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과 악의 기준 >
선과 악에 관한 본성론을 논의할 때 가장 선결될 과제는 선과 악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선과 악에 대한 정의를 생각할 때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본다.
이타적인 행위가 선이고 이기적인 행위가 악인가?
이타적 행위와 이기적 행위는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을까?
완벽하게 이기적 행위와 이타적인 행위라는 것이 있을까?
이기적 동기로 말미암은 이타적 행위는 선인가 악인가?
이타적 동기로 시작하였지만 결과가 좋지 않다면 선인가 악인가?
선과 악에 대한 서로 다른 정의 속에서 논의가 지속된다면 깊이 있는 사유가 힘들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맹자와 순자의 선, 악 관념은 어떨까?
순자는 결과주의의 관점에서 선과 악을 정의한다.
예의법도에 맞고 사회질서에 기여하는 행위인 정리평치가 선이며 편파적이라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인 편험패란이 악이라고 주장한다. 현대 공리주의의 아이디어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맹자의 사상은 결과를 계산하지 않고 내 마음의 선을 실현하겠다는 동기주의적 성격을 가진다.
맹자와 순자의 선과악의 개념에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성선설과 성악설의 대표 학자인 순자와 맹자의 선,악 개념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을 하나로 정의하기 매우 힘들며 같은 개념 속에서 논의가 이뤄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 현대 진화생물학과 성무선무악설 >
1.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도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책은 현대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도서 중 하나일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생존 기계이며 유전자로 알려진 이기적인 분자들을 보존하기 위한 로봇 운반자들이다. 수많은 생물들의 생존을 위한 행동은 유전자의 자기복제를 위한 과정이다.
도킨스는 개체(인간)가 이타성을 가지는 것은 유전자의 이기심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겉으로 보기에 이타적으로 여겨지는 행위 역시 생물들의 유전자가 자기 복제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이 책의 주요 주장이다.
유전자의 이기성을 입증한다고 인간의 이기성이 입증되지는 않는다. 유전자 차원의 이기적인 행위가 개체 차원 이기적 행동의 동기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2.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마음 도서
도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마음 저서를 통해 집단 선택을 부정하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론을 비판한다.
인간은 이기적인 본성이 있지만 나의 이익보다 우리의 이익을 중요시 하는 성향도 있다는 것이다.
그 근거는 집단 선택인데 예컨대 수렵, 채집 집단 중에서 무임승차자 문제를 극복하고 협동이 잘 되는 집단이 살아남았다는 등의 가설이다. 즉 우리는 집단선택을 통해 집단의 이익을 중요시하는 본능이 생겼다는 것이다.
< 나의 입장 >
나는 두 가지 이유에서 성무선무악설을 지지한다.
고자의 논리와 같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인간의 본성을 선 또는 악이라고 규정 짓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첫째 선과 악의 개념을 하나로 정의할 수 없다.
선과 악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문화권, 언어의 차이 등에 의해 하나의 의미로 규정 짓기 매우 힘들다. 시대나 가치관에 따라 선과 악이 개념이 달라질 수 있다면 선과 악을 인간의 바뀌지 않는 본성이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둘째 이기적인 행위와 이타적인 행위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으며 이기적 동기에 의한 이타적인 행위가 무수히 많이 일어난다고 본다. 예컨대 아이는 엄마의 유전자를 나눠 갖고 있기 때문에 유전자를 지키기 위한 선택의 결과 모성애가 발생했다는 관점 등을 들 수 있다. 유전자 차원에서의 이기적인 동기이지만 행위의 발현은 너무나도 이타적이라면 악한 본성 혹은 선한 본성으로 규정짓기 힘들다고 본다.
< 성선설과 성악설의 수양 >
맹자의 본성: 인간은 선하게 태어난다 → 목표: 선함 확충
※ 방법: 본래 선함을 드러나게 함
순자의 본성: 인간은 악하게 태어난다 → 목표: 악성을 교화
※ 방법: 악성을 예를 가르쳐 교화
사실 철학적으로 보면 맹자와 순자의 이론은 큰 차이지만 맹자와 순자 모두 악인을 만들려고 하지는 않는다.ㅎㅎ
서로 다른 본성론으로 인해 수양 또는 교육의 방법이 다른 것인데 실제 현장에서는 두 가지 관점 모두 존중하며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 교육현장 적용 >
성선설과 성악설의 인간을 바라보는 정반대의 관점이지만 하나의 관점으로만 교육현장에 종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성선설 성악설 성무선악설을 교육현장에서 다음과 같이 적용하여 생활하려고 한다.
1. 성선설
교직 생활이 지치고 학생들을 신뢰하기 힘들 때 성선설을 떠올리며 학생들은 원래 정말 선하지만 먼지가 많이 낀 거울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맹자 역시 환경이 안좋다면 선함을 가리기 쉽다고 말했으니 환경의 문제를 개선하여 선함이 드러나게 도와주면 될 것이다.
2. 성악설
성악설은 도덕교사의 존재가 필요함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는 학설이라고 생각한다. 매일 사고치는 학생들을 예로서 교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며 존재이유인 것이다. 순자 역시 “학문의 방법은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보다 빠른 길은 없으면 예를 존중하는 것이 그 다음” 이라고 말할 정도로 스승의 중요성을 무척 강조한다. 교육현장에서 5000번 말해도 말을 듣지 않는 학생들을 보며 오히려 우리의 쓸모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 성무선악설
선과 악에 대한 강한 관념을 가지고 학생들을 지도하는 것은 학생들을 하나의 기준으로만 평가하는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학생들의 다양한 개성을 존중하기 위해 성무선악설을 활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