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한국서원이야기
 
 
 
카페 게시글
경상북도(이야기) 스크랩 봉산서원 이야기
관보 추천 0 조회 176 11.12.15 19: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봉산서원(鳳山書院)
소 재 지 :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사산리 527
(원소재지 :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금산리)
건 축 주 :  상주 유림
건축시기 :  1688년(숙종 14)
중건시기 :  1977년

건축 배경
봉산서원(鳳山書院)은 명종 때 상주 목사인 신잠이 세운 상주의 18개 서당의 하나인 봉산서당이 그 모체이다. 이곳은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이 지방의 유생들을 위해 강학하던 곳이다. 소재가 시호를 받아 나라에서 치제하자 유생들이 서당을 서원으로 승원하기로 하여 1688년 사당을 세우고, 다음해에 강당을 건립하였다.

1708년(숙종 34)에 노수신을 주향으로 예조의 승인을 얻어 서원으로 승원하여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와 판곡(板谷) 성윤해(成允諧) 두 분을 배향하였다.

그 후 성극당(省克堂) 김홍미(金弘微), 이재(?齋) 조우인(曺友仁), 동원(東園) 정호선(丁好善), 백화재(白華齋) 황익재(黃翼再) 네 분을 추배하여 일곱 분을 모시게 되었다.

1868년 조정의 명령으로 훼철되었다. 1923년에 사림의 중론으로 단소를 세워 향사하여 오다가 영남유림의 발의로 1977년 묘우가 준공되어 서원으로 복원하였다.

건축 구성
봉산마을 야트막한 산자락에 자리 잡은 봉산서원은 뒤로 봉황의 형상을 하고 우뚝 솟은 봉황산이, 오른쪽엔 천택산이 왼쪽에는 원통산이 감싸고 멀리 팔음산과 백화산을 바라보고 정남향을 하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4칸의 강당,5칸의 재소,4칸의 고사와 봉산지부도신도비,봉산지사적비,하마비 등이 있다. 특히 신도비는 허목(許穆)이 노수신에 관하여 지은 것이다.

-경현묘(景賢廟)

강당 뒤쪽에 돌계단을 올라 서원이 위치한 자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전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이다. 원래의 묘우가 협소하여 강당 뒤편으로 옮겨서 세웠다.

-내삼문
묘정을 출입하는 삼문으로 평삼문으로 지어졌다.

-강당
근래에 서원을 복원하며 지어진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 반의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3칸은 마루이며 양쪽에 온돌방이 시설되어 있다. 강당의 이름은 선교당(宣敎堂)이다.

현판
경현묘(景賢廟)
서원 묘우 정면 처마에 걸린 현판이다.
선교당(宣敎堂)
근래에 신축된 강당 마루 안쪽 가운데에 걸려 있는 당호 현판이다.

내력과 기능

향사일
봉산서원의 향사는 매년 음력 3월 중해일(中亥日)로 정해져 있다. 가을 향사는 치르지 않는다.

향사 홀기에 따르면, 향사 전날 유사는 서원 내외를 청소하며, 제기도 씻는다. 희생을 서원 문밖에 도착하면 제관들이 복장을 갖추고 살펴보며 부엌에 가서 깨끗이 하는 것을 살펴보고는 처소로 들어가 제향에 대한 연습을 한다.

유사는 헌관의 자리를 묘우 중간에 북면하여 설치하며, 서쪽을 상석으로 설치한다. 제관의 자리는 그 뒤에 차례로 설치한다. 헌관의 문밖자리는 동문 밖에 북에서 남으로 차례로 설치한다. 관세위를 동쪽 계단아래 동남쪽으로 설치하며, 행사 시작 1시간 전에 장찬자는 사당에 들어가 제수를 진설한다. 집사는 잔을 씻어 광주리에 담아 상위에 가져다준다. 집례자가 차례대로 행사를 시작한다.

봉산서원의 배향 위치는 묘우 신문의 정면에 문간공 노수신을 배치하고, 그 오른쪽 가까이에 성윤해, 조우인, 황익재 순이며, 왼쪽 가까이에 심희수, 김홍미, 정호순의 순서로 모셔져 있다.

관련인물

관련인물
- 노수신(盧守愼)
1515(중종 10) ∼ 1590(선조 23). 본관은 광주이다. 자는 과회(寡悔)이고 호는소재(소재), 이재(이재), 암실(암실) 또는 여봉노인(여봉노인)이다. 아버지는 활인서별제 홍이다.

1531년 17세에 당시 성리학자로 명망이 있었던 이연경의 딸과 결혼하고 장인의 문하생이 되었으며 1541년 27세 때 이언적과 학문적 토론을 벌였다.

1543년 식년문과에 장원한 뒤로 전적, 수찬을 거쳐 1544년에 시강원사서가 되고 같은 해 사가독서를 하였다.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 되어 죄가 가중됨으로써 진도로 이배되어 19년간 섬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이황, 김인후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하였다.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했던 관계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 대상 후에 바로 흑색의 갓을 쓰는 것이 미안하다고 생각하여 백색 포립을 쓰고 다니기를 국상 때와 같이 하였는데 그 뒤 직제학 정철이 이를 본받아 실행했고 뒤에 교리 신점이 주청하여 담제만한 성격을 가진 문신이자 학자로서 사림의 중망을 지녔으며 특히 선조의 지극한 존경과 은총을 받았다.

저서로 《소재집》13권 8책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며 뒤에 문간(文簡)으로 고쳤다.
- 심희수(沈喜壽)
1548(명종 3)∼1622(광해군 14).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자는 백구(伯懼)이며, 호는 일송(一松) 혹은 수뢰루인(水雷累人)이다. 정자(正字) 건(鍵)의 아들이다.

노수신(盧守愼)의 문인으로, 1570년(선조 3)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해 이황(李滉)이 죽자 성균관을 대표하여 장례에 참여하였고, 157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고 1583년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99년 이조판서가 되고, 홍문관,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고서 안으로는 사명(辭命)을 장악하고 밖으로는 접빈에 힘썼다. 우의정에 올랐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1607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다시 좌의정으로 입상하였다. 1615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있을 때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허균(許筠)과 중국 야사(野史)에 나타난 종계문제(宗系問題)로 다투다가 궐외로 축출되고 이듬해 폐모론이 다시 일자 둔지산(屯之山)에 은거하여 《주역》을 읽고 시를 읊으며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1620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다. 저서로는 《일송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성윤해(成允諧)
생몰년 미상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자는 화중(和仲)이며, 호는 판곡(板谷)이다. 참봉 근(近)의 아들이다.
원통산(圓通山) 밑에 집을 짓고 서책과 자연에 묻혀 일생을 보냈는데, 만년이 된 1583년(선조 16) 이이(李珥), 정지연(鄭芝衍), 이후백(李後白) 등의 추천으로 왕자사부, 태인현감 등의 관직이 내려졌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조헌(趙憲)의 상소에 숨은 선비 중에 언론과 풍지(風旨)가 바르고 굳센 최고의 인물이라고 평가되었다.
- 김홍미(金弘微)
1557(명종 12)∼1604(선조 37).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자는 창원(昌遠)이며, 호는 성극당(省克堂)이다. 아버지는 옥과현감(玉果縣監) 범(範)이다. 조식(曺植)과 류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579년(선조 12) 진사가 되고, 1585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발탁되고, 예문관검열 등을 거쳐 부수찬을 역임하였다.
1589년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남인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되었다.

1604년 강릉부사로 부임하였는데, 이듬해 큰 비가 내려 백성이 많은 재난을 당하였다. 이에 약한 몸을 이끌고 수재로 죽은 자의 조문과 굶주린 자의 진휼에 힘써 직무에 충실하다가 병이 악화되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 조우인(曺友仁)
1561(명종 16)∼1625(인조 3).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자는 여익(汝益)이며, 호는 매호(梅湖) 또는 이재(?齋)이다. 예천출생이다.
1588년(선조 21)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0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다가 1616년(광해군 8)에는 함경도 경성판관을 지냈다.

1621년에는 제술관(製述官)으로 있으면서 고궁(故宮)이 황적유폐(荒寂幽閉)함을 보고 감회일장(感懷一章)을 지어 광해군의 잘못을 풍자하였다가 필화를 입어 3년간 옥고를 치르고, 인조의 등극으로 풀려나 상주의 매호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마쳤다.

시, 서예, 음악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문집 《이재집》과 가사집 《이재영언》이 있다.
- 정호선(丁好善)
1571(선조 4)∼1633(인조 11).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자는 사우(士優)이며, 호는 동원(東園)이다. 대사헌 윤복(胤福)의 아들이다.
1601년(선조 34)진사가 되고, 이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11년(광해군 3)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부정을 범한 춘천부사 이원엽(李元燁), 양양현감 신경우(申景遇)를 파직시켜 지방의 관기를 바로잡았다.
1616년 사인으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가 득세, 계축옥사를 일으켜 영창대군(永昌大君), 김제남(金悌男) 등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이 대두되어 정세가 크게 혼란하자 상주목사로 나가면서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은퇴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파수대장(把守大將)으로 좌도의 병사를 거느리고 죽령(竹嶺)에 진을 쳤다가 강화가 성립되어 철수, 이듬해 병으로 사임하였다.
- 황익재(黃翼再)
1682(숙종 8)∼1747(영조 23).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자는 재수(再?)이며, 호는 백화재(白華齋)이다. 좌승지 진하(鎭夏)의 아들이다.

1702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709년 전라도사에 재직할 때에는 조세의 조운과정(漕運過程)에서 발생하는 폐단을 엄격히 단속하였고, 1711년 무안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거듭된 흉년으로 피폐해진 농민들의 구휼에 힘썼다.

도순무사 오명항(吳命恒)과 영남안무사 박사수(朴師洙)와 함께 청주에 이르러 이인좌(李麟佐)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도리어 적도들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아 구성에 유배되었다.

7년 뒤인 1736년에 사면되어 복직의 명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낙향하였다. 향리에서 성리학 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저서로 《화재집》이 있다.

마을이야기

상주 > 서부권 > 화서면 금산리
- 화서면은 신라시대 경덕왕때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화령으로 부르다가 1895(고종32년) 상주군으로 개편될 때 중화의 서쪽에 위치하였다 하여 최초 화서면이라 칭하게 되었다 현재에도 화서보다는 화령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많은 사람들이 화령이라고 부르고 있다.
상주시의 서부에 위치하고 서북부로부터 속리산의 남맥이 분수령을 이루는 지대로 서북쪽에 봉황산, 서남쪽에 천택산, 동남쪽에 원통산이 솟아 있어 지세가 산악으로 험준하다. 동으로는 내서면 서로는 화남면, 남으로는 화동면, 북으로는 외서면과 접해 있다.

봉산서원이 위치한 곳은 봉산리이다. 봉산리를 구성하는 마을로는

-금산1리(錦山1里)

금산1리는 천택산(天澤山)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1년 금산리에서 분동되었다. 갑방(甲房) 1개소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갑방(甲房)

“갑뱅이" 또는 "금천"이라 한다. 진주강씨(晋州姜氏)가 처음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마을 앞에 금천이 흐른다하여 금천리라 하다가 1914년행 정구역 제정시 금산1리로 되었다. 천택산 아래 금계천 상류에 있는 명소로 산수동과의 사이에 "병목아지 목"이 있고 봉산과의 사이에는 병풍바위가 있으며 서쪽에는 "갈모" 모양같이 생긴 " 갈미봉"이 있다. "갑방(甲房)"이라함은 옛날 병사들의 갑옷을 감춘 곳이라 하여 갑방 또는 갑뱅이로 불리어 지고 있다. 지금도 진주강씨가 많이 살고 있다.

-금산2리(錦山2里)




금산2리는 천택산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 때 광산노씨(光山盧氏)가 봉산 마을을 개척하였으며,1961년 금산리에서 분동되었다. 봉산(鳳山), 산수동(山水洞) 2개의 자연 마을이다.

봉산(鳳山)
"서원마" 라 한다. 봉산서원이 있으며, 앞에 있는 봉산못(서원못)에는 섬이 있었다. 섬에는 수양버들이 있어서 마치 아름다운 처녀가 머리를 풀고 있는 것 같았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 섬은 한 해에 한 번씩 옮기는데 동쪽으로 가면 흉년이 들고 서쪽으로 옮기면 풍년이 든다 하였고, 해마다 연꽃이 만발하여 아름다웠으나 한말에 우연히 섬이 없어졌다 전한다. "서낭댕이고개"로 갑방과 왕래 한다.

산수동(山水洞)
"산수굴"이라 한다. 산이 높고 물 맑은 명소이며, 한때 옹기를 굽기도 하였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