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염산 교회는
한국 최대의 순교자 피가 흐르는 곳이다.
전남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설도 마을은 작은 어촌인 설도항에 위치해 있다.
6.25전쟁 당시, 한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아픔인 77명의 순교자를 낸 곳으로
단일 교회로는 최대의 순교지이다. 염산 교회 1대 담임이었던 허상 전도사,
2대 원창권 목사, 3대 김방호 목사
모두 순교하였다.
순교자들의 신앙적 절개와 교훈을 되새기기 위해
77인 순교기념비, 이들의 시신이 합장된 묘소, 순교자 기념예배당,
각종 유물들과 자료 등을 보관하고 있다.
전남 영광군 내에 194명의 순교자 중
무려 77명이 이곳 염산 교회에서 나왔다. 순교자들은 북한 공산군에게
죽임을 당하면서도 그들을 용서하고 찬송을 불렀다. 후손들은 그 가해자들을 사랑으로
하나님에게 인도했다. 한국 기독교의 순교신앙과 오직 예수 사랑을 잘 보여주는 세계적인 순교 유적지이다. 이곳에는 기독교 순교 체험관이 있다. 그 당시에 물에 수장하기 위해 사용한
장비와 돌들이 진열되어 있다.
염산 교회는 1939년 8월 허상 장로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2대 원창권 목사에 이어 3대 김방호 목사가 6.25전쟁 당시 시무 중이었다. 김방호 목사는 경북 경산 출신으로 3.1만세 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 잠시 국내에 들어왔다가 부흥회에서 하나님을 영접하고 평양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벽지와 오지만을 섬기면서 1950년 3월 10일 염산교회에 부임했다.
그의 부임 이후 염산 교회는 날로 부흥 발전했다. 그러나 6.25가 나고 공산군이 이곳에 진입하면서 교회당과 목사관을 강제로 빼앗아 갔다.
김 목사는 교인들의 가정을 전전하면서 비밀 예배를 진행했다. 그
해 9.28 서울 수복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나주와 함평을 거쳐 영광읍내로 진격한다는 소문을 들은 이 지역 기독청년과 우익 청년들이 영광서 열리는 만세 환영대회를 주도했다.
미처 북으로 도망치지 못한 공산군 잔당들이
이 사실을 알고서 대대적인 보복행위를 시작했다. 그 해 10월 7일 환영대회를 주도했던
기삼도(당시 목포 성경학교 학생)는 죽창에 찔려 불타는 교회 앞에서 순교 당했고, 동료 노용길 등 3명은 새끼줄에 굴비처럼 묶여 돌멩이를 매단 체 교회 옆 바닷속에 수장됐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날은 노병제 집사 부부 및 어린 자녀들을 포함해
9명 모두가 똑같은 방법으로 바닷 속에 참살됐고, 동생 가족도 모두 참살됐다. 노 집사는 찬송을 부르며 먼저 뛰어내렸다. 모두 22명의 일가족이 굴비처럼 엮여서 수장되었다. 시체들은 썰물을 따라 바다 위에 떴다가 가라앉는 것을 수없이 되풀이하다가 사라졌다. 13일에는 허상 장로 부부가
가까운 산골에서 죽창에 찔리고 돌무더기에 깔려 숨졌다.
허 장로는 숨이 끊어지면서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이후 '예수를 믿는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산군은
이 지역 어린아이들까지 무참히 죽창으로 찌르고 몽둥이로 때리고 수장시켰다.
죽음을 앞두고 어린아이가 칭얼대며 울자 업고 있던 언니가 "울지 마라 우리는 곧 천국에 간단다."라고 달래기도 했다. 어린아이까지 신앙의 정조를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순교를 당했다.
이후 가정집에서 비밀 예배를 계속하던 김방호 목사는
10월 27일 공산군들에게 끌려가 일가족 8명이 순교를 당했다. 공산군은 자녀들에게
"아버지를 장작으로 때려죽이면 너희들은 살려주겠다."라는 등 악랄한 방법을 사용하려 했으나 자녀들은 도리어 "주님, 주님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교의 영광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
김 목사도 자녀들에게 "너희들은 절대로 이들을 미워하지 말라, 이들이
몰라서 그러는 거야"라고 외치고 찬양을 부르며
피를 토하고 순교했다.
2대 목회자인 원창권 목사도 영광에서 순교하였다.
이로 인해 염산교회는 1,2,3대 교역자 전원이 순교하는 비극을 맞이했다.
전 교인의 3분의 2가 순교를 당했으나 누구 하나 비겁하지 않았다. 모두 그들을 미워하지
않고 찬송을 부르며 순교를 당했다.
국군에 의해 완전해 수복된 1951년 2월 24일 수요일 밤,
살아남은 자들이 목사관에서 첫 예배를 가졌다. 몰래 땅 속에 묻어 두었던 성경책과
마루광 항아리 속에 숨겨 두었던 찬송가를 들고 한겨울 추위도 잊은 채 타버린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시 이 마을 신학생인 안종렬 전도사가 인도한 예배는
눈물과 통곡으로 진행됐다. 안 전도사는 순교한 교인들의 시신을 찾아 매장하는 일과 가족들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는 유족들을 찾아 위로했다.
(생명의 샘교회 Ca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