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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작]
묵시적 재난에서 개별화된 재난으로
- 편혜영 ‘홀’
정재훈
1. 시스템을 위한 재난
신자유주의가 내세운 시장 논리는 이제 개인의 일상 영역까지 깊숙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글로벌’, ‘세계화’라는 미명하에 소비 사회에 최적화된 욕망을 확산시키고, 그것에 순응하고 행동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치켜세우고 있다. 아울러 진보된 과학기술은 인간의 모든 능력을 긍정성으로 포장하고 자연의 불확실성을 지속적으로 제거해 나갔다. 하지만 바우만이 지적한 것처럼, 현대인들의 불안은 오히려 더욱더 깊어지고, 파괴적인 양상으로 확산되고 있다. 불안은 메울 수 없는 공동(空洞 : Hole)처럼 개인의 일상 곳곳에서 은폐되어 있다. 시대적 징후이자, 문학적 화두로 드러난 불안은 21세기를 기점으로 일군의 작가들(편혜영, 윤이형, 조하형, 정유정)이 선보였던 장르적 실험성, 재난의 내재화, 그로테스크한 묘사, 파격적인 결말 등과 같은 서사 방식으로 이어졌다.
총칭하여 이 ‘재난의 서사’들은 신자유주의와 후기 근대를 배경으로 한 재난과 그로 인한 파국을 보여줌으로써 그 속에 숨겨진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거나, 공포를 상징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자유 시장과 과학기술의 낙관적 미래관을 부정하고 세계의 이면을 보다 파격적으로 묘사하고자 하는 재난의 서사 방식은 2000년대 중반까지도 주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의 ‘재난의 서사’는 이전 작품들의 아류에 머물러 있거나, 아니면 그것 자체가 이미 식상한 소재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재난의 서사 방식이 그동안 과잉되어 쓰여 온 탓도 있거니와, 영화를 위시한 대중매체가 스크린을 통해 선보이는 재난의 스펙터클 앞에서 문학이 대중들의 관심을 일말이라도 받겠는가라는 회의감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문학에서 재난은 이제 가용하기 힘든 소재에 불과한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재난의 서사’는 앞으로 어떤 ‘재난’을 보여줌으로써 당대의 시대적 징후를 담는 서사 방식이 될 수 있는가.
문학에서 바라보는 재난과는 반대로, 신자유주의와 후기 근대가 바라보는 재난(근대적 재난)은 스펙터클을 전제한다. 스펙터클은 인간의 눈을 거치지 않는다. 그것은 재난의 현장을 카메라로 조망하며, 그곳 한가운데에 불타고 있는 희생물을 (생)중계할 뿐이다.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할리우드의 재난 영화들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무장한 채 관객들에게 보일 따름이다. 이처럼 근대적 재난은 탈(脫)인간 방식으로 중계되거나, 가공되어 시장에 유포된다. 현장의 생생한 공포든, 만들어진 공포든 간에 근대적 재난은 지독한 원시를 지녔다. 그것은 카메라의 비가시권 영역, 즉 희생자들에 대해 무지하다. 재난의 장면은 반복되어 재생되지만, 희생당한 이들의 얼굴은 재생되지 않는다. 인간의 눈으로 목격되지 못한 희생자의 얼굴은 그저 스크린을 스치는 탈색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근대적 재난은 일시적으로 일어난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사건(부정성)임은 분명하지만, 반드시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복구가 가능할 것’이라는 긍정성도 함께 뒤따라 나온다. 이것은 마치 자동기계처럼 재난 발생 이후에 적절한 시기가 오면 언제든지(또는 즉각적으로) ‘해결책’, ‘대안’, ‘사후 조치’, ‘예방’이라는 이름으로 재난을 뒤따른다. 재난 이후에 남아있는 자들은 무너진 세계를 다시 재건해야 한다는 소임과 함께 그것이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결국 근대적 재난은 희생의 반대급부로 근대적 시스템을 재건할, 보다 최적화된 인간을 필요로 한다. 그것을 선한 의지와 행동으로 발휘할 개인은 자신에게 부여한 소임과 가능성을 시스템이라는 외부의 것이 아닌, 자기 내부의 것으로 착각한다.
근대적 재난은 시스템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스템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짝패이자 쌍둥이와도 같다(근대적 시스템―재난). 시스템 내부에 있는 개인은 근대적 주술에 빠진다. 이것은 재난 이후에 따른 복구와 재건의 믿음을 자기 자신에게 기원함으로써 드러난다. 근대적 주술은 ‘지속적인 탈(脫)인간화’가 진행되는 일련의 사태의 심각성을 두 가지 측면에서 은폐한다. 하나는, 급작스럽게 발생한 재난이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반드시 복구될 것이라고 믿음으로써 읊어지고, 또한 그 믿음을 계승하여 이전 세계를 재건할 수 있는 선하고 의지가 강한 인간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것(또는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이다. 근대적 주술은 재난의 부정성을 깨끗하게 지우려고 하는 자기 최면에 가깝다. 하지만 재난으로 인한 지속적인 탈인간화 문제는 긍정성만으로는 결코 지울 수 없는 얼룩이다. 따라서 재난의 서사는 원시에 빠진 스펙터클이 간과한 탈인간화 문제를 드러냄으로써 문학 밖에서 상품으로 소비되고 있는 재난과 그 이면에 자리 잡은 근대적 시스템의 민낯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
2. 의지라는 주술에 빠진 식물인간
2000년대의 ‘재난의 서사’를 일군 작가들 가운데에서 독보적인 서사 기법으로 주목을 받았던 편혜영의 근작인 장편 ‘홀’(문학과지성사, 2016)은 서술 시점을 재난 ‘이후’로 두고 전개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작품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작중 인물인 “오기”는 지리학을 전공한 40대의 대학 교수인데, “아내”와 함께 강원도로 여행을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사고로 인해 아내가 목숨을 잃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척수가 심하게 손상되어 전신마비가 된 오기는 이제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장모”에게 의탁해 하루하루 연명해 나간다. ‘홀’의 서술 시점은 불구가 된 오기의 현재와, 과거를 회상하는 오기의 기억이 서로 교차되어 전개된다. 특히 ‘홀’은 ‘아오이가든’, ‘사육장 쪽으로’처럼 기괴하고 파격적인 묘사가 거의 전무하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한 작품이다. 또한 동일하게 재난을 소재로 한 ‘재와 빨강’(창비, 2010)과 비교할 때, ‘홀’에서는 편혜영의 주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는 ‘현장성’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홀’은 ‘재와 빨강’과 마찬가지로 재난에 처한 일개 개인이 등장한다. 다만, ‘홀’은 재난이 발생하고 있는 현장 자체에 초점을 두지 않고, 오히려 오기의 교통사고(재난) 이후를 서사의 출발점으로 놓고 있다. 서사의 핵심이 재난의 진행 과정(현장성)보다는 사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는 재난으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이 앞으로 지속적으로 작중 인물에게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재와 빨강’의 “전염병”과 같은 광범위한 재난 현장과 비교한다면, ‘홀’의 오기가 처한 재난은 그저 교통사고라는 사소한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 재난에 대한 대응 또한 C국이라는 공적 영역에서 이뤄지는 게 아니라, 개인이 홀로 ‘의지’를 발휘해야만 한다는 것도 확실히 비교되는 부분이다. 지극히 사적 영역으로만 국한되었다는 점에서 ‘홀’의 세계가 주는 재난의 긴장감은 그 강도가 ‘재와 빨강’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오로지 개인에게만 주어진 복구의 과제는 그것의 성사 여부를 묻기 이전에 이미 타인으로부터 공감을 얻기 어려운 고립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전신마비라는 불구의 신체에 요청되는 ‘의지’라는 어휘를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불구가 된 오기에게 의사는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예요. 의학이 아니라 의지가 필요하단 말이에요.”(11쪽)라고 말한다. 이때 ‘의지’를 발휘해야 할 주체는 오로지 개인, 즉 작중 인물인 오기뿐이다. ‘의지’는 그야말로 외부의 상황에 맞서 누구의 강요나 명령 없이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고양시켜 발휘해야 할 고유의 정신적, 감정적 대응이다. 의사가 오기에게 말한 ‘의지’라는 어휘는 불구의 몸을 치유(복구)하고 다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긍정성을 은밀히 보증하는 의미로 쓰인다. 하지만 불구가 될 가능성이 짙은 오기의 신체에 부여되고 요청되는 ‘의지’라는 어휘는 오히려 그의 신체에 남겨진 재난의 부정성을 은폐시키고, 헛된 긍정성을 보증하고자 하는 기만적인 근대적 주술에서 나온 것이다. ‘의지’로서 드러난 근대적 주술은 개인의 한정된 재화, 제한된 능력을 마치 무한한 것인 양 탈바꿈시키고, 오히려 주체에게 더 자발적으로 능력을 발휘하라고 부추기는 시스템의 폭력이다.
‘나을 수 있다’라는 주술로서 부추겨진 긍정성의 환상은 재난 이후에 극도로 취약해진 개인의 심리를 깊숙이 파고든다. 이 때문에 작중에서 오기도 자신이 정말 나을 수 있다는 확신에 빠지면서 마치 최면에 걸린 듯 새로운 행동 방식을 체득하고자 몸부림친다. 근대적 주술이 개인의 행동 변화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낼 수 있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개인이 느끼는 불안의 근본 요소가 곧 근대적 시스템의 성격(계속해서 개인에게 불확실성을 조장하는 것)과 매우 닮아 있기 때문이다. 불안의 주 원인은 사회적 역할, 정체성을 바꾸려는 끊임없는 욕망, 그리고 행동의 지침이 되는 본보기의 부재와 관련해 사람들이 겪는 문제와 더 연관되어 있다. 오늘날 이런 불확실성은 또한 사람들이 근본주의적 종교에 의지하고 사회적 제약들을 받아들이는 원인이 되며 이로 인해 새로운 유형의 전체주의가 발생하게 된다(살레츨, ‘불안들’, 23쪽). 오기는 대학교수라고 주변으로부터 신망을 받다가 재난을 겪고 난 뒤에 사회적 신분과 역할(“병신”이라 불리는 상황)이 바뀌었고, 또한 행동이 철저히 제한된 신체적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시행착오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행동의 지침 부재’에 처한다. 그는 차츰 자신이 ‘불확실성에 내던져졌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폐기물과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라는 불안에 빠지게 된다.
오기는 의사가 말한 ‘의지’를 처음에는 굳게 믿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것만으로는 절대 자신의 신체가 복구될 수 없다는 진실을 서서히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고 오기의 ‘의지’에 깃든 주술의 힘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의지’는 생존을 위한 욕망으로서 여전히 강력한 권한을 유지한다. 오기가 처한 생존의 문제는 한 개인이 문명에서 자연의 야만으로 내던져지는 탈인간화 사태이다. 오기는 예전에 아내가 몰래 키운 “덩굴식물”의 지독한 생존 본능을 징그럽다며 혐오스럽게 보았지만, 재난 이후에 그의 생존 방식은 예전에 자신이 그렇게 혐오했었던 덩굴식물의 “생장 방식”과 차츰 닮아간다.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식물인간(자연의 야만적 질서를 체득한 인간)인 셈이다. 이렇듯 오기의 생존 방침은 덩굴식물의 그것처럼 생명 유지만을 위해 움직이는 지극히 퇴화된 성향을 띤다. 이는 타인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오기가 타인을 판단하는 기준은 지극히 단순해진다. 불구가 된 자신을 ‘계속 돌봐줄 사람’인가, 아니면 ‘완전히 버릴 사람’인가로 말이다.
3. 홀로 저급하고, 홀로 고립된 삶
이제 오기로서는 자신을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냐, 그렇지 않느냐가 생존과 직결된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만약 그것을 판단하기 어려운 정체불명의 타인이 등장하면 극도로 경계할 수밖에 없다. 외부에서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악한 것’이라는 판단과 생존을 위한 이기적인 행동 방침은 신체의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온다. 그런데 오기의 회상을 보면 이러한 생존 본능이 재난 이전에도 발휘된 듯 보인다. 그가 대학교수로 임용되는 과정에서 벌인 일련의 행동은 사실 신자유주의의 과도한 경쟁, 극단적인 개인 이기주의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임용 당시 동료의 약점을 이용해 술수를 부렸고, 간혹 자신의 성공만으로 성에 차지 않을 때가 있었으며, 가까운 누군가의 실패가 더 안도감을 주기도 한”(184쪽) 오기의 이력은 신자유주의의 시장 논리에 최적화된 개인의 성과주의(시장에서의 생존주의)와 그로 인한 윤리적 무감각을 동시에 보여준다.
신자유주의 시장 논리에 철저히 순응한 개인에게 돌아오는 대가는 타인과 공동체로부터 고립, 배제되는 지극히 저급한 삶이다. 작품의 말미에서 오기가 마주한 “내부의 공동”(185쪽)은 그가 직면하게 될 비인간적인 삶의 공허함이자, 인간다움이라는 기반이 붕괴되어 버린 윤리적 파산 상태를 암시한다. 어둡고 텅 빈 ‘공동’ 안에는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이 깊고 음습한 공동의 어둠은 불가해한 영역으로 오기 앞에 놓여 있다. 게다가 작중에서 공동이 마치 망자를 매장하기 직전에 파놓은 구덩이처럼 묘사되고 있는 것은 그가 처한 고립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떠받치고 있는 사고는 사회 내 개개인이 각각 하나하나 흩어져 있다는 것이며, 그 안에서 스스로 사회적인 존재임을 망각한 개인의 고립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강상중, 예외와 ‘악’, 참조). 따라서 신자유주의의 개인이 처한 ‘심각한’ 문제로서 드러나는 오기의 고립은 고작 한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복구될 수 없는 지속적인 탈인간화 문제인 것이다.
고아와 다름없이 자랐던 오기에게 유일한 가족은 아내와 장모였다. 사고로 아내를 잃은 오기에게 이제 유일하게 남은 가족은 장모뿐이다. 오기는 장모가 자신의 법정 후견인이며, 재활과 일상생활을 보살피는 가족이라고 인식한다. 작품의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오기가 처음에는 죽은 아내를 애틋하게 떠올리다가 이후 점차 어떤 죄책감에 휘말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생전의 아내가 벌인 어떤 불가해한 행동을 재해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또한 그는 자신을 대하는 장모의 태도가 이전과는 사뭇 달라졌음을 느낀다. 불구가 된 몸이기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있는 오기로서는 장모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할 수 없다. 또한 그는 폐쇄적인 생활 방식을 추구했던 아내가 자기 몰래 남긴 어떤 “기록”을 장모가 읽은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마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동을 들여다보려고 애쓰는 것처럼 그는 온갖 추측을 해보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뿐이다.
고립된 상황이 생존과 직결된 문제로 다가오자 결국 오기는 장모에게 부여한 ‘가족’, ‘보호자’라는 사회적 지위를 스스로 철회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일말의 가책이나 주저함은 찾아볼 수 없다. 오기가 장모에게 기대했던 가족, 또는 보호자로서의 역할은 물물교환에 따른 암묵적 거래에 근거한 것이다. ‘자신의 재산(재화)을 재활에 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는 입장’과 ‘응당 가족이자, 보호자라면 헌신적인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물물교환에 따른 암묵적 거래’이다. 하지만 오기가 봤을 때, 장모가 이질적이고 두렵게 보이는 것은 그녀가 거래의 규칙을 준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법적인 근거로 삼아 장모를 가족과 보호자라는 지위에서 배제시키고, 새로운 법적 대리인을 내세우고자 한다. 이런 오기의 사고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이것은 시장의 논리처럼 비쳐진다. 계약 이행을 하지 않았을 때 시장은 그 당사자를 ‘악’이라고 규정한다. 흔히 ‘악덕 기업’, ‘악덕 상인’이라는 말처럼, 시장의 계약은 도덕과 일치된다. 장모는 거래의 규칙을 위반한 이방인이며, 견제해야 할 악에 속한다. 오기가 장모에게 공포를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녀가 시장 논리의 인과관계로는 불가해한 ‘것’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반면, 장모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도 이미 오기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무너진 상황이다. 그녀는 유일한 혈육인 딸을 사고로 잃었고, 그 이전에 남편과도 사별했기 때문에 이제는 ‘엄마’도 아니며, ‘아내’도 아니다. 언제고 지속될 수밖에 없는 재난(가족의 해체)의 흔적, 그 공허함을 견디면서 그녀가 습관적으로 읊조리는 “다스케테쿠다사이, 다스케테쿠다사이(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는 그로부터 구원받기를 바라는 또 다른 주술인 셈이다. 신자유주의의 시장 논리에 철저히 순응한 끝에 고립된 인물이 오기라면, 장모는 남편과 딸의 죽음을 누구와도 진정으로 공유할 수 없다는 또 다른 고립의 양태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렇게 본다면, 작품의 제목인 ‘홀’이 구멍, 또는 공동이라는 ‘Hole’을 가리키는 어휘이지만, 어쩌면 이것이 작중에서 장모인 그녀가 오기를 일컬어 “홀아비”라고 하는 것과 스스로를 “과부”라고 자칭한 것처럼 철저히 혼자 고립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내포하는 의미로서 접두사인 “홀-”일 수도 있지 않을까.
4. 공유되지 못한 죽음과 소거된 추모
장모와 오기가 저마다 비인간적인 삶으로서 고립될 수밖에 없었던 표면적인 이유는 유일한 가족이자 동반자, 즉 딸이자 아내를 잃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겪은 재난은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흔적으로서 남아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상황이다. 하지만 서사가 전개될수록 아내를/딸을 잃은 이들의 감정의 공유는 극심한 차이를 드러내며 마침내 깨지게 된다. 오기는 “의심할 것 없는 일상적인 방식의 교통사고”(32쪽)를 당했고 비록 아내가 목숨을 잃어 슬프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그는 이제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라 할 수 있는 장모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다. 한편, 장모는 유일한 피붙이인 딸의 비명횡사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기도 하지만, 하늘에서 바라보고 있을 딸을 위해서라도 홀로 남은 사위를 지극히 보살피고자 한다. 이들의 관계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점차 파국으로 치닫게 된 것은 아내가/딸이 남겨놓은 여러 가지 ‘기억’과 ‘기록물’들이 죽은 그녀의 삶을 추모하는 데에 합일되지 않고 파편화된 채 곡해되었기 때문이다.
오기는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기억들을 조립하는 과정에서 아내가 어떤 태도로 삶을 살고자 했는지 등을 유추한다. 결혼 전 상견례 자리에서 아내로부터 느꼈던 이질감을 다시 떠올려보기도 하고, 평소에 그녀가 꿈꿨던 이상향이 무엇이었고, 왜 그녀가 그것을 성취하지 못했는지 나름 비판하기도 한다. 작중 초반에만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할 뿐, 이후 오기의 회고는 이렇듯 아내가 어떤 삶을 추구했으며 왜 그 삶에 실패했는가를 보여주는 데 집중적으로 할애되어 있다. 이렇게만 본다면, 오기의 아내는 성공만을 좇는 속물이거나, 자신의 실패에 대해 불만만 토로하는 무능력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장모가 바라본 딸의 모습은 무엇일까. 작중에서는 상세하게 나와 있지 않지만, 앞서 오기가 기억하는 아내의 모습과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오기가 기억하는 ‘아내’의 모습과 장모가 기억하는 ‘딸’의 모습이 이토록 상반된 이유는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들이 그녀를 기억하는 방식이 저마다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오기가 뒤죽박죽 섞여 있는 단편적인 기억들을 스스로 납득할 만한 수준에서 조립한 것을 과연 참(진실)에 가까운 기억의 내용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니, 바꿔 말하자면 오기가 스스로 납득한다는 기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며, 이를 통해 진술되는 아내의 모습은 정말 그녀의 것이 맞을까. 이것은 작품의 주요 서술 시점이 오기라는 문제적 개인에게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생각해 볼 부분이다. 만약에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서술의 내용이 그저 오기만의 편향된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작품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다. 작품 말미에서 드러난 것처럼 교통사고를 낸 당사자가 만약 오기라면 그는 이 모든 파국을 일으킨 원인제공자이자, 윤리적 의식이 철저히 결여된 범죄자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작가는 열린 결말을 보여줌으로써 거기에 대한 명료한 단서를 제공해 주지는 않는다.
한편으로 장모는 딸이 곳곳에 남긴 방대한 양의 기록물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장모는 딸이 남긴 무수한 기록들 가운데에서 전혀 무의미한 것을 읽었을 수도 있고, 또는 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딸과 사위가 감추고 싶어 했던 비밀을 접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장모가 자신이 읽은 내용을 일절 외부로 발설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딸이 그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사위와 딸 사이에 묵은 오해를 풀 수 있는 여지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등에 대해 사위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사위를 향한 장모의 태도도 어딘지 분명해 보이지 않는다. 장모가 하는 일련의 행동들이 사위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딸에 대한 실망과 자괴감에서 비롯된 것인지 작중에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이렇게 오기와 장모는 아내이자, 딸이기도 한 그녀의 죽음을 극히 제한된 기억의 테두리 내에서 받아들이고 있다. 오기든, 장모든 기억과 기록에는 한때 아내이자 딸로 살았던 그녀의 삶에 대해 여전히 해명되지 않는 공동이 자리 잡고 있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들을 공유함으로써 그 공동을 메우려 하지 않는다. 같은 가족 구성원이면서도 이들은 서로 고립된 상황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그녀의 죽음을 사유(私有)한다. 그녀의 죽음은 공동체의 차원에서 공유됨으로써 추모되는 것이 아니라, 흩어진 기억이나 기록으로만 남겨져서 어떠한 접점이나 합일도 형성하지 못한 채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아내이자 딸인 그녀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남아 있는 공동체 구성원, 그것도 혈육이며 배우자라는 가장 가까운 존재들에게서조차 공유되어 복원되지 못한다. 그녀는 한 조각의 기억으로, 한 쪽의 기록으로만 부유한다. 죽음 이후에도 남은 이들에게 기억되는 인간다움의 추모는 소거된 채 부유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그녀만의 문제가 아니다. 타자를 상실한 고독 앞에서도 오로지 자기 자신만의 생존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는 지난하고 공허한 삶이 오기와 장모 앞에 놓여 있다. 이들도 인간다운 삶에 뿌리박지 못하고 부유하는 자들이다. 또한 이들은 공허한 삶을 이어가며 불확실한 기억의 파편과 무수한 종이쪼가리에 둘러싸인 채 자신들의 죄책감과 그녀와의 추억들을 저울질할 것이다.
죽은 자가 아직 남아있는 자들에게 추모되지 못하는 것은 지속적인 탈인간화 문제의 가장 극단적인 사태이다. 공동체나 타인으로부터 고립되고 저급해진 삶은 결국 죽어서도 인간답지 못한 죽음으로 이어진다.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사태에 직면한 것을 가리키는 ‘지속적인 탈인간화’ 문제는 비단 생존만을 위하는 저급한 삶만이 아니라, 죽음조차도 추모가 소거된 채 저급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오기와 장모가 죄책감과 추억을 저울질한다고 해서, 과연 그녀(아내/딸)의 죽음을 여전히 남아 있는 ‘인간다운 인간’으로서 진정으로 사유(思惟)할 수 있을까. 추모가 소거된 저급한 죽음들이 난무하고, 그나마 죽음을 추모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인 공동체 윤리마저도 위태로운 사태가 지속된다면 어느 누구도 죽음을 진정으로 사유할 수는 없다.
5. 재난에서 벗어난 재난의 서사로
편혜영은 ‘재난의 일상화’를 파격적이고도 섬세한 감각으로 작품에 구현한 작가이다. 그가 다룬 일련의 재난들은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신자유주의의 시장 논리, 날로 진보하는 과학기술로 인한 세계의 폭력적인 이면을 드러냈다. 그간 ‘아오이가든’, ‘사육장 쪽으로’, ‘재와 빨강’과 같은 재난의 서사들은 편혜영이 구현하고자 한 작품 세계나 그에 관한 서사 방식이 일시적인 유행에 편승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장편 ‘홀’은 작가가 그동안 보여주었던 ‘재난의 일상화’ 문제를 보다 더 첨예하게 파헤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작품들과 사뭇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전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었던 보편적인 재난, 광범위한 재난이 아니라 교통사고라는 일상적인 재난을 통해 한 개인의 ‘지속적인 탈(脫)인간화’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홀’의 특징이다.
근대적 시스템―재난은 일시적인 사태로서 부정성인 동시에, 그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긍정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로써 근대적 재난은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보다 견고하게 하는 것이다. 재난이 해결되고 복구될 것이라고 믿는 긍정성, 이른바 근대적 주술은 신자유주의에 순응한 채 고립되고 저급한 삶에 놓인 개인의 불안을 파고든다. 근대적 재난으로 비롯된 ‘지속적인 탈인간화’ 문제는 해결이나 복구라는 이름으로 메울 수 없는 공동(홀)처럼 남아 있으며, 이것은 급기야 죽음마저도 추모될 수 없는 사태로까지 이어진다. 현장성으로 광범위한 재난이 아니라, 보다 더 좁혀진 개인의 영역에서 점철되는 재난의 양상을 묘사하는 방식은 이를테면 멀리서 조망하는 스펙터클한 것이 아닌, 그 내부에 놓인 희생자의 얼굴을 인간의 눈과 손으로 클로즈업하는 것이다. 그것의 본질은 곧 성과주체(한병철)로 명명될 수 있는 지금의 개인이 처한 근본적인 불안 요소를 문학으로서 선명하게 밝히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의 문학에서 ‘재난’이라는 소재와 그것을 다루는 서사 방식이 문학 밖에서 소비되는 상품으로 전락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지금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미세한 징후를 놓치지 않고 포착할 수 있는 특유의 감수성을 다시 되살려야만 한다. 왜냐하면 근대적 시스템은 물질적, 비(非)물질적 측면에서 비인간적인 것들을 여전히 고안해 내고 있으며 이를 상품으로서 확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비되는 상품들은 겉으로는 최신, 최첨단을 가장하고 있지만, 오히려 공동체나 타인과의 관계에 필수적인 감각이나 사유를 지극히 원시(遠視)적인 것으로 제한시킨다. 이처럼 보다 급속도로 나아가는 기술적 진보 상황과 그에 따라 날로 저급해지는 삶의 문제, 아울러 인간다운 삶에 관한 진정한 성찰들이 고갈되어 가는 과정이 서로 맞물렸을 때 생길 재난은 지금의 그 어떠한 상상조차도 간단히 초월하는 가공할 파괴력이 되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이미 그것을 경고하는 미세한 징후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본래의 자유가 탈각되고, 정작 노예이면서 스스로 노예라고 생각하지 않는 무감각한 성과주체들의 출몰을 막기 위해서는 다시 인간에 대한 성찰로 돌아가는 방법뿐이다.
[당선 소감]
◆ “상실 견뎌내며 겸손하게 기록하고 싶다”
당선 소감 - 정재훈
올해가 지나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이 있다. 스무 해 넘도록 살았던 동네, 이제는 재개발지역이 되어 곧 철거가 될 그곳을 사진으로 담는 일이다. 아침 공기를 가르며 인사를 나누었던 이웃들의 길, 저녁놀이 골목들 사이로 가지를 칠 때마다 갓 지은 밥내가 차지하던 길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겸손하게 기록하고 싶다. 셔터를 누른 오늘의 손으로 또 글을 쓸 것이고, 보석처럼 빛나는 작품들의 속살들을 내일의 손으로 더듬어 갈 것이다. 상실을 느끼고, 견디는 방법은 눈앞에 사라져 가는 것들을 조용히 관찰하며 이성과 감각으로 주워 모으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랑하는 부모님, 든든한 동생들인 재성, 재호, 그리고 언제나 제 글의 진지한 독자가 되어준 아내에게 고맙습니다. 미력한 글을 봐주시고, 치기에서 포기로 치우쳤던 마음에 불을 지펴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합니다.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으시며, 부족한 저를 너그러이 학문의 길로 이끌어주신 김종회 선생님을 비롯한 경희대학교 여러 선생님들과 선배님들, 그리고 문학적 동지애로 뭉친 현대문학연구회 동료들에게도 깊은 존경과 감사를 표합니다. 문학으로 맺어져 이젠 혈연처럼 가까워진 형철 형과 학중 형, 스무 살에 만나 어느덧 벌써 17년 지기가 된 화영, 기용에게도 이 수상의 기쁨을 전합니다.
△1982년 서울 출생 △경희대학교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수료
◆ “근대적 재난 시대… 소설과 현실세계 균형적 성찰”
심사평 - 김주연 문학평론가
섬세한 감수성으로 분석을 밀고 나가는 평문이 있는가 하면, 해박한 지식으로 강의록 같은 해석을 꾀하는 평문도 있었다. 현실에 대한 굵은 비판의 논조로 문학작품의 결을 확장하는 평문도 있었다. 그 어떤 평문도 문학평론이라는 이름에 충분히 값하는 훌륭한 글들이었다. 그러나 당선이라는 관문 앞에서는 어차피 선택의 순간을 지나가야 한다. 여기서의 선택은 그러므로 시각의 선택을 의미할 뿐, 평문 자체의 질적 우열과 크게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이라는 말이다.
‘묵시적 재난에서 개별화된 재난으로 - 편혜영 『홀』’(정재훈)은 이런 관점에서 당선작으로 결정되었다. 이 작품은 재난의 세기라고 할 수 있는 작금의 현실 가운데에서 문학의 위상을 성찰케 하는 비평의식을 떠올리게 하는 평론이다. 그로테스크한 공포를 소설의 소재, 혹은 주제로 내세워온 중견소설가 편혜영을 다룬 작품으로서 주목될 만하다. 신자유주의와 후기 근대가 유발하고 있는 오늘날의 재난을 ‘근대적 재난’이라고 이름하면서 구체적인 소설 분석과 현실세계를 바라보는 거시적 안목을 조화시킨 비판적 균형감이 신뢰를 준다. 대상작품에 대한 깊이있는 독해의 결과로 보인다.
‘바깥을 향한 손 - 김애란’(강숙영), ‘대화하는 인간, 진화하는 패턴 - 황정은’(오은교), ‘파노라마, 혹은 연속필름의 기억 - 신용목의 시’(이철민), ‘오르토스에 대항하여 - 백민석’(임선우) 등의 평론들은 선자로서도 큰 하자를 찾기 힘든 작품들이다. 구태여 부기한다면, 김애란론은 김애란 속에만 깊이 묻혀서 그야말로 바깥을 보는 일은 좀 소홀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없지 않다. 황정은론은 대화의 소설적 기법에 대한 심도있는 강의가 연상된다. 그런가 하면 유일한 시론인 신용목론은 시인의 세계를 성실하게 따라가다가 그 이상을 놓친 감이 있다. 한편 패기있게 쓰여진 백민석론은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과정과 결론을 안고 있으면서도 깊이있는 새로움에는 다소 못 미친 듯한 인상이다. 신화적 환유와 결부된 현학적 분위기는 이제 지양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고, 선외로 물러난 분들에게도 격려를 보낸다. 모두들 평단의 새로운 힘을 보탤 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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