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를 잡고 싶다, 그 스튜디오에서
강 희 근
(시인. 국립 경상대학교 교수)
1.
나는 1962년에 동국대 국문과에 입학하고 1963년 2학년이 되었을 때 학교방송 요원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응시하여 합격했다. 그때는 편성제작부나 아나운서부가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고그냥 아나운서 요원을 뽑았다. 실기시험과 상식시험을 치뤘는데 들어가 보니 4학년 이성일(대구 MBC아나실장 역임) 선배가 이미 일을 하고 있었고 3학년의 허건영(교통방송 이사), 김성실 선배와 나 세 사람이 1기로 뽑힌 것이었다.그 이후에는 매년 요원을 5명씩 뽑았는데 후배로 이영구(대전쪽 어디 아나운서), 김동명, 이미자, 백형두(우리나라 DJ명사) 등이 기억난다.
당시 교내방송으로는 아침방송(8:30-9:00), 낮방송(12:00-13:00), 저녁방송(17:00-18:00)으로 1일 3회 방송했다. '교내뉴스', '음악 콘서트' 수준의 방송이었는데 필동 일대 주민들이 시끄럽다는 불평을 해오곤 했다.내가 4학년이 되고 실장이 되면서 바쁜 일들이 계속 생겨났다.VUNC에 1주 30분씩 대학생 코너의 할애를 받아 시내 6개 대학 방송이 요일별로 참여했다. 우리는 '동악의 시간'이라는 이름으로 뉴스, 드라마, 녹음구성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참여했는데 녹음은 VUNC 스튜디오에서 했다.
또 대학방송 컨테스트를 동아방송국과 VUNC에서 개최했는데 내가 책임 제작한 [오늘의 한국 불교], [자치생활의 상아탑]으로 각각 연기상, 우수상을 받아 기염을 토했다.대학방송연합회(UBFK)도 우리 방송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는데 6.3사태가 나서 연세대학(당시 차인태 실장) 모임에 가다가 좌절되면서 연합회도 뚜껑을 닫고 말았다.
2.
나는 그무렵 발음 장애(경상도 발음)로 인해 아나운서 진출의 뜻을 접고 있었고 시를 써서 교내 창작 문학상 두 개를 이미 휩쓸었고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이어 공보부 신인예술상 최고상까지 접수하여 우리 시단의 주목을 받고 있었던 터였다. 졸업하면서 나는 [문인공화국 아듀]라는 글을 학교신문에 싣고 '60년대의 황제'(후배가 붙여 준 말)는 그냥 사라질 뿐이라고 썼다.여기에 방송국에서의 애환도 반쯤 적어 넣었다.
이후 사회진출과 오늘이 있기까지의 과정은 다음 기회로 미루거니와 대학 방송에서 있었던 체험은 일생의 중심에서 끊임 없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해 둔다.
3.
후배들, 그대들이 선택한 방송은 그대들의 실존이고 에너지이리라.그대들의 최선은 그후의 향배가 어느쪽이든 그대들의 고삐가 되어 주리라.끝말을 붙인다. "나는 그대들을 신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