必質於公。情義洞徹。囷廩傾倒。我所以愛公之深者。服其義也。公所以待我之厚者。抑奚取焉。公有高世之資。而我齪齪耳。公有拔俗之行。而我瑣瑣耳。以言其材則公楩楠而我樗櫟也。以言其器則我碔砆而公瑚璉也。是數者無一之不相反。而愛之如此其深。待之如彼其厚者。豈有佗哉。以公之有餘。補我之不足。相須而共濟。反異而歸同。故許與之偏。自不得不已也。知余樸愚之性。不巧於俯仰。憐余羇危之蹤。常厄於顚躓。羣非獨扶。披肝露膽。謂百年之莫違。遽一朝而長辭。天乎鬼乎。痛矣已矣。嗚乎哀哉。尙忍言哉。宿草已霜。淺土忽啓。命賜禁麓。載封若堂。哀榮之典。益復無憾。不昧之靈。必爲之感泣。未死之氣。想有以圖報。或爲風雲。以蘇生民耶。或化䨓霆。以壯國勢耶。夫豈怡怡而存。沒沒而亡。與凡夫澌盡一場哉。嗚乎。忝守是邦。經紀幽窆。新悲舊感。地久天長。有盡者辭。無限者心。一聲長號。公私之慟。單杯瓣香。未足紓吾之至哀。降監屑歆。庶幾諒余之深衷。
오정원(吳挺垣) 1614년(광해군 6)~1667년(현종 8) 서울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중보(仲輔)
조부는 백령(百齡). 아버지는 감사 단(端). 아들은 우의정 수촌(水邨) 시수(始壽)
누이 동생은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부인이다.
사위 이조정랑 민홍도(閔弘道:외조부는 김시양)는 선생의 이종이다.
효종(孝宗) 1년(1650) 문과급제.
지평. 정언. 교리. 경상도어사. 장령. 의정부사인. 집의. 보덕. 집의. 충청도어사.
승지. 해주목사. 충청감사. 황해감사. 병조참의. 충청감사를 역임하였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吳參議 挺垣
福慶由來萃善門。鴒原聲價世爭諠。靑雲紫陌推英妙。玉署銀臺荷聖恩。
二路觀風歌蔽芾。三州流惠信魚豚。家庭傳訓詩書禮。膠漆輸情祖子孫。
嶺嶠縱違重命駕。洛城猶得細斟樽。聯裾禁苑迎春早。引燭騎曹度歲翻。
樞院共期資贊畫。萱堂誰謂訣晨昏。孤鸞撫鏡悲無極。駟馬容閭業更蕃。
哀樂還驚十載後。死生交誼幾人存。儀刑寂寞尋何處。一片眠牛月窟原。
장학(張澩) 1614년(광해군 6)∼1669년(현종 10). 인동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성원(聖源)이고, 호는 남파(南坡)이며,
조부는 극명당 내범(乃範)이며, 아버지는 참봉 만회당 경우(慶遇) 어머니는 광주(光州) 이로(李簬)의 따님이다.
8-9세에 이미 통사(通史)를 읽었으며, 11세에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에게 수학하였다. 1642년(인조 20) 식년시(式年試)에 생원(生員)이 되었으며, 여헌 선생을 임고서원(臨皐書院)에 입향(入享)하는 데 힘썼다.
1652년(효종 3)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1655년(효종 6)에는 여헌 선생이 살았던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를 넓히는 일을 하였다. 이후 정치에는 뜻을 두지 않고 스승을 모신 서원의 사액(賜額)에 전념하였고, 1668년(현종 9)에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모신 오산서원(吳山書院)의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張南坡 澩○己酉 1669년(현종 10)
立雪師門在妙齡。南金光價溢靑萍。襟懷灑落氷生壑。論議恢奇刃發硎。
倒峽瓊葩違壯志。留庭玉樹有餘馨。花山歷路終宵款。奄隔幽明涕自零。
허강(許堈) 1614년(광해군 6) 합천 가수(陜川 嘉樹)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사정(士正) 호는 회계(晦溪)
아버지는 예조정랑 허돈(許燉)
현종(顯宗) 3년(1662) 생원시에 합격
문집: 晦溪先生文集
挽詞 李元禎
訃傳疑夢或非眞誰謂公爲地下人氣▼(山/片)自能齊艮嶽情田元不設畦畛頹波立脚名愈著藝苑馳聲跡已陳千里無由臨壙訣嶺雲回首倍傷神
강욱(姜頊) 1615년(광해군 7) 서울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신백(愼伯)
아버지는 현령 홍정(弘定). 생부는 여헌 문인 강원감사 홍중(弘重)
인조(仁祖) 26년(1648) 생원시 합격.
문음으로 김포군수가 되어 선정으로 가자되었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姜金浦 頊
洛社過從幾踵門。踈慵常幸辱仁言。家庭敎訓詩書禮。膠漆心期祖子孫。
琴鶴淸風嗟已遠。芝蘭餘慶看愈蕃。萱闈歲晏荊華晩。泉下應爲不瞑魂。
목내선(睦來善) 1617년(광해군 9)∼1704년(숙종 30). 서울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내지(來之), 호는 수옹(睡翁)·수헌(睡軒).
지중추부사 서흠(敍欽)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증병조판서 권탁(權晫)의 딸이다.
미수 허목(許穆)의 문인이다.
1646년(인조 24) 사마시에 합격, 진사가 되고, 1650년(효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교리·판결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뒤 1672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5년(숙종 1) 형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대사헌을 거쳐 예조·호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남인인 관계로 1680년 경신대출척 때 삭직되었다.
그뒤 우참찬이 되고, 1689년 우의정에 이르렀다. 이해의 기사환국에서 서인(西人)을 제거하는 데 앞장서 좌의정에 올랐다.
1694년 남인이 몰락하는 갑술옥사가 일어나 절도에 위리안치되었고, 1699년에 풀려나 전리(田里)에 돌아왔다.
글씨에 뛰어났는데, 특히 해서(楷書)와 초서를 잘 썼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睦來善]
哭君悲淚未曾晴。欲說庚申夢亦驚。何幸聖朝回雨露。終看哀典慰忠貞。
梧丘已洩竆泉痛。藁葬初移淺土塋。最是世間知己恨。白頭無處托平生。
이명익(李溟翼)1617년(광해군 9)∼1687년(숙종 13). 예천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만리(萬里), 호는 반초당(反招堂).
이지형(李之馨)의 아들이다.
1649년(인조 2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검열로 등용되고, 곧 설서가 되었다.
1657년과 이듬해 두 차례에 걸쳐 실록을 태백산·오대산 사고에 각각 봉안하고 돌아왔다. 현종 때 정언이 되고, 이어서 지평을 거쳐 사간·집의를 역임하였다.
1675년 승지, 다음해 대사간이 되어 언로(言路)의 기강을 세웠고, 1677년 외직인 충청도관찰사로 나가 세곡(稅穀)의 수송을 편리하게 하는 방법을 시행하게 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게 하였다.
귀암선생과 같이 영남과 호남에 대동법 시행을 건의하여 부역과 세공에 의한 백성들의 피해를 덜게 하였다.
*번암 채제공이 지은 묘갈에 則與李尙書 元禎,建議,用兩湖大同法,民至今賴之,
이경휘(李慶徽) 1617년(광해군 9)∼1669년(현종 10). 서울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군미(君美), 호는 묵호(默好) 또는 춘전거사(春田居士).
제현(齊賢)의 후손으로, 형조판서 시발(時發)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며 문장에 뛰어났고 17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뒤 1644년(인조 2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된 뒤, 이듬해 검열을 거쳐 1647년 지평에 올랐다.
1653년(효종 4) 행홍문관수찬·지제교 겸 경연검토관(知製敎兼經筵檢討官)을 역임하고, 춘추관기사관으로 《인조실록》 편찬사업에 참여하여 헌납이 되었다. 그가 언관으로 있을 때에 인품이 온순 단정하며 도량이 넓고 평소에도 말이 적어 주변에서 그를 두려워하였지만, 반면에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인물을 아끼기로 유명하였다.
또, 이조참의로 있으면서 양제신(陽濟臣)의 수령 임명시에 의망(擬望)을 거부하여 체직(遞職)되기도 하였다.
한편, 1668년(현종 9) 현종이 온천에 행차할 때 삼남지방의 세선(稅船)들이 안흥진(安興津)에서 자주 파손되자 태안에 새로 포(浦)를 만들 것을 의논하여 이미 실행단계에 들어갔는데, 그 부당성을 상소하여 중단된 일도 있었다.
그뒤 강화유수·경기감사 등 외직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李判書 慶徽 1669년(현종 10)
美璞崑丘瑞。靈芝太室花。業承詩禮學。名竝弟兄誇。蟾殿初攀桂。龍墀旋草麻。東曹郞宿煥。西掖繡氈奢。駿步超騏驥。神光淬鏌鎁。儒林望益顯。師席寵仍加。試按邦畿節。重開選部衙。宰衡推郾鄯。際會佇勛華。大閥能垂訓。諸郞克稱家。典刑猶在室。門巷可容車。薄劣叨聯派。高明幸棄瑕。蓬心賴正直。風節仰脩姱。世道期無曲。人生愴有涯。一哀秋景迫。泉路轉幽遐。
윤휴(尹鑴) 1617년(광해군 9)∼1680년(숙종 6). 경주에서 출생
본관은 남원(南原). 초명은 갱(鍞), 자는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하헌(夏軒).
이조참판 중호(虎)의 증손으로, 희손(喜孫)의 손자이고,
대사헌 효전(孝全)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 김덕민(金德民)의 딸이다.
숙종이 즉위한 뒤인 이듬해 정월에 유일(遺逸)로서 정4품벼슬인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의 직을 받았다. 이후 5개월 만에 대사헌에 오르고, 이어서 판서직을 몇 차례 거쳐 1679년(숙종 5) 9월에 우찬성에 올랐다.
그러나 이듬해에 경신환국의 정변으로 사사(賜死)되었다.
그는 본래 당색에 구애됨이 적었으나, 예송을 통하여 서인측과 틈이 생겨 출사 뒤에는 남인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기해예송 때 포의(布衣)로서 송시열의 주장의 오류를 가장 먼저 지적하였으며, 1674년 갑인예송 때에도 같은 기준에서 서인측 견해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남인으로서 그는 허적(許積)을 중심으로 한 탁남(濁南)과는 입장을 달리하여 허목(許穆)과 함께 청남(淸南)일세를 이루었다.
歸巖先生文集
書
與尹白湖 鑴○甲寅 1674년(현종 15)
夜回霜肅。伏惟道味益腴。瞻慰區區。昨承辱惠復書。有恐非所管之敎。多見警責。不遐之厚意。媿赧之極。感佩亦深。第念新君嗣位。受服之節。實是國家莫重莫大之典禮也。必誠必愼。勿之有悔者。同出於臣子之至誠。則其敢曰非我所管而已乎。玆與大臣禮官有所衡難。而終無的確之見。必欲叩疑於知禮之君子。纔已見拒。又復仰溷。此則禎之所以爲愚也。謹按杜氏通典。嫡孫持重在喪而亡。次孫代之條。宋江氏問甲兒先亡。甲後亡。甲嫡孫傳重。未及中祥。嫡孫又亡。有次孫今當應服三年否。何承天答曰甲旣有孫。不得無服三年者。謂次孫宜持重也。但次孫先以制齊衰。今不得便易服。當須中祥。乃服練居堊室耳。今以此推之。則大行大王服喪未及中祥而薨。當宁以嫡孫受服。雖與次孫之代嫡孫者有異。其先制齊衰。今不得便易服之義則似無異同。以禎淺見。卒哭後敬思殿祝文。先書御諱固當。而至於受服之節。須待中祥。恐不害於禮意。未知如何。幸恕愚僭。毋惜開示。
백호전서 제15권
서(書)
*이사징 원정 에게 보냄[與李士徵 元禎] 기미년 1679년(숙종 5) 3월
제가 성 밖에서 도망을 쳐 여기까지 오느라 미처 작별도 못하고 왔기에 지금 그쪽을 바라보고 한탄만 하고 있답니다. 요즘 대감 체후는 어떻습니까? 시사(時事)가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나라가 전복될 조짐이 이미 나타난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좋단 말입니까. 영상(領相) 집안일은 매우 불행한 일이었는데, 처음 듣고서는 놀라고 당혹도 했었으나 두 번째 영상 서한을 받고서는 그러한 사실도 없이 그러한 누명만 썼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도가 번복되는 기미가 실로 이런 데서도 보이건만 제공들은 데면데면하면서 누구 하나 힘을 내어 주상께 말하는 자도 없습니다. 이때 대감이 분별 있는 한 말씀 올려서 주상의 마음을 깨치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근거 없는 말들이 길에 떠돌다가 그것이 금중(禁中)으로 흘러 들어가면 그때 가서 곁에서 슬쩍 한 마디 거들어가지고 사람을 중상 모략하는 것이 바로 간교한 무리들이 써먹는 덫이고 세상이 이 때문에 위태위태한 것입니다. 대감께서도 아마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이만 줄이겠습니다.
*이사징에게 답함 기미년 1679년(숙종 5)
충고의 서한은 잘 받아보았습니다. 다만 구구한 이 사람의 뜻은 전일 차자에서 이미 다 말한 바 있지만, 기실 조정에서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아끼시는 성인의 뜻을 체득하여 법을 분명히 하고 벌을 삼가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형은 그것을 잘못된 계책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오늘 조정에서 만약 저의 계책대로 따르지 않는다면 뒷날 제공들이 틀림없이 후회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오래 전부터 맡은 바 직무를 제대로 수행 못하고 있는 것을 형께서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오늘 합계(合啓)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형이야말로 장부로서 왜 그러십니까.
듣기에, 영상께서는 저의 뜻을 그렇지 않다고 아니하고 흔연히 의견을 같이할 생각이라고 했다는 것 같은데, 형께서는 언젠가 영상과 그 문제를 놓고 상의해보시지 않았습니까? 이 사람은 어리석고 꽉 막혀서 그 때문에 죄를 얻는다고 해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공들께서도 한번 웃고 넘어가시기 바랍니다.
이관징(李觀徵) 1618년(광해군 10)∼1695년(숙종 21). 서울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국빈(國賓), 호는 근옹(芹翁)·근곡(芹谷).
심(襑)의 아들이다.
1639년(인조 17)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 유생으로서 뛰어난 재질을 보여 천거로 참봉이 되고, 1653년(효종 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한 뒤 사헌부장령이 되었다.
1660년(현종 1) 효종이 죽자, 효종의 계모인 조대비(趙大妃)의 복상문제가 있을 때 당시 기년설(朞年說: 만1)을 주장한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에 대하여 만3년설을 주장하다가 쫓겨난 남인 허목(許穆) 등을 구제하려다가 전라도도사로 좌천되었다.
1664년 다시 장령이 되고, 1672년 승지가 되었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여 남인이 집권하자 이듬해 대사성·대사헌을 지내는 한편,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숙종의 신임을 얻었다.
1680년(숙종 6)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89년 예조판서를 거쳐, 세자와 세손을 교육하는 보양관(輔養官)에 임명되었다.
그뒤 이조판서를 지내고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1694년에 노론인 김춘택(金春澤) 등이 숙종의 폐비 민씨(閔氏)의 복위운동을 일으킴으로써 노론과 소론 일파를 제거하려던 남인들이 오히려 참화를 당한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앞서 1689년에 일어났던 기사환국 때의 발계인(發啓人)으로 삭출(削黜)되었다. 해서(楷書)에 일가를 이루었고, 만년에는 김생(金生)의 필법을 연구하였다.
저서로는 《근곡집》이 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李觀徵]
往事驚心尙忍言。忠貞從古負深冤。十年非久天回斡。九地雖幽日照盆。
哀詔惜靈尊上相。佳城移宅妥英魂。倘敎父子重泉會。定泣幽明荷聖恩。
이영세(李榮世) 1618년(광해군 10)∼1698년(숙종 24). 칠곡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영백(榮伯)이고, 호는 일휴정(日休亭)이다.
시조는 고려 태조(太祖) 때의 벽진장군(碧珍將軍) 이총언(李悤言)이다.
증조부는 졸암(拙庵) 창국(昌國), 조부는 공조참의 탁이(卓爾)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모암(慕巖) 이충민(李忠民)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9세 때 숙사(塾師)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부친에게 말하길 스승이란 지극히 중요한 것이라며 여졸공(厲卒公)을 천거하였다. 14세에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찾아가서 〈춘추부(春秋賦)〉와 〈옥산부(玉山賦)〉를 지어 큰 칭찬을 받았다. 15세에는 완정(浣亭) 이언영(李彦英: 1568∼1639)과 동숙하면서 공부에 전념하니 학문이 크게 정진하였다. 1651년(효종 2)에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79년(숙종 5)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으로 천거되었으나 이듬해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다 생을 마감하였다.
문집으로 《일휴정문집(日休亭文集)》이 전한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李榮世]
欲陳疇昔涕漣漣。童稺情親五十年。樑棟折時多士痛。哀榮極處聖恩全。
庭羅金紫門闌赫。宇衍璵璠福慶緜。千里計偕淹北洛。泉臺款款媿前賢。
정도응(鄭道應) 1618년(광해군 10)∼1667년(현종 8). 상주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봉휘(鳳輝), 호는 무첨(無忝).
판서 우복 경세(經世)의 손자로, 심(杺)의 아들이다.
1648년(인조 26) 좌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연소하나 사행(士行)이 있다고 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곧 교관(敎官)에 임명되었고, 다음해에 대군(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효종이 즉위한 뒤 학행(學行)을 포상하여 자의(諮議)에 임명하였으나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1657년(효종 8) 다시 자의에 임명되어 1년간 서울에 머무르다 사직하였다.
저서로는 《국조명신록》·《소대명신행적 昭代名臣行蹟》·《소대수언(昭代粹言)》 등이 있다.
歸巖先生文集卷
詩
挽鄭佐郞 道應 1667년(현종 8)
愚老遺風不出門。妙齡光價士爭諠。淵源學問詩書禮。膠漆心期祖子孫。
共擬胄筵居左右。誰知彩服訣晨昏。庭留雙璧眞能似。佇見他時業更蕃。
정석교(鄭錫僑) 상주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희백(熙伯) 호는 환성재(喚惺齋)
증조부는 판서 우복 경세(經世). 조부는 검열 심(杺). 아버지는 무첨(無忝) 도응(道應)
대사헌 박곡 선생 사위. 선생의 질서
학행으로 천거되어 숙종 3년 숭릉참봉이 되고. 숙종 15년 신창현감. 숙종 17년 영양현감으로 나갔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鄭錫僑]
昭昭天道十年回。紫闕隆恩編夜臺。楚屈招魂荷蓋斷。漢楊移葬大禽哀。
精忠百鍊金豈爍。氣節千秋斗共巍。祇爲邦家悲殄瘁。不堪揮淚廣陵隈。
이창진(李昌鎭) 1619년(광해군 11)∼1684년(숙종 10) 칠곡(漆谷)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운장(雲長), 호는 창주(滄洲),
완정 언영(彦英)의 아들. 어려서부터 행동을 바로하고 학문에 힘썼다. 1650년(효종 1) 과거에 응하려고 할 때 성균관 유생이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승무를 청한 것을 영남유생이 반대하다가 소를 올린 우두머리가 유벌(儒罰)을 받는 것을 보고 과장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어 과거에 나가지 않을 것을 결의하고 독서와 수양에 힘썼으며, 만년에 찰방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선생 처남
滄洲先生文集
*與李士徵[元禎]
仄聞 朝廷有淸濁兩津未知台舟泊於何津耶洛江鱖魚正肥迨其歸哉迨其歸哉
신류(申瀏) 1619년(광해군 11)∼1680년(숙종 6). 인동(仁同) 출신.
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 덕우(德祐)와 같이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문과에 능하여 여러 차례 문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한 뒤 1645년(인조 23) 무과에 합격, 1655년(효종 6) 훈련원부정 겸 내승이 되었다.
1656년 혜산진첨절제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함경북도병마우후가 되었다.
1658년 청나라의 원군요청으로 함경도의 조총병 200여명을 거느리고 영장(領將)이 되어 나선정벌(羅禪征伐)에 참가, 흑룡강까지 원정하였다.
이때 러시아의 스테파노프선대(船隊) 10여척을 불태우고 적장 스테파노프 이하 270명을 살해, 그 패잔병을 전멸시켜 이 지역을 넘보지 못하게 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김해부사·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669년(현종 10) 경상좌도병마절도사, 1674년 황해도병마절도사를 지내고, 이듬해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가 1681년(숙종 7) 포도대장이 되었다.
저서로는 나선정벌을 기록한 《북정일기(北征日記)》가 있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申統制 瀏 1680년(숙종 6)
才賦干城氣亦豪。經營弧矢久賢勞。統戎南海鯨波息。推轂西關虎節高。
石勒燕山心早許。塵棲楚劒計虛拋。緬懷洛涘過從興。吟罷哀詞淚滿袍。
정석(鄭晳) 1619년(광해군 11)∼미상.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백야(白也), 호는 악남(岳南).
효준(孝俊)의 아들이다.
1649년(인조 2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학정(學正)·정언을 거쳐 지평이 되어 1654년(효종 5)에 인조의 총희 조숙원(趙淑媛)문제를 논하다가 영산(靈山)에 유배되었다.
2년 뒤 복관되어 정언·지평·장령 등을 역임하였고, 1662년(현종 3)에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으로 문신정시(文臣庭試)에 3등으로 합격하였다.
그뒤 수찬·교리·집의·응교를 거쳐 1669년에 동래부사가 되어 왜관(倭館)을 동래부로 옮기기도 하였으나 왜인을 잘 규리(糾理)하지 못하였다 하여 파면되었다.
그뒤 승지·대사간을 거쳐 예조참판이 되었고, 1679년(숙종 2)에 《명사(明史)》 가운데 잘못 기술된 인조반정 기사를 바로잡기 위하여 변무부사(辨誣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악남집》 1책이 있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鄭參判 晳
曩屬文昌會。寧陵造士時。華譽擅詞壇。羽儀漸鴻逵。不佞聯步武。歲晏指襟期。名場同伯仲。世路共平陂。出處顚沛間。賴君先後之。交誼特地密。海嶽尙可移。余纏風樹痛。守廬洛水湄。路闊書猶數。勖以善扶持。深荷故人情。空敎涕交頤。生還重盍簪。當喜反增悲。周旋曾幾日。君今忽騎箕。憶君策名初。文學動見推。棣萼交輝暎。門欄福履宜。雅韻掃羣啾。偏承四朝知。臺端頻獻替。經幄久論思。喉司仍啓沃。巖廊又畫奇。名論傾前輩。始卒璧無玼。蘊蓄旣云富。從此可大施。是以有譽處。多士共伸眉。初聞臥牀褥。何曾生死疑。塵冗縛我苛。踵門苦恨遲。問疾才一宿。凶音遽爾隨。愷悌宜壽祿。天胡不憗遺。神理不可詰。斯人止於斯。金天收爽氣。吾黨失蓍龜。家庭留玉樹。積慶驗在玆。若堂開新阡。薤露引幽儀。朋賓集祖道。不忍送靈輀。孤蹤轉踽踽。無復承箴規。存亡今日痛。奚但爲吾私。
권대재(權大載) 1620년(광해군 12)∼1689년(숙종 15). 서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거(仲車), 호는 소천(蘇川).
예조판서 협(悏)의 손자이고, 진사 위중(偉中)의 아들이다.
1646년(인조 24) 사마시에 합격하고, 1653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선발되었다.
1658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에 승진되었고, 병조좌랑·창평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660년(현종 1) 전라도도사 1666년 공산판관(公山判官)을 지냈다.
그 뒤 격화된 당쟁의 와중에서 남인으로 처신하였기 때문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의 관직생활도 평탄하지가 않았다. 두 차례의 예송(禮訟)을 거친 뒤 남인이 정권을 잡자, 승지·영남순무사·대사간·대사헌·예조참판 등을 역임하면서, 송시열(宋時烈)의 처벌을 적극 주장하였다.
남인이 허목(許穆)을 중심으로 하는 청남(淸南)과 허적(許積)을 중심으로 하는 탁남(濁南)으로 분열되자 청남에서 활동하였고, 1679년 청남이 정권에서 물러나면서 종성부사(鍾城府使)로 쫓겨났다. 그해 10월에 전라감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경신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정권을 잡자 영변(寧邊)으로 유배되었다.
그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정권을 잡자 홍문관제학으로 등용되었다. 같은해에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주전(鑄錢)을 반대하였고, 송시열과 김수항(金壽恒)을 죽일 것을 주장하였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權公山 大載 大夫人
儀修榛栗在芳年。人賀公姑得婦賢。謨訓閨中森玉潔。兒孫膝下被陶甄。
門容駟馬徵餘慶。劒合重泉續舊緣。投袂升堂知已矣。不堪題挽涕漣漣。
권두망(權斗望) 1620년(광해군 12) 단성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첨(子瞻). 호는 명암(明庵)
아버지는 진사 극중(克重)
숙종(肅宗) 1년(1675) 진사시 합격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權斗望]
家庭儒雅擅聲名。平步雲衢士望傾。台閣共期推宿德。泉臺誰料抱深惸。
魏碑起踣流新澤。董筆褒賢換舊旌。堪歎二郞齎恨沒。終然獨不見時淸。
이경억(李慶億) 1620년(광해군 12)∼1673년(현종 14). 서울 출생.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석이(錫而), 호는 화곡(華谷).
아버지는 판서 시발(時發)이며, 어머니는 승지 신응거(申應榘)의 딸이다.
7세에 아버지가 죽고 편모슬하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재지가 출중하여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수재였다.
1644년(인조 22) 25세의 젊은 나이로 정시문과에 장원하여 예조와 병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세자시강원사서가 되었다.
1651년(효종 2) 귀인 조씨(貴人趙氏)와 김자점(金自點)의 역모사건에 관련되어 파직된 대사헌 조석윤(趙錫胤)을 구하려고 간하다가 효종의 노여움을 사서 경성에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어 돌아왔다.
1653년 순안어사(巡按御史)가 되어 영남 지방의 민정을 시찰하고 탐관오리를 징계하였다.
이듬해 정언이 되어 수천언의 봉사(封事)로 시폐를 진언하였고, 수찬·사인 등을 지냈다.
1659년 대사간을 지내고 이어서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1661년(현종 2) 좌승지를 거쳐 대사성이 되고, 1664년 부제학을 지낸 뒤 한성우윤·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1668년 동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고 이어서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뒤 이조와 호조·예조·형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그뒤 1672년에는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다. 천성이 밖으로는 엄격하였으나 내부로는 따스한 인정이 넘쳤다. 수염이 길고 풍채가 아름다워 일견 미남자였으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명백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의 사의가 간여하지 못하였다.
저서로는 《화곡유고》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歸巖先生文集
祭文
祭李左相 慶億 文 甲寅 1673년(현종 14)
嗚乎。人之生也。稟於天者。罕得其全。修諸己者。常患其偏。纔長於此。輒短於彼。何者。簡則易從。而喜簡之弊。幾無以御煩。靜則有定。而好靜之害。亦難與制動。若其簡焉而足以御其煩。靜焉而足以制其動者。古之君子。尙或難之。降而叔世。又何論哉。恭惟相國。歉然辭巽而言若不出口。其簡也至矣。退然溫克而體若不勝衣。其靜也專矣。猶且事至而能擧。無煩之不可御。物來而順應。無動之不可制。故字牧之政。獻替之職。繡衣之廉訪。方面之廵宣。以至於經幄之論思也。廊廟之籌畫也。無所試而或屈。則其所以蜚英聲於一代。荷殊恩於三朝。身居黃閣。名流靑史者。夫豈無自而致之歟。嗚乎。我之所以愛公之深。公之所以遇我之親。非直爲聯派之分婣厚之情而已也。公以有餘於身者。匡我之不給。我以循省於心者。聽公之劘礪。我自冥行而取躓。則公必指迷而燭幽。我嘗罹讒而見擯。則公乃永歎而深惜。雖不得拯引於坎壈之途。未嘗不獨扶於羣非之中。蓋知余之疎直。恕余之無佗。而亦所以惡世之深文也。始吾外祖。與公先子。義是姻婭。契則金蘭。氣槩以相許與。才器以相推重。受任於敗軍之際。奉命於危難之間。督師關河。籌策克合。決議鞍峴。功業相侔。分義之重。厥惟舊哉。公居洛下。我在嶺表。道里非不遼迥也。公方顯揚。我猶屛伏。雲泥非不間闊也。然且佩符湖外之時。饋問遠及。按事嶠南之歲。存訊委辱。此在相國。固是餘事。而亦豈易得於今世人者哉。新安公館。始承良覿。玉山郡齋。重接淸範。而曾未幾何。余入京師。公曁仲氏。迎慰慇懃。參尋私第。過從禁掖。對直廬於翰苑。忝僚席於銀臺。警誨諄諄。衷情款款。此身之受賜於二難。於是而益厚矣。俄陞卿月。元季並美。聯步雲梯。朝野共豔。豈料悲歡之迭催。旋見喪難之荐臻。纔躋八座。而仲氏奄歿。逮登三台。而相國遽亡。將邦家之不幸耶。抑斯民之無祿耶。聽天命之脩短而去難追者耶。厭世路之混濁而淹不得者耶。夫旣降之豐如彼。而又何奪之速若是哉。嗚乎。今之謂巍論之士者。偏刻峭急以爲能。而公之持議。務從平允。世所稱直截之風者。排擊震撼以相尙。而公之處事。常欲周全。士必矯激而公不好嫺飾。人多矜伐而公未嘗衒耀。馬不塡巷。豚不掩豆。蕭然一室。自同寒士。此又衰叔之所罕見。而公未肯自大者也。惟其溫良愷悌之姿。今難得以復見之矣。開導規箴之言。今不可以復聞之矣。事孰從而咨之。疑孰從而質之哉。噫百僚之冠。位莫隆也。搢紳之範。名不朽也。盈庭蘭玉。福未艾也。得其正而全歸之。死無可悲也。吾不須悲而猶不能不悲。豈上以爲朝廷。下以爲吾私。自不覺心欲摧而腸欲裂也耶。世事悠悠。塵冗若掣。星霜冉冉。初朞忽至。一瓣心香。始在今日。九原有知。無以爲顔。文不盡意。哭有餘哀。已亡者雖亡。不亡者猶存。幸垂冥應。降歆菲誠。
이연년(李延年) 1620년(광해군 12)∼1672년(현종 13). 서울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익(子益), 호는 탄은(灘隱).
증조부는 홍제(弘濟), 조부는 정직(廷稷), 아버지는 적(積)이고, 생부는 적(𥡦)이다.
외조부는 강홍적(姜弘勣), 처부는 호조참의(戶曹參議) 민광훈(閔光勳)이다.
1646년(인조 24) 병술(丙戌)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 23위에 합격하고, 1650년(효종 1) 경인(庚寅)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20위에 급제하여 이조좌랑(吏曹佐郞)·예조참판(禮曹參判)을 역임하였다.
1672년(효종 13)에 함경도 함흥부의 정화릉(定和陵)에 있는 정자각(丁字閣)에 불이나 이를 살피러 가다가 안변(安邊)의 남산역(南山驛)에서 병사(病死)하였다. 발병했을 때에 조정(朝廷)에 보고하니 효종(孝宗)이 의관(衣冠)을 보냈으나 채 도착하기 전에 병세가 심해져 죽고 말았다. 이에 의금(衣衾)과 관곽(棺槨)을 내리고 예법(禮法)에 맞게 상(喪)을 치르도록 하였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李參判 延年○壬子 1672년(현종 13)
歷數平生友。惟君最炳靈。寬仁由稟賦。詩禮自家庭。槐市連華蓋。花甎近御屛。汲塋搜古籍。戴席稽前經。巍論氷生壑。淸譚刃發硎。持衡留藻鑑。剖竹燕嫠煢。禮部陞卿月。邊城晦使星。悠悠世上事。草草客中蓂。嶺雪歸魂泣。關雲去路暝。生前無甔石。身後有螟蛉。子似銜蘆鴈。吾猶腐草螢。襟期雙照劒。出處兩浮萍。榮辱頭俱白。京鄕眼幾靑。世交仍托契。末路更忘形。禁省挑燈話。江齋對酒醒。傾懷情款曲。在耳語丁寧。鶴髮哀何耐。鸞奩血不停。衋傷遍士友。痛惜徹朝廷。江樹添新候。庭梅減舊馨。郵亭迎送處。一慟動冥冥。
祭李參判 延年 文 1672년(현종 13)
嗚乎哀哉。大造賦予。縱有厚薄之不齊。賢愚貴賤。畢竟同歸於一致。爲尻爲脊。誰得誰喪。達觀之士。已有定論。吾非獨昧乎此也。惟是生而未究其施。死有不忍寬譬者。則雖不欲深惜而長悲。終可得乎。夫以兄才識之弘遠。器度之淵深。蜚英妙齡。發軔長途。深荷聖明之知。特躋卿月之班。惟其蓄于身者不貧。是以得於君者如彼。兄自以盡瘁爲期。人亦以公輔待兄。孰謂長轡未半。隙駟先催。使我後死之友。重抱失侶之慟耶。嗚乎。慈顔在堂。景迫西山。伯氏佩符。路遠南徼。斑衣歸寧。曾未幾時。而朔雪馳驅。重嬰二豎。遊子枕邊。空有思親之淚。王孫暮出。永孤倚閭之望。人情到此。能不悲哉。嗚乎。夤緣世誼。追隨後塵。同襟聯袂。披肝照膽。以至科場之得失。世路之平陂。備閱共賞者。今垂三十年矣。時加規警。間以諧謔。推兄有餘。補我不足。將期此樂之莫違。遽見大限之易促。天乎天乎。此何爲哉。皇華之行。路出弊境。緣王程之苦忙。慨逢場之未洽。屈指前期。不月當旋。臨分一言。丁寧在耳。而轉眄之間。人事忽變。昔送朱軒之地。今迎素車之塵。天乎天乎。此何爲哉。嗚乎。年未克壽。位不稱德。仁孝家聲。只付螟蛉。報施之理。亦已舛矣。疑無與質。過無與規。覊危之蹤。益復無儔。吾於此安得不深惜長悲。直以達觀者自居乎。嗟乎嗟乎。重可哀也。文不可以盡言。言不可以盡哀。物雖菲薄。情實由中。靈其知也耶。其不知也耶。
이운근(李雲根) 1620년(광해군 12) 충주 출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덕배(德培)
아버지는 시익(時益)
인조(仁祖) 20년(1642) 생원시에 합격하고,
효종(孝宗) 1년(1650)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직강. 전경문신. 서산군수. 의령현감.
공조정랑. 성균관 사예를 역임하였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李相禮 雲根
龍榜魁名早。鵬程闊步遲。巨創哀未闋。毒瘴病難醫。
忍訣堂中老。堪憐膝下兒。無由馳白馬。雪涕謾題詞。
홍여하(洪汝河) 1620년(광해군 12)∼1674년(현종 15). 안동(安東)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백원(百源), 호는 목재(木齋)·산택재(山澤齋).
대사간 호(鎬)의 아들이다.
1654년(효종 5) 진사로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이 되고 이어 대교·봉교 등을 역임하고, 정언에 이르러 효종에게 시사(時事)를 논하는 소를 올려 왕의 가납을 받았으나 반대파의 배척을 받아 고산찰방으로 좌천되었다가 1년 만에 사퇴하였다.
1658년 다시 나아가 경성판관이 되었으며, 왕의 하문에 의하여 소를 올렸으나 그 소문에 이후원(李厚源)을 논박한 구절로 말미암아 이조판서 송시열(宋時烈)이 사직하는 등의 문제를 일으켜 황간(黃澗)에 유배되고, 이듬해에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가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74년(숙종 즉위) 제2차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송시열이 추방되는 등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자 다시 등용되어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이어 사간에 이르렀다.
특히, 주자학에 밝아 당시 사림의 종사(宗師)로 일컬어졌다.
1689년 부제학에 추증되고, 상주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목재집》이 있고, 편서로는 《주역구결 周易口訣》·《의례고증 儀禮考證》·《사서발범구결 四書發凡口訣》·《휘찬여사 彙纂麗史》·《동사제강 東史提綱》·《해동성원 海東姓苑》·《경서해의(經書解義)》 등이 있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洪木齋 汝河○乙卯 1675년(숙종 1)
才高命達古來難。不得朝廷一日安。中歲陶潛竆理窟。弱齡曺植富詞瀾。
蒼天速奪文將喪。紫誥新頒墨未乾。宇宙從今誰暖眼。哀詞題罷淚闌干。
木齋先生文集
詩
評易,詩,史法。寄睦來之 來善 ,李士徵 元禎 二學士。
男兒大業受命初。生此東韓亦不虛。萬里山河禹貢外。千年禮樂箕疇餘。
碩儒譚易多臻妙。騷客言詩或起余。祇有史家門路錯。發揮心法正須渠。
*送李士徵令公序
夫倫五而朋友一焉。其爲道與兄弟不殊焉。兄弟之情。聚而處則懽。懽則愉。愉則樂。樂則生。生則油。油如也。離則悲。悲則思。思則愁。久而不見則其中悒悒若有所失然。病則爲之慼然而憂。喪則爲之悲號摧慟而不知止。斯固出於情之自然。非自外至者也。其於朋友亦然。聚則懽然而樂。離則愀然而思。憂其病而哀其喪。亦出於情之自然。而非自外至者也。噫。兄弟 固然戚也。友疏也而情若斯之篤。何也。同生於天地之間。同稟其氣之秀者。而爲君子焉。擇其稟之秀與吾同而與衆人異者而友之焉。學同也。業同也。進而事君則義同也。退而講明則道同也。有兄弟之道焉。故有兄弟之情焉。此其爲一於倫。而與君臣父子夫婦兄弟四者而五也。然倫焉而不及師。何也。師友一倫。稱友而師擧之矣。師重而友輕。師有父之道焉。朋友有兄弟之道焉。故古之人。於師則若喪父而無服。於朋友則若喪兄弟而無服。其爲道重矣。獨怪夫東國俗誠厚矣。於師友也。殆近於薄乎。存而相與也。歿 而相忘也。及其子孫。漠然路人視者滔滔。不逮中國甚何也。吾東達喪。行於皁隷下賤。而士庶婦女無行再醮之禮者。餘可類也。其於四倫則可謂豐矣。豐其四故嗇其一。亦理宜也。若吾士徵則不然。士徵之大父曰石潭先生。石潭先生之師曰寒岡鄭先生。鄭先生棄後學久。士徵不及登門矣。士徵乃推其家學之所自。先世愛慕之遺意。深慕悅於鄭先生。其至誠暢於中。而見於辭氣。動於四體而可知也。厓愚之門之士之慕厓愚也。則不若之矣。吾故有取於士徵焉。夫篤於師也如此。則其於友道可知。於東國之所嗇如 此。則其所豐者從可知已。此吾深有取於士徵也。歲戊申。士徵以樞密直南北軍逾歲。一日不樂在朝。呈告下鄕。余遇之咸寧客館。聯枕敍話。臨別相顧。有愀然之思。故敍此以贈焉。然吾以士徵於鄭先生。不唯徒慕之爲。而深用力於鄭先生淵源之學。斯可矣哉。
정박(鄭樸) 1621년(광해군 13)∼1692년(숙종 18).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문(子文)이다.
증조는 원희(元禧)이고, 조부는 흠(欽)이다. 아버지는 효준(孝俊) 외조부는 이진경(李眞卿)
1652년(효종 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관직은 정언·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1660년(현종 1) 약방 입진을 거부하는 국왕에게 간언하고, 개성유수 남노성(南老星)을 탄핵하는 데 반대하였다. 1674년(현종 15) 강계부사로 재직 시 월경 범죄자를 잘못 다스린 죄로 직첩(職牒: 조선시대 관리로 임명된 자에게 수여한 증서)을 박탈당하였다. 그 후 다시 복직되어 승지·대사간(大司諫) 등을 지내면서 남인 당론을 행사하였으나,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서인에 의해 광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파직되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다시 등용되어 대사간·한성부우윤·강화유수·도승지 등을 지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鄭樸]
維嶺之南第一人。夙登崇秩任經綸。秋荼忍說庚申禍。天道終看己巳伸。
寵極中牢祠墓日。忠徵大鳥集墳辰。儼然方伯持緦服。回首新阡涕滿巾。
정홍현(鄭弘鉉) 1621년(광해군 13)~1698년(숙종 24) 星州(성주)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원길(元吉) 호는 사포(沙浦)
조부는 군자감판관 언의(彦義0. 아버지는 훈련원봉서 창영(昌榮)
沙浦先生遺集
挽李判書 元禎
無前千古變余欲默無言雪枉逌天道崇封亦聖恩德門全舊福壽宅占新原白首人間客哀章灑淚痕
홍주삼(洪柱三) 1621년(광해군 13)∼1682년(숙종 8).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정경(鼎卿), 호는 월탄(月灘).
대사헌 이상(履祥)의 손자이며, 곽(霍)의 아들이다.
1653년(효종 4)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언과 수찬·교리 등을 거쳐, 1664년(현종 5) 사간이 되었다. 그해 서원현감(西原縣監)으로 전출, 재직 중 충청병사 이두진(李斗鎭)과 불화상투(不和相鬪)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뒤 집의로 복직된 뒤 좌부승지·광주목사(廣州牧使)·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洪執義 柱三 大夫人
慕堂遺敎在門庭。早識夫人德可刑。薪火共稱虞氏謹。蘋蘩咸頌謝家馨。
一男華顯今三品。八耋光陰又五齡。投袂升堂知已矣。薤歌凄斷不堪聆。
장영(張銢) 1622년(광해군 14)∼1705년(숙종 31). 인동 남산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명세(鳴世), 호는 소매당(訴梅堂).
아버지는 부제학 청천당(聽川堂) 응일(應一)이며, 어머니는 야로송씨(冶爐宋氏)로 부사 광정(光廷)의 딸이다. 조부 문강공 여헌(旅軒) 현광(顯光)에게 가학(家學)을 이어받았다.
선생의 매부
1662년(현종 3)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671년에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를 제수받았다.
그뒤 효종과 숙종 양조에서 경안찰방(慶安察訪)·고령현감·이인찰방(利仁察訪)·군자감판관·공조정랑·경흥창주부·세자익위사위솔(世子翊衛司衛率) 등을 역임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에는 인정(仁政)을 베풀고 공평, 청렴하였기 때문에, 붕당이 극심하던 당시의 정계상황에서도 한번도 옥사에 휘말리지 않았다.
특히 이인찰방으로 있을 때에는 각 역전(驛田)이 모두 피폐하여 그곳 주민들의 생계가 어려워지자, 그 사정을 조정에 진정하여 세금을 면제받도록 하여서 그곳의 생업을 진작시킨 일도 있었다.
그밖에도 병자호란 때의 의사 채무(蔡楙)를 소암사(嘯巖祠), 이사룡(李士龍)을 옥천사(玉川祠)에 각각 봉향하였으며, 그들의 애국충절을 기려 널리 후세에게 본받도록 하여 미풍양속을 진작시키는 데 힘썼다. 호조참의로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소매당유집》 1권이 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張銢]
賢門令望屬華胄。雲路崇班荷聖恩。大手方期調鼎日。藎臣終作覆盆魂。
誰將存沒問蒼天。祇感榮伸泣九原。聞道靈川移奉地。重霑衰淚十年痕。
김방걸(金邦杰) 1623년(인조 1)∼1695년(숙종 21). 안동 지례
본관은 의성. 자는 사흥(士興), 호는 지촌(芝村).
아버지는 표은 시온(是榲)이다.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75년 지평, 이듬해 정언을 거쳐 장령이 되어 이서(吏胥)들의 방납(防納)으로 인한 백성들의 피해를 상소하였다.
그뒤 부수찬·수찬 등을 지내고 1689년 사간이 되었으나, 그해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가 폐위되자 간관(諫官)으로 왕의 과오를 사전에 방지하지 못한 데 책임을 느껴 낙향했다.
이듬해 승지가 되었으며 1692년에 대사간, 이듬해 대사성을 지냈다.
갑술옥사 때 동복으로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졸하였다.
저서로는 《지촌문집》이 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金邦杰]
湖土冤封歲十更。快看天日照忠貞。文章德義全朝望。器局風流間世英。
剛恨廟謨終未展。從知國是久逾明。白頭不盡公私慟。爲向新阡倍愴情。
원만석(元萬石) 1623년(인조 1)∼1667년(현종 8). 서울 출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군옥(君玉), 호는 고산(孤山).
아버지는 좌상 두표(斗杓)이며, 어머니는 사간 최동식(崔東式)의 딸이다.
일찍이 부조(父祖)의 세력을 믿고 사람을 죽였다는 죄목으로 하옥된 바 있으나 인조의 특명으로 방면되었다.
1649년(인조 2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주서에 기용되고, 1652년(효종 3) 지평·정언·문학을 역임하였다.
1654년 세자시강원사서로 있을 때 시폐 열가지를 상소하여 왕의 우비(優批)를 받았다.
이듬해 장령이 되고 세자시강원필선을 거쳐, 1656년 경상도에 전대미문의 흉년이 들었을 때 왕명으로 진구어사(賑救御使)가 되어 열 읍을 순회하면서 민정을 보살피고 기민을 구제하여 은덕을 폈다. 그해 헌납을 지내고 이듬해 동래부사가 되어 어려운 왜금(倭禁)의 책임을 완수하였다.
1659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그해 사우(祠宇)의 신주(神主)를 도둑맞는 일이 생겨서 추고(推考)의 처분을 받았다.
1662년(현종 3) 병조참지가 되고 이듬해 좌부승지를 거쳐, 1664년 우승지에 올랐다. 성격이 쾌활하여 일을 처리함에 과단성이 있었고, 민정을 잘 살펴 국민과 조정에 교량구실로 시폐를 논하여 시정을 촉구하였다.
한때 권력을 남용하였다는 반대세력의 비평을 받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명관으로 알려졌다.
歸巖先生文集
書
與元承旨 萬石○辛丑 1661년(현종 2)
頃於進上領吏便。修付一札。而其行苦遲。必未及達也。不審寒兇。大監氣體若令候起居如何。遠慕不弛。元禎勞拙日甚。疾病日加。不速之客。又發僭猥之請。前與令兄同事。尙不免見非於一世。况今獨當。幾何其不至於生事耶。元禎之妄料別差倭接待。實是規外。而有事則順付歲船來告者。乃約條中大節目。故曾前陸續出來者。皆不受書契。不許接待矣。鄕接慰官則始於乙亥。京接慰官則創於壬午。襲謬已久。雖不可猝然復舊。至於不問其言之善惡其事之當否。而幷許館接。則無乃過乎。今玆移館之請。在所當許。則差遣京官。設茶禮受書契可也。苟以爲釜城斷不可許。倭館決不可移。則茶禮何須設。書契何必受。京官亦何苦而差遣乎。旣行茶禮則自有接應節目。夫旣待之而不欲許之。豈不難哉。彼中凡事。一發於口。則必以死爭。雖有儀秦千百。終難動得。而朝廷欲以譯舌止之。此而不得則專責東萊釜山。以示威於彼。彼不曾動其一髮。適足以倍增驕氣。以二官及譯輩禍福。謂在其手。而恐喝愈急。尤可痛也。此事機關。所繫非輕。廟堂議處。必須原始要終。庶無後悔。幸稟達于大監。詳示如何。
이두광(李杜光) 1623년(인조 1) 성주(星州)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경휘(景輝)
아버지는 진사 이중형(李重亨)
효종(孝宗) 3년(1652) 진사시에 합격
歸巖先生文集
書
與李進士 杜光○壬子 1672년(현종 13)
遠承惠札。如對慰滿。未委信後起居何如。懸溯區區。元禎千萬夢寐外。猝聞從弟之訃。慘裂心事。何可忍言。重以季父衰病中遭此至痛。尤用是煎念。先尊丈碣陰之託。決非短於觚墨者所敢當。而重孤盛意。切非兩家相愛之道。忘拙構呈。慚忸無已。
이유상(李有相) 1623년(인조 1)∼1673년(현종 14). 서울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세경(世卿), 호는 동둔(東芚).
월사 정구(廷龜)의 손자이며, 형조참판 소한(昭漢)의 아들이다.
1642년(인조 20) 사마시를 거쳐,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62년 지평, 1663년 부교리·헌납 등을 지내고, 이듬해 이조좌랑을 거쳐, 1666년 이조정랑·응교·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시문과 초서에 뛰어났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李應敎 有相 1673년(현종 14)
相公遺敎在賢孫。雲路聯翩弟與昆。玉署論思留舊價。粉銜哀贈煥新恩。
佩符湖外初傾蓋。接閈城東屢踵門。喪盡朋知誰暖眼。不堪題挽淚䨥痕。
정회(鄭澮) 1623년(인조 1) 성주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심원(深源)
아버지는 홍부(弘簿)
효종(孝宗) 2년(1651) 진사시 합격.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鄭澮]
石潭先生兮。毓德行些。諫議大夫兮。直氣抗些。世濟其美兮。公迺生些。秋月揚輝兮。春風盎些。冰玉養精兮。鐵石剛些。南州第一兮。北斗名些。金門待詔兮。玉堂英些。地崇冢宰兮。顒望協些。經邦致理兮。萬手額些。時何罔極兮。釀奇禍些。爭天力微兮。一網打些。投荒禦魅兮。蓋已甚些。是可忍爲兮。鍛鍊慘些。殲我良人兮。百難贖些。邦失蓍龜兮。朝野惻些。士喪領袖兮。章甫嘖些。火色益高兮。餘燄及些。無罪季方兮。冤何深些。天道蒼茫兮。實難諶些。哀哉校理兮。奚短折些。痛矣大憲兮。何亡促些。淸時未見兮。飮恨極些。地下冤魂兮。長鬱悒些。人間藐孤兮。魚銜索些。何幸天心兮。竟悔禍些。公議旣昭兮。容光射些。一洗天波兮。玉無瑕些。隱死贈秩兮。賁泉臺些。哀生眷深兮。秋蘭偕些。詔許歸養兮。玉節來些。觀風暇餘兮。營禮窆些。新卜宅兆兮。㯃燈驗些。誠孝所感兮。福未斬些。神明之佑兮。將發祥些。舍舊就新兮。妥英靈些。必誠必信兮。子職殫些。盡哀盡禮兮。四方觀些。幽明無憾兮。志願終些。顧余不佞兮。獲登龍些。辱知偏厚兮。得御數些。乙冬聯枕兮。開心曲些。丁夏餞席兮。善戲謔些。琅琅笑語兮。響耳側些。今日哭柩兮。隔窀穸些。他年入地兮。倘合幷些。哀詞題罷兮。淚零零些。
심재(沈梓) 1624년(인조 2)∼1693년(숙종 19). 서울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문숙(文叔), 호는 양졸재(養拙齋).
유행(儒行)의 아들이다.
1654년(효종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검열을 지냈다.
1663년(현종 4)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67년 교리를 거쳐 승지·경기관찰사·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677년(숙종 3) 사은 겸 동지부사(謝恩兼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여 대사간·경기관찰사·도승지·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남인의 과격파로 1689년 기사환국 때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남인이 쫓겨난 경신옥사의 원통함을 말하였고 세자(뒤의 경종) 책봉을 반대한 송시열(宋時烈)·김수항(金壽恒) 등을 강력히 탄핵, 유배시켰다.
그해 좌참찬을 거쳐 1693년 판중추부사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죽은 이듬해 갑술옥사가 일어나 관직이 추탈되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沈梓]
早負淸朝望。仍爲柱石臣。文章傳世業。忠義凜秋旻。
貝錦俄成織。經綸竟未伸。是非今始定。惜不見昌辰。
윤우갑(尹遇甲) 1624년(인조 2)
본관은 칠원(漆原). 자는 계형(季衡)
아버지는 도사 유길(有吉)
인조(仁祖) 20년(1642) 진사시 합격
효종 3년 천거로 전생서 참봉이 되고, 효종 7년 의금부도사. 현종 2년 직장.
현종 4년 공조좌랑. 현종 9년 황주판관이 되었다
歸巖先生文集
祭文
祭尹判官 遇甲 文
嗚乎痛哉。慈詳愷悌之德。如兄者果幾人也。文雅英妙之才。如兄者又幾人也。之德也宜其食報于天。而四十八歲之光陰。直是轉眄之頃。則誰使促之而未享脩齡耶。之才也宜其展武於世。而一官五品之功名。徒切潦倒之歎。則誰使泥之而竟淹長程耶。德者無所自勉。才者未必不懈。倘所謂天道者。是耶非耶。言念傾蓋之樂。粤在勝冠之年。重聯姻戚之誼。遂托弟兄之情。磨肌戛骨。壎唱箎和。年相若而志相合。過則規而善則勸。共保此樂。期百年之莫違。何天不憗。奄一夕而長辭。人事到此。我懷伊何。幸賴鸞鵠之停峙。有託堂構之繼述。駟馬門高。于公之業可大。三槐庭植。王氏之緖必昌。意者不昧之靈。其亦以是而自慰耶。向之宜食而不食。宜展而莫展者。或者有待於此也耶。嗚乎慟哉。己丑渡灞。我與兄偕。而分歧於槐山。丙申還鄕。兄與我俱。而留別於西原。行則聯轡。止則同館。傾倒囷廩。間以調諧。當時之事。杳然如夢。而弟赴燕山之歲。兄佐黃岡之幕。送往迎來。惜別喜逢。還洛之行。兄又與同。團圓之興。宜何量哉。而兄旣解歸。我遭顚躓。恨良晤之苦遲。遽凶問之先報。天乎神乎。此何爲哉。星霜易周。琴祥忽迫。九原莫作。萬事長已。如割之慟。益復難制。荒詞薄奠。旣不足以紓哀。畏途危踪。又不能以躳造。薦雖代手。哭不借聲。有盡者文。無竆者悲。靈如有知。庶賜降格。
김태기(金泰基) 1625년(인조 3, 을축)∼1700년(숙종 26, 경진). 안동 천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안안(安安). 호는 무위당(無爲堂.)
증(贈) 승지(承旨) 시건(是健)의 장손이며 임(恁)의 맏아들이다. 재종조(再從祖) 표은(瓢隱)의 문하에서 도의와 학문을 닦았으며 특히 시에 뛰어나 성망이 원근에 높았다. 몇 번 과거에 실패, 천운의 길을 단념했으나 조정의 천망(薦望)으로 능참봉이 되고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를 거쳐 장수찰방(長水察訪)이 되었으나 이는 가세가 어려워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얼마 뒤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은퇴, 호를 무위당(無爲堂)이라 하고 후진 배양과 가학을 계승하기에 전심했다. 아들과 두 조카가 대과에 급제하고 형제들이 수직으로 영직을 누리게 되어 모두들 축하를 보내왔으나 공은 집안이 너무 번화함을 오히려 경계했다.
갈암 이현일, 고산 이유장 등과 깊이 사귀었다. 저서:『無爲堂集』.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金泰基]
德業文章萬口談。幾年衡席坐潭潭。蠅飛白玉曾何忍。日照丹衷古不慙。
千載大名星斗動。九原崇秩聖恩涵。白猿黃兎相先後。地下從遊死亦甘。
無爲堂集
*贈李判書士徵[元禎]
이복(李馥) 1626년(인조 4)∼1688년(숙종 14) 성주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면여(勉餘), 호는 양계(陽溪),
아버지는 상규(尙規)이며, 어머니는 덕산황씨로 하징(河徵)의 딸이다.
이구(李坵)에게 경사(經史)를 배우고 궁리치지(窮理致知)에 힘썼다.
1651(효종 2)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54년 명경(明經) 갑과에 급제하여 사옹원(司饔院) 직장(直長)이 되었다. 1658년 안동교수(安東敎授)에 임명되고 1660년 전적(典籍)을 거쳐 감찰(監察)이 되고 이어 예조정랑이 되었다. 1663년 만항현감(萬項縣監)이 되어 치적이 훌륭하여 포계(褒啓)를 입고 호조좌랑, 예빈시정(禮賓侍正),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하였으며 기해방례(己亥邦禮)의 잘못을 지적하여 고묘(告廟)와 반교(頒敎)를 청하고 종부사정(宗簿司正), 장악원정(掌樂院正)을 거쳐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어 통정대부에 올랐다. 1679(숙종 5)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라 형조참의가 되었으나 반대당의 무고로 삼영(三水)에 유배되어 1686년 흥양(興陽)에 이배(移配)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陽溪先生文集
0答李判書[元禎○戊午] 1678년(숙종 4)
新元伏惟大監體候增福已極贊賀之忱況又新巡相閣下中路發痘證情極順已出全安之境驚慮之餘不勝欣抃之私十月書中有力主保合今似粗安之示此實朝廷之幸而士類之福也非大監斡旋之力向來爻象豈能容易滾合幸願終始周旋俾無一簣之虧也合必離離必合宋朝群賢之所不免今之時又安可必其合而不必其離也此則不待鄙言大監亦必先爲之所尤令人恃而無恐也第未知書後已有日目前景色又作何如便還槪示之也閔汝直事極可驚歎成事遂事欲言何言只自仰屋而已馥遠離老母淹滯瘴鄕三年於此矣私心切迫有不可言也
이화진(李華鎭) 1626년(인조 4)∼1696년(숙종 22).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서(子西), 호는 묵졸재(默拙齋)·묵재(默齋).
상관(尙觀)의 손자로 별제(別提) 지일(志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의병 오익창(吳益昌)의 딸이다.
1648년(인조 26) 진사가 되고, 1673년(현종 1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언·부제학을 역임한 뒤, 1677년(숙종 3) 동지자(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해 실시된 과거의 부정이 탄로되자 시관으로서 논죄되어 홍천에 도배되었다.
그러나 곧 용서되어 대사간·대사헌을 역임한 뒤, 1679년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또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병조참의를 거쳐 우부승지에 이르렀다. 경흥부사로 있을 때는 〈북로편의십사조 北路便宜十四條〉를 상소하였으며, 여러 지방관을 지내는 동안 선정을 베풀었다.
항상 마음을 애민(愛民)에 두고 일체 당론을 말하지 않고, 한가하면 시의 제작에 여념이 없어 시로도 유명하였다.
저서로는 《묵졸재집》이 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李華鎭]
昔在歲黃鼠。與公幸同榜。稠中始識面。一見知骨相。巖巖山嶽像。汪汪河海量。自是君子儒。令人心不忘。纔占錦標名。已負公輔望。人人競推轂。賢路誰與讓。風采動烏府。憸小氣皆喪。成均任師資。士趨知所向。居銓藻鑑明。人器各相當。議獄情罪平。囚繫無冤枉。歷試已底績。天工允時亮。未及登鼎席。奄見罹禍網。德星光淪沒。縉雲色慘愴。朝朝奏事地。寂寂曳履響。誰護竇武喪。堪憐馬援葬。天胡降割偏。玉樹又黃壤。循環一理在。王道復坦蕩。昭昭天日臨。深冤痛洗盪。紫誥侈祀典。黃閣加恩奬。寵章延小馮。卿月輝金掌。授以相州節。晝錦榮鄕黨。孝思無不盡。擇地改壽藏。靑烏得吉筮。山水儘明爽。粉書換舊旌。素幄臨新壙。從今體魄安。千秋永無恙。巋然五尺封。行路猶瞻仰。知公無所憾。死生皆榮享。但爲邦家慟。時危更誰仗。朝廷失龜蓍。士林無宗匠。况余情分深。一念常慕嚮。人間餘白首。牢落將安倣。詩成遠寄去。雙淚空滉漾。
이석규(李碩揆) 1627년(인조 5)~1666년(현종 7) 서울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거공(鉅公)
아버지는 영의정 이성구(李聖求)
인조 20년 16세 때 영의정의 아들로 심양에 인질로 갔다가 돌아왔다.
효종(孝宗) 3년(1652)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효종 9년 음서로 금절창방이 되고, 현종 2년 예안현감. 현종 3년 의금부도사. 1663년(효종 4) 단성현감(丹城縣監)이 되었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李丹城 碩揆 1666년(현종 7)
通家三世又婚姻。歲晏襟期卽一身。賢路由來多蹇滯。高才曾謂負經綸。
樓成白玉浮生促。庭植靑槐瑞色新。怊悵乾坤誰暖眼。山陽篴裏一傷神。
祭李丹城 碩揆 文 丙午 1666년(현종 7)
嗟嗟我公。而止於斯耶。生之非偶而奪之若是其忙耶。降之旣豐而畁之若是其嗇耶。古人之稱吉人者。不曰溫溫恭人。不曰謙謙君子乎。此於寒門賤族。而求之尙難能也。况名卿賢相。三世趾美。爲一世所宗仰。而生乎其門者。豈不尤難能哉。人所難能而獨能之者。吾於公見之。而斯猶不足爲公重也。若其行義之高潔。德性之純美。孝友之刑於家。忠信之著於朝。宜若食報於天有爲於世。而壽不過四十。官不過一縣。士安得不怠於爲善。人安得無惑於天道耶。嗟嗟我公。其止於斯矣。嗚乎慟哉。尙忍言哉。承先世契誼之厚。忝今日姻婭之好。嶺縣湖府。我往公臨。鄕居洛社。公訪我造。共期此樂。可保百年之莫違。孰謂一別。奄成千古之永訣耶。嗚乎。病急旅泊。喪出倉猝。妻子兄弟未及奔救。親戚朋友不得憑殮。幼稺滿室。嫠婦叫天。靈車返舊。賓朋迎路。都門祖道。殊異疇昔。人情到此。腸摧心裂。尙幸公生而爲衆人所共愛。歿而爲士林所同惜。庭植三槐。門容駟馬。則其與少而無聞。老而不死。生負尸肉之譏。死乏堂構之託者。孰爲得失也。公之達觀。宜有以自慰。而不復戚戚於全歸也。嗚乎。文不可以盡言。言不可以盡情。單杯瓣香。萬事長已。靈如不昧。庶幾來格。
이현일(李玄逸) 1627년(인조 5)∼1704년(숙종 30). 영해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승(翼昇), 호는 갈암(葛庵).
참봉 시명(時明)의 아들이며, 휘일(徽逸)의 아우이고, 어머니는 안동장씨(安東張氏)로 흥효(興孝)의 딸이다.
1646년(인조 24)과 1648년에 초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어 복시를 단념하였다.
1652년(효종 3) 중형 휘일의 《홍범연의(洪範衍義)》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666년(현종 7)에는 영남유생을 대표하여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예설(朞年禮說)을 비판하는 소를 올렸다.
1674년에 학행으로 명성이 높아지자 영릉참봉(寧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1676년(숙종 2)에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삼년상이 끝나지 않아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 이어 공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상경하여 사은(謝恩)하고 곧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어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78년에 공조정랑·지평에 임명되었으며, 외척의 용사와 당쟁의 폐단 등을 논하였다.
1686년에는 《홍범연의》를 속성(續成)하였으며, 1689년 산림(山林)에게만 제수되는 사업(司業)에 임명되고, 이어 사헌부장령·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며, 이때 인현왕후(仁顯王后)폐비문제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임술무옥의 신설(伸雪)을 건의하였고, 6월에는 산림유현(山林儒賢)의 벼슬인 좨주(祭酒)에 임명되어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이어 예조참판 겸 좨주·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에 제수되어 거듭 사임의 뜻을 표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8월에는 겸직과 함께 대사헌에 올랐고, 9월에는 인현왕후를 위한 소를 올렸으나 왕의 윤허를 얻지 못하고 11월에는 분황(焚黃)을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1690년 이조참판·세자시강원찬선에 임명되어 세자책례(世子册禮)에 참석하였고, 다시 대사헌·이조참판에 거듭 임명되었으나 그때마다 사직 상소를 내었다.
1692년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경신·임술 무옥의 신설을 건의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어 병조참판·자헌대부(資憲大夫)·우참찬·이조판서에 연이어 임명되었다.
1694년 4월 인현왕후가 복위된 뒤 갑술환국 때 조사기(趙嗣基)를 신구하다가 함경도 홍원현으로 유배되었다. 다시 서인 안세징(安世徵)의 탄핵을 받아 종성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으며, 유배지에서 글을 가르치며 《수주관규록(愁州管窺錄)》을 완성하였다.
1697년에 호남의 광양현으로 유배지가 바뀌었고, 1698년에 갈은리(葛隱里)로 이배되었으며, 1699년에는 방귀전리(放歸田里)의 명이 내렸다.
1700년에는 안동의 임하현 금소역(琴詔驛)에 이거하였다가, 여기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금양(錦陽)에서 집을 짓고 제생(諸生)을 강학하였다.
1701년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석방명을 환수하였으나 압송되지는 않았다.
1704년에 인덕리(仁德里)로 이거하였다가 금소로 돌아와 금양에서 죽었다.
1710년에 죄명이 풀리고 이듬해 복관되었다가 환수되었다.
1718년 영해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853년(철종 4)에 다시 복관되었다가 환수되었다.
1871년(고종 8)에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가 환수되었으며, 1909년에 관직과 시호가 모두 회복되었다.
영남학파(嶺南學派)의 거두로 이황(李滉)의 학통을 계승하여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고 이이(李珥)의 학설을 반대하였다.
저서로는 《갈암집》과 편서로 《홍범연의》가 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李玄逸]
曾列台衡地望尊。忽驚星坼九霄昏。重泉應結無竆恨。十載旋霑不世恩。
會値郞君方按節。改營斧屋要題幡。荒山衰疾孤綿漬。回首新阡獨斷魂。
송광벽(宋光璧) 1628년(인조 6)∼1701년(숙종 27). 영주
본관은 야성(冶城). 자는 문성(文星), 호는 응봉(鷹峯).
아버지는 진사 상헌(尙憲)이며, 어머니는 선성김씨(宣城金氏)로 교수(敎授) 우인(友仁)의 딸이다. 작은아버지 남파(南坡)의 문하에서 수학, 퇴도(退陶)의 학문에 힘썼다.
1657년(효종 8) 사마시에 합격하고, 1663년(현종 4) 전시에서 장원으로 발탁되어 승문원에 배속되었다.
1669년 박사로 승진하였고, 다음해에 가주서(假注書), 1671년에 정언, 1673년 승정원주서를 역임하였고, 이조의 좌랑·정랑을 거쳐 1675년(숙종 1) 순천부사가 되었다.
그뒤 장악원별제(掌樂院別提)·대구부사·단천부사 등을 거쳐서 다시 악정(樂正)이 되었는데, 이때 시국이 소란하자 자청하여 영암재(靈巖宰)로 파견나갔다.
그뒤 청송부사로 나갔다.
1693년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저서로는 《응봉유고》가 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宋光璧]
忍說當年黨禍竆。至今南國競沾瞳。靑山不語齎深痛。白日多情照舊忠。
千載妥靈移吉宅。一時褒贈煥幽宮。仰瞻星斗干天處。中有光芒認是公。
윤이제(尹以濟) 1628년(인조 6)∼1701년(숙종 27). 서울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여즙(汝楫). 세징(世徵)의 아들이다.
1663년(현종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676년(숙종 2) 의주부윤이 되고 강화유수·공청도관찰사 등을 거쳐, 1682년 진하 겸 진주사은부사(進賀兼陳奏謝恩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승지·동지중추부사·경기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 등을 거쳐 1689년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남인으로 어영대장에 임명되었다.
그뒤 한성부좌·우윤을 거쳐 판윤이 되고 형조판서가 되었다.
1691년에는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청나라 사신을 맞아들이기도 하였다.
그뒤로 비변사제조·우참찬·공조판서·형조판서·어영대장 등 요직을 지내다가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삭탈관작되어 향리 포천에서 은거하였다.
세번이나 도백을 지내고 다년간 병마권을 잡았으나 항상 청백하여 집에는 담장이 없었고, 스스로 몸가짐을 삼가하여 당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큰 화를 입지 않았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尹以濟]
往事傷心不忍言。幾年泉下抱幽冤。蒼穹悔禍伸丹筆。白日回光照覆盆。
前席溫綸輝史籍。禮官哀誄侈殊恩。非因誕說輕遷奉。祇是佳城卜吉原。
최영세(崔永世) 1628년(인조 6) 서울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향숙(享叔)
아버지는 거원(巨源). 생부는 장령 계훈(繼勳)
효종(孝宗) 1년(1650) 생원시 합격
천거로 남별전 참봉. 현종 5년 빙고별검. 의금부도사. 사헌부감찰. 10년 홍산현감(鴻山縣監)
14년 호조좌랑이 되었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崔佐郞 永世
溫溫風味自天眞。詩禮家庭趾美新。妙歲聲華稱俊逸。暮年情義託婚姻。
竆通有命才難試。仁壽無徵病忽臻。尙喜諸郞能繼述。行看責報在他辰。
祭崔佐郞 永世 文
嗚乎哀哉。人生斯世。誰則久視。愚智同歸。脩短一致。達觀有言。宜遣以理。獨於公亡。我難制淚。純明宜業。強康可恃。溫溫令質。翩翩佳士。杞梓於材。瑚璉於器。苟展厥武。何往或躓。未整長轡。先催隙駟。肆余長慟。莫可寬譬。昔公嚴君。與我先子。臭味斷金。心期淡水。施及後人。敢渝斯志。自附婚姻。益篤情義。永言優遊。奄隔生死。儀容入眼。心膽欲墜。彼洫何有。以壽以祉。仁未有年。才不得試。天可必乎。理難推矣。未盡之應。幸有四子。佗年責報。豈不在是。日月幾何。窆期忽至。庭臺物色。去年無異。公何不知。脩夜永閟。祖道將啓。親朋萃止。一木旣戢。萬事長已。文不盡言。言不盡意。一瓣心香。屑歆是冀。
김추만(金秋萬) 1629년(인조 7)~1673년(현종 14) 서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춘일(春一)
조부는 판서 하담 선생. 아버지는 김곡(金縠). 생부는 이조판서 만은(晩隱). 김휘(金徽). 외조부는 이조판서 허성의 아들 판관 허실(許宲)
현종(顯宗) 1년(1660) 경자(庚子) 증광시(增廣試) 증광생원 1등(一等) 2위로 입격
현종 5년 12월 의금부도사. 현종 10년 3월 의금부도사로 온양 행차시 배종
歸巖先生文集
*祭內弟金都事 秋萬 文 癸丑
哀哉春一。今其爲地下人耶。以王父種德之厚。而不能食報於後耶。以春一純明之資。而未克受畁於身耶。官纔一命。壽慳五十。雙親在堂。忍割顧復之恩。二孤叫天。永忘眷愛之念。一夢長辭。脩夜不暘。哀哉春一。胡至於斯耶。惟君孝友之性。得之天賦。仁厚之風。不事嫺飾。睦於親戚而咸得其歡心。信於朋友而共推其行誼。接物以誠則無隱蔽於談閒。臨財喜施則絶係吝於胷中。凡此無非古人之所難能。末俗之所罕見。吾之愛君。非尋常中表之可比。君之眷我。視同氣兄弟而無間。出入造次。相依爲命。垂于今四十稔矣。孰謂一病五載。醫竆技殫。使我垂老之兄。長抱無涯之戚耶。嗚呼。伯舅無嗣。以君爲後。兩家幹蠱。惟君一身而已。舅姑何幸。晩得男女。膝下提攜。與君成三。緖業之昌。謂自此可期。善慶之應。謂在今可徵。初見賢弟之殤折。續値徐妹之夭逝。禍福舛施。存歿驚心。理不可以推知。情不可以寬譬。而妹死周歲之間。君又奄忽而亡。舅姑深年。更無侍側之人。哀哉春一。胡至於斯耶。賴有二子。嗣續典型。雖竆顔氏之命。可大王公之門。推今日未盡之報。責佗年左契之驗者。其不在是耶。
이보(李簠) 1629년(인조 7)∼1710년(숙종 36) 안동
본관은 진성(眞城). 자(字)는 신고(信古), 호(號)는 경옥(景玉),
아버지는 이장(爾樟). 외조는 仁同 장우정(張友程). 妻父는 安東 권중립(權中立).
학사 김응조(金應祖) 문인.
1676년(숙종 2) 문과에 합격했으나 擧子들의 亂場으로 罷榜되었다. 그 후에도 한두번 응시했으나 실패한 후로는 과거를 단념했다. 1691년 익년(翌年)에 사옹원참봉(司饔院參奉)이 되어 잠시 부임(赴任)했다가 사임하였다. 만년에 대곡산중(大谷山中)에 집을 짓고 경옥산인(景玉山人)이라 부르고, 독서와 시 짓기를 일 삼으며 죽장망혜(竹杖芒鞋)로 산곡(山谷)을 산책하였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李簠]
白日回光處。枯華更見春。陰邪皆若掃。正氣得重伸。
地下哀榮備。人間事業新。太常應秉筆。節惠寵名臣。
안여석(安如石) 1630년(인조 8)∼1695년(숙종 21). 영주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주국(柱國).
유(裕)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수성(壽星), 동생은 여악(如岳)이다.
1666년(현종 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0여년이 지난 뒤 주서를 비롯하여 대간에 들어가 장령·사간·집의 등을 거쳤고, 1677년(숙종 3)에는 변무사(辨誣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바 있으며, 이후에는 승지로서 오래도록 봉직하였다.
1689년에는 충홍도관찰사(忠洪道觀察使)를 역임하고, 1694년에는 병조참판을 지낸 뒤 이듬해 죽었다.
인품이 성실하여 당시 당쟁이 반복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편당(偏黨)에 치우치지 않고 본분에만 충실하였으므로 높은 관직에 오르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크게 화를 당하지도 않았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安如石]
嶺南東國人才府。先數星山八座公。元禮模楷天下彥。士衡詞賦洛陽雄。
官淸每進勤勤奏。位大冞深眷眷忠。已被聖朝如海渥。將期他日濟川功。
庚申事變嗟何及。君子儒賢網打空。羣望自然爲世忤。六旬非是以年終。
冤魂幾泣三泉下。天道能回十載中。哀詔改封弘縣墓。洪恩先祭曲江翁。
銘旌粉字官銜極。衰草荒原雨露豐。孝嗣卽今榮晝錦。也知餘慶屬無竆。
강석빈(姜碩賓) 1631년(인조 9)∼1691년(숙종 17). 서울
본관은 진주. 자는 위사(渭師).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사상(士尙)의 현손이며, 목사 욱(頊)의 아들이다.
일찍이 문명을 떨쳤으며,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
1668년 강원도도사가 되었으나, 기민구제를 게을리한다는 대간의 계(啓)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1669년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수석하여 현종에게서 호피(虎皮)를 하사받았으며, 1675년 남인이 정권을 잡자 사간원정언에 복직, 홍문관부수찬·수찬을 지냈다.
이듬해 충청도암행어사·이조좌랑·교리·사인(舍人)·응교(應校)·사간을 역임하였다.
문무의 재능을 인정받아 묘당(廟堂)의 추천으로 경기도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정권이 서인에게 넘어가자, 경기수사로서 민폐가 많고 근무가 태만하다는 서인들의 탄핵을 받고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
1689년 원자문제로 일어난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자 풀려나와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1691년 대사간이 되어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노독(路毒)으로 죽었다. 진선군(晋善君)에 습봉(襲封)되었다.
歸巖先生文集卷 附錄
挽詞[姜碩賓]
楚獄幽冤尙忍忘。至今奇禍使人傷。天恩一洗丹書痛。泉路重回白日光。
永宅新開時有待。舊旌空換恨何長。應知孝子哀榮淚。枯盡南州故里棠。
송익(宋熤) 1631년(인조 9)~1695년(숙종 21)
본관은 야로(冶爐) 자는 비경(賁卿). 호는 숭정처사(崇禎處士)
조부는 시준(時準) 아버지는 선무랑 만회정(晩悔亭),세빈(世彬),
외조부는 참판 자암(紫巖) 이민환(李民寏)
강고 류심춘이 지은 묘갈명에
귀암선생과 근곡 이관징선생과 도의 교를 가졌다고 하였다
(與龜巖李公元禎,芹谷李公觀徵,講磨道義)
민안도(閔安道) 1631년(인조 9)∼미상.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여행(汝行).
증조부는 1582년(선조 15) 진사(進士) 민영(閔韺), 조부는 1610년(광해군 2) 문과 급제한 민응회(閔應恢), 아버지는 좌찬성 민점(閔點),
외조부는 김시양(金時讓)이다.
1669년(현종 10)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 10위로 합격하였으며, 1675년(숙종 1) 을묘(乙卯)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5위로 급제하였다. 벼슬은 참의(參議)에 이르렀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閔安道]
奇禍當年可忍言。欲傾東海洗深冤。天心快悟無餘憾。地底追褒泣斷魂。
吉兆移封惟子職。雄藩祖送亦君恩。哀詞幷寄平生淚。灑向南雲字字痕。
유하익(兪夏益) 1631년(인조 9)∼1699년(숙종 25). 서울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사겸(士謙), 호는 백인당(百忍堂).
필선 수증(守曾)의 손자이다.
1651년(효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사서·정언·부교리·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1667년에 황해도암행어사로 나가서는 수령들에게 신상필벌하여 관리들의 기풍을 진작시키고, 그뒤 이조정랑·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숙청될 때 함께 파직되어 문외출송(門外黜送)당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추방되자 풀려나와 도승지에 등용, 그뒤 이조참판·공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대사헌으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하면서 사고(史庫)의 보존에 대하여 소를 올려 사고의 보존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였다.
1690년 이후 한성부판윤·예조판서·대사헌·좌참찬·형조판서를 역임하고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정권에서 물러날 때 같이 삭출되었다가 2년 뒤에 풀려났다. 글씨를 잘 썼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兪夏益]
夙昔遊公父子間。每瞻楷範冠朝班。誠心自許昭如日。德望人稱重若山。
火烈崑岡邦殄瘁。恩延泉路理循環。欲題哀誄存餘慟。令季佳兒壽亦慳。
이언직(李言直) 1631년(인조 9)∼1698년(숙종 24)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자진(子愼), 호는 명호(明湖),
6세에 취학하여 학문의 대의를 깨치고, 낙촌 이도장(李道長)의 문하에서 『효경(孝經)』을 배워 15∼16세에 문장이 크게 진보하였다. 일찍이 공자(孔子)와 안자(顔子)가 문답한 기록을 모아 선유(先儒)의 주석을 붙여 『안자전(顔子傳)』을 저술하였고, 또 효행이 지극하여 중형과 함께 3년을 여묘(廬墓)하여 대소련(大小連)의 칭호를 받았다.
明湖文集
詩
硏經書院贈李歸巖 元禎
九月高秋觀逝樓 無端微雨使人留 階除香菊英初 發軒外方潭水穩流
今日淸談來泗屐 去年餘約問伊舟 山蹊茅塞迷前 路早晩歸巖擬共遊
정중휘(鄭重徽) 1631년(인조 9)∼1689년(숙종 15)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신백(愼白), 호는 돈곡(敦谷).
증조부는 정흠(鄭欽)이고, 조부는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와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한 정효준(鄭孝俊)이며, 부친은 필선(弼善) 정식(鄭植)이다.
1652년(효종 3) 임진증광사마시(壬辰增廣司馬試)에 진사(進士) 2등으로 합격하고, 1657년(효종 8) 정유식년문과(丁酉式年文科)에 병과(丙科) 6등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벼슬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함경도사(咸鏡道事)·지평(持平)·장령(掌令)·헌납(獻納)·정언(正言)·집의(執義)·필선(弼善) 등을 거쳐 《효종실록(孝宗實錄)》 편찬 시에 기주관(記注官)으로 활약하였고, 병조참판(兵曹參判), 충훈부(忠勳府) 유사당사(有司堂上) 등을 역임하고 해흥군(海興君)에 봉하여졌다. 묘는 남양주 진건면 사능리 사릉 경내에 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鄭重徽]
一快靑天覩。終明碧血冤。孤忠應下淚。十載竟蒙恩。
尙憶山公鑑。申招屈子魂。緘辭念平昔。雲嶺望中存。
강세구(姜世龜) 1632년(인조 10)∼1703년(숙종 29). 서울
본관은 진주. 자는 중보(重寶), 호는 삼휴당(三休堂).
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호(鎬)이다.
1660년(현종 1)에 진사가 되고, 1676년(숙종 2) 강릉참봉에 기용되었으며, 1678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정언·수찬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교리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 승지가 되고, 1689년에 충청도관찰사, 1692년에 예조참의 등을 역임, 1693년 대사간이 되어 이듬해 왕의 유행(遊幸)을 간하다가 파직되었다.
1701년 장희빈(張禧嬪)을 사사하려 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홍원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뒤에 복관되고, 회덕의 용호서원(龍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姜世龜]
傷心不忍說庚申。黃壤今朝雨露新。從看關西改葬日。冢前神鳥動楓宸。
김구만(金龜萬) 1632년(인조 10)~1700년(숙종 26) 서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원서(元瑞)
조부는 시열(時說). 아버지는 소(素)
현종(顯宗) 7년(1666)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숙종(肅宗) 4년(1678)문과에 급제. 장령. 승지에 이르렀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金龜萬]
九苞丹穴羽。五色備彩珍。蔚然瑞世儀。翺翔登舜鄰。官爲六卿長。秩亞三台尊。
藻鑑稱權衡。文學賁經綸。事業出流輩。德望傾搢紳。逢時展抱負。思欲答聖君。
羣兇釀大禍。一網盡賢人。李膺考死日。范滂訓子辰。行路皆流涕。天道詎堪論。
福善理莫徵。家禍復相因。都憲逝何遽。校理訃又聞。懸知夜臺下。抱冤更悲辛。
天運有循環。聖化屬維新。首罪誅元惡。共政任舊臣。九原人難作。悼念軫楓宸。
復官紆恤典。賜祭雪幽冤。餘慶在令胤。按節還故園。承恩改藳葬。備禮窆新原。
路遠身縻職。執紼情未伸。幽明有所負。慙恨倍傷神。謾將一掬淚。灑向南天雲。
정유악(鄭維嶽) 1632년(인조 10)∼미상. 서울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길보(吉甫), 호는 구계(癯溪)·동촌(東村).
아버지는 이조참판 뇌경(雷卿)이며, 어머니는 윤상형(尹商衡)의 딸이다.
1652년(효종 3) 진사가 되고, 1666년(현종 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75년(숙종 1) 승지로 있을 때, 환관(宦官)이 인사(人事)와 상벌(賞罰) 등에 간여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왕에게 간언하다가 파직되었으나, 영의정 허적(許積)의 상소로 다시 기용되어 북한산성을 축조할 때 도청(都廳)을 지냈다.
그뒤 좌승지·공조참판·도승지를 역임하다가, 1680년 남인 일파가 대거 실각하게 된 경신대출척으로 가장 먼 변경에 안치되었다.
1685년 죄가 풀려 귀향하게 되었으며, 1689년 기사환국으로 경기도관찰사에 등용, 이듬해 도승지가 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다시 진도(珍島)에 안치되었다가 1697년 귀향하게 되었고, 1699년 사면되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鄭維岳]
世間那忍說庚申。禍酷東京竇與陳。兇賊伏辜天理驗。敎書追衋聖恩新。
重泉更啓當時殯。孝子今爲按道臣。千里永違臨壙哭。不堪衰淚自沾巾。
김시현(金時鉉) 1633년(인조 11) 충주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시(重時)
아버지는 김준(金峻)
현종(顯宗) 7년(1666) 생원시에 합격하고, 현종(顯宗) 10년(1669) 문과에 급제
성균관전적. 은율현감. 예조좌랑. 함창현감. 개성경력. 숙종 15년 칠곡부사를 역임하였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金時鉉]
追憶庚申豈忍言。士林之禍慘公門。丹衷未暴埋深痛。白日回光雪至冤。
房相復官榮已極。曲江頒祭寵尤尊。承家幸有旬宣伯。移卜新阡爲妥魂。
김총(金璁) 1633년(인조 11)∼1678년(숙종 4) 안동 예안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휘(仲輝), 호는 우헌(迂軒),
아버지는 광술(光述)이며, 외조는 풍천임씨(豊川任氏) 경진(慶進)이며, 처부는 순천김씨 만응(萬應)이다. 1652년(효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662년(현종 3)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사간원정언과 홍문관수찬 역임을 역임하였다. 과거(科擧)의 출제가 부당(不當)하다고 하여 단양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金校理 璁○己未 1679년(숙종 5)
聲華藹蔚早蜚英。腳下靑雲萬里平。蘊藉固宜經幄貯。風猷果愜講官名。
星軺北闕初將命。奎彩南天遽晦晶。鄒魯勝流凋喪慟。不禁衰淚自沾纓。
민취도(閔就道) 1633년(인조 11)∼1698년(숙종 24). 서울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정숙(正叔).
응협(應協)의 손자로, 좌의정 희(熙)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정세구(鄭世矩)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덕행을 갖추었다.
1675년(숙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77년 홍문록에 오르고, 수찬이 되었다. 같은해 교리를 거쳐 다음해 헌납·이조좌랑 등을 역임한 뒤 동부승지가 되었다.
1680년 승지가 되고, 이어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693년 청차사행(淸差使行) 박창한(朴昌漢)을 수행하는 대청외교분야에까지 많은 업적을 남겼다. 청나라에서 귀국하여 형조판서에 특승되고, 1698년에 죽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閔就道]
先子於公誼最多。逢人說項豈徒誇。當朝偉器瞻山峻。蓋世高名幷日華。
末路危魂同掩抑。餘生恨淚幾橫斜。明時各守西南道。千里緘辭九起嗟。
유명천(柳命天) 1633년(인조 11)∼1705년(숙종 31). 서울.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사원(士元), 호는 퇴당(退堂).
사인 영(穎)의 아들이며, 관찰사 석(碩)에게 입양되었다.
1672년(현종 13)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 정언·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675년(숙종 1) 이조좌랑이 되고, 이듬해에는 대사간·대사성을 지냈다.
1680년 이조참판 재직중 경신대출척으로 음성에 유배되었다가 1683년 전리(田里)로 방귀(放歸)되고, 1688년 지난날의 옥사가 무고라 하여 강계부사로 기용되었다.
이듬해 기사환국으로 정권이 뒤바뀌자 공조판서에 중용되고 다시 예조판서로 옮겨 홍문관제학을 겸임하였다.
이후 판의금부사·판중추부사 등 요직을 거치고, 1694년 갑술옥사 때 지난날 김기문옥사(金起門獄事)에 임금을 오도하였다는 죄목으로 파직불서용(罷職不敍用)의 명이 내려졌다.
이어 장령 유집일(兪集一), 지평 김시걸(金時傑) 등이 권력을 천단하며 악행과 음모로 백성을 병들게 한다고 상소하였다가 흑산도에 위리안치되었다.
1699년 전리로 방귀되었으나, 1701년 장희재(張希載)와 공모하여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모해하려 하였다는 지평 이동언(李東彦)의 탄핵을 받고 나주 지도(智島)에 안치되었다가 1704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柳命天]
崑岡焚玉不堪言。騈首忠貞抱至冤。天道循環回聖悟。泉塗改照渙新恩。
身登廊廟風儀儼。手秉銓衡位望尊。遙想重封金盌地。按臣淸血灑成痕。
김덕원(金德遠) 1634년(인조 12)∼1704년(숙종 30). 서울
본관은 원주. 자는 자장(子長), 호는 휴곡(休谷).
아버지는 판관 인문(仁文)이다.
1662년(현종 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현종 연간에는 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을 역임하면서 언관(言官)으로 활약하였다.
1675년(숙종 1)에 홍문록에 오르고,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다. 경신환국(庚申換局) 전까지의 남인정권하에서는 허목(許穆)을 지지하는 청남(淸南)계열로서 당시의 권신 허적(許積)의 비리를 공격하였다.
《현종실록》 개수의 주장에 앞장섰고, 복제논쟁은 허목의 설을 따랐다. 이어 병조참판·형조참판으로서의 뛰어난 재주와 원만한 성품이 숙종에게 인정되어, 서인정권이 들어서고 모든 남인이 제거될 때에도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한성판윤·경기감사·예조판서 등을 거쳤고, 1687년에는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연경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기사환국으로 정권이 바뀌자 곧 우의정에 임명되어 이후의 정국을 주도하였고, 실질적인 행정업무를 전담하였다.
이때 서인세력의 회유에 노력하였으나, 김수항(金壽恒) 등을 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살육을 방관하였다 하여 뒷날 노론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자 우의정을 사임하였다.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赫)의 역모사건이 숙종에 의해서 반전되면서 갑술환국으로 진전되자, 이를 반대하다가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4년 뒤에 해남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풀려났다. 황해도 해주에서 죽었으며, 1711년에 신원되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金德遠]
滄桑人世幾消魂。忽見皇穹照覆盆。黃壤倘知今日事。丹書已洗十年冤。
頻繁芬苾誠希典。哀痛絲綸最聖恩。遙想靑烏移兆處。銘旌空煥上台尊。
목임유(睦林儒) 1634년(인조 12)∼미상. 서울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사아(士雅).
아버지는 겸선(兼善)이고, 어머니는 민형남(閔馨男)의 딸이다.
1651년(효종 2) 사마시에 합격하고, 1675년(숙종 1) 공조정랑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76년 지평이 되고, 그뒤 수찬·정언·지평·교리·부수찬·집의·수찬·사간·부응교·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남인인 그는 1679년 8월 집의로서 송시열(宋時烈)의 처벌을 주장한 바도 있었다.
그뒤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체직당하였다가 1689년부터 남인이 재집권하게 되자 승지·강춘도관찰사(江春道觀察使)·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 이후 남인이 실각하면서 삭출(削黜)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睦林儒]
泉塗飮恨十經春。泰運重回雨露新。忍說烈炎焚玉石。終看襚爵煥台匀。
風人詩廢茹哀日。孝子誠深按節辰。冥感還應迎大鳥。古來天意慰貞臣。
김남일(金南一) 1635년(인조 13)∼1696년(숙종 22) 영주
본관은 선성(宣城). 자는 중백(重伯), 호는 지남(砥南),
외조부 권사고(權槎皐)에게서 수학하였으며, 1677년(숙종 3) 향천(鄕薦)으로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괴산군수(槐山郡守)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砥南先生文集
*李判書[元禎]遷葬 輓 귀암집에는 미수록
엄집(嚴緝) 1635년(인조 13)∼1710년(숙종 36). 서울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경지(敬止), 호는 만회(晩悔).
감찰(監察) 성구(聖耉)의 아들이다.
1673년(현종 1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678년(숙종 4) 정언이 되고, 부교리·사간·집의·승지 등 주로 삼사(三司) 청화직(淸華職)에 출입하였다.
1696년 개성부 유수에 승진되었다가 도승지로 전임되었다.
1701년 공조판서 때에 장희빈(張禧嬪)을 논죄하였고, 다음해 의정부좌참찬·예조판서를 역임한 뒤 우참찬으로 있을 때 병으로 치사하고 기사소(耆社所)에 들었다. 기개가 있고 청렴하였으며, 권문을 멀리하고 당쟁을 싫어하여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
만년에 궁핍한 가운데 와병 사실이 상신(相臣) 서종태(徐宗泰)에게 알려지자 임금이 약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정헌(貞憲)이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嚴緝]
庚申奇禍豈堪言。白日回光照覆盆。一夜彷徨悲濫獄。十行綸綍悼冤魂。
舊封重啓應消恨。新贈初題更煥恩。想得安陵行色慘。至今餘淚尙留痕。
이우정(李宇鼎) 1635년(인조 13)∼1692년(숙종 18). 서울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백(重伯). 직강 익로(翼老)의 아들이다.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1668년 병조좌랑이 되고 이어서 지평·정언·필선을 역임하였다.
1674년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오삼계(吳三桂)의 난을 보고하였다. 문학·장령 등을 거쳐 정언이 되었는데 이해 숙종이 즉위하자 예론(禮論)과 관련하여 송시열(宋時烈)을 격론(激論)한 남인계열의 유생 곽세건(郭世楗)을 유배보낼 것을 주장하였다.
다시 헌납으로서 현종의 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상을 당하여 대왕대비인 장렬왕후(莊烈王后)의 복제에 있어서 효종상 때(1659, 乙亥年)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였던 송시열 등 서인이 대공설(大功說: 9月喪)을 주장하다 실각하자 효종상 때의 오례(誤禮)를 문책, 그 당시의 송시열 이하 서인일파를 엄징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전일에 송시열을 배척하는 곽세건을 유배 보내라고 하였던 그가 도리어 곽세건의 예론으로 송시열을 배척, 한 사람의 견해가 달포 사이에 갑자기 변하여 정태(情態)가 반복무상하다는 부수찬 이인환(李寅煥)의 공박을 받았으며, 이후 예론이 있을 때마다 서인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또한, 효종상 때 기년설을 주장하였던 김수흥(金壽興)을 멀리 귀양보내려는 그의 주장에 승지 안진(安縝)이 이를 반대하자 그의 파직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남인이 득세하자 1675년(숙종 1)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조판서 김석주(金錫胄)가 그의 인물됨을 들어 반대하자 부임하지 않았다가 좌부승지·우부승지·대사간·우승지 등을 역임하고 부임하였다.
이듬해 대사간을 거쳐 예조참판에 오르고 1677년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관원 명부에서 이름이 삭제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직첩(職牒)을 환급받았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승지로 기용되고 이어서 형조판서·우참찬·대사헌·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판의금부사·예조판서를 거쳐 수어사(守禦使)가 되어 전에는 300호(戶)였던 남한산성에 1,000여호가 밀집하여 있어서 유사시에 물자가 부족할 것을 염려하여 입성자(入城者)를 제한할 것을 주장하였다.
1692년 사신으로 청나라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李宇鼎]
傷心不忍說庚申。最惜吾公枉死身。十載黃泉深痛結。一朝丹筆至冤伸。
禮隆哀贈宣恩日。葬備遺孤按道辰。寵辱餘生今白首。撫時興感倍沾巾。
장진(張瑱) 1635년(인조 13)∼1707년(숙종 33). 영주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군옥(君玉), 호는 모암(茅菴).
적개공신(敵愾功臣) 말손(末孫)의 6대손으로, 원경(元慶)의 아들이다.
유학(幼學)으로 1665년(현종 6) 별시문과에 병과 5인에 급제하고, 곧 승문원에 소속되었다가 여러 문한관을 역임한 뒤 외직에 나가 목민관이 되었다.
1693년(숙종 19) 장령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향리인 영천(榮川)에 돌아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모암집》이 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祭文[張瑱]
嗚呼哀哉。蟬聯茂閥。奕葉衣纓。濟德流祉。世有耇成。河嶽儲精。篤生韙人。惠風愛日。威鳳祥麟。才猷闓敏。城府閎淵。菀乎昌時。步武雲天。玉季金昆。望實隆赫。嶷嶷風稜。嶄嶄崖角。結知三朝。契合昭融。乃柱乃石。一節始終。從容廟朝。啓迪徽猷。提衡八座。獨斡鑪錘。包荒茹納。坦豁心腹。孰是倉卒。奇禍迅激。懟彼元兇。狺于肘腋。射影潛毒。俟間而作。烈火焦原。駭機箭發。肉視正士。肆其屠剔。公乃毅然。胷藏鋼鐵。笑視刀鋸。其氣益強。嗟哉善人。卒罹于殃。斗隕中霄。峯摧半岳。萬目睽睽。輿情痛抑。嗚呼哀哉。物極必反。天道好還。白日回光。湛恩渙汗。羣穢屛迹。庶冤咸洩。更化伊初。首復舊秩。貤官弔祭。申以愍章。鴻褒殷典。光賁幽堂。哀榮無對。潛德愈亹。羣陰解駁。善流吐氣。嗚呼哀哉。百世在後。一時在前。公無所怍。可以翩。屯躓非辱。奬飾非榮。榮辱去來。雲浮太淸。厄哉華門。神理難明。荊花減歇。謝樹飄零。殄瘁同悲。儒林慘色。天或未定。爲善者惑。食報非遠。在爾茂嗣。猗歟茂嗣。載其顯懿。桂林一枝。崑山片玉。暫徹啓沃。憇茇南服。江表安危。雪山重輕。蒼生望屬。丹極寵傾。嗚呼哀哉。儀刑一隔。奄忽幾蓂。日月寖遠。影響難憑。念余無似。飽德淪髓。夤緣出入。積有年紀。羇旅洛邸。辭以痘忌。推誠勉留。猥蒙館置。迺後甄擢。實不求備。式至于今。寸心銘佩。公能知我。或見夢寐。白雞之歲。宛候門戺。引入中堂。問答有以。歷歷悲辭。眷眷未已。吟呈一律。覺來猶記。秘事載心。未易一二。棠陰此日。幸叨庥庇。鶴告新塋。適丁玆時。感念幽明。涕泗漣洏。單杯瓣香。披露菲忱。風流宛在。僾然中心。倻山蒼蒼。洛水盈盈。劒氣中橫。匪公之靈。
茅庵先生文集
詩
*夢李判書士徵 元禎
南華昨夜到星山。握手相逢舊日顔。無地洩冤天莫照。論懷未半涕潸潸。
*輓李判書士徵 二首 귀암집에는 미수록
憶曾崑玉虐炎燔。黃鳥飛聲閉九原。天道好還開奉運。聖朝無碍燭幽冤。
昭昭國是輿情快。落落勳名擧世尊。正値新阡禮窆日。慶哀交極復何言。
忍說當年事。邦家運孔艱。風儀森眼底。輿誦藉人間。
每覺依依夢。頻承款款顔。拙詩曾記此。開篋淚痕斑。
홍득기(洪得箕)1635년(인조 13)∼1673년(현종 10). 조선시대 효종의 부마(駙馬).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자범(子範), 호는 월호(月湖).
관찰사 명구(命耉)의 손자로, 우의정 중보(重普)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 이현영(李顯英)의 딸이다.
1649년(인조 27) 당시 세자이던 효종의 둘째딸 숙안군주(叔安郡主)와 혼인하여 익평부위(益平副尉)에 봉해졌다. 같은해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익평위(益平尉)로 진봉(進封)되었다.
1660년(현종 1)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인품이 겸손하고 신중하며 또한 소박하여 인망이 높았다.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歸巖先生文集
祭文
祭益平君洪 得箕 文 1673년(현종 10)
嗚乎哀哉。惟先相國。昔宰吾邦。余荷知遇。時造黃堂。公年十四。婉其淸揚。儼若成人。氣宇昂昂。譽洽同隊。彩耀圭璋。謂余稍長。公視爲兄。感公不鄙。余亦輸情。曾未幾時。公選儀賓。一隔雲泥。遂斷翔鱗。公忽出疆。庚子之春。霜臺仗威。忝隨後塵。遼塞風沙。薊門煙樹。原隰共嘗。覊絆同苦。無幽不展。有蘊必吐。我不解飮。屢戒公酒。縱未回聽。知我情厚。廻程疾劇。所恃神佑。愷悌宜祿。幸而獲救。言旋故國。閱月凡五。自玆以還。情義益親。洎乎年來。又卜東鄰。公來我往。倒廩傾囷。浮生幾何。哀樂相因。不弔于天。先相捐館。邦家殄瘁。士類長嘆。俄哭惠連。荐遭喪難。相看脈脈。有淚漫漫。病久創巨。爲公危惕。終乃得全。誠孝攸格。對門追逐。歡言猶昔。將期百歲。永保此樂。那知一疾。奄至不淑。天乎神乎。胡寧忍此。痛哉痛哉。已矣已矣。惟公家世。世有聞士。簪組繩繩。疇有其比。尙書文雅。觀察節義。逮于相國。乃大厥施。公能趾美。有蔚其章。嬀汭之命。降自先王。衣披文繡。食厭膏粱。富而可驕。公孰能當。身雖顯隆。心則韋布。竇固好賢。荀羨敦素。苟整長轡。早展其武。夷塗順軌。焉往或躓。拘於國制。竟未有試。秖榮以祿。不任以事。宜受其償。克享遐祉。年又不永。此是何理。哀纏親知。痛徹宸極。鶴髮哀哀。鸞奩惻惻。公何不顧。永閟窀穸。載贏其遺。靑氈有託。未食之報。豈其虛徐。卽遠之日。省母海西。孤負執紼。危涕漣如。返遭國恤。未薦一酌。今來瓣香。悲愧交臆。靈其垂恕。監此衷曲。
권환(權瑍) 1636년(인조 14)∼1716년(숙종 42). 서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장(仲章), 호는 제남(濟南).
아버지는 증이조참판 대윤(大胤)이며, 어머니는 순천김씨(順天金氏)로 현감 두명(斗明)의 딸이다. 숙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권대운(權大運)의 조카이다. 이민구(李敏求)에게 수학하였으며, 허목(許穆)을 사사하였다.
1658년(효종 9) 생원시에 합격하고, 1668년(현종 9)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홍문관교리·사헌부지평 등을 지냈고, 평안도와 경상도의 암행어사로 발탁되기도 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때에 허적(許積)·윤휴(尹鑴) 등의 당인으로 연루되어 북평사(北評事)에서 파직되어, 처향(妻鄕)인 김포 제진(濟津)에서 여러 해를 보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다시 등용되어, 대사간·황해도관찰사·공조참판·병조참판·성균관대사성·한성부좌윤·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로 파직되어 향리에서 후진을 가르치면서 여생을 마쳤다.
기사환국 때 박태보(朴泰輔)·오두인(吳斗寅)·이세화(李世華) 등이 인현왕후 민씨의 폐출을 반대하는 상소문 때문에 화를 당하자, 반대파의 입장에서 이들을 비호하는 구제상소를 올렸으므로 그 후손들로부터 재생의 은인으로 추앙을 받았다.
저서로는 《제남집》 27권이 전한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權瑍]
孝子遑遑不盡哀。慈堂血淚見城頹。丹書冤雪昭長夜。粉字恩新煥上台。
地擇千年時有待。天回十載泰方來。從今大事無餘憾。日暮靑山玉節廻。
민암(閔黯) 1636년(인조 14)∼1694년(숙종 20). 서울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장유(長孺), 호는 차호(叉湖).
이조참판 응협(應協)의 아들이다.
1668년(현종 6)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지평·승지·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679년(숙종 5) 고산찰방(高山察訪) 조지겸(趙持謙)이 당시의 함경도관찰사인 이원록(李元祿)이 분수에 넘치게 역마(驛馬)를 탄다 하여 탄핵하였다.
그는 자기가 함경도관찰사 때의 그곳의 실정과 경험을 자세히 들어서 이원록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을 극구 변명하여 도리어 탄핵한 조지겸을 문초받게 한 사실은 유명하다.
1678년 동지사 겸 변무부사(冬至使兼辨誣副使: 변무부사는 당시 명나라에서 인조반정에 대한 기록이 아주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파견된 사신임.) 복평군(福平君) 연(㮒)과 함께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에 귀국하였다.
그뒤 이조참판을 거쳐 1680년 대사헌으로 있다가 경신대출척으로 남인(南人)이 실각하자 파직되었다.
1682년 서인(西人) 김중하(金重夏)로부터 모반한다는 무고(誣告)를 받았으나 조사 뒤 무사하였다.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다시 대사헌에 기용되어서는 이조판서 심재(沈梓)와 함께 서인 김수항(金壽恒)·송시열(宋時烈)을 탄핵하여 그들의 처형에 대한 강경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어 대제학·병조판서를 역임하였고, 1691년 우의정에 승진하였으며,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94년 김춘택(金春澤) 등이 숙종의 폐비인 민씨(閔氏)를 복위하는 음모가 있다는 고변(告變)이 있자 남인의 영수이던 그는 훈련대장 이의징(李義徵)과 함께 일대옥사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숙종은 갑자기 남인을 쫓아내고 서인을 등용하는 갑술옥사를 일으켰다.
그는 이 옥사 때 대정(大靜)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의 탄핵으로 곧 이의징과 더불어 사사되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閔黯]
天曹官貴逼鴻樞。從古榮名與禍俱。中夜悔心回丙枕。千秋哀贈賁泉途。
觀風新屬庭趨鯉。銜土重看邑號烏。朽質昔曾蒙剪拂。祇今孤負致生蒭。
신후재(申厚載) 1636년(인조 14)∼1699년(숙종 25).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덕부(德夫), 호는 규정(葵亭)·서암(恕庵).
아버지는 현감 항구(恒耉)이다.
1660년(현종 1) 사마시를 거쳐 같은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에 들어갔다가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내고 지평·홍문관부교리 등을 역임한 뒤 1679년(숙종 5)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경신대출척으로 남인들이 제거당할 때 삭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자 승정원우승지·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그뒤 사은 겸 진주주청사(謝恩兼陳奏奏請使)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강화유수·개성유수·한성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 소론이 집권하자 여주에 유배되었다.
1697년 석방되었으나 충주 오갑장(鰲甲庄)에 은퇴하여 학문에 전념하다가 여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시문집 《규정집》 7권이 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申厚載]
詩禮傳家訓。鸞凰瑞世姿。三朝恩最渥。一節險看夷。榮列台階近。危邦大廈支。聲名元北斗。哆侈忽南箕。焚玉人胡忍。摧蘭理可疑。初非明主意。竟作小臣悲。天道十年復。國言萬姓咨。丹書冤已雪。紫誥寵如絲。賢子靑氈繼。雄藩玉節持。春山侈馬鬣。雲路憶鴻儀。族誼曾相睦。交情又荷知。漬綿違嶺外。臨挽倍含思。
규정집(葵亭集)
[詩]
*送李參判 士徵 令公之燕
此路依然走帝畿。丈夫相別亦沾衣。鶴歸華表城猶是。人似延陵樂已非。
遼塞暮雲天共遠。薊門秋樹葉頻飛。賢勞自古從王事。莫向旄丘賦式微。
윤이후(尹爾厚) 1636년(인조 14) 해남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재경(載卿)
조부는 고산 윤선도(尹善道). 아버지는 윤예미(尹禮美). 생부는 윤의미(尹義美)
숙종(肅宗) 5년(1679) 생원시에 합격하고,
숙종(肅宗) 15년(1689) 문과에 급제.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성균관 사예를 역임하였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尹爾厚]
卜地移安日。仁天悔禍心。丹忱惟炯炯。泉路竟沈沈。
直筆伸冤氣。殊恩賁碣陰。哀榮看玉節。餘慶謝庭琳。
이태구(李泰龜) 1636년(인조 14)∼1724년(경종 4). 서울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수(汝守)이다.
증조는 금산군(錦山君) 이성윤(李誠胤)이고, 조부는 이정방(李庭芳)이다. 부친 이민정(李敏政)과 모친 한득일(韓得一)의 딸 한씨(韓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676년(숙종 2)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89년(숙종 15) 헌납(獻納)·사간(司諫)·수찬(修撰)·부수찬(副修撰)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고(故)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의 죄를 규탄하고 관직을 삭탈 할 것을 주장하였다. 1690년(숙종 16)부터는 집의·승지·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李泰龜]
追惟往事欲無言。蘭臭膏明摠禍根。天意亦如憎直道。聖恩終許雪幽冤。
重頒紫誥優新渥。更卜靑烏掇舊原。遙想賢郞增至痛。不堪題挽倍銷魂。
이형련(李亨連) 1636년(인조 14)~ 1664년(현종 5) 성주(星州)
본관 경산(京山). 초명 형재(亨載). 자는 성세(聖世) 호는 암재(岩齋)
아버지는 여헌 문인 학가재 이주(李𦁖).
현종(顯宗) 3년(1662) 생원시 합격
歸巖先生文集
祭文
祭李進士 亨連 文 甲辰 1664년(현종 5)
嗟嗟聖世。今其爲地下人耶。端愨之容。淸介之標。其可得以復見之耶。孝友存性。聰警絶類。如君者幾人也。藝苑馳聲。金門竚望。如君者又幾人耶。嗟嗟聖世。其已矣夫。始吾師氏。蓄之厚而不做於身。修之吉而食報於天。靑蓮丹桂。交暎滿室。光于士林。坐享其榮。天錫君家之福慶。亦曰多矣。人生天地。日化如馳。于朝于市。或貴或賤。壯而夭老而壽。前者逝後者繼。畢竟同歸於一致。則論尻脊之得失。較彭殤之歡慼。知非達人之大觀也。惟是高堂之上。春秋已高。又使所後之雙親。永抱無涯之茹痛。親戚之所塡膺。行路之所掩涕。何嘗不在斯乎。而門容駟馬。庭耀五璧。君之責報於佗日。宜若持左契而手相付矣。嗚乎聖世。其不死矣。况幼承庭訓。早登上庠。生而鄕黨共愛之。歿而士類同惜焉。此又人人所能致乎。其與世之人。少而無聞。老而不死。空負尸肉之譏。終乏堂構之託者。孰爲可哀也。嗚乎。楩美樗散。旣殊其性質。柳朽蕙芳。亦異其先後。而我所以愛君之深。君所以待我之厚。自有不能已者。我於齠年。受業君家。得到今日。惟君家大人之敎是賴。與君諸兄。義均骨肉。遇欣感慼。君亦與同。我呼君以弟。君以我爲兄。不問一日之長。遂託百年之契。孰謂蘭摧玉折若是之遽也耶。嗚乎。頃赴書院之日。歷訪伯仲于家。君時聯袂。夜分乃罷。繼得簡札。謂必到院。望眼欲穿。凶問忽傳。噫君其不起於半日之病耶。夢耶眞耶。此何爲哉。向來永夕之歡。奄作平生之訣。回程踵門。一木已戢。今也來斯。若堂載封。天耶神耶。又何爲哉。嗟嗟聖世。今其爲地下人耶。世緣川流。人事火忙。悲君之日。知無幾則悲可已也。而自不覺其深悲。是誠何心。吾亦不自知也。單杯薄奠。未足紓吾之至哀。英靈不昧。庶幾諒余之深誠。
이일정(李日井) 1637년(인조 15) 서울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하(子夏)
증조부는 요신(堯臣). 조부는 양(揚). 아버지는 여식(汝湜). 생부는 부사 여택(汝澤)
외조부는 이홍망(李弘望). 처부는 정담(鄭儋)
현종(顯宗) 1년(1660) 생원. 진사 양시합격. 현종(顯宗) 6년(1665) 문과급제.
옥당을 거쳐 승지가 되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李日井]
黨禍庚申慘。賢名己卯同。承家今按節。卜兆又移封。
昭雪恩書賁。流傳國史公。下僚餘白髮。長憶舊登龍。
오시복(吳始復) 1637년(인조 15)∼미상. 서울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중초(仲初), 호는 휴곡(休谷).
정규(挺奎)의 아들이다.
1662년(현종 3)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이어 수찬·정언·지평·교리·이조정랑·사인 등을 거쳐 1675년(숙종 1) 승지·이조참판·개성유수를 역임하고, 강릉부사가 되었다가 부임 전에 허적(許積)에게 아첨하였다 하여 1680년 경신대출척 때 파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이조참판에 이어 한성판윤·호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그는 경비부족을 메우기 위해 각도, 각읍의 채은처(採銀處)를 호조에서 관장하여 수세하도록 하였고, 왜에 면포예급문제, 각 아문의 둔전경영문제를 해결하였다.
이듬해에는 이조판서 겸 수어사를, 이어 다시 호조판서가 되었으나 갑술옥사로 하옥, 유배되었으며, 1697년 풀려나와 우부빈객을 지냈다.
1701년 무고(巫蠱)의 옥사에 연루되어 대정현(大靜縣: 지금의 제주도)에 안치되었는데, 1712년 함평·강진 등지로 이배되었다가 이듬해에 영해부(寧海府: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에 이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특히 글씨에 능하였고, 뒤에 신원되었다.
歸巖先生文集
詩
太廟齊宿日。寄吳學士 始復 之任咸平。
聖主方推老老仁。一麾南服輟詞臣。已知君自超榮利。還愧吾猶走俗塵。
嘉績古稱惇五典。純誠今見報三春。齊明淸廟違臨別。須寄音書不厭頻。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吳始復]
嶺雲迢遞自傷神。往事魂驚難更陳。時運重亨回己巳。天心敦復悔庚申。
哀深德裕移藁葬。禮極楊卿薦苾禋。耆老典刑猶有在。建牙桑梓泣恩綸。
이하신(李夏臣)
본관은 경주(慶州)1664년(현종 5) 사옹원 참봉(司饔參奉)이 되었다.
歸巖先生文集
詩
挽李參奉 夏臣
曩余卜新宇。洛城之東里。巷深居者少。幸與公鄰比。瓜葛常加敬。顚沛謂相恃。淸談間諧謔。昕夕不知止。公愛我蕭踈。我服公厚誼。我纔嶺外去。送別臨陋地。丁寧辱一言。努力愼行李。南歸倍戀憀。前期方屈指。儀容昭在眼。凶問來何自。孰謂一分手。奄忽隔生死。緬思古貌心。於世少知己。外物何足加。庶幾安素履。公議不終泯。晩從廚院仕。名位雖云屈。所蘊從可試。人情多險巇。世路易顚躓。於焉卷而懷。不願名與利。一疏徹楓宸。丹悃輸字字。聖心頗嘉奬。廟議還與貳。時命與仇謀。不容何病爾。蓄德食其報。庭鸞凡有四。門楣佇見大。謂公受遐祉。悲歡膝下促。至慟纏深髓。曾傷我亦酷。相對共揮淚。尙喜公無疾。脩齡未宜閟。今反奪之速。蒼蒼是何意。一夢如過鳥。萬事同逝水。仁壽終無徵。禍福休言理。三槐春色滿。積慶驗在此。家可爲賢嗣。人亦稱良士。足以塞妄悲。脩短皆天耳。尻脊誰得喪。存亡最傷思。歿旣違憑殮。窆又未經紀。靈辰不可駐。茹哀強寄誄。
정창지(鄭昌址) 성주
본관은 청주(淸州)
증조부는 한강 정구(鄭逑). 조부는 정장(鄭樟). 아버지는 정유희(鄭惟熙)
천거로 헌종 9년 헌릉참봉(獻陵參奉)이 되고, 그 뒤 감역. 청암찰방(靑巖察訪). 도사(都事)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鄭昌址]
禮敎重明日。朝儀更化年。扶持須大器。倚重首羣賢。激濁知醒俗。恢公在秉銓。全才爭斗仰。輿望屬台躔。豈意含沙久。公然射影偏。駭機劇倉卒。奇禍竟聯緜。必以公爲的。都由守甚堅。夜臺何寞寞。神理極玄玄。白日蟾江路。淸秋㺚水船。至今冤恨意。留與婦童傳。益覺天無賴。還驚禍未悛。花山仍滯寓。玉樹遽頹顚。英彩今難見。吾徒轉索然。可憐都御史。又瘞大江堧。未覩淸明世。空成殄瘁篇。陰䨪那竟夕。陽景忽中天。一敎誠哀痛。諸冤快洗湔。運惟回十歲。恩已霈重泉。初政方多故。厚晨起沒緣。卽今當整肅。誰是任陶甄。淺土嗟時耳。崇終有待焉。良辰協龜卜。美兆占牛眠。寂寞盤龍遠。凄凉幕燕翩。梅園曾設敎。潭老得眞詮。家世通文獻。鄕居更接連。後孫餘薄劣。先執荷周旋。末路吾無托。殘生孰肯憐。感多情不盡。文拙意難宣。一痛空沾臆。單杯只漬綿。祇應當日事。輸入史臣編。
祭文[鄭昌址]
嗚呼哀哉。理管培覆。氣更參錯。當徵而信。其理賁若。及乖而盭。謂氣使然。反覆交互。孰讆孰眞。考委識源。視發知積。曰惟廣李。冠冕奕舃。曁于石潭。擧如毛輶。累善植根。推餘阜後。如苗蓺土。公獲其遺。畜裕出宏。大暢厥施。中年抹摋。險路跼武。晩歲際遇。順風縱羽。多材茅拔。爲領與袖。衆務林委。如刀斯剖。烏府首席。冢宰峻秩。甄別之精。經緯之密。聖眷非常。側佇和羹。復有季方。接跡而升。白眉鳳儀。朝著爲瑞。慈明棟材。挺拔未已。福祿是宜。益昌而熾。天若可必。理其足恃。豈意鬼蜮。公行白日。交亂罔極。鑠金銷骨。羿彀之棘。公爲其的。羅鉗吉網。恣其呑喫。視天其蒼。曷有其竆。千秋冤氛。爲蜺爲虹。十載深谷。盡室畏途。而禍未艾。惟鬼之謀。花山覊寓。二郞先逝。洛江村塢。仲氏又繼。非惟外食。豈關子厚。或諉於氣。果孰是究。固天有定。人莫之勝。泰運初回。如日方昇。聖敎哀痛。快洗深冤。上相崇品。賁于重泉。在公何憾。爲國興咨。政當更始。誰任扶持。如涉大浸。失其楫桅。云亡之痛。是公非私。江涯淺土。豈公攸宅。旣不具禮。又未備物。瞻彼盤龍。晻靄佳城。龜卜旣協。終焉允臧。展也伯胤。孝思不匱。專制方面。葬祭備至。隱卒崇終。有光窆穸。此理孔昭。孰疑孰惑。顧惟薄劣。文獻通家。先故是敦。辱公撫摩。末路失依。餘生安倣。依俙樑月。長入夢想。菲薄雞酒。寂寥文字。無竆者情。不盡者淚。
김성좌(金聖佐) 1639년(인조 17)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임경(任卿)
증조부는 사원(士元). 아버지는 상린(尙璘). 외조부는 남잡(南磼), 처부는 권두망(權斗望)
현종(顯宗) 4년(1663) 문과에 급제하여
전경문신에 초계되고, 사헌부감찰. 영춘현감. 예조정랑. 병조정랑을 지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金聖佐]
石老風猷在。荷翁事業新。淸操傳世德。長策蘊經綸。謀幄籌參決。銓衡鑑絶塵。三朝秉一節。千載際昌辰。北闕媒虫葉。西荒泣逐臣。桁楊徵岳夢。天日隔楓宸。冤碧萇弘血。悲沾志士巾。蒼穹雪冤枉。幽谷發陽春。丹綍昭雲漢。黃麻煥鼎匀。家聲仍繼述。嶠外又宣旬。草草城西葬。哀哀禮未伸。靑烏新宅兆。白馬舊門賓。曾忝牀前拜。偏蒙拂拭仁。徒霜介甫髮。未送魏公輴。撫己簪纓怪。緘辭感慨因。公私無限淚。南望倍傷神。
김해일(金海一) 1640년(인조 18)∼1691년(숙종 17). 영주
본관은 예안. 자는 종백(宗伯), 호는 단곡(檀谷).
아버지는 단(鍴)이다.
1660년(현종 1) 진사시에 합격한 뒤 1663년 선교랑(宣敎郞)의 신분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뒤로 지평·정언·헌납·집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숙종 초년 집권세력의 한 사람으로서, 1675년에는 김수항(金壽恒)을 탄핵하여 유배시키고, 허목(許穆)과 윤휴(尹鑴)의 대립에는 허목을 편들었다.
1678년 집의로 재직중에는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으로, 1689년에는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의 부사(副使)로서 중국에 다녀왔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축출되었다가, 1689년 기사환국 때 승지로 등용되었다. 목민관으로는 경주부윤까지 승진하였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金海一]
天道循環枉必伸。哀榮十載可堪陳。隨輀玉節家聲煥。褒隧黃麻聖渥新。
泉下痛纏凋棣日。人間恨極折蘭辰。遷封馬鬣知何處。悵望春山倍愴神。
이우진(李宇晋) 1640년(인조 18)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진백(晋伯)
아버지는 성균관직강 익노(翼老)
숙종(肅宗) 1년(1675) 진사시에 합격하여 천거로 참봉이 되고,
숙종(肅宗) 9년(1683)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에 이르렀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李宇晉]
寃竹風霜歲幾徂。夢中驚起但長吁。楊公墓下禽猶泣。王子廬前樹亦枯。
禍福相推終莫詰。是非纔定果難誣。聖恩今日哀榮備。泉路茫茫倘識無。
김성구(金聲久)1641년(인조 19)∼1707년(숙종 33). 봉화 해저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덕휴(德休), 호는 팔오헌(八吾軒) 또는 해촌(海村).
아버지는 용양위부호군 추길(秋吉).
1662년(현종 3) 사마시를 거쳐 166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전적·무안현감·직강·지평·수찬·정언 등을 지냈다. 수찬 재직시 국가재정에 관하여 각사(各司)의 비용과 내탕비(內帑費)를 줄여 진휼비에 보충하는 일과, 경사(經史)를 열심히 강론하여 치도(治道)를 구하는 일 등 수천언의 상소를 올렸고, 정언 재직시에는 당시 형조판서 남구만(南九萬)이 진휼비를 탕감했다고 고발하였다.
1679년(숙종 5) 장령 재직시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나누어지면서 논핵(論劾)되어 정의(旌義: 지금의 제주도) 등의 벽지로 쫓겨났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복관되어 대사성·집의·헌납·좌승지·강원도관찰사·병조참지 등을 거쳐 호조참의를 역임하였다.
그뒤 갑술환국으로 노론이 득세하자 향촌에 물러나서 서사(書史)를 즐기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는 관직생활에 있어서 공사를 분명히 하였다.
안동의 백록사(柏麓祠)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팔오헌집》이 있다.
*선생과 조정에 같이 있으면서 항상 뜻을 같이 했다.
김준상(金儁相) 1641년(인조 19) 서울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거경(巨卿)
아버지는 호조판서 동명(東溟) 세렴(世濂)
숙종(肅宗) 4년(1678) 문과에 급제
정언. 안변부사. 공조참의(工曹參義)에 이르렀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金儁相]
痛哭復痛哭。拊心傷讒舌。忠貞陷機穽。自古誠非一。孰如我明公。一朝奇禍發。念著庚申事。未語腸欲裂。橫罥以罪罟。有恨天可徹。炯炯爲國誠。可以神明質。終悲洛陽獄。聞者皆惻怛。况我四世好。偏蒙情愛密。每語陳交誼。必從祖先說。乃知君子心。勸勉後生切。自公就晻昧。慘惋驚心骨。未能哭歸櫬。于時一麾出。道路旣壅隔。聞問亦阻絶。我固有所負。胷中常耿結。音容夢裏接。覺後增悲咽。惠連沒旣早。仲智夭何卒。福善理已爽。彼蒼那得詰。爾來一紀餘。歲月何倏忽。天道好回互。凶讎果伏鑕。哀贈及泉壤。冤恨永昭雪。承家有喆嗣。玉節鎭南臬。天地監誠孝。錫以滕公室。淺土破蒼苔。佳城移白日。庶可妥精魄。從此獲慶吉。情當哭臨壙。路遠違執紼。惟有淚成河。哀此棟樑折。洛江猶可斷。此恨無時歇。
이시만(李蓍晩) 1641년(인조 19)∼1708년(숙종 34).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정응(定應), 호는 동애(東厓).
후징(厚徵)의 아들이다.
1678년(숙종 4) 통덕랑으로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680년 정언이 되고, 이듬해 홍문록(弘文錄)에 녹선되었다.
1683년 부수찬으로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688년 수찬이 되고, 1689년 교리를 거쳐 사간이 되어, 지난해 희빈 장씨(嬉嬪張氏)소생인 왕자의 명호(名號)를 정하는 일과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가 생겼을 때 서인의 거두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항(金壽恒) 등이 시기상조라고 상소한 것에 논박하여 이들을 사사(賜死)하게 하고 남인이 세력을 잡은 이른바 기사환국을 불러일으켰다.
1690년 대사간이 되고, 1693년 도승지에 이어 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李蓍晩]
傷心那忍說庚申。司隷云亡黨錮辰。人不敢言猶敢怒。理無終屈有終伸。
天回白日浮雲散。字煥丹旌聖渥新。應是墓門來大鳥。古今忠直正堪倫。
이양(李暘) 1641년(인조 19) 성주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하경(夏卿)
아버지는 통덕랑 태형(泰亨)
현종(顯宗) 7년(1666) 진사시 합격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李暘]
傷心那忍說庚申。最惜王章社稷臣。天道十年回泰運。玉宸千里降恩綸。忠魂北望哀榮備。孝子南歸葬禮新。只恨荊蘭相繼折。嗚呼不及見昌辰。
이옥(李沃) 1641년(인조 19)∼1698년(숙종 24). 서울/상주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문약(文若), 호는 박천(博泉).
관징(觀徵)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최호(崔皞)의 딸이다.
1660년(현종 1) 즉위증광시(卽位增廣試)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관(史官)을 거쳐 1668년(현종 9) 예조좌랑, 1670년 사간원 정언·사헌부지평이 되었으며, 1675년(숙종 1)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그뒤 헌납·이조좌랑·응교·사간·우부승지·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678년 예송(禮訟)에 의하여 시정된 복제(服制)의 고묘(告廟)와 송시열(宋時烈) 등의 오례주장자(誤禮主張者)의 처벌문제로 남인이 강경파 청남(淸南)과 온건파 탁남(濁南)으로 분열되자, 아버지와 함께 허목(許穆)·윤휴(尹鑴)를 중심으로 한 청남에 속하여 송시열의 극형을 주장하다가 탁남의 영수 허적(許積) 등의 반대로 삭직되어 북청(北靑)에 유배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풀려나 승지에 등용되고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1692년 예조참판이 되었다. 직간(直諫)을 잘하여 여러 차례 유배당하였으며, 1698년 영남에서 죽었다.
글씨에 능하고 문명도 높았다.
저서에는 《박천집》 33권과 《역대수성편람(歷代修省便覽)》이 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李沃]
南國新羅人士冠。來儀王國作天官。更張志切名爲累。文網於公獨不寬。
臆鬱長虬氣射雲。寧無所見亦無聞。至今恐惹東京說。黨禍人中孰是君。
白日中天掃翳氛。遺孤慟哭曲江文。分明禍福持符契。孤竹祠前慰范墳。
孝子精誠感彼天。雪冤恩渥漏重泉。誰無父母誰無子。小雅詩中廢一篇。
박세신(朴世臣) 1642년(인조 20)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신재(臣哉)
조부는 유(瑠). 아버지는 태화(泰華). 외조부는 김득선(金得善)
숙종(肅宗) 10년(1684) 문과급제. 숙종 14년 동학훈도. 15년 창락찰방(昌樂察訪)
숙종 17년 예조좌랑.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朴世臣]
高門世德早蜚英。八座名卿衆望傾。身命寧論時罔極。安危喜見日重明。
傳聞塞徼開荊棘。復道邱原賁寵榮。忍把庚申無限淚。臨風灑向五倻城。
성관(成瓘) 1643년(인조 21) 서울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옥여(玉汝)
조부는 신구(信耉). 아버지는 후주(後周). 외조부는 목기선(睦嗜善)
숙종(肅宗) 5년(1679) 생원시에 합격하고, 숙종(肅宗) 8년(1682) 문과에 급제
사간. 집의를 지내고 갑술옥사로 권대운 민점과 같이 변방에 유배되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成瓘]
山斗名高禍竟隨。一生忠赤只天知。每憐幽痛伸無地。何幸陽春見有時。
丹筆洗冤公議定。黃扉襚秩聖恩滋。也應淺土移封日。大鳥悲鳴淚亦垂。
권두인(權斗寅) 1643년(인조 21)~1719년(숙종 45) 안동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춘경(春卿). 호는 하당(荷塘), 설창(雪窓)이다.
아버지는 참봉 목(霂). 외조는 驪州 李伯明, 妻父는 昌寧 成錫夏이다.
홍준형(洪浚亨)의 문인이며, 갈암 이현일(李玄逸)· 우담 정시한(丁時翰)을 尊慕하였고, 천리길에 미수 허목(許穆)을 찾아 뵙기도 했다. 1677년(숙종 3) 35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였지만,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심했다. 權瑎의 천거로 효릉이 된 후,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 ·사어(司禦)를 거쳐 공조좌랑이 되고 사직하였다. 안동의 동백서원(東柏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는 <荷塘集>이 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權斗寅]
平生蘊抱合經綸。玉立風標聳搢紳。卿月位隆弘聖化。台星望集際昌辰。
明夷入腹冤誰白。往事驚心慟更新。泉壤至今優寵典。庶看幽憤洩神人。
손만웅(孫萬雄) 1643년(인조 21)∼1712년(숙종 38). 경주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적만(敵萬), 호는 야촌(野村).
아버지는 신의(愼儀)이며, 어머니는 이심근(李深根)의 딸이다.
1669년(현종 10)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해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크게 명성을 떨치고 성균관에 등용되어 오수찰방(獒樹察訪)·전적을 거쳐 공조·예조·형조의 좌랑을 지냈다.
1674년 현종이 죽었을 때 도감랑(都監郞)으로서 모든 일을 순서있게 처리하자 당상관들이 그 재주를 칭찬하고 일마다 그와 의논하여 행하였다.
1675년(숙종 1) 병조좌랑에서 영광군수로 내려가 선정을 베풀었다. 정언·호조정랑·춘추관기사관을 거쳐 지평으로 있을 때 김수흥(金壽興)을 서용하려고 하자 자의대비복제문제(慈懿大妃服制問題)에서 그가 효종을 ‘체이부정(體而不正)’이라고 하여 파직당하였던 죄목을 내세워 조리정연하게 논핵(論劾)하여 취소시켰다.
1677년 사예로 동지사의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사도시정(司䆃寺正)·장령·공주목사·나주목사·괴산군수 등을 역임하였으나, 가정이 빈한하여 서책과 장복(章服)을 팔아서 부모를 봉양하였으며, 청주목사에 제수되었다가 파직되었는데 대신들이 상주하여 유임되었다.
그뒤 동래부사를 거쳐 경주부윤에 이르렀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孫萬雄] 천장시
生挺名家積德門。遁村之裔石爺孫。氣藏河海襟懷豁。世掌絲綸雋望尊。
一代聲譽聯棣萼。諸郞風采盡蘭蓀。東京黨禍何偏酷。元祐賢流竟抱冤。
世事十年知幾變。化翁多忌更堪言。丹忠鬱悒悲埋土。白日分明照覆盆。
追錫台鉉紆盛眷。仍加禮典煥新恩。翻思碌碌陪從久。每聽諄諄敎誨敦。
藥石深欣蒙奬勸。萍流偏幸得攀援。傷心往跡銷魂盡。回首前遊拭淚痕。
更卜新阡移藁葬。政當賢嗣守屛藩。忍看城外花千樹。依舊春風又一番。
野村先生文集
燕行日錄
1677년(숙종 3) 동지사서장관이 되어 떠날 때 모인 분들
정사는 영창군 이침. 부사는 참판 심재. 서장관은 사예 손만웅.
전별연에는 판서 홍우원. 판서 목래선. 회원군 이륜. 대사간 이하진. 승지 권해. 판결사 김하량. 참의 유명천. 참의 나만엽. 여주목사 신후재. 장령 이유관. 집의 이항.
교리 이봉징. 수찬 이식. 지평 신후명. 헌납 권환. 정언 박진규. 헌납 김해일. 정랑 이담명. 장령 강석구. 좌랑 정수현. 사평 한후상. 참봉 이윤해. 별좌 이상현. 정자 이시만. 풍기군수 박천영. 대사간 목창명. 승지 유명헌. 교리 목임유. 정 이달의. 정 박정설. 진사 한경우. 한명상. 진사 이동근. 전적 승득운. 전적 김상하. 주부 김상환.
박사 나선. 박사 백세흥. 학유 신필형. 39인.
夕時。就辤領左右相及鄭。判府事。右相睂爺曰。吾年已八十三。君今作萬里行。㪅見其可必乎。別意都在不言中。唯願珍重往還云。夜深。許友仲能。持酒來餞。○丁丑。晴。平明。詣闕辤陛。上宣賜紗帽。耳揜臘藥一封。胡椒三升。與副使㘴。兵曺李叅議[元祿]在直李判書[元禎]鄭參判[錀。]金佐郎[兌一。]李注書[泰龜。]尹翰林[義濟]來見。入政院。與承㫖叙別。日晚拜表訖。正副使。各奉表咨。安彩轝。大作樂。由敦化門而出。[員役七。醫貟四。雁字官七。畵貟二。正使軍官四。副使軍官三。書狀官軍官一。灣上軍官三。商賈管餉別將二。運餉別將三。海西別將一。淸譯一。] 到慕華館。查文書。與李正宇[徴龜]同㘴。看結褁表咨。李正丈。自掌樂院。爲余設餞。金宗伯申天休朴正丈白博士辛學諭姜學正。皆會別而去。俱同道人也。吳參判[始復。]崔參議[文湜。]姜掌令金直長[儁相。]尹正郎 [源。]羅叅議。到鞍嶺。摻別而罷。右相睂爺鄭判府事。再伻以問。眷意可想。到弘濟院。上副使及李判書,吳判尹[挺緯]權叅判[大載]鄭大諫[之虎。]權承旨[脩]柳參議李大諫[夏卿]兪參議[夏益。]柳正[星三。]李執義大初權獻納仲章李正郎耳老朗善君[保]花昌君[沇。]皆已來會矣。夜二㪅到髙陽。上副使已來到。主倅金有鉉出待。刷馬差貟衿川縣監崔聖任人馬差貟桃源察訪洪益亨來見。黃叅奉應老氏。自昌陵來訪。許進士嶨。與其伯㟩。亦來見。是日行四十里。
上之三年丁巳十有一月初三日丙子。晴。余充冬至使書狀。官偕上使瀛昌君[沉。]副使沈參判[梓。]陪表如燕京。以發程在明日。故卿宰及諸僚友。相繼以來。設餞送別。洪判書[宇逺。]睦判書[來善。]檜原君[倫。]李大諫 [夏鎭。]權承㫖[瑎。]金判決事[廈樑。]柳參議[命天。]羅參議 [萬葉。]申驪州[厚載。]李掌令[碩寛。]李執義[沆。]李校理[鳯徴。]李修撰[湜。]申持平[厚命。]權獻納[瑍。]朴正言[鎭圭。]金獻納[海一。]李正郎[聃命。]姜掌令[碩耈。]鄭佐郎[洙賢。]韓司評[後相。]李叅奉[允諧。]李別坐[象賢。]李正字[蓍晚。]朴豊基[千榮。]睦大諫[昌明。]柳承旨[命賢。]睦校理[林儒。]李正[逹意。]朴正[廷薜。]韓進士[景愈。]韓友[命相。]李進士[東根。]承典籍[得運。]金典籍[尚夏。]金主簿[尚煥。]羅博士[䙋。] 白博士[世興。]辛學諭[必馨。]凢三十九人。夕時。就辤領左右相及鄭。判府事。右相睂爺曰。吾年已八十三。君今作萬里行。㪅見其可必乎。別意都在不言中。唯願珍重往還云。夜深。許友仲能。持酒來餞。○丁丑。晴。平明。詣闕辤陛。上宣賜紗帽。耳揜臘藥一封。胡椒三升。與副使㘴。兵曺李叅議[元祿]在直李判書[元禎]鄭參判[錀。]金佐郎[兌一。]李注書[泰龜。]尹翰林[義濟]來見。入政院。與承㫖叙別。日晚拜表訖。正副使。各奉表咨。安彩轝。大作樂。由敦化門而出。[員役七。醫貟四。雁字官七。畵貟二。正使軍官四。副使軍官三。書狀官軍官一。灣上軍官三。商賈管餉別將二。運餉別將三。海西別將一。淸譯一。] 到慕華館。查文書。與李正宇[徴龜]同㘴。看結褁表咨。李正丈。自掌樂院。爲余設餞。金宗伯申天休朴正丈白博士辛學諭姜學正。皆會別而去。俱同道人也。吳參判[始復。]崔參議[文湜。]姜掌令金直長[儁相。]尹正郎 [源。]羅叅議。到鞍嶺。摻別而罷。右相睂爺鄭判府事。再伻以問。眷意可想。到弘濟院。上副使及李判書,吳判尹[挺緯]權叅判[大載]鄭大諫[之虎。]權承旨[脩]柳參議李大諫[夏卿]兪參議[夏益。]柳正[星三。]李執義大初權獻納仲章李正郎耳老朗善君[保]花昌君[沇。]皆已來會矣。夜二㪅到髙陽。上副使已來到。主倅金有鉉出待。刷馬差貟衿川縣監崔聖任人馬差貟桃源察訪洪益亨來見。黃叅奉應老氏。自昌陵來訪。許進士嶨。與其伯㟩。亦來見。是日行四十里。
정내상(鄭來祥) 1643년(인조 21)∼1717년(숙종 43).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대숙(大叔)이다.
증조는 정협(鄭恊)이고, 조부는 정세미(鄭世美)이다. 부친 정수(鄭脩)와 모친 김계(金棨)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679년(숙종 5)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숙종 대에 장령·부수찬·교리·사간·응교·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1690년(숙종 16) 장령으로서 남인 정권 때 이미 처벌받은 민정중(閔鼎重)을 다시 처벌할 것을 주장하는 논계(論啓)에 반대 입장을 내세웠다. 이후 사인·승지를 지내고, 1701년(숙종 27) 철원지방 토포사로 나갔다. 1712년(숙종 38) 정시 고관에 선출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가 파직당하였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鄭來祥]
楚獄橫冤世共憐。驚心何忍說庚年。宸衷旣悟絲綸切。泉路雖深雨露偏。
藁葬幾時埋至恨。蓬科今日卜新阡。賢郞令季如相見。應拜君恩感涕漣。
권흠(權歆) 1644년(인조 22)∼미상. 서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형(子馨).
아버지는 대군사부(大君師傅) 적(蹟)이다.
1676년(숙종 2) 성균관 유생으로서, 영평정(寧平正) 사(泗)가 올린 상소로 우의정 허목(許穆)이 사직하자 사직을 만류하도록 상소를 올렸다.
1675년(숙종 1) 감시(監試)에서 생원시에 일등하였는데, 이는 10년 전에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남중유(南重維)의 사소(邪疏)에 관련되어 유벌(儒罰)을 입었기 때문에 그동안 응시하지 못하다가 이때 칙령으로 응시할 수 있었다.
1678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대사성 이무(李袤) 등이 6품에 천거하였고, 따로 초계(抄啓)가 있었으므로 참봉으로 6품직에 직승(直陞)되어 정언이 되었다.
도당(都堂)이 선발하는 홍문록(弘文錄)에 뽑혀 부교리·이조좌랑이 되었으며, 식년시에 응시하지 않고 증광시에 응시한 것은 비법(非法)이라고 하여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대사간·대사성·이조참의를 거쳐 승지가 되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權歆]
十年天日見重明。九地埋冤感聖情。溫綍首宣偏痛切。粉書新換極哀榮。
牛岡叶卜更神宅。箕尾凝精衛漢京。堪詫寵光泉路賁。大郞棠茇闡家聲。
박경후(朴慶後) 1644년(인조 22)∼미상. 서울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휴경(休卿), 호는 취옹(醉翁)·만오(晩悟).
상욱(尙郁)의 아들이다.
1669년(현종 10)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675년(숙종 1) 통덕랑(通德郞)으로서 숙종의 즉위를 축하하는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승정원주서·홍문관수찬·사간원정언 등 삼사(三司)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1682년 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그뒤 1690년 승지를 거쳐 황해도관찰사로 보임되었고, 1692년(숙종 18) 청나라에서 사신이 오자 접반사(接伴使)로 활약하였으며, 이어 병조참판에 올랐다.
글씨를 잘 써서 당대에 이름이 있었고, 양주(楊州)의 좌찬성박대립비(左贊成朴大立碑), 하양(河陽)의 통제사김시성비(統制使金是聲碑) 등의 유필(遺筆)이 남아 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朴慶後]
向來人事欲無言。有淚空留枕席痕。天道十年方悔禍。嶺雲千里始招魂。
明時失鑑嗟何及。大廈要樑惜不存。今日泉塗改照地。想應含笑拜君恩。
신경제(申慶濟) 1644년(인조 22) 청주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회(聖會)
증조부는 대사헌 용졸재(用拙齋) 신식(申湜). 아버지는 신행(申涬)
숙종(肅宗) 1년(1675) 진사시에 합격하고, 숙종(肅宗) 15년(1689) 문과에 급제
영조 1년 송시열을 논척하다가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한성좌윤을 지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申慶濟]
前乎己卯後庚申。十載長沾志士巾。天理好還丹筆煥。泉途改照粉書新。
大夫以葬寧無恔。孝子之情庶可伸。敢把荒詞摹偉烈。海東乘史暎千春。
이동근(李東根) 1644년(인조 22) 서울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진백(震伯)
아계 이산해의 현손. 아버지는 오빈(梧賓). 생부는 인빈(寅賓)
현종(顯宗) 10년(1669) 생원시에 합격하고, 숙종(肅宗) 15년(1689) 문과에 급제.
홍문록에 오르고 사헌부 지평, 장령. 필선이 되고 숙종 17년 허적의 신원과 민정중의
절도유배를 청하였다. 숙종 20년 갑술옥사로 유배되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李東根]
當時一網擧朝空。只恃冤魂訴上穹。玉入火中光益烈。劒埋泉下氣猶通。
漢灘從古多嗚咽。天日于今抉蔽蒙。自顧誅奸誠未格。白頭慙乏諫臣風。
강선(姜銑) 1645년(인조 23)∼미상. 서울
본관은 진주. 자는 자화(子和).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백년(柏年)이다.
1675년(숙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679년에 부수찬·정언을 지냈고, 홍문록(弘文錄)·도당록(都堂錄)에 올랐다. 인동부사 역임 거사비가 세워졌다
1680년 지평으로 재직중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삭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교리에 등용되어 송시열(宋時烈)의 죄를 논하고, 나국(拿鞫)할 것을 청하였다. 이어서 장례원판결사·형조참의·동부승지를 역임하고, 1693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갑술환국으로 다시 파직당했다.
1698년 형조참의로 다시 기용되었고,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동지의금부사를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1705년 강원도관찰사, 이듬해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1708년에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姜銑]
絲綸哀惻雪深冤。賵贈恩榮賁九原。枯木欣霑新雨露。漆燈留待幾朝昏。
華亭始改楊公葬。楚水重招屈子魂。自此高門緜福慶。張弓天道老聃云。
목창명(睦昌明) 1645년(인조 23)∼1695년(숙종 21). 서울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제세(際世), 호는 취원(翠園).
관찰사 행선(行善)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장령 윤효영(尹孝永)의 딸이다.
1670년(현종 1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여러 언관직(言官職)을 거쳐 1674년(숙종 즉위) 진향사(進香使)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헌납(獻納)·응교를 거쳐, 1677년 승지, 다음해 대사간·이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남인이었던 까닭에 1680년 경신대출척이 일어나자 사직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대사간에 복직되고, 이어 한성부우윤·도승지·대사헌·대사성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부제학이 되었다.
1692년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1694년 갑술옥사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탄핵을 받고 삭주(朔州)에 안치되어, 유배지에서 죽었다.
1699년 관작이 복구되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門下睦昌明]
一節三朝卽藎臣。平生爲國不謀身。剛腸嫉惡猜嫌積。大廈扶傾望實純。
奸孼陰謀欺日月。士林淫禍慘庚申。山長海闊冤何極。歲去時移淚謾頻。
還幸十年天亦定。終敎一夕枉皆伸。宸情惻怛俄宣詔。襚爵慇懃遂秉匀。
學士如何先曉露。明時不及見陽春。淸光改照泉途賁。幽穸從佳宅兆新。
早荷登龍常感激。更兼趨鯉托情親。關西異鳥來翔處。矯首南雲倍濕巾。
배정휘(裵正徽)1645년(인조 23)∼1709년(숙종 35). 성주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미숙(美叔). 호는 고촌(孤村)
배세위(裵世緯)의 아들이다.
1673년(현종 14) 진사로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77년(숙종 3) 정언(正言)이 되고 다음해 지평(持平)이 되었다.
그뒤 정언과 지평을 번갈아 지내고, 헌납(獻納)·평강현감(平康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 장령(掌令), 1694년 승지로 특진되었다가 폐비사건으로 인하여 부령(富寧)으로 귀양갔다.
사헌부에 있을 때인 1679년 송시열(宋時烈)을 탄핵하기도 하였으며, 특히 글씨를 잘 써 행목사송희규비(行牧使宋希奎碑)·지평여희림표(持平呂希臨表)·처사배상룡갈(處士裵尙龍碣) 등을 남겼다.
孤村集
祭李判書 元禎 文 改葬時 귀암집에는 미수록
理管培覆氣更參錯當徵而信其理賁若及乖而戾謂氣使然反覆交互孰爲孰眞考委識源視發知積曰惟廣李冠冕奕舃曁于石潭擧如毛輶累善食報推如阜後如苖宜土公獲其遺畜裕出宏大暢厥施中年抹摋險路跼武晩歲際遇順風縱羽多才茅拔爲領爲袖衆務林委如刀斯割烏府首席冡宰峻秩甄別之精經緯之密聖眷非常側佇和羹復有季方接迹而升白眉鳳儀朝著爲瑞慈明棟材挺拔未已福祿是宜益昌而熾天若可必理其足恃豈意鬼蜮公行白日交亂罔極鑠金銷骨羿彀之棘公爲其的羅拑吉鍊恣其呑嚼視天其蒼曷有其窮千秋冤氛爲霓爲虹十載深谷盡室畏途而禍未艾惟鬼之謀花山羈寓二郞先逝洛江邨塢仲氏又繼非惟外食豈關子厚或諉於氣果孰是究固天有定人莫之勝泰運初回如日方昇聖敎哀痛快洗深冤上相崇品賁于重泉在公何憾爲國興咨政當更始誰任扶持如涉大浸失其楫桅云亡之痛是公非私江涯淺土豈公幽室旣不具禮又未備物瞻彼盤龍晻靄佳城龜卜旣協終焉允臧展也伯胤孝思不匱專制方面葬祭備至隱卒崇終有光窆穸此理孔昭孰疑孰惑顧惟薄劣文獻通家先故是敦辱公撫摩末路失依餘生安倣依俙梁月長入夢想菲薄鷄酒寂寥文字無窮者情不盡者淚嗚呼哀哉
신학(申㶅) 1645년(인조 23)∼미상. 청주.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도원(道源), 호는 만회당(晩悔堂)·만천(晩川).
아버지는 사예 득홍(得洪)이다.
1673년(현종 14) 통덕(通德)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674년(숙종 즉위) 가주서가 되었다.
1677년 지평에 이어 정언을 역임하고 전라도의 흉년에 대하여 위민책(爲民策)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689년 장령이 되어 홍문록(弘文錄)에 등록되었으며, 이듬해 헌납·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1694년 승지에 이르렀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申㶅]
古來冤死似公誰。欲說庚申涕自垂。事質神明如皦日。恩霑泉壤卽淸時。
哀情不盡崩城婦。餘慶猶存按節兒。何處靑烏移卜宅。春風回首倍傷悲。
심단(沈檀) 1645년(인조 23)∼1730년(영조 6). 서울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덕여(德輿), 호는 약현(藥峴)·추우당(追尤堂).
청성백(靑城伯)의 후손이고, 평시령(平市令) 광면(光沔)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해평윤씨(海平尹氏)로 예조참의 선도(善道)의 딸이다.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조부인 윤선도 밑에서 교육을 받고 자라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1662년(현종 3) 진사가 되고, 1673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75년(숙종 1)에 승정원주서·전적을 거쳐, 1677년 홍문관수찬이 되고 이조좌랑·숙녕현감(肅寧縣監)·교리·이조정랑·검상·사인·응교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1680년 남인세력이 서인세력에 의하여 쫓겨나는 경신대출척으로 인하여 양덕에 유배되어 10년간 지내다가 1689년 남인이 득세하는 기사환국으로 다시 풀려나 교리·부응교·수원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유배생활의 경험을 백성편에서 진소(陳訴)하여 왕의 인정을 받았다.
당시 인현왕후(仁顯王后) 민비(閔妃)가 쫓겨남에 박태보(朴泰輔) 등이 이를 반대하다가 참살을 당하자 비록 반대파 처지이기는 하지만 그의 충성을 칭찬하기도 하였다.
그뒤 이조참의·병조참판·도승지·대사간을 거쳐 대사헌이 되어서는 장성현(長城縣)의 민전(民田)이 궁방전(宮房田)으로 빼앗기자 이를 상소하여 민전으로 환급시켰다.
또, 평안도관찰사로 나가서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인심을 얻었으며, 이어서 대사간과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1694년 민비복위와 동시에 갑술옥사를 통하여 남인세력이 모두 축출당할 때 파직당하고 이듬해에 어머니상을 당하였다.
1699년 삼척부사를 잠깐 지냈으나 1701년 민비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자 그나마 명맥이 남아 있던 남인세력이 완전히 제거당할 때 같은 남인이던 민언량(閔彦良)의 무고를 입어 해남현에 유배되고, 1703년 영해에 옮겼다가 1711년에 풀려났다.
그뒤 1713년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1720년 지중추부사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1721년(경종 1)에 이조판서·예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경종과 세제인 영조에게 우애하기를 항상 권장하였고, 당시 소론의 강경파 김일경(金一鏡)이 중심이 되어 환관 박상검(朴尙儉)을 매수하여 왕세제를 해치려 하였던 사건을 크게 비난한 바도 있다. 이어서 대사헌·판의금부사를 거쳐 한성판윤과 세제우빈객(世弟右賓客)을 겸하면서 왕세제를 보도(輔導)하였다.
이어서 우참찬·형조판서·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영조즉위 후에는 판의금부사·판중추부사·도총관 등을 역임하였으나 1728년(영조 4) 재집권한 노론의 탄핵으로 삭주에 유배되었다가 1729년 영조의 탕평책으로 풀려나 공조·형조의 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러나 그해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급히 궁궐로 달려가서 안민(安民)하고 학리(虐吏)를 제거할 것, 제도(諸道)의 사조(私租)를 조사하여 군액(軍額)에 충당할 것, 주전(鑄錢)을 하지 말 것, 제궁가(諸宮家)와 각 관아가 침탈하는 법외사세(法外私稅)를 혁파할 것 등의 시무(時務)를 올렸다.
1730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정조의 말에 의하면 “영조는 그가 충신이라고 항상 칭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시대가 당쟁이 심하던 때이고 남인이던 그의 외조부의 영향을 직접 받아 관직생활 57여년 동안 당쟁의 파란을 많이 겪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沈檀]
相公生南國。朱雀耀台垣。羽儀丹穴禽。變化滄溟鯤。上君白玉堂。視草靑瑣門。以玆一寸膠。欲止千丈渾。平生寬饒勁。本無金張援。棲棲困下邑。鎩翮失騰鶱。萊鎭國威宣。完府遺愛存。河陽報政後。舜庭龍納言。片辭折狡虜。風儀動至尊。亞卿非序進。拔擢承殊恩。門闌漸輝赫。簪笏盈高軒。屛風每隔座。雲路相和壎。文衡潤國命。藻鑑服衆論。非無戒盈心。角巾歸故園。徒懷報主願。未忍辭天閽。駭機一朝發。鬼怪陰車掀。竇武非叛將。大禍及陳蕃。白日雖至明。何由照覆盆。風霜奮直舌。桁楊泣斷魂。東京太尉喪。藁葬城西原。山河不平氣。結爲陰雲屯。天道一周星。世事波瀾翻。驚䨓伏羣魔。九地雪幽冤。哀贈煥台階。恩波徹厚坤。祀典慰精靈。惻然天語溫。冥冥感泣地。父子兼弟昆。家業屬金籯。便養鎭南藩。追惟大葬缺。痛哭膺自捫。靑烏卜靈丘。粉旌繞朱幡。鯫生昔何幸。早荷恩禮敦。關塞十年蹤。更仄周行鵷。未得共淸時。惻愴難可諼。執紼阻前後。題挽聲自呑。
심벌(沈橃) 1645년(인조 23)∼1711년(숙종 37). 서울.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군섭(君涉).
이조판서 액(詻)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광사(光泗)이다.
1675년(숙종 1) 증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1677년 2월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다. 그는 남인으로서 같은해 6월 서인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의 유배 직후에 전개된 고묘(告廟)에 우의정 허목(許穆)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이는 예(禮)를 바로잡은 일을 종묘에 고하는 것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서인을 일망타진하려는 의도가 개재되어 있는 것이었다.
1679년 1월 부제학 이당규(李堂揆) 가 홍문록(弘文錄)을 작성할 때 이한명(李漢命)·윤의제(尹義濟) 등 15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혔으며, 같은해 6월 도당(都堂)에서 홍문록을 작성할 때에도 역시 포함되었다. 이후 정계에서의 두드러진 활약상은 보이지 않다가, 1689년 희빈장씨(禧嬪張氏)가 낳은 아들을 세자로 삼으려는 숙종에 반대한 송시열 등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한 기사환국 이후 정계에 다시 등장하였다.
같은해 2월 사헌부지평에 임명된 이후 홍문관의 부수찬·수찬·부교리·교리·부응교 및 사헌부집의를 거쳐 의정부사인에 이르렀다. 이후 홍문관의 여러 관직을 역임한 다음 승지를 거쳐 1691년 7월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8월 승지를 거쳐 9월 황해도관찰사에 이르렀다.
1694년 남인이 축출되고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 갑술환국으로, 그도 대사헌 이규령(李奎齡), 사간 박세준(朴世儁) 등의 탄핵에 의하여 극변(極邊)에 유배되었다가, 1697년 3월에 유배에서 풀려났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沈橃]
聞說新阡改築塋。思量往事幾呑聲。梓喬曾擅三蘇譽。荊棣兼傳二陸名。
傾覆向來疑晦塞。循環此日定分明。哀榮前後恩如海。按節兒今奉紼行。
권만제(權萬濟) 1646년(인조 2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세경(世卿)
조부는 진(溱). 아버지는 진철(震哲). 처부는 이우징(李虞徵). 조시원(趙時瑗)
현종(顯宗) 10년(1669) 식년 문과 급제. 현종 11년 교서관 정자로 분관. 박사. 성균관전적.
숙종 2년 공조좌랑. 예조좌랑. 결성현감. 숙종 15년 예조정랑. 숙종 19년 창령현감.
1690년(숙종 16 경오) 예조정랑으로 숙종의 치제문을 가지고 내려와 귀암. 석담, 동강. 한강선생을 치제하였다.(석담선생 문집 부록)
歸巖先生文集 附錄
賜祭文
維歲次庚午二月癸亥朔十八日庚辰。國王遣臣禮曹正郞權萬濟。諭祭于卒贈領議政李元禎之靈。不貲之身。追贈未償。漢皇所詔。實感予情。故於忠藎。用賚非常。首降哀音。再申愍章。嗚呼噫噫。思之涕滂。胡忽羸豕。胡昧履霜。庶戮無辜。而卿最傷。爲儀之鳳。見噬於狼。執我仇仇。爲矛爲鋩。戕蕭者戚。殲膺是璫。其死足悲。其名愈昌。古而有徵。今也可方。術竆詐得。彼不終藏。聽枉省冤。予則諦詳。卿對不撓。忠肝理長。貳身有疏。孝膽義颺。收錄兩孤。伯陞侍郞。寄以心膂。典刑未亡。㴑厥淵源。鍾此休祥。大爺儒宗。祖溪父岡。考富學箱。舅擅智囊。生此一人。畀我三王。儀幹脩偉。氣宇軒昂。契深聖考。恩猶慈孃。輒僵而扶。必沈之揚。羣眦欲裂。衆吻成瘡。始予倚毗。思日贊襄。間雖晻昧。卒乃昭彰。肆直前謾。用表來臧。竊跡平生。丈夫心腸。彼鬚而媍。瓦全爲良。天眞爛漫。才具汪洋。骨又不媚。後身仲翔。用是逢患。亦以留芳。原秩豈恩。一醊未光。載崇花誥。更薦瓣香。永念世緯。方攬朝綱。大廈重修。政急櫲樟。九原如作。何憂棟樑。卿有喆媲。命孤以將。魂亦歸來。佑我無疆。嶺雲悠悠。洛水泱泱。千里緘辭。寫意悲凉。貴相知心。何間幽明。
挽詞[權萬濟]
往事悲纏骨。天心愍老成。苾芬煩使价。崇奬煥恩榮。
宣布藩臣重。經營孝子情。仍懷蒙宿眷。雪涕望新塋。
정시윤(丁時潤) 1646년(인조 24)∼1713년(숙종 39). 서울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우(子雨), 호는 두호(斗湖).
관찰사 호선(好善)의 손자로, 교리 언벽(彦璧)의 아들이다.
1669년(현종 10)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뒤 음보(蔭補)로 현감을 지내고, 1690년(숙종 16)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그해 사헌부지평에 올랐다.
그뒤 정언·부수찬·헌납·수찬 등 삼사의 청직(淸職)만을 두루 거쳤다.
1694년 홍문관부교리로 있을 때 남인과 소론간의 당쟁이 격화, 남인일파가 몰락하고 소론이 정권을 장악한 갑술옥사가 발생하자 남인으로 지목되어 삭직되었다.
1698년 세자시강원필선으로 복직한 뒤 일시 파직된 일이 있었으나 재기용,
관직이 병조참의에까지 이르렀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丁時潤]
鳥嶺之南第一人。秉銓當日擬經綸。至冤忍說庚申夏。霈澤欣沾己巳春。
玉樹聯芳貤慶遠。丹旌換字卜阡新。觀風桑梓哀榮並。幽顯應知感祝均。
최경중(崔敬中) 1646년(인조 24) 서울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일강(日强)
아버지는 간(侃). 처부는 여헌 문인 이정기(李廷機)
숙종(肅宗) 7년(1681)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숙종(肅宗) 9년(1683) 문과에 급제. 성균관전적. 숙종 15년 병조좌랑. 16년 성균관직강.
사헌부지평. 의흥현감. 19년 사헌부장령. 평안도사. 20년 장령. 23년 좌통례. 여산군수.
숙종 29년 승문원판교. 32년 무산부사. 36년 공조참의. 37년 병조참의.
1721년(경종 원년) 한성좌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崔敬中]
魏碑纔起感神人。恩及泉臺雨露新。奸孼曾聞媒乙巳。禍機寧忍慘庚申。
千秋榮辱存鈇袞。一代風流冠搢紳。滌盡舊冤營卜兆。從知有後必稱仁。
이현석(李玄錫) 1647년(인조 25)∼1703년(숙종 29). 서울 출생.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하서(夏瑞), 호는 유재(游齋).
실학자인 수광(睟光)의 증손으로, 상규(尙揆)의 아들이다.
1667년(현종 8) 진사가 되고, 1675년(숙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예문관검열에 보직된 뒤 삼사의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1682년 우승지가 되었으나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의 예론(禮論)을 반대하다가 철원에 부처되었다.
1688년 다시 동래부사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경상도관찰사, 1691년 동지중추부사, 1693년 춘천부사를 지냈다.
이듬해 청풍현감을 자원하여 나가 《명사강목(明史綱目)》을 저술하였으며, 그뒤 한성부판윤·우참찬·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관직에 있는 동안 군학(君學)과 시무(時務)에 관한 여러 소장(疏章)과 저서를 제진(製進)하였다. 탕평책과 중농정책을 건의하였으며, 경연강의(經筵講義)교재의 개편을 진언하였다. 국방정책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강화도 축성방안과 봉수제도의 개선방안 등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춘천부사 등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진휼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 경제세무(經濟稅務)에 관한 실용적인 사상을 가지고 조세의 감면 등 각종 정책을 입안하였고, 역리(易理)로써 군도(君道)와 치술(治術)을 설명한 《역의규반(易義窺斑)》을 저술하여 임금에게 올렸다.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이론보다는 존심양성(存心養性) 등 실천적인 덕목에 치중하였다.
저서로는 《명사강목》 24권, 《역의규반》 1권, 《유재집》 24권 등이 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李玄錫]
玉燼崑炎禍最奇。冤呼道路十年玆。日昭盆底先回景。綸切人間亦洩悲。
應有精靈扶社稷。每從朝著想容儀。中宵撫枕當時淚。滴墨今題引紼詞。
이현기(李玄紀) 1647년(인조 25)∼1714년(숙종 40). 서울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원방(元方), 호는 졸재(拙齋).
판서이자 학자인 수광(睟光)의 증손으로 동규(仝揆)의 아들이다.
1673년(현종 14)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76년(숙종 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해 사관(史官)으로 등용되고 이어서 수찬이 되었다. 학식이 깊어 나라의 중요한 공문은 대부분 그의 손에서 작성되었다.
1686년 또다시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집의가 되고, 이어서 우부승지를 거쳐 대사성이 되었다.
1688년 외직인 전라도관찰사로 나가고 이어서 경상도관찰사로 재직중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남인인 그는 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다시 외딴 섬에 안치되었는데, 1699년에 풀려나와 고향에서 살도록 방귀(放歸)되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李玄紀]
曾是周班望實隆。一心王室炳丹忠。材全文武經綸密。手握匀衡黜陟公。
儀範可堪今日隔。渥恩還覺聖朝洪。區區更向重泉賀。新化方隨世運通。
홍만수(洪萬遂) 1647년(인조 25)∼1695년(숙종 21). 서울.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중(成中), 호는 채봉(彩峰).
감사 주삼(柱三)의 아들이다.
1678년(숙종 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승문원정자로 문과중시에 을과로 발탁되어 상사에 출입하게 되었으며, 벼슬이 교리에 이르렀다. 안질이 매우 심하여 실명하였다.
저서로는 《채봉집》이 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洪萬遂]
一代巖廊具。需時德且才。明堂安峙鼎。淸廟儼開罍。玉石鍾鼇下。波瀾潤洛隈。荷潭徵宅相。梅里有庭槐。留滯曾遺托。零丁早乏媒。囊螢身佇立。歌鹿計偕來。親策收髦俊。巍科逼斗魁。名推天下士。美擅嶠南材。翰筆三傳世。豸冠屢入臺。奇才宜主眷。隆譽致人猜。落拓頻分竹。超陞祇得萊。瞻辰常耿耿。遊刃謾恢恢。隨事操何力。先時禍已胎。道因三黜直。鬢爲二憂皚。縱識留無益。那能去不廻。喉司恩獨被。右地轂仍推。特立他何恃。羣敲久不摧。公朝當肅穆。卿月重徘徊。掄選稱懸鑑。經綸佇踐台。要將涇合渭。應使駿先駘。活國謨初定。蘇氓理亦該。聖恩期報答。時事柰傾頹。首亂知何者。戕良底快哉。滄桑驚一夢。否泰遞相催。北寺崑炎再。西關玦泣纔。殆同鴻罥網。未有馬含杯。疾痛呼重禁。傷嗟逮下儓。必除將死草。猶撲旣寒灰。顯廟應加衋。幽泉可訴哀。銘旌塡寂寞。歸櫬越崔嵬。骨肉悲盈臆。交遊淚暎腮。雲煙凄故壠。霜露愴陳荄。入夢親曾說。障瀾我自咍。宸心一朝悟。天道十年回。存沒昭伸雪。幽明霈解䨓。千秋輝簡冊。九地托鹽梅。劒氣應銷斗。家聲屬轉灾。貂班有寶樹。鵬路絶浮埃。列鼎臨當臬。聯珠惜減枚。固知榮不樂。多見慟無裁。淺土塋曾掩。他山宅改開。應緣防水洩。恨未近金堆。薤露辭何廢。南雲眼屢擡。承顔思夙昔。撫頂自提孩。庭侍淹嘗藥。軒臨輒倒盃。敢忘先誼重。永願後塵陪。曳履嗟空闃。同舟憶泝洄。誰堪舊遊地。花暎滿城栽。
이의징(李義徵) 미상∼1695년(숙종 21). 서울.
본관은 전주(全州). 판서 응시(應蓍)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공덕으로 음관(蔭官)에 천거되어 진안현감이 되었다.
1681년(숙종 7) 암행어사로 내려온 오도일(吳道一)의 추천으로 양리(良吏)로 뽑혀 관직이 특승되었다.
그러한 치적으로 1689년 호조참의에 발탁되었다.
이듬해에 충홍도관찰사를 거쳐 수원부사가 되었다.
1691년 지방행정관으로서 세운 선정을 인정받아 호조참판으로 승직되었다.
이듬해에 공조판서가 되고, 1693년 한성부판윤을 거쳐 훈련대장이 되었다. 그해 국방대책의 일환으로 추진되는 축성후보지를 물색하기 위하여 왕의 특명을 받아 문수산(文殊山)을 답사, 그곳이 축성적지임을 보고하여 성을 쌓았다.
1694년 지의금부사가 되어 옥사를 공정히 다루었으며, 다시 훈련대장이 되었다. 타고난 무골이었을 뿐만 아니라, 성질이 너무 강직하여 의금부사로서 죄인을 너무 거칠게 다룬 것이 당쟁인들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보복적인 탄핵을 받아 절도(絶島)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해에 사사(賜死)되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李義徵]
忠精誰愍九泉魂。公議猶存萬口喧。十載皇天方悔禍。一朝宸極幸昭冤。
葬緣厚禮營新兆。官復榮名煥舊恩。尙有親知無限痛。滿襟哀淚更添痕。
권규(權珪) 1648년(인조 26)∼1723년(경종 3). 서울
본관은 안동. 자는 국서(國瑞)·덕장(德章), 호는 남록(南麓).
아버지는 영의정 대운(大運)이며, 어머니는 우정(禹鼎)의 딸이다.
1675년(숙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검열이 되었다. 사헌부·사간원의 관직과 이조낭관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1689년 도당록(都堂錄)에 오르고 수찬이 되었다.
1690년 경기도관찰사, 이듬해 도승지, 다음해에 대사간을 거쳐 1693년 대사헌에 승진하였다. 아버지 대운과 함께 남인의 처지를 고수하여, 1694년 갑술환국 때는 당진으로 유배되었다가 1697년 풀려났다.
그뒤 노·소론의 대립에서는 소론의 처지를 도와, 1721년(경종 1) 세제(世弟) 연잉군(延礽君)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1722년 신임옥사로 소론이 집권하자 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소론 조태억(趙泰億) 등의 주청에 의해 공조판서에 추증되었으나, 영조 즉위 후 직첩을 빼앗겼다.
전서(篆書)에 뛰어났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權珪]
傷心往事欲無言。虎倒龍顚日月昏。烈焰何知焚玉痛。大明終燭戴盆冤。
操衡舊秩天曹峻。贈爵新榮鼎席尊。莫怪牛岡塋域改。歸來猶有未招魂。
정재륜(鄭載崙)1648년(인조 26)∼1723년(경종 3). 조선 효종의 부마.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수원(秀遠), 호는 죽헌(竹軒).
영의정 태화(太和)의 아들이며, 좌의정 치화(致和)에게 입양되었다.
1656년(효종 7) 효종의 넷째딸 숙정공주(淑靜公主)와 혼인하여 동평위(東平尉)가 되었다.
숙정공주가 일찍 죽고, 1681년(숙종 7) 독자이던 효선(孝先)이 요절하자 재취할 것을 상소하여 왕의 허락을 받았으나, 대간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부마들은 재취할 수 없다는 법규가 정하여졌다.
1670년(현종 11) 사은정사로, 1705년에는 동지정사로, 1711년에는 동지 겸 사은정사로 청나라에 세 차례나 다녀왔다.
1716년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記)》를 증보, 간행하였다.
또한, 저서로 《공사견문록 公私見聞錄》·《한거만록(閑居漫錄)》 등 수필형식의 기록이 있다.
기국(器局)이 준위(俊偉)하고 생활이 검소하여 모두 왕의 사위인 줄을 몰랐다고 한다.
시호는 익효(翼孝)이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鄭載崙]
昔承王命伴燕行。薄劣慚叨上价名。共涉長途成厚分。頻尋委巷荷深情。
風儀幾痛重泉隔。墓草空傷十載經。改卜眠牛移永宅。可堪旌翣向新塋。
김세흠(金世欽) 1649년(인조 27)∼1721년(경종 1). 안동 내앞.
본관은 의성. 자는 천약(天若), 호는 칠탄(七灘).
조부는 임(恁). 아버지는 주부 태기(泰基). 외조부는 김광수(金光遂)
1673년(현종 14) 진사가 되고 1687년(숙종 1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93년 홍문록·도당록에 올랐다. 부수찬·지평 등을 역임하고 1698년 교리가 되어 붕당(朋黨)·기강(紀綱)·기근(飢饉) 등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
1707년 수찬으로 상소가 지나쳐 장벌을 받아 죽게 된 이잠(李潛)의 구명을 간하다 관작을 삭탈당하고 흥양(興陽)에 유배되었고, 유배에서 풀려나서는 벼슬을 단념하고 향리로 돌아가 독서로 소일하였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金世欽]
袞綉三朝德業成。風雲萬里際休明。可爲痛哭十年事。不盡消磨千古名。
天向覆盆垂沛渥。地要金骨改封塋。如公可贖人將百。安得重泉喚再生。
홍중정(洪重鼎) 1649년(인조 27) 서울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상지(象之)
고조부는 대사헌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 증조부는 독정재(獨靜齋) 감사 립(雴). 조부는 주후(柱後). 아버지는 진사 만최(萬最). 외조부는 신기한(申起漢)
숙종(肅宗) 4년(1678) 진사시에 합격하고, 숙종(肅宗) 16년(1690) 문과에 급제.
숙종 17년 예문관검열. 19년 사헌부지평. 시강원문학. 지평.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洪重鼎]
庚年士禍慘東京。噓毒姦凶一夜成。九地舊冤今日雪。三台新贈聖朝榮。
恩從象魏幽明感。卜改牛岡宅兆營。獨使少郞終不見。棠陰血淚灑縱橫。
여성거(呂聖擧) 1649년(인조 27) 성주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우(子遇). 호는 나은(蘿隱)
아버지는 여대화(呂大和) 처부는 이태형(李泰亨)
숙종(肅宗) 7년(1681) 생원시에 합격
숙종(肅宗) 9년(1683)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숙종 11년 성균관 학유. 13년 학록, 학정. 숙종 15년 성균관전적. 16년 예조좌랑으로 겸춘추 무과감시관이 되었다. 7월 충청도사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임하고, 10월에 사간원정어니 되었다. 숙종 19년 병조정랑, 사헌부지평, 사간원 정언이 되었고 숙종 20년 금산군수로 나갔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呂聖擧]
傷心忍復說庚申。天定終能亦勝人。烈火貞珉冤滌舊。崇班哀贈寵縈新。
重泉厚夜嗟難作。大觀淸朝痛末因。別有幽明無限恨。不同南紀見斯辰。
이후영(李後榮)1649년(인조 27)∼1712년(숙종 38). 안동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사구(士久).
증조부는 이지(李遲)이고 조부는 이종배(李宗培)이며 아버지는 이분(李蕡)이다.
외조부는 참의 고암(孤巖) 남천한(南天漢)이고 처부는 감사 반초당 이명익(李溟翼)이다.
15세 때 이미 시(詩)·서(書)·서(史)에 통달하였다.
1684년(숙종 10) 급제하였고 관직은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이르렀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李後榮]
欲寫哀詞淚滿巾。傷心不忍說庚申。崑岡火烈冤無極。寒谷陽生痛忽伸。
天上恩波延九夜。身前事業暎千春。遙聞此日遷幽宅。還慰仁阡葬禮新。
강현(姜鋧) 1650년(효종 1)∼1733년(영조 9). 서울
본관은 진주. 자는 자정(子精), 호는 백각(白閣)·경암(敬庵).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백년(柏年), 어머니는 황담(黃湛)의 딸이다.
1675년(숙종 1) 진사시에서 장원하고 1680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86년 수찬으로 문과중시에 다시 을과로 급제하였다.
1689년 이조참의, 1694년 예조참판·경연참찬관·경기도관찰사 등을 거쳐 1695년 도승지가 되고, 1701년 인현왕후의 상을 당하여 좌참찬으로 고부사(告訃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08년 대제학, 다음해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이후로도 한성부판윤, 경종 때 다시 판의금부사를 지냈다.
북인의 후예로서, 숙종대의 정치적 기복에 큰 부침을 겪지 않았으나 점차 소론을 두둔하여 경종 때의 신임옥사에서는 노론 정치인들을 다스렸고, 그 죄로 1725년 삭출되었으나 기로소에 들어갔던 점이 감안되어 곧 석방되었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姜鋧]
幽谷春回日。佳城改卜時。冞增風樹痛。永激士林悲。
冥漠應無憾。精靈倘有知。追思舊世誼。嗚咽不成辭。
송유룡(宋儒龍) 1650년(효종 1)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덕보(德甫)
조부는 지명(之明). 아버지는 도흥(道興)
숙종(肅宗) 7년(1681) 문과에 급제. 승지를 지냈다.
지평 때 김수흥을 탄핵하였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宋儒龍]
不語呑聲欲語噫。昭昭天道問何爲。人亡國瘁竆冤結。理返時來渙渥垂。
蕪沒汶陽非大葬。經營江夏卽新儀。更憐玉樹中年折。惟有甘棠孝子悲。
허경(許熲) 1650년(효종 1)∼1719년(숙종 45). 서울 출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요부(堯夫), 호는 빙호(氷湖).
아버지는 지평 열(悅)이며, 어머니는 권현(權睍)의 딸이다.
1675년(숙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1681년(숙종 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자·지평·응교·장령을 거쳐 동부승지를 지냈다.
이어 경주부윤이 되고,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저서로 《빙호유고》가 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許熲]
蒼天冥漠苦無言。終遣孤忠抱至冤。叵耐向時雙涕淚。會看今日再乾坤。
魏碑起踣惟公議。董筆褒賢摠主恩。聞道新阡移舊宅。更將餘恨賦招魂。
홍만기(洪萬紀) 1650년(효종 1) 서울 출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여장(汝張)
증조부는 대사헌 모당(慕堂) 리상(履祥). 아버지는 주문(柱文)
숙종(肅宗) 15년(1689) 문과급제
승지를 지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洪萬紀]
昏昏風雨十年間。离日回光快燭姦。肯遣忠魂長掩抑。也知天道有循環。
兒持玉節營新兆。寵贈黃扉絶舊班。欲識高名人仰處。斗南千丈屹烏山。
이만원(李萬元) 1651년(효종 2)∼1708년(숙종 34). 서울 출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백춘(伯春), 호는 이우당(二憂堂).
아버지는 형(泂)이며, 어머니는 최대년(崔大年)의 딸이다.
1678년(숙종 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정언 등을 역임하고, 1689년에 지평(持平)이 되어 송시열(宋時烈)·윤증(尹拯)의 시비를 분별할 것을 상소하자 왕이 가납하였으며, 홍문록(弘文錄)에도 올랐다.
이어서 정언·지평·부교리·헌납·이조좌랑을 역임하고서 함경도암행어사가 되었다. 곧 승지에 발탁되었다가 광주부윤(廣州府尹)을 거쳐, 1690년에 이조참의가 되어 진휼(賑恤)을 위한 공명첩(空名帖)의 남발에 따른 폐단을 상소하였다.
그뒤 대사간·이조참의를 거쳐, 1693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고, 2년 후에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1697년 성주목사가 되어 혜정(惠政)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들었다.
1700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고, 이어서 공조참판·이조참판을 역임하였으며 연릉군(延陵君)에 봉하여졌다.
1796년(정조 20)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공주의 부용당(芙蓉堂) 영당(影堂)에 제향되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李萬元]
每痛忠臣慘禍罹。至今行路亦嗟咨。蒼穹改照宸情惻。丹筆伸冤愍典垂。
王氏蓼莪詩幾廢。關西異鳥淚應滋。八哀千古騷人恨。爲續遺篇不忍悲。
김문하(金文夏) 1652년(효종 3) 서울 출신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성기(聖起)
조부는 시국(蓍國). 아버지는 수번(壽蕃)
숙종(肅宗) 1년(1675) 생원. 진사양시에 합격하고
숙종(肅宗) 9년(1683)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응교를 역임하였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金文夏]
往事涒灘尙忍言。驚心烈火劇崑焚。周臣碧血霾幽恨。漢代丹書雪厚冤。
哀贈上台紆祀典。英靈九地泣君恩。賢郞按道營新兆。忠孝于今萃一門。
성준(成儁) 1653년(효종 4) 서울 출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천정(天挺)
아버지는 대현(大顯). 외조부는 남명익(南溟翼)
처부는 영의정 이민구의 아들 이석규(李碩揆)
숙종(肅宗) 10년(1684) 문과에 급제 성균관 사성을 지냈다.
정재선생과 가까웠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成儁]
有美生南國。魁梧見偉人。碩才優柱石。宏器擅簪紳。遇事期無苟。持心自任眞。剛方懷直道。峻整拔凡倫。敎胄明彝則。操衡愼揀掄。斥邪如脫距。憂國卽忘身。直木知先伐。駭機已暗臻。鑠金傷衆口。受玦泣孤臣。密網人誰脫。圓扉草不春。黃泉終掩抑。素志柰沈淪。忍說當年事。空沾志士巾。孤忠傍質鬼。幽怨上干旻。幸際朝班肅。重開世運屯。聖聰深悔悟。哀痛溢絲綸。竄殛唐盧李。旌褒漢范陳。幾齎長夜恨。不待百年伸。禮遣黃蕉奠。恩頒紫誥新。榮光賁窀穸。瞻聽聳鄕鄰。淺土移塋日。佳兒按節辰。客陳徐子酌。民哭寇公筠。相紼嗟無路。題詞倍疚神。春風一掬淚。重灑禁城闉。
성임(成任) 1662년(현종 3) 서울 출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중(汝重)
아버지는 대현(大顯). 외조부는 남명익(南溟翼). 성준(成儁)의 동생
숙종(肅宗) 7년(1681) 생원시에 합격하고,
숙종(肅宗) 10년(1684) 형과 문과에 동방급제.
장악원정을 지냈고 장희재의 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成任]
元禮高標屬望深。文饒雅量冠紳簪。星辰曳履風雲盛。虹霓干霄日月陰。
冤結重泉埋碧血。時淸哀詔輸丹心。台垣贈秩銘旌換。塋域新開洛水潯。
김만주(金萬柱) 1653년(효종 4) 예안 출신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중능(仲能)
문절공 담(淡)의 7대손. 조부는 찬(鑽). 아버지는 종호(宗灝).
처부는 경주부윤 괴애(乖厓) 류지(柳榰)
숙종(肅宗) 7년(1681) 생원시에 합격하고, 숙종(肅宗) 16년(1690) 문과에 급제.
그해 자여도찰방(自如察訪)이 되고. 19년 병조좌랑. 강원도사가 되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金萬柱]
昭代名家有世臣。尙書劒履上星辰。長材自合支傾廈。駭浪誰知起妒津。
九地英靈招不返。十年天道屈還伸。崇褒大葬哀榮盡。繼志酬恩屬貳身。
김일기(金一夔) 1653년(효종 4)~1711년(숙종 37)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순경(舜卿) 호는 도암(道庵)
아버지는 만시(萬始). 외조부는 황영(黃泳)
숙종(肅宗) 3년(1677) 문과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숙종 17년 사간.
사헌부 집의. 통정에 올라 목사를 지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金一夔]
傷心何忍說庚申。泉路重看日月新。身後聖恩深且厚。世間公道屈還伸。
靑烏改兆靈宜妥。玉節臨阡孝彌純。欲奠生蒭雲嶠遠。謾題哀誄淚盈巾。
박행의(朴行義) 1653년(효종 4) 서울 출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도언(道彦)
조부는 계영(啓榮). 아버지는 진규(鎭圭). 생부는 신규(信圭)
숙종(肅宗) 5년(1679) 진사시에 합격하고, 숙종(肅宗) 16년(1690) 문과에 급제.
17년 예문관검열. 세자시강원사서. 22년 홍문관수찬. 23년 경연에서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聖學輯要)의 강독을 정지할것을 청하다가 문외 출송되었다.
숙종 31년 시강원필선. 사헌부장령. 32년 보덕. 사간원 사간. 34년 선현을 모독하였다하여
파직되가. 숙종 41년 보덕으로 기용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朴行義]
說到庚申欲籲天。可堪臨挽涕漣漣。扶持未賴明神力。生殺還移聖主權。緹女疏成悲厚夜。王裒詩廢泣竆泉。丹書洗枉哀榮備。黃閣宣綸寵渥偏。雛鳳卽看拖晝錦。臥牛何幸占新阡。移封只要英靈妥。舊穴將開宿草芊。重壤有知魂不憾。九原難作慟猶牽。鏡鸞幾弔空閨影。銀管行徵石室編。江漢茫茫東逝永。璿霄落落列星懸。交親爲是連三世。風樹餘懷倍愴然。
이윤수(李允修) 1653년(효종 4) 서울 출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면숙(勉叔)
증조부는 덕형(德馨). 조부는 여규(如圭). 아버지는 상정(象鼎)
숙종(肅宗) 5년(1679) 진사시에 합격하고, 숙종(肅宗) 7년(1681) 문과에 급제
승지. 황해감사 역임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李允修]
冢宰生南國。山河降神精。家世廣陵李。荷潭宅相成。魁星耀平康。歲歲歌鹿鳴。遂入宗匠選。文彩振大京。嶷然士林領。坦坦天衢程。珥彤鳳池邊。環珮鳴鏘鏗。蛾眉竟見妒。蹤跡阻蓬瀛。牛刀困雞割。鵬翮辭虫翃。萊館慴居倭。完府蘇疲氓。歸來紫淸高。密直趨延英。際會葡萄館。虜使恣凶獰。公時陪至尊。片言國重輕。風儀動顧眄。進秩躋少卿。吾道屬元亨。咎繇仍寵榮。枯魚倏含索。蘆衣就杜蘅。外除入京闕。事業推阿衡。兼誨國子胄。與莅騷壇盟。徐兒叶吉夢。蘇子延家聲。金華白玉省。燀爀弟與兄。非無石奮謹。恐懼戒滿盈。感此主恩深。效身忘死生。含沙競待影。巧密設機坑。幽戶自飛霜。赤心證神明。毅然舌不柔。來周肝膽驚。難將一卷經。掩得千載名。慘惔萇弘血。蕪沒城西塋。親知且畏約。盡室嶺外行。十年天道復。家耄斯彙征。百身終難贖。遺悔感宸情。絲綸洗冤氛。不待廷臣爭。褒贈煥槐棘。祀典哀忠貞。冥冥九地下。精魄猶生平。鴒原與子舍。感淚應相幷。靑雲有舊武。經訓留金籝。南藩爲便養。桑梓繞旗旌。追惟倉卒際。孺慕起深誠。牛岡擇靈丘。鬱鬱眞佳城。悠悠葬日促。悵望悲懷縈。鯫生昔隅坐。花樹開逢迎。溫溫丈席間。承誨僕頻更。前後阻攀紼。發慚顔猶赬。荒詞替薤歌。淋浪淚河傾。
민창도(閔昌道) 1654년(효종 5)∼미상. 서울 출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사회(士會), 호는 화은(化隱).
좌의정 희(熙)의 아들이다.
1678년(숙종 4)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80년 정언이 되었고, 1689년 부제학 유명현(柳命賢) 등이 홍문록(弘文錄)을 만들 때 1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발탁되었다. 그해에 헌납·부교리를 지냈고,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던 중 호당시(湖堂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숙종으로부터 상으로 표피(豹皮)를 받았다.
1690년 헌납으로 사서(司書)를 겸하였고, 이어 이조좌랑·승지를 거쳐 1691년 경상도관찰사, 이듬해 부제학을 거쳐, 1693년 이조참의, 1694년 대사성이 되었으며, 1722년(경종 2) 신임사화 때 장수(長水)에 유배되었다.
특히,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곽산의 개원사(開元寺) 불량비문(佛糧碑文)과 영변의 보현사(普賢寺) 월저대사비문(月渚大師碑文)을 찬하였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閔昌道]
含沙伎倆劇兒曹。陽九儒冠柰世髦。惟有鬼神心可質。終敎魑魅影難逃。
丹書棘寺回盆枉。紫誥楓宸下袞褒。從此洛江千里水。恩波日夜共滔滔。
嶠南文獻魯爲鄰。詩禮庭中見鳳麟。祇謂經綸能濟世。豈知仁義亦亡身。
不煩肺石冤先洗。爲贈台衡寵更新。正屬須才多難日。起公無路但傷神。
哀詔丁寧雪枉初。恩推孤寡重欷歔。望夫雙淚心同瀉。頌父千言血已攄。
學士靈安忘吉鼔。少娘魂亦念緹書。由來存沒傷神地。摠爲家肥更感余。
休明未究便沈幽。一洗冤魂改卜丘。骯髒九原埋不朽。芬芳一代暎長留。
奠芻客有三千士。攀紼兒將七十矦。結草亦應貽式穀。甘棠方任活氓憂。
先朝盛德在堯先。明鑑眞同日月懸。推擯每須容汲引。生成不獨荷陶甄。
銓衡留與傳今聖。鼎鉉追加慰舊賢。想得龍髯天上侍。應同吾老共周旋。
二父神交世共知。忍看奇禍晩同罹。首陽埋骨眞堪痛。湘水招魂不盡悲。
未死曾經塗炭日。餘生重見照盆時。代言纔罷仍題挽。上哭吾公下哭私。
祭文[閔昌道]
不佞小子。常心語口曰。李公之謾必直乎。其種德邁矣。篤襲詩書。蔚爲寬大通明之人。中實剛毅。有不可奪之操。故迺於崑炎之日。忠肝義膽。辭氣不撓。其身雖隕。其名不朽。且其庭壼之懿。使其寡有崩城之烈。其孤雖迫於勢牽於事。雖不能上書擊鼔。其心卽吉緹縈之心。而伯也又有淚如泉。此而不直。是無天也。嗚呼。以今日觀之。不佞之言。若持左契矣。語云人無所不至。惟天不容僞。嘻噫誠然哉。當世道交喪之際。夫豈有所謂蒼蒼者。而不十載而大定。旌與雪俱媺。至於崇贈而再醊。又至於使貳身持節故土。以禮營窆。則人間泉下。哀榮無憾。時則不佞承聖主之命。致意於隱卒之文。仍孝子之請。寄哀於蒿里之章。今與伯子交龜南嶠。來奠於幽宅。而感慨之情。又萬萬矣。嗚呼。今之俗政頹矣。時方艱矣。若使公在者。德可以激頹。才可以濟艱。而百身靡贖。九原難作。此蘇長公之所以上以爲天下惜。下以爲吾私者也。
이현조(李玄祚) 1654년(효종 5)∼1710년(숙종 36). 서울 출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계상(啓商), 호는 경연당(景淵堂).
태종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좌랑 석규(碩揆)이며, 어머니는 여흥 민씨로 좌랑 성복(聖復)의 딸이다. 큰아버지 동규(同揆)에게 수학하였다.
1681년(숙종 7)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2년 증광시에 을과로 급제, 다음해 검열(檢閱)을 거쳐 대교(待敎)에 올랐다.
1684년 구언(求言)에 의하여 허목(許穆)의 관작복구를 상소하였다가 도리어 파직당하였다.
1685년 대교로 복직, 1689년 사가독서하여 호당(湖堂)에 들어갔다가 성균관전적으로 부임한 다음 경상도도사·경기도도사를 거쳐 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이조좌랑을 지냈다.
1689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출을 적극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그뒤 사인(舍人)·사간·대사간·형조참의를 거쳐 강원감사를 지냈다.
저서로 《경연당집》이 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李玄祚]
忍說庚申痛。驚呼欲問天。城狐初竊柄。弩蜮暗張絃。樂禍䕺羣憾。乘機網衆賢。士林方掩抑。夫子亦流遷。必欲甘心久。終看受毒偏。哲人罹此厄。行路至今憐。向歲遭逢盛。當朝地望先。忱誠天獨許。忌嫉世皆然。累躓名逾重。羣敲守益堅。竟承當宁眷。冞感得君專。補袞身爲鑑。持衡位長銓。聖情須激濁。輿望仰扶顚。幾贊綢繆策。宜操燮理權。孤忠落機擭。宿志負陶甄。棟折誰支廈。檣摧未濟川。氣干牛斗鬱。心炳日星懸。淚逬披陁血。悲傳殄瘁篇。魂應陪顯廟。冤可訴幽泉。世道看消長。天心有斡旋。人間新渥煥。地下宿誣湔。襚爵台班極。哀綸奠禮蠲。精靈知結草。悔語屬臨筵。有子官仍峻。酬忠賞更延。明時重際遇。方面任旬宣。宅改靑烏吉。光生粉字塡。蒼黃曾淺土。雨露卽新阡。掩涕思先誼。承顔自幼年。女兄蒙舅愛。世好荷姻連。弔畏腸曾裂。嗟賢慟幾纏。路長違執紼。魂斷嶺雲邊。
이이만(李頤晩) 1654년(효종 5) 서울 출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정수(正叟). 호는 오헌(悟軒)
조부는 필행(必行). 아버지는 후징(厚徵). 외조부는 송휘길(宋暉吉). 처부는 정박(鄭樸)
숙종(肅宗) 13년(1687) 진사시에 합격하고, 숙종(肅宗) 15년(1689) 문과에 급제.
16년 예문관검열. 17년 사간원정언. 전라도암행어사(이때 이현일이 대사헌). “어사(御史) 이이만(李頤晩)이 군관(軍官)을 곤장으로 구타한 것은 비록 온당하지 못한 일이기는 합니다마는, 병사(兵使)가 이로 인해 화를 내어 봉명(奉命)한 사신(使臣)을 능멸한 것은 크게 체통을 무너뜨린 일이니, 홍이도(洪以度)를 파직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이이만은 추고(推考)하고, 홍이도는 먼저 파직한 다음에 추고하도록 명하였다
(왕조실록) 숙종 24년 사헌부장령. 숙종 33년 시강원필선. 헌납. 34년 경상도어사. 보덕. 집의. 35년 사간원사간으로 “토호(土豪)들이 소민들에게 끼치는 폐해를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부요(富饒)한 사람들이 대부분 이자 놀이하느라 돈과 곡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흩어 놓으며 전토(田土)의 문서를 전당(典當) 잡았다가, 이자가 날로 불어나 갚을 수 없게 되면 그 전당 잡은 것을 그대로 매매(買賣)한 것으로 만들어 그의 전토를 빼앗아버리고, 또한 조금 세력이 있는 사람은 유민(遊民)들을 유혹하여 모아 이모저모로 비호(庇護)해 주며 연호(烟戶)의 부역을 포탈하여 면하게 해 놓고서 공공연히 구사(驅使)하고 있고, 심지어는 소를 도살하여 이익을 남기는 짓을 하고 전결(田結)을 숨기어 부역을 피하는 짓을 하고 있으니, 청컨대 각도 감사(監司)를 신칙하여 적발해서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따랐다. 사헌부집의. 동부승지. 숙종 40년 상소로 삭탈관직되다.
숙종 42년 관직이 복구되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李頤晩]
向來時事足驚心。說到庚申淚不禁。始信十年天道復。終敎九地聖恩深。
北宸哀贈丹旌煥。南國佳城白日臨。珍重平生憂愛志。尙看餘慶在棠陰。
송정규(宋廷奎) 1656년(효종 7)∼미상. 서울 출신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원경(元卿), 호는 우수(迂叟).
1683년(숙종 9)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1690년 정언에 올랐다. 당시 폐출된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처 우문제의 상소를 올렸다. 이어 지평이 되고 1696년 경성판관으로 선치(善治)하여 품계가 오르고, 뒤에 승지가 되어 참찬관(參贊官)을 겸임하였다.
1701년에 인현왕후가 죽자 고부사(告訃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708년 강원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절수(折受)의 폐를 상소하여 강릉·춘천·낭천 등 3읍의 절수를 폐지하게 하였다.
글씨에 뛰어났으며, 문묘 대성전의 현판을 썼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宋廷奎]
大嶺鍾靈秀。高門挺傑魁。崢嶸湖海氣。磊落棟樑材。鵬翼摶風擧。鯨魚跋浪開。傳家秉彤筆。補闕直銀臺。新服釐邦禮。明時引衆才。聖心圖理銳。淸議待公恢。獻替紆謨密。推遷望實該。持衡思拔茹。調鼎佇爲梅。祇道天應祚。寧知禍有胎。鴻魚俄一網。玉石竟同灰。楚獄無虛歲。齊堂有震䨓。龍樓中夜起。天道十年廻。雨露霑黃壤。哀榮極上台。承家白眉在。按節錦衣來。具禮蒙官庀。移封獲吉裁。丹旌粉字換。蒿里薤歌催。更覩緦麻處。兼傷玉樹摧。聲華曾動世。盛滿豈招災。積慶終難艾。遺風幸未頹。斗間收白氣。庭際鬱蒼槐。碑起文皇念。城崩杞婦哀。遙應一大鳥。來泣若堂隈。
이진휴(李震休) 1657년(효종 8)∼1710년(숙종 36). 서울 출신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백기(伯起), 호는 성재(省齋)·성암(省菴).
아버지는 영(泳)이며, 어머니는 정만화(鄭萬和)의 딸이다.
1677년(숙종 3) 사마시에 합격하고, 1682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686년에는 전적으로서 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지평·정언·장령·헌납·수찬·부교리·집의·사간·필선·승지 등을 역임하고, 1700년에 도승지·동지의금부사를 거쳐 1701년에는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송사(訟事)를 편청(偏聽)하였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일시 파직되었다.
이듬해 도승지를 거쳐 1703년에는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는데, 국경을 넘어가는 사람 2명을 죽인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1705년에 다시 도승지로 서용되었으며 그뒤 동지의금부사·안동부사·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특히 서예에 능하였으며, 그가 쓴 비문으로는 〈통도사사리탑비 通度寺舍利塔碑〉, 상주의 〈지추김식비 知樞金湜碑〉, 광주(廣州)의 〈예판이증비 禮判李增碑〉·〈찬성이상의비 贊成李尙毅碑〉, 양주의 〈호참목장흠비 戶參睦長欽碑〉·〈영백이명웅갈 嶺伯李命雄碣〉 등이 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李震休]
喬木名家第一人。斗南聲價世無倫。風流席上看威鳳。文雅朝端識瑞麟。
魚水承歡寧考日。涓埃思答聖明辰。銓衡幾歲懸淸鑑。廊廟他年佇大匀。
時値艱虞期盡瘁。心存經濟便忘身。淸朝豈意讒能售。君子如何運更屯。
火烈崑岡焚玉石。波驚宦海泣簪紳。西關遠謫何須說。北戶深冤竟莫伸。
伊昔衣冠皆慘愴。祇今行路尙酸辛。英靈飮恨邱原閟。天道無私雨露新。
官復舊銜紆享禮。榮加崇贈煥恩綸。靑氈更有承家子。玉節方爲按道臣。
改卜佳城開淺土。留將殊蹟寄貞珉。傷心存沒成千古。回首光陰隔十春。
想得騎箕遊上界。惟應結草報中宸。踈慵恨未承淸範。千里緘詞灑涕頻。
권중경(權重經) 1658년(효종 9)∼1728년(영조 4). 서울 출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도일(道一), 호는 손재(巽齋)·정묵당(靜默堂).
조부는 영의정 대운(大運)이며, 아버지는 위(瑋)이다.
1689년(숙종 15)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독서당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듬해 도당록(都堂錄)에 뽑히고 사서(司書)에 이어 교리·헌납·이조좌랑, 1691년 수찬·부교리·이조정랑, 1692년 부응교·사간·승지, 1693년 대사간·대사성, 이듬해 이조참의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이해 그를 등용한 민암(閔黯) 등이 실각하는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위리안치되었다.
1708년 전리(田里)로 방귀(放歸) 되었다가 1721년(경종 1) 풀려나 이듬해 전라도관찰사에 기용되었으며, 1723년 함경도관찰사에 이어 이듬해 형조참의·호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728년 척질(戚姪)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키자 자살하였다.
저서로 《정묵당집》이 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權重經]
秀氣山河毓。淸朝有藎臣。凝嚴瞻器宇。軒豁破畦畛。碩望推南紀。深誠拱北辰。君民志未展。宇宙運方屯。肺腑容螟蜮。干戈逮搢紳。萍蓬西塞夜。風雨北扉晨。道路皆垂涕。親朋暗疚神。斐萋眞毒手。鍛鍊卽膏唇。密網徵三刺。輿情見百身。戴盆空茹痛。淺土幾經春。世道看消長。天機有屈伸。九重廻睿眷。一札降哀綸。殊寵台扉贈。崇恩泂酌陳。一天懸白日。萬事已黃塵。舊卜星山側。新阡洛水濱。天敎賁窀穸。兒已按宣旬。井里觀瞻改。松楸氣色新。維公多契托。我祖最情親。杖屨叨陪久。詩書惠訓頻。于今都已矣。哀挽一沾巾。
나학천(羅學川) 1658년(효종 9)∼1731년(영조 7). 영주 출신.
본관은 수성(壽城). 자는 사도(師道), 호는 창주(滄洲).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수종(壽宗)이며, 통덕랑(通德郞) 수성(壽星)에게 입양되었다.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688년 전적을 거쳐 병조좌랑·강원도도사를 역임하고, 1690년 지평·정언·면천군수(沔川郡守)·울산부사·예빈시정·인동부사·판교(判校)·서천군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영조가 즉위한 뒤 노론(老論)의 일파로 시론(時論)을 진언하여 민생의 어려움과 군비의 소홀함 등을 지적하였고, 1725년(영조 1) 사성·필선·보덕·사간을 거쳐 승지·병조참지·우부승지에 이르러 영조가 탕평책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을 바꾸려고 하였다.
즉, 영조는 탕평책을 위하여 시비를 가리는 것까지도 거론하지 못하게 하자, 사색을 논하는 당론이 아닐 경우인 역적을 토척한다든가 의리를 밝힌다든가 하는 일은 권장하여야 하며, 역적 김일경(金一鏡)일파의 예를 들어 모역자들은 엄벌에 처하여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1727년에 좌부승지에 제수되자 나이 칠십을 이유로 극구 사양하다가 좌승지·형조참의가 되었다. 그때 영남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북관(北關)사람들이 그를 난적(亂賊)으로 몰아 파직시키자, 고향에 내려가 있다가 난이 평정된 뒤 1729년 다시 병조참지가 되었다.
이어 비록 영남사람이기는 하나 김일경과는 다르다는 변무소(辨誣疏)를 올렸다. 성품이 강직하고 자신을 지키는 태도가 확고하여, 당시의 당론에 휩쓸리지 않고 독보적인 존재로 정명의리론(正明義理論)을 주장하였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羅學川]
說到庚申涕幾潸。始知天道十年還。勳名一代推麟角。位望當時截筍班。
冥佩重藏塋兆吉。奇雛尙看鳳毛斑。遙違執紼空題誄。鳥叫千秋恨一般。
금 섬(琴暹) 1659(효종 10,)∼1695(숙종 21,). 봉화 출신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중서(仲舒).
아버지는 이해(以諧). 외조부는 光山 김석중(金錫重). 처부는 載寧 이필(李柲) 永陽 李重燫.
1683년(숙종 9) 진사시 합격하여 성균관 시에 장원하여 직부 전시되어 1690년(숙종 16) 문과 급제. 成均館學正을 지냈다.
經史에 博通하고 文士로서의 명성이 있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琴暹]
語到庚申涕泗洏。那堪臨挽寫哀詞。十年天道回還日。千古幽冤渙雪時。
勳業定垂良史筆。忠勤端合百僚師。靑山見說移玄宅。南國風煙0解悲。
김정익(金庭翊) 1659년(효종 10) 성주 출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익경(翼卿)
증조부는 동강 우옹(宇顒). 조부는 효가(孝可). 아버지는 지평 욱(頊)
처부는 한사 강대수.
숙종(肅宗) 1년(1675) 생원시 합격.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金庭翊]
憶曾迎哭洛江潯。奇禍從玆轉浸淫。仲胤先亡那瞑目。季方隨逝更恫心。
互回天道幽冤雪。悲喜人間聖渥深。重寫薤詞懷往事。淚和殘墨謾沾襟。
손덕승(孫德升) 1659년(효종 10)∼1725년(영조 1). 경주 출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현수(玄叟), 호는 매호(梅湖).
우재(愚齋) 중돈(仲暾)의 후손이다. 조부는 종계(宗啓)이고, 아버지는 건(鍵)이다.
문벌로 충의위(忠義衛)에 소속되어 있던 중, 1684년(숙종 10)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3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김천도찰방(金泉道)을 지냈다. 김천도찰방으로 있을 때, 치적이 많아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웠다고 한다. 만년에는 향리로 돌아와 후학을 기르며, 《심경(心經)》, 《근사록(近事錄)》 등에 심취하였다. 1725년(영조 1) 67세의 나이로 졸(卒)한 뒤, 필선(弼善)의 증직(贈職)이 내려졌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孫德升]
巖廊文彩際昌期。嶽降箕乘繫盛衰。南服起來豪氣蓋。東區終古大名垂。
星周十載屯亨日。恩徹重泉揭厲時。雨露荒原春草宿。哭攀新旐送靈輀。
채성윤(蔡成胤) 1659년(효종 10) 서울 출신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중미(仲美)
조부는 채진후(蔡振後). 아버지는 채시상(蔡時祥)
손자는 영의정 번암 채제공(蔡濟恭)
숙종(肅宗) 10년(1684) 문과에 급제. 예문관검열. 대교를 거쳐, 사헌부지평.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파직되었다.
그뒤 공주목사가 되고 경종즉위 후 승지가 되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蔡成胤]
宏材雅量屹巍班。盡瘁三朝任濟艱。半夜禁庭悲燬玉。十年天道見循環。
不敎學士逢今日。特遣恩綸賁舊山。移卜佳城傍淸洛。路人揮涕望旌顔。
김여건(金汝鍵) 1660년(현종 1)∼1697년(숙종 23). 봉화 해저 출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천개(天開).
아버지는 감사 팔오헌 성구(聲久)이다.
1687년(숙종 1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언·지평을 역임하였고, 1693년에는 도당록(都堂錄)에 오르고 수찬(修撰)이 되었다.
1690년 정언으로 재직중 세자책봉하례(世子册封賀禮)에 참석하지 않은 영돈령부사 조사석(趙師錫)을 “교만하고 인신(人臣)의 예(禮)가 없다.”고 탄핵하여 귀양보냈다.
그런데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숙종의 미움을 받아 실각하고 소론이 득세하자, 파직당하여 명천(明川)으로 귀양갔다.
저서로는 《북천록(北遷錄)》과 잡저(雜著)가 전한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金汝鍵]
忍作何懷寫誄章。淫淫哀淚自沾裳。人間幸見幽冤雪。泉下重開劒履藏。
位望當朝誰竝美。家聲東海世傳芳。尙看丹穴奇毛在。南國方歌蔽芾棠。
홍중현(洪重鉉) 1660년(현종 1)∼1726년(영조 2). 상주 출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대옥(大玉), 호는 천일재(天一齋).
첨지중추부사 만최(萬最)의 아들이다.
1684년(숙종 10) 사마시를 거쳐 1688년 3월 반궁시(泮宮試)에서 수석합격을 하고, 168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90년 설서가 되고, 1691년 정언이 되어 그해 이동근(李東根)과 함께 장계를 올려 김석주(金錫胄)의 죄상을 밝혀 처벌할 것을 청하고, 다시 남용익(南龍翼)의 교문(敎文)을 문제삼아 따지라는 계(啓)를 올리기도 하였다.
1693년 홍문록(弘文錄)에 오르고, 지평이 되어 책무태만으로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694년 부교리가 되고 같은 해 헌납 윤성교(尹誠敎)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며, 1695년 유배에서 풀려났다.
1721년(경종 1) 다시 수찬에 임명되었으나 소론인 서종하(徐宗廈)로부터 갑술옥사 때의 일로 탄핵을 받아 파직을 당하였다.
1725년(영조 1) 노론의 집권으로 사예·사복시정·판교·강릉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洪重鉉]
岡焚烈火谷摧蘭。欲說庚申骨亦寒。丹筆雪冤紆寵眷。黃扉贈秩聳瞻觀。
承家此日甘棠茂。泣血當年玉樹殘。十載泉臺無限恨。至今嗚咽洛江灘。
이주천(李柱天) 1662년(현종 3)~1711년(숙종 34) 성주 출신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이능(爾能)
증조부는 완정 언영(彦英). 조부는 창진(昌鎭). 아버지는 해발(海潑).
외조부는 조여수(趙汝秀). 처부는 권기(權愭)
숙종(肅宗) 13년(1687) 생원시에 합격하고, 숙종(肅宗) 17년(1691) 문과에 급제.
숙종 19년 예문관검열. 숙종 32년 성균관전적. 예조좌랑. 감찰. 33년 전라도경시관.
사헌부지평이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다음해 예조정랑이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李柱天]
說到涒灘骨猶驚。赤舌閃光天爲高。貝網彌空棟樑摧。愁雲慘惔陰風饕。痛哭模楷漢李膺。嗚呼碧血周萇弘。行路傷時灑涕淚。志士憐德搥心胷。十年果見理復環。聖主惻然昭諸枉。若曰予悲藎臣忠。于今何以慰英爽。特贈台座祭以侑。九原再拜君王恩。哀榮曠典允臻極。悲喜私情那可論。庭樹重看甘棠芾。天心實許板輿養。佳城卜新舊不臧。墨食高陽雙女向。哀哉立朝三十年。韙烈昭昭在國史。接物溫爾春和藹。臨事凝然喬嶽峙。浮世何時更得覩。鳳姿冥漠龍章藏。可憐膝下第二郞。多年泣血冤魂傷。應成泉裏平生樂。儻識人間今日事。舊衋新感詎罄毫。哭挽南望雲千里。
심최량(沈最良) 1669년(현종 10) 서울 출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백미(伯眉)
조부는 교리 심유행(沈儒行). 아버지는 이조판서 심재(沈梓)
숙종(肅宗) 15년(1689) 21세로 문과 급제
보덕. 헌납. 판결사. 광주목사를 지냈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沈最良]
南斗之南第一人。向來聲望冠朝紳。家傳秉筆推文學。位重持衡際聖神。
伊昔惟知傷乙巳。至今那忍說庚申。吹沙旣昧潛機伏。焚玉何欺大禍臻。
臨死凜言隳佞膽。平生忠悃質蒼旻。氣干牛斗難消恨。魂托夷齊喜結鄰。
十載中間偏降割。二郞冥漠又先春。昭昭天道今重返。一一羣冤許畢伸。
哀慕想增逢吉語。英靈恨未見昌辰。宸情有悔綸音切。褒贈如生粉字新。
改卜牛眠靈所妥。佇看鴻緖慶應因。南州悵望知何處。執紼情違淚滿巾。
채팽윤(蔡彭胤) 1669년(현종 10)∼1731년(영조 7). 보령출신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중기(仲耆), 호는 희암(希菴)·은와(恩窩).
현감 시상(時祥)의 아들이다.
1687년(숙종 13) 진사가 되고, 1689년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지낸 뒤 그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때 숙종의 명에 의하여 오칠언(五七言)·십운율시(十韻律詩)를 지어 후일 나라를 빛낼 인재라는 찬사와 함께 사온(賜醞)의 영예를 입었다.
그뒤에도 호당(湖堂)에 선임된 자들과 은대(銀臺)에 나아가 시부를 지어 포상을 받았으며, 그가 금중(禁中)에 노닐 때면 언제나 숙종이 보낸 내시가 뒤따라다니며 그가 읊은 시를 몰래 베껴 바로 숙종에게 올리게 하리만큼 시명(詩名)을 날렸다.
1691년 세자시강원의 벼슬을 거쳐 1694년 정언(正言)에 있으면서 홍문록(弘文錄)에 올랐으나,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묘출향(文廟黜享)을 주장한 이현령(李玄齡)의 상소에 참여하였다 하여 삭제되었다.
그뒤 벼슬에서 물러나 제자들에게 학문을 강론하며 지내다가 1724년 영조의 즉위로 승지에 제수되고, 이듬해 도승지·대사간을 거쳐 예문관제학에 임명되어 감시장시관(柑試掌試官)이 되었으나 성균관 유생들이 전날 양현(兩賢)의 모독과 관계되었다 하여 응거(應擧)를 거부, 교체되는 파란을 겪었으며, 1730년(영조 6) 병조참판·동지의금부사·부제학을 역임하였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렸고, 특히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해남의 두륜산(頭輪山) 대화사중창비(大花寺重創碑)와 대흥사사적비(大興寺事蹟碑)의 비문을 찬하고 썼다.
저서로는 《희암집》 29권이 있고, 《소대풍요(昭代風謠)》를 편집하였다.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蔡彭胤]
陰虹屭贔翳乾坤。欲訴忠貞阻九閽。楊震名高媒大禍。李膺血濺負深冤。
忍焚白玉寧天意。昭雪丹書卽聖恩。萬古是非明竹策。十行哀痛下金門。
旌標贈秩看新字。草宿荒墳啓舊原。學士有靈應瞑目。重泉何處奉晨昏。
정기윤(鄭岐胤) 안의 출신
본관은 초계(草溪)
조부는 이조참판 동계(桐溪) 온(蘊). 아버지는 창모(昌謨) 처부는 미수 허목.
음서로 숙종 3년 영릉참봉(寧陵參奉). 숙종 5년 상의원직장. 숙종 18년 청하현감(淸河縣監)
歸巖先生文集 附錄
挽詞[鄭岐胤]
若涉巨川舟楫倚。舟傾楫折水崢嶸。奸回釀孼邦家瘁。鬼蜮潛機善類嬰。
烈火那堪焚玉石。恩波何幸雪幽明。卻將當日呑聲淚。寄向新遷蒿里塋。
鴒原未瞑泉臺目。玉樹應含萬古冤。何不須臾無一死。更看今日得平反。
이의익(李宜翼)1794년(정조 18)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문약(文若). 종억(宗億)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 7) 음직으로 여주목사에 제수되었다.
1848년 증광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857년(철종 8) 강화부유수·이조참판을 지냈으며, 동지성균관사·경연관(經筵官)을 지냈다.
1862년 삼절연공행(三節年貢行)의 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고종이 즉위하고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새로운 인물이 중요한 관직에 기용될 때 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1864년(고종 1) 예조판서를 비롯하여 1865년 이조판서로 중용되었고, 이듬해에는 경기관찰사가 되었다.
70세가 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귀암선생의 시장을 지었다
吏曹判書歸巖李先生諡狀
國朝搢紳之禍。慘於庚申。而惟故尙書歸巖李先生。以忠正守道。橫罹黨禍。未一紀淵衷悔悟。首復官爵。贈以上相。惻怛之敎。屢發中朝。誣衊快滌。恩言昭揭。君子知所勸。小人知所懼。斯可見當日君臣之際也。公諱元禎字士徵。系出廣州。始祖諱集。在麗季。判典校寺事。號遁村。以文學志節伏一世。諱之直。仕聖朝爲刑曹參議。贈首相。其後代有名碩。簪組不絶。曾祖諱煕復贈左承旨。祖諱潤雨號石潭。歷敭華貫。卒官參議。贈吏曹參判。師事鄭寒岡先生。得其嫡傳。旣卒配寒岡書院。考諱道長號洛村。歷翰苑天曹郞。卒官弘文館應敎。贈左贊成。妣安東金氏贈貞敬夫人。判中樞府事荷潭公時讓之女也。公生而穎秀俊偉。擧止言辭。迥出凡兒。見者已知爲遠大器。髫齔日誦數萬言。文辭日進。華聞大播。仁祖戊子。中國子生員。自此至釋褐。五六年間。每試必占。輒居一等。庚寅時輩請以二臣從祀聖廟。而筵臣以無異論。欺誣天聽。嶺南多士。封章卞破。時時論方峻。凡立異論者。必以誣賢醜正目之。而公是時言論文翰。爲京外所推重。故時輩意公主其事。甚忌嫉之。孝宗辛卯。魁漢城試對策。考官趙錫胤大加稱賞曰此典文衡手段也。壬辰魁增廣文科。居殿試第二。例付尙衣直長。時同榜李公象震。嘗以疏首。率洛中多士。論斥二臣從祀之議。故泮任輩沮其謁聖。公率榜中同志八九人。送言於齋任曰李某雖立異於從祀。相臣陳箚而伸解。聖明洞燭而允許。旣已解罰應擧。則登第之後。不許謁聖。殊甚無謂。况文武科事體異於生進。非太學儒生所敢呼來而斥去。以此往復累十次。夜已向深。公以夜開廟門。擧火入謁。尤極褻慢。遂與同志諸人退歸。聯名封章。備陳泮宮持議之謬悖。擧措之駭異。由是時論益銜之。屢年不敍。丙申始拜說書。侍講胄筵。出入經史。陳說義理。微辭奧旨。融會無碍。同列咸嘖嘖推服。秋選入史局爲翰林。自石潭洛村公。仍祖子孫三世珥筆翰苑。世罕有也。丁酉由奉敎陞典籍。轉騎曹佐郞正郞。正言持平文學。尋除全州判官。戊戌移陞長城府使。爲銓長者陽言治最。而實枳天曹名選也。己亥奉謝恩書狀命赴淸國。顯宗新卽位。公自在胄筵講官。受知最深。是役也簡在上也。明年夏復命。卽拜掌令。乞暇歸省。冬拜江陵府使。府衙云有鬼祟。前守皆廢不處。公至則直灑掃入處。吏鄕交諫。夷然若不聞。已而見杈枒古木立庭畔甚怪。亟命繚以網。熾炭于根。有二靑狐跳出燒死。其怪遂絶。江陵舊刊白沙集中。己丑遺事及挽鄭公慄詩。時輩惡其直書。毁其板。公與三陟守眉叟許先生。相議改刊焉。時人甚惡之。辛丑用廟薦爲東萊府使。公前在長城。賑撫飢民。至誠以之。民賴以活。至是萊民又連歲阻飢。公方便廣濟。如長城之爲。而尤不以封疆域民。旁近民多所沾惠。御史南公九萬上其事。上大嘉歎。賜馬以寵之。冬以倭人移館事。被奪職。實公所不干也。癸卯鄭相國太和薦公敍拜灣尹不赴。甲辰拜判決事。移承旨。未幾出補全州府尹。與觀察使爭體例。峙不撓被啓罷。公不以爲意。居二年敍拜承旨。時淸國査使至。凜凜有禍機。公以該房入侍。密贊辭令。動中機宜。重瞳屢回。眷注殊異。左右私竊稱嘆。上亦倚任有加焉。拜湖西觀察使。大臣爲言得遞。丁未以承旨用王世子冊禮禮房勞。陞嘉善拜廣州府尹。尋以事罷。自是連拜右尹工曹參判。庚戌鄭都尉載崙以上价赴燕。鄭相國太和謂銓官曰吾兒年少未解事。必須遴差李某爲副价後。方可以不僨使事。由是公爲副使。旣竣事還。差別試殿試考官。仍除楊州牧使。癸丑以右尹還朝。前數月。上謂侍臣曰李元禎之爲楊州。不已久乎。至是以加望末擬除授。特拜都承旨。公再疏遞。自是屢拜刑禮曹參判都承旨。甲寅顯廟賓天。差山陵都監提調。乙卯丁大夫人憂。扶櫬歸嶺南。上下諭三道護送。丁巳服闋。拜刑曹參判。公之在鄕廬也。聞朝廷設萬科。施爲多不厭人意。用范文正故事。與宰相書。略曰向來彼輩之用事。阿附之徒。驟蒙顯擢。朝廷名器。視爲己私。旣以是爲彼輩之罪。則今宜一反其所爲。而非徒不反。乃反效之。至若各擧所親於幼主之前。有若請托銓官者然。益可寒心。萬科之設。光海末政。以昏朝之末政。援爲聖世初政何也。時相不能用。以大司諫召還。卿宰以下皆來訪以時事。公隨問指陳。剖析如流。皆充然欣喜曰江左有管夷吾。吾無憂矣。因上應旨疏。首言明義理別公私。親賢士遠便佞。以正君心。抑躁競戒因循。杜倖門重名器。以正朝廷。生靈塗炭。怨咨日滋。拯之振之。以固邦本。仍條其當罷者五。而罷體府廳一也。當立者五。而立嶺南大同法一也。首尾累千餘言。無非救時之急務。濟民之切策。上優批嘉納焉。時肅宗承先王遺志。釐改邦禮。宗統復正。眉叟許先生首建議請上告太廟。太學及四方章甫繼之。公因辨謗疏。略曰宗統之復正。不可不告。人心之迷惑。不可不曉。是甲者之論也。論議雖正。層激不可不慮。節目雖備。乖戾不可不憂。是乙者之論也。二者均有所執。而第念此論以過時而不發則固好矣。旣發之後。摧折之斥拒之。若遏橫議者然。揆諸義理。實有不當然者。天地常經。斁滅無餘。擧國含生。孰不悲痛。而人或有言其非者則禁錮之竄逐之。至於請殺而杜人口。猶以爲不足。復設禮禁。播告八方。設刀鉅以待言者。此先王所以痛惋其見欺。而殿下之有切齒腐心之敎者也。然而仰體好生之德。將順不殺之仁。但云正統之當告。不以加罪而爲請。則此實稱停之論也。公寬厚恢弘。雖當國言朋興之際。其立論之毅而惠嚴而寬如此。拜兵曹參判籌司有司。又兼賑恤廳堂上。尋拜大司諫。院僚欲與憲府並發告廟啓。公曰事貴消詳。且待之。人或謂遲疑。公引避不得遞。遂發啓焉。由禮曹參判移大司成。擢陞刑曹判書。仍兼大司成。正卿之兼國子。國朝所罕也。戊午以遠接使赴灣上。時北使見公風度凝遠。文辭華贍。甚禮敬焉。旣歸載公序與詩於朝鮮採風錄。而選入於華人文抄中。及復命拜判尹。刱行嶺南大同法。先是大同法行於兩湖。惟嶺南仍前任土作貢。上司之取於民無藝。公嘗於應旨疏言之。至是廟堂以公主其事。於是度民田出粟米。計上貢量官用。裁其遠近。劑其傭直。要使宜於國而利於民。旣成而頒行之。民大悅。勒石頌德。時進香使先來啓以淸國擾亂。朝廷議加設禁旅。而公獨以爲不便。泮宮節製時。金錫胄遇公言邊事曰。中州多警。體府必可復。欲設體府。禁旅勢當益。此係不容少緩也。公曰體府無益。徒擾人國耳。禁旅之加。與此奚異。雖然台旣主兵。職當憂耳。卽今事勢。有異前日。則直陳己見。何不可之有。蓋體府之罷以公言。禁旅之加非公意。故錫胄必欲得公之一言。且於其時京外騷屑。故公亦慮綢繆之疎虞。其後引見日。隨諸臣仰對而已。俄有體府復設之命。旣而以大司憲拜戶曹判書。移右參贊兼知義禁府事。時有江都投書之變。捕凶逆有湞鞫。朝議欲加周紐之刑。公止之曰鞫獄自有常刑。而韓上黨明澮刱烙刑。流毒至今。非古法而豈可刱制乎。衆是之。於是元惡伏法。餘多平反出者。移大司憲。尋拜吏曹判書兼弘文提學。固辭不獲。常以精白一心。恢張公道爲務。雖異己人。毅然參用。以此至被臺劾。庚申擢崇政階。兼判義禁府事。公方長天曹。而所兼帶備局經筵提學成均春秋內局槐院宗簿譯院贊畫使賑廳繕工監也。上眷隆盛。職任重大。公益憂懼焉。是時相門孼子堅。妖惡不道。奸凶失志之徒。藉以爲網打善類之計。挾矢傍伺。煽動危言。而一邊通宮禁造蜚語。使無賴輩元老,萬鐵等。遂上急變。獄大起。告者言堅使李台瑞激宰相。復體府廳。辭及公。捏奏不置。卒以見欺逆竪。命配理州。俄命拿致詔獄。公歷擧與金錫胄泮宮酬酢語。以明其非由於台瑞。鞫廳書問錫胄。如公言。且抵書鞫廳。承旨傷其冤。至欲請對白之。會上命除刑發配遂已。秋獄更起。以死囚亂言。又被逮。卒無實。按獄者怏怏無柰。更提體府事。掠治甚急。公對益厲。無少沮仰。謂鄭相知和曰公非文翼之孫耶。座有頓足咆哱者曰以此比之己卯乎。左右莫敢復言。遂告終于請室。實閏八月二十一日也。是日雨土蒙瞀。日晻慘無光。都下士庶。莫不悲嗟隕涕焉。嗚呼。公氣像磊落。言論峻整。正色立朝。無所回撓。庚寅從祀立異之疏。壬辰謁聖自列之章。已爲時輩所憎嫉。至於告廟之論而怨益深。及至蒙被聖渥。眷注益隆。而一種鬼蜮之輩。磨牙鼔吻。醞釀禍機。期欲戕害善類。而構捏不得。則乃以力主體府宜罷之人。反以體府而爲案。卒不得免焉。彼黨人者。其誰欺。欺天乎。己巳上悔之。首復公官爵。遣禮郞賜祭。旣又命贈領議政。及公之長胤副學公登筵。上面諭曰爾父冤死。予每惻然。玉音摧咽。至再至三。其改葬也。下諭方伯庀其事。哀榮之典至矣。後六年甲戌。黨人乘時啓奪職。後又十九年壬辰。公之孫世瑗擊金白其冤。上下大臣議。領府事尹公趾完獻議曰金錫胄嘗言其冤抑。其謫也有書贐。在理也欲請對㬥實而未及云。其言可信。上曰領府議是。卽命復公爵。贈秩亦如前。不逞者梗之閱年。上曰當初處分。是予之過。過而遂之。予不爲。絲綸之下。批旨之間。哀愍惻怛之敎。每出尋常萬萬。邪說乃熄。公論不百年而大定。嗚呼。歷觀古來。遭罹冤禍。畢竟伸雪者。皆在於世代寖遠之後。豈有當宁翻悟。快洗幽枉。斷自宸衷。不撓羣議。如肅考當日之爲哉。若非公之忠藎可質於君父。懿蹟能孚於後人。則亦安得以有此哉。公德性寬厚。器局峻整。篤於孝友。常以贊成公不克永年。爲一生至慟。事太夫人如嚴父。推以至撫諸弟敦宗族。皆可以觀其仁也。尤謹於追遠之禮。凡有祭祀。雖冬月。必沐浴潔齊。饌果祼享之節。皆有定式。一遵文公家禮。其立朝也。愛君如父。憂國如家。公耳國耳。不顧一身之利害。惟以盡瘁匪躳。圖報聖恩爲期。語及顯廟。輒爲之嗚咽泣下。及肅宗冲年嗣位。一念常在於追先帝而報陛下。垂紳正笏。不詭不隨。風節才猷。蔚然爲一代名臣。其出牧也。以字愛爲政。以淸淨律己。以懲奸猾恤民隱爲務。而尤惓惓於作興人才。每朔考講。且試著述。優加褒奬。明示激厲。其在完山及萊府也。値歲大旱。禱雨必應。人皆以爲純誠所感。至於詞訟之決。常曰苟於此而一毫容私則是內而欺心。外而欺人。上而欺君。是可忍也。平生勅勵如此。判全州時。適當歲抄。文簿山積。詞訟盈庭。手寫簡牘。耳聽詞訟。目閱文簿。口呼題語。應對賓客。幷行無滯。方伯趙啓遠使人瞷之。吐舌稱神明。躳來致語曰吾欲見神人而來矣。公之聰明。劉穆之無以過也。其後書考最曰不疾不徐。無前無後。蓋心服也。佐貳秋曹時。有一姦宄以烏鯽魚墨書券賣於人。三年後無端起訟。取券來則無一墨跡。但空紙耳。秋部不能決。買者無以白其實。公令取溺水漬其紙。字畫了然可見。乃竆治之。公聰明絶倫。看書能八行俱下。讀書三數遍。衰老後猶能背誦無一錯。一聞之事。終身不忘。國朝典章。無不練達。對問如響。爲文章浩汗贍敏。不事雕飾。操筆立成。滔滔不竆。一時之號爲文士者。莫不推服。所著星山志增修鄕約歸巖謾錄等若干卷藏于家。公春秋五十九。墓在永川蓋雙洞坎向之原。與夫人合窆。貞敬夫人碧珍李氏。承旨浣亭公彥英之女也。端莊淑哲。正大有法度。事君子。和順而有禮。雖貴爲命婦。服御無改寒素。兩子旣榮顯。常勉之以抑遜。後公二十二年辛巳卒。享年七十九。有四男四女。長曰聃命吏曹參判。次曰漢命弘文館副校理。皆以文學名於世。次曰俊命。年十三夭。次曰龜命察訪。女長適柳命河。次輔德崔恒齊。次佐郞姜相周。次金升國。參判二男二女。長生員世琛,次世璟。二婿參奉姜楷,睦聖謙。校理三男一女。長生員世瑗,次世寶,次世璜。婿沈壽榦。察訪無子。以世寶后。柳命河子後謙。三婿李泌,金錫範,鄭重恒。崔恒齊三男。佐郞守慶,守溫,守仁。婿權世鉉。姜相周子濡。金升國二男。佐郞東俊,東傑。二婿金重禮,李仁兼。曾玄以下多不盡載。公忠信足以敦薄俗。力量足以當大事。言論足以鎭浮議。文章足以煥皇猷。天性坦蕩。不設畦畛。與人酬酢。和氣藹然。而至於大議論大是非。壁立不撓。凜然有不可奪之操。聞人之善。若己有之。見人有過。未嘗含蓄。絶不修飾邊幅。瞻顧前後。故君子慕之。小人忌之。以及於禍。豈不慟哉。幸賴肅廟聖明。天鑑孔昭。察公之忠。愍公之冤。滌其丹書。贈以上相。君子於是謂有天焉。今於年代寖遠之後。謹就公之家狀及蔡相公所撰墓道文中。略記顚末。以備大人君子之採取而考信云爾。
上之八年辛未。輔國崇祿大夫行吏曹判書李宜翼謹撰。
채제공(蔡濟恭) 1720년(숙종 46)∼1799년(정조 23). 홍주 출생.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번옹(樊翁).
효종 때 이조판서‧대제학을 지낸 채유후(蔡裕後)의 방계 5대손으로, 지중추부사 채응일(蔡膺一)의 아들이다.
1735년(영조 11) 15세로 향시에 급제한 뒤 1743년 문과정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748년 한림회권(翰林會圈)때에 영조의 탕평을 표방한 특명으로 선발되어 청요직인 예문관사관직을 거쳤다.
1753년에 충청도암행어사로 균역법의 실시과정상의 폐단과 변방대비 문제를 진언하였다.
1755년 나주괘서사건이 일어나자 문사랑(問事郞)으로 활약하였고, 그 공로로 승정원동부승지가 제수되었다. 이후 이천도호부사‧대사간을 거쳤고, 《열성지장(列聖誌狀)》 편찬에 참여한 공로로 1758년에 도승지로 임명되었다.
이해에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가 악화되어 세자폐위의 비망기가 내려지자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 이를 철회시켰는데, 이 사건으로 하여 후일 영조는 채제공을 지적하여 “진실로 나의 사심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정조에게 말하였다 한다.
이후 대사간‧대사헌‧경기감사를 역임하던 중 1762년 모친상으로 관직을 물러나자, 이해 윤5월에 사도세자의 죽음이 있었다.
복상 후 1764년부터 개성유수‧예문관제학‧비변사당상을 거쳐 안악군수로 재임중 부친상을 당하여 다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1767년부터 홍문관제학‧함경도관찰사‧한성판윤을, 1770년부터는 병조‧예조‧호조판서를 역임하고, 1772년 이후 세손우빈객‧공시당상(貢市堂上)이 되었다.
1775년 평안도관찰사로 재임시에 서류통청(庶類通淸)은 국법의 문제가 아니므로 풍속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 상소로 인하여 서얼출신자에게 구타당하는 사건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후 영조의 깊은 신임으로 약방제조로 병간호를 담당하기도 하였고, 정조가 왕세손으로 대리청정한 뒤에는 호조판서‧좌참찬으로 활약하였다.
1776년 3월에 영조가 죽자 국장도감제조에 임명되어 행장‧시장‧어제‧어필의 편찬작업에 참여하였다.
이어 사도세자 죽음에 대한 책임자들을 처단할 때 형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로서 옥사를 처결하였고, 정조특명으로 사노비(寺奴婢)의 폐를 교정하는 절목을 마련함으로써 정1품에 이르렀다.
이 사노비절목은 점차로 그들의 수효를 감소시킴으로써 1801년(순조 1)의 사노비 혁파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후 규장각제학, 예문관제학, 한성판윤, 강화유수를 역임하였다.
1780년(정조 4) 홍국영(洪國榮)의 세도가 무너지고 소론계 공신인 서명선(徐命善)을 영의정으로 하는 정권이 들어서자, 홍국영과의 친분, 사도세자에 대한 신원의 과격한 주장으로 정조 원년에 역적으로 처단된 인물들과의 연관, 그들과 동일한 흉언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집중공격을 받아 이후 8년간 서울근교 명덕산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1788년 국왕의 친필로 우의정에 특채되었고, 이때 황극(皇極)을 세울 것, 당론을 없앨 것, 의리를 밝힐 것,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백성의 어려움을 근심할 것, 권력기강을 바로잡을 것 등의 6조를 진언하였다.
이후 1790년 좌의정으로서 행정수반이 되었고, 3년간에 걸치는 독상(獨相)으로서 정사를 오로지 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이조전랑의 자대제(自代制) 및 당하관 통청권의 혁파, 신해통공정책 등을 실시하였으며, 반대파의 역공으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793년에 잠깐 영의정에 임명되었을 때는, 전일의 영남만인소에서와 같이 사도세자를 위한 단호한 토역(討逆)을 주장하였으므로, 이후 노론계의 집요한 공격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그뒤는 주로 수원성역을 담당하다가 1798년 사직하였다.
저서로는 《번암집》이 있다
1801년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으로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1823년 영남만인소로 관작이 회복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귀암선생의 묘갈명을 지었다.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행숭정대부 행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사 홍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 귀암 이공 신도비명 병서
제공濟恭이 돌아가신 총재 귀암歸巖 이공의 행장을 읽고 여러 번 울었고 길이 탄식하면서 더욱 편당의 화가 사람의 집과 나라에 미치는 것이 어떻다는 것을 알았도다. 무릇 숙종대왕은 밝으신 임금이요 공은 충성된 신하라, 충성된 신하로서 밝으신 임금을 섬기면 마땅히 그 이로운 혜택이 백성에게 베풀어지고, 그 예우가 종신토록 있어야 하는데 어찌된 것이 척신들이 남몰래 권도를 잡고 희망을 터들어 곤강의 열염으로 우리의 양옥을 녹여버리려 하였는가? 이것이 하늘이냐 귀신이냐.
슬프도다! 당화인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끝내 속이지 못하는 것이요. 이치는 끝내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것임으로 일기(12년)가 못 돼서 임금님의 깊은 마음에 크게 깨달은바 있어 가엽게 생각하는 교지가 여러 번 내리고 그 단서丹書를 시켜서 영의정으로 증직을 내리니 이에 하늘이 또한 사람을 이겼도다. 군자에게는 권할 줄을 알고 소인에게는 두려움을 알게 하니 비록 당인인들 하늘이 하는 일을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다.
공의 휘는 원정元禎이오 자는 사징士徵이오 귀암歸巖은 그 호이다. 그 선대는 광릉인이니 고려말기에 있어 판전교시사이시고 호는 둔촌遁村이시며 문학과 기개와 절조로 유명하신 분이었으니 그 분이 집集이시다. 조선조에 들어와 형조참의가 되시고 증직으로 영의정을 받으신 분이 있으니 그 분이 지직之直이시고 3세를 지나 영남의 성산에서 장가들고 그곳에 사신 분이 계시니 이분이 지摯신데 자손들이 드디어 영남인이 되었다. 또 그 후 3세에 희복熙復께서는 증좌승지요. 윤우潤雨께서는 호 석담이오 빛나는 벼슬을 하시고 참의로서 이조참판의 증직을 받으시니 이분이 공의 증대부曾大父와 대부大父시다. 석담께서는 정한강鄭寒岡 선생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돌아가신 뒤에 한강서원에 배향하였다. 아드님은 도장道長이신데 호는 낙촌洛村이시다. 한원翰苑을 거쳐 천조랑이 되셨으며 벼슬이 홍문관 응교였고, 좌찬성의 증직을 받았으며 당숙부되시는 군자감주부로 이조판서의 증직을 받으신 영우榮雨의 후사로 출계하셨다.
배配는 정경부인 안동김씨신데 판중추부사 하담 김공 시양의 따님이니 공의 아버지와 어머니이다.
공은 총명하고 영특하기가 보통사람에 지나침으로 어렸을 때부터 하루에 수많은 글귀를 외우더니 자라서는 글을 읽는데 8행을 한꺼번에 내려읽으니 그 훌륭한 소문이 크게 떠들썩했다. 인조 무자년에 국자생원에 합격했고, 임진년에 증광문과 전시에 갑과 제2위로 뽑히니 예에 따라 상의원직장이 되었고, 병신년에 세자시강원 설서에 제수되었고, 천거로 한림이 되었으니 석담부터 낙촌과 공까지 이와 같이 조. 자. 손 3대가 이어서 한원에 기록된 것이 이 세상에 드문 일이다.
이듬해 봉교로부터 전적으로 올라가고 병조좌랑으로 정랑으로 사간원정언으로 사헌부지평으로 시강원문학으로 전임되었고, 전주판관으로 제수되었다가 1년 만에 장성부사로 승진하니 임명권을 가진 자가 허위로 잘 다스린다고 하여 마땅히 내직으로 승진하여야 된다 하였으나 그 실상은 이조의 명선을 막으려고 한 것이다. 기해년에 사은사의 서장관이 되어 청국에 부임했었다. 현종이 새로 즉위하시니 공이 주연 강관으로 있을 때부터 가장 깊이 잘 알아주심을 받은지라 이번 사신으로 감은 임금이 친히 가린 것이다. 이듬해 여름에 돌아오심에 다시 장령으로 제수되었다.
여가를 얻어 귀성하고 겨울에 강릉부사로 부임하였더니 관아에 귀신이 나온다 하여 수리도 하지 않고 내버려둔 지 몇 해가 된다 하는지라 공이 부임하여 곧바로 소제하고 들어가고자 한즉 아전들이 못하게 서로 말리었으나 태연히 못들은 척하고 본즉 고목이 뜰에 서있는데 그 가지의 모양이 심히 괴상한지라 급히 명하여 그물로 둘러싸고 나무뿌리에다 숯을 피우니 두 마리의 푸른 여우가 뛰어나와 죽으니 그 후 관부가 드디어 편안해졌다.
신축년에 조정의 천거로 동래부사로 삼으니 공이 전에 장성에 있을 때 굶주린 백성을 위해 지성을 다함으로 백성이 살 길을 힘입었는데 이때의 동래의 백성들이 또한 여러 해 계속해서 굶주리고 있어서 형편에 따라 널리 구제하기를 장성 때와 같이 잘하고, 그 지역에 경계를 구별함이 없게 하니 그 근처의 백성들도 많은 혜택을 받게 되었다. 어사 남구만공이 그 일을 상께 알려 올리니 상이 크게 아름답게 여겨 말을 하사하여 총애하셨다. 겨울에 왜인이 관사를 옮기는 일로 말썽이 있어 공이 벼슬을 내놓게 되었으나 사실은 공께서 간섭한 일이 없는 것이다. 계묘년에 의주부윤이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갑진년에 장례원 판결사가 제수되고, 승지로 옮겼는데 얼마 안 있다가 전주부윤이 제수되었다가 관찰사와 체례를 다툼에 맞서서 굽히지 않으니 관찰사가 위에 알리어 파직했으나 공은 아무렇지도 않고 있었다.
2년이 지난 후에 승지가 제수되었다. 그때 청국에서 조사하는 사신이 오니 조정의 신하들이 화라도 일어날까 무서워 떨고 있었다. 그때 임금께서 사신을 공이 옆에서 은밀히 영令을 도와서 때에 맞도록 움직여서 그 폭사가 없도록 무마시켰더니 무사하게 되었다. 좌우에서 이 일을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상께서도 또한 신임하는 정도가 높아져서 호서관찰사로 배하였는데 사양하고 도임하지 않았다. 정미년에 승지로서 왕세자책례 때에 예방이었던 수고로 가선의 계급에 오르고 광주부윤에 배했으며 얼마 있다가 이를 그만두었다. 이후로 연달아 우윤과 총관과 공조참판에 배하였고 경술년에 부마도위 정재윤이 상사가 되어 청국으로 갈 때 정상국 태화가 조당에서 전부에게 말하기를 “나의 아들이 아직 젊어서 일을 잘 모르는데 부사가 훌륭한 사람이 따라가지 않으면 국가의 일을 그르칠까 두려워한다” 하였다. 전조에서 그런 사람을 구하기 어려워 하니 상국이 말하기를 “이모가 아니면 이 일을 담당 할 사람이 없다”하여 공이 부사가 되어 모든 일을 잘 마치고 돌아왔다.
별시 전시 고관으로 차출되었을 때에 공의 아들 부학공이 제생으로서 시정에 나가 시험을 볼 때 공은 입을 다물고 고교하는데 참여하지 않았는데 대신으로서 시험을 주장하는 사람이 물으면 겨우 대답해 줄 뿐이었다. 이름을 듣고 보니 부학공이 제 2인에 뽑혔었다. 공께서는 자신이 빈한한 선비로 있을 때 영남사림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그때 유직이란 사람이 상소를 하여 율곡과 우계의 종향을 배척한 일이 있는데 공께서 사실상 참여하였는데 시의가 투질 하는 무리가 많았으나 공이 임금에게 신망이 두터움으로 잠잠하더니 이때 모든 대간들이 상소해서 그 사실을 밝히고 거짓됨을 밝히니 상께서 엄중히 대간을 물리치고 이르시되 “입론하는 것이 근거가 없다” 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대간이 반년 동안이나 잠잠하였다. 공께서 양주목사를 제수 받았고 계축년에 우윤으로 불려들었다가 얼마 안 있어 특별히 도승지로 제수하니 대간이 경력이 얕다하여 바꿀 것을 청하니 상이 노하여 가로되 “방금 당론이 우선이 되고 공도가 다음이 되니 만약에 당론을 취한다면 원정은 거의 안 맞음이 오래고, 만약에 공도로 말한다면 이런 말은 심히 부당한 말이다” 하였다.
공께서 두 번이나 상소를 올려 사임하고 이로부터 여러 번 형조참판과 도승지와 예조참판으로 벼슬을 받으셨다. 현종께서 돌아가시니 산릉도감 제조로 차출되셨다.
그 전에 왕대비의 병환이 있을 때에 약에 대한 수고한 공로로 가의대부에 올랐다.
을묘년에 대부인의 상을 당해서 관을 모시고 영남으로 돌아갈 때 상께서 삼도에 명령을 하시어 호송케 하시니 특별한 은총이었다. 상을 마치니 형조참판으로 배하였다가 다시 대사간으로 옮겨 조정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공이 고향집에 있을 때 조정에서 만과(萬科)를 설치하여 그 실시함이 사람 뜻에 맞지 않음이 많다는 말을 듣고 범문 정의 고사로서 재상에게 편지하여 가로되, "지금까지 저 사람들이 하는 일이 아부하는 무리로서 빠른 시일에 좋은 자리에 뽑혀서 조정의 이름 있는 벼슬자리를 자기의 사적인 것 같이 보고 온 것만으로도 저 사람들의 죄라고 하겠은즉 지금 와서 마땅히 한번 바로 잡아지지 않고 도리어 본보기가 되니 이렇게 되면 옛사람이 어찌하여 '자기에게 허물이 없고서야 남의 허물을 말 할 수 있다'고 하였겠는가? 만약 각자가 친한 사람을 유주 앞에 천거하게 되면 전관에게 청탁하게 되는 것과 같이하니 더욱 한심한 일이다. 만과를 설치하는 것은 광해때의 말정인데 혼조의 말정으로 성세의 초정을 삼으니 이것은 무슨 일이냐" 하였는데 그때 상신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이때 와서 상께 뜻하신 바에 대해 여러 천 마디의 말씀을 올렸는데 머리말에 '의리를 밝히고 공사를 분별하고 현신을 친히 하고 편벽된 사람을 멀리하여 임금의 마음을 바로 잡고 서로 날뛰며 경쟁하는 것을 억제하고 매사에 머뭇거리고 용단성이 없을것을 경계하고 요행을 바라는 것을 막고 벼슬을 소중히 여겨 조정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며, 국민들이 도탄에 빠져 원성이 날로 더하니 구원하고 진기시켜 나라의 근사를 굳게 해야 할 것이다. 지금 하는 일에서 당연히 없애야 할 것이 다섯가지인데 체부청을 없애는것이 그 중 하나요, 당연히 세워야 할 일이 다섯가지인데 영남에 대동법을 세우는 것이 그중 하나이다.' 라고 상소를 했더니 상께서 퍽 좋게 생각하시고 아름답게 칭찬하셨다.
그 때에 숙종께서 선생의 유지를 이어받아 방례를 고치고 종통을 바로 잡기로 하니 미수 허선생이 앞장서서 건의하여 위로 태조에 고하기를 청하니 태학과 사방의 선비들이 다 계속하여 건의하였다.
공이 변론하는 상소를 하니 대략 가로되 종통을 바로 잡게 되었으니 불가불 고해야 할 것이며 인심의 미혹함은 불가불 깨달아야 한다는 것은 갑의 논하는 바이며, 논리가 비록 바르다 해도 형격되는 것을 가히 염려하지 않을 수 없고, 절목이 비록 갖추어졌다 해도 어긋날 일을 가히 근심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을의 논하는 바이다.
이 둘은 다 주장하는 바가 있으나 생각건데 이 이론이 때가 지나서 일어나지 않으면 그대로 좋으려니와 이미 일어난 후에는 꺽거나 거절하기를 마치 함부로 일어나는 무리를 막는 것 같이하면 이것을 이론에 맞추어 보면 실로 부당한 일이 된다.
천지의 떳떳한 법이 멸망하여 남음이 없음에 온 나라의 모든 사람이 없음에 온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비통해 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어늘 누구인가 혹 그것이 잘못될 것이라 하였다가는 금고와 찬축을 당하고 심지어 죽음을 당하게 되어 사람의 입을 막고 오히려 부족하여 다시 예금을 베풀어 널리 팔방에 고하고 도거(刀鋸)를 설치하여 말하는 자가 있나하고 기다리니 이런 일을 선왕께서도 항상 속임을 당한것에 통분하게 여기 신 바 있고, 전하께서 절치부심하신 가르치심입니다.
그런데 우러러 호생의 덕을 본받고 불살의 인심을 갖추어 다만 정통에 대한 것을 태묘가 가함이 없어야 한다는 청을 한즉 이것이 실로 그 논쟁을 미리 정지 시킨 좋은 일 입니다.' 하였다.
공은 관후하고 마음이 크시어 비록 국내에 말이 많고 붕당이 일어난 때를 당해서도 입론하는 것이 굳세고도 은혜로우며 엄하고도 관대함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만과를 시행하고 체부를 설치하는 것에 대해서는 정색을 하며 다른 주장을 세움이 조금이라도 거짓됨이 없었다.
병조참판 주사유사(籌司有司)를 배하고 또 진청당상을 겸하고 대사간을 배하니 원료가 헌부와 같이 고묘하는 일을 계하고자하거늘 공이 말하기를 "일이란 소상하게 하는 것이 귀한 것이니 좀 더 기다리라" 하였더니. 혹자는 더디다하며 공을 의심하므로 공은 인피할까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발계하게 되었다.
윤헌경이란 사람이 있어서 공을 꼬집어서 괴롭히니 공은 상소하여 변론하되 "교묘하기를 '의논한 사람들의 말에 때를 놓친 혐의는 적고 마땅히 고해야 할 의는 크니 작은 혐의를 가지고 대의를 폐할 수는 없다.' 하니 신은 여기서 의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그만이지만 이미 일어난 이상 또한 막기 어려운 일이라 오례한 자들에게 죄를 가하지 않을 때까지 이르게 된 것은 실로 의논이 다같이 함십해서 하고자 한데서 나왔는데 헌경은 의심이 가득차고 깊었으며, 헛된 환상을 그리고 있으니 이것은 원망이 쌓이고 노여움이 깊어서 이러한 일을 한것이라고 볼 것이다. 저 사람들이 손으로 왕작을 잡고 입으로 천헌을 막으며 지나온 지 오십 여년인데 신은 꾸부리고 우러러 보거나 굽실거리는데 능하지 못하고 취하고 패하는데 평범하여 관심이 없는데 만약 머리를 숙이고 기를 죽이고 아첨하고 순종하는 것은 마침내 나의 광연한 성품으로 갑자기 할 수 없는 일이라." 하였다.
대사성을 겸하니 정경으로 국자를 겸한 것을 성조에서는 드문 일이다.
무오년에 청나라 사신을 의주에서 맞아들이고 또 보낼 때도 같이 하였다. 돌아와 복명하매 판윤을 배하고 처음으로 영남대동법을 행하였다. 그 전에 대동법이 양호에서만 행했고 오직 영남에서는 전과같이 임토작공(任土作貢)하니 백성들이 상사들의 강제로 물건을 요구하는데 견디지 못하였으므로 공이 일찍이 임금님의 생각하시는 바에 맞추어 상소하여 이 일을 힘써 말하였더니 이때에 와서 조정에서 비로소 공에게 그 일을 맡아 보도록하니 공은 여기서 백성이 가진 토지를 감정하고 거기서 나오는 곡식의 소출을 참작해서 상공할 것을 계산하고 관용할 것을 헤아린 다음에 그 원근을 가리고 그 노력을 참작하여 꼭 나라에서 필요하고 백성에게 이롭게 되는 일만하여 결정이 된 뒤에 널리 펴서 행하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고 비석에 새겨 송덕을 하였다.
때마침 진향사가 달려와 아뢰되 중국이 크게 우란하다하니 조정에서 의논하여 금군을 더하기를 의논함에 척신 김석주가 실로 공이 주장하되 공이 불가하다할까 염려해서 마침 반궁에서 공을 만나서 변방의 일을 말하고 또 말하기를 "서쪽 오랑캐를 경계할 바가 많으니 체부를 반드시 다시 설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며, 체부를 설치키로 하면 금려를 마땅히 더하여야 될것이니 이것을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될 일이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무익한 것으로서 한갓 인심과 나라만 동요 시킬 뿐이며, 금려를 더하는 것도 이것과 다른 것이 없다. 그러나 병권을 주장하는 자가 직책상 마땅히 근심될 것이나 자기의 견해가 있으면 자기 스스로 곧 말씀드리는 것이 어찌 잘못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 뒤에 등대할 적에 공도 또한 의중에 방비가 소홀하거나 또는 병신(柄臣)이 그 일을 맡아서 하니 반드시 나의 의견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제신과 따라서 대답을 하였더니 얼마 안 있다 체부를 다시 설치하라는 명이 있었다.
대사헌으로서 호조판서로 옮겨 배하였다. 그 때에 청나라 사신이 왔는데, 상께서 병환중이라 교외까지 영접할 수가 없어서 중신을 보내 이 연유를 말을 전하니 사신이 고지하고 허락하지 않는지라 공이 명을 받고 길을 막아서서 여러 번 반복하여 깨닫도록 말하니 사리가 명확한지 사신이 경복하여 오직 공의 말이라면 들어주었다.
우참찬으로 옮기어 지의금부사를 겸하니 그 때에 강도에서 역서하여 변을 알리니 흉역(凶逆) 유정(有湞)을 잡아 국문하매 조의가 도형으로 다스려 구형을 하기로 하니 공이 말하기를 옥에서 국문하는 법이 정하는데 형벌이 있는데 한상당 명회가 처음으로 낙형을 시작하여 그 유독이 지금까지 내려왔는지라 옛법이 아닌 것을 창제한다는 것은 옳다고 생각할 수 없다하니 모두 다 옳다 하였다. 이에 원악은 벌을 받고 나머지는 많이 평범하게 용서되어 나가는 자도 있었다.
대사성으로 옮기었다가 이조판서로 홍문관제학을 겸하니 사양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더욱 공도를 가지고 편벽을 없애고 비록 자기와 다른 편 사람이라도 의연히 참용해서 쓰게 하니 이 때문에 대각이 있어도 임금께서 공이 다른 뜻이 없는 것을 알고 더욱 공을 믿었다.
숭정계에 뽑혀 판의금부사를 겸하니 비국과 경연과 제학과 성균관 춘추관 내국 괴원 종부 역원 찬화사 진청 선공등은 전형을 맡았을 때에 겸해서 관장하였으며, 그 때 공은 가장 걱정하고 두려움이 많았던 것이다.
이 때에 있어서 김석주가 담담히 일변인을 노려봐서 궁중을 통해서 허튼 말을 꾸며내서 임금을 공동시키는데 갖은 수단을 다하니 상께서 자리가 바뀔까 두려워서 공을 삭출하였다. 조금 후 원로(元老), 만철(萬鐵)등이 급변을 고해 올리니 그것은 수상 허적의 서자 견이 요악부도하여 가까이 종친정과 염으로 더불어 모반할 일을 꾀했다하여 석주가 이것을 핑계 삼아 일망타진 할 것을 꾀하여 옥사를 크게 일으키니 이것이 곧 경신옥사이다.
고한 자가 말하기를 "견이 이태서로 하여금 재상들을 격동하여 체부청을 회복하게 함에 공도 연루되었다." 하여 허위 날조하여 마침내 관서리주로 귀양보냈다가 별안간에 납치를 명하여 공을 옥사로 다스림에 공이 역력히 지난날 김석주와 반궁에서 수작한 말을 들어서 그 거짓으로 밝히니 국청에서 서면으로 석주에세 물으니 그 회답이 공의 말과 같고, 또 국청에서 이 말을 알리겠다 하였다. 승지 윤개가 그 원통한데 상심하여 임금님께 말씀드릴 기회를 청했더니 임금께서 형을 멈추고 귀양을 보내라 명했다.
추옥이 다시 일어나 사수의 허튼 소리로 또 피체되어 결국 아무 실상도 없음에 옥사를 다루는 사람들이 앙심을 다시 품고 다시 체부에 대한 말을 끄집어내어 고문이 심하였다.
공께서 심기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정상 지화를 쳐다보고 말하기를 "공은 문익공의 손자가 아니냐" 하였더니 좌중에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지르는 자가 있어 별안간 말하기를 "감히 오늘 일을 기묘사화에 비하느냐"하니 죄우가 다시는 말을 못하였다.
마침내 청실에서 돌아가시니 실로 윤 8월 21일이라. 이날 흙비가 내리어서 햇빛이 음참하고 빛이 없으니 서울의 사서인이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고 눈물을 떨어뜨리기에 이르니, 아! 슬프다. 간사한 무리들이 착한 사람을 죽이고 해치는 것을 옛날부터 얼마나 막았건만 오히려 그럴듯한 방법을 써서 위로는 군상의 총명을 가리고 아래로는 초야의 입을 막았는데 공과 같은 분은 체부 피하기를 힘써 주장하던 처지인데 도리어 체부 때문에 죽음의 길을 면치 못하였으니, 저 당인들이여 그 누구를 속일 것이냐!
하늘을 속일 것인가? 기사년에 상이 후회하시고 제일 먼저 공의 공직을 회복시키고 예부랑을 영외로 보내어 특별히 제사를 내리시고 김상 덕원의 진백으로 인하여 영의정 벼슬을 증직하시고 또 관원을 보내 제사지내다. 부학공이 경연에 오르니 상이 말씀하시기를 "너의 부친이 원통하게 죽었으니 나는 언제나 슬퍼한다." 하며 임금님의 목소리가 목메어 두번 세번 울먹이셨다.
그 산소를 다시 옮길 때 상께서 방백에게 명령을 내리시어 장례를 같이 돌보도록 하시니 그 슬픔과 영광이 이같이 갖추어졌다.
그 후 6년만에 당인이 기회를 타서 다시 탈직을 하였다가 또 19년이 지나서 공의 손자 세원이 북을 올려 그 원통함을 아뢰었더니 상께서 대신에게 의논할 것을 명하셨다. 윤영 부사 지완이 의논하기를 "김석주가 일찍이 그 원통함을 말하고 그 귀양갈때 선물을 주고 옥형이 있을때는 사실을 밝혀 살고자 하였으나 미처 못 하였다 하니 그 말을 가히 믿을만 합니다." 하니 상의 말씀이 영부의 의논이 옳다 하고 공의 벼슬을 회복하고 품질을 또한 여전하게 하였다. 불순분자가 방해함에 상께서 말씀하기를 "당초의 처분은 나의 과실인데 과실을 또 저지름은 나는 하지 않는다.' 하시니 말한 자가 또한 저지 되었다.
공이 집에 계실 때 내행이 독실하고 대부인을 섬기는데 엄부같이 하고 이를 미루어 여러 아우들을 무애하며 집안 일가들과 화목하게 지내니 이것으로 가히 그 어지심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임금을 섬길 때면 띠를 늘이고 홀을 바로잡고 거짓이 없고 남을 따르지도 않고 그 풍절과 재질이 뚜렷한 일대의 명신이 되니 실로 가정에 근본을 두고 나라에까지 미치는 것이었다.
끝내 당화가 몸에 미쳤으나 하늘의 명을 순순히 받았을 따름이니 그 시운에 어찌하리오. 다행히 숙종임금의 성명하심을 힘입어서 비록 조정의 형세가 어지러운 때였으나 공의 충성을 살피시고 공의 원통함을 민망히 여겨 거짓말을 깨끗히 씻었으며 은혜로운 말씀이 밝게 세상에 알려져서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간사한 무리들이 일시에 나라의 화를 끼치는 것을 백년이 못되어서 공론으로 옳고 그른것이 정해지니 비록 흉한 불꽃은 사람을 망칠 수 있는 것이나 복인에게는 끝내 능히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당일의 군신관계에서 볼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공의 문장은 말이 순하고 이치는 통달하여 넓고 시원스러워서 일찍이 빈사로서 의주를 왕래할 때 사신이 공의 시문을 애중히 여겨 《조선채풍록》에 실렸고, 《화인문초》에도 뽑혔다. 저서로는 【성산지】· 【중수향약】· 【귀암만록】이 있어 집에 장서로 되어 있다.
공의 춘추는 59세인데 장사를 세 번이나 옮겨서 기축년에 더불어 영천 개쌍동 감향 자리에 합폄하니 정경부인 이씨의 본관은 벽진인데 승지 완정공 언영의 따님으로서 남편을 섬기는데 화순하고 예가 있었으며 비록 귀히 되어 명부가 되었으나 검소함을 고치지 않았다. 두 아들이 다 영현하였으나 언제나 억제하고 겸손함에 힘쓰지 않을 때가 없었다. 공이 돌아가신 후 22년 신사년에 세상을 뜨시니 향년이 79세라 4남 4녀를 두니 장남은 부제학 담명이니 벼슬은 이조참판까지 하였고, 다음은 한명인대 홍문관 교리이며 다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고, 다음 준명은 일찍 죽었고, 다음 귀명은 찰방이다. 딸은 유명하, 보덕 최항제, 좌랑 강상주, 김승국에게 출가했다. 참판은 2남 2녀를 두니 장남은 생원 세침이고 차남 세경은 일직 죽었다.
두 사위는 참봉 강개와 목성겸이다. 교리는 3남 1녀를 두니 장남 생원 세원은 곧 북을 울려 공의 원통함을 아뢴 사람이고, 다음은 세보와 세황이다. 사위는 심수간이다. 찰방은 아들이 없어 세보를 입후했다. 유명하의 아들은 후겸이고, 세 사위는 참봉 이필과 김석범과 정중백이다. 보덕 최항제는 3남이니 좌랑 수경과 수온이며, 사위는 권세현이다. 강상주의 아들은 유이고, 김승국의 아들은 좌랑 동준과 동걸이고,
사위는 김중례와 이인겸이다. 중현 이하는 많아서 다 올리지 못한다.
5대손 만운이 문과에 급제하여 문행으로 이름나니 금상(정조) 20년에 교지를 내려 불러올려 특별히 혜택을 보여주신 것이다. 천리 길 멀리 와서 해가 바뀌도록 가지 않으며 명을 청하는 자는 6대손 이풍이니 그 정성 또한 족히 사람을 감동시키었다.
명銘하니 왈
대령이 우람할 손 원신께서 나셨으니 /大嶺磅礴。曰生元臣。
어려서 배우고 커서 행하니 좋은 가문 연원 있네. /幼學壯行。家有淵源。
임금께서 좋다 시며 내게 있는 어진 신하 /王曰媺哉。予有臣良。
한림은 깊고 깊어 3세 동안 날개 쳤네. /木天深深。三世翺翔。
동죽과 은대에서 좋은 명성 날렸건만 /銅竹銀臺。令聞載颺。
저 당파 사람들은 눈 흘기며 곁에 있네. /彼朋家者。睊睊在傍。
숙종 임금 잘 이어서 사당에 고하는 예 /肅考善繼。于廟告禮。
일월 같은 종통을 누가 감히 더럽힐소냐. /日月宗統。疇敢更螮。
령을 넘어 공이오니 /公來自嶺。布袍麁弊。
어찌 그리 준엄한고 그 포부는 은혜 뿐을/曷不峻嚴。所包者惠。
성균관에 장이 되고 모든 관청 다 돌았고 /晉兼成均。遍都諸省。
천관의 총재로서 청탁이란 받지 않네. /天官冢宰。門絶造請。
누가했나 척분끼고 피 이발로 물것 같아 /誰據戚掖。血牙狺如。
얼 킨 그물 하늘 가득 공이신들 면 할 손가. /罻羅彌天。公豈免諸。
귀양갔다 다시 잡혀 귀신조차 슬퍼하니 /旣竄旋逮。鬼神其吁。
틀림없는 저 상봉을 자와 악이 쪼았도다. /宛彼祥鳳。鷙鴞攸啄。
흙이 날려 비가 되니 이세상이 캄캄해져 /土以爲雨。乾象黯黑。
십년세월 흘러가니 왕의마음 슬퍼지서. /十年重回。王心斯惻。
네가 왔나 공의 아들 가까이한 앞자리에/來汝遺孤。密邇前席。
너의 아비 원통함을 내가 실로 후회한다. /汝父之冤。予實悔怍。
왕의 명령 왕신에게 천리 길에 제주 드려 /王命王臣。千里酹酌。
시운에 평파있고 아첨한말 다시이네 /運有平陂。憯謀復逞。
왕이 어찌 따를 손가 따라서도 잠깐일세 /王豈汝徇。所徇俄頃。
손자께서 북을 울려 조정의논 널리 받아 /孫籲以鼓。廷詢之博。
나라안의 대신들이 의논하기 밝았으니 /國有大臣。獻議明的。
왕의 말씀 이쯤되니 나도 이제 깨달았네./王曰有是。予不遂非。
빛나도다 은혜로운 말 하는 같이 내리셨네/煌煌恩誥。申降天扉。
깊고 깊은 저 땅속에 태양빛이 비추이고 /幽哉覆盆。太陽臨下。
원수된 자 기가 죽고 모든 입이 막혀졌네 /仇者氣沮。衆喙始啞。
어느 임금 신하 없고 어느 임금 신하 없나 /君誰無臣。臣孰無君。
이와 같이 슬픈 영광 볼만할 손 군신이여 /惟玆哀榮。可觀君臣。
개상이란 마을 아래 천기조차 명랑하니 /盖雙之洞。天氣昭朗。
검은 머리 변치않고 이 세상과 같이하리 /龜頭不泐。可弊天壤。
나의 글 삼엄하여 너의 편당 벨 것이다. /我筆森嚴。誅爾偏黨。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검교 규장각 제학 평강 채제공 짓다.
樊巖先生集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行崇政大夫行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經筵事弘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歸巖李公神道碑銘
濟恭讀故冢宰歸巖李公狀。爲之絫欷永歎。益知偏黨之禍人家國而後已也。夫肅宗明主也。公藎臣也。以藎臣而遇明主。宜乎利澤施于民。禮遇終其身。而奈之何戚臣陰竊權柄。彌禍網以椓崑岡。烈焰燬我良玉。天乎鬼乎。嗚呼此黨禍也。雖然。天者不可終欺。理者不可終誣。未一紀而淵衷大悔悟。惻怛之敎屢發。中朝滌其丹書。贈以上相。於是乎天亦勝人。君子知所勸。小人知所懼。雖黨人。其於天何哉。公諱元禎。字士徵。歸巖其號也。其先廣陵人。在麗季判典校寺事號遁村。以文學氣節著者曰集。入國朝爲刑曹參議。贈首相者曰之直。傳三世。娶于嶺南之星山居焉者曰摯。子孫遂爲嶺南人。又二世曰煕復。贈左承旨。曰潤雨。號石潭。歷敭華貫。卒官參議。贈吏曹參判。是爲公曾大父,大父。石潭。師事鄭寒岡先生。旣卒。配寒岡書院。子曰道長。號洛村。歷翰苑天曹郞。卒官弘文館應敎。贈左贊成。出後堂叔父軍資主簿贈吏曹判書榮雨。配贈貞敬夫人安東金氏。判中樞府事荷潭金公時讓之女。寔爲公考妣。公聰穎絶人。在髫日誦數萬言。及長看書。能八行俱下。華聞大噪。仁祖戊子。中國子生員。孝宗辛卯。魁漢城試對策。壬辰。闡增廣文科。居殿試第二。例付尙衣直長。丁酉。拜講院說書。薦入史局爲翰林。自石潭,洛村,公仍祖子孫三世珥筆翰苑。世罕有也。明年。由奉敎陞典籍。轉兵曹佐郞,正郞,諫院正言憲府持平,講院文學。尋除全州判官。居一年。移陞長城府使。爲銓長者陽言治最當陞。內實枳天曹名選也。己亥。奉謝恩書狀命。赴淸國。顯宗新卽位。公自在胄筵講官。受知最深。是役也簡在上也。明年夏復命除掌令。乞暇歸省。冬。拜江陵府使。府衙云有鬼祟廢不修己有年。公至則直灑掃入處。吏鄕交諫。夷然若不聞。已而見古木立於庭。杈枒恠甚。亟命繚以網。熾炭于根。有二靑狐跳出燒死。官府遂帖然。辛丑。用廟薦爲東萊府使。公前在長城。賑饑民至誠。以之民賴以活。至是萊民又連歲阻饑。方便廣濟。如長城之爲。而尤不以封壃域民。旁近民多所沾惠。御史南公九萬上其事。上大嘉歎。賜馬以寵之。冬。倭人以移舘事有言被奪職。實公所不干也。癸卯。敍拜灣尹不赴。甲辰。拜判决事。移承旨。未幾出補全州府尹。與觀察使爭體例峙不撓。觀察使啓罷。公不以爲意。居二年。敍拜承旨。時。淸國査使至。廷臣廩廩有禍機。方上之接待使也。公密贊辭令。動中機宜。使戢其暴。事得以妥帖。左右私竊稱歎。上亦倚任有加焉。拜湖西觀察使。辭不赴。丁未。以承旨用王世子冊禮禮房勞。陞嘉善堦。拜廣州府尹。未幾。以事罷。自是連拜右尹摠管工曹參判。庚戌。鄭都尉載崙。以上价赴淸國。鄭相國太和。於朝堂謂銓部曰。吾兒年少未了事。非遴副价甚峻。恐敗國家事。銓部難其人。相國曰。非李某莫可。由是公爲副使。旣竣事還。差別試殿試考官。時。公子副學公。以諸生詣公車對策。公噤不與考校。大臣主試者時有問。强應之而已。及拆號。副學公居第二名矣。公自在韋布。爲嶺南士林望。柳㮨之䟽斥二臣從享。公實與焉。時議之媢嫉者衆。以公之結主知深。無如公何。至是諸臺躍起請削科。仍幷及公命官。諸考官䟽暴事實明其誣。上嚴斥臺官。諭之以立論無據。幾半年。臺梗寢焉。除楊州牧使。癸丑。以右尹召還。未幾特授都承旨。臺官以歷淺請遞改。上怒曰。方今黨論爲先。公道次之。若取黨論。元禎未愜久矣。若以公道。此等說。甚不正矣。公再䟽遞。自是屢拜刑曹參判,都承旨,禮曹參判。甲寅。顯廟賓天。差山陵都監提調。以前此王大妃患候議藥勞。加嘉義堦。乙卯。丁大夫人憂。扶櫬歸嶺南。上諭三道護送。異恩也。服闋。拜刑曹參判。旋移大司諫。還朝。公之在鄕廬也。聞朝廷設萬科。施爲多不猒人意。用范文正故事。與宰相書畧曰。向來彼輩之用事。阿附之徒驟蒙顯擢。朝廷名器。視爲己私。旣以是爲彼輩之罪。則今宜一反其所爲。而非徒不反。乃反效之。若是則古人何以曰無諸己而后非諸人乎。至若各擧所親於幼主之前。有若請托銓官者然。益可寒心。萬科之設。光海末政。以昏朝之末政。援爲聖世初政。何也。時相不能用。至是。上應旨䟽累千餘言。首言明義理別公私親賢士遠便佞。以正君心。抑躁競戒因循杜倖門重名器。以正朝廷。生靈塗炭。怨咨日滋。拯之振之。以固邦本。仍條其當罷者五而罷體府廳一也。當立者五而立嶺南大同法一也。䟽奏。上優批嘉奬焉。時。肅廟承先王遺志。釐改邦禮。宗統復正。眉叟許先生。首建議請上告太廟。太學及八方章甫繼之。公因辨謗䟽畧曰。宗統之復正。不可不告。人心之迷惑。不可不曉。是甲者之論也。論議雖正。層激不可不慮。節目雖備。乖激不可不憂。是乙者之論也。二者均有所執。而第念此論以過時而不發則固好矣。旣發之後。摧折之斥拒之。若遏橫議者然。則揆諸義理。實有不當然者。天地常經。斁滅無餘。擧國含生。孰不悲痛。而人或有言其非者。則禁錮之竄逐之。至於請殺而杜人口。猶以爲不足。復設禮禁。播告八方。設刀鋸以待言者。此先王所以痛惋其見欺而殿下之有切齒腐心之敎者也。然而仰體好生之德。將順不殺之仁。但云正統之當告。不以加罪而爲請。則此實稱停之論也。公寬厚恢弘。雖當國言朋興之際。其立論之毅而惠嚴而寬如此。至若萬科軆府之設。觺觺然正色立異。不少假也。拜兵曹參判,籌司有司。又兼賑廳堂上。尋拜大司諫。院僚欲與憲府並發告廟啓。公曰。事貴消詳。且待之。人或謂遲疑。公引避不得遞。遂發啓焉。有尹憲卿者䟽捏公甚憯。公䟽辨。以爲夫告廟議者之言曰。過時之嫌小。當告之義大。不可以小嫌而廢大義。臣於此以爲此論不發則已。發則亦難沮格。至於誤禮者之不欲加罪。實出詢謀之僉同。而憲卿疑阻轉深。譸張爲幻。盖緣積怨深怒而發也。彼輩之手握王爵。口銜天憲五十餘年。臣不巧俯仰。凡幾取敗。而若其低首下氣。阿意順旨。終非狂狷之性所可強而能也。由禮曹參判。移大司成。擢陞刑曹判書。仍兼大司成。正卿之兼國子。國朝所罕也。戊午。儐北使灣上。伴送亦如之。及復命。拜判尹。刱行嶺南大同法。前時大同法行於兩湖。惟嶺南仍前。任土作貢。民不堪上司誅求。公嘗於應旨䟽力言之。至是。廟堂以公主其事。於是度民田出粟米。計上供量官用。然後裁其遠近。劑其傭直。要使宜於國而利於民。旣成而頒行之。民大悅。勒石頌德。時。進香使馳啓言中國大擾亂。朝廷議加禁旅。戚臣金錫胄實主之。患公持不可。適於泮宮。遇公言邊事。且曰。西鄙多警。體府必可復。欲設體府。禁旅勢當益。此係不容少緩也。公曰。體府無益。徒擾人國耳。禁旅之加。與此奚異。雖然。主兵柄者職當憂耳。已有見。已自直陳。何不可之有。及後登對。公亦意以爲備禦踈虞。且柄臣顓其事。不必膠前見。隨諸臣仰對而已。俄有體府復設之命。以大司憲移拜戶曹判書。時。北使至。上欠寧。不可以郊迎。重臣馳往諭之。使牢不許。公承命逆于路。反復開曉。辭理明確。使敬服。惟公言是遵。移右參贊。兼知義禁府事。時。有江都投書之變。捕凶逆有湞鞫。朝議欲以治盜刑鉤之。公曰。鞫獄自有常刑。而韓上黨明澮刱烙刑。流毒至今。非古法而刱制。不知其可也。衆是之。於是元惡伏辜。餘多平反出者。移大司憲。尋拜吏曹判書。兼弘文提學。辭不獲。益以持公道絶偏係爲務。雖異己人。毅然參用。以此臺劾發。上察公無他。益委任焉。擢崇政階。兼判義禁府事。若備局,經筵,提學,成均,春秋,內局,槐院,宗簿,譯院,贊畫使,賑廳,繕工等任。掌銓衡時所兼管。公益憂懼焉。當是時。金錫胄眈眈視一邊。通宮禁造蜚語。恐動上無所不至。上易置有位削黜公。已而。元老萬鐵等上急變。盖首相許積孼子堅。妖惡不道。與逆宗楨,柟締結謀不軌。錫胄媒是爲網打計。獄大起。卽所謂庚申獄。告者言堅使李台瑞。激宰相復體府廳。辭及公。捏奏不置。卒以見欺。逆竪竄關西之理州。俄命拿致詔獄。公歷擧與金錫胄泮宮酬酢語。以明其非由於台瑞。鞫廳書問。錫胄復書如公言。且抵書鞫廳承旨尹堦。傷其冤。至欲請對白之。會。上命除刑發配。遂已秋獄更起。以死囚亂言。又被逮。卒無實。按獄者怏怏無奈。更提體府事拷掠甚急。公神氣不少沮。仰謂鄭相知和曰。公非文翼公之孫耶。座有努目咆者遽曰。敢以今日。比之己卯士禍乎。左右莫敢復言。遂告終于請室。實閏八月二十一日也。是日雨土蒙瞀。日晻慘無光。都下士庶莫不悲之。至有隕涕者。嗚呼。奸壬之戕害善類。從古何限。而猶得以疑似可欺之方。上以蔽君上之聰。下而揜草野之口。而若公者。以力主體府宜罷之人。反以體府而爲死案。不得免焉。彼黨人者其誰欺。欺天乎。己巳。上悔之。首復公官爵。遣禮部郞嶺外特賜祭。旋因金相德遠陳白。命贈領議政。又遣官祭。及副學公登筵。上曰。爾父冤死。予每惻然。玉音摧咽。至再至三。其改葬也。下諭方伯共其事。哀榮備矣。後六年。黨人乘機復奪職。後又十九年。公之孫世瑗。鳴鼓白其冤。上下大臣議。尹領府趾完議曰。金錫胄嘗言其冤抑。其謫也有贐。在理也。欲請對暴實而未及云。其言可信。上曰。領府議是。復公爵贈秩亦如前。不逞者或梗之。上曰。當初處分。是予之過。過而遂之。予不爲。言者亦沮焉。公處於家。內行純篤。事太夫人如嚴父。推以至撫諸弟敦宗族。皆可以觀其仁也。及其出而事君。垂紳正笏。不詭不隨。風節才猷。蔚然爲一代名臣者。實本諸家而推之國也。卒之黨禍之及於身。順受天而已。其於時運何哉。幸賴肅廟聖明。雖於朝局推盪之際。察公之忠。愍公之冤。誣衊快滌。恩言昭揭。使後之人。知奸壬禍國不過逞一時之毒。而至於公論之不百年而定者。雖以禍福人凶焰。亦不能沮遏之也。斯可見當日君臣之際也。公爲文章。詞順理達。滂沛奔放。嘗以儐使來往灣上也。北使愛重公詩文。載之朝鮮採風錄。選入於華人文抄云。所著有星山志,增修鄕約,歸巖漫錄等書藏于家。公春秋五十九。葬凡三移。己丑。與夫人合窆于永川盖雙洞某向之原。貞敬夫人李氏。籍碧珍。承旨浣亭公彦英之女。事君子和順有禮。雖責爲命婦。服御無改寒素。兩子旣榮顯。未嘗不勉以抑遜。後公二十二年辛巳卒。享年七十九。有四男四女。男長卽副提學聃命。卒官吏曹參判。次漢命弘文校理。皆以文學名於世。次俊命早夭。次龜命察訪。女長適柳命河,次輔德崔恒齊,次佐郞姜相周,次金升國。參判二男二女。長生員世琛,次世璟夭。二婿參奉姜楷,睦聖謙。校理三男一女。長生員世瑗。卽鳴鼓白公冤者。次世寶,世璜。婿沈壽幹察訪。無子以世寶后。柳命河子後謙。三婿參奉李泌,金錫範,鄭重恒。崔恒齊三男。佐郞守慶,守溫,守仁。婿權世鉉。姜相周子濡。金升國二男。佐郞東俊,東傑。二婿金重呂,李仁兼。曾玄以下。多不盡載。五代孫萬運登文科。以文行稱。今上二十年。降旨宣召。特除臺閣。盖念其爲舊臣之孫。延揭厲之澤也。千里來乞銘。歷歲不去者。六代孫以豊。其誠亦足感人。銘曰。
大嶺磅礴。曰生元臣。幼學壯行。家有淵源。王曰媺哉。予有臣良。木天深深。三世翺翔。銅竹銀臺。令聞載颺。彼朋家者。睊睊在傍。肅考善繼。于廟告禮。日月宗統。疇敢更螮。公來自嶺。布袍麁弊。曷不峻嚴。所包者惠。晉兼成均。遍都諸省。天官冢宰。門絶造請。誰據戚掖。血牙狺如。罻羅彌天。公豈免諸。旣竄旋逮。鬼神其吁。宛彼祥鳳。鷙鴞攸啄。土以爲雨。乾象黯黑。十年重回。王心斯惻。來汝遺孤。密邇前席。汝父之冤。予實悔怍。王命王臣。千里酹酌。運有平陂。憯謀復逞。王豈汝徇。所徇俄頃。孫籲以鼓。廷詢之博。國有大臣。獻議明的。王曰有是。予不遂非。煌煌恩誥。申降天扉。幽哉覆盆。太陽臨下。仇者氣沮。衆喙始啞。君誰無臣。臣孰無君。惟玆哀榮。可觀君臣。盖雙之洞。天氣昭朗。龜頭不泐。可弊天壤。我筆森嚴。誅爾偏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