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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문화재지정: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25호(1984.05.17지정) 목은이색영정-보물 제1215호(1995.03.10지정) 가정목은선생문집판-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77호 (1978.03.31지정) 목은선생신도비-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27호 (1984.05.17지정) ❏배향인물: 이 곡(李 穀) 이 색(李 穡) 이종덕(李種德) 이종학(李種學) 이 자(李 耔) 이 개(李 塏) ❏창건연도: 1594년(선조 27) ❏사액연도: 1611년(광해군 3) ❏향 사 일: 3월, 9월 중정(中丁) |
문헌서원은 이 지역을 본관지로 하는 한산이씨 명조 선현 6위를 제향하는 서원으로 기산면 영모리에 있다. 최초창건은 1594년(선조 27)으로 전해지며 처음 이름은 ‘효정사(孝靖祠)’이다. 1611년(광해군 3)에 문헌(文獻)이라 사액 받았다. 제향인물은 이곡(李穀), 이색(李穡), 이종학(李種學), 이종덕(李種德), 이개(李塏), 이자(李耔)이다.
문헌서원의 최초 창건연대는 정확한 기록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단지 이성중(李誠中)이 재임하던 1580년대 초반이라고 보여지나, 기록상 창건연대는 1594년(선조 27)으로 전해진다. 이 효정사는 그 후 정유왜란으로 소진되어 겨우 사우만이 남아 있었는데 1610년(광해군 2)에 관찰사 정엽(鄭曄)과 정언 이경탁(李慶倬: 명곡 이산보의 아들)등이 이를 애석하게 여기고 이건을 계획하여 이듬해에 동재, 다음해에 강당을 건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서원의 재건과 때를 같이하여 1611년(광해군 3)에는 ‘문헌(文獻)’으로 사액을 받게 되는데 이경함(李慶涵), 이덕형(李德馨), 이경준, 이경전, 이현영(李顯英), 이경탁, 이임 등등의 협조와 지원이 컸었고 이때에 이종학(李種學)과 이자(李耔) 2위를 추배하여 모두 6위를 제향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서원재건은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문묘배향 논의와도 때를 같이하고 있었으며 특히 이 과정에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은 이색의 행적에 대한 전면적인 재평가를 역설하면서 이 서원의 운명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문헌서원지에 의하면 창건 후 원장으로 송준길, 윤증(尹拯), 남구만(南九萬), 권변(權抃) 등이 기록되고 있으며 우암 송시열은 ‘문헌서원’이라는 액호를, 진수당(강당), 존양재(동재), 석양재(서재) 글씨는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이 썼다고 한다. 1713년(숙종 39)에는 백옥헌 이개(白玉軒 李塏)를 추가로 추배하여 모두 5현이 제향되게 된다.
문헌서원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고, 1891년 옛 터에 단을 설치하고 제향하였다. 서원구지(書院舊誌)에 의하면 이 설단 당시 한산 향현사에 제향되던 ‘한산 6군자(현암 이종덕, 어성 신심, 남강 이염, 과묵당 홍미, 복천 강학년, 지족당 권양)’을 함께 제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100여년이 지난 1967~1968년에 종족들에 의하여 중건이 발론되고 후손들의 합력으로 영모리 동쪽의 현재위치로 1969녀에 이건하게 된다. 이 해에 현암 이종덕(玄巖 李種德)을 추배하여 현재의 제향인물은 가정 이곡(稼亭 李穀), 목은 이색(牧隱 李穡), 현암 이종덕, 인재 이종학(麟齋 李種學), 백옥헌 이개(白玉軒 李塏), 음애 이자(陰崖 李耔) 등 6현이다.
1)주벽-이곡(李穀, 1298∼1351)
본관은 한산,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이라 하였으며 이자성(李自成)의 아들이고 이색(李穡)의 아버지이다. 일찍이 원나라 제과에 급제하였고 재상들의 건의로 한림국사원검열관이 되어 중국의 학자들과 교유하고 귀국하여 정당문학이 되고 후에 한산군에 피봉되었다. 이제현과 함께 편년강목을 중수하고 충렬, 충선, 충숙 삼조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유고는 가정집 2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2)이색(李穡. 1328~1396)
본관은 한산, 자는 영숙, 호는 목은이며 여말삼은의 한 사람. 14세에 성균관시에 합격하였고 1353년(공민왕 2) 괴과(魁科)에 들었으며 다시 정동성 향시에 장원으로 합격되어 서장관에 임명된 후 원나라에 들어가 다시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지제고가 되었다. 1367년(우왕 3)에 대사성이 되어 정몽주, 김구용, 이숭인 등을 학관으로 하여 신유학의 보급과 성리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또한 유·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 때의 중흥을 주장하였으며, 불교의 폐단시정을 목적으로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관련되어 금천, 여흥, 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에 석방되었다. 저서에 목은문고 목은시고(牧隱詩藁)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3)이종덕(李種德, 생몰년미상)
본관은 한산, 자는 덕성, 호는 현암(玄巖) 또는 삼당(三堂)이라고도 하였다. 이색의 아들로 문과에 장원하고 벼슬은 동지밀직사사에 이르렀다. 정조부사로 명나라에도 다녀왔다.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4)이종학(李種學, 1361~1392)
본관은 한산, 자는 중문(仲文), 호는 인재(麟齋)이며 이색의 아들이다. 공민왕 10년(1361)에 성균관시에 합격하였고 우왕 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장흥고사가 되었다. 창왕 1년 동지공사를 겸하다가 공양왕이 즉위하자 아버지가 탄핵을 받아 함께 파직되었다. 공양왕 2년 윤이(尹彛)와 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부자가 함께 청주에 투옥되었다가 마침 홍수가 나서 사면되었으나 1392년 다시 함창에 유배되었다. 같은 해 장선현으로 옮기는 도중 살해되었다. 저서에는 인재유고가 있다.
5)이자(李耔, 1480~1533)
본관은 한산,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몽옹(夢翁)․계옹(溪翁)이며 이색의 후손으로 대사간 이예견(李禮堅)의 아들이다.
1501년(연산군 7)에 사마시를 거쳐 1504년에 식년 문과에 장원하여 감찰을 지내고 전추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조좌랑에 올랐으나 연산군의 난정으로 사직했다. 1506년 중중반정으로 다시 벼슬에 올랐으나 1519년 기묘사화에 연좌되어 파직 숙청되었다. 그 뒤 음성, 충주 등지에서 학문을 닦으며 여행을 보냈다. 저서로는 음애일기와 시문집 음애집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6)이개(李塏, 1417~1456)
본관은 한산,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자는 청보(淸甫)․백고(伯高), 호는 백옥헌(白玉軒)이라 하였으며, 이색의 증손이자 이계주(李季疇)의 아들이다. 1436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441년 집현전저작랑으로서 당나라 명황의 사적을 적은 명황계감의 편찬에 참여하고 훈민정음의 제정에도 참여하였다. 1456년 성삼문, 박팽년과 함게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 발각되어 피살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구릉지에 배치된 문헌서원은 크게 2개의 공간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강당과 서재가 배치된 ‘강학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강학공간 뒤 한단 높은 구릉을 대지로 조성하여 사당을 배치한 묘당공간이다. 배치좌향은 진좌술향(辰座戌向)인데 이는 흔치않은 서북향이다. 지형조건에 따른 것 같다.
전면에 9개의 계단이 들어있는 외삼문을 들어서면 중정이 있고 중정을 앞에 두고 강당과 서재가 배치된다. 강당은 전면을 향하고, 서재는 강당 앞에서 직각방향으로 배치된다. 이 2개의 건물을 에워싸고 담이 둘러져 있다.
강당 바로 뒤편에 사당을 들어가는 내삼문이 높은 단위에 배치된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또 하나의 담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사당이 그 중앙에 배치되어 있다.
외삼문에서 사당에 이르는 일직선상에 중심축을 형성하고, 외삼문·강당·내삼문·사당이 좌우대칭이고, 다만 강당 앞에는 동재 없이 서재만 있어 배치에 있어서 비대칭이다. ‘전학후묘’식 배치이다.
1)사당
정면 3칸, 측면 3칸인데 전면 1열은 퇴칸으로 하여 정면을 개방해 두었다. 측면 하부는 벽을 두어 막고 기단은 흙바닥으로 마감해 두었다. 1고주 5량집구조이고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2)강당(진수당)
외삼문을 들어서면 마주보이는 건물이다. 정면 4칸, 측명 3칸의 평면에 가운데 2칸통을 대청으로 하고, 양 측면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1고주 5량집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3)서재
정면 4칸, 측면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평면의 2칸은 온돌방이고 온돌방 전면열은 퇴칸으로 만들어 마루를 깔았다. 나무지 2칸통은 부엌으로 사용한다.
4)외삼문
구릉지를 이용하여 한단을 높여 대지를 조성하고 계단을 설치한 다음 정문인 외삼문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1칸이고 3량 구조의 홑처마 맞배지붕 평삼문 형식이다.
5)묘문
사당 앞에 5칸, 측면 1칸의 문간채를 배치하였다. 출입은 가운데 3칸으로 하고 양측 1칸씩은 제기고로 사용하고 있다. 가운데 어칸은 솟을삼문과 같이 높게 만들었는데 겹처마이다.
1)가정목은선생문집판-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77호(1978.03.31지정)
고려 후기의 대학자인 가정 이곡(稼亭 李穀)과 그의 아들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곡은 이제현의 문인으로 도첨의찬성사를 지내고 한산군으로 봉해졌다. 이색은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성리학자로서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고려가 망할 때 태조 이성계에 굴하지 않고 절개를 지킨 삼은(三隱)으로 불린다. 현존하는 목판은 975판이 있으며, 문헌서원 장판각에 보존되어 있다.
이 목판은 한국문화사 뿐만 아니라 국문학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2)목은이색영정-보물 제1215호(1995.03.10지정)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영정은 1404년 제자인 양촌 권근(陽村 權近)에 의하여 화상찬(畵像讚)이 지어지는 것을 보아 이때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원래 영당은 목은 사후 130년이 되던 1526년(중종 21)에 5대손인 이유청(李惟淸)이 고촌의 옛 서원에 영당을 건립하여 봉안되다가 ,1755년(영조 31)에 후손 이수옥과 화공 변상벽이 구본을 보고 2본을 모사하여 다시 제작, 1본은 서울 수송동 영당에, 다른 1본은 문헌서원에 봉안하였다. 그러다가 서원훼철 후 영모리 영당에 영당을 개축하고 봉안하고 있다.
3)목은선생신도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27호(1984.05.17지정)
신도비란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비석에 기록하여 그의 묘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을 기리고 있다.
비는 낮은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며, 비문에는 ‘선생은 후에 죄를 얻어 폐출되었으나, 하늘과 땅만이 그의 고결한 마음을 알리라’라는 내용을 새겨 놓았다. 1433년(세종 15)에 처음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잃어버리고, 1666년(현종 7) 후손들이 다시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다.
참고-충청남도, 충남의 서원·사우,199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천군-장항중 문헌서원 활용 ‘충효정신’ 계승 협약 | ||||||
장항중 학생 문헌서원 이용 목은 이색 따라잡기 등 교육체험키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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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스토리=서천)윤승갑 기자=서천군과 장항중학교(교장 고미영)가 문헌서원과 연계한 지역 특색사업 추진을 위해 두 손을 맞잡았다. 2일 서천군과 장항중학교에 따르면 ‘내고장 숨 불어넣기’ 사업과 ‘학교교육과정 및 학생 참여 프로그램’의 활성화를 촉진하기 위해 양 기관 간의 상호 협력 및 지원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주요 내용은 장항중 학생들이 문헌서원이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이를 적극 지원, 협약을 통해 학생들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키로 했다. 장항중은 올해 학교교육과정 운영을 위한 역점사업의 하나로 학생들에게 서천 출신 목은 이색 선생의 충효사상과 선비정신 계승을 위해 ‘목은 이색 선생 따라잡기’ 프로그램을 추진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학년, 학급 및 동아리 단위로 문헌서원에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장항중 고미영 교장은 “서천군과 체결한 업무협약을 통해 학교에서 추진하고 있는 각종 프로그램 운영이 더욱 활성화 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학생들에게 문헌서원을 통해 내 고장 출신의 위대한 사상가인 목은 이색 선생의 충효정신을 본받도록 적극 지도 하겠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