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기사 관련) '마귀 같았다'는 표현은 안세영이 들을 수 있는 최고의 극찬이 아닐까 한다. 그만큼 상대에게 조금의 빈틈도 허락지 않고, 잔인할 정도로 완벽하게 경기를 지배했다는 뜻이기에.
원래 안세영에게 큰 부상만 없다면 한유에는 비교적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였다. 야마구치나 천위페이 같은 대포알 스매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안세영이 지금처럼 스매시 파워를 끌어올리기 이전에도 느린 스트로크 대결만으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안세영은 지지난주 대회를 쉰 반면, 한유에는 2주 연속으로 결승전을 치르느라 체력은 바닥이고 종아리 부상마저 있었으니 사실 시합은 해보나 마나였다.
따라서 필자는 경기 결과가 아닌, 경기 중에 엿보인 안세영의 정신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하고자 한다.
지난 파리 세계선수권에서 안세영은 제2게임 초반 천위페이가 발목이 완전히 꺾이는 부상을 입었을 때 충분히 천위페이의 약점을 공략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그냥 천위페이의 템포에 맞춰주는 이상한 배드민턴을 하다가 결국 2 대 0 완패를 당한 바 있다. 진실은 안세영 본인만이 알겠지만, 필자의 눈에는 안세영이 천위페이의 부상 악화를 걱정하다가 본의 아니게 승리를 양보한 걸로 보였다.(물론, 천위페이가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면 안세영의 승리 가능성은 없었으리라. 그날 안세영은 제1게임 초반 그녀의 몸쪽 스매시를 천위페이가 몇 차례 받아낸 이후부터 리듬을 잃고 패배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몸이 무거웠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항저우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안세영이 무릎 부상으로 절뚝일 때 천위페이 역시 같은 심경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천위페이도 고향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에 종아리 부상을 안고 뛰는 상황에서 안세영을 걱정할 여유는 없었을 수도 있지만, 워낙 따뜻하고 매너 좋은 선수들이기에 상대의 부상 악화를 걱정하다가 자신들의 경기 리듬을 잃었을 가능성은 다분하다.) 즉, 이때까지의 안세영은 정신적으로 아직 모질지 못했다.
이번 시즌 (어제 결과 포함) 준우승만 다섯 차례를 차지한 한유에 입장에서 모국에서 열리는 대회 결승에서 안세영에게 제2게임에서 21 대 3으로 대패한 것은 아쉬움을 넘어 분명 큰 치욕이었을 터였다. 충분히 짜증을 낼 법도 했지만, 한유에는 시종 미소를 잃지 않으려 애쓰며 멋진 매너를 유지했다. 이런 그녀라면 평소 안세영과도 분명 친분이 있었을 것이고, 안세영 역시 그녀의 상황을 모르진 않았을 것이기에 한유에의 체면과 체육관을 찾은 중국 관중들을 생각해서 티 안 나게 한 10점 정도 점수를 잃어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지금까지의 안세영이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어제의 안세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치 굶주린 사자나 표범처럼, 점수 차이가 몇 점이 나건 알 바 아니란 듯이 극강의 집중력을 끝까지 유지한 채 한유에를 몰아붙였다. 그리고 필자는 이 부분을 높게 평가한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아무리 안세영의 실력이 월등하다 해도 상대는 세계 랭킹 3위의 선수다. 잠깐의 방심으로 경기 템포를 늦출 경우, 안세영 본인의 좋았던 리듬은 깨지고 상대의 꺼져 가던 승부욕은 다시 점화될 수 있다. 경기를 최대한 빨리 끝내서 상대를 쉬게 만들어주는 게 서로에게 좋은 일인 것이다.
둘째, 경기 중 한 순간이라도 긴장의 끈을 놓치게 되면, 그때 뜻하지 않은 부상을 당할 가능성이 커진다. 상대방 사정에는 일말의 관심도 두지 말고, 경기가 끝나는 순간까지 경기 시작 때 가졌던 집중력을 유지해야만 하는 이유다.
셋째, 어제 경기를 현장에서나 스마트폰으로 지켜봤을 다른 모든 선수들에게 안세영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냉혹한 여제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는 게 가장 큰 소득이다. 이제 그들은 안세영에게 5점 이상만 뒤져도 그 게임을 역전하려는 의지를 스스로 접게 될 것이다.
넷째, 한유에에게 대회에서 우승하고, 세계 톱랭커가 되기 위해선 지금보다 더 독해져야 하고, 모든 순간 집중해야 한다는 걸 몸소 가르친 효과가 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이번 시즌 한유에가 왕즈이에게만 결승에서 세 번이나 가로막혀 준우승에 머문 걸로 아는데, 충분히 이길 수도 있는 경기를 결정적인 순간에 어이없는 범실을 연발하며 놓치는 경우가 있었다. 이에 대해 안세영은 그녀의 부족한 부분을 자신이 직접 독한 경기를 해보임으로써 일깨워준 셈이다.(한유에가 속 좁은 선수라면 안세영에게 서운함만 느꼈을 것이고, 그릇이 큰 선수라면 분명 이런 깨달음을 얻었으리라.) 물론, 안세영이 여기까지 생각할 여유가 있었을지는 다소 의문이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극강의 집중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한유에를 비롯해 이 경기를 지켜본 모든 배드민턴 선수들에게 가르친 효과는 분명 있었으리라.
내일부터 수원에서 개최되는 코리아 오픈에는 아쉽게도 천위페이는 출전하지 않는다. 1번 씨드 안세영은 이변이 없는 한 결승에서 2번 씨드인 야마구치 아카네와 맞붙게 될 것이다. 안세영의 공격력이 강해진 걸 이번 중국 마스터스에서 처음 체험한 야마구치가 1주일 만에 어떤 대응책을 들고 나올지, 또 그런 그녀를 안세영이 다시 어떻게 제압할지 궁금하다. 또, 8강에서는 일본의 미야자키 토모카, 4강에서는 태국의 폰파위 초추웡과 맞붙을 가능성이 높은데, 아직 안세영에게 단 1승도 거둬본 적이 없는 이 두 미녀 선수들의 필사적인 도전도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TrW7JqZKnlM
https://www.youtube.com/watch?v=Cs37yP36z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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