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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1일차 10월24일(토) |
2일차 01월 25일(일) |
06: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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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0 기상 |
07: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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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0-07:30 금당실마을답사 |
07:40-08:00 초간정 | ||
08:00 |
08:00 화성홍보관 앞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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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0-09:00 용문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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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0 |
09:00-09:15 여주휴게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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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0-10:00 부용대 | ||
10:00 |
10:00-10:15 단양휴게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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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11:20 하회마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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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 |
11:00 서안동 I·C | |
11:20-11:50 봉정사 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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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0-11:50 병산서원 | ||
12:00 |
12:10-12:30 이천동미륵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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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13:20 점심식사 |
12:40-13:10 회룡포 | |
13:00 |
13:10-13:40 점심식사 | |
13:40-14:30 안동민속박물관 | ||
14:00 |
13:40-14:10 삼강주막 | |
15:00 |
15:10-16:10 도산서원 |
15:00-15:10 소수서원 |
16:00 |
15:30-16:30 부석사 | |
16:30-17:00 군자마을 | ||
17: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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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0 치악휴게소 |
18:00 |
18:00 예천 금당실마을 도착 삼겹살 구이 및 휴식 |
18:30 수원도착 해산 |
19:00 | ||
20:00 |
답사정리 |
피곤하겠다. 한 잔 먹고 자야지! |
21:00 |
자든지 말든지 |
참고자료(參考資料)>
1. 天燈山鳳停寺(천등산 봉정사 :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901번지)
-국보 제15호인 극락전(현존 우리나라 목조건축 중 최고(最古)의 건물)-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스님이 창건한 사찰. 천등산은 원래 대망산이라 불렀는데 능인대사가 젊었을 때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고 있던 중 스님의 도력에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 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으므로 '천등산'이라 이름함. 그 굴을 '천등굴'이라 함. 그 뒤 더욱 수행을 하던 능인스님은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서 날리니 이곳에 와서 머물러 산문을 개산하고, 봉황이 머물렀다 하여 봉황새 봉(鳳)자에 머무를 정(停)자를 따서 봉정사라 명명고려태조, 공민왕이 다녀감
2. 이천동 석불(泥川洞 石佛)
자연암벽에 신체를 선으로 새기고 머리는 따로 올려놓은 전체 높이 12.38m의 거구의 불상이다. 이러한 형식의 불상은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는데,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보물 제93호)도 이와 거의 같은 수법을 보여준다.
머리의 뒷부분은 거의 파손되었으나 앞부분은 온전하게 남아 있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이 솟아 있고,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어서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진 거구의 불상에서 일반적으로 느껴지는 미련스러움은 보이지 않는다.머리와 얼굴 특히 입에는 주홍색이 남아 있어서 원래는 채색되었음이 분명하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몇 개 안되는 옷주름은 매우 도식적(圖式的)으로 표현되고 있다. 양 손은 검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어 왼손을 가슴에 대고, 오른손을 배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지방화된 거구의 불상 가운데 하나로 당시 불상 양식을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3. 안동민속박물관
1) 도입부에는 안동의 선사문화와 불교문화 등을 전시. 안동은 중부이북지역과 남부지역이 교차하는 곳으로서 문화의 교량역할을 하였다. 선사유적의 유물로 고인돌, 선돌, 고분, 무문토기, 돌화살촉, 그물추, 숫돌자귀 등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선사문화의 유적 외에 안동에는 유교문화가 성행한 조선시대 이전인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의 불교문화도 많이 성행하여 이에 대한 여러 유적과 유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특히 불교문화의 한 형태로 전탑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 안동의 불교문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 조선시대에 안동의 도시규모 등을 알 수 있는 행정모형도 전시.
2) 洞祭堂(동제당)은 주로 마을 어귀에 있으며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매우 신성한 공간이며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당집, 동수, 돌무더기로 구성되어진 것이 일반적이나 당집만 있는 곳도 있다. 당집에는 다양한 신체를 모시면서 남신일 경우에는 이씨할배, 여신일경우에는 김씨할매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 마을의 창건조상을 의미한다. 동제당은 마을을 드나드는 부정한 것과 잡귀를 막아준다고 하여 골막이, 골맥이라고도 하며 성황당, 국신당, 서낭당, 삼신당 등 여러 가지로 부른다. 동제는 주로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날 새벽 1시경에 지내나 열 나흘날 새벽 1시에 지내는 곳도 있다.
3) 産俗(산속)-산모가 해산을 할 때에는 삼신상을 차려놓고 삼신에게 순산을 빈다. 산모는 동쪽이나 남쪽을 향하여 아기를 낳는데 이것은 동쪽을 향하면 부자가 되고 남쪽을 향하면 명이 길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산파는 아기가 태어나면 탯줄을 자르는데 아들이면 낫으로, 딸이면 가위로 잘라서 태운다. 태운 재는 밭에 뿌리는데 세 살 터울이면 세 고랑을, 네 살 터울이면 네 고랑을 넘어서 뿌린다. 아기가 태어난 후 삼칠일까지 대문에 금줄을 쳐서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4) 生業(생업)-안동은 경상북도 내륙에 위치하며 총면적의 72%가 임야이고 경지는 16% 정도이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한서의 차가 뚜렷하며 토질은 낙동강과 그 지류인 반변천을 중심으로 강남은 대체적으로 점토질이며 강북은 사질토이다. 식량작물의 생산량은 전체의 86%가 미곡이 차지하며 나머지가 맥류, 두류(콩, 팥, 녹두), 서류(고구마, 감자) 등이 차지한다. 특히 안동을 비롯한 인근 지역에서 생산되는 담배, 고추, 마늘은 전국적으로 질이 우수하며 생산량에 있어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5) 冠禮(관례)-남자가 태어나서 일정한 연령에 이르면 성인으로서의 사회적 지위와 자격을 부여받는 의식을 행한다. 이것이 사례(四禮)의 하나인 관례이며 여자들에게 하는 것은 계례라고 한다. 관례는 보통 15세에서 20세 사이에 상투를 틀고 갓을 씌우는 것으로 초가례, 재가례, 삼가례 순으로 진행된다. 관례를 할 때 이를 주관하는 빈을 청하는데 집안과 두터운 친분이 있고 덕망 있는 사람으로 한다. 이러한 관례는 전통사회에서는 엄격하고 경건하게 치르는 아주 중요한 의식 이였으나 사회문화가 변화하면서 이제는 그 자취마저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안동에서는 아직도 각 문중에서 간간히 행해지고 있다.
6) 교육기관
서원은 선현에 제사하고 인재를 양성시키는 민간교육기관으로 조선중기 이후에 크게 성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542년(중종 37)에 풍기군수인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이 그 시초이다. 그 후 국가에서 현판을 하사한 사액서원이 생기고 노비와 전답을 주어 장려하기도 하였다. 안동은 예로부터 선비의 고장이라 하여 많은 서원들이 설립되었으며 안동 최초의 서원은 여강서원인데 후에 호계서원으로 개명함. 鄕校는 고려시대부터 설립되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교육기관으로 중앙의 성균관, 4학과 더불어 지방중등교육기관이다. 부, 목, 현 등 각 지방에 하나씩 설립되어 규모에 따라 교수, 훈도, 학장의 교육관을 파견하여 소학, 사서, 오경, 근사록 등을 가르쳤다. 또 향교에서는 교육뿐만 아니라 문묘에 공자를 비롯하여 성현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며 그 지방의 향교순화를 위하여 여러 가지 행사를 주관하였다. 안동향교는 1567년(명종 22)에 당시 부사인 윤복이 명륜동에 중건한 것으로 그 규모가 영남의 으뜸이었다고 한다. 이 장에서는 관학과 사학의 비교전시를 위하여 안동향교와 도산서원을 그대로 모형으로 재현하였으며 특히 안동향교는 안동의 읍지인 영가지를 참고로 하여 복원한 것이다.
7) 陰宅(음택)-우리 선조들은 땅에 지기가 있다고 믿어, 지기가 좋은 곳을 명당이라고 하였다. 명당에는 양택과 음택이 있는데 양택은 집터를 가리키는 것이고 음택은 묏자리를 가리킨다. 보통 묏자리를 잡을 때에는 음양오행설에 입각한 풍수지리설에 따라 터를 잡는데 용, 혈, 장풍, 득수를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좋은 묏자리라고 할 수 있다. 이 장에서는 명당의 본보기로 퇴계선생의 묘소를 모형으로 처리하여 전시하였으며 또 명당의 기본개념도와 안동의 지형도를 전시하였다. 그리고 풍수지리설에 관련있는 문서도 함께 전시하였다.
8) 喪禮(상례)-우리 선조들은 효를 예의 기본으로 생각하여 실천하여 왔다. 부모님의 생전은 물론이고 사후에도 반듯한 효를 보여 왔다. 이러한 효의 정신은 상례에도 잘 나타난다. 이 장에 연출한 염습장면과 빈소 등은 전주류씨 문중에서 행하는 것을 재현한 것이다.
5. 도산서원
-도산서원의 전경(퇴계선생의 가르침이 남아있는 곳)
한국정신문화의 성지 '도산서원'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
도산서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에 지어진 서원이다. 도산서당은 퇴계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고,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건립되어 추증된 사당과 서원이다.
도산서당은 1561년(명종 16)에 설립되었다. 퇴계선생이 낙향 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지었으며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완공되었다.
1570년 퇴계 선생이 작고함. 1575년(선조 8)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賜額)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총 본산이 되었다.
도산서원은 주 교육시설을 중심으로 배향공간과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교육시설은 출입문인 진도문(進道門)과 중앙의 전교당(典敎堂)을 기준으로 좌.우 대칭으로 배열되어 있다. 동.서로 나누어진 광명실(光明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서 오늘날의 도서관에 해당한다. 동.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건물<기숙사역할>이다.
동편 도산서당건물을 ‘박약재(博約齋)’와 서편 건물을 ‘홍의재(弘毅齋)’라 하는데 안마당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배향공간인 사당 건축물로는 위패를 모셔놓은 상덕사(尙德祠)와 각종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典祀廳)이 있는데 삼문을 경계로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입구 왼쪽에는 1970년 설립된 유물전시관 ‘옥진각(玉振閣)’이 있는데, 퇴계선생이 직접 사용했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969년 본 서원을 중심으로 임야 및 전답 19필 324.945㎡이 사적 170호로 지정되었고, 1970년부터 대통령령으로 보수.증축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상의 정신적 고향으로 성역화 되었다.
* 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뛰어난 학자이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이다. 좌찬성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으나,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이우(李堣)로부터 『논어(論語)』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18세에 지은 「야당(野塘)」이라는 시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周易)』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부터 평생을 병치레하였다 한다.
-27세에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와 교유하고 심경부주(心經附註)를 구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이해 귀향 도중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부정자(副正字)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37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 간 복상했고,
-39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받았다. 중종 말년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히고,
-43세이던 10월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 삼아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세가 되던 해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았다. 끝내 퇴거(退居)할 수 없는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자, 퇴계는 이를 피해 전임을 청해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 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 생활에 침잠하다가
-52세에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56세에 홍문관부제학,
-58세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43세 이후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명종은 예(禮)를 두터이 해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어진 이를 초빙했으나 오지 않음을 탄식하다)」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고,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서 좌우에 두었다고 한다. 그 뒤 친정(親政)하게 되자, 퇴계를 자헌대부(資憲大夫)·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 자주 초빙했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67세 때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자, 조정에서 퇴계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했다 한다. 그 뒤 이황은 선조에게 정이(程蓬)의 「사잠(四箴)」, 『논어집주』, 『주역』, 장재(張載)의 「서명(西銘)」 등의 깊은 의미를 진강하였다.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이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고향에 돌아온 후 학문 탐구에 전심하였으나,
-70세가 되던 다음해 11월 병환이 악화되었다. 돌아가시던 날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고 하여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簀: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 죽은 지 4년 만에 고향 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낙성,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6. 군자마을
-경북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군자마을 전경-
안동에서 북쪽으로 도산서원 가는 국도를 따라 약 20km 정도 가다 보면 오른쪽 길가에 ‘오천 유적지’라는 안내판과 자연석에 ‘군자리’라고 새긴 표석이 연이어 서 있고, 여기서 오른쪽으로 300m 정도 들어가면 20여 채의 고가들이 들어앉은 안배된 유적지에 다다른다. 자동차로는 안동시청에서 출발한다면 약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다. 이곳이 조선조 초기부터 광산김씨 예안파가 20여 대에 걸쳐 600여 년 동안 세거해 온 외내에 있었던 건축물 중 문화재로 지정된 것과 그 밖의 고가들을 1974년 안동댐 조성에 따른 수몰을 피해 새로 옮겨 놓은 오천유적지이다. ‘군자리’라고도 불리는 이 유적지는 산 중턱에 자연스럽게 조성되었으며, 앞 골짜기가 호수를 이루고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 유적지는 터를 2단으로 구분하여 아래쪽에 주차장을 만들었고, 위쪽에는 산기슭의 경사면을 따라 광산김씨 예안파의 중요 건물들을 잘 배치하여 놓았다. 이제는 주위의 국학진흥원, 도산서원 등과 더불어 ‘안동의 주요 관광코스의 하나가 되었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00년 역사의 군자마을. 예부터 군자들만 산다하여 ‘君子마을’로 불려온 이 마을은 광산김씨 예안파의 집성촌이다. 1974년 안동댐에 마을이 수몰되려하자 수백 년 된 고택 20여 채만 지금의 마을로 옮겨왔다. 현재 7가구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 450년된 안동 요쿠르트 ‘타락’
한밤 중 마을에서 가장 큰 정자 ‘계암정’에 사람들이 모였다. 집안에 가보로 전해오는 요리책 ‘수운잡방’의 음식을 맛보기 위해서다. ‘수운잡방’은 500년 전 쓰여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요리책이다. 우유에 막걸리를 넣어 발효시킨 ‘타락’, 꿩고기를 넣어 만든 물김치 ‘치저, 고기로 만든 국수 ‘육면’ 등 120가지의 음식 만드는 법이 소개 되어있다.
7. 醴泉 금당실마을
-1박 할 우천재의 한옥 모습-(경북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468)
금당실은 마을 내 고인돌 무덤이 산재하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기록상으로는 600여년전 15세기 초 감천 문씨(문헌)가 이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그의 손자 문부경의 사위 박종린과 변응녕이 처향인 금당실에 터전을 잡으면서 그 후손들이 번성하여 큰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전쟁이나 천재지변에도 안심할 수 있는 땅! 흔히 이런 곳을 우리는 승지라고 일컫는다.
즉 이런 경치가 좋거나 지형이 뛰어난 곳, 10군데가 있다고 하니 그 중 한 곳이 금당실이라고 한다. 조선 태조가 도읍지로 정하려고 했던 이곳! '금당실은 우리나라 十勝地의 하나로 병화가 들지 못한다'고 하여 임진왜란때 온전 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정감록(鄭鑑錄)에남사고(南師古:1509~1571)가 꼽은 십승지지 가운데 한 곳으로서 '금당과 맛질을 합하면 서울과 흡사하나 큰 냇물이 없어 아쉽다'고 하였다.
마을 앞 금곡천에 사금이 생산되었다고 하여 '금당실'은 금당곡 혹은 금곡이라고 한다.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형국으로 북쪽의 매봉, 서쪽의 국사봉, 동쪽의 옥녀봉, 남쪽의 백마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 지형으로 매봉이 조산이 되고 그 뒤로 길게 뻗은 소백산 줄기가 내룡(來龍)이 되어 연못을 상징해서 금당이라고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금당실 마을은 조선시대 고가옥과 미로로 연결되어 있는 돌담길이 양반문화를 그대로 간직한 전통마을로서 역사, 문화, 전통이 강한 곳이다. 금곡서원, 추원재, 사괴당 고택, 99칸 고택터, 반송재 고택 등 이외에도 개량된 고택들이 자리하고 있어 전통생활양식을 직접 느낄 수 있는 마을이다. 그리고 연못에 떠있는 연꽃을 상징하는 오미봉 공원과 마을의 서쪽으로부터 불어오는 세찬 바람을 막아주고 마을을 보호해주는 2km의 울창한 소나무 숲은 금당실마을의 아름다운 자연과 상쾌함을 느낄 수 있다. 금당실 사람들은 예부터 소나무를 베는 사람을 우물에 빠뜨릴 정도로 소나무를 아끼고 소중하게 보호하여 왔다.
최근에는 영화 영어완전정복(2003), 나의 결혼원정기(2005), 그해 여름(2006), KBS 드라마 황진이(2006) 등 각종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서도 명성을 얻고 있다.
8. 초간정
예천 권씨종택에 보관된 초간일기의 주인공‘권문해 선생’과 관계 깊은 곳. 초간정은 기단이 물가에 있어 정자에 올라서면 바로 물위에 떠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소실되어 다시 세워진 건물이긴 하지만 초간 선생의 유고를 보관하는 전각으로 선생의 문학에 대한 힘을 느낄 수 있다. 초간정에는 도끼자국이 있다. 거기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중 옛날 어느 선비가 과거 준비중에 초간정 난관을 백 바퀴 돌면 과거에 급제한다는 전설에 따라 난관을 돌다가 정자 밑 소에 빠져 죽었는데 남편을 잃은 부인이 원통하여 기둥을 도끼로 찍어 흠집을 내었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도 그 도끼자국을 볼수 있음.
9. 용문사
신라 경문황 10년(870)에 이 고장 두천리 출신 두운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로 윤장대를 포함한 보물 5점을 소장한 문화유산의 보고이며, 불교문화의 이해와 연구에 좋은 교육의 장으로 알려진 전국적인 사찰이다. 또한 소백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어 주변의 우거진 푸른 숲과 흐르는 개울의 정취가 매우 아름다우며, 나라의 소중한 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만큼 화려함과 고풍스러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0. 河回(하회)마을
1) 부용대
서애 류성룡 선생이 기거하던 옥연정사(좌) 겸암 류운룡 선생이 기거하던 겸암정사(우)
부용대에 올라서면 하회마을의 풍수가 한 눈에 들어온다. 물줄기에 포근하게 감싸인 마을의 모습이 주변 경관과 참 잘 어울린다. 부용대의 좌우에는 옥연, 겸암정사가 있는데 고색창연한 옥연정사는 서애 류성룡 선생이 만년에 기거하면서 임진왜란 때의 일을 기록한 국보 132호 ‘징비록’ 을 저술한 곳이다. 최근에는 영화 "조선남녀상열지사" 의 촬영 장소로도 이용되기도 했다. 겸암정사는 겸암 류 운룡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치던 곳으로 부용대에서 모두 15분 정도 걸린다.
중학교 국어교과서에도 소개되어 있으며, 정상에서 하회마을 주위의 산태극(山太極) 수태극(水太極)의 산하(山河)와 마을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택지와는 달리, 집들이 태극형의 강줄기를 향하여 남서북으로 각기 향하여 있는 특수한 마을형태를 볼 수 있으며, 아래로는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곳에 겸암정사, 옥연정사, 화천서원이 있다.
2) 하회마을
풍산 유씨의 씨족마을로 유운룡·유성룡 형제 대(代)부터 번창하게 된 마을이라고 한다. 낙동강 줄기가 S자 모양으로 동·남·서를 감싸 돌고 있고 독특한 지리적 형상과 빼어난 자연경관을 갖추고 있다. 유씨가 집단 마을을 형성하기 전에는 대체로 허씨, 안씨 등이 씨족으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유의 하회별신굿탈놀이로 유명한 이 마을은 크게 남촌과 북촌으로 나눌 수 있으며 유서 깊고 제법 크기를 갖춘 많은 문화재를 잘 보존하고 있다. 특히 별신굿에 쓰이던 탈들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 제작 연들은 고려 시대로 추정하고 있어 마을의 역사가 뿌리 깊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대표적 가옥이라 할 수 있는 양진당(보물 제306호), 충효당(보물 제414호), 북촌택(중요민속자료 제84호), 남촌택(중요민속자료 제90호), 옥연정사(중요민속자료 제88호), 겸암정사 (중요민속자료 제89호) 등 많은 건축들은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생활상과 발달된 집 구조 등을 연구하는데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1.병산서원(倂山書院)
병산서원의 전신(前身)은 고려말부터 이어져온 풍산류씨 가문의 서당인「풍악서당」을 선조5년(1572년)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諡號 文忠公 1542-1607년)선생이 31세 때에 후학의 양성을 위해 풍산에서 병산으로 자리로 옮겼다. 광해군6년(1614년)에 선생의 제자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공이 서애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유림(儒林)과 뜻을 모아 사당(祠堂)인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여 선생을 배향(配享)하면서 서원으로 위상이 바뀌게 되었으며, 1629년에 서애선생의 셋째아들 수암(修巖)류진(柳袗,1582-1635) 공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또 참고자료>
(1)위패(位牌)란?
유교(儒敎) 의식(儀式)에 따라 돌아가신 어느 위(位)를 상징하고 모시기 위하여, 나무에 당해 위(位)을 적어 넣어서 만든 패(牌)이다. 나라를 상징하는 것으로 국기를 만들 듯이, 돌아가신 어느 위를 상징하여 모시기 위하여 위패를 만듬. 위패를 "신주(神主)"라고도 부름.
(2)사당(祠堂)이란?
위패를 모셔두기 위하여 만들어진 집을 사당이라 한다.
(3) 감실(鑒室)이란?
위패를 모셔두기 위하여 만들어진 방을 감실이라 하며, 사당 안에는 감실이 있다. 그러나, 사당을 별도로 만들지 못한 경우에는 사랑방 마루의 지붕 아래에 감실을 만들어서 위패를 모신다.
(4) 4대(代) 봉사(奉祀)란? (茶禮는 4대조까지 지냄)
자기로부터 부, 조부, 증조부, 고조부는 차례로 1대, 2대, 3대, 4대로 계산하며, 그러므로 고조부는 4대조가 된다. 사림층에서의 제사는 고조부까지 드리며, 이를 4대 봉사(奉祀)라 하며, 4대 이상은 위패를 조매(挑埋:위패를 땅에 묻는 것)하고 더 이상 그 위(位)에 대하여 기제사(忌祭祠)를 드리지 않는다.
(5)불천위(不遷位)란?
나라에 큰 공이 있거나 학행이 높은 위에 대해서는 조매하지 않고 영원토록 모시는 위를 불천위 또는 부조위라고 하며, 해마다 기일(忌日)에 제사를 올리며 이를 불천위제사라 한다. 불천위는 예조의 승인에 의하였으나 나중에는 도(道)의 유림에서 승인 또는 서원에서 인정하는 불천위가 생겨났으며, 이를 구별하기 위하여 국불천(國不遷), 도불천(道不遷), 원불천향천위(院不遷)로 구별하여 부르기도 한다. 한 집에 불천위가 2위 이상 있으면 각각 사당을 따로 하는 것이 원칙이며, 하회마을의 양진당에는 2위의 불천위가 모셔져 있으므로 사당이 둘이다.
(6) 서원(書院) 향사(享祀)
서원에는 각기 그 서원에서 배향(配享)한 위(位)를 사당(祠堂)을 만들어 모시고 있으며, 배향된 위에게 올리는 제사를 향사라 한다. 병산서원에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선생을 주향(主享)으로, 선생의 셋째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 공을 종향(從享)으로 하여 존덕사(尊德祠)에 모시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에 향사를 올린다.
화천서원에서는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선생을 주향(主享)으로, 선생의 제자 동리(東籬) 김윤안(金允安) 공과 선생의 종손(從孫)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 공을 공을 종향(從享)으로 하여 경덕사(景德祠)에 모시고 있다.
12. 回龍浦(회룡포)
강이 산을 부둥켜안고 용틀임을 하는 듯한 특이한 지형의 회룡포는 한삽만 뜨면 섬이 되어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물도리마을로서 전국적으로도 손꼽히는『육지 속의 섬마을』이다. 이곳은 맑은 물과 넓은 백사장이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인근 비룡산에는 숲속 등산로와 원산성, 봉수대 등 역사적 정취가 숨쉬는 자연공원으로 산책과 등산코스로 적합하다. 또한 이산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운명선사가 세운 천년고찰 장안사가
산중턱에 있으며 이 사찰의 뒷산에 올라가면 팔각정의 전망대가 있어 의성포(회룡포)마을의 절경이 한눈에 들여다보인다.
2000년도에 방영되었던 KBS 인기드라마 『가을동화』의 초기배경이 이곳 회룡포와 용궁면 소재지로 하여 많은 이들이 찾아오고 있다.
13. 三江酒幕(삼강주막-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166-1)
삼강은 내성천과 금천, 낙동강이 합류하는 곳이라서 붙은 이름으로 주변경관이 아름답고 맑은 물과 넓은 백사장이 어우러져 있다. 예로부터 이곳은 서울로 가는 길목으로 장사하던 배들이 낙동강을 오르내렸고, 문경새재를 가기 전에는 이곳 삼강 나루터를 꼭 거쳐 갔으며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여 이 주막등 상거래가 번성하였다.
그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주막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으며 그 옆에는 500년이 넘은 회화나무가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고 있다.
이 회화나무는 아래와 같은 전설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300년전 상주군에 있는 한 목수가 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면 사고도 나지 않고 큰돈을 번다하여 연장을 가지고 이 나무를 베려하므로 사람들은 마을을 지키는 영험스러운 나무라 하여 베지 못하게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나무그늘이 좋아 낮잠이 들었는데 꿈에 백발을 날리는 노인이 무서운 모습으로 나타나서 "만약 이 나무를 해치면 네가 먼저 죽으리라"하므로 꿈에서 깨어나니 하도 생생하여 식은땀을 흘리며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혼비백산 달아났다고 한다.
삼강주막 054)655-3035 예천군 문화관광과 054)650-6394, 6395
상차림 : 막걸리, 부침개, 국수, 두부등.
* 客窓感을 느끼려면 역시! 걸쭉한 그 지방의 막걸리를 마셔봐야 돼! 캬~아 악!
14. 紹修書院(소수서원-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1번지)
이 서원은 풍기(豊基)군수(郡守)였던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선생이 고려말의 유현(儒賢)인 안향(安珦)선생의 연고지에 중종(中宗) 37년(1542) 사묘(祠廟)를 세우고 안향 선생을 주향(主享)하였으며 다음해에는 안향 선생의 영정(影幀)을 봉안하고 학사(學舍)를 이건( 移建)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데서 비롯되었다. 중종 39년(1544)에는 안축( 安軸)선생과 안보(安輔)선생을 배향하였고 인조(仁祖) 11년(1633)에는 주세붕 선생을 추향(追享)하였다. 명종(明宗) 5년(1550) 퇴계 이황 선생이 풍기 군수로 재임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사액(賜額)을 받게 되어 최초(最初)의 사액서원이자 공인(公認)된 사학기관(私學機關)이 되었다. 경내(境內)에는 강당(講堂), 동·서재(西齋), 학구재(學求齋), 지락재(至樂齋), 서고, 문성공묘(안향-文成公廟) 등이 있다.
15. 浮石寺(부석사)
경상북도 영주의 부석사(浮石寺)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한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근본도량이다. 경내에는 무량수전(국보 제18호), 조사당(국보 제19호),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 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 등 국보와 삼층석탑(보물 제 249호), 북지리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호),부석사 당간지주(보물 제255호)등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특히 배흘림기둥으로 유명한 무량수전(無量壽殿)은 부석사의 본전(本殿)으로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곳에는 국보 제45호인 소조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는데, 무량수전의 건물이 남향(南向)인데 비해 이 불상만 동향(東向)인 점이 특이하다.
* 부석사 무량수전 현판은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머무를 때 쓴 글씨라 전한다.
마. 답사비용 산출 내역안
1. 유류비 150,000원×2=300,000원
2. 고속도로비, 주차비 25,000원×2=50,000원(소장님이 계산)
2. 24일 점심 6,000원×17명=102,000원
3. 안동민속박물관 입장료=15,000원(일반-1,000원, 학생-300원)
4. 도산서원 입장료=23,000원(일반-1,500원, 학생-700원)
5. 예천 금당실마을 숙박료=200,000원(우천재-5개실)
6. 저녁 삼겹살 파티=60,000원(예천에서 구입)
7. 하회마을 셔틀버스비 및 입장료=50,000원
(일반-2500원, 학생 1500원)
8. 점심 6,000원×20명=120,000원
9. 소수서원 입장료=59,000원(일반-3,000원, 학생-2,000원)
10. 부석사 입장료=27,000원(일반-1200원, 학생-1,000원
11. 공동준비물 및 기타 잡비 7,000원×20명=140,000원
12. 상품 : 20,000원
*지출 예산: 1166,000원 1166,000원÷20명=58,300원.
* 갹출 예상 액수
-어른(일반 20세이상) 65,000원×10=650,000원
-학생(20세이하) 45,000원×10=450,000원
합계 110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