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위인에 대한 스피치
대목적에 살아가는 인생은 아름답다
제 58회 본부간부회 1992. 9. 25 중에서
♧ 문화대은의 나라
지금부터 꼭 4백년전인 1592년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조선에 15만명의 대군을 보내 침략하였다.
이후 7년에 걸친 전란으로 조선의 국토에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손해를 입혔다. 야만스럽기 짝이 없는 약탈, 폭행, 파괴 -. 죄도 없는 수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고, 도시도 농촌도 몹시 황폐해졌다.
또한 많은 국보급의 문화제도 파괴되거나 반출되었다.
이제까지 몇 번이나 말씀 드려 왔지만, 한국(조선)은 일본에게 있어서 「문화의 대은의 나라」이다.
고대 이래, 한반도로부터 여러 가지 문화가 일본에 전래되어 왔다. 불교도 그렇다. 이 한가지만으로도 일본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를 입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그 대은을 짓밟고 이웃나라 사람들을 괴롭혀 왔다. 중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너무나도 비도한, 인간의 길을 벗어난 일본이었다.
대성인은 「단 일천제인 이라 하여 방법자만이 지옥수에 억류되어 있었는데 그들이 낳아 퍼뜨려 금세의 일본국의 일체중생으로 되었느니라」(어서 959쪽)
--- 일천제인(정법을 믿는 마음이 없어 성불할 수 없는 중생) 이라해서 방법자만이 지옥의 옥졸에게 억류되었다. 그들 일천제인이 (자손을) 낳아 퍼뜨려 금세의 일본국의 일체중생으로 되었던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있지만 대성인을 박해한 일본인의 죄업이 얼마나 깊은가를 잘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이웃나라에 대한 일본인의 침략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악업의 역사를 새겼다.
작은 인물은 지위가 올라가거나, 큰 돈을 갖게 되면 그만큼 자신이 위대하게 된 것처럼 착각하고 오만해진다. 예사로 상대를 깔보게 된다. 은혜를 잊고 은인마저 짓밟아 버리며, 자신의 추한 야망의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다.
과거의 일본이 그랬었다. 지금의 닛켄종도 마찬가지이다(대박수). 이러한 잘못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 이것이 나의 마음 오저로부터의 소원이다. 일본의 숙명전환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비도(非道)의 침략을 물리친 이순신
그런데 도요토미헤데요시의 침략에 대하여 단호하게, 끝까지 싸워낸 위대한 용자가 있었다.
영웅의 이름은 이순신(1545 ~ 98년). 수군의 명장이다.
그런데 국왕이 수도룰 버리고 피신하고, 많은 관료들이 도망가는 가운데 그는 홀로 의연히 일어섰다. 48세의 장년이었다.
이순신의 진두지휘 아래, 모든 곤란을 극복하고 수군은 연전연승. 도요토미군을 철저하게 물리쳤다. 통쾌한 승리였다. 홀로 일어선 그의 사자분신의 싸움이 이윽고 조국을 최후의 승리로 이끈다.
또한 그는 고결한 인격자이기도 했다.<청렴결백을 신조로 한 그는 출세를 위해 권세에 영합하거나, 권력자 앞에서 자신의 신념을 굽히는 일은 없었다. 그 때문에 권력자로부터 미움 받아 역직을 해임당하거나 원죄(寃罪)에 빠지게 되었다>
조국의 위기를 구한 그는 지금도 역사의 영웅으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해, 한국(서울시와 부산시)에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를 영웅이 되게 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여러가지로 논의 되고 있는 바이지만, 하나의 커다란 요소로 “모친의 현명함”을 들 수 있다.
도요토미군의 침략이 시작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80세에 달하는 고령이었다. 병이 잦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음은 불타고 있었다. 어머니는 조국의 위기를 우려하여 편지로 아들을 엄하게 질타하였다. 광포의 싸움에 소극적인 자식을 질타, 격려하는 부인부 여러분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어머니는 이렇게 쓰시고 있다.
「순신아, 이것이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흉악한 왜적의 침략을 받고 세상 사람들이 분노에 잠을 이룰 수 없는데, 나라의 신하인 자가 어째서 싸우지 않고 그 싸움에 목숨을 아낄 수 있단 말인가!
이 늙은 내가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해상에서의 싸움에서 목숨을 아끼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오직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승리의 큰 북이 울려 퍼지기를 바랄 뿐이다.
비록 네가 쓰러진다 해도, 이 어미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찬양할 것이다. 이것을 더 없는 기쁨으로 여기겠다」라고.
이겨서 승리의 큰북을, 민중의 환호의 외침을 조국에 울려 퍼지게 할 수 있도록 해주기 바란다 – 어머니의 간절한 소원이었다. 어머니의 의연한 한마디가 아들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어머니가 참으로 진지하다면, 자식의 생명 오저를 동요시키지 못할 리가 없다. 허식이나 스스러움을 벗어 던지고 아주 진지하게 되었을 때, 반드시 그 일념은 통해간다.
모친으로 결정된다. 어머니의 일념의 깊이가 모든 것을 바꾸어 간다.
♧ 의연히 남편을 재촉한다
도요토미군과의 싸움에는 수 많은 서민도 일어섰다. 그 리더로서 활약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곽재우(1552 ~ 1617년)가 있다.
전란이 닥쳐와 긴박해진 세정에 있어서 처음에는 그는 30대의 한창 활동할 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태평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첫번째 아내를 병으로 잃고 재혼하였지만, 태연자약한 생활태도는 여전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그를 무엇이 “영웅”으로 만들었던 것인가. 그것은 부인의 힘이었다. 재혼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의 일이다.
새 아내는 제대로 가사도 돌보지 않고, 자신의 방에서 빈둥빈둥대고 낮잠만 잘 뿐이었다.
그것이 몇 개월씩이나 계속되자., 당연히 마을의 평판거리로까지 되고 말았다. 물론 가족도 좋게 여길리가 없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그는 드디어 어느날, 낮잠을 자고 있던 아내를 억지로 깨워 큰 소리로 고함을 쳤다.
「도대체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나!」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부인은 갑자기 일어났다. 그리고 유유히 머리를 가다듬고 자세를 바르게 하여 이야기 했다.
「말씀 한번 잘 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쭈어 보겠습니다만, 만약 외적이 우리나라에 침입해 온다면 당신은 술잔과 글을 읽는 책상으로 싸우실 작정입니까. 이 나라에 생을 받은 사내 대장부라면 당연히 친구나 젊은 사람과 어울려 마술(馬術)에 면려하고 무술을 닦아 적에 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너무나도 침착하고, 그러나 의연한 태도였다. 아내의 한마디에 그는 눈이 떠졌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뼈져리게 느끼게 하기 위해서, 아내는 일부러 칠칠치 못한 생활을 보여준 것인가.
“그랬었구나! 나를 분기시키려고 생각하여 ……. 좋다. 하자!”
그로부터 그는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일을 하고, 무술의 연습과 동지와의 작전상담에 진지하게 몰두해갔다. 모든 행동이 빛나기 시작했다.
필사의 사람 만큼 강한 것은 없다. 빛나는 것은 없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하물며 필사의 二字로 신심에 면려하는 사람은 삼세시방의 제불. 제천도 진진하게 그 사람을 지켜간다. 본불님 日蓮대성인의 대자비에 엄연히 감싸여 갈 것은 틀림없다. 또 주위의 사람도 감동받아 움직여 간다. 장난기가 있다거나 어중간한 자세라면 참된 대공덕은 나오지 않는다.
부인도 또한 주위의 사람이 놀랄 정도로 시원시원하게 남편의 일을 도왔다. 부부 두 사람이 적과의 싸움에 주도면밀하게 대비했다.
이윽고 결전의 때를 맞이한다. 그가 이끄는 군은 연전연승을 계속해 침략군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대성인은 남편을 화살, 부인을 활에 비유하고 계시는데, 이때 남편의 힘을 최대한으로 끌어낸 것도 부인의 의연한 일념과 총명함이었다.
참으로 부인의 총명한 지혜는 가정을 바꾸고, 일가를 번영으로 이끈다. 나아가서는 사회 그리고 일국의 미래까지도 열어간다. 이 일화는 부인의 힘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귀중한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고려 민중의 불굴의 저항군 삼별초
청년과의 대화 중에서
♧ 국왕은 항복했을지라도 우리는 싸운다 라고
지금 고려. 조선 도자기 명품전이 개최중이지만, 저 훌륭한 고려청자도 몽고의 침략이라는 고난 속에서 연마된 美입니다.
세계적인 대투쟁의 시대였습니다. 고려의 민중이 대단한 것은 「국왕이 항복할지라도 우리들은 계속 싸운다!」라고 저항을 계속했다는 사실입니다.
강화도로 수도는 옮겨졌지만 삼별초의 병사와 함께 민중의 의용군이 강화도. 진도. 제주도에 버티며 철저히 항전했던 것입니다. 침략당한 이후 놀랍게도 42년간이나 싸움을 계속하였습니다.
청년부 분명히 저항군은 일본에도 함께 싸우자고 사절을 보냈던 것입니다.
SGI 회장 그러나 일본은 응하지 않았습니다. 실은 고려사람들의 몽고군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일본은 그 동안 무사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청년부 결국 고려의 민중 덕분에 무사했던 것이군요. 그 사실을 왜곡하고 「원과 고려의 연합군이 일본에 쳐들어왔다」라고 역사를 가르친다면 “진실”은 전혀 전해지지 않습니다.
SGI 회장 약 반세기에 이르는 침략의 피해는 일본 따위와는 비교가 안됩니다. 포고가 되었던 사람도, 살해된 사람도 헤아릴 수 없고 「해골은 들을 뒤덮는」참상이었습니다.
일본이 무사했던 그 근저에는「日蓮이 억제하였기에」(어서 919쪽), 「성인이 나라에 있음은 일본국의 大喜이며 몽고국의 大憂로다」(어서 850쪽) 라고 말씀하신 대성인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것은 당연하고, 고려사람들의 대은을 일본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대성인의 마음에는 항상 「민중」이 있고 「인간」이 있었습니다. 나라가 전부 광기에 찬 내셔널리즘에 기우는 속에서 국경을 초월하여 한일의 그리고 세계의 민주의 불행에 눈물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자신께서 대난을 받으시면서도 세계의 「입정안국」을 외치셨던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민중의 행복이 목적이고 기준이셨습니다.
어쨌든 고려청자의 저 아름다운 「영원한 푸르름」도 이러한 고난의 시기에 연마되고 완성되었습니다. 그 밖에 고려에서는 유럽보다 2백년 앞서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발명하고 인쇄를 시작했습니다. 또 대장경의 판목으로 8만매(팔만대장경)을 완성시키고, 이 판목으로 인쇄된 대장경은 일본 등 해외에 수출되었습니다.
목화의 재배로 목면도 만들었습니다. 마침내 「목면」이라는 현지의 발음대로 귀중한 의료(衣料)로서 하카다 등에 들어와서 「모멘」으로 일본에 넓혀졌다고 합니다.
한반도의 사람들은 강한 민족입니다. 대륙과 이어진 지역이기 때문에 예부터 무수한 침략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항상 외적과 싸워 승리하여 전국토에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적은 없었습니다. 수천년의 한국사에 있어서 유일하게 일본의 식민지시대(1910 ~ 1945년)만이 예외로 굴욕의 시기입니다.
이 정도로 강인한 저항의 역사는 유럽과 아시아대륙 전체를 봐도 찾아보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청년부 「약한 조선. 강한 일본」이라고 하는 이미지가 戰前의 권력자에 의해 고의로 넓혀졌던 것은, 그것이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SGI 회장 권력은 정보마저 좌우합니다. 예사로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진실」을 백일하에 밝히지 않으면 안됩니다. 학회는 「민중의 행복」을 위해 오로지 끝까지 살아왔습니다. 보살. 부처의 행동을 지역에서, 세계에서 계속 넓히고 있습니다. 종문은 나쁜 권력으로 화해서 자신만 좋으면 된다고 하는 「축생도」의 권화(權化)로 되어 버렸습니다.
청년부 방치해 두는 것은 이쪽까지 악에 통해 버립니다. 싸우겠습니다.
SGI 회장 지도자는 여러가지 상황을 「찬스」로 포착하여 성장해 가야 합니다. 광포를 위해 민중을 위해 진지하게 고뇌해 간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부처의 경계에 통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용감한 마음」에서 배워라
청년부 전국간부회 1998. 1. 18
♧ 삼국통일의 김유신 장군
“결사의 인간이 반드시 이긴다” “마음이 하나라면 반드시 이긴다”
그런데 역사를 되돌아보았을 때, 7세기 한반도에서 삼국이 통일이라는 위업을 성취한 큰 원동력은 한 청년의 용기있는 결기(決起)였다.
그 용자야말로 우리들 진천군에서 태어난 명장 김유신 장군(595 ~ 673)이다.
김유신 장군의 용맹함을 전하는 에피소드는 실로 많다.
629년. 그의 조국은 대패했다. 엄청난 수의 병사가 쓰러지고 아군의 사기는 약해졌다.
이 절대절명의 위기에 씩씩하게 용출했던 이가 젊은 날의 김유신 장군이었다.
“투쟁할 때는 용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적진의 급소를 찌르겠습니다.!”
그는 혼자서 말을 타고 검을 휘두르며 돌격했다. 그 웅자(雄姿)에 전군이 분기했고, 형세는 일거에 역전되었던 것이다.
‘한 사람’으로 좋다. ‘한 사람’의 지휘로 어떻게든 되는 법이다. 광선유포라는 ‘정신투쟁’ 에서도 유사시에 솔선하여 싸우고 엄연하게 이기는 것이야말로 참된 명장이다. 참된 지도자이다.
나는 50년간 모든 일에 그러한 결의로 싸웠다. 그대로 승리해 왔다. 제군도 그렇게 해 주기 바란다.
참으로 싸워야 할 때 싸우지 못하는, 힘이 없는 겁쟁이 인간은 아무리 좋은 인간일지라고 기대할 수 없다.그러한 인간은 엄하게 말하면 오히려 적과 똑같다.
♧ 한 사람이 백명과, 백명이 천명과
이 김유신 장군이 비원하던 통일을 달성한 것은 70대 이후의 일이다.
실로 그 생애는 격전에 격전의 거듭이었다. 수 많은 험난함을 타고 넘어 승리해 온 그의 ‘승리의 장군학’은 무엇이었던가. 그 하나는 “나의 몸을 돌보지 않는 결사의 인간이 이긴다” 는 확신이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호소했다.
“한 사람이 결사의 각오로 백 명과 맞서고, 백명이 결사의 각오로 천 명과 맞서고, 천 명이 결사의 각오로 만 명과 맞선다면 어떠한 싸움도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했다.
자주 내가 말씀드리는 “필사의 한 사람은 만군을 이긴다”는 말과 통한다.
또 김유신 장군은 “마음을 합친 쪽이 반드시 이긴다” 는 것을 깊이 알고 있었다.
언젠가 출진하는 그에게 왕이 걱정한 나머지 말했다.
“이렇게 적은 군세만으로 적의 대군과 맞선다는 건 너무도 위험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김유신 장군은 단호하게 답한다.
“승패의 숫자의 크고 작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가로 결정되는 겁니다.
지금 우리들은 마음을 하나로 하여 생사를 같이하고자 마음먹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느 것도 두려울 건 없습니다.”
불법의 진수도 ‘사람의 마음’이다. 「마음만이 중요하니라」(어서1192쪽)고 대성인은 명언하시고 계신다.
모든 사람의 마음이 따로따로 고립되고 만다면 힘은 나오지 않는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합하면 힘은 곱셈이 되어 몇 배가 된다. 스포츠에서도 가정에서도 그러할 것이다.
이 김유신 장군이 남긴 유언 또한 함축성이 깊다.
“후계자라는 건 처음에는 잘 하는 것처럼 보여도 최후를 제대로 마무리 짓는 일이 어렵다.
대대로 쌓아온 공적이 앗하는 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건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므로 성공하는 것도 어렵지만 수성(守城:이어받아 지키고 완수하는 것도 또한 곤란함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군자를 가까이하고 소인배를 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들로 말하면 “좋은 동지를 가까이하라” “책략과 요령만 피우고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을 멀리 하라”는 것이 될 것이다.
강한 몸, 강한 마음, 강한 두뇌의 사람으로!
청년부 전국간부회 1998. 1. 18
그녀의 이름은 유관순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17세의 젊음으로 옥중에서 숨진 – 신념의 소녀이다.
이미 24년 전이지만 나는 고교생의 대표에게 이 소녀의 일을 조금 말한 적이 있다.(1966년 1월 6일) – 이 소녀가 살았던 시대. 그 때는 일본의 비도적인 식민지 지배의 시대였다. 문화의 대은인인 한국에, 일본은 은혜를 갚기는커녕 약탈과 압제로 보답했다.
그러한 가운데 그녀의 부친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지금이야말로 나라의 새싹인 아이들을 훌륭하게 교육시켜 나가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몇 명의 동지와 함께 학교를 세웠다.
소녀의 부친은 스스로의 신념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털어서 학교를 운영했다. 그러나 고리대금업자인 일본인에게 견디지 못하고, 교육사업은 막혀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인으로부터 폭행을 당해
병마저 들었다. 그녀는 조국의 미래를 위해 헌신하는 아버지의 진지한 자세를, 어린 눈동자에 새겼다. 그리고 아버지를 괴롭힌 일본의 횡포함에 대한 분노를 가슴에 새겨 두었던 것이다.
정말 강한 인격이라는 것은 이러한 분한 마음, 괴로움을 도약대로 해서 단련된다. 무엇이든 순조로우며, 아무런 고생도 없이는, 위대한 인물. 인생이 이루어 질 리가 없다.
노고속에만이 향상이 있다. 스스로 자진해서 고생한다. 거기에 진정한 교육도 있다. 자립의 인격도 만들어져 간다. 안일과 응석은 자기 자신을 좀먹을 뿐이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이야기한 소련의 작가이며 대통령회 의원인 아이토마토프씨도, 아홉살 때 아버지가 도리에 어긋난 권력에 의해 살해 당하고 만다. 그는 자신이 휴머니즘, 인간주의를 위해 본격적으로 싸우게 된 것은, 그런 아버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하고 계셨다.
이윽고 소녀 유관순은 어느 부인의 추천에 의해 서울의 명문 여학교 이화학당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여성도 사회를 위해 활동해야 한다」라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기도 했다.
고향을 떠나 혼자만의 기숙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지방에서 막 올라온 그녀는 학교 공부의 수준이 높아서 처음에는 상당히 고생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녀는 타고난 강한 참을성과 근성을 발휘하여 노력을 계속해서, 눈에 띄게 실력을 길러 나갔다. 그녀에게 있어서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자기 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마음을 이어받아 사랑하는 조국을 구하는 것이다 – 라는 커다란 희망과 목적관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친구들을 소중히 하는, 마음이 아름다운 처녀였다.
식비를 낼 수 없는 친구를 위해서 자신의 식사를 살짝 나누어 준 적도 있었다. 또 밤에 만두를 파는 아르바이트 친구가 있으면 모두가 조금씩 돈을 내어 가서 사오기도 했다. 어느 때는 기숙사의 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에 벽을 넘어 밖으로 나가다가 들켜 선생님께 꾸중을 들은 적도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명랑하게 그 친구를 계속 도왔다.
또한 그녀는 독서를 계속했다. 언제나 책을 손에 놓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잔다르크의 전기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자신도 또한 조국을 위해서 청춘을 바치자. 소녀는 마음에 깊이 정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의 잔다르크”라고 해야 할 그녀의 신념이 깊어져 갔다.
1919년 3월 1일. 민중에 의한 조국 독립운동의 행동이 개시되었다. 그녀도 이 투쟁에 몸을 던졌다.
그것은 폭력을 쓰지 않는 평화적인 데모행진 등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권력은 총검으로써 피의 탄압을 가했다. 그녀의 친구들도 몇 명이나 체포되어 돌아오지 않았다. –
그 이후 소녀는 휴교령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 운동의 추진역으로서 활약했다.
음력 3월 1일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 대해 또 다시 일본의 헌병대는 무차별한 발포를 했다. 그녀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살해되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루 말 할 수 없는 잔혹한 고문이 계속 되었다. 그러나 만신창이가 되어도 그녀는 「독립만세!」라고 계속 외치며 사람들을 격려하기까지 했다.
재판에서도 “죄를 인정하라” 는 협박에 절대로 굴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들어도 그녀는 「내가 “자신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독립만세를 부른 것이 무슨 죄가 된다는 것인가? 오히려 죄를 받아야 할 것은 강제로 남의 나라를 빼앗은 당신들이다!」라고 긍지 높게 단언했다.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조국의 행복을 위해 싸우는데 무엇이 나쁜가” 라고 대항했던 것이다 영원한 정의에 의해 재판 받았던 것은 재판장 쪽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2년에 이르는 옥중생활을 보냈다. 최후까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한 마디도 약한 말을 하지 않았다. 한번도 구국의 불꽃을 꺼지게 하지 않았다. 만세를 부를 때마다 고문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계속 외쳤다. 그리고 1920년 10월 1일. 「독립만세!」라고 외치면서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짧은 생애였다. 선열한 청춘이었다.
그 너무나도 씩씩한 청춘의 발걸음은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불은 널리 번져 이윽고 25년 후에 독립인 「광복」의 날을 맞이했다. 권력은 그녀의 육체를 죽였다. 그러나 정신마저 죽일 수는 없었다.
나는 이러한 불굴의 신념의 사람을 키우고 싶다.
이 소녀 유관순과 같이 생명을 걸고 권위와 싸우는 사람. 다른 사람을 지키는 사람만이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다. 사회적 지위나 명성따위는 “진짜”에서 보면 환영 같은 것이다.
간사이 창가학원 제 9회 건강제 1990 10. 20
한편 ‘한국의 잔다르크’라고 불리는 항일운동의 여성투사 유관순(1904 ~20). 대단히 저명하고 위대한 사람이다. 그녀는 무도한 일본당국의 투옥에도 그리고 잔학하기 짝이 없는 고문에도 절대로 굴하지 않았다.
최후의 최후까지 “독립만세!” 라고 외치면 순사했던 것이다.
16세의 젊음으로 장절한 옥사를 했다. 그녀는 옥중의 동지가 약한 소리를 내면 질타하고 격려를 계속했다. “어째서 한숨 따위를 쉬는가! 고문 받는 게 힘들다고 해도 악역(惡逆)에 대해 침묵하고 간과하는 것보다는 쉽지 않는가! 단호히 싸워 가자!”
역사에 새겨진 피눈물이 떨어지는 이 강함. 이 정의. 이 신념.
그녀에 비한다면 제군들은 너무도 많은 혜택을 받고 있다. 창가순교의 사자왕 마키구치 선생님은 대박해 속에서도 언제나 단언하고 계셨다.
“나의 족적 뒤에 반드시 청년들이 잇따라 이어갑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에게는 도다 선생님이 뒤를 이었다. 도다 선생님에게는 내가 뒤을 이었다.
내게는 수백명의 제군이 있다. 제군이 뒤를 이을 것을 믿고 싶다!”(큰 박수)
제군은 아시아와 세계의 청년, 특히 한국의 청년과 더욱더 깊고 강하게 연대하면서 단호하게 이 사자(師子)의 길을 이어주기를 바란다.
한국이 눈부신 성장을 이룬 것은 어째서인가.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병 등 나쁜 일에도, 승리 등 좋은 일에도, 전부 원인이 있다.
「원인은 무엇인가」를 추구한다 – 이 자세가 중요하다.
한국발전의 원인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우뚝 솟은 싸움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벗은 닛켄종의 악려에게 괴롭힘 당한다거나, 온갖 고생을 해 오셨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다른 사람에게 좌우되지 않는다」이 각오의 신심으로 전진해 오셨다. 그 신심에 무량한 복덕이 쌓여 왔던 것이다.
「한민족 독립운동의 아버지」라고 칭송되는 안창호(1878 ~ 1937년). 마키구치 선생님과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그는 일본의 비열한 침략과 끝까지 싸운 위대한 투사이다.
그는 몇 번이나 몇 번이나 투옥되셨다.
무슨 일이 있든 “어중간한 관용은 무책임하다” 라고, 타협하지 않고 악과의 투쟁을 관철했다.
악과의 투쟁에 어중간함은 있을 수 없다. 도중에 그만 두어서는 놀이이다. 쓰러지든가 쓰러뜨리든가 – 악을 쓰러뜨릴 때까지 철저히 싸우는 이외에 승리는 없다.
그에 대해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일본의 폭거와 투쟁 또 투쟁. 그러한 속에서 「왜 우리들에게는 인물이 없는가?」라는 소리가 높았다.
“더 우수한 인물이 있으면 이길 수 있었을 텐데” 라고 모두가 고뇌하고 고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우리들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결심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인물이 없다고 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이 되려고 공부하고 수양하지 않는 것인가」
환경이 아니다. 자신이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할 뿐이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자신이 싸워가면 된다.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된다.
자기자신이 엄연히 하고 있는 한, 희망이 있고, 향상이 있고, 승리가 있다. 그리고 그 사람 뒤에는 한 사람 또 한 사람, 두 사람 그리고 세 사람으로 이어져 간다.
상황에 일희일우 하며 불평한다. 이것은 상승 장군의 삶이 아니다.
나는 무슨 일이 있든 유쾌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좌우되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영원히 막히지 않는다. 반드시 거기에서 승리의 길을 열어 보인다. 신심이란 무량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대 이름은 윤동주
제 82회 본부간부회 1994. 11.12
아시는 바와 같이 나는 이번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한일의 우호. 그것은 내가 오랫동안 계속 간직해 온 바램이다.
일본은 전쟁 전 한반도,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온갖 포학한 짓을 다해 온 역사가 있다. 일본이 범한 잘못에 대해서 - 나는 도다 선생님으로부터 몇 번씩이나 이야기를 들었다. 아울러 소년시절, 아버지와 큰형님으로 부터도 반복해서 들었던 것이다.
메이지 말 또한 다이쇼의 초기였던가, 아버지는 징병 되어 현재 한국의 서울(당시, 일본의 지배하에서는 경성이라고 불리고 있었다)에서 2년간 체재하셨다. 큰형님도 병사로서 중국에 건너가는 체험을 하셨다.
아버지와 큰형님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인간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분이셨다. 자주 “일본은 가혹하다. 저 횡포함. 오만함. 같은 인간끼리가 아닌가. 이런 것은 절대로 잘못된 일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 나는 소학교 5학년 정도였을까. 그렇지만 두 분의 전쟁에 대한 노여움, 일본의 침략에 대한 분노를 나는 소년의 혼에 깊이 새겼다.
- 불법자(佛法者)로서 오늘날까지 세계의 평화를 위해 달려 온 나의 행동의 원점은 당연히 도다 선생님이시다. 은사께 배운 평화관과 세계관이 근본에 있다. 아울러 아버지와 큰형님의 이런 평화에 대한 염원이 커다란 도약대로 되어 온 것도 틀림이 없다.
권력과 싸우는 시인
나의 큰형님은 종전의 해인 1945년 버마에서 전사하셨다.
향년 29세. 매우 소중한 청춘의 날들을 전장에서 보낸 형님이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1945년 2월. 규슈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7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한, 한 사람의 청년시인이 있다.
그 청년의 이름은 윤동주. -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릿쿄대학에서 배운 후에 도시샤대학 재학중에 ‘치안유지법’ 위반의 용의로 체포된다.
전시중, 마키구치 선생님, 도다 선생님이 체포되신 것도 이 ‘치안유지법’ 위반과 구 ‘형법’ 의 ‘불경죄’ 를 문제로 삼은 것이었다. 평화를 원하는 사람, 사람들의 행복을 생각하는 사람을 보면 없애 버리려고 획책한다. 선의의 사람, 정의의 사람이 서면, 유린(蹂躪)하려고 덤벼든다 -. 그런 권력의 마성(魔性)의 작용은 항상 변하는 일이 없다. 절대로 져서는 안 된다. 일본에 공부하러 온 학생을 소중히 하기는커녕, 비정하게 체포하여 옥사 시킨다는 것은, 정말로 광기의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의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 그것은 온갖 횡포를 다한, 가혹한 것이었다.
그 커다란 희생이 된 한국. - 조국의 독립운동에 관계되었다고 하는 것이 죄가 되어 그는 체포되어 버린다. 폭풍우 같은 권력의 유린. - 그 폭풍우에 몸을 돌보지 않으며, 이 젊은 시인은 영예 높은 청춘의 혼의 노래를 계속 불렀다.
일본이 뺏으려고 한, 사랑하는 조국의 언어로 조국의 문자 - 한글로, 주옥과 같은 아름다운 청춘의 시를 목숨을 걸고 남겼다. 조국에 ‘아름다운 아침’ 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믿고 바라고 싸웠다.
2년간에 걸친 옥중생활에서는 잔혹한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일본의 항복에 의한 해방의 날(8월 15일)을 보지 못하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어떤 처사를 받더라도 죽음의 순간까지 희망을 계속 갖고 싸워 나가는 정신 - 이것이 진실 된 청춘의 혼이다. 더군다나 광선유포라고 하는 가장 숭고한 사명에 사는 청년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에 겁낼 필요가 있겠는가. 광포에 있어서의 고난은 모두가 청춘의 훈장이고 혼의 영예이다. 허영을 부리고, 허풍과 잔재주를 부리며 언제까지나 마음을 정할 수 없는 청년이 어떻게 진실 된 인생을 살수가 있겠는가.
세계는 지금 ‘민주’ 와 ‘인간’의 시대로 향하고 있지만 아직도 수많은 난문을 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 속에 있어서 묘법을 수지한 여러분이야말로 시대의 새벽을 알리고 세계에 인간주의의 ‘새로운 아침’ 을 만들어 가는 사명의 사람이다. 그것을 깊이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대박수)
우러러 보아라 혼의 승리의 창공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함께
시인 윤동주는 탄압 때문에 생전에는 한 권의 시집도 낼 수 없었다. 일본의 관헌에 압수당하여 어둠 속에 묻혀 버린 시도 있었다고 추측된다. 그는 완전히 무명인 채로 그의 생애를 마칠 것을 강요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1백 편 남짓한 시는 지금 조국의 청년들에게 사랑 받아 선열(鮮烈)한 혼의 공명(共鳴)을 계속 주고 있다. 일본에서는 번역되어 윤동주 전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서 출판되었다.
그가 일본에 유학하기 전에 배운 연세대학의 캠퍼스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진 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그가 이 언덕을 산책하면서 노래한 주옥과 같은 시는 암흑기의 민족문학 최후의 등불로서, 민족의 마음을 울리고 그 메아리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함께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는다” 라고.
하늘과 바람과 별 - 그 영원한 자연과 우주와 함께 남을 청춘의 연소. 제군도 또한 아니, 시인 윤동주 이상으로 ‘불멸의 청춘’ 의 혼백을 역사에 새겨 나가는 전사이기를 바란다.(대박수)
또 그가 16세 때에 쓴 ‘생과 사’ 라는 제목의 시는 말하자면, ‘생과 사의 싸움의 노래’ 로 되어 있다. 세간의 사람들은 향락의 노래에 춤추고 있다. 유흥이나 술이나 연애에 들떠 부나 명성에 마음을 빼앗기며 살고 있다.
그는 생각한다. 생은 항상 ‘사의 서곡’ 을 노래하고 있다 라고. 그리고 사람들은 ‘생의 노래’가 끝나는 공포를 응시하지 않고, 그날 그날을 보내고 있다고. 이것이 그의 눈에 비친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와 같은 것은 일찍이 토인비 박사도 말씀하고 계셨다. 키신저 박사와의 대화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언제 죽는지를 항상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되도록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문득 정신이 들어 생각하는 것이다 “아아 벌써 이렇게 나이를 먹어 버렸다”라고.
그는 젊어서 ‘생(生)과 사(死)’ 를 응시했다. 제군은 젊어서 ‘생사의 이법(二法)’ 의 근원의 대법(大法)에 연을 맺었다. 생사를 관철하는 절대적인 ‘인과의 법’ - 그것을 완전하게 설한 것이 묘법이다.
그러므로 묘법을 근본으로 한 우리들의 일념과 행동은 결코 헛되이 사라지지 않고, 대우주와 일체인 내 생명에 새겨져 무량의 복덕으로서 영원히 빛난다.
다시없는 청춘인 지금, 대정법을 수지하고 광선유포에 나아가는 제군은, 말하자면 '생사의 이법'의 달인의 길을 걷는 사람이다 라고 진심으로 찬탄하고 싶다.(대박수)
‘법’ 의 위대함은 ‘사람’ 이 증명
스승을 구하는 마음
또, 그는 ‘서시’ 속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라고.
별을 노래하는 마음 - 대우주와도 이어진 마음.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 - 모든 사람들을 또 초목마저도 포용해 가는 자애의 마음으로 이 사명의 인생을 살아 나간다 -
두 번 다시없는 청춘이다. 인생이다. 청춘의 대공에, 젊은 생명의 대지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혼의 역사를, 제군은 자기답게 새겨두기 바란다.
나도 청춘시대부터 그런 인생을, 신심을, 역사를 걸어 왔다. 오늘은, 폭풍이 지난 후의 구름 한 점 없는 창공. 아무쪼록 제군은 이 창공을 우러러 보는 마음으로 긍지 높은 나의 신념의 길을 당당하게 나와 함께 또 나의 뒤를 이어 나아가 주실 것을, 진심으로 간절히 바란다.(대박수)
더욱이 감옥에서 고독한 죽음을 맞은 이 청년시인은, 일찍이 서울 시대에 “우리들의 괴로움을 알아주는 스승이 있다면 ...” 하고 스승을 구하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부모 자식의 연은 깊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 사제의 연대는 그것 이상으로 깊고 강한 것이다. 인간으로서 자신의 스승을 구하는 마음은 참으로 존귀하고, 스승을 얻은 기쁨은 참으로 크다. 또한
‘스승이 없는 사람은 신용할 수 없다’ 라고 할 정도로, 스승을 갖는다는 것은 중대한 일인 것이다.
예술이든 스포츠든 어떤 분야에 있어서나 ‘사제’ 의 관계는 엄하고도 따뜻하다. 하물며 인생의 근본사인 ‘신앙’ 의 세계, ‘광선유포’ 라는 지고한 대목적에 일어선 ‘사제’가 얼마나 준엄하며 자애에 가득찬 것인가.
내가 무고한 죄로 옥중의 몸이 되었던 것은 29세(1957년). 윤 청년과 거의 같은 나이이다. 오사카의 참의원 보궐선거에 관련해, 선거위반의 혐의를 받았었다. 물론 사실무근의 용의이며, 그 후 (1962년) 재판에서도 무죄가 증명된 것은 아시는 대로이다.
내가 붙잡힌 몸이 되었을 때, 도다 선생님은 청년부를 모아서, 나를 구해내려고 해 주셨다. 선생님은 학회를 탄압하려고 하는 부당한 검거·조사라는 것을 간파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불법은 승부’이며, 광포를 방해하려는 자에게 절대로 져서는 안 된다. 사회에 있어서나 각자의 생활상에서나 승부의 엄한 현실을 똑똑히 보고 불법자로서 승리의 증거를 나타내 가는 곳에 광포의 전진이 있다. 그러므로 횡포한 권력자와는 단호하게 싸울 수밖에 없다. 청년부여 일어서라 라는 선생님의 마음이셨다. 이번에는 자신이 15년이나 투옥되는 위험을 알면서도, 한 사람의 사랑하는 제자를 구하기 위해 싸우려고 하셨던 것이다.(대박수) 나는 은사의 이 깊은 마음을 절대로 잊을 수 없다. 아니 가슴 속 깊이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다.
제자를 생각하는 스승의 마음은 제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은 것이다. 제자에게 있어서 그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 이상의 불행은 없다. 또 스승의 깊은 마음을 모르는 제자가, 자기 쪽이 훌륭하다고 믿어 배신, 반역해 가는 것도, 유감스럽지만 세상의 상사이다.
나는 도다 선생님이라는 희유(稀有)한 대지도자를 스승으로 삼고 철저하게 훈련 받았다. 내 인생에 있어서 이 이상의 영예는 없다.
젊은 날에 인생의 스승과 만나, 진실한 인간의 연마를 받는다는 것은, 청춘의 최고의 영예이다. 이 인생의 진수를 알 수 있다면, 부나 명성 따위의 겉치레에 미혹되는 일도 없고,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무쪼록 제군은 학회정신의 정수인 이 길을 관철해 나가기 바란다.(대박수)
제2회 전국 남자청년부간부회 1990년 09월 일
한국의 청년시인
이전에도 말하였지만, 일본의 군국주의 침략에 맞서 그 횡폭한 탄압과 단호히 끝까지 싸운 한국의 시인으로 ‘윤동주’ (1917∼1945)라는 청년이 있다.
그는 일본에서 특고(特高) 경찰의 손에 의해 체포되어, 무엇하나 확실하게 조사 받은 것도 없이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규슈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다. 27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의 청춘시대 - 그것은 사랑하는 조국을 빼앗기고, 가족과 존경하는 사람들이 학대 받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는 나날이었다. 그는 남보다 갑절, 마음이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보다 더 분개한 생각을 했다. 오만한 악, 교만한 사악을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었다. 인간으로서 청년으로서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일본이 빼앗으려고 한 사랑하는 조국의 언어로 조국의 아름다운, 인간의 진실을 드높이 계속 노래하며 죽어갔다. (SGI회장은 윤동주에 대해 1990년 9월의 한국 첫 방문 직후, 제2회 전국 남자청년부간부회 스피치에서 이야기했다.)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그는 20세 때에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가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 내일도 ...
까치는 한국에서는 길조(吉鳥)라고 한다.
아무튼 제군의 ‘청춘의 길’ 도 나날이 항상 새롭고, 언제나 생기에 가득 넘치는 것이기 바란다.
우리들이 나아가는 길은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바꾸어 가는 ‘환희의 길’ 이며 ‘위대한 변혁을 향한 길’ 이다. 우리 생명엔 ‘언제나 새로운 길’ 이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영원히 계속된다 - 이것이 불법이다. 신심이다. 창가정신이다.(대박수)
청년부간부회, 도시마·분쿄·다이토 합동총회 1992년 12월 일
김구(金九) 선생
법화경의 지혜 – 보현보살권발품
한국의 독립투사인 김구(金九) 선생의 잊을 수 없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가장 부강(富强)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武力)도 아니며 경제력도 아니다” “ 현재의 자연과학만으로도, 편하게 살아가는 데는 충분하다. 인류가 현재 불행한 근본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심이 부족하며, 사랑이 부족한 데 있다. 이같은 마음을 일으킬 수만 있다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모두 만족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자서전 『백범일지(白凡逸志)』>
독립을 달성한 후의 말입니다. 한국에는 이렇게 훌륭한 정치가가 있습니다.‘지성’이 인류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결여되어 있는 것은 ‘자애를 지닌 지성’입니다. 즉 ‘지혜’입니다. 이것을 넓히는 것이 광선유포입니다.
세종대왕
경희대 조 박사 일행 창가대학 방문 축사 1997년 10월
우리가 신봉하는 니치렌(日蓮) 불법에서는 당시의 귀국에 대해 “일본의 스승의 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할 나위도 없이 불교도 귀국에서 전래되었습니다.
젊은 마키구치 회장의 대저서 <인생지리학>에서도 고대의 일본문명은 대부분 한반도에서 배웠다고 강조되어 있습니다. 한 예를 들면 옛날 ‘무사시노’의 대지에 존귀한 개척의 땀을 흘린 것도 귀국에서 온 선인이었습니다. 창가대학·학원이 있는 이 대지입니다. ‘무사시’라는 말 그 자체가 한국어에 유래한다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 설령 내 눈이 먼다(盲目)고 해도’'
생각하면 15세기 조선왕조의 황금기를 구축한 유례없는 명군(名君) 세종대왕은 틀림없는 귀 대학의 모토인 ‘문화세계의 창조’를 체현한 대지도자였습니다. 올해는 이 문화의 대왕이 탄생한 지 6백 주년의 가절로서 이 때 조 박사 일행을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한다.” 이러한 부동의 철학에 섰던 대왕이 극히 과학적이고 더욱 알기 쉬운 나라의 글자인 한글을 만들어 민중에게 문자와 교육의 자비로운 빛을 쏟은 것도 세계에 이름 드높은 역사입니다.
너무 많아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대왕의 업적은 ‘민중을 위해’라는 일점에서 지도자가 전 생명을 걸고 현란한 인간문화가 꽃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한글 문자를 한창 창제할 때, 세종은 학자들과 함께 밤이 늦는 줄도 모르고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건강을 해쳐 시력마저 희미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건강상태를 염려한 신하의 진언에 세종대왕은 엄연하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문자를 만들어 민중의 눈을 열 수 있다면 나의 눈이 못쓰게 되어도 괜찮다.”
나도 또한 ‘민중을 지킨다’, 단지 그것을 위해 살아 온 셈입니다. 또 차원은 다르지만 대학의 창립자는 교육이라는 성업(聖業)에 대해 필사적인 신념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대학이 반석같이 된다면, 그리고 나의 학생이 훌륭하게 성장한다면, 나의 몸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이것이 창립자의 마음입니다. 창립자의 마음은 창립자 외에는 알 수 없습니다. 조 박사의 마음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학생이 훌륭하게 사회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 소식이 얼마나 기쁜가. 또 불행하면 할수록 급히 달려가 격려해 주고 싶다. 불행하든 행복하든 한평생 지켜본다. 어떤 의미에서 친자식 이상의 관계인 것입니다. 교육을 천직으로 정한 조 박사는 권력도 부귀도 영화도 전혀 안중에 없었습니다. ‘인간의 존엄’을 외치고 구속당하면서도 독재정권과 정면에서 대결하신 싸움도 유명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학생을 지킨다. 교육을 지킨다.
그 정신을 우리들도 배우고 싶습니다. 목숨을 걸고 청년의 길을 열어 가는 사자에게 무슨 두려운 것이 있겠습니까. 나도 마찬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