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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督敎와 世界歷史, 人物史 스크랩 카리브해(쿠바/바하마/자메이카/아이티/도미니카/푸에르토리코/트리티나드토바고)
sooaram 추천 0 조회 441 11.12.06 22: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라틴아메리카>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쿠바> 스페인 식민지

 

 

공식명칭 : 쿠바공화국(Republic of Cuba)
인구 : 11,294,000
면적 : 110,860
수도 : 아바나
정체·의회형태 : 중앙집권사회주의공화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대통령
공식 언어 : 스페인어
독립년월일 : 1902. 5. 20
화폐단위 : 쿠바페소(Cuban peso/CUP)

공식 명칭은 쿠바 공화국(Republic of Cuba/Rep?blica de Cuba).

카리브 해 군도 가운데 가장 큰 단일 섬이며, 그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서인도 제도의 국가..

 

하나의 큰 섬과 여러 작은 섬들, 산호섬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미국 플로리다 주 남단에서 남쪽으로 145km 떨어진 대서양상에 있다. 멕시코 만 입구를 지나는 북회귀선 바로 남쪽에 있으며, 서인도제도 전체 육지면적의 1/2 이상을 차지한다. 수도는 아바나이다. 동서길이는 약 1,250km, 너비는 북서부가 31km, 남동부가 191km이다. 면적 109,886㎢, 인구 11,235,000(2009 추계).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도착했을 때 쿠바에는 초기 원주민에 이어 그 지역을 차지한 타이노족 인디언이 살고 있었다. 콜럼버스는 그 지역을 스페인 영토로 선포했다.

 

18세기 쿠바는 스페인 제국에 원당(原糖)을 공급하는 가장 중요한 공급처가 되었고, 나중에 '앤틸리스의 진주'(Pearl of the Antilles)라는 별명을 얻었다. 스페인은 쿠바인들의 독립운동에 맞서 수차례 어렵고 값비싼 전쟁을 치러야 했지만,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1898년까지 유지했다.

 

하지만 1898년 스페인은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미국과 쿠바 독립군에 패했다. 쿠바는 인접한 미국의 강력한 정치적 영향 아래 있었지만 오래지 않아 공식적으로 독립을 얻었다.

 

1959년 1월 1일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혁명군은 독재정치를 일삼던 바티스타 이 살디바르 정권을 무너뜨렸다. 2년 후 카스트로는 그 혁명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는 사회주의 혁명임을 선포했다. 쿠바는 소비에트 연방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경제적 발달을 이루었기 때문에 북부의 인접 국가들로부터 경제적 고립을 겪었다. 게다가 1990년대 초반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자 쿠바는 더욱 더 고립되었다. 소비에트 연방과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쿠바인들이 완곡하게 표현하여 '경제적 특별기간'(periodo economico especiall)이라고 일컫는 전방위적 결핍과 재정적 불안정의 경제위기를 가져왔다.

 

21세기 들어 쿠바는 경제·사회적 긴축정책들의 일부를 완화시켰다. 하지만 미국은 쿠바가 지속적인 경제위기를 겪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카스트로 정부에 대해 수십 년간 무역금지조치를 이어나갔다.

식량·교통·전력 및 다른 생필품들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을 감안한다면, 오늘날 쿠바인들의 삶은 쉽지 않다.

 

하지만 많은 쿠바인들은 자신들의 국가가 라틴 아메리카의 유일한 혁명국가라는 데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인류학자 미구엘 바르네트의 소설 〈Cancion de Rachel〉(1969, 1991년 영어판 〈레이첼의 노래 Rachel's Song〉로 출간됨)의 주인공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 섬은 무언가 특별하다. 가장 낯설고 가장 비극적인 것들이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 섬은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간처럼 대지도 자신의 운명을 지니고 있다. 쿠바의 운명은 신비에 싸인 운명이다."

 

쿠바에는 대도시가 단 1개 발달했지만 대체로 도시 중심 국가이다. 이 유일한 대도시인 아바나는 북서쪽 해안에 위치해 있으며, 나라의 수도이자 상업의 중심지이다. 약간은 쇠락했지만 멋이 있는 도시 아바나는 경치 좋은 부둣가가 있고 훌륭한 해변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바나는 세계적으로 매력적인 장소로 알려져 해외 관광객들이 해마다 늘고 있다. 산티아고, 카마구에이, 올긴, 특히 트리니다드 같은 쿠바의 도시들에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유산인 아름다운 건축물과 현대적 건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최초로 스페인인이 도착했을 때 쿠바에 살고 있던 원주민은 시보니족, 과나아타베이족, 이들보다 뒤에 정착했던 아라와크(또는 타이노)족 등의 인디언이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그의 첫 아메리카 대륙 항해 때인 1492년 쿠바를 스페인영토로 선포했다. 1511년에는 벨라스케스 데 쿠엘라르바라코아에 최초의 유럽인 영구정착지를 세웠다. 스페인인들은 곧 쿠바를 7개의 자치체로 나누었고, 이곳은 에르난 코르테스의 멕시코 진출(1519∼21)을 비롯해 스페인의 중앙 아메리카 탐험의 근거지가 되었다. 인디언 인구가 감소함에 따라 16세기말에는 인디언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엥코미엔다 농장 제도는 더 이상 효율성을 발휘하지 못했다. 17세기에 경쟁관계에 있는 유럽 강대국들이 침략해옴에 따라 식민지 상황이 어려워지기도 했다.

 

18, 19세기에 걸쳐 사탕수수 재배술의 발전, 노예노동력의 수입, 설탕산업의 성장 등에 힘입어 쿠바는 번영을 누렸다. 19세기에 설탕산업을 세계최고수준으로 기계화했고, 1860년경에는 전세계 설탕의 거의 1/3이 이곳에서 생산되었다. 1865년 노예매매는 중단되었지만, 멕시코 인디언과 중국인 노동력이 증가했다. 1886년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19세기말에는 미국이 주요 교역상대국이자 투자국이었다.

 

 스페인이 정치적 자치를 허용하지 않고, 세금부담이 증대하면서 제1차 쿠바 독립전쟁인 10년전쟁(1868∼78)이 발발해 군사적 교착상태에 빠졌다. 제2차 독립전쟁은 1895년에 발발했는데, 스페인은 이 전쟁에 2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배치했다. 1898년 아바나 항에 정박중이던 미국함대 메인호(號) 선상에서 원인불명의 폭발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미국도 스페인에 대항하여 이 전쟁에 참가했다(→ 색인 : 미국-스페인 전쟁).

 

1899년 쿠바가 독립을 쟁취한 후 한동안 미국이 이곳을 점령해 질서가 회복되고 많은 학교와 도로·교량 등이 건설되었다. 1901년 미국은 관타나모 만의 해군 기지 설립권과 쿠바의 국내외 행정을 감독할 권리를 얻어냈다. 1902년 토마스 에스트라다 팔마가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폭동기였던 1905∼06년을 거쳐 1906∼09년에는 제2차 미국 점령이 실시되었다.

 

1909년 자유당 대통령 호세 미겔 고메스가 이끄는 새로운 행정부가 집권하게 되었다. 고메스 대통령의 재임기간중 뇌물수수, 부정부패, 아프리카계 쿠바인에 대한 사회적 불평등 등이 구조적으로 고착되었다. 뒤이은 대통령들과 독재자들의 시대에도 이것은 마찬가지였다. 계속적인 미국의 투자와 설탕산업·관광산업·도박산업의 성장에 힘입어 경제발전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부의 불평등한 분배와 정치적 부패가 지속되던 끝에 1958년 오랫동안 망명생활과 대정부 게릴라전을 지속했던 혁명적 공산주의자 피델 카스트로바티스타 이 살디바르의 장기 독재를 타도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카스트로는 곧 소련과 수교하고 자본주의의 폐지, 외국인소유기업의 국유화, 소련식 농공업 개혁 등을 실행했으며, 마침내 자신의 혁명당을 PCC로 전환했다. 이 때문에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미국의 지원을 받은 반(反)카스트로 전쟁인 1961년의 피그스 만 침공과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최악에 달했다.

 

 1960, 1970년대에 소련의 위성국가로서 확고한 자리를 굳혔고, 제3세계로 확산되는 공산주의혁명에서도 소련을 대신해 활약했다.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운동을 지원해왔으며, 앙골라와 에티오피아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카스트로 정부는 모든 계층에 대한 교육·의료 혜택을 실시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경제는 여전히 침체되었고 계속 소련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카스트로는 소련의 부속국이라는 쿠바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비동맹국가들의 움직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쿠바는 동유럽과 소련 공산주의 붕괴로 정치·경제적인 타격이 컸다.

 

<바하마> 영국의 식민지

공식명칭 : 바하마연방(The Commonwealth of The Bahamas)
인구 : 327,000
면적 : 13,939
수도 : 나소
정체·의회형태 : 입헌군주제, 양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영국 국왕/ 총리
공식 언어 : 영어
독립년월일 : 1973. 7. 10
화폐단위 : 바하마달러(Bahamian dollar/B$)
국가(國歌) : Lift up your head to the rising sun, Bahamaland

공식 이름은 바하마 연방(The Commonwealth of the Bahamas).

서인도제도 북서부 끝에 있는 국가.

약 700개의 크고 작은 섬과 그보다 작은 2,000여 개의 낮은 바위산으로 이루어진 군도지역으로 미국 플로리다 주 남동부 해안에 자리잡고 있다. 북회귀선을 가로지르면서 서(西)대서양으로 약 23만 3,000㎢에 이르는 지역에 걸쳐 자리잡고 있다. 수도는 가장 중요한 섬인 뉴프로비던스에 있는 나소이며, 가장 큰 섬은 길이 167km, 너비 64km인 안드로스 섬이다. 면적 13,939㎢, 인구 314,000(2003 추계).

 

바하마의 원주민은 루카얀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아라와크 인디언이다. 이들은 원래 남아메리카대륙에 살던 종족이었으나 일부가 카리브 인디언들 때문에 북쪽 카리브 해 쪽으로 쫓겨오면서 이곳에 정착했다. 이웃에 사는 카리브인들과는 달리 대부분 온건했으며, 농업보다는 주로 어업에 종사했고 식인풍습도 없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 상륙한 곳은 바하마 제도의 산살바도르 섬(와틀링 섬이 라고도 함)이나 사마나 섬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스페인인들은 바하마에 정착하려고는 하지 않았으나 평화롭게 사는 아라와크 인디언들을 급습하여 노예로 삼았고 이에 따라 원주민의 숫자는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영국인이 왔을 때 이곳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 1629년 영국의 찰스 1세가 바하마 제도를 국무장관 1명에게 하사했지만 이주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색인 : 대영제국).

 

1648년 윌리엄 사일은 영국인 청교도들을 이끌고 버뮤다 섬에서 일류서러 섬으로 건너갔다. 이 개척은 너무나 힘든 어려움에 부딪혀서 성공하지 못했으나 다른 버뮤다 이주민들이 계속 이곳으로 왔다. 뉴프로비던스섬에는 1656년 정착이 이루어졌다. 1670년경 바하마 제도는 앨버말 고아작과 5명의 귀족영주 식민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곳에 관심이 없었고, 정착은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해적행위를 하며 생활했다. 1717년 다시 왕권에 귀속된 후 영국 왕실은 해적행위를 없애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국왕이 보낸 초대총독인 W. 로저스가 해적행위를 막는 데 성공했으나, 자신의 희생도 컸다. 영국에서 재정·군사 지원이 거의 없었으므로 빈곤한 상태에 있었고 스페인의 공격을 받기 쉬웠다.

 

1776년 미국 해군이 며칠 동안 점령했고 1782년부터 거의 1년 동안 스페인이 장악했다가, 1783년 영국으로 넘어갔다. 왕실 신하들과 이들이 소유한 노예들로 인구가 늘어났으나, 미국 독립전쟁이 끝나자 노예들은 미국으로 도망갔다. 한때 목화농장이 성공해 번영했으나 토양이 고갈되고 1834년 노예가 해방되자, 고질적인 가난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후 미국의 남북전쟁중 바하마에 밀항자들이 몰려들었던 1861∼65년과, 미국에서 금주법을 시행하던 때 바하마에서 밀조주 사업을 한 1920∼33년의 2차례에 걸쳐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이것은 오래가지 못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관광업이 발달하면서 비로소 지속적으로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흑인들의 정치적 대표자가 있어야 한다는 필요에 따라 결성된 PLP가 1967년 정부를 구성했다. PLP는 인종차별을 종식시키고 바하마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결과 1973년 독립을 이룩했다. 독립 후 바하마 정부는 아우트 섬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마약거래와 수많은 아이티 난민의 불법입국문제 등에 직면해 있다.

 

<자메이카> 영국의 식민지

 

공식명칭 : 자메이카(Jamaica)
인구 : 2,667,000
면적 : 10,991
수도 : 킹스턴
정체·의회형태 : 입헌군주제, 양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영국 국왕/ 총리
공식 언어 : 영어
독립년월일 : 1962. 8. 6
화폐단위 : 자메이카달러(/Jamacia dollar/J$)

서인도 제도에 속하는 섬나라.

쿠바에서 남쪽으로 145km 떨어져 있으며, 카리브 해 중앙의 주요무역항로들이 지나는 교차로에 자리잡고 있다. 카리브 해 연안국가들 중에서 쿠바 섬과 히스파니올라 섬에 이어 3번째로 큰 섬이다. 길이는 동서로 235km이며 너비는 남북으로 56km이다. 면적 10,991㎢, 인구 2,644,000(2003 추계).

 

1494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세계로 가는 2번째 항해중에 자메이카를 발견했을 때, 이 섬에는 아라와크 인디언이 살고 있었다.

 

아라와크 인디언들은 남아메리카에서 대(大)앤틸리스 제도를 지나 250년경에 이주했으며, 몇 백 년이 지난 후에 자메이카에 도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콜럼버스가 자메이카를 발견한 지 15년 후 스페인 사람들이 이곳을 식민지화했다. 그러나 이 섬에 금이 없는 것을 알고는 곧 실망했다. 그후 자메이카는 스페인의 무관심으로 방치상태가 되었다. 1655년에 이 섬은 영국에 넘어가게 되었다. 17∼18세기에 영국인들은 도망친 노예들에게 계속해서 습격당하고 시달림을 받았다. 이 자유 노예들은 콕핏컨트리라고 불리는 지역을 비롯해서 빽빽한 숲과 산 속에서 무장한 채 조직적으로 활동했다. 영국 해적들은 스페인 배를 습격하고 스페인 함대를 방해하면서 자메이카에 있는 포트로열에서 활동했(→ 색인 : 대영제국).

 

스페인인들로 인해 시작된 노예무역은 영국 통치하에서도 여전히 번창했다. 노예 노동력으로 생산된 설탕은 질이 좋고 양도 점점 증가하자 노예무역은 꾸준히 늘어났으며, 18세기말 자메이카는 주요식민지로 높이 평가받았다(→ 색인 : 노예제).

 

1830년대말 노예제도의 폐지로 대농장체제가 무너지게 되었다. 1866년에 총독이 행정권과 입법권을 장악하면서 영국의 직할식민지 정부 형태가 설립되었다. 1930년대말 무렵 대공황의 결과 영국 직할식민지 체제에 대해 불만이 높아졌다. 그로 인해 자메이카 전역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노동조합이 결성되었으며 자결(自決)에 대한 요구가 늘어났다. 1944년에 제정된 헌법은 양원제의 입법부, 내각제의 행정부, 성인의 보통참정권에 대한 규정을 마련했다. 1959년에 완전한 내정자치권을 획득했으며, 3년 후 영국 연방 내의 독립국이 되었다.

 

 독립 초기에는 자메이카 노동당(Jamaica Labour Party/JLP)이 의회를 주도했다. 1972년 인민국가당(People's National Party/PNP)이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PNP의 카리스마적 지도자 마이클 맨리의 통치 아래 정부는 갑자기 좌익으로 돌아섰으며, 많은 사업이 국영화되었다. 1976년 맨리는 재임되었으나 1980년에 온건 보수주의자 에드워드 시가가 이끄는 JLP가 다시 득세했고, 1989년에는 맨리를 행정부의 수반으로 PNP가 다시 정권을 잡았다.

 

<아이티> 프랑스의 식민지

 

공식명칭 : 아이티공화국(Republic of Haiti)
인구 : 8,808,000
면적 : 27,700
수도 : 포르토프랭스
정체·의회형태 : 과도정부, 양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총리
공식 언어 : 아이티크리올어 ·프랑스어
독립년월일 : 1804. 1. 1
화폐단위 : 구르드(gourde/G)

공식 이름은 아이티 공화국(Republic of Haiti/Repiblik Dayti/R?publique D'Hai?ti).

서인도 제도에 있는 섬나라.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일한 프랑스어권 독립 공화국이다. 히스파니올라 서부의 1/3과 인근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남동쪽으로 약 970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수도는 포르토프랭스이다. 고나이브 만을 사이에 둔 2개의 반도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으로 대서양, 남쪽과 서쪽으로 카리브 해에 면해 있고 동쪽으로 도미니카 공화국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면적 27,700㎢, 인구 7,528,000(2003 추계).

 

1492년 콜럼버스가 히스파니올라 섬을 항해하기 이전의 아이티 역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16세기말 토착 인디언인 아라와크족은 일하다 죽거나 병으로 죽거나 또는 스페인인들에게 몰살당해서 대다수가 멸종한 상태였다. 당시 스페인 정착촌은 대개 섬 동쪽 끝부분에만 드문드문 있었다.

 

케이맨 제도에 기지를 둔 프랑스 해적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섬의 서쪽 끝부분을 장악해서 재배농장을 세우기 시작했다(→ 색인 : 프랑스사). 1644년에는 북서쪽에 포르드페를 세웠으며 곧 프랑스 서인도회사가 나서서 포르드페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1697년 프랑스는 히스파니올라 섬의 서쪽 부분을 생도미니크라고 새로 이름 붙였다. 18세기 동안 이 식민지는 상당한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섬의 해방'노예들이 프랑스의 통치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켰고 1804년 원래 아라와크어인 아이티라는 국호 아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반란군들은 안정된 정권을 수립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장 피에르 보이에가 통치했던 1813∼43년을 제외한 19세기 동안 이 나라는 암살과 혁명으로 얼룩진 정권교체를 계속 경험해야 했다. 보이에 정권이 전복된 이후 쿠데타와 암살이 다시 벌어졌다. 20세기초 미국은 아이티에 대한 광범한 통상 특권을 얻어냈고 1915∼34년까지 해군을 주둔시켰다(→ 색인 : 미국사) .

 

이 부대가 철수한 후 아이티는 국내의 정치불안뿐만 아니라 도미니카 공화국의 적대행위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후 1957년 '파파 독'이라 불리던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는 '통통 마쿠테'라는 친위부대를 편성하여 그의 반대자들을 진압하고 종신 대통령직을 고수했다. 경제적 쇠퇴, 계속된 국내 불안, 도미니카 공화국과의 불편한 유대관계 등에도 불구하고 뒤발리에는 1971년 죽을 때까지 독재정치를 했다. 그후 '베이비 독'이라 불리는 그의 아들 장 클로드 뒤발리에가 권력을 계승했다.

 

장 클로드의 통치기간에도 아이티의 경제적 불균형, 정치적 탄압, 타락한 정치관행 등이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러나 1986년 널리 퍼진 국민의 불안은 반정부 시위로 표출되었고 장 클로드는 축출되었다. 그러나 이어서 일어난 민주적 정치개혁의 실패로 여전히 군부통치하에 있다가 1990년 12월 6일 대통령 선거에서 가톨릭 신부인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가 민간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는 해방신학 신봉자여서 외국자본 도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도미니카> 스페인의 식민지

 

공식명칭 : 도미니카공화국(Dominican Republic)
인구 : 9,021,000
면적 : 48,671
수도 : 산토도밍고
정체·의회형태 : 공화제, 다당제, 양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 대통령
공식 언어 : 스페인어
독립년월일 : 1844. 2. 27
화폐단위 : 도미니카페소(Dominican peso/RD$)
국가(國歌) : Himno Nacional ("National Anthem")

(영) Dominican Republic.

서인도제도에 있는 독립국.

히스파니올라 섬의 동부 2/3와 이웃한 몇몇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남동쪽으로 1,080km 떨어진 지점, 대서양(북쪽)과 카리브 해(남쪽)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서인도제도에서 쿠바 다음으로 큰 나라로 수도는 산토도밍고이다. 히스파니올라 섬 서부지역의 1/3을 차지하는 아이티를 서쪽 경계로 하며, 동쪽으로는 모나 해협을 사이에 두고서 푸에르토리코와 마주보고 있다. 면적 48,671㎢, 인구 8,716,000(2003 추계)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 시대의 히스파니올라 섬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1492년 콜럼버스가 도착했을 때 이 섬에는 남아메리카에서 이주해 온 카리브인들이 온순한 아라와크(또는 타이노)족을 약탈하며 살고 있었다. 콜럼버스는 대서양 쪽 북부 해안에 식민지를 세웠지만 원주민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2번째 항해 때 북부 해안에 또다른 식민지를 건설했으나 곧 유실되었고, 카리브 해안에 산토도밍고가 세워졌다.

 

히스파니올라 섬의 스페인 식민지는 번창했지만 1550년 무렵 멕시코와 페루가 큰 발전을 이루면서 소홀하게 되어 이후 3세기 동안 가난한 변두리 식민지로 방치되었다. 1697년 공식적으로 섬의 서부 1/3이 프랑스로 할양되었다. 나중에 독립국 아이티가 된 이 지역에서는 흑인노예의 노동으로 사탕수수를 생산하는 식민지가 성했다.

 

1795년 히스파니올라 섬 전체가 프랑스에 넘겨졌으나 1809년 동부 2/3는 스페인으로 되돌아왔으며 이 식민지가 1821년 도미니카 공화국으로서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건국하고 몇 주일 지나지 않아 아이티군의 침략을 받았고 1844년까지 점령된 상태로 있었다.

 

그후 도미니카 공화국은 잠깐씩 민주정부가 들어선 것을 제외하면 줄곧 독재 세력의 통치 아래 있었다. 혁명기간 동안 2차례(1916∼24, 1965∼66) 미국이 개입하기도 했다. 1930년 정권을 잡은 라파엘 트루히요가 1961년 암살될 때까지 절대적인 통치권을 행사했다. 1966년 호아킨 발라게르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78년까지 봉직했는데, 그의 보수정부는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78년에 처음으로 야당 후보자인 안토니오 구스만 페르난데스에게 평화적인 정권이양이 이루어졌다. 1980년대초에는 파업과 시위가 격화되어 도미니카 공화국 보안군이 무력으로 진압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1982년 실시된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에서 우세당인 도미니카 혁명당의 온건 좌익주의자 살바도르 호르헤 블랑코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좌경화 양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의 내핍정책은 악평만 남긴 채 별다른 성과없이 실패했고 이에 따라 1986년 발라게르가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대통령직을 맡게 되었다.

 

<푸에르토리코> 미국 자치령

 

공식명칭 : 푸에르토리코연방(Commonwealth of Puerto Rico)
인구 : 3,927,000
면적 : 9,104
수도 : 산후안
정체·의회형태 : 미국과 연합한 자치연방제, 양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미국 대통령/ 총독
공식 언어 : 스페인어·영어
독립년월일 : ?
화폐단위 : 미국달러(U.S.$)

공식 이름은 Estado Libre Aso-ciado de Puerto Rico/Commonwealth of Puerto Rico.

서인도제도에 있는 미국 자치령.

북(北)카리브 해 서인도제도의 섬들 중앙에 있다. 수도는 산후안이다. 대체로 직4각형 모양으로 동서로 약 179km, 남북으로 약 64km 뻗어 있으며, 동쪽 해안 앞바다의 비에케스 섬과 쿨레브라 섬도 포함한다. 미국 플로리다에서 남동쪽으로 약 1,600km 떨어진 곳에 있다. 면적 9,104㎢, 인구 3,879,000(2003).

 

 

서인도제도에 있는 미국 자치령.

푸에르토리코의 초기 주민은 플로리다 남부와 남아메리카 오리노코 강 유역에서 이주해온 이주민들이었다.

 

1493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 섬에 도착했을 때 이곳에는 유순한 아라와크 인디언이 호전적인 카리브 인디언에게 시달리며 살고 있었다. 1508년 후안 폰세 데 레온은 카파라 마을을 세우고 처음으로 금을 채굴하고 농사를 지으려는 시도를 했다. 16세기말 동안 영국인과 네덜란드인의 공격 때문에 스페인은 섬에 견고한 요새를 세웠으나 18세기말까지 푸에르토리코는 대체로 경제적으로 미개발 상태에 있었다. 1830년 이후부터 사탕수수·커피·담배 등의 3가지 수출농작물에 바탕을 둔 플랜테이션 경제가 점차 발달했다. 19세기말 푸에르토리코는 정치적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1897년 스페인으로부터 자치정부의 방대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듬해 미국-스페인 전쟁 동안 미국군이 푸에르토리코를 점령했으며, 전후 푸에르토리코는 미국에게 양도되었다.

 

 초기에 미국정부는 스페인 치하에서 자치권을 얻기 위해 투쟁했던 많은 푸에르토리코인의 원성을 사면서 푸에르토리코와 그 주민들을 미국화하려고 시도했다. 1917년 제한된 자치정부가 승인되었으며, 푸에르토리코 주민은 미국 시민이 되었다.

 

1930년대 푸에르토리코의 정당은 섬의 향후 위상에 대해 독립을 지지하는 쪽과 미국의 주로 편입되는 것을 지지하는 쪽으로 나누어졌다. 1946년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최초의 푸에르토리코 원주민 총독을 임명했다. 1948년부터 국민투표로 총독을 선출했고, 1952년에는 정식으로 푸에르토리코 연방이 성립되었다. 1940년대부터 1960년대말까지 푸에르토리코 경제는 농업을 바탕으로 하는 경제에서 노동집약적 제조업에 기반을 둔 경제로 변모했다. 노동자들은 사탕수수 밭과 커피 농장을 떠나 사회 서비스와 근로 조건이 좋은 도시로 이주해갔다.

 

푸에르토리코의 독립운동은 트루먼 암살 시도와 미국 의회에서의 저격소동 등 미국 내에서의 산발적인 테러 행위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1970, 1980년대 이후 중요한 정치적 쟁점은 독립 문제가 아니라 연방의 위상을 유지할 것인가 또는 미국에서 완벽한 주의 위치를 확보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소안티야스 : 기타 작은 많은섬>

(트리티나드토바고,바베이도스,그라나다 )

 

아메리카 대륙을 구분할 때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혹은 라틴아메리카로 분리한다.

 

하지만 중미와 서인도제도(콜롬부스가 죽을때까지 인도라고 믿고싶었던 섬제도)를 별도로 분리하는 것은 북미(미국,캐나다,멕시코)국가들의 우월성으로 선을 긋고자 함도 있는 것 같다.

 

흔히 중미7개국: 과테말라,온두라스,벨리스,산살바도르,코스타리카,니카라구아이,파나마를 지칭하며,

 

서인도제도는 안티야스제도로 일컬어지는데 대안티야스(바하마제도,쿠바,자메이카,아이티,도미니카공화국) 기타 작은 많은섬(트리티나드토바고,바베이도스,그라나다등)들은 소안티야스라고 일컫든다.

 

이중 중미상품은 과테말라,온두라스,코스타리카,파나마 4국과 대안티야스섬의 쿠바와,도미니카공화국을 여행하는 상품이다.

 

후기마야 선고전기의 유적중 대표적인 4곳의 유적은 멕시코서부의 팔렌케, 유카탄반도의 칸쿤에서 멀지않은 치체이사의 유적이며, 과테말라 동부의 페테지방의 정글속의 티칼유적, 그리고 온두라스와 과테말라의 경계에 있는 산타로사 데 코판(Santa Rosa de Copan)의 유적으로 알려져있다.

 

이중 티칼과 코판이 주요 관광이되며, 이집트의 수많은 상형문자와 마야의 상형문자를 비교해보는 것도 관광의 하나의 재미가 아닐까 한다.

 

과테말라의 옛거대도시였던 안티구아는 1700년대 대지진과 화산으로 무너졌던 흔적과 현재의모습이 잘 대비를 이루는 페루의 쿠즈코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곳이다. 과테말라시티는 아마도 유일하게 도시의 관광지도에 나오는 숫자를 마야어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도시가 아닐까싶다.

 

코스타리카, 태평양연안과 카리브해를 동,서해에 두고 있는 중앙에는 우아한 화산이 이어진 산맥이 있다

많은 국립공원과 자연보호구를 가지고 있어, ‘’중미의 화원이라 일컫는 이나라는 환경보호에 있어서도 선진국이다. 아직 도시는 선진국의 면모를 보이지 못하지만, 중미7개국중 가장 잘사는 나라로 그 커피향이 말해주는 것 같다.

 

파나마운하 남미와 북미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대공사다. 불과 100년전에 이루어졌고, 독특한방식(Elevating 방식)으로 많은 배들을 이끄는 모습과, 태평양과 대서양에 오전,오후 교대로 대기하는 수많은 배들의 모습에서 실질적인 세계의 물동량의 흐름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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