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처럼 흘러간 초등학교 시절의 첫사랑
누구나 사랑이란 늪에 진창 빠져 헤어나지 못해 가슴시리도록 아파본적이 있다. 사랑의 아픔은 현시대에 앞서 점점 더 멀리 살았던 사람들일수록 더욱 클 것이다. 물론 부모가 자식들의 결혼까지 결정했던 조선시대 이전을 제외하고 말이다. 하지만 사극 역시 남녀 간의 깊고 애틋한 사랑이 고통으로 성숙 될 때 관객은 더 깊이 몰입된다. 소설이나 모든 장르에 아름다운 사랑은 그저 강물처럼 흘러만 가는 것이 아니다. 폭포수처럼 수만 길 낭떠러지에 떨어지기도 하고, 갈라졌다 굽이굽이 돌아 다시 만나기도 한다.
사람은 어렸을 때 대게는 초등학교 때부터 남다른 애틋한 이성적 감정이 있다. 지금은 초등학생은 물론 유치원생들도 서로 좋아 한다고 말하는데 익숙하다. 어린 꼬맹이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귀엽다. 하지만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이성간 서로 좋아한다고 말했다간 금세 소문이 퍼져 놀림의 대상이 됐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 좋아해도 속으로만 애가 탈 뿐 이다. 그런 시절을 지냈던 사람들의 초등학교 때 추억은 정말 새롭다. 그래서 초등학교 동창모임은 다른 어떤 모임보다도 정감이 깊어 직업이나 생활수준 같은 어떠한 조건에 관여 하지 않고 만나면 모두가 달랑쇠가 된다. 이제는 그때 서로 좋아 했다는 얘기들이 전혀 쑥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럽다.
나는 초등학교 때 몇 달 차이가 안 된 사촌 여동생과 한 동네에 살았다. 그녀는 공부를 잘하고 예뻐서 선생님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녀와 단짝인 친구가 있었는데 그녀 역시 우리 동생처럼 예쁘고 공부를 잘했다. 우리는 같은 학년이었지만 남녀가 각각 다른 교실에서 공부를 했다. 남학생들이 거의 다 그녀들을 좋아했다. 동생 친구는 우리 동네에서 걸어서 20여분 거리에 살았기 때문에 우리 동내에 자주 놀려왔다.
초등학교 5학년 봄날이었다. 그 때는 칸막이로 되어 있는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는데 남녀 학생 구별 없이 사용했다. 너무 급해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문을 열었더니 그녀가 막 일을 마치고 나오려는 참이었다. 나는 무척 당황했다. 그런데 그녀가 나보다 “개새끼”라고 했다. 죄를 지은 몸이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얼굴만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해 가을이었다. 군대 가신 형님이 제대를 하시면서 비스킷 과자 몇 봉지를 사오셨다. 나의 몫은 열 조각이 한 봉지로 묶여진 두 봉지였다. 우리 시골에 점방에는 눈깔사탕이나 셈베이 과자 외에는 비스킷을 파는 곳이 없었다. 나는 그 비스킷이 얼마나 향긋하고 부드러운지 아낀다는 것이 하루도 안가 한 봉지를 다 먹어 버렸다. 하지만 나머지 한 봉지는 그녀에게 주고 싶어 먹고 싶어도 꾹 참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면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끼니도 거르다 시피 한 대부분 학생들에 비해 비교적 잘사는 층에 속했다. 그러므로 틀림없이 비스킷을 먹어본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검은 치마에 하얀 저고리 차림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학교에 다녔던 여느 시골아이들과는 달리 화려한 예쁜 옷에다 구두나 운동화를 신어 유난히 눈부셨다.
그런데 그렇게 자주 우리 마을로 놀려오던 그녀는 며칠이 지나도 영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학교가 파하고 나면 길목에서 그녀가 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그동안 그녀에게 한 번도 말을 건네 본적이 없었다. 그 비스킷을 남이 볼까봐 호주머니에 감추고 마냥 손으로 만지면서 혹시 없어지지나 않았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그것을 전할 때 뭐라고 말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을 했다. 그냥 건네주고 도망치기로 했다.
드디어 그녀가 복찻다리를 건너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며칠 동안 그것을 호주머니에 넣고 자고 맨날 만지니 과자가 다 부서져 버렸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다 부서져 버린 과자를 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녀가 내 앞을 지나갔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우리 사이에는 어떠한 아는 체도 없었다. 나는 겨우 한줌 밖에 안남은 과자가루를 모두 신작로에 뿌렸다.
이듬해 6학년이 되었다. 우리 학년은 남학생이나 여학생이나 정상적인 나이에 학교에 다닌 학생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정상적인 나이에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보다 나이가 네다섯 살 더 많은 학생들도 몇 명이 되었다. 그런데 그런 남녀학생 끼리 졸업파티를 한다하여 학교 근처에 있는 점방에 방을 구해 먹을 것을 사다놓고 놀면서 밤을 샜다. 그 소문이 담임선생에게 들어가 우리 남학생 모두가 운동장에서 군대식으로 얼차려 및 토끼뜀뛰기 같은 기압을 심하게 받았다. 얼마나 심하게 받았는지 겨우 기어 오다 시피 하여 집에 돌아와 문을 닫고 안방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밖에서 여동생과 그녀가 떠드는 소리가 나더니만 동생이 ‘오빠’하며 나를 불렀다. 문을 열어보니 그들이 마루에 앉아 있었다. 나는 가슴이 쿵쿵 거렸다. 그러면서 오늘 기압 받은 얘기를 들었다면 몸이 얼마나 많이 아프냐고 물었다. 그녀도 나에게 괜찮은지에 대해 물으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내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오더니만 어디가 아프냐며 내 몸에 손을 댔다. 그때 내 몸이 바르르 떨렸다.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해 벽지도 바르지 않았고 방바닥 역시 진흙을 쇠손으로 곱게 입혀 말린 그대로여서 사방이 거북이 등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다. 나는 약간 창피했다. 무엇보다도 그녀 집과 너무나 차이가 나는 내 현실을 보고 다시는 나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을까 봐 불안 했다.그녀 집은 면소재지에 있었다. 그녀 집안으로 들어 가본적은 없지만 가끔 밖에서 그녀 집을 들어다 보았다. 그녀 집 역시 우리 집처럼 초가집이었지만 초가 세 칸 우리 집하고는 비교도 안 돌 만큼 넓은 마당에 행랑채가 딸린 큰 집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나의 염려와는 달리 그 이후로 몇 번 사촌 여동생과 함께 집에 놀러와 숙제를 하면서 즐겁게 놀았다.
우리는 졸업을 하고 3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녀는 전주에서 중고등 학교를 다닌다는 얘기만 동생으로부터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운영하는 학원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목소리를 들으니 직감적으로 그녀라는 것을 알았다. 맑고 앳된 목소리는 초등학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동생으로부터 전화번호를 알았다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니 한번 찾아 오라했다. 얼마 후 그녀 집을 방문했다. 온 집이 모두 그림으로 널려 있었다. 상업미술을 그려 수출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남편이 아닌 친구라며 음악을 전공했다는 어느 남자를 소개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보통사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고 다음에 서로 연락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하지만 그 뒤로 전화로만 몇 번 안부 차 주고받다가 연락이 끊겼다.
그 후 10여년이 지나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 결성 되어 다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동물병원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동창생들과 함께 노래방에 갔다. 그녀와 나는 손을 잡고 합창을 했다. 그 때가지도 그녀는 혼자 산다고 했다. 교수인 남자와 동거를 한다는 얘기도 들렸다. 그 후 몇 년 동안 동창 모임에서 우리는 다른 동창처럼 허물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여느 동창생들처럼 초등학교 때의 그녀에 대한 내 감정을 서슴없이 얘기 했다. 여느 동창생처럼 그녀도 왜 그때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그랬냐고 말했다. 악수를 한다고 손을 잡아도 친구의 손을 잡은 것처럼 아무런 떨림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