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이란 나의 삶을 정화하는 카타르시스’
양희은은 요즘 각종 프로그램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다. 이리저리 TV 채널을 돌리다보면, 그녀가 어느 한갓진 시골집 툇마루에 걸터앉아 고추장과 온갖 나물을 쓱쓱 비벼먹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또 어느 프로에서는 조카뻘로 보이는 후배들과 함께 퀴즈를 풀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멋들어진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된 것 같아 아쉽게 느껴진다. 분명히 양희은이 활약했을 당시의 노래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말이다. 이런 사람들의 생각을 알았는지, 양희은이 팬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 오는 10월 18일부터 3일간 삼성코엑스 아티움에서 그리고 11월 6일, 7일 양일간 세종문화회관에서 ‘느리게 걷기’라는 타이틀로 공연을 갖는다.
안녕하세요, 양희은입니다. 아 떨려 “팬들을 위해 일 년에 한 번씩 공연을 해요. 이유는 다양해요. 팬들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저를 위해서이기도 해요. 저에게 공연이란 자기증명과 같은 중요한 의식이거든요.” 그녀는 공연을 할 때 제일 편안하고, 행복하고, 따뜻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얼마나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는지 비슷한 느낌의 단어들을 연방 나열했다. ‘좋아, 좋아. 바로 이걸 기다린 거야.’ 그렇게 공연을 기다리고 기다린다고. “지금까지 함께해온 멤버들과 공연연습을 할 때가 제일 행복해요. 우리 집에서 밥을 해먹으면서 ‘이번 공연에서는 이걸 빼고 이걸 넣자. 나는 누나가 팝송을 부르는 게 좋은데…’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누죠. 혼자 노는 걸 많이 하는데, 콘서트 연습은 절대 혼자서 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흥이 나요.” 그녀는 예전부터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가수로 데뷔했을 때부터 DJ를 해왔기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이 많지 않았다. 또 일하는 시간도 달랐다. 새벽 4시쯤 라디오 진행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한숨 자고 나면 어느덧 정오를 바라보는 시간이었고, 오후 6시가 넘으면 남편이 귀가한다. 때문에 그녀는 사소한 취미라도 함께할 친구가 많지 않았다.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을 찾다 보니까 무작정 걷거나 해발 87.7m(웃음)의 정발산을 올라요. 그게 전부죠. 그래서인지 낯가림도 심한 편이에요. 열린 직업의 폐쇄성이라고 해야 하나?”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말문을 트고, 말리지만 않으면 카메라 앞에서 주구장창 연설을 할 것 같은 그녀가 뜻밖에도 카메라와 무대 울렁증이 있다고 고백했다. 카메라만 앞에 오면 표정이 얼음처럼 굳고, 노래를 하려고 무대 위에 올라서면 10분 정도 시간이 지날 때까지 심장 뛰는 소리가 귀로 들릴 만큼 긴장을 한다. 최근 예능프로그램의 출연이 잦은 이유도 그런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 시작한 도전이다. “자꾸 피하다 보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요. 그나마 TV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게 ‘열린 음악회’ 정돈데, 그것도 일 년에 고작 네 번 정도입니다. 그 무대에 서면 보통 서너 곡을 부르는데, 겨우 노래를 부를 만하면 무대에서 내려와야 해요. 그래서 제가 출연했던 TV 프로그램을 보면 바보처럼 보일 때도 많아요. 그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겁니다.”
‘아침이슬’에 묻혀버린 코미디언의 꿈 두툼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고백을 한 양희은. 그러나 그녀에게는 사람들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꿈이 있다. 그녀는 얼마 전 한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카메라 울렁증이 극복되면 환갑이 되어서라도 코미디언으로 데뷔하겠다는 폭탄발언을 했다. 자신의 어린 시절 별명이 ‘여자 구봉서’였다는 설명까지 곁들였다. “학창시절부터 제가 입만 열면 친구들이 까르르 웃었어요.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코미디언이 되는 게 꿈이었죠. 노래는 자발적으로 부른 적이 없어요. 애들이 신청을 하면 부르는 정도였죠. 그리고 초등학교 때부터 연기를 했어요. 아동극 대회에 나가 1등을 하기도 했지요.”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액션을 과장하는 슬랩스틱 코미디는 아니다. “가발도 쓰고, 흉물스러운 분장도 할 수 있겠느냐”는 농을 건네자 “이빨에 김 묻히고, 바보 연기하는 게 코미디의 전부는 아니지 않느냐”며 진지하게 답했다. 그녀는 자신의 그런 희극적인 면이 ‘아침이슬’에 묻혀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예전에 양희은이라는 이름은 ‘금지곡’ ‘민중가요’ ‘좌파’ 등의 단어들과 함께 따라다니는 연관검색어였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아침이슬’이 시대를 대변하는 노래가 되어버렸죠. 그래서 ‘아침이슬’은 나에게 올무가 되었어요. 그 부담을 씻어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몰라요.” 이념에는 특별한 관심이 없고, 오히려 그런 시선을 두려워하는 그녀지만 고인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특별한 인연은 피할 수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녀는 노 전 대통령 취임식과 영결식에서 모두 노래를 부른 유일한 가수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행동에 이념적인 색깔을 덧씌우는 것을 경계했다. “솔직히 그런 제안이 부담되기는 했어요. 용기가 필요했던 게 사실이죠. 하지만 피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자기를 찾는 무대가 있다면 당연히 서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 마음에 노래를 불렀는데, 수많은 악플에 시달렸어요. 예상했던 일이긴 하지만요.” 그녀의 홈페이지에는 ‘좌파’ ‘똥개’ ‘돼지’ 등 차마 입에 담지 못할 글들이 올라왔다. 그녀는 그걸 읽으면서 분단국가의 슬픈 현실을 다시 절감했다. 그리고 어린 친구들이 악플 때문에 왜 목숨을 끊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색깔이 없어요. 이념에도 전혀 관심이 없고요. 그저 사람들이 나에게 그런 옷을 입혔을 뿐이죠. 내 노래 중에 ‘아침이슬’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소박한 사람들의 삶이나 사랑에 대한 노래들도 많아요. 하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도 금지곡이었죠. 민주주의를 그리워하는 노래라는 게 이유였어요.(웃음)”
시련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양희은에게 시련은 그뿐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찾아온 두 번의 암은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할 만큼 커다란 충격을 주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그것을 시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그녀는 암 치료를 권하는 의사의 충고를 거절하고 혼자의 힘으로 극복해냈다. “암수술을 집행한 의사에게 ‘수술이 잘 됐다며? 자신 있다며? 수술자리가 깨끗하다며? 그러니까 나는 항암치료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죠. 암에 대한 사전지식도 없었고, 이렇게 저렇게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던 것뿐인데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말한 게 되어버렸어요. 근데 그렇게 극복하니까 여기저기서 ‘투병기를 쓰자’는 전화가 쇄도했죠.” 그래도 그녀는 당시 두 번의 수술을 해준 의사 선생님을 은인으로 생각한다. 그 의사선생님이 신중하게 수술을 해준 결과, 지금처럼 노래를 다시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자궁부위는 목소리하고 연관이 있는데, 아직까지 그 의사선생님 덕분에 노래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투병생활을 하면서 하나 깨달은 게 있어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구분되더라고요. 어떤 사람은 나를 위로해준다고 찾아와서 자신이 암에 걸리지 않은 것을 행복해하는 그런 눈물을 보였어요. 위로하는 입장을 즐기면서 ‘당장 내일 산부인과에 가서 검사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게 느껴졌어요. 또 실제로 그런 사람도 있었고요.” 그때 그녀는 많은 사람들을 붙잡고 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속내를 알아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친한 몇 사람을 제외하고 사람들과의 만남을 자제했다. “요즘도 일이 없으면 곧장 집으로 들어가요. 돈 버는 일이나 그것에 연관된 일이 아니면 바깥출입을 하지 않아요. 겉 친구 많을 필요 없어요. 속 친구 하나만 있으면 돼요. 내 창자가 쏟아질 때 손으로 받아주는 친구! 너무 비약이 심했나요?(웃음)” 그렇게 집으로 곧장 향하는 양희은의 취미는 무엇일까? 그녀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조조영화 보기, 걷기, 사우나하기. 하지만 지난해 겨울 어머니가 아프고 난 다음부터는 걷기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요즘은 다 귀찮아졌어요. 예전에는 음식 만들고 운동하는 걸 꽤 즐겼는데 요즘은 운동 대신 사우나에 다니고, 음식도 잘 안 해먹어요. 기운도 예전같지 않고요. 그리고 이상하게 운동을 좀 하면 불면증이 생기더라고요.” 세월 탓인지 점점 기력이 딸린다는 양희은. 하지만 일에 대한 욕심과 도전정신은 여느 젊은이 못지않았다. 그리고 공연문화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가수들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공간이 없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그녀가 한창 활동하던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무대가 많았다. 그래서 따로 노래 연습을 할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매일 무대에서 노래를 했기 때문에 실전이 연습이고, 연습이 실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괜찮아요. 그렇게 적응하며 사는 거죠. 그래서 내가 자발적으로 공연을 하잖아요? 누가 어떤 무대를 만들어주느냐가 뭐가 중요해요? 팬들이 나를 보고 싶어하고, 내가 팬들을 보고 싶을 때 공연을 하면 되니까요.(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