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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14일 일요일 오전 10시50분 순천 옥천서원(玉川書院) 외삼문(外三門)의 이름은 경현문(敬贒門)이다. 어질 현(賢)의 한자가 현(贒)으로 표기되어 있어 운치를 더한다. 경현문을 들어서면 옥천서원 현판이 걸려있는 강당이 나온다. 서원은 2006년 중수작업이 한창이던 때와 달리 이제 본래의 모습을 찾는 듯 싶다.
재실 입구에는 서흥김씨대종보철도 걸려있다. 내삼문(內三門) 앞 좌우 양쪽의 은행 나무 두 그루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은행나무는 80년대 광주 상무대 공병대대장으로 근무하던 우리 문중의 태갑(兌甲 27世 영남중파 진해) 중령이 순천광양지역 동원예비군 훈련차 이 지역을 방문했을 때, 순천향교의 협조를 받아 1984년 3월23일 서원 내삼문앞 좌우에 묘목으로 식수한 나무다. 재경서흥회장을 지냈고 현재 대종회 감사직을 맡고 계신 분이다. 위의 사진은 2009년 9월 부산종친회에서 옥천서원 순례시 촬영한 것이다. 3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은행나무 두 그루가 크게 자라 선명하게 보인다. 위의 사진은 태갑 감사님이 카페에 올리신 표지석 사진이다. 이번 방문에서는 서원관리를 맡고 있는 향교에서 치웠는지 위 표지석은 보이지 않았다 내삼문 앞 오른쪽 은행나무 옆에는 옥천서원 묘정비(玉川書院 廟廷碑)가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호남 사림의 정신적 기지(基址)로서의 옥천서원이 갖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1760년(영조 36) 건립하였다고 두산백과에 기술되어 있다. ▲사진제공 : 윤호 이사 사당건물은 2005년 12월 중수(重修)된 것으로 당시와 비교하니 이제 연륜이 깊어진 느낌이다. 도동서원 추향제 제관으로 참제한 병국(炳國) 사무총장이 예복(禮服)을 갖추고 참배를 드리다. 옥천서원은 매년 봄가을 두차례 향사를 모시고 있다. 봄향사는 한훤당 선생 양력탄신일에 맞춰 5월25일, 가을향사는 기일을 음력으로 환산하여 10월1일에 모신다.
옥천서원에는 서원전담 문화재지킴이가 계시다. 문화재지킴이 송병관 선생의 ‘옥천서원을 아시나요’에 다음의 글을 읽을 수 있다 『순천 부사 이정(李楨)은 김굉필을 추모하는 뜻으로 임청대의 구지(舊址)에 대를 쌓고 대의 북쪽에 3칸의 당을 이루어 이를 경현당(敬賢堂)이라 이름 지었고, 기대승(奇大升)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에 청하여 그 액(額)의 글을 받았다고 했다. 이듬해에는 가운데를 당(堂)으로 하여 옥천정사(玉川精舍)라 짓고 좌우로는 동서의 재실을 마련하고 이름을 지도재(志道齋)·의인재(依仁齋) 현재 지금은 그냥 옥천서원이라는 이름의 삼칸 건물에 각 재실이 있다. 이정의 뒤를 이어 1566년 순천부사로 부임한 김계식(金啓寔)은 김굉필의 위패가 당내의 좌측 한편에 치우쳐 있음이 적당치 않다 하여 중앙으로 옮겼고, 1568년에 사림들이 발론하여 사액(賜額)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옥천’이라는 액호 이것이 전라도의 최초의 사액서원의 의미를 가진다.』 ▲사진제공 : 윤호 이사 임 청 대 (臨 淸 臺) 서원옆으로는 임청공원이 조성되었고 그곳에 임청대(臨淸臺)가 보인다. 임청대는 김굉필(金宏弼) 선현이 순천 유배지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셨는지를 잘 보여주는 선현 생전의 마지막 유적지로 기억해야 할 곳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임청대에 관해 기술한 문화재청과 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의 글들을 모아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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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태갑 감사님 은행나무 표지석 사진자료 감사합니다. 식수 년도와 날짜를 추가했습니다. 이번 방문에서는 표지석이 안보였습니다. 제대로 된 표지석을 세워 옥천서원의 역사와 함께 앞으로는 서원목으로 쑥쑥 자라고 있는 은행나무와 관련된 역사도 기록해 놓을 수 있도록 순천향교의 협조를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은행묘목을 구해 그 당시 식수한 흔적을 남기는 전례가 되었으나 과거의 발자취가 남아
말 없는 은행 나무가 대변하는 듯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