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 |
송간 이정회가 작성하여 眞城李氏世傳遺錄이라 명명한 진성 이씨 주촌파의 家乘. |
[개요] |
1612년(광해군 4) 송간 이정회가 작성한 진성 이씨 주촌파의 가승이다. 종손계열의 직계만 서술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정회의 後識에 나온 “내 금년 나이 칠십이라 노쇠하고 눈이 어두워 손수 기록하지 못하고 사위 생원 이립으로 하여금 쓰게하여 종가에 갈무리한다”는 내용으로 보아 저자는 이정회이며, 필사자는 이립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본 문서의 맨 마지막에는 李溟翼(1617-1687)의 後識가 있는데, 작성시기는 1670∼80년 경으로 추정되며 글씨는 이명익의 친필로 판단된다. |
『진성 이씨세전유록』에는 시조 李碩으로부터 子修(2대)-云候(3대)-禎(4대)-遇陽(5대) -哲孫(6대)-壎(7대)-演(8대)-希顔(9대)에 이르는 이정회의 직계 조상의 행적이 대수별로 나열되어 있다. 단 한가지 특이한 점은 맨 마지막에 〈舍弟庭栢〉이라는 제목 하에 자신의 아우 이정백의 항목을 설정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정백이 학행도 있었지만 자기보다 먼저 죽은 아우에 대한 추념의 의미로 여겨진다. |
내용의 핵심은 역시 각 인물에 대한 略傳이다. 약전은 행장・묘지명・묘갈명 등을 축약한 것이 대부분이며, 세계・행적・자녀관계・배위관계・산소위치・제사관계 기록에 중점을 두었다. 한편 선대의 약전과 이정회의 후지 사이에는 1612년 이정회가 직접 작성한 「族中完議」가 실려 있다. 「족중완의」는 昏禮・喪禮時에 문중간에 상부상조할 것을 규정한 조약이다. |
이처럼 이정회가 선조의 행적을 일일이 기록하여 하나의 책자로 만든 것은 진성 이씨의 안동 이거에 관한 사실이 정확하지 않고 선대에 있어 형제간의 순서를 고증할 만한 문적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즉 이정회는 각종 문중관련 고문서를 수집・열람하여 시조로부터 선친에 이르기까지의 직계 9대의 행적을 기록하여 자손들에게도 길이 보존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이 글을 작성한 것이다. |
[인물] |
李碩은 진성 이씨의 시조로 생졸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 고려말 진보현리로서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후일 아들 子脩의 훈공으로 인해 密直副使에 증직되었다. 천성이 謹恭하여 향리로서의 도리에 충실하였다고 한다. 산소는 진보현의 남쪽 기음곡촌에 있다고 하나 위치가 자세하지 않다. 그래서 이우・이해・이황 3숙질이 동구에 단을 세우고 망제를 지내게 되었다. 松生 金氏와의 사이에서 子修・子芳 두 아들을 두었다. 이정회의 기록에 따르면, 자방 역시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백패를 분실한 관계로 고려말에 朝官・生進을 막론하고 抄軍할 때 생원시 합격자임을 증명하지 못하여 자방의 자손들은 향역에 종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안동・예안일대에 거주하는 진성 이씨는 모두 자수의 후손들이다. |
李子脩는 진성 이씨의 시조 李碩의 아들이며 생졸년 미상이다. 1341년(忠惠王 2) 문과에 합격하여 지춘추관사를 지내고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이 침입하자 總兵官 鄭世雲의 부장으로서 난리를 평정하여 개경을 회복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인해 安社功臣에 책훈되고 松安君에 봉해졌다. 그는 명실공히 진성 이씨의 起家祖로서 현재까지 안동・예안 일대에 세거하는 진성 이씨는 모두 그의 자손들이다. 최종 관직은 判典儀寺事이며, 후일 參議에 증직되고 자손들에 의해 鵲山祠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운구・운후 두 아들을 두었는데, 운구는 진성 이씨 풍기파의 파조가 되었다. |
李云侯는 이자수의 차자로 생졸년 미상이다. 문음으로 軍器寺副正을 지냈으며, 증손 李堣가 현달하여 통훈대부 司僕正에 추증되었다. 풍산 磨崖村에서 안동 부북 周村里로 이거하여 안동에 진성 이씨가 정착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좌의정 權希正의 사위가 됨으로서 裵尙志, 金革과 동서간이 되었다. |
李禎은 생졸년 미상이며 이운후의 장자이다. 음직으로 출사하여 재령군수, 한산군수, 선산부사를 역임하여 치적을 쌓았다. 계유정난 이후에는 佐翼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는 등 세조의 왕위찬탈 과정에 적극 동조하면서 중앙의 양반관료로서 입신하였다. 후에 증손 이황으로 인해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안동 김씨 挺의 딸을 맞이하여 遇陽・興陽・繼陽 등 모두 6자녀를 두었는데, 3자 계양이 바로 퇴계 이황의 조부가 된다. |
李遇陽은 이정의 장자로 무과를 거쳐 인동현감을 지냈다. 청주 이씨 縣監 李義山의 딸을 맞이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이우양 3형제 대에 이르러 진성 이씨는 크게 3파로 분파되었는데, 우양은 安東派(주촌파), 흥양은 輞川派, 계양은 溫惠派의 파조가 되었다. |
李哲孫(1441∼1498)은 이우양의 장자이다. 문음으로 출사하여 忠順衛를 지냈다. 咸昌에 거주하는 淸州李氏 宗源의 딸을 맞이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천성이 청담하고 근후하여 재물에 관심이 없었고, 응견을 벗을 삼아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
李壎(1467∼1538)의 자는 子和이다. 敦勇校尉 龍驤衛副護軍을 지냈으며, 宣城金氏 洪의 딸과 혼인하였다. 무재에 능하였으며, 별시위에 入籍하여 여러번 무과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는 못했다. 이에 과거를 단념하고 家産의 경영에 힘써 크게 致富하게 되었으며, 50여간의 종택을 창건하였다. 흉년이 들면 기민의 구제에 노력하여 인심을 얻었으며, 형제간에 우애도 깊어 동생이 요절하자 조카 濟에게 가택과 전답을 분급하여 삶의 기반을 조성해 주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이정회는 임진왜란 당시 진성 이씨 一門에서 화를 당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 이훈의 음덕 때문으로 회고하였다. |
李演(1492∼1561)은 자는 浩然, 호는 慶流亭이다. 이훈의 장자이다. 학문에 힘써 9차례나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문과에 합격하지는 못했다. 이후 음직으로 훈도를 지냈으며, 노년에는 시주와 응견으로 자락하였다. 가산을 불리지는 않았지만 조상 전래의 구업을 충실하게 유지하였으며, 1492년(성종 23)에는 종택내에 경류정을 건립하였다. 경류정은 진성 이씨 대종택(주촌종택)의 별당으로 흔히 주촌종택의 당호로도 불린다. 정자의 명칭은 이황이 명명한 것이라 한다. 綾城具氏와의 사이에서 1남을 두었고, 후취 平海黃氏와의 사이에서 4남 1녀를 두어 자손이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
李希顔은 1511∼1563. 자는 愚中. 이연의 장자이다. 9세에 어머니 능성구씨를 여의고 조부의 슬하에서 자랐다. 성장해서는 유업에 종사하여 학행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유일로 징소되어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광국공신에 책훈된 아들 이정회의 훈공으로 인해 통정대부에 추증되었다. 안동의 대성인 의성김씨 金禮範의 딸을 아내로 맞아 2남 5녀를 두었다. 의성 김씨는 곧 학봉 金誠一의 고모이다. |
李庭栢(1553-1600)의 자는 汝直, 호는 樂琴軒이다. 이희안의 2자로서 숙부 希雍을 계후하였다. 1588년(선조 21)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임진왜란 때는 형 정회의 명을 받고 金垓・李亨男 등과 함께 안동의병을 주도하였다. 학행으로 경기전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원주변씨와 아산장씨 두 부인을 맞았으나 아들이 없어 希尹의 손자 擧를 양자로 들였다. |
眞城 李氏 世傳遺錄
○惟我眞寶 李氏 起自 麗 末始祖 碩 以縣吏
中生員以子 子脩 貴 贈密直副使世居
邑內天性恭謹常居私室聞主倅坐衙角
聲則下堂拜跪止後就堂凡處鄕之道每
事如是縣倅聞其拜跪之事心爲未安作
舍 靑杞縣 角聲不及之地勸令移居此言
自古流傳其他古老指點 李氏 始祖居址
云云墓在縣南歧音谷村而世遠失之後
孫 靑海君 堣 大司憲 瀣 及 退陶 先生爲
本道使命時設壇望祭于洞口云云公娶
前後室生二子子芳之後不知流派族譜
修正時以未詳懸錄矣去 戊戌 年間
以病遆 義興 避天兵擾攘調病 眞城 地寓
居數年傳聞子芳亦中生員仍兵亂失白
牌 麗 末勿論朝官生進抄軍之時不得考
證白牌仍還本役以故子芳子孫皆從本
役云云考諸縣藏古籍則正統十二年 丁
卯 戶籍中記官 李智父 戶長 乙仁 曾祖擧
人 子芳 首吏 李龜齡 卽其後也問之則世
係分明古籍果如世傳之說信不虛矣
○二代祖 子脩 麗 末明書業及第從 鄭世雲
討紅賊有功封 松安君 入本朝仕至通憲
大夫判典儀寺事始來 安東 葬于 府西面ː
兜率院ː馬鳴洞 娶 黃氏 生二子長 云具 次
云侯 後世子孫不知次序疑未定矣去 癸
亥年 中 庭檜 丁父憂翌年 退陶 先生招
余曰始祖避倭亂移于 安東府 西 磨羅村
之言自古流傳而無所可考宗家必有文
籍搜考來告聞命還披閱世代文記則始
祖及 松安君 文記則無有而故判事致仕
趙璜 妻 金氏 建文元年己卯 別給文記一
張存焉其文曰夫妻已前 寧海 任內 甫城
土居生 癸亥年 因倭亂流移 安東府 西
寓 馬羅村 止接失衣食艱難寓居而家翁七
村姪子副正 云侯 別別孝養故作侍養奴
婢等傳與且其生同兄 云具 前亦給婢子
云云成置文記持進溪上則 先生披閱
再三良久曰始祖避倭移來之說據此文
信然高祖兄弟次序亦無所疑而文籍盡
歸長子派故 周村 無之矣頃者大憲兄爲
忠淸 監司時 云具 外孫持納 松安君 紅牌
則文籍歸 云具 家亦明矣云云其後族譜
時始正兄弟之序又錄避亂移來之語
○三代祖 云侯 以門蔭仕至軍器寺副正以
曾孫參判 堣 貴贈通訓大夫司僕正始移
居府北十五里許 周村 葬府東 佳丘村 娶
安東 權氏 贈左議政 希正 之女也葬府
北 刀畓村 搜理洞 內外子孫或居 佳丘 或
居 周村 便於行祭 佳丘 子孫則祭于 佳丘
墓所 周村 子孫則祭于 搜理洞 墓所故後
世子孫亦遵其規世代漸遠香火或絶 佳
丘 墓所今失之矣往年訓導祖父承 退
陶 先生之命使親率 佳丘 居孽外孫 鄭氓
同 往省尋則丘壟纍纍莫的所指而鄭言
昔在年少時陪父親 奠獻 今至五十餘年
兒時所見未能分明何敢指的云云自此
以後每歲合祭于 搜理洞 無碣之故失其
二代先塋子孫慚慟可勝言哉 兜率院ː搜
理洞 亦無碣石不久必失之常以爲憂往
在 戊寅 丁母憂浮石于 義城 地時 退陶
先生之胤 李寯 爲縣倅出米太若干以助
之事訖卽以私力運致廬所免喪後宦遊
東西又値兵亂付之於無可奈何歲在 戊
戌 李寯 之子 詠道 以戶曹正郞爲本道天
兵調度官 庭繪 以病棄官歸休與正郞通
議門中 庚子 淸明會奠于 兜率院ː搜理洞
兩處墓所仍立碣此後每於子午卯酉年
淸明姓族會奠于 兜率院 搜理洞 可倉山
三處仍族會永爲恒規又令進士 李亨男
修正族譜監董刊役印行於世板則藏在
陶山書院
○四代祖 禎 以門蔭仕至中直大夫 善山 都
護府使參 世祖 朝原從功臣後以曾孫
判中樞 滉 貴 贈嘉善大夫戶曹參判葬
安東府ː水多村ː可倉山 娶 安東 金氏 知甫
州事 挺 之女也葬同原公善騎射有大志
世祖 朝北狄屢寇邊朝廷命設 寧邊 鎭築
藥山 城以控制形勢公爲判官能董治底
績復從 崔潤德 北征有功錫爵歷 韓山 善
山 幷有遺愛有三男長 遇陽 仁同 縣監次
興陽 訓練叅軍次 繼陽 進士是 退陶 先
生祖也六女 南伯庚 柳鳳壽 鄭普文 李疇
朴謹孫 權悰九 子女子孫蕃衍不可勝數
公爲 善山 府使時種盆松朝夕撫玩女壻
朴謹孫 在府地遆去時贈其松曰別女子
無物可贈只遺所愛盆松云云其後 朴公
移種地上盤茂廣大下可坐五十餘人子
孫尋玩者亦多 先生爲本道使命時往
觀之每稱其美 庭檜 與有聞焉而宦遊無
暇未得往見常以爲恨頃者逢 善山 人問
其松存否則兵亂時爲倭剪伐只有根査
云悔歎奈何公爲 寧邊 時有惡虎食人爲
害公自恃騎射之才馳突直至虎穴故作
回馬退還之狀虎大吼突出公便轉身背
射一箭殪之觀者莫不歎服此古老相傳
也
○五代祖 遇陽 以武科仕至 仁同 縣監娶 李
氏 生一男一女居 周村 宗家葬府東三十
里許 爲嶧之原 與弟 興陽 同年登科榮親
時公自 沙野峴 大路來 興陽 自別 破峴 小
路來一時並至慈親望見左右路盛儀顧
謂婢等曰彼來之子何子也云云 李氏 先
逝葬府北 丘老洞 古有短碣不書貫鄕世
係是可恨也 爲嶧山 則前無碣標 庭檜 庚
辰年 間謀諸族人立石加土孽子喜善風
水惑術業 丘老洞 不滿其意故別卜於爲
嶧之山云云世代寢遠子孫散處自近年
來四名日合祭于 丘老洞 爲嶧則只於寒
食仲秋設祭此子孫衰替之致尤可恨也
○六代祖 哲孫 以門蔭爲忠順衛居 周村 宗
家娶 咸昌 居 淸州 李宗源 之女生二男一
女性淸謹無意營産唯以鷹犬終世葬府北
丘老洞 先妣墓側古有碣而內外世孫不詳
錄焉無可稽考是可恨也
○七代祖 壎 善武才古者籍名軍簿然後可許
赴故托名別侍衛累捷初試竟未登科自
分命簿晩事産業家甚豊富創建宗家五
十餘間歲在 辛丑 人民飢饉蓬頭采面往
來盈路公設釜鼎架板於前路作粥排粥
鉢於架上人民往來者皆跪而取食之向
家再拜祝壽而去者不知其幾千萬人至
如昏喪則勿論親疎匍匐救之弟 堪 亦武
藝絶倫而早逝有子濟孤而無依公率養
一家無異己出作家舍以給之備田畓以
與之使不至貧乏其爲善積德類如此老
婢傳言曰上典親家窮不得率去早年使
之別居只以十斗粟爲計活且値旱災無
以料生與南別衛沈別侍衛同約呈議送
開創火田於 鳳停山 種粟所穫至於八十
餘石因以致富由幹奴 貴山 盡忠故也娶
榮川 居 宣城 金洪 之女生二男一女夫妻皆
至極壽葬于宗家南數里許西向之原噫
壬辰 倭敵之亂吾門無一人被害汚辱者
是乃祖積善陰德之賜可不欽敬而鑑戒
哉往年 淸海君 爲 安東 府使時病重招公
敎曰士大夫家皆享四代又尊不遷之位
而吾門則 松安君 神主已爲埋置今不可
追作而可倉祖父本朝原從也於子孫有
德吾遆歸時設族會通議以是祖爲不遷
事界已定矣今病劇未行心事死不瞑目
君爲宗長體臨余死之言議定不遷以遂
余願卒于府其後一遵其言定爲不遷事
曾聞之於先考矣去 癸亥 庭檜 丁父憂大
喪臨迫 退陶 先生不意命招卽往現謁
則 先生曰可倉曾祖神主曾欲陪來而
汝門中連有喪患玆未決意今聞汝喪臨闋
不可仍享親盡之家於禮文亦甚未安汝
禫祭日察訪兄主陪來事已定汝悉此意
凡事措置庭檜告以 淸海君 議定不遷之
事及門中完定之意則 先生曰 淸海君
三寸不考禮文唯以情義議定不可從其
非禮之事再三言之故不敢更達無辭而
退遍告 西澗 伊溪 門長則皆愕然曰門中
專以 淸海君 之議議定矣今聞此言不勝
缺然越三日門長齊進溪上庭檜亦從之
先生所敎如前少無回意門長再三開陳
亦未得請而退過數日 先生又送人招
庭檜 曰 可倉 祖父神主處置極難晝思夜度
未得其宜考諸禮文則家禮中 李繼善 問
答極當以此處置何如卽出示其問答曰
代盡神主遷于墓所宗孫請族人一員□
大祭云云 先生曰 可倉 寺亦墓所也近
日間未及造成一間祠宇否若如是處之
則余意不是仍存其廟 周村 門中亦不遠
送兩勢似爲便當而吾兄年過七十吾亦
年將七十吾兄弟俱沒則神主還歸 可倉
墓所埋置以此揆之則往來頻頻亦似未
安汝有建廟之勢則吾當助之庭檜卽告
門中旬日之間立祠于 可倉 寺後面幾畢
先生又招庭檜曰廟宇幾許成乎昨昨 樹
谷 族會之日議及此事則或言今此子孫
生時則庶似如是爲之後世至殘孫則
非徒不知祭享從不知埋置之禮竟置於
陋地不祀不埋則莫如初不如是處置也
其言似是更思之則門中已定不遷之議
余從禮文一朝論罷則心有未安而揆之
以報本追遠之義則寧失於厚一如門中
完議可倉祖主代代不遷仍享宗家其下
高祖遆遷論以四代以正士大夫祭四代
之義爲當而可倉新造廟宇亦不虛棄 搜
理洞 墓所四名日不得行祭春秋望祭于
可倉祭時其規已成自今以後則造二代
位版而空其面藏于其廟春秋合祭時出
版書紙牓付版設祭事定奪下敎後庭檜
禫祭時 先生親錄遆遷及改題節目命
送門人 李憑 使之叅祭且送位版牓紙筆
墨並皆精潔 乙丑年 秋夕送子弟合祭于
可倉 樓上奉安位版於其廟且藏其筆墨
紙地此後歲遵其禮以至于今高祖神主
亦遵 先生命令遆遷于最長房五寸族
長 李希孟 家 乙丑年 庭檜 遆任 橫城 還家則
其叔夫妻以病旣歿子孫失所神主僅免
兵火茅屋中寂寞無依不勝悲感通議門
中奉來合祭于祠廟事雖未安情實追遠
子孫知悉此意高祖以上則遆遷奉送于
最長房
○八代祖 演 自少力學九度入格竟未成功
晩事鷹犬日張詩酒待人接物極致歡情
□鄕 欽敬 皆以風流長者稱之不拘小節
不營産業謹守祖業辱不及身壽至稀年
嬰疾卒于家葬 沙野 南向之原先娶 綾城
具氏 生一男後娶 平海 黃氏 生四男一女
具氏 葬 伊溪 家後洞南向之原 黃氏 與公
同原幷有碣石內外子孫蕃衍不可勝記
也
○九代考[諱]生纔九歲慈母下世長養於
祖父家及長以儒爲業事載墓碣中娶 義
城 金氏 金禮範 之女生二男五女壽至五十三
癸亥 卒于喪中葬 伊溪 家後洞 具氏 墓側
從遺命也後十五年 戊寅 金氏 卒葬同原
合墓有碣
○舍弟 庭栢 天性剛毅仁孝持己以正待人
以誠處心行事表裏如一淸謹寡欲好善
疾惡見善則如登聞惡則若崩不爲利動
不爲威屈有一妹家貧而多子女常爲之
矜悶焉永給己婢使之扶窘其於親族朋
友患難之際必以至誠相扶自家事則專
不關他鄕閭皆敬服而嚴憚之友人權宇
顯世而早逝其子女皆幼豪奴悍婢將叛
通議本家杖殺厥魁以故權家賴以得保
歲在 壬辰 逢倭變郡縣不守主將逃遁
乘輿西巡廟社丘墟命令不行統紀陵夷
土賊蜂起人心雲擾一鄕推爲義將與 禮
安 居翰林 金垓 鄕人 裵龍吉 □□相議通
文於四隣列邑大起鄕兵一遵軍法小不
饒貸號令嚴肅數載之間獻馘相繼不幸
金垓 以病卒于軍中弟亦以宿疾罷兵嗚
呼痛哉有志力學竟莫之遂晩得司馬安
分養病不出門外者有年矣病至難醫 辛
丑 卒于家享年四十六葬于家後洞先塋
一里許南向之原嗚呼平生常以爲人後
爲恨不幸又無子女信乎天不可必也臨
終之日自疑有遺腹不定後嗣姑以摯兒
托其家事而待遺腹眞 然後令余處之
云云余不忍背其將死之言令摯蒙三寸
服主祭祀接賓客而已厥後遺腹竟歸
虛僞故摯兒仍服三年喪其家不遵
弟之意至于今不定其嗣豈料弟家之事
至於此耶嗚呼痛哉略記其平生心事附
之於 祖先遺錄之末使後孫鑑戒也
표지
○蓋世代事跡略陳于右然祭享節目闕而
不錄此乃欠事也始祖及 松安君 二代墓
祭則 麗 末國初多難之日不知何樣處置
而 搜理洞 可倉 墓則別出位畓流來故以
其畓所出四名日祭時分授守直人精備
祭物祭酒則宗家辦出行祭其餘爲嶧 丘
老洞 沙野 家後洞亦皆有位土若干代盡世
降守護似難則許姓孫繼葬者以其田畓
並屬其派使之永世守護如無繼葬者則
其位田宗孫次知精備祭物每歲請族人
一祭爲當若子孫不知此義或有爭端則
贖公法當而但代代流傳之物付之他處
似爲不便還入宗家近於情理矣大抵宗
法至嚴且不可以私意輕改世或有不
謹之人自以爲己物擅自撓改使其宗孫
貧殘以至不祀誠可痛也吾宗則三代祖
父始卜於 周村 創立宗家位田奴婢極其
豊裕世傳不虧而曾祖父爲其子女割宗
家西邊位田排置兩家而別出其代有增無
減其亦幸矣噫吾門起自國初爲一邦大
族唯以謹祀追遠爲事而況 退陶 先生
出於吾門凡我後孫寧可以不謹不敬以
忝吾門哉後孫宜諦念玆遺錄敬守不
墜則死猶瞑目盍相勉之哉
○族中完議
夫昏喪人道之大事也凡民有喪匍匐救
之況於同源一派之人乎唯我姓親散居
隣鄕而道路隔遠不可如意相扶吾宗門
則同居一鄕相距不遠所當盡心相顧而
前無此規大是欠事今與門長諸族僉議
純同立此規約自今以後各出米太荏子
若干升相扶永爲恒規而若臨其時定有
司收合則或有不謹終至不長宗孫次知
凡有昏喪聞卽出文使墓直奴婢收送則
事勢便易矣宗孫若不用意門中僉議定
罰諸族不從者則亦施損徒相爲勅礪而
孽屬等擯而不與則不知親切之義終至
於路人許其願從者一樣相救俾知姓族
親親之義幸甚
嗚呼余以眇末之裔追 祖先流傳之
事極知僣踰而前無可考之文莫知終始
之迹常竊愧歎去 癸亥年 遭父喪翌年
退溪 先生招余敎曰 始祖避倭亂移居
安東 之事及兄弟次序無文可考宗家必
有可稽之文汝可搜覓來余卽考諸古文
書中得一張文記進現則 先生再三披
閱敎曰其遷移之迹兄弟次序今見此文
釋然無疑矣噫自始祖至 先生不過六
七代而尙且如此況於後裔之疎遠者乎
是以忘其文拙略記[祖先]世系及門中
世傳之語使後孫觀鑑焉嗚呼余今年七
十衰老眼昏不得自書令女壻生員李苙
書藏于宗家云
時 萬曆四十年壬子六月日 光 國原從功
臣通訓大夫行 義興 縣監 李庭檜 識
謹按 松安君 政案□□□□□
春州事兼勸農防禦使 李○○ 本貫
甫城府 父追封奉翊大夫密直使云云
則副使之副字出□□傳之誤也又按政
按 洪武十五年 爲正憲大夫判典儀寺
事而 洪武二十五 年我 太祖大王 始開國
卽位則其非入本朝爲判典儀事亦明矣
始祖墓在 歧音谷 世遠失之後孫 靑海
君 大司憲 退溪 先生爲本道使命時設
壇望祭于洞口云 始祖於六代 祖判書公
爲 高祖而親未盡也贊成公 靑海君 皆
逮事 判書公而 二公於其時年皆長成
判書公祭 高祖之日二公豈無陪從攝事
之時乎 判書公亦豈不指言 高祖墳墓
於二子而乃設壇望祭乎此必無之理
也況 司僕正公於 靑海君 爲 曾祖而
葬 安東 佳丘 村則 靑海君 爲 安東 府使
四時節祀及無時省掃時子姪輩亦豈
無往從者而識其墓乎其時子姪中如
潛河漪諸公年或三十九或三十六二
十四而大憲公年已二十餘先生年亦
十六七常常往來於府衙時豈不省拜
於路旁 高祖墓乎在 先生時已失
高祖墓云者事甚可疑 先生之令訓
導公與孽外孫 鄭氓 同往省尋之事亦
甚可疑 先生果若失 高祖墳塋則
其痛心刻骨當如何也而乃只令訓導
公與孽外孫 鄭氓緩 緩往尋之哉其曰
後世子孫便於行祭子孫之在 佳丘 者祭
佳丘 墓所在 周村 者祭 搜理洞 墓所世
代漸遠今失墓所云者此其實錄而盖
其時 佳丘 墓下無直孫而只有外孫 鄭
故也可勝痛哉且 先生嘗手書世系族
譜而曰諱某居眞寶葬 歧音谷 曰諱
某葬 安東府ː西兜率院 後洞曰諱某葬
安東府 北加 仇伊里 云云而無一言及於失
墳塋事文集及家世遺事雜錄中亦
無失墳墓痛恨之語則 先生時已失
兩世墳墓云者是齊東之語而隨所聞
錄之耶藐余後生極知僣猥而事在
先世敢此傳疑以備叅考云
通政大夫前行 光州 牧使 李溟翼 謹
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