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중면장년회 총무 김형준입니다
(9)월 어르신찿아뵙기 보고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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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어르신 : 식현리 이강석어르신
<중면장년회 어르신찾아뵙기>
식현리 이강석 어르신댁을 찾아 화목과 친절의 소중함을 느꼈던 9월의 오후녁
9월 17일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 추석을 한 주일쯤 보낸 후의 하늘은 높고 화창했다. 조금은 따갑다고 해야 할까? 인천 신도시인 청라국제도시에서 만난 이강석 어르신과 부인 신영자 여사님, 그리고 학교 선생님을 연상시킬 만큼 또렷또렷한 인상의 두 따님들은 서울에서 찾아온 길손들을 너무도 고맙고 미안해 하면서 맞이했다. 한달 한번씩 맞이하는 어르신찾아뵙기에 늘상 동참하는 중면장년회 유근배 형제, 김형준 총무, 그리고 필자인 나 김용근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함께 뭉쳐서 인천에 거주하시는 식현리 이강석 어르신(중면 이사) 댁을 찾아온 거였다.
보통은 자택을 찾아서 담소를 나눈 후 모시고 인근의 식당을 찾아서 식사를 하는 것이 순서였지만, 이날은 조금 달리한 터였다.
유근배 형제는 잠실에서 출발, 수유리에서 출발한 필자와 서울역에서 만나 공항철도를 통해 내려왔고, 서울 대림동에 거주하는 김형준 총무는 중도에 지하철을 환승해 인천 2호선 가정역에서 셋이 만난 터라 예정보다 도착 시간이 늦어버려서 식사가 우선이 되어 버렸다. 마침 전국적으로 불어닥친 택시 휴업 파동으로 차를 잡지 못해 동동거리던 우리 사정을 알고 큰 따님이 어르신을 모시고 나와 식당까지 운전해 주는 수고까지 해주었다.
인근에 물색해 두었던 닭갈비 전문식당은 크지는 않았지만 조용했고, 음식은 꽤 정갈하고 맛있었다. 식사를 하면서 많이 궁금했던 중면 식현리에 대해 어르신께 많은 것을 여쭈었고, 이강석 어르신은 또렷한 기억으로 일일이 설명을 해주셨다. 식현리는 필자의 선친께서 살았고 2세대인 필자 또한 정신적인 본향이기도 했다. 한 시간 남짓 시간이 흐른 후, 궁금함을 갖고 자택으로 가는 길에는 어르신의 둘째 따님이 운전하는 수고를 해줘서 우리는 두분 따님을 차속에서 미리 인사를 나눌 수가 있었다.
“식현리는 중면 7개리 중에서도 풍요로운 편이었어. 대추와 밤으로도 유명했지. 임진강과 서해 바다, 한강이 합쳐지는 곳이라 해서 삼도풍이라고도 불렸던 고향 식현리는 뱃사공들이 대추랑 밤을 배에 싣고 서울 마포나루와 강화 등지를 다니면서 팔았지. 밥재마을이라고 했지만 밤으로 더 유명했던 것 같아.”
어르신의 설명을 들으면서 식현리가 ‘밥재마을’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고는 있지만 과거에는 ‘밤재’라고 불렸던 이유를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고향에는 고모가 둘이었지만 남자들만 나왔어. 나는 전쟁 이전에 부모님을 따라나와서 생활을 했었고..”
중면 분들이 대체로 전쟁 직후나 1.4후퇴때 피란을 나왔지만, 이강석 어르신은 경로가 조금 달랐다. 부친을 따라 가족이 일찍이 남한으로 와서 생활했고, 초등학교 5학년때 서울로 이주를 하면서 6.25동란을 겪었다, 이때가 12살, 아직은 어린 소년이었다.
“전쟁 전에는 배들이 고향을 오가며 물물교환을 많이들 했어, 그래서 종종 배를 타고 고향나들이를 했어요. 고향에는 큰댁이 있어서 왕래가 자연스러웠지. .. 당숙어른들 두 분 모두 전쟁 나고 월남을 했는데, 큰당숙은 북한에서 인민군으로 차출이 됐어. 가을철에 낙엽 속으로 미끌어져 잠이 들었다가 미군에게 생포가 됐대. 결국 포로로 거제도에 수용이 됐다가 포로 교환때 남쪽을 택했대. 반공포로가 된거지. 당시 고향에는 처자식이 있었는데 참으로 어려운 선택을 했던 거지. 그리곤 서울의 우리집에 함께 있었다가 이번엔 국군으로 재입대를 하고.. 지리산 빨치산 토벌까지 했으니 참 운명이 그랬어. 그때 기억은 배고팠던 것밖엔 없었대.
전역 후에는 파주 선유리 개울 건너 있던 미군부대에서 부대 짬밥을 얻어다가 돼지를 키웠고, 안성으로 가서 살다가 돌아가신거지”
작은당숙님의 얘기를 상세하게 들려주시는 것을 흥미있게 들으면서 두 분 사이에 청이 참 많았음을 느꼈다.
화제를 바꿔서 부인 신영자 여사와의 인연에 대해 물었다. 어르신은 1939년생 전주이씨, 여든 네살이고 두 살이 아래인 부인은 평산신씨, 여든 둘인 셈이다. 중매로 엮어진 부인은 파주 법원읍 쪽 금곡리 출신이라며 정겹게 신 여사에게 눈길을 돌린다. 자그마한 체구의 신영자 여사님은 단아한 모습에 조분조분 말씀을 하시는 폼이 전형적인 한국적 여인상이라 할까? 참으로 자애롭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가양동에 있는 양천국민학교를 열세 살에 마치고 고등학교엘 갔지. 국민학교땐 겨울이면 추워서 울면서 십리길을 걸어서 학교를 갔어. 그땐 다 그랬지뭐. 고등학교 졸업후엔 바로 군대를 갔는데 육군이었어. 제대 후엔 자동차 정비 출신이라 철도청을 특채로 들어갔는데, 회사를 다니면서 철도전문대학(現 철도대학)도 나왔고, 거기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34년을 다녔는데, 서울역 특동(특별동차사무소)에서 대통령 전용 전동차 수리를 맡았었지.“
실향민 출신인데도 가능했냐고 여쭙자, 매주 신원조회를 거쳐야 하는 엄중한 근무였다고 회상을 하신다. 덕분에 모범 공무원으로서 표창도 꽤나 받았다고..
이강석 어르신 댁에서 정성드레 내오신 차와 과일을 맛있게 음미하면서 이번에는 가족관계에 대해 물었다. 넓다란 아파트의 거실에 군데군데 놓인 가족사진에서 보듯이 대가족인 이강석 어르신 부부는 슬하에 2남2녀를 두었고 여덟 명의 손주와 외손주의 재롱을 누라고 있기도.
1966년생 장남으로부터 1973년생 막내 따님에 이르기까지 효성들이 지극해 방문을 한 그 시각에도 대화를 나누는 어르신과 방문객 접대에 분주하다. 그 동안 꽤나 많은 어르신 가정을 찾는 동안 특히 다복하고 친밀한 뷴위기를 느끼게 한 가족들이었다. 기업의 중견으로 활동중인 두 아들과 두 사위 외에도 두 따님 또한 현역생활을 알차게 하고 있는 커리어 우먼들이다.
그 많은 용돈을 다 어디다 쓰시냐고 묻자, 어르신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명절 용돈 외의 것은 일체 사절이란다. 여유로운 노후 관리가 느껴지는 가정 모습이었다.
중면 이철영 어르신과, 목동 한동네에서 살았던 인연이 있는 김영하 어르신과의 친교가 특히 두텁다는 이강석 어르신은 식현리의 신인철 선배님(중면 부회장)에 대한 각별한 존경과 애정을 표하기도 ..
식현리 모임에 다니다가 일흔 다섯 되던 해부터 김영하 어르신과 더불어 중면 모임에 적극 참여해 오고 있다는 이강석 어르신은 검단 망향의 동산에 부모님과 큰 당숙내외님이 함께 모셔져 있다고 밝히면서 중면의 미래 모습에 대한 걱정과 당부를 주셨다.
적지 않은 거리의 방문길, 익숙지 않은 교통 여파에 조금 당황은 했었지만, 참으로 뜻깊고 의미있는 방문길이었다는 느낌에 차서 어르신 가족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우리 삼총사는 귀경길에 올랐다. 둘째 따님의 차량을 통해 청라국제도시역까지 이강석 어르신의 따뜻한 전송을 받으면서..
<글/중면장년회장 김용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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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10)월에도 중면장년회의 "어르신찿아뵙기' 장기프로젝트는 지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