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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由 揭示版 스크랩 체코 프라하, 로레타 성당을 거쳐 명사들 묘지가 있는 비셰흐라트로
교회와 수아람 추천 0 조회 189 12.06.11 17: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8. 6/03 토 Praha (보행 11.4Km, 16,300보)

 

아침 일찍 2층 거실에 내려가니 옆방 여학생이 벌써 컴퓨터에 앉아 작업 중이다. 배낭여행 중인 대학생 정도의 나 어린 두 사람인데 지난밤 보이지 않던 것이 필수 코스인 인형극 돈 조반니를 구경한 모양이다. 늦게 돌아 왔을 텐데 새벽부터 어제 찍은 사진을 올리는 중이라니 실시간으로 여행수기를 쓰고 있는 듯, 무척 부지런하다. 프라하가 며칠 예정이냐고 물으니 3박4일이라고 한다. 같은 사흘을 자면서 젊은 사람은 나흘을 구경하지만 우리는 3박2일로 꼬박 이틀의 관광이다. 시간을 파악하는 개념이 다르다. 저녁에 도착하고 아침에 떠나는 우리 여행습성이 밤차를 이용하는 배낭여행과 다른 것이 원인이겠지만 앞, 뒤에 걸치는 이틀을 도중 탐승에 쓸 수 있으니 말짱 손해라고만 볼 수도 없다. 여행이란 도달하려는 가치이상으로 그 과정에도 보람이 있는 것이다.

다른 방에 들어 있는 남자 둘은 게을러 아직도 한 밤중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날씨가 좋다. 주인아주머니가 앞으로는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면서 일기예보에서 들었다고 한다. 여행을 시작한 이래 잠깐씩이긴 하지만 거의 매일 지겹게 비가 내렸다. 우리가 알지 못했을 뿐이지 5월 한 달은 우기인지도 모르겠다.

아줌마가 차려준 아침밥을 먹고 10시에 집을 나선다. 오늘은 트램을 타고 프라하 성 근처로 올라가 어제 보지 못한 로레타 성당(Loreta)과 스트라호프 수도원(Strahovsk? kl??ter)을 구경한 다음 블타바 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체코 명사들의 묘지가 있는 옛 성터, 비셰흐라트(Vy?ehrad)까지 다녀올 계획이다.

데디나정류장에서 119번 버스를 기다리던 중 어제 만난 한국아가씨가 옆집에 묶고 있는 일행과 나타나 서로 인사를 교환하고 마침 당도한 버스에 함께 오른다. 직장 출장길에 주말을 이용하여 프라하에 들렀다는 어린 아가씨와 짬을 내 여행 중인 중년의 KAL 파일럿부부가 동행이다.

부근에 샤르카(Divok? ??rka)라는 볼만한 절벽이 있다고 들어 숙소 아저씨에게 길을 알아놨는데 잠깐 보고 가겠다고 했더니 일행이 모두 따라 나선다. 두 번째 정거장인 맥도날드 햄버거 앞에서 내려 북쪽으로 난 급한 사면을 내려간다. 옛날 이 일대를 통치하던 여인 족이 비셰흐라트의 남자 족과 싸워 위급한 처지에 몰렸는데 여 전사 샤르카가 스스로를 나무에 묶고 적의 장수 츠티라트(Ctirad)를 유인하여 술로 잠재운 후 살해한다. 그러나 이미 사랑에 빠져버린 샤르카가 슬픔을 못 이겨 절벽에서 몸을 던졌고 결국 패망한 여인 족의 뒤를 이어 프르제미슬 왕조가 생겨난다는 전설의 그 무대다. 샤르카의 전설은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 제3곡의 표제로도 묘사돼 있다.

쉽게 보고 가리라 예상했는데 500m 정도 걸으니 앞에 꽤 높은 바위산이 막아서며 고개를 오르는 사람만 멀리 보이는 것이 절벽은 그 너머에 있는 모양이다. 아침부터 등산으로 힘을 써버리면 오늘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아 잠시 생각한 끝에 여기서 후퇴하기로 결정한다. 기운이 왕성한 부부 두 분은 온 김에 절벽을 보겠다며 산으로 계속 오르고 아가씨 두 사람과 우리는 되돌아 큰길로 나온다. 도중 돌아보니 멀리 산 위에서 콩알만 한 두 사람이 손을 흔든다. 프라하 다녀가는 한국 관광객은 엄청 많지만 샤르카 절벽을 거친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경치가 어떠했는지 그 후 얘기를 알지 못해 궁금하다.

데이비츠카까지 버스로 나가 지하철 A선으로 환승한다. 우리는 두 번째 정거장 말로스트란스카에서 내려 트램으로 바꿔 타고 성 지구, 흐라트차니로 바로 올라갈 생각이다. 두 아가씨도 같은 트램으로 언덕을 올라 프라하 성부터 구경을 시작하고 소지구와 카를 다리로 내려가면 힘이 덜 들 것이라는 의견에 동의해 같이 가기로 한다. 불운은 거기서 싹이 텄다.

전철을 내려 역 입구로 걸어 나오는데 개찰구 밖에 지키고 있던 두 명의 검표원이 막아서더니 차표를 보자고 한다. 이로써 고속도로 통행권이나 차표 단속을 모두 겪어보는 셈인데 고속도로 위나 전철 안 보다는 나오는 길목을 지켜 점검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우리 둘과 어제 아가씨는 무난히 통과했는데 오늘 처음 나온 아가씨에 문제가 생겼다. 표는 가지고 있었지만 펀칭 기계로 시간을 찍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 타는 전차라 몰랐다며 사정을 해 보지만 단속이 직책인 사람에게 통할 리 없다. 아가씨는 영어를 잘 한다. 조용한 곳으로 같이 가 대화를 하더니 한참 만에 돌아온다. 젊은 여자라 혹시 봐주지 않을까 희망을 가졌는데 소용이 없었다. 가지고 있던 표를 회수하고 벌금 500코루나를 징수한 후 1시간 유효한 새 차표를 끊어줬다고 한다. 침울해진 기분으로 걸어가다 돌아보니 아가씨가 울고 있다. 원인을 제공하고 도와주지 못한 것이 미안해 위로를 했더니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괜히 속이 상한다며 웃어 보인다.

어떤 인생에도 비는 온다. 나의 보물은 내 아픈 곳에 놓여있다고 한다. “돈은 빼앗길 수 있지만 지식은 뺏기지 않는다.” 탈무드에 있는 말이다. 벌금은 뺏길 수 있어도 추억은 뺏기지 않을 것이다.

23번 트램을 타고 이리저리 굴절하며 비탈을 올라간다. 발아래 넓어지는 도시가 여러 각도로 방향을 바꾸며 특유한 형상으로 입체화돼 나간다. 언덕길의 운행은 시야 따라 연속으로 생산되는 변화가 예측할 수 없어 즐겁다. 성 근처 프라스니 다리(Pra?n?ho mostu)에서 같이 간 두 여인이 내리고 우리는 한 정거장을 더 가 포호르젤레츠(Poho?elec)에서 하차한다. 잔디밭에 서있는 티코 브라헤와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의 동상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6분의를 들고 있는 쪽이 브라헤다. 덴마크의 천문학자 브라헤는 한 때 프라하에 살며 천체 망원경이 없던 시절, 육안으로 행성 운행을 정밀 관측한 것으로 유명하다. 어제 들렀던 틴 성당에 그의 무덤이 있다. 그 성과에 의거 독일인 제자 케플러가 도출한 ‘케플러의 법칙’이 뉴턴역학의 기초를 이룬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광장 남쪽이 스트라호프 수도원이다.

1140년에 창건돼 1950년 사회주의 체제에서 폐지될 때 까지 800년을 이어온 수도원은 높다란 언덕 위에 자리를 잡고 말로스트라나를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다. 여러 번의 전란을 겪으면서도 중세 이래의 장서 12만5천권을 소장하고 있는 도서실과 곡면천정의 프레스코화가 유명하다. 미로, 피카소, 뮈샤 등 작품으로 알려진 화랑이 있어 기대가 컸는데 오늘 따라 결혼식이 있어 내부 공개를 하지 않는다. 고관 아니면 귀족 집안인 듯 처음 보는 초호화판 혼례다. 아카데미시상식에 입장하는 스타들같이 차려입은 귀빈이 쌍쌍이 도착해 식장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며 수군거린다.

 

 

 

주변에 서있는 몇 대의 롤스로이스가 분위기에 위엄을 더한다. 공산체재를 겪으면서도 상류계급의 명맥은 유지됐던 것일까? 프랑스 철학자 이폴리트 텐(Hippolyte Taine)이 말한 대로 3주간 그들은 서로를 연구하고 3개월 사랑하다 3년을 싸운 후 30년 참고 지내는 과정을 오늘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애들이 똑 같이 되풀이 하는 인생, 상층사회라고 조금도 다를 리 없을 것이다.

수도원 동쪽 스트라호프 정원(Strahovsk? zahrada)으로 돌아나가 말라스트라나에서 카를 다리, 구시가 쪽으로 멀리 흐려지는 프라하를 내려다본다. 높고 낮은 붉은 기와, 백색과 마리아테레지아 옐로의 외벽, 정면에 보이는 TV 타워, 수많은 교회의 바늘 탑과 청동지붕이 햇빛과 바람 속에 그대로 관광포스터다. 역사의 시공간이 증발하지 못한 채 미로 같은 골목 구석구석 앙금으로 얽히고 중세의 낭만이 프라하 마법에 걸려 다리 밑에 숨어있을 것만 같다. 오른편에 1891년에 세웠다는 에펠탑과 비슷한 페트르진(Pet?insk?)탑이 60m 높이로 솟아있는데 이곳 전망으로도 흡족하여 언덕을 거쳐 올라야 할 299단 층계의 고행을 절약하기로 한다.

북쪽으로 밋밋한 언덕을 로레타 성당을 향해 걸어 내려간다. 얀 후스의 종교개혁 이후 구교도와 신교도의 대립이 계속되자 구교의 승리를 기원하며 1626-31년에 카테리나 로브코비츠(Kate?ina Lobkowicz) 남작부인이 세운 성당이다. 천사장 가브리엘이 마리아 앞에 나타나 예수 잉태를 예언한 곳이 산타카사(Santa Casa)라 불리는 ‘성모의 집’이다. 전설에 의하면 나사렛(Nazerat)에 있던 성모의 집은 1291년 터키 침공을 피해 네 천사에 들려 하늘을 날아 1294년 이탈리아 로레토로 옮겨진다.

프라하의 로레타 성당은 지오반니 오르시(Giovanni Orsi)가 건설한 후 크리스토프 디엔첸호퍼에 의해 규모가 확대됐는데 마당 중앙에 ‘산타카사’라는 독특한 예배당을 세우면서 이탈리아에 있는 산타카사의 원본을 그대로 재현시켜 로레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1664년부터 1740년 사이, 성당에는 수도원과 6개의 예배당이 추가되고 47개의 천장 벽화가 그려진 회랑이 들어섰으며 그 전면에 바로크식 건물이 세워져 현재와 같은 아름다운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을 상징하는 금빛 테두리의 하얀 시계탑에는 크고 작은 27개 편종(carillon)이 매달려있으며 매시 정각에 천 번씩 성모를 경배한다는 내용으로 된 ‘마리아의 노래’를 사방으로 울려 보낸다.

 

 

 

12시15분, 한사람 90코루나의 입장료를 내고 현관으로 들어가니 반듯한 네모의 중정이 앞에 보인다. 곱게 가꾼 잔디 중앙에 30평정도 되는 상자모양의 산타카사가 묵직하게 앉아있고 그 양쪽에 천사들이 조각된 분수대가 놓여있다. 뜰을 둘러싸고 붉은 기와 2층의 아치 회랑이 사방으로 돌아갔는데 둥근 천정에는 프레스코화가 가득 그려져 있고 고해성사대 같은 기도 석이 여러 개 벽에 붙어 놓여있다. 네모꼴 회랑의 중간과 귀퉁이마다 예배당이 있으며 산타카사의 뒤가 되는 현관 건너편으로 돌아가니 현란한 장식의 예수 강림성당이 나타난다. 자료를 찾다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바로크 양식으로 꾸며진 성당 내부에는 특별한 볼거리가 있다. 옷을 차려입고 밀랍을 쓴 두 스페인 성인 펠리키시무스 (Felicissimus)와 마르치아(Marcia)의 시신이 제단 옆에 있는 것이다. 유심히 보기 전에는 그것이 유해인지 눈치 채지 못한다.

회랑 전면, 남쪽 모서리에 자리 잡은 ‘슬픔의 성모 마리아’ 예배당에는 수염을 기른 채 십자가를 진 여인의 조각상이 있다. 공주였던 이 여자는 이교도와의 결혼을 모면코자 기도를 드려 얼굴 가득 수염이 돋았는데 분노한 아버지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한다. 2층으로 올라가면 널리 알려진 보물전시실이 있으며 입구에 은행금고 같은 철문이 달려있다. 도난을 염려하여 설치한 모양이지만 바로크로 조화된 분위기에 갓 쓰고 자전거 탄 듯 거슬리고 어울리지 않는다. 안으로 들어가니 왕관, 보관을 비롯하여 금, 은, 보석으로 꾸민 예배용 성구가 여기저기서 오색영롱한 빛을 반사한다. 그 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이 6,222개의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프라하의 태양’이라는 이름의 성체현시대(Monstrance)다. 콜로브라트(Ludmila Kolowrat) 백작부인이 자신의 드레스에 박혀 있던 보석을 기증하여 1699년에 제작했다는 12Kg의 이 성채대는 이름 그대로 태양 같은 황금 빛살을 사방으로 뻗치며 주변을 압도한다. 붉고 푸른 에나멜로 성화를 그려 넣은 은도금 성배도 뛰어난 작품이다. 내부는 산진촬영이 금지돼 있으며 빤한 공간에 감시가 심해 한 치의 빈틈도 잡을 수 없다.

 

 

 

뜰로 내려와 성스러운 하얀 집, 산타카사를 둘러본다. 커다란 석관처럼 중정 한가운데 반듯하게 좌정한 성전은 문 이외의 부분이 철저하게 막혀있다. 사방 외벽 면에는 어린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생애, 산타카사가 옮겨지는 장면 등을 묘사한 스타코(stucco) 부조가 입체감 두드러지게 양각돼있어 장중한 기운이 주위에 감돈다. 내부에는 은으로 된 제단이 있고 한쪽에 보리수로 만든 로레타의 검붉은 성모상이 보일 뿐 간소한 꾸밈이다. 건물 아래에는 설립자이자 후원자인 로브코비츠 가문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로레타 성당의 방문을 마치고 포호르젤레츠 정류소로 돌아 나와 트램을 타려는데 어디서 표를 파는지 알 수가 없다. 길가 구멍가게에서 물어보니 앞에 있는 호텔에 가보라고 한다. 뜻밖에도 그럴듯한 호텔 프런트에서 전차표를 팔고 있는 것이었다. 20코루나 표만 있다고 해서 두 장을 구입한다. 오늘이 주말이라 이 표는 90분간 유효하다.

13시, 23번 트램을 타고 언덕을 내려간다. 멀리 보이던 거리와 건물이 차차 접근하며 아침에 출발한 말로스트란스카에 돌아온다. 옆에 있는 잔디공원에 삼색기의 조각이 보여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전쟁 기념비라고 한다. 꽃다발을 놓고 시민 몇 사람이 조촐한 행사를 벌이고 있다.

 

 

 

트램의 노선은 지도에서 손쉽게 찾을 수 있다. 18번 트램으로 환승하고 카를다리 하나 하류에 걸려있는 마네수프(M?nes?v)다리로 블타바 강을 건넌다. 왼쪽으로 보이는 커다란 건물이 체코 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본거지이자 음악 축제 ‘프라하의 봄’ 이 개최되는 루돌피눔(Rudolfinum)이다. 1884년 요제프 지테크(Josef Zitek)의 설계로 완공된 신 르네상스 양식의 극장으로 작곡가 드보르작(Anton?n Dvor?k)을 기념하는 드보르작 홀과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수크(Josef Suk)의 이름을 딴 수크 홀이 있으며 건물 앞에 팔자수염의 드보르작 동상이 서있다.

1841년 보헤미아에서 태어난 안토닌 레오폴트 드보르작(Anton?n Leopold Dvo??k)은 향토색 풍부한 애환서린 선율로 관현악과 실내악 곡을 남긴 후기낭만파의 체코 작곡가다. 브람스에 재능을 인정받고 슬라브 무곡 집으로 명성을 얻은 후 활동무대를 서유럽으로 넓혀갔다. 영국을 자주 방문하여 환영을 받던 중 1892년에 뉴욕 내셔널음악원 원장으로 초빙되어 도미하고 다음해 미국 인디언 음악과 흑인영가에 조국 보헤미아의 정서를 담은 교향곡 9번 ‘신세계’를 작곡한다. 드보르작 음악이 특히 사랑을 받는 원천은 슈베르트와 비견되는 감미롭고 친숙한 그 멜로디에 있다. 신세계 제2악장 라르고, 첼로협주곡 B단조, 현악4중주곡 제12번 ‘아메리카’ 그리고 피아노곡 ‘유모레스크’ 등이 그 대표적인 실례다. 누구나 쉽게 입에 올리는 가락, 요 며칠 본바닥 벌판을 달리며 되풀이 들은 덕에 그 매력이 더욱 새로워진 느낌이다. 1895년 참을 수 없는 향수에 사로잡혀 자신이 있어야 할 땅 보헤미아에 돌아 온 드보르작은 1904년 4月 지병인 요독증이 재발하여 63년의 생애를 마친다. 장례는 국장으로 성대히 치러졌고 그의 몸은 이제부터 우리가 찾아가는 비셰흐라트 묘지에 고이 묻혔다.

마네수프다리를 건너면 얀 팔라흐 광장이다. 1945년 프라하 해방 전투에서 희생된 소련병사를 기려 붉은 군대 광장(N?m?st? Krasnoarmejc?)이라 불리던 이곳은 벨벳혁명 후 자유를 위해 분신한 대학생을 추모하여 얀 팔라흐 광장(N?m?st? Jana Palacha)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광장의 동북일대가 유대인 구역인 요세포프(Josefov)로 귀에 익숙한 예전 게토(Ghetto)가 있던 곳이다. 유대교회 시나고그(Synagoga)와 12,000이 넘는 묘가 있다는 세계적으로 흔치않은 규모의 유대인 지구, 박해를 받으면서도 독자적 공동체를 지켜온 색다른 분위기도 한번 느껴보고 싶었는데 시간을 낼 수 없어 그대로 통과한다.

 

 

 

18번 트램은 팔라흐 광장에서 우로 꺾여 블타바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300여m 떨어진 카를 교 동탑을 잠깐 만에 지나 그 옆 스메타나 박물관(Museum Bed?icha Smetany)이 있는 정거장에서 내린다. 비셰흐라트까지 다녀오는 시간을 대중할 수 없어 박물관 내부를 볼 여유는 없으나 그 앞에 있는 스메타나의 동상이라도 보고 가려는 생각이다.

베드르지흐 스메타나(Bed?ich Smetana)는 1824년 보헤미아 리토미실에서 태어난 체코 근대 음악의 아버지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에 뛰어나 연주자가 되려는 꿈을 품었으나 1848년 혁명운동에 가담한 것을 계기로 체코슬로바키아 해방을 향한 작곡가로서의 역할을 자각한다. 1856년부터 5년간 지휘자로 머물던 스웨덴에서 돌아와 민족운동의 선두에 서서 작곡가, 지휘자, 평론가로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1863년 발표한 오페라 ‘팔려간 신부’(Prodan? nev?sta)가 큰 성공을 거두자 음악학교를 설립하고 국립극장 지휘자로도 의욕적으로 참여한다. 1874년 50의 나이에 환청이 악화돼 귀가 들리지 않게 되지만 작곡활동은 계속하여 대표작 ‘나의 조국’을 완성한다. 그러나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심혈을 기울여 성취한 그 교향시의 연주를 끝내 자신의 귀를 통해서는 듣지 못했다. 1883년 말부터는 정신착란 증세까지 나타났으며, 프라하의 정신병원에 수용된 후 1884년 불운한 상태로 한 평생을 마감했다. 만년은 순탄치 못했으나 스메타나는 체코 민족색을 표현한 최초의 작곡가이자 국민악파의 시조로 절대적인 존경을 받고 있으며 보헤미아의 선율을 세계로 넓힌 드보르작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교향시 ‘나의 조국’은 체코의 정감을 풍부하게 담아 웅장하면서도 격정적으로 민족의식을 북돋우고 국적에 상관없이 듣는 이 모두에게 조국에 대한 사랑과 자긍심을 심어준다. 그 중에서도 제2곡 '블타바'는 국토를 어루만지듯 굽이쳐 흐르는 강을 아름답게 묘사한 명곡이다.

- 곡은 블타바 최초의 작은 샘, 차고 맑은 원류에서 시작한다. 두 가닥 흐름은 하나로 합쳐지고 바위에 부딪쳐 맑은 소리를 내며 햇빛을 받아 폭을 넓힌다. 강은 사냥꾼 뿔피리 울리는 숲을 빠져 가을걷이와 혼례로 활기 찬 전원을 흐르고 달빛 밝은 밤, 고성 그늘을 지날 때는 '물의 요정'들이 모여 춤을 춘다. 아침에 흐름은 빨라져 성 요한의 급류에 물보라로 떨어지고 큰 흐름으로 바뀐 블타바는 거룩한 옛터 비셰흐라트에 인사를 보내며 서서히 프라하를 떠나 장대한 엘베 강으로 흘러내린다. - 스메타나 스스로가 풀이한 해설의 요약이다. 매년 스메타나가 서거한 5월12일부터 3주간 개최되는 음악 축제 ‘프라하의 봄’에서는 체코음악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교향시 ‘나의 조국’을 연주하면서 그 막을 올린다.

 

 

 

카를교 남측, 블타바강으로 약간 돌출한 노대 끝에 서있는 박물관은 1936년 개관한 르네상스 양식의 갈색 건물이다. 내부에는 악보, 악기, 편지와 사진 등이 전시돼 있으며 남쪽 테라스에 가운을 걸친 작곡가의 조각상이 상류, 비셰흐라트를 보고 앉아있다.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모습의 스메타나를 중심으로 별로 넓지 않은 노천 레스토랑이 둥글게 자리를 잡고 있는데 동상에 붙어있는 식탁도 있을 만큼 자유로운 분위기다. 강물이 흘러내리는 카를교의 옆모습이 잘 보인다.

 

다리를 찍고 있던 대학생 또래의 한국 젊은이가 인사를 하며 말을 걸어온다. 우리 숙소 묻는 것을 보니 이틀 지냈다는 민박이 마땅치 않은 눈치다. 인터넷에서 평 좋은 곳을 예약해 왔는데 식사 시원치 않고 샤워는 미지근하지, 냄새까지 나는데다 저녁마다 맥주 파티로 시끄럽다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낯선 타향에서 어찌 내 집 같은 곳을 바랄 것인가? 식도락가가 들으면 화낼 말이지만 집에서는 있는 대로, 여행 때는 주는 대로 먹으라고 했다. 2, 3일 참으면 될 것을 고생을 해보지 못한 청년인 듯하다. 인내는 쓰지만 열매는 달다. 비바람 많이 맞으니 차차 뿌리 깊은 나무로 든든하게 자라겠지.

마침 다가온 17번 트램을 타고 강 동쪽을 따라 남으로 내려간다. 표 하나로 90분 동안은 몇 번을 타도된다. “써!”하고 자리를 양보하는 젊은 사람이 있다. 처음 받아보는 대접이라 순간 당황했는데 서양에도 이런 풍습이 있었구나 하는 발견에 마음이 즐거워진다. 카를 교에서 스메타노보 나브레지(Smetanovo n?b?e??)거리를 따라 약 500m 내려가 섬 위에 걸친 군단(군대)이라는 뜻의 레기(Legii)다리 동쪽을 지난다. 이 도로는 물 위로 곧게 뻗은 것으로 보아 제방위에 축조된 모양이다.

 

왼쪽으로 크게 나타나는 갈색 건물이 ‘체코인에 의한, 체코어로 상연되는 오페라 극장’을 표방하면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하여 1881년에 세운 국립극장(N?rodn? Divadlo)이며 현재 주로 오페라, 연극, 발레의 공연장으로 사용된다. 루돌피눔을 계획한 요제프 지테크에 의해 신 르네상스 양식으로 설계됐으며 옥상 난간에 둘러 선 인물과 동물 조각, 왕관 같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패러핏 등 색다른 인상을 주는 건물이다.

 

블타바 강에 걸린 다음 다리인 이라스쿠프(Jir?sk?v)에서 17번 트램을 내린다.

네거리 남쪽 모서리에 서 있는 새로운 명물, 댄싱 하우스(Tan??c? d?m)로 많이 알려진 나쇼날레 네델란덴(Nationale-Nederlanden)빌딩을 보기 위해서다.

 

 

미국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Owen Gehry)와 그의 체코 동료 블라디미르 밀루닉(Vladimir Miluni?)이 공동 설계한 이 건물은 타임지에 의해 1996년 최고 디자인작품으로 선정된 포스트모던 건축의 걸작이다. 해체주의를 대표하는 프랭크 게리는 모델링과 구조해석에 CAD 등 첨단기술을 사용하여 복잡한 형태를 해결하였다. 평탄한 면이 하나도 없다는 스페인 빌바오(Bilbao)의 구겐하임(Guggenheim)미술관이나 신문지를 구겨놓은 것 같은 MIT 스타타센터(Stata Center) 등 상상할 수 없었던 기상천외의 작품을 실현시킨 건축가다.

건축에 있어 해체주의(Deconstructivism)란, 건물형태의 대칭성, 균형성 등 전통적 구축주의를 비판하면서 1980년대 이후 대두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사조로, 정돈된 형태나 구조는 해체된 다음 분열, 일탈, 비틀림을 거치면서 다시 조립되고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이다. 실행된 설계 보다는 이미지 드로잉정도로 존재하던 것이 1990년 이후 설계기술 발달에 힘입어 많은 경기에서 승리하며 현실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1945년 2차 대전 공습으로 무너진 건물자리에 들어섰다는 이 댄싱빌딩은 아직 파괴에서 복구를 못한 듯 바로크, 로코코의 전통시가 한 복판에 일그러진 도발적 모습으로 서 있다. 유리와 철골로 된 건물은 ‘Fred and Ginger’ 라는 애칭도 갖고 있다. 1930, 40년대 뮤지컬영화를 주름잡던 파트너, 진저 로저스(Ginger Rogers)와 프레드 아스테어(Fred Astaire)의 춤추는 자세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유리벽으로 된 왼쪽은 허리를 질끈 졸라맨 스커트 여인의 모습 그대로이며 남성적인 오른쪽 부분과 대조된다.

파괴, 언밸런스, 미완성으로 흩어지는 형태를 옥상에 만들어놓은 돔 모양의 구조물이 잡아주고 있는 느낌이다. 자극적이면서도 제어된 혼돈에서 나오는 분위기는 10년이 지났어도 부인할 수 없는 참신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다만 해체주의가 인간 본성에 감응하는 근거를 마련하지 못하고 파편이나 뒤틀림 등, 파격적 형태를 쫓는 경쟁에만 급급한다면 단순한 설치미술이나 미완성 실험으로 끝나버릴 우려가 없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건물은 사무실과 상점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전망이 훌륭한 최상층에는 시내에서도 손꼽히는 프랑스 레스토랑이 입주해 있다고 한다.

다시 17번 트램을 타고 강 따라 곧게 뻗은 도로, 라지노보 나브레지(Ra??novo n?b?e??)를 1,000m 정도 남행하여 두 번째 다리인 젤레즈니츠니(?elezni?n? most)에서 내린다. 비셰흐라트 바로 밑에 있는 이 다리는 기차가 통과하는 아치철교로 1901년에 건설된 것이다.

다리를 동쪽 끝으로 따라가다 곧 만나는 교차로에서 오른편으로 갈라지는 블라티슬라보바 (Vratislavova)거리로 들어선다. 주변에는 특이한 아르누보 양식의 집들이 눈에 뜨인다. 언덕진 넓은 길을 약 500m, 크게 돌아 올라가면 전방에 3, 4층은 돼 보이는 높은 담이 나타나 왼쪽으로 길을 따라오다가 마침내 아치문 뚫린 붉은 벽이 되어 눈앞에 마주 선다.

 

 

1841년에 축조된 비셰흐라트 요새의 북쪽 출입구, 치헬나(Ciheln?, 벽돌)문이다. 지하철, 붉은 색의 C선을 타고 비셰흐라트 역에서 내려 동남쪽에서 접근하면 두 개의 문, 타보르(T?bor)와 레오폴트(Leopold)를 거쳐 성내로 들어오는데 이쪽이 정문이고 우리가 지금 택한 트램의 서북 어프로치는 뒷문인 셈이다.

체코 민족의 조상 크록(Krok)의 막내 공주인 리부셰(Libu?e)는 7세기경 프라하의 번영을 예언하며 비셰흐라트 언덕에 터전을 잡았다. 모계 중심의 족장이던 리부셰는 동족사이에 싹트는 불만을 알아차리고 농민인 프르제미슬 집안에서 남편을 골라 수장의 자리를 내주는데 이로부터 프르제미슬 왕가가 형성되고 국가의 기틀이 확립됐다는 것이다. 그 전설은 스메타나의 3막 오페라 ‘리부셰’에 잘 묘사돼 있다. 비셰흐라트는 체코어로 ‘높은 성’을 뜻한다고 한다. 

프라하의 발상지로 전해지는 비셰흐라트지만 그 성은 프라하성보다 1세기 늦은 10세기 후반에 축조되

 

 

었고 두 성채는  근 2세기 동안 별도의 세력을 지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스전쟁 당시 가톨릭파의 거점이었던 비셰흐라트는 1420년 후스교도에게 점령 당해 교회, 왕궁, 주거

 

 

가 철저히 파괴됐으며 세월과 함께 폐허로 변한 후 지금도 원래 모습을 찾지 못한 채 명사들이 고이 

 

 

잠자는 성곽공원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체코 국민의식에 투철했던 스메타나는 교향시 ‘나의 조국’ 제1곡에서 비셰흐라트의 영광과 비애를 절절한 심정으로 노래한다. 

- 전설의 음유시인 루밀(Lum?r)은 바위 위의 성, 비셰흐라트를 바라보며 흘러간 옛날을 노래한다. 그가 뜯는 비파에 실려 영광의 시절, 왕과 기사들이 벌이던 향연의 그림자가 되살아난다. 루밀은 용사들의 경기와 전투의 사연도 읊어 내린다. 승리의 찬가가 울려 퍼지던 그 성채는 수많은 싸움으로 무너져버렸고 고루대각 금빛 왕좌는 산산이 부서진 채 수백 년간 쓸쓸한 황성으로 머물러 있다. 폐허에서 들리는 옛 노래, 루밀의 비파가락은 바람에 실려 멀리 사라져간다. -

역시 스메타나 자신이 붙인 해설이다.

14시30분, 요새 분위기가 짙게 풍기는 검은 문을 통과하여 성내로 들어서자 관리실에서 표를 판다. 한사람 30코루나의 표를 노인 할인 20코루나로 두 장을 사니 잠시 기다리라고 한다. 비셰흐라트 입장권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비셰흐라트의 출입은 돈을 받지 않으며 이 표는 매시간 출발하는 카세마티(Kasematy)라는 인공동굴의 투어용이라고 한다. 시간이 되자 가이드가 창고 같은 철문을 열쇠로 열고 불을 켜며 컴컴한 돌 벽의 지하 동굴로 앞장선다. 1742년 프랑스 점령군에 의해 축조된 후, 확장을 거듭해 2Km에 이른다는 좁은 터널을 직각으로 돌며 300m는 걸었을까 돌연 눈앞이 넓어지며 커다란 방으로 들어선다. 대포를 저장하거나 병사들 집결 장소로 쓰였다는 어스름한 토굴 안에는 장승같은 조각상이 여기저기 놓여있으며 음산하고 생소한 분위기로 가득하다.

 

 

해설을 들으니 골리체(Gorlice Hall)라는 이름의 이 방은 넓이가 330평방미터(100평)에 둥근 아치로 된 천장높이가 13m다. 섭씨 16도로 유지되는 일정한 온도가 유물 보존에 알맞아 1992년부터 카를 교에 있던 오리지널 석상을 옮겨 놓았다고 한다. 땅에서 막 캐낸 듯, 으스스하던 여섯 개의 조각이 갑자기 친근해지며 얼떨결에 끌려든 지하의 탐험이 뜻밖의 행운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요새에 주둔하던 프러시아 군대가 퇴각하면서 지하실에 폭약을 장치했으나 다행히 용감한 세 사람에 의해 미연에 제어됐다는 이야기도 들려준다.

밖으로 나와 푸른 잔디 정원에 놓인 벤치에서 오늘의 점심을 도시락으로 치르고 커피로 마감한다. 옆에 바츨라프의 기마상이 서 있다. 원래 시내 바츨라프 광장에 있던 것을 1879년 이곳으로 옮긴 것이라며 국립박물관 앞 광장 이름은 이 기마상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강으로 면한 서쪽 언덕으로 발을 옮긴다. 바위 위 절벽에 서서 켜켜이 쌓인 역사 곁을 무심히 흘러내린 블타바의 물을 내려다본다. 비셰흐라트에는 꼭 오고 싶었다. 다른 곳은 단순한 구경으로 그치지만 비엔나의 중앙묘지나 이곳은 실재했던 역사적 인격체에 지척까지 접근해 봤다는 관점에서 심정적으로 친숙한 느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강물너머 3Km, 겹쳐 쌓인 붉은 지붕 위로 또 다른 성채 프라하 왕궁의 첨탑이 멀리 보인다.

15시30분, 인접한 묘지로 들어선다. 1869년 조성된 비셰흐라트 묘원(Vy?ehradsk? h?bitov)은 예술가, 과학자, 정치가 등 600명에 이르는 체코 명사가 묻혀있는 마지막 안식처다. 잘 알려진 스메타나, 드보르작, 화가인 뮈샤, 시인 얀 네루다(Jan Neruda), 극작가 카렐 차페크(Karel ?apek), 지휘자 라파엘 쿠벨릭(Rafael Kubel?k) 등이 모두 이곳에 잠들어있다. 약 8000평방미터 묘역에 각양각색의 비석이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빽빽이 서 있고 북쪽과 서쪽에는 경계를 따라 주랑형식의 지붕 씌운 묘들이 놓여 있다. 동쪽 중앙에는 안토닌 뷔흘(Antonin Wiehl) 설계로 1893년 축조된 슬라빈(Slav?n)이라는 큰 규모의 추념비가 있으며 44개의 관이 지하실에 공동으로 안치돼 있다고 한다. 슬라빈이란 낱말을 찾아보니 위인들 영혼을 모신 전당으로 판테온(Pantheon)과 같은 뜻인데 묘지 전체를 슬라빈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찾고 싶은 묘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던 중 한 아주머니가 후문 밖에 번호 적힌 게시판이 있으니 거기서 찾는 것이 빠르다고 일러준다. 동쪽 담장의 작은 문으로 나가 명사의 묘지번호와 배치도를 살펴 본 다음 5-40번지에서 겨우 스메타나의 오벨리스크 묘석을 발견하고 잠시 묵념을 올린다. 얀 네루다는 길 없는 묘지 사이의 3-25번에 있었고 드보르작은 배치도를 두 번이나 다녀온 끝에 북쪽 지붕 밑 주랑의 14-35번에서 찾아냈다. 금빛으로 적힌 이름과 청동 흉상을 보며 그동안 향수어린 선율로 초대해준 황홀했던 시간에 대해 감사를 드린다. 알퐁스 뮈샤는 묘지번호 대신 슬라빈이라는 표시만 있는 것으로 보아 공동 추념비 밑에 묻혀있는 모양이었다.

 

 

슬라빈은 층계로 올라간 노대 위에 묵직한 석탑과 이를 삼면으로 둘러싼 측벽으로 구성돼 있으며 탑 위에는 날개 달린 수호천사가 앉아있다. 그 밑에 "A? Zem?eli, Je?t? Mluv?"라는 모토가 보이는데 “죽었으되 그들은 아직 말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양쪽 아래에 흐느끼는 두 여인의 조각상이 있다. 탑과 측벽에는 검은 판에 금 글씨로 묻힌 사람의 묘명이 적혀있으며 뮈샤의 이름은 오른쪽 측벽, ㄱ자로 꺾여 나온 부분에서 찾을 수 있었다.

 

 

 

묘지 동쪽으로 후문을 나서면 잔디 위 나무그늘에 악마의 기둥(?ertovy kameny, Devil’s Pillar)이라고 불리는 사람 키만 한 돌기둥 세 개가 놓여있다. 전설에 의하면 사제가 이곳에서 미사를 끝내기 전에 악마가 로마에 있는 베드로 성당에서 기둥을 가져오기로 내기를 했는데, 성 베드로의 도움으로 사제가 이기자 화가 나서 기둥을 성당 지붕에 내던졌다는 것이다. 이후 몇 년 동안 무너진 지붕을 고칠 수 없었다고 하며 그 기둥이 아직 풀밭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악마쯤 되면 그 정도는 내다볼만 한데 전설에서는 매번 지기만 한다. 전설은 그렇다 치고 돌기둥의 실체는 이정표라는 설이 있고 고대 천문 시계라는 말도 있지만. 11세기 로마네스크 양식 바실리카 기둥의 일부라는 설명이 가장 믿을만하다는 것이다.

묘지 남쪽에 붙어 성베드로와 바울 성당(Kostel sv petra a pavla)의 검은 벽돌로 된 첨탑 두 개가 높이 솟아있다. 1070년, 보헤미아의 초대 왕 브라티슬라브(Vratislav) 2세에 의해 건립된 이 성당은 기초를 놓을 당시 임금 스스로 돌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열두 번이나 날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성당은 1887년 요제프 모카에 의해 신 고딕양식으로 바뀌고 1903년 프란티섹 믹스(Frantisek Miks)에 의해 다시 정비됐다는데 지금 볼 수 있는 종탑 두개도 이때 첨가된 것이다. 16시20분, 성당으로 들어가려는데 오늘은 결혼식이 있어 일반 공개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침에도 예식으로 수도원을 못 봤는데 혼인날을 토요일로 잡는 것이 세계 공통의 현상인 모양이다. 천정과 벽면이 온통 아르누보의 그림과 문양으로 덮여 있다는 내부를 못 보는 대신 정문 위 아치에 있는 부조작품 ‘최후의 심판’과 울긋불긋 모자이크로 장식된 두 개의 측문을 감상하고 덤으로 리본을 감아놓은 신혼자동차를 구경한다. 이번은 서민혼례인 듯, 자그마한 빨간 차다.

성당에서 남쪽으로 오솔길을 건너면 잔디밭에 네 개의 조각상이 놓여있다. 바츨라프 광장의 기마상을 제작한 미슬벡의 작품인데 그 중에 오늘 사귄 전설 속의 인물들, 츠티라트와 샤르카, 프르제미슬과 리부셰, 그리고 루밀의 모습까지 있어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워진다. 거기서 동쪽으로 돌아 200 여m 걸어간 곳, 키 높이 석축 위에 성 마르틴의 로툰다(Rotunda sv. Martina)가 있다. 11세기 후반에 건설된 로마네스크양식의 이 예배당은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된 원통형 성당으로 알려져 있다.

 

 

남쪽으로 발길을 돌리자 1672년에 세워진 레오폴트 문(Leopoldova br?na)이 앞에 보인다. 바로크 양식으로는 가장 아름답고 오래 됐다는 비셰흐라트의 정문으로 지붕 위 독수리 조각과 윗벽 문장 등 단정한 장식이 주변 분위기에 잘 어울린다.

이제 귀로에 들어선다. 돌이 깔린 깨끗한 산책로를 천천히 남으로 걸으면 관광 안내소가 들어있는 슈피츠카(?pi?ka)문의 유적이 왼쪽에 나타나고 100m 쯤 더 간 곳에서 30년 전쟁 직후 1655년에 세웠다는 타보르(T?bor)문을 만난다. 성벽위에 하얀 2층집이 앉아있는 모습의 돌문을 지나고 두어 번 뒤를 돌아보며 비셰흐라트와 작별한다.

16시40분, 눈앞에 서 있는 대규모의 콩그레스 센터(Kongresov? centrum) 옆을 따라 약 500m, 동쪽으로 걸어간다. 지하철 C선 비셰흐라트 역은 도보로 10분이 안 되는 거리로 파란유리의 높은 호텔, 코린티아(Corinthia) 타워가 있는 곳이라 쉽게 찾을 수 있다. 20코루나의 차표를 사서 17시에 출발, 어제 왔던 무제움역에서 녹색 A선의 지하철로 갈아타고 종점 데이비츠카에서 내린다. 익숙해진 귀로는 순조롭다. 119번 버스를 타고 데디나에서 내린 후 홀가분한 기분으로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본다. 같은 연립주택 동내에 옆집 말고 또 하나의 한국 민박집의 간판이 보인다. 맑음이네로 돌아 온 시간은 18시, 저녁 차려먹고 숙박비 잔액을 지불한다. 내일은 쿠트나 호라(Kutn? Hora)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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