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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8. 울산두레교회 주일예배
다른 선택을 한다(마 20:17-28)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으실 것을 세 번째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18절) 이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손에 의해서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을 아시면서도 그 고난의 길을 가기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십자가를 지지 않는 쪽을 선택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쪽으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평범하지 않은 선택이고, 다른 선택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선택을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거창고등학교의 강당에는 직업선택 10계명이라는 내용의 글이 있는데 몇 가지만 소개합니다. “하나.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둘.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넷.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열.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십자가)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라.” 이와 같이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내용들은 이 학교가 기독교 정신의 바탕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같은 상황에서도 비 그리스도인들과는 분명히 다른 선택을 하도록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왜 다른 선택인가 하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고난 받으실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받들어 모시고, 헤롯과 로마 총독으로부터 순순히 권력을 이양 받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넘게 먹이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는 분이라면 유다의 왕이 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를 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 곁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하던 제자들에게도 다른 선택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사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 선택의 결과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번은 셔츠를 사기위해서 옷 가게에 갔습니다. 딸아이와 아내는 좀 젊게 보이라고 무늬가 있는 옷들을 들고 와서 권합니다. 그런데 제가 입고 거울을 보면 어색하고, 이상했습니다. 대 여섯 벌의 옷을 입어보고도 결국 저는 무늬가 없는 셔츠를 사기로 선택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선택에도 관성의 법칙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던 대로, 익숙한 대로 선택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관성의 법칙을 거스르는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누구나 원하는 영광의 길이 아니라, 아무도 원치 않는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예수님의 믿음과, 사명과, 거룩함과, 가치관에 따라서 선택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우리들도 어떤 중요한 결정과 선택 앞에 섰을 때 예수님의 선택을 생각해보며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1)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선택
먼저 생각해 볼 말씀은 자기 욕심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선택을 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런 부탁을 드립니다.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21절) 그들은 이제 곧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보좌에 오르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이런 부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이 두 아들 중 하나는 주님의 우편에 하나는 주님의 좌편에 앉을 수 있도록 지금 약속을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22절) 예수님은 그들이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에 따라서 선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셔츠를 구하는데 바지코너를 돌아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구하는 것에 따라서 다른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그들이 예수님에게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고 잘못 구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을 따라서 구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구하게 된다면 그 다음의 선택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2절)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분이 구하고 있는 것을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이 구하는 것은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인데, 이것을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야고보와 요한은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22절) 이 대답을 통해서 야고보와 요한의 선택이 처음과는 달라진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좌우편의 자리에서 영광을 받는 것을 선택하려고 했다가, 예수님의 좌우편에서 십자가를 지는 것을 선택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면, 우리의 삶에서 다른 선택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마태복음 6:33-34)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구하는 것에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으로 구하는 것이 달려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선택이 달라지는데 먹고 입을 것을 염려하는 삶에서,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을 믿고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않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이 달라지고, 선택이 달라지고, 염려하는 삶에서 하나님을 믿는 삶이되기를 원하십니다. 구하는 것이 달라지면 선택하는 것이 달라지고 선택하는 것이 달라지면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구하고, 그래서 염려가 가득한 삶에서 믿음이 충만한 삶을 선택을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 예수님을 따르는 선택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23절)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 고난의 잔을 마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을 따르기로 선택한 사람에게는 십자가와 고난의 잔이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나 우리들이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잔을 마시기위해서 예수님을 믿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들은 영광의 자리에 오르고, 무사하고 평안한 삶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을 수는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려면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잔을 마시는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만 만족할 것인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될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만 만족한다면 고난의 잔을 마시지 않아도 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려면 예수님과 함께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까지도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가복음 10:38절에서 고난의 잔을 세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마가복음 10:38) 예수님을 따르기로 선택한 사람이 받는 고난의 잔은 세례입니다. 이 세례는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기 위해서 물속에 잠긴다 해도 그 물에 빠져 죽지는 않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따르는 선택을 하고, 그 결과로 고난을 받는 것이 당황스럽기는 해도 받은 고난 때문에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세례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세례는 우리가 계약과 교제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의식입니다. 예수님을 따름으로 받는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선택을 하는 것은 자기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23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 고난의 잔을 마신다 할지라도 예수님 좌우편에 앉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고난의 잔을 마신다 하더라도 고난이 공로가 되고, 고난의 보상을 받아서 예수님의 좌우편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따르기로 선택한 사람은 나의 영광도, 나의 고난도, 나의 장래의 소망까지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과 이어지는 바디매오의 이야기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실제를 보여줍니다. 맹인이 눈을 떠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눈을 뜬 사람이 동냥해서 먹고 살던 삶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바디매오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멀리서 구경하던 사람이,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던 사람이, 도리어 예수님과 함께 고난의 잔을 마시고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이 다른 선택입니다. 이것은 아무런 보장이 없는 선택 같지만, 모든 것이 보장된 선택입니다. 이 놀라운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선택을 한 결과입니다. 우리들도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는 다른 선택, 곧 예수님을 따르는 선택을 하여서 십자가와 고난의 세례를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부활의 영광에 이르고, 예수님과 연합하는 삶이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 섬기고 주는 선택
끝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선택을 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섬기는 것을 선택하고, 주는 선택을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마치 예수님으로부터 특혜를 받은 것처럼 생각하고 화를 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26, 27절)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강요를 하시는 것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이 살면서 어떤 선택을 하셨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8절)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선택이 우리들의 선택과 다른 것은 두 가지입니다. 섬기는 것과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택이 우리들의 선택과 다른 것은 우리는 주는 것과 받는 것 중에서 대부분 받는 것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끔 섬기기도 하고 가끔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섬김을 받기 위해서 섬기거나 받기 위해서 주는 쪽에 가깝습니다. 만약에 먼저 섬기고 먼저 주었는데도, 내가 받는 것이 없다면 더 이상 주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을 주기만 한다면 살 수가 없습니다. 내가 살기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받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은 악이 된다 - 육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데 앞장서서 역할을 했던 아이히만은 독일이 패전한 후에 아르헨티나로 피신을 했다가 이스라엘의 비밀경찰에게 잡혀왔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법정에 세워졌을 때 “나는 맡겨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다”는 진술을 했습니다. 내가 살기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변명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선과 악의 분명한 경계가 없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 결국은 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 때문에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말하기를 “악은 이웃처럼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거듭한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평범한 이웃의 얼굴을 한 악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해 주는 것입니다.
저는 부자가 욕심 때문에 가난하게 되는 경우는 많이 보았어도 섬기고, 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그것 때문에 가난해지는 것을 단 한 사람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더 잘 되고, 더 사랑받고 존경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장 분명하게는 예수님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섬기고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살면서 조금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어도 세상에는 많이 다른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가족 간에도 교회 안에서도 지금보다는 많이 다른 결과가 생기게 될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꼭 물질이 아니더라도 시간이나 건강이 뒷받침 해주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섬길 수 있고 우리가 줄 수 있는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위해서 단단하게 무장된 갑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던져버린 사람처럼 자만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하여 스스로 낮아지셨으며, 종의 모습으로 섬기셨고, 자기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을 따라서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을 믿고 맡기며, 섬기고 주는 다른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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