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험에 관한 사항
계시록 시험은 강의안 속에 들어 있다. 강의안 내용이 많기 때문에 어떻게 소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계시록 기말 고사에는 헬라어가 포함되어 있다. 2-3장만 헬라어 시험을 칠 것이다. 본문 단어의 파싱과 번역을 해야 한다. 문장을 그대로 내는 것이 아니라 교수님이 작문하여 낼 것이기 때문에 외우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 외워서는 해답을 못하도록 할 것이다. 그러므로 헬라어 문법과 단어를 완전히 외우도록 하라. (2장과 3장만)
☞ 강의 방법.
강의 부분과 강해부분을 다 커버할 것이다.
즉, 앞 부분과 뒷 부분을 동시에 읽어 나갈 것이다.
계시록에는 다양한 상징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을 어떻게 풀 것인가? 그리고 계시록의 구조를 어떻게 풀 것인가? 이것이 계시록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된다. 계시록은 해석하기 전에 벌써 계시록 그 자체로서 복 받는 책이다.
제 1 장 서 론
계시록을 연구하는데 참고문헌이 있다. 중요한 책은 ‘정복자들’이다. 무천년설의 입장에서 쉽게 강해한 책이다.
핸드릭슨의 <넉넉히 이긴다>
래드 죠지E<역사적 전천년설의 입장>
모리스<무천년설>
마운스<전천년설>
로시두니<후천년설>
월부드<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즉 대표적인 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무천년설-헨드릭슨
②역사적 전천년설 - 래드
③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월부드
④후천년설 - 로시두니
예수님의 재림을 확실히 믿는다면, 무천년설이든 역사적 전천년설이든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권성수 교수님의 입장은 무천년설적인 입장이다. 김길성 교수님의 입장은 역사적 전천년설이다. 박형용, 박윤선 박사는 역사적 전천년설 입장이다.
☞ 묵시문헌 - 계시록은 묵시문헌이다. 모리스의 <묵시>라는 책이 있다.
천년왕국설 - 클라우스 편저<천년왕국의 의미> - 4개의 학설이 모두 소개되어 있기 때문에 이 책만 읽으면, 천년왕국에 대해서 거의 이해할 수 있다.
주제 및 해석서
계시록의 복음 -복음과 묵시
테니-계시록 해석
톰슨-묵시와 제국 (묵시의 장르와 로마제국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김상복, 당신은 확실히 준비하십니까? (요한계시록 강해)
김철손, 성서주석 요한계시록(무천년설)
박윤선, 성경주석 요한계시록(역사적 전천년설, 무천년설도 호의적)
석원태, 요한계시록 강해 (무천년설)
신성종, 요한계시록(무천년설)
원세호, 요한계시록 성경주해 극단을 피한 종합적 해석.
이광복, 계시록강해, 난제해설, 역사적 전천년설, 온건 미래주의.
이동원, 역사적 전천년설
조용기, 세대주의
천정웅 ‘역사적 전천년설’
우리가 역사적 전천년설, 혹은 무천년설을 믿고 주장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세대주의 입장에서 설교할 때가 많다. 왜냐하면 세대주의적 입장에서 설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자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드라마틱하고 매력적이다. 그리고 전체적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이해해도 설교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따라간다. 그런데 세대주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계시록을 단편적으로 볼 때, 세대주의로 흐르기 쉽다. 그런데 세대주의자들이 종전에는 극단적으로 나아갔지만 지금은 많이 온건해 지고 있다. 그들은 크게 이스라엘, 교회, 천년왕국으로 나눈다. 세대주의가 언약신학을 하면서 개혁주의로 많이 다가오고 있고, 점진성을 많이 끌어 들리고 있다. ‘점진적 세대주의’가 나올 정도로 나아가고 있다. 상대방을 서로 이해하게 되면서 가까와졌다. 달라스 신학교에 가 보아도 많이 달라졌다.
월부드는 건전한 입장에서 건전한 입장에서 세대주의적 주석책을 썼다.
*종말과 영성(권성수)이라는 책도 참고하라. 계시록과 관련이 있다. 종말론과 성령론에 대해서 쓴 책이다.
☞ p.22
제2장 계시록의 내용요약
기말고사에서 계시록 내용을 모르면 대답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몇 장에 무엇이 나오느냐?’를 정확하게 숙지해야 한다. 그래야 계시록 전체를 놓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각 장에 무슨 내용이 들어 있는지 살펴보자.
◎ 장별 내용 요약 ◎
장 |
내용 요약 |
|
1 |
서언, 서두, 인자 같은 이 |
서언 |
2 |
에베소, 서머나,버가모,
두아디라. |
7 교회 |
3 |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
4 |
하늘의 보좌(앉으신 이) |
하늘 보좌 |
5 |
하늘의 보좌(책의 인을 떼실 어린양 |
6 |
첫째···· 여섯째 인 |
7 인(印) |
7 |
하나님의 인맞은 자들 |
8 |
일곱째인, 첫째~네째 나팔 |
9 |
다섯 째, 여섯째 나팔 |
ㅇ
10 |
인봉된 일곱우뢰 |
7 나팔 |
11 |
두 증인, 일곱째 나팔 |
12 |
붉은 용과 여자 |
|
13 |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따에서 나온 짐승 |
짐승과
여자 |
14 |
시온산의 14만4천, 짐승에게 경배자들 심판 |
15 |
일곱 대접 서언 |
7 대접 |
16 |
첬재~일곱째 대접 |
17 |
큰 음녀 |
큰 음녀
바벨론 |
18 |
바벨론 멸망 |
19 |
어린양의 혼인잔치,
백마탄 자 |
잔치와
심판 |
20 |
천년왕국, 백보좌 |
왕국과
심판 |
21 |
새 하늘과 새 땅 |
신천신지
에필로그 |
22 |
생명수 강, 에필로그 |
◎ 단위별 분해 ◎
내 용 |
장 |
인 자 |
1 |
7 교회 |
2-3 |
보 좌 |
4-5 |
7被印者 |
7 |
인 |
6-8 |
7인봉, 7우뢰 |
10 |
두 증인 |
11 |
나 팔 |
8-9,11 |
용과 여자 |
12-14 |
7 대접 |
15-16 |
음녀, 바벨론 |
17-18 |
잔치와 심판 |
19 |
천년왕국, 백보좌,신천신지 |
20-22 |
7인가 7나팔만 중간 차단이 있음 |
◎ 단위별 내용요약 ◎
서언 |
ㅇ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3)
ㅇ하나님→그리스도→천사통해 요 한→종들
ㅇ하나님의 말씀=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요한의 비전
ㅇ읽고 듣고 지키는 자에게 복 |
서두 |
ㅇ송신자 수신자 인사(1:2-8)
ㅇ송신자=요한, 수신자=아시아
7교회(1:4상)
ㅇ첨가/승화된 인사:
삼위의 은혜와 평강기원(1:4하)
그리스도의 송영(1:5,6)
그리스도의 재림예언(1:7)
알파와 오메가 하나님 자기선언 (1:8) |
인자같은 이의
현현
1:9-20 |
ㅇ밧모섬에서 주의 날에 음성을 들음(1:9-11)
ㅇ인자 같은 이의 등장(1:12-20): 7 촛대 사이에 그의 모습:
착의=발에 끌리는 옷, 가슴에 금 띠
인상=흰 머리와 털,
불꽃같은 눈
빛난 주석 같은 발
많은 물 소리 같은 음성
오른손에 7별
입에서 날선 검
태양같은 얼굴 |
그의
말씀 |
ㅇ“두려워말라”
ㅇ나는 처음이요 나중
ㅇ죽었다가 산 자:사망과음부의 열 쇠
ㅇ네 본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ㅇ7별=7교회 사자
ㅇ7촛대=7교회 |
2. 7 교회 (2-3장)
교회 |
송신자 |
수신자 |
칭찬/
당부 |
책망 |
대책 |
경고 |
약속 |
에베소 |
7별을 붙잡고 7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성령 |
교회사자,교회들 |
행위, 수고, 인내, 근면, 거짓폭로, 니골로당을 미워함 |
첫사랑버림 |
생각하라 회개하라 첫행위를 회복하라 |
네게임하여 네 촛대를 옮기리라. |
낙원의 생명나무과실 |
서머나 |
처음 나중 죽었다가 살아나신 자:성령 |
사자 교회들 |
화란, 궁핍(유대인,훼방) 부요, 장차 10일 환란 중 두려워말고 충성하라. |
|
|
|
생명의 면류관: 둘째 사망면제 |
버가모 |
날선 검을 가지신 이: 성령 |
사자 교회들 |
사단위 소재지에서 안디바 순교:교인신앙절개 |
발람/니골라(우상,행음)추종 |
회개하라 |
내게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
가추었던 만나와 흰돌 |
두아디라 |
불꽃같은 눈, 빛난 주석같은 발 가진 하나님의 아들:성령 |
사자, 교회들 |
사업 사랑 믿음 섬김 인내:처음보다 나은 나중 행위;이세벨을 추종하지 않는 자들.절개지키라 |
자칭 선지자 이세벨 용납/ 종들이 미혹 행음 우상숭배 이세벨 불회개 |
회개하라 |
이세벨 침상에 던지고 자녀들을 죽일 것; 그녀와 행음한 자들에게 큰 환란 책벌의 귀감 |
만국 통치권과 새벽별 |
사데 |
하나님의 7영과 7별을 가지신이;성령 |
사자. 교회들 |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명 |
네 행위살았다 하는 이름 뿐 죽은자; 온전한 행위 전무 |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라 |
흰옷 그이름을 생명책에서 흐리지 아니하고 시인 |
빌라델비아 |
거룩진실 다윗의 열쇠가지신 자:열고 닫는 전권 소유자/성령 |
사자 교회들 |
적은 능력으로 말씀 지키고 주이름 배반치 않음; 면류관 사수 |
|
|
|
사라의 증거주고 시험의 때 면제:성전기둥 |
라오디게아 |
아멘 충성진실한 증인 창조의 근본: 성령 |
사자. 교회들 |
|
미지근; 부자로 자부 그러나 곤고 가련등의 상태로 무지 |
금/흰옷/안약사라;열심을 내라회개하라 |
토하여 내리라. |
음성듣고 영접하면 주님과 교제; 보좌동석 |
3. 하늘 보좌(4-5장)
하늘보좌 |
ㅇ열린 문으로 올라감
ㅇ하늘보좌(4:2-5)
그 분의 모양 : 벽옥과 홍보석
후광-녹보석 같은 무지개
보좌주변; 24보좌와 24장로
보좌 앞; 7등불=7영
ㅇ네 생물과 그 찬양(4:6-8);
보좌 주위 사자/송아지/사람/독 수리/각 6날개, 눈 가득, 찬양 |
책 떼는 어린 양 |
ㅇ‘다윗의 뿌리’외는 펼수 없는 인 봉한 책(5:1-5)
ㅇ어린양이 책을 취하심(5:6-7): 7 눈(=7영)있는 어린 양 대합창 (5:8-14): 4생물+24장로, 많은 천사들, 모든 만물 |
4. 7인(6-8:2)
제 1 인 |
흰 말가 그 탄자, 승리 또 승리 |
제 2 인 |
붉은 말과 그 탄자, 평화제거 상호살상, 큰칼 |
제 3 인 |
검은 말과 그 탄자, 저울(1데나리온에 밀1되, 보리3되, 감람유와 포도주는 무해 |
제 4 인 |
청황색 말과 그 탄자(=사망, 음부가 뒤따름) 땅 1/4, 검 흉년 사망 땅짐승으로 죽임 |
제 5 인 |
제단 아래의 순교 당한 영혼들의 기도(언제 원혼? 순교자 수 차면!) |
제 6 인 |
진노의 큰 날(큰 지진, 해/달/별들/하늘/산/섬변화, 임금들 왕족들 장군들 부자들 강자들 종들/ 자유인들의 공포의 탄식) |
막 간 |
ㅇ하나님의 인침과 인맞은 수와 찬양(7장)
ㅇ하나님의 인치기까지 해하지 말라(7:1-3)
ㅇ이스라엘의 被印者(7:4-8):총수14만 4천, 각지파의 피인자
ㅇ흰 옷 입은 무수한 자들(7:9-17); 각 나라/족속/백성/ 방언의 찬양(7:9-10)
ㅇ천사들의 화답송(7:11-12)
ㅇ흰 옷 입은 자들의 신분
어린 양의 피에 씻은 자들, 하나 님의 섬김,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호와 인도 |
제 7 인 |
하늘 반 시 고요, 7천사 7나팔 받음 |
◈ 7 나 팔 (8:3-11장) ◈
*서막(7:3-6): 많은 향과 성도들의 기도들이 하나님 앞으로/ 그 향로 땅에 쏟음, 나팔 불기 예비
제1나팔
(8:7) |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땅에 쏟아져 땅 1/3, 수목1/3, 각종 푸른 풀 타서 사윔 |
제2나팔
(8:8-9) |
불붙는 큰 산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서 바다1/3 피, 바다 생물1/3죽고, 선박 1/3파손 |
제3나팔
(8:10-11) |
타는 큰 별(=이름은 쑥)이 떨어짐, 강들 1/3물들, 1/3쑥처럼 쓰게 되어 많은 사람들 죽음 |
제4나팔(8:12) |
해,달,별들 각 1/3비침, 낮 밤 1/1
무광 |
*화 선언(8:13): 땅 거주자들에게 화(아직 세 나팔이 남아 있음)
제5나팔(9:1-11) |
ㅇ열린 무저갱 재앙
ㅇ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무저갱 열어 연기로 해와 공기 어두워짐(9:1-2)
ㅇ연기 가운데로부터 황충들 나와 해침(9:3-11):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자들만 5개월(9:3-5),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함(9:6)
ㅇ황충들의 모습:전마들 같고 머리에 금 같은 면류관 썼고 사람의 얼굴 모양, 여자의 머리털 같고, 사자의 이 같고, 철흉갑같은 흉갑, 전마와 병거들 같은 날개 소리, 전갈 같은 꼬리, 쏘는 살
ㅇ황충들의 임금(9:11):무저갱의 사자, 아바돈=아불리온 |
* 아직 화 둘이 남아 있다. |
제6나팔
(9:13-21) |
전쟁
ㅇ유브라데에 결박한 4천사 풀려 사람들 1/3죽임(9:13-15)
ㅇ2만만 마병대, 말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 연기/유황으로 사람 1/3죽임(9:14-19)
ㅇ이 재앙에서 살아 남은 자들 無회개(9:20-21) |
*막간1:인봉 7 우뢰(10장)
7우뢰 기록하지 말라(10:1-4)
제7나팔 때 복음 성취(10:5-7)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 받아 먹음=다시 예언준비(10:8-11) |
*막간2: 두증인
ㅇ갈대로 성전 안 척량, 밖 마당은 이방인에게42개월 짓밟힘
ㅇ두 증인의 1,260일 권세 있는 증언
ㅇ짐승과 전쟁, 3일 반 동안 죽음, 세상기쁨
ㅇ부활하여 승천
ㅇ큰 지진으로 성 1/10붕괴, 7천 사망
ㅇ둘째 회 지나고 셋째 화 급래 |
제7나팔(11:15-19) |
하늘의 큰 음성들과 24장로 경배, 하늘 언약궤 |
◈ 붉은 용과 여자 (12-14장) ◈
붉은 용과 여자
(12장) |
①여자와 붉은 용
②아이를 삼키려던 용의 실패, 아이의 승천,
③1260일 여자의 광야 양육
④미가엘軍과 용軍의 하늘 전쟁, 용군의 패전과 땅으로 쫓김
⑤땅으로 내어쫓긴 용이 여자 핍박
⑥여자가 광야 자기 곳으로 피신, 땅의 도움
⑦여자의 자손들과 싸우려고 모래 위에 선 용 |
40
두 짐승
(13장) |
①바다에서 나온 짐승(13;1-10)
ㅇ짐승의 모습-10뿔(10 면류관) 7머리 곰 발 사자 입 같고 표범과 유사, 용이 능력 보좌 큰 권세 그에게 줌.
ㅇ죽게된 상처 치유로 온 땅이 용과 짐승 경배
ㅇ하나님, 하늘 거주자들, 성도들 42개월 훼방, 어린양의 생명책 녹명되지 않은 자들 짐승 경배
ㅇ성도들의 인내와 믿음
②땅에서 나온 짐승(13:11-18)
ㅇ 짐승의 모습-새끼 양 같이 2뿔, 용처럼 말함
ㅇ바다 짐승의 권세 행하여 바다 짐승 경배케 함
ㅇ바다 짐승 우상에게 말하게, 우상숭배 거부자들 살상
ㅇ오른 손에나 이마에 바다 짐승 이름의 표 받게 함-표 받게 하고 표 없는 자는 매매 못하게 함
ㅇ바다 짐승의 표=짐승의 이름, 그 이름의 수 666 |
하나님의 인 맞은 자들과 짐승의 표 받은 자들(14장) |
①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 쓴 자들.
ㅇ시온 산의 14만 4천 이마 표
ㅇ새 노래
ㅇ정절이 있고 어린 양의 인도 받는 자들
②짐승의 표 받은 자들 심판(14:6-7)
ㅇ심판 때 이르렀으니 하나님께 경배하라
ㅇ무너졌도다, 바벨론이여
ㅇ짐승과 그의 우상 경배자들 심판
*주안에서 죽은 자들 복
③사람의 아들 같은 이의 이한 낫
④다른 천사의 이한 낫, 진노의 포도주틀
③ |
◈ 7 대 접 (15-16장) ◈
*준비(15:1-16:1)
①7대접을 가진 7천사
②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 합창
③4생물 중 하나로부터 7천사가 7대접을 받음
④7대접을 땅에 쏟으라는 큰 음성
|
제 1 대접(16:2) |
악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 받은 자들에게 남 |
제 2대접
(16:3) |
피같은 바다, 바다 생물 모두 죽음 |
제 3대접
(16:4-7) |
강과 물 근원 피, 성도/선지자 피 흘린 죄 심판은 정당 |
제 4대접
(16:8-9) |
해가 불로 사람들을 태움, 회개하지 않음 |
제 5대접
(16:10-11) |
짐승의 보좌에 쏟음, 사람들 아파하면서도 회개하지 않음 |
제 6대접
(16:12-16) |
유브라데에 쏟음,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 예비, 3 더러운 영이 용,짐승,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와 천하 임금들을 꾀어 하나님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해 아마겟돈으로 그들을 모음 |
제 7대접
(16:17-21) |
공기 가운데 쏟음, 번개,음성들, 뇌성, 큰지진(인류 역사 최대의 지진), 큰 성 바벨론과 만국의 성들 무너짐, 섬들과 산악들 없어짐, 큰 우박, 사람들이 하나님 훼방 |
◈ 음녀, 바벨론 (17-18) ◈
큰 음녀가 받을 심판
(17장) |
1) 큰 음녀의 모습(17:1-6): 광야, 7머리 10뿔의 주홍색 짐승타고, 음녀자신은 자주, 붉은 빛 옷, 금,보석,진주로 치장, 손에 금잔, 이마에 이름(비밀, 큰 바벨론, 창녀들의 어미) 성도들의 피에 취함
2)해석(17:7-15)
7머리 10뿔 짐승:전에 있었으나 시방은 없고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나와서 멸망으로 들어갈 짐승.
ㅇ7머리=여자가 앉은 7산, 7왕(5왕은 이미 멸망, 1왕은 현존, 다른 왕은 앞으로 잠간 계속)
ㅇ전에 있었으나 시방 없는 짐승=제8왕, 7왕 중에 속한 자.
10뿔=10왕,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짐승과 더불어 일시 동안 권세를 얻을 것, 어린 양과 싸울 것이나 패전.
ㅇ음녀의 앉은 물=백성, 무리, 열국, 방언들
3)짐승과 음녀의 싸움
4)큰 음녀=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큰 성 |
바벨론의 멸망
(18장 |
1)바벨론과 만국 멸망선언
2)바벨론 멸망과 통곡, 성도들의 신원
3)맷돌 같은 돌 바다에, 바벨론 결코 다시 회복 불가 |
◈ 잔치와 심판( 19장) ◈
①어린 양의 혼인 잔치로 인한 할렐루야
②백마 탄 자의 승리와 심판
③일반적인 심판
④짐승과 거짓 선지자 유황불 심판 |
◈ 천년왕국, 백보좌 심판, 신천신지 ◈
(1)천년왕국(20:1-6)
1)마귀의 1,000년 결박 (1-3)
2)1,000년 통치 (4-6) |
(2)마귀와의 전쟁(20;7-10)
1,000년 차매 마귀 놓여 곡과 마곡 미혹하여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자의 성을 두름,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저희 소멸, 마귀를 유황 못에 |
(3)백보좌 심판(20:11-15): 생명책과 책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 불못에 던지움 |
(4)신천신지
1)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2)왕 하나님과 그 분의 백성
3)새 예루살렘의 모습
4)그리로 들어가는 자들
5)생명수의 강 |
(5)에필로그(22:6-21) |
1.장 서언 서두
2.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3.사데 빌라델비아,라오디게아
6장부터 있을 계획
4.성부(우주의 총사령관)
5.어린양(인을 떼실 어린양)-그 계획을 집행하는 분
6장 첫째--6째인
7장 하나님의 인 맞은 자들
8장 일곱째 인 첫째 네째 나팔
9장 다섯째와 여섯째 나팔
10장 인봉된 일곱 우뢰
11장 두 증인, 일곱째 나팔
<붉은 용과 여자문제> 붉은 용, 바다에서 나온 짐승, 땅에서 나온 짐승-사탄 삼위일체
144,000을 공격, 사탄과 교회의 전쟁사건
12장 붉은 용과 여자
13장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땅에서 나온 짐승
14장
15장
17=18 음녀 바벨론의 심판
19장
바다 - 권력을 말함- 권력을 사용해서 어쨌던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함
땅 짐승- 사상 -뉴에이지, 종교다원주의가 나타나 예수를 못믿게 함
20:1-6 천년왕국이 나타남. 계시록을 공부했다면 천년왕국에 대해서 다 알고 있어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특히 천년왕국에 대한 세대주의적 견해, 무천년적 견해, 역사적 전천년설 등을 다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시험 가능성이 높음)
예수님의 평안, 생명도 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always and not
역사적 전천년설은 재림 후에 천년왕국이 오는 것이다. 그런데 무천년설은 교회시대를 말한다. 교회가 천년왕국이라고 보는 것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천년왕국이 오느냐? 천년왕국이 안오시느냐?가 논쟁의 초점이다.
* <신학지남>에 20:1-6절에 대해서 3가지 입장을 다루어 놓았다.
주석을 해 보니, 역사적 전천년설이 더 강했다.
그런데 신학적인 질문을 던져 보았다.
“천년왕국이 성경대로 된다면 사탄이 결박되고 예수님이 직접 다스리신다. 예수님이 세계 총통이 되신다. 그 천년 왕국에도 죄가 있고 죽음이 있고 예수님에 대한 도전이 있다.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천년왕국의 본질 부분에 가면 어려워진다. 예수님이 임하면 신자들은 영광의 몸으로 변해 버린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아직도 그대로이다. 천년 왕국의 본질을 따르면 역사적 전천년설이 어려워진다.
만약 주님 재림 후에 천년왕국이 온다면, 모든 계시의 내용이 그쪽을 향해져 있어야 한다. 바벨론으로 갈 때 반복해서 예언되었고, 예수님이 오시는 것도 반복되었다. 만약 예수님 재림 후에 천년왕국이 온다면, 반복해서 천년왕국에 대해서 예언되어야 한다. 계시록 20:1-6 이외에는 찾기 어렵다. 본문을 찾기 어렵다. 명시적으로 확실히 다루는 본문이 없다는 것이 전천년설의 난제이다.
21장 신천신지.
인자--인상착의 요지
하늘보좌(4-5) 성가대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장 후에 찬양이 나오고, 5장에 어린양이 나온 후에 대 합창이 나온다.
열왕기서에 다윗의 성가대 수가 대단했다. 찬양과 악기만 전문으로 하는 자가 어마어마하였다. 그 때 구약시대에 성가를 상당히 중시했다. 우주의 대합창, 우주가 어린양, 성부를 찬양하는 모습이다.
7인(6-8장) 인간성의 파괴를 나타낸다.
재앙이 나오면서 하나님의 위로가 바로 따라 나온다. 그 재앙을 내릴 때, 안 믿는 자를 경고하고 믿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인 받은 자-144000
5.일곱 나팔은 환경파괴에 있다.
6.붉은 용과 여자
붉은 용이 여자와 싸움이 나온다. 거기서도 시온산의 144,000이 나온다.
7.일곱대접 - 환경파괴 -전체 파괴(나팔은 1/3)
8.일곱머리 열 뿔이 누군가 하는 것이다.
계 1:1-8 내용
본문을 놓고 적절한 질문을 해야 한다. 그래야 강해를 잘 할 수 있다.
보통 편지는 누가 누구에게 인사를 하는데 요한 계시록은 그렇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송신자 수신자를 보면, 요한이고, 수신자는 아시아의 일곱교회이다.
왜 요한이 이렇게 접근했을까? 이것이 첫번째 질문이다. 이것을 질문하면서 감찰한 것이 <요한이 이 본문을 쓸 때 감격하고 있다는 것이다> 6절에 보면,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이라고 하였다. 이 본문을 볼 때 요한이 감격하고 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7절)
요한이 그냥 편지를 쓴 것이 아니다. 본 것을 쓴 것이다. 본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묵시인 것이다. ‘묵시’라는 말을 썼다. ‘보이셨다’는 말이 싸인( εσημανεν) 으로 보이셨다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 다 나오는데, 성자에게 초점이 있다. 9절 이하에 성자예수에 대해서 자세히 나와 있고, 일곱교회에 편지를 보낸 자, 어린양, 재앙을 전개한 자, 내려온 자, 천년왕국을 다스린 자가 성자이다. 그렇다면 성부, 성령이 무시되느냐? 아니다. 인사말에도 6장부터 나오는 계시도 성부이다. 성령은 나오지 않는가 아니다 일곱영으로 나온다. 일곱눈을 가진 자로 나온다. 성부와 성령도 나오지만, 성자 중심이다. 왜냐하면 주제상 그러하다. 계시록의 주제상 그분의 피로 사신 교회가 세상의 압제를 받고 있는데 그것을 완전히 구속하시고 다루시기 때문에 그분 중심일 수밖에 없다. 이 말을 할 때 요한은 감격했을 것이다. 그가 3년 동안 따라다녔기 때문에 예수님을 잘 알았다. 그런데 60년쯤 흐른 이후였다. 이제는 백발이었다. 요한이 이 편지를 쓸 때, 밧모섬에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다가 유배되어간 상황에 있었다. 대체적으로 그런 유배를 당하면 외롭고 쓸쓸할 것이며 풀이 꺾여 있었다. 황제가 세상을 완전히 다스리는 상황 속에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감격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하였던 것이다.
계 1:9-20
p. 190
1.환상보기 전의 요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는 같은 말이다.
밧모섬에 가 있던 요한, 모세는 황야에서 오경을 썼고,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면서 여러 시편을 썼으며 예레미야는 시련과 박해 중에 예레미야서를 썼고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면서 여러 시편을 썼으며 예레미야는 시련과 박해 중에 예레미야서를 썼고 베드로는 순교 직전의 고통 중에 서신 두 편을 썼다. 요한도 밧모섬에 유배되어 계시록을 쓴 것이다.
밧모섬의 길이 16Km의 섬으로 에베소 앞 스포라데스라는 도서에 속한 한 섬이다.
육신적으로는 밧모섬이지만, 영적으로는 성령 안에 있었다. 야곱이 천국을 보았고, 모세는 떨기나무를 보았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주님을 보았다.
촛대=교회의사명/ 황금=교회의 가치
이 촛대 사이에 인자같은 이가 서 있는데 현란하게 비취는 모습이다. 인상을 보면, 흰 머리털, 음성, 오른손,입에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온다.
이 모습은 신현의 모습이다. 땅 위에 계실 때에 예수님은 요한이 마음대로 기댈 수 있었으나 이 때는 왕중 왕의 모습으로 신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로마의 황제들이 엎드릴 수밖에 없는 그 분이 지금 다스리고 계신다. 하나님의 통치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왕중왕이 다스리는 것이다. 현실적인 문제는 이 문제가 우리에게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에, 우리 나라에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왕중왕이 다스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 사명을 받은 요한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 자들.
나라는 예수님의 통치하심, 그 다스리심에 동참하는데 주님이 다스리심에도 환란이 있었다. 그러나 그 환난을 참으면 동참하는 것이다. 환난을 당하지만 참는 것이다. 그것이 요한의 모습이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모습이다. 안 다스리는 것 같지만 성경에 주님이 다스린다는 것을 믿고 충성하라.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 사람.
☞ p. 28
제3장 구조 분석
Merrill Tenney의 구조분석
1. εν πνευματι를 가지고 분석
2. και ειδον 약 40회
3. 노래 중심의 분석
계시록의 노래를 전부 찾아내서 분석한 것이다.
4. 7 수에 의한 분석
①일곱 교회
②순교자
이 분석은 좀 억지이다. 새 예루살렘도 새 낙원과 관계있다.
우리가 이해하는데 이러한 구조 분석의 利點이 있다.
p.30
5. 1:9
*본것들--그리스도의 비전
*이제 있는 일--7교회의 상황
*장차 될 일--미래--언제?
6. 삽입구들?
7: 14만 4천
10: 힘센 천사와 작은 책
11: 두 증인
12,13,14: 나팔 대접 재앙 사이
톰슨의 분석
편지형태
예언형태
예배형태
격언형태
7시리즈/ 7편지, 7인,7나팔,7대접
쌍: 144,000
나팔과 대접
바벨론 멸망 선언
복과 화: 제 1-6인 -구원과 소망
뿔가진 짐승. - 시온 산의 어린 양
바벨론멸망애가-바벨론축가
대조단위
수치의 상응:
666
1수의 재난: 7인 7나팔, 7대접
7나팔 시리즈 안에 동일한 기간
7환상 시리즈 안에 동일한 기간:
12수 : 새 예루살렘
전복관계:
1)4천사, 땅의 4구석, 땅의 4바람
2)5장의 책은 7중 봉인--10장의 힘센 천사는 열린 두루마리
유다지파의 사자만 연다---요한이 기록하려고 하는데 못하도록
심상의 축복(하나 하나의 이미지가 쌓여서 나중에 쌓여서 나타남)
백마 탄 자-6장, 1장, 19장에 등장한다. 어린아이, 어린 양이 등장. 앞부분에 나온 심상들이 뒷부분에 축적되어 나온다.
순환: 중앙에 원을 두고
붉은 용과 영인의 싸움---나중에도 나옴
요한의 정체----1장-22장
예수님 1장: 22장
축복선언 1: 22
때가 가깝다 1: 22
*** Vern S. Poythress의 분석 ***
서간문 분석
1.Prologue
2.Interoduction go the Epostle
3.Body of the Epostle
A. Body-Opening
B. Body-Middle
3.conclusion
c.body-closing
4.Conclusion
*** 수사학적 구조분석 ***
p,36
세부구조
상징적 인물들.
창조맥락에서의 여인교회
이런 것들을 보면서 포이트레스는 훨씬 더 구조적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기자들은 평범하게 썼는데, 구조주의자들은 그들의 구조에 따라서 성경을 짜맞추는 것이다.
p 38.
계시록에서의 교차 구조
A. Leading into the visions
B. Christophany
C.Announcement og recompense to the churches
D. Throme vision
E.7 seals : rider judhments
F.7 trumpets
G.Vision og the redeened
H.Vision of deceptive opponent
I.Vision og destructive oppnent
G.Vision of the redeemed
F.7 bowls: angelic judgments
E.White horse: rider judgment
D.Throme viion
C.Announcement og recompense to the churches
B.Theophany
A. Leading ou of the visions.
이와 같은 구조분석의 단점은 앞의 것은 맞는 것 같지만 뒤의 부분은 억지가 있다.
*포이트레스의 분석의 문제점
억지지만 그렇게 두들겨 맞추었다는 것이 기적이다. 그런데 교차구조에서 문제점은 중앙에 바다 짐승이 서 있다. 바다짐승을 중심으로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다. 억지 분석이라는 감이 있지만, 계시록을 끌어 당길 수있는 부분에서 참고할 만하다.
p. 39
계시록의 7수 구조
1.7편지.
7인
7나팔
7상징역사
붉은 용, 여인, 바다짐승, 거짓짐승, 144,000 천사선포자들, 추수
-이것이 7개의 역사가 되는가? 각기 하나의 역사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7 history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간다.
7대접
7바벨론의 심판메시지 - 천사의 해석. 천사의 멸망선언, 하늘의 분리, 왕들의 통곡, 상인들의 통곡, 선원들의 통곡, 천사들의 마지막 멸망 선언
7마지막 사건
-마지막 축가, 마지막 전투, 마지막 악의 요소, 마지막 심판, 마지막 새하늘과 땅, 마지막 도시, 마지막 낙원
백마 탄자를 해석할 때, 구조 속에서는 복음의 승리로 볼 수 없다. 오히려 심판으로 보아야 한다.
승리와 심판이 큰 주제임을 보았다.
계시록의 내용이 딱 떨어진 구조속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구조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조적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계시록을 두고 역사적 순서로 보는 것이 세대주의나 역사적 전천년설의 입장이다. 연대기적으로 보지는 않지만 점점 더 심화되는 것이 사실이다. 7나팔에서 7대접으로 가면 더 심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연대기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마크를 다는 것이다. 심화되긴 되대 반복진행이냐, 그냥진행이냐?는 것이 문제이다. 권교수님은 반복진행이라고 본다.
연대기적으로 보는 대표적인 사람이 쥬영흠 교수이다. 그의 종말론은 무천년설은 마귀적이라고 말한다. 전체적으로 신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독설이 나온다. 그러므로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24장---데살로니가 등등을 연대기적으로 찾은 것이다. 그런데 권교수님은 진행되는 것은 분명한데 ‘반복진행’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6장에 가면 ‘진노의 큰 날’이 나온다. 그날은 마지막 장면이다.
그리고 7장에 가면, 144,000명과 무수한 무리가 나온다. 그들은 지금 마지막 복의 상태에(지복) 가 있다.(final bless) 7장 뒤에 가면 어린양이 눈물을 씻어 준다. 그러므로 7장에 마지막 완성이 나온다. 그렇데 되면 연대기적으로 진행이 될 수 없다. 그 다음에 11장에 가면, ‘이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마지막 통치가 나온다)
14장에 가면 바벨론의 무너짐이 나오는데 , 그것은 17장에 나온다.
16장 끝에 가면, 바벨론 멸망이 또 나온다.
18장에 도 바벨론 멸망이 나온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가? 바벨론은 마지막 심판이다. 이것들이 도중에 나온다. 심화되긴 되되 반복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반복되면서 나가고 있다. 이것을 반복진행법(Progressing Repetition)이라고 한다. 그 중간에 나타나는 부분들이 거의 전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니엘서를 보자. 왜냐하면 예언의 형태로 보면 유사하다. 그리고 계시록이 다니엘을 많이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니엘서 2장에 보면 금신상과 4나라가 나온다. 7장에가면 짐승으로 바꾸어서 4나라가 나오고 8장에가면 두 짐승이 나온다. 9장에 가면
11장에가면 남방왕 ,북방왕이 나타난다. 톨레미, 실류시크 왕조가 나온다. 이것이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각도를 달리해서 반복되고 있다.
그러니까 다니엘을 주신 하나님이 계시록도 하나님이 주셨는데, 계시의 반복은 반복진행적이라는 것이다.
계시록 자체를 놓고 볼 때, 반복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계시를 주실 때도 반복하되 확대시키면서 반복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으로 갈 때도 , 올라올 때도 다각도적으로 반복했다. 예수님의 재림도 다각도적으로 반복했다.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도 제자들이 다각도적으로 반복했다.
◈◈ 이 부분은 너무나 중요하다. 시험에 나올 때 쓸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파괴면에서, 환경의 파괴면에서, 영적 싸움의 면에서도 이야기 할 수 있다. 이것이 계시록에서 반복진행된다. 보여주는 부분은 다르지만.
그런데 19장에 와서 끝나 버리고 20장에서 다시 시작되는가 문제가 된다.
역사적 전천년설은 19장에와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20장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무천년설은 19장에 와서 끝나버리고 20장에와서 다시 시작되는 입장이다.
종말 훈화에 대해서도 마24, 막13, 눅21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바울 서신도 집중으로, 혹은 암시적으로 다루며, 베드로 서신도 다루고 있다.그리고 모든 서신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사도요한의 기록당시 상황이 성도들에게 위로가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 p. 195
2장 강해
에베소 교회의 메시지를 전할 때 주의해야 한다. 교인들이 물려 있다. 이미 다 아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떻게 뒤짚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새로운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첫째, 둘째, 셋째로 접근하지 말라.
권 교수님의 접근방식은 이렇다.
소아시아에 제일 큰 도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이 거기에서 목회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죽은 자 였습니다. 그 다음에 떨어진 메시지가 사도요한에게 왔는데 그 메시지가 자기가 목회하던 에베소교회였습니다. 그 교회는 형편 없는 교회가 아니라 아주 놀라운 교회였습니다. 하나의 행위만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있는교회, 실천하는교회, 여러가지 실천이 있는 교회였다. (거기서 강요하지 말라)
에베소 교회는 야고보서적인 메시지가 필요없는 교회였습니다.(교인들에게 설득시켜라. 생각하게 하라)
에베소 교회는 온 몸을 다해 실천하는 교회였다.(수고의 강도를 말한다)
인내라는 단어와 연결하여. 냄비같은 교회가 아니라 꾸준한 교회였다.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속성 있는 교회였다. 참고 견뎠다는 주님의 평가가 내려졌다. 동기도 순수했다. 내 이름을 위해서 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있다면 대단한 교회이다. 정행이 있는 교회였다. 실천을 강조하면 교리를 무시하는 것이 교회사에 나타난다. 교리를 강조하면 실천을 무시한다. 이런 현상이 대부분 나타난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않았습니다. 니골라 당의 행위, 우상숭배와 음행을 미워하였던 것이다. 이 이단의 행위를 테스트해서 폭로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21세기를 가면 상대주의시대로 접어 들게 된다. 상대주의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유일서을 강조하는 것이 어려워지게 될 것이다. 그것을 강조하면 쇄국적 폐쇄성이라고 비난받을 것이다. 그 때 에베소에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에베소 교회는 정통과 정행이 있는 교회였음을 알 수 있다.
얻허게 하면 이들이 이렇게 지켰을까?
행 20장을 보라. 행악한 이리가 와서 어그러진 자들이와서 헤칠 것이며, 내외부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3년동안 주어진 교훈을 지켜라. 이 유언적 교훈을 에베소 교회는 지켜서 이단들을 테스트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에베소 교회가 대단한 교회였음을 인식시켜야 한다)
그런데 첫 사랑을 잃어버렸다.
요한은 사랑의 사도였다. 그런데 요한이 목회한 교회가 사랑이 없다니!
주님이 말씀 하실 때, 처음 행위들을 가지고 행하라. 대책을 보니까 처음 행위들로 표현된 첫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다. 첫 행위를 알기위해서는 사도행전 19,20장에 처음 사랑이 나타난다. 19장은 53년, 20 55년에 기록된 것인데, 그들은 두란도 서원에서 성경공부를 하였다. 바울 사도가 강론하였던 것이다. 4-5시간, 상당히 긴 시간을 강론하였던 것이다. 바울이 2년을 머물면서 교육시킨 교회이다. 아마도 많은 부분을 공부했을 것이다. 아마도 구약성경을 다 커버했을 것이다. 그것도 눈물로 권면했다. 그래서 주의 말씀이 편만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2년동안 듣고 있던 자가 누구냐는 것이다. 2년을 줄곧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의 말씀에 대한 수용성을 보라. 이것이 그들의 처음 행위였다. 그런데 이 처음행위가 사라진 것이다.
사도행전20장 끝 부분에 보면, 바울의 목을 안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였다. 에베소 항구에서의 바울과 그들의 행동을 보라.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였다. 하나님과의 기도의 관계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인정이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요즘 우리는 얼마나 인정이 메말랐는가?
그런데 에베소 교인들의 처음 행위는 어떠했는가? 이제 그들은 처음 행위를 버렸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 그들의 풋풋한 사랑이 이제는메말라 버렸던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강원도에서 살자루를 지고 서울에서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온 것인데, 요즘은 어떠한가?
☞ p.48
제 4장 여러 해석들
계시록의 내용이 언제 성취되느냐? 성취 시기면에서 계시록의 내용을 살펴 보겠다. 계시록은 열광주의자들과 분파주의자들의 낙원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나름대로 계시록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최근 계시록의 해석이 너무 다양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당혹스럽다는 것이다. 이 복잡한 내용을 통일하기 위해서 일단 전체적으로 훑어 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1)계시록의 내용을 살펴보아야 한다.
계시록은 tantalizing한 것이 아니다. 다 알것 같은데 모르는 것 같은 것이 아니다. 계시록은 복을 주시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다. 그런 면에서 tantalizing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계시록의 성격상 어렵다는 것이다. 귀 있는 자만이 들을 수 있다 그리고 기록자 요한도 잘 몰랐다. 그럼으로 요한계시록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풀어야 하겠다는 도전을 받게 된다.
초대 교회는 천년왕국을 문자적으로 보았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적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이레니우스는 지상의 천년왕국을 주장했고 666에 대해서는 제의만 하였다. 이레니우스는 폴리갑을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66이 누구를 가르치는지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몇 명을 제의하였다.
이런 경우를 보면서, 저자 요한과 1세기정도 떨어진 이레니우스가 666을 잘 몰랐다면 2000년 떨어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히폴리투스도 이레니우스와 비슷하게 전개한다.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의 투쟁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도덕적인 교훈을 받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지상의 천년 왕국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4세기 말의 티코티우스는 7대 주석법을 낸 사람인데 주로 영적인 방법을 썼다. 이 영향으로 어거스틴은 영해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중세로 넘어가면 티코니우스를 따라간다. 중세는 4중 의미를 강조한다. 영적으로 더 깊은 의미를 찾아 내는 것이다
종교개혁으로 넘어오면, 티코니우스의 영향을 벗어나, 문법적, 역사적으로 따라갔다.
교황측에서는 리베이라, 알카사가 나온다.
17,8세기에 가면 여러가지 해석이 나타난다.
19세기에 가면 요즘 이야기하는 방법이 이미 다 나타났다.
19세기까지의 해석정리와 현재 해석동향분석
(1)과거주의 해석법 -성취의 연대가 언제냐,
로마 제국설이라고 한다. 당시와 연결시킨다. 계시록은 주로 예루살렘 멸망과 로마 멸망을 두고 계시록을 해석하려고 한다.
(2) 미래주의 해석법 - 예수님의 재림직전과 직후를 연결시킨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7교회를 그렇게 본다.
에,서,버,두,사,빌,라---
세대주의적 미래주의 -계시록을 해석할 때, 후 3년반에 나타날 환란에 두고, 땅 위에 천년왕국이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일어난다.
온건한 미래주의 --유대주의를 제거하고, 3년 반을 강조하지 않는다.
(3)역사주의 해석법
교회역사설
교회 역사 전체를 상징적으로 제시하는 책,
반즈의 입장
(4)상징주의적 해석법
계시록 전체를 거대한 풍유로 보고, 무천년설 입장에서 봄. 하나님 나라와 사단의 나라의 충돌을 상징적으로 봄
젠센의 도표
☞ p. 53
우리는 어떤 방법을 택할 것인가?
Ladd입장을 취함
원근통시방법을 취한다. 멀리있는 것과 가까이 있는 것을 동시에 본다. 그들의 예언적 시각 속에 2가지 초점을 두었다. 그 당시와 근접미래의 사건들, 그 다음에 궁극적 종말사건이 또 하나의 초점이다 이 두 초점이 역동적 긴장관계에 있다. 때때로 이 긴장관계를 보면 연대기적 구분도 없이 나타난다. 미래의 프로그램이나 도표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적 완성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종말적 완성과 현재가 2가지가 있다. 이것이 계시록에 잘 나타났다.
이것이 계시록에 잘 나타났다. 여호와의 날이 아모스에 나타나 있는데, 이것은 그 당신의 앗수르의 멸망과 동시에 종말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속을 말한다. 사 13장에 보면 바벨론의 멸망을 보는데 두 초점을 동시에 보고 있다. 요엘서에 보면 여호와의 날이 있는데, 여호와의 날이 당시 황충 재앙과 연결되어 있다. 한발 재앙으로부터 여호와의 재앙으로 나아가는데, 마지막 심판이 나온다. 시대적 구분 없이 뛰어 넘어 가버린다. 다니엘서를 보면 하나님의 전에 멸망의 가증한 것을 세우는데, 안디오크스 에피파네스이다. 이는 종말적 적그리스도의 예표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니까 두가지 초점을 동시에 두었다. 이것이 예언자들의 시각이다. 이것이 예수님에게도 나타났다. 마 24장에 보면, 로마군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의 최종멸망을 동시에 보셨다. 제자들의 질문에 동시에 답변하셨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다 이루어진다”고 말할 때, 두 가지를 동시에 보아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질문할 때, 웅장한 예루살렘을 가리키면서 질문하였다. 그 때 예수님은 돌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것이다. 언제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날 것입니까? 그리고 세상 끝날에는 무슨 일이 있을 것입니까?
예수님의 답변을 동시에 하신다. 다른 차원에 있었지만 동시에 답변하셨다. 예루사렘 멸망이 마지막 세상 종말의 예표로 두고 말씀하셨다. 어디까지가 예루살렘의 멸망인지, 어디까지가 세상 종말인지 구분 못한다 역동적 긴장관계속에 들어가 버렸다. 이것이 원근통시법이다. 이것은 구약 예언자들에게도 있었지만 예수님에게도 있었다.
계시록의 바다짐승을 볼 때, 로마를 가리킨다. 당시로 보면 로마다. 그것이 최종으로 가면 종말적 적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래서 저는 이 래드의 원근통시법이 계시록을 푸는 열쇠라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요한당시에 어떤 것에 해당되는지, 그 다음에 재림 직후를 연결해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많은 부분이 풀린다. 7머리 10뿔이 나오는데, 왕과 산을 의미한다. 이것은 분명히 로마를 가리킨다, 로마를 보면 7산이 있는데 그것은 로마를 지시함이 분명하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로마를 통해서 성취되고, 예수님 재림 직전에 적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원근 통시법을 가지고 계시록을 보면, 초대교회도 cover 하게 되고, 과거주의 해석도 보게 되고 재림 직후를 볼 수도 있다. 교회 역사에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교회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 상징적인 부분이 있다. 12-14장까지 보면, 역사나 과거주의로 보기 힘든 부분이다.
10장이 종교개혁시대라면 12장이 종교개혁이후시대가 되어야 하는데 12장에 예수님의 탄생부분이 나오니까 당황하여 버린다. 광야에서 양육받는 여인, 붉은 여인이 박해받는내용, 13장에 뒷부분에 가면 땅에서 나온 짐승이 종교와 사상을 혼란케 한다. 이것은 어느 시대를 말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가 나타난다. 그래서 이것은 상징주의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의 투쟁을 말한다.
계시록은 로마와 관련되어서, 문화와 관련되어서 상징을 많이 사용한 묵시로서, 초대교회에 연결될 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에도 연결된다. 신국과 세상의 나라, 신국과 귀신의 나라가 투쟁관계에 있다.
하나님 나라의 현시대와 귀신의 나라의 갈등을 보여준다. 그리고 신국과 인국의 궁극적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 계시록 전체에 다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어느 정도 상징이며 어느 정도 문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대주의 해석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여기에서 나온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 적용될 때, 어느 시대를 가리키는지 문제가 생긴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 원근통시법을 사용한다. 먼 산을 볼 때, 같은 산으로 본다. 그러나 가까이 가면 떨어져 있다. 멀리서 보면 같은 지평선 안에 있다. 이 두 가지가 연결될 때, 유형론적, 예표론적이 된다.
교회 역사와 관련된 해석을 보면, 교회 역사 속에 나타나는 사건들은 큰 원리 속에서 나타나는 패턴과 비슷하다. 히틀러도 그러한 유에 들어가게 된다.
원근통시법이 기본이고 그것에 상징주의가 전반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사탄과 하나님의 나라가 투쟁하고 있다.
이렇게 계시록을 볼 때, 그 시대 자체, 초대 교회에도 복을 받고, 우리 시대에도 복을 받을 수 있다. 현실성 있는 책이다. 이렇게 원근통시법을 통해서 계시록을 볼 때, 난제가 생긴다. 난제가 나올 때, 겸허한 판단유보의 자세가 필요하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이야기가 최종 답안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이것을 볼 수 있고 저렇게 볼 수 있다.
p. 56 끝
* 계시록의 해석 태도
필래 휴즈의 계시록의 해석 태도
--성요한의 계시록 속에 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 우리가 그 놀라운 사실의 실재들을 보고 체험할 때만 완전히 명백해 질 수 있는 것들이 많이 들어 있다. 그 부분들을 앞으로 올 영광의 관점에서 묘사하고 있다. 앞으로 완성되고 체험하기 전 까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므로 그 때까지는 바울사도처럼 지금은 희미하게 보고 있고 부분적으로 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희미하지만 바로 알고 있고, 부분적으로 알고 있지만 틀린 것이 아니다. 완전한 것이 올 때까지는 불완전하다. 성 요한처럼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성경과 성경을 비교하면서 우리는우리의 이해를 증진시킬 분만 아니라 오류를 피하고 오류와 오석을 피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을 통해서 이 책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진 복들을 붙잡도록 복에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 시간에는 계시록을 구조 속에서 보았고, 오늘은 해석의 관점에서 계시록을 보았다.
계시록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희미하게 안는 것도 복이 된다.
☞ p. 239
라오디게아
미지근하다.-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비교해 보아야 알 수 있다. 라오디게아에 대해서는 칭찬이 없다. 행위는 있었지만 칭찬할 만한 것이 없다. 그들은 미지근하였다. 예수님을 보면 비유의 천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뿌리를 내리는 메시지를 전했다. 착근은 주변의 환경과 연결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라이디게아는 골로새와 히에라볼리와의 사이에 있는 지역이다. 히에라볼리 지역은 온천이 있다. 석회수가 흐르고 있다. 물이 떠거운 곳이 있다. 히에라볼리는 뜨거운 물이 ?구친다. 이것이 라오디게아 올 때 미진근해진다. 그것이 역겨운 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지역에 흐르는 물의 상태를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이 비유를 사용했다.
라이디게아는 금이 많은 지역이었고, 직물로 유명하였다. 안약이 유명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부유한 지역이었다. 이들은 외부적인 부를 근거해서 그들의 신앙을 이쯤이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볼 때에 그들은 가난했고 벌거벗었고 눈이 멀었다는 것으로 평가했다. 그들은 돈이 많았지만 가난했고, 직물업이 발달해서 옷을 입은 것 같지만 사실은 벌거벗었다. 그리고 안약이 발달했지만 눈이 멀었다.
그래서 옷을 사고, 안약을 사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살 때, 나에게서 사라고 하셨다. 시장의 비유가 나온다.
3;20은 안 믿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뜻뜻 미지근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금을 사라고 해도 사지 않고 옷도 사지 않았다. 캄캄한 밤이 되었다. 그래서 문 앞에까지 가서 문을 두드리면서 지금이라도 열어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문제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주님을 밖에 두었다는 것이다. 문맥을 보면 주님은 문 밖에 계신다. 실존적으로 오셔야 한다. 마음 속에 주님을 배제시키는 부분이 있다. 주님을 배제시킨만큼 신앙이 미지근해진다.
☞ p. 57
제5장 세대주의적 해석
오늘은 계시록에 대한 해석 중에서 가장 유행하는 세대주의적 해석에 대해서 살펴보자.
세대주의라고 하면 문자적 해석이 그 특징이라고 하는데 실제적으로는 어떤가? 월부드의 입장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월부드도 계시록이 묵시문학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세대주의자들도 상징법을 인정한다. 세대주의자들은 묵시문헌을 이야기할 때, 성경 내의 묵시와 성경 외의 목시가 있다고 한다.
월부드는 성경 내의 묵시는 정경차원에서 성령의 감동에 의한 것이며, 성경 외의 묵시는 가경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예언이 아니면서 예언의 형태를 취한다. 저자가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고 가명을 사용하며 당시 상황에 대해서 비관적이다. 성경을 볼 때, 이런 각도에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다니엘서가 주전 2세기에 쓰여진 책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 내의 묵시로 보아야 한다. 계시록은 성경 내의 묵시 문학이다.
계시록은 수신자를 분명히 밝혔다. 계시록은 범세계적인 것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므로 묵시문학이면서도 성경 내의 묵시문학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이 월부드의 견해이다.
* 상징법에 대한 월부드의 견해
월부드는 계시록이 상징법을 사용하는 이유는 기독교를 박해하고 있던 도미티안 황제 시대에 로마의 당국이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상징들로 계시를 전하는 것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그 상징들 중에 동물들의 세계의 상징들이 많다. 그리고 비자연 세계, 식물 세계, 인간 세계, 천둥, 우박, 농기구, 무기, 악기 등이 등장한다. 성경적 배경이 엄청나다. 다니엘서의 바벨론. 이세벨, 발람 등등 그리고 이 상징의 핵심은 그리스도이다.
숫자가 많이 나온다. 문자적으로도 상징적으로도 이해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7이 그 숫자이다. 특별한 반증이 없는한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월부드는 보았다. 그리고 42개월은 상징이 아니라 정확한 날짜를 말한다고 한다. 그리고 666은 마귀와 바다짐승과 땅 짐승의 삼위일체로 보았다. 그리고 계시록 안에 직·간접 상징이 나온다. 7별, 7촛대·············
계시록 안에 있는 상징 해석을 했다. 그러나 숨겨진 만나, 새벽별, 7 언덕 위에 앉은 자에 대한 해석은 그렇게 보기 힘들다. 그러므로 월부드도 문자적 해석에 일관성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계시록은 하나님의 진리를 표현함에 있어서 상징법을 사용하고 있다. 강의를 할 때나 설교를 할 때도 현재 나오는 많은 책들을 읽어야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다. 책을 많이 읽기를 권면한다.
이러한 상징들에 대한 해설이 나오는데 이것을 해석의 패턴으로 보았다. 상징에 대한 해석의 패턴으로 보았다. 설명되지 않은 상징들이 나올 경우, 그 문맥이 상징적인 해석을 명시하지 않는 한 그 자연스러운, 통상적인 의미에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 부분이 논쟁점으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월부드가 볼 때, 상징적으로 해석되지 않을 경우, 본문이 해석하지 않는 한 문자적으로 해석하라고 한다. 하나님이 보여 주셨던 방법대로 해석하라고 하라는 것이다.
월부드가 3년 반에 대해서는 상징으로 보지 않는 근거를 다니엘서에서 찾고 있다. 그는 반증이 없는 한 문자적으로 해석하라고 한다.
☞ p. 60
세대주의의 특징이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세대주의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은 남아 있고 교회가 4장에서 휴거한다. 그리고 19장 까지 이스라엘과 이방이 환란을 겪는 기사라고 보는 것이다.
월부드는 2, 3장이 그 시대의 대표적 교회라고 본다. 그리고 4장에 가서 ‘이리로 올라오라’고 하는 구절이 중요하다. 이것을 월부드는 교회의 휴거를 전제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뒤에는 교회 안에 다른 사람이 당하는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교회라는 단어가 22장 16절에까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는 어디에 가 있는가? 바로 하늘에 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그러한가?
우리는 성경해석학에서 개념과 실제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교회라는 단어가 없더라도 교회라는 개념은 있다. 22장 16절을 보면, 교회들에게 증거하겠다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해서 이것들을 증거하겠다고 하셨다. 앞에 나온 내용들인데, 그러므로 교회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잘못이다.
월부드는 2, 3장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씀을 들으라고 했는데 13장에 보면 교회라는 말이 안 나온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3장에 성도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들이 곧 교회이다.
세대주의자들은 교회와 이스라엘을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도표를 보면 후 3년 반의 대환란이라고 보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고 월부드는 말하고 있다.
계시록의 대단히 많은 부분이 후 3년 반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시록에 표현된 것은 아래 도표와 같다. 7나팔 속에 7 대접이 들어있고 제1-7나팔 이 7인안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인하고 나팔은 같이 간다. 그러므로 그런 도표는 힘들다.
제 6인을 보면, 이미 최후 심판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계시록이 연대기적이 아니라, 반복적이라고 하였다.
월부드는 6인을 진노의 시작이라고 하였다. 날을 해석함에 있어서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문제가 생기므로, 24시간의 하루가 아니라고 해석하였다. 계시록에 그러한 근거가 없다.
제 3 나팔을 보면 하나의 천체가 대기권에 들어와서 강물과 물들 위에 떨어져 그것들을 오염시키는 것으로 본다. 합리적 문자성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 힘들다. 3 나팔의 경우 이 세상에는 수 많은 강들이 있는데, 타는 별은 하나이기 때문에 어느 강에 떨어지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제 6나팔을 문자적으로 보면, 유프라테스 강으로 본다. 그리고 2억의 군대는 동양의 인구 폭발로 본다. 동양의 군대가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침공한다는 것이 6나팔이라는 것이다.
10장 부터 17장 까지는 연대기적인 진전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후에는 연대기적 진전이 있다는 것이다.
군대는 일본이나 중국군으로 본다. 어디로 모이느냐? 므깃도로 모인다고 보는 것이다. 므깃도는 요새이다. 월부드는 2억명을 문자적으로 해석해 놓으니까 해석이 안되자 2백 마일로 해석해 버린 것이다. 이것으로 문자적인 해석의 무리가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월부드는 합리적인 한도내에서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도가 되지 않는다.
6나팔도 동방의 군대, 6대접도 동방의 군대라고 하였다. 3년 반 중에서 6나팔과 6대접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도 마지막 날에 일어나기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교회가 휴거하고, 제7왕국이 회복되고(회복된 로마, 10왕) 이 제국과 더불어 제 8왕 곧 짐승이 나타난다. 그리고 전 3년 반은 살려두고 후 3년 반은 핍박을 한다. 이것이 7머리 10뿔을 가리킨다. 그리고 휴거한다는 것이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나라들이 실제적인 나라였듯이, 계시록에서 구체적인 나라였을 것이다.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적그리스도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인물로 본다.
19장에서 그리스도가 재림하고 그 후에 바다 짐승, 바다짐승, 거짓 선지자를 정복하고 왕국이 나타난다. 그리고 천년통치가 이루어지고 부활과 심판이 있다.
* 지금부터 천년왕국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것이다. 앞으로 완성될 천년 왕국이 이 지구가 포함되고 회복된다고 하였다. 회복의 근거는 계기록 21장을 보면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하셨다. 이미 있는 만물을 가지고 새롭게 했다. 로마서 8장에 만물이 지금 허무에 굴복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죄 때문에 굴복한다고 하였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영광중에 나타날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회복된다는 것이다. 로마서 8장이 확실하다. 이 질문을 할 때, 벧후 3장의 질문이 나온다. 거기서는 땅이 불에 타 없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만물이 없어진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다. 벧후 3장을 다시 보면, 사람들이 베드로후서에서 도전할 때 무엇을 가지고 도전하였느냐를 잘 보아야 한다. 그것은 이 세상은 그저 있다. 세세토록 변함이 없다. 그런데 무슨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거냐? 심판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이렇게 그들은 공격해 왔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들에게 물의 심판이 있었던 것처럼 불의 심판도 있다고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했다. 물의 심판이라고 했을 때 실제의 물이었고 세상의 모든 사람과 동물들은 멸망당했다. 그와 똑같이 지금 세상은 불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초점은 물의 심판이 되었을 때, ‘멸망되었다’는 표현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 멸망은 이 세상이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죄인들을 소멸했다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불의 심판도 하나님의 심판하실 때 불로써 심판을 하시는데, 그것은 이 땅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노아 때와 같이 ?아하겠다는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이 땅은 회복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또 질문이 온다. 요1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데리로 오겠다”고 하셨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계시록 21장에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내려 온다는 말이 있다. 마지막 완성 될 때, 주님이 준비하신 그 하늘나라를 가지고 내려온다. 그리고 데리고 간다고 하더라도 그 세계가 가까이 있기 때문에 데려가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권 교수님은 무천년설적 입장에서 역사적 전천년설에 대해 열려 있는 입장이다.
역사적 전천년설자들에게 계시록 20장 이후에 어디에 천년왕국이 나오느냐고 질문했을 때 들고 나오는 구절이 고전 15: 23이하 구절이다.
첫 열매 = 그리스도
다음 = 재림
이 사이의 간격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무천년설이냐 전천년설이냐 논쟁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이 이 세상이 오셔서 통치력을 발휘하시지 않았다. 만약 천년왕국이 실현되면 그 곳에서 통치하실 것이다.
재림 때에 영광의 몸으로 바뀌고 죽었던 사람들이 살아나 영광체가 된다. 재림하고 나서 천 년이든 몇 년이든 지상의 통치기간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면 저 천년 동안에도 사람들이 태어난다. 그 태어나는 사람들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예수님께서 오실 때 성경이 계속 강조하는 것은, 초림 때의 예수님은 비하된 모습이지만 재림 때는 영광된 모습이 확실한데, 그 영광스러운 모습에 성도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가 동참한다는 것이다. 그 동참한 영광에서 배제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 때에 죄 없는 자로 태어난다면, 영화의 신자가 된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보아도 고통이 없는 완성된 성도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현재는 고통이요, 장차는 평안이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약이 초점으로 하는 것은 재림이다. 재림에 최종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이다. 무천년설에서 강조하는것은 주님 재림하시면 모든 것이 다 회복되는 것이고, 전천년설은 주님 재림 후에 천년 동안 역사가 진행되면서 주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백보좌 심판을 하는 것이다.
신약 성경은 주님 재림하시면 모든 것이 완성된다고 보는 데 포인트를 두고 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것으로 구원이 완성된다는 입장이다.
제6장 계시록의 장르:
묵시(apocalyptic)
세대주의는 문자적으로, 묵시문헌은 상징주의로 간다. 이 둘을 보면 극단적으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랜트 오스본은 해석학적 나선형이란 책을 쓴 사람이다. 이 사람은 대부분의 사람에 있어서 묵시문헌은 가장 현혹적이면서도 가장 신비적이라고 하였다. 바로 알고 나면 신학적인 진리를 제시하는 매력적이고 총괄적인 진리를 제시해 준다. 그러므로 이 문헌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묵시문헌이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보았다. 케제만은 묵시문헌의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한 사람이었다. 프리드만은 묵시가 신약문학의 통제요소라고 하였다.
이와 상반된 이론을 말한 사람이 롤린스이다. 묵시문학은 복잡한 패턴의 한가지이며 그것도 원초적인 가닥이 아니라고 하였다. 신약에 있어서 묵시문헌을 가장 중요시 해 버리면 기독론이 약화된다. 교회론도 약화 되어 버린다. 교회를 묵시문헌에서는 적극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교회를 강조하고 있다. 묵시문헌은 종말의 통치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묵시문헌을 모체나 통제요소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레온 모리스가 <묵시>가 요즘 신약신학계에서 중요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하였다. 케제만의 입장은 묵시는 모든 기독교 신학의 모체라고 하였다“ 챨스의 묵시는 기독교의 부모라고 했으며, 프리드만은 묵시가 신약신학의 통제요소라고 했다. 롤린스는 케제만의 입장에 반대해서 묵시는 신약의 매우 복잡한 패턴의 한 가닥이며, 그것도 원초적인 가닥이 아니라고 하였다. 특히 계시록은 묵시문학이기 때문에 묵시문헌을 모르면 안된다는 입장이다.
1. 묵시라는 의미
영어권에서는 아주 많이 쓰인다. 미국에서는 고충건물의 대화재, 산성비, 핵전쟁의 위혐, 환경 파괴등이 나오면 묵시론적인 것으로 말한다.
그런데 묵시라고 할 때 묵시는 아포칼룹시스는 카바를 벗긴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약사다. 묵시라는 말은 기원전 300년에서 기원후 300년까지 이르는 특징을 가진 책들의 그룹을 말한다. 그런데 그 당시 묵시라는 분류가 없었다. 그리고 특정 장르로 보는 기준도 없었다. 그냥 썼다. 그러므로 그런 글들을 하나로 단순히 정의 내리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여러 학자들의 정의를 살펴보자
2. 다양한 정의
1)콜리의 정의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계시의 도고가 미래, 특히 말세의 비밀을 ·······
이 정의의 문제는 사도나 예언자에 한정 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만에 국한 시켰기 때문에 문제이다. 일반 묵시 문학에 더 많기 때문이다.
2)레디쉬의 정의
묵시적 종말론, 묵시, 묵시사상을 구분해 설명했다. 이렇게 구분하면 더 원만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예언적 종말론을 알아야 한다. 묵시적 종말론은 이 땅의 인간 역사사가 완전히 끝나고 완전히 다른 세계가 와야 한다. 그러니까 현실 역사와 전적으로 다른 것이 묵시적 종말론이다. 궁극적으로 미래에 어떻게 활동하시겠는가 하는 것이다. 묵시적 종말론은 완전히 단절된 세계를 다룬다.
묵시는 네르티브이며 계시 문학이며, 타계적이며 종말론 적 구원을 내다본다.
내러티브로 된 계시문학, 계시의 인간 수용자는 과거의 유명한 영웅이며·········수평적이며 수직적(타계적 존재들과 장소들)이 있다.
묵시사상은 하나의 세계관이다. 묵시문학에 발견되는 전체적 사상, 세계관이다. 여기서는 천국과 지옥과 죽은 자들의 도성 까지 포함한다.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폭풍처럼 뛰어 들어와서 흔들어 놓는다.
이 특징은
1) 이원론이다. 올 세상과 이 세상, 하나님과 마귀,
2)상징적 우주관을 가지고있다.
3)종말론적이다.
이것이 레디쉬의 정의이다.
3)한슨의 정의
어디까지를 묵시라고 하느냐? 곤란하다.
그런데 이러한 묵시를 정의하는데 있어서 사람들이 너무 한쪽에서 사람들이 정의했다. 쟝르, 출처, 배경가지고 정의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한 각도에서 정의하기 때문에 다른 부분은 도망가 버린다. 그래서 모든 것을 결합해서 정의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선견자를 통하여 종교적 공동체에 계시된이란 구절에 대해서 이 공동체를 재구성하기 워렵지만 원초적 천상계시다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질서라고 제시하면서 현실적으로 생활을 갱신하고 생활의 질서를 재편하는 글을 말한다.
쿨리는 성경에 국한시키는 점을, 레디스는 복합적인 요소를, 한슨은 종합적으로 잘 정의해 주었다.
2. 묵시의 분류
1)토레이의 분류
다니엘, 에녹서, 에녹서 모세의 승천 에스드라서 바룩의 묵시 ············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유언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아브라함, 엘리야, 아담, 등등 많은 유명한 사람들을 등장시켰다. 에스드라스 2서는 신학적 묵시의 최고의 모델이다. 신학적인 갈등 문제를 다룬 묵시문학이다.
우리는 어떻게 묵시문학을 볼 것이냐?
묵시문학에 대해서 아는대로 5권 정도를 써 보라고 했을 때, 유명한 사람 5개를 떠올리고 써면 될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씨름할 필요가 없다.
쿰란 문선들을 보면
이사야, 호세아, 나훔, 하박국, 스뱌냐, 시편 37편 주석 사독 문서, 훈육집 등등이다.
여기에 보면 빛과 어둠의 이원론이 나온다. 쿰란 문헌에는 이원론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묵시문헌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많이 다루고 있다.
p. 70 기독교 묵시
우리가 묵시문학을 공부할 때, 한계는 기원전 300에서 기원후 300년을 잡는다. 이것을 통해서 묵시문헌이 어떤 것인지를 대강 살펴볼 수 있다.
111 묵시문학의 배경
1.위기와 도전
죤 콜린즈는 위기문학으로서 에스라 4서의 경우 신학적 위기, 다니엘의 경우 정치적 위기, 쿰란문헌의 경우는 사회학적인 위기를 배경을 깔고 있다.
이런 위기라는 것은 인식된 위기이다. 실제의 위기이지만 느끼는 사람도 있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저항문학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저항이라는 것은 능동적 형태도 수동적 형태도 취할 수 있다. 묵시문학의 경우는 대부분 수동적 형태이다. 그 클라이막스가 순교이다. 이런 것을 당하면서 저항하는 것이다. 위기 속에서 저항하는 것이 위기 속에서의 묵시문학이다.
위기와 도전에 있어서 위기는 악에 있었다.
1)의로운 남은 자가 다른 말로 하면 의로운 자지만 소수에 불과한 사람들이 악의 문제에 부딪혔다. 이 악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한 자들을 포상하시고 악한 자들을 징벌하신다는 입장인데, 왜 악한 자들은 잘되고 의인은 고통을 당하느냐 하는 악의 문제에 부딪혔을 때에 과거에는 예언자로 통해서 직접 하나님께서 설명했다. 예언이 있었다. 그런데 묵시문학의 배경에서는 예언이 중지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재해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묵시문학이다.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 유대인들이 역사적 신학적 딜레만에 빠져 버렸다. 그들이 왜 바벨론으로 갔느냐 불순종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 올 때는 비젼이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예언자들의 예언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왔다. 그래서 그들은 우상숭배를 철저히 처리했다. 율법에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이방 결혼도 폐지하였다. 마카비 시대에는 영웅적으로 헌신했다. 그런데 왜 이런 의인들에게 형통을 주시지 않고 악인들이 지배하느냐?
실루시드가 등장하였고 폼페이가 등장하므로 신학적 딜레마에 빠져 버렸다. 이것이 신약으로 연결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의 의로운 삶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역사가 악으로 점철된 것은 예언자들의 설명으로 불가능하였다. 하나님 의정의 문제가 악의 현실 속에서 부딪혔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희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요청되었다. 묵시는 이러한 재해석을 제공한 것이다.
악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변호해야 되니까, 변신론Theodicy이 나오게 되었다. 악의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변호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현실을 설명함에 있어서 악한 사람의 형통하고 의인들이 고통을 당하니까 율법적인 해석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새로운 해석이 묵시문학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사람들이 신앙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 다만 그 시대의 상황에 대처하는 신앙의 방편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앞으로 새로운 세상이 오면 완전히 해결된다고 하는 것을 제시함으로 해결하고 있다.
비어슬리의 해석
<묵시는 신자를 소수의 공동체에 위치시키고 신자의 삶을 임박한 종말······>
4. 묵시의 기원
예언이지만 예언과 다른 예언의 아들이다. 묵시의 자료는 예언에서 나왔다. 묵시문헌의 중요한 재료가 예언에서 왔기 때문에 묵시 문헌은 예언에서 찾아야 한다.
묵시문헌은 성전의 제사제도와 연관되고 있다. 묵시 문헌은 성전과 제사 제도에 대해서 혐오감을 가지고 있으므로 ···········
베트는 묵시가 헬라 세계의 커다란 운동의 일환이라고 보았다.
바벨론 종교에서 묵시 문헌의 기원을 찾아야 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유대 묵시문헌인 바벨론 문헌보다 앞선다는데 있다. 고대 가나안 묵시 문헌에서 찾자는 이론은 그러한 가나안 묵시문헌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언에서 나와서 헬레니즘 세계의 복합적인 영향을 받고 히브리적 사상과 기독교적 사상과 연결되서 나타나는 것이 묵시문학의 특징이다.
5.래드가 본 묵시문학의 특징
1. 묵시장르의 특징
(1)계시성 묵시장르의 특징은 묵시라는 용어가 암시해 주듯이 계시성이 있다. 미래의 숨겨진 내용이 특징이다. 묵시문헌과 예언문헌을 볼 때, 미래의 숨겨진 비밀을 꿈과 환상과 천상 여행을 통해서 보여준다.
(2)문학적인 기교
(3)가명성 - 실명으로 하지 않고 가명으로 묵시문학을 기록하고 있다.
(4)유사예언성
예언서는 실제로 예언하였지만, 묵시의 경우는 지나간 과거의 경우로 기록
(5)상징주의
묵시경우는 더욱 상징을 극도화하였다.
2. 묵시적 종말론의 특징
(1)이원론
우주적 이원론과 종말론 이원론
우주적 이원론은 하나님과 사탄, 종말론적 이원론은 이 세계와 올 세계이다. 이런 이원론이 나타나게 된 이유는, 묵시의 경우는 역사 속에 악의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악의 문제를 하나님께 돌릴 수는 없었다. 귀신들에게 돌려야 했다. 그래서 귀신론이 발전하게 되었다. 하나님과 귀신론은 첨예화 되어 간다. 이것이 우주론적 이원론이다.
그 다음에 이 세대는 악하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계가 나타나야 한다. 새로운 세대가 와야 한다. 이래서 이원론이 발전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다룰 때에 묵시 문학을 다룬다. 묵시문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 부분이다. 악의 현존을 설명하기 위해성이다.
(2) 역사와 종말
묵시적 종말론의 두 번째 특징은 당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초점을 둔 예언과는 달리 현역사와 무관한 종말을 말한다는 점이다.
계시록을 강해 할 때 이원론으로 흘러갈 위험이 있다. 역사의 의미를 상실하는 방향으로 가면 아주 잘못으로 가게 된다. 일곱교회를 보면 그 당시 현실 역사이다. 그 교회들은 승리의 주님께서 일곱교회를 다니면서 일곱교회를 통치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를 진행시키시고 계시는 분이시다. 성자는 일곱 영을 가지신 성령충만하신 하나님이시다. 과거에는 이것을 놓치고 설교하였다.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니까 도피해야 하는 것이다. 정치적 의미, 역사의 의미, 다른 것을 부여하지 않으니까 훌륭한 신학이 나오지 않았다. 기업의 현장이 하나님의 일이고 정치의 현장이 하나님의 일이었다. 그 현장에서 일하였다. 만약 다니엘이 정치를 했던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었다. 보수주의 학자들이 이것을 놓쳤다. 우리는 묵시문헌을 볼 때, 계시록을 보아야 한다. 계시록은 종말과 역사의 긴장이 팽팽하게 되었다. 계시록은 미래까지 포괄하고 있는 역사철학책이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와 종말의 긴장을 상실한 것이 묵시문학이다.
이렇게 긴장을 상실하고 나니까 비관주의로 빠지게 된다.(3) 비관주의로 나아간다. 궁극적으로 낙관주의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니까 그렇다. 계시록은 현실 역사에 대해서만 비관주의이다. 현실 역사 속에서 바로 살 것을 계시록은 강조하고 있다.
(4)묵시문학은 숙명론적이다.
자신이 작정한 때를 스스로 기다릴 수 밖에 없고, 하나님은 수동적으로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시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에녹서에 나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묵시적 종말론의 특징은 종말을 계산하고 있다. 계산자 신학이다. 컴퓨터화 신학이다. 때만 오면 되니까 그 때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피동윤리로 바로 연결된다.
(5)피동윤리
숙명론이기 때문에 인간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윤리가 배제된 종말학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은 윤리가 배제된 종말론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학업도 포기하고 가정주부의 생활도 포기하고 있다. 이것은 윤리가 포기 되어 있다.
피동윤리는 종말론과 윤리를연결시켜면서 나타난다.
그러나 계시록의 윤리는 절대로 피동윤리가 아니다.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나면, 그렇다면 계시록이 묵시문학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계시록은 묵시문학적 요소가 있지만 전적으로 묵시문학은 아니다. 유사점이 있지만 차이점이 많다.
나름대로 묵시문헌이다.
(1)문헌이 장르의 복합성과 다양성을 가지고있다.
(2)다니엘과 계시록의 차이
(3)묵시의 변화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계시록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모리스도 역시 그런 입장이다.
예언과 묵시가 섞여 있는 것이다.
이중적 수난을 당하고 있다.
1)무시당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첫번째 수난이다.
2)묵시무헌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서 사람들을 공포분위기로 만들고 우습게 만듦
1)그러므로 고차원적 차원을 가지고 잇는 사람들이 계시록을 다루어야 한다. 저차원적인 도덕원리를 가진 사람이 다루면 사람들을 우롱하기 때문이다.
2)요즘은 불확실한 시대의 묵시로 본다. 이 때 의식을 변화시켜야 한다.
3) 묵시문헌을 연구 해야 할 이유는 묵시문헌은 인간 실존의 분석과 역사 이해에 대한 인식을 가지게 하여 성경신학에 중요한 의미 차원을 더하여 주기 때문이다.
<결론>
묵시는 요한 당시 로마 제국에라는 거대한 세상 세력에 의해서 고난당하는 소수의 신앙인들의 관심사일 뿐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시달린 현시대인들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계시록이 잘못 취급된 이유 중의 하나는 묵시문헌에 대한 무지이다. 물론 계시록이 묵시문헌인가?
☞ P. 264
4 장 설교
4장에 책이 있다. 그런데 책이 인봉되어 잇다. 그런데 그 인봉된 것은 상속자만이 뗄 수 있다. 7중으로 인봉된 인을 누가 떼느냐 승리하신 분이 떼면 집행된다. 그 분이 어린양이다. 거기 누가 책을 뗄 것인가? 우주를 울리는 산울림 같은 질문이다.
요한은 크게 울었다. 누가 합당하냐? 24장로 중 하나가 사자가 이겼다. 그래서 이 책의 인을 떼시리라. 이 사자 이야기를 듣고 요한이 보니까 어린양을 보았다. 동물의 왕 사자를 본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을 본 것이다. 이것이 계시록의 핵심이다. 어린양이 사자였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승리자였다는 것이다. 이 주제를 가지고 사도요한이 깨달았을 때, 굉장한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그가 비록 십자가에 달렸으나 최종적으로 승리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어린 양이 역사를 주장해 나가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 교재 p. 91
계시록의 “3년 반”
11,12,13장 해석
1.세대주의적 해석(월부드)
11:2,3
눅 21:24····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세대주의는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실제로 예루살렘이 짓밟힌다고 보았다. (권교수님은 예루살렘이 앞으로 문자적으로 회복된다고 보지 않는다.)
예루살렘 멸망과 아울러 재림이 임하고 재림이 임박한 것을 알라고 하였다. 종말이 온다는 것이 숙제로 남는다.
월부드는 예루살렘을 문자적으로 본다. 그리고 3년 반과 이방인에게 짓밟히는 것을 문자로 본다. 승천과 1,260일과의 격차가 있다고 본다. 이 1,260일은 이스라엘이 당하는 것이라 보고 근거는 다니엘서에서 찾았다. 월부드의 해석을 분해해 보면 다니엘서 9장의 70이레를 밑바탕에 깔고 있다.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하고 있다.
*다니엘서 9장 24 - 27에 대한 주석
<다니엘 9장의 70이레 주석(헹스텐버&카일)>
1절-3절/ 24-27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계기를 이해해야 한다. 그 계기는 다니엘이 예레미야서(29:10)를 통해서 예루살렘 성이 70년만에 마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회복시켜 달라고 하였다. 그것이 끝나가면서 기도를 한 것이다. 70년 바벨론기가 끝나 갈 때 쯤에 기도하였다. 그 기도 내용이 4절에서 19절까지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말하면서 죄를 고백한다. 그렇게 하면서 예루살렘 성이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과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 출애굽을 시킨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한다.
20절-23절>다니엘이 기도를 시작할 때, 응답이 임한 것이다. 그 응답 내용이 24-27절이다.
내 백성과 네 거룩한 성> 아브라함의 언약이 씨와 땅이다. 가나안 땅과 이스라엘 자손이다.
70이레의 기한은 어떤 기한인가?
1)허물이 마친다(사라짐)
2) 죄가 끝난다(사라짐)
3)죄악이 영속되고(사라짐)
4)영원한 의가 드러나며(나타남)
5)이상과 예언이 응하며(나타남)
6)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는다.(나타남)
속죄와 의에 초점이 있다. 70이레의 핵심은 속죄와 의에 있다. 다니엘이 지금 예루살레을 회복해 달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궁극적인 해답은 속죄와 의이다.
25절> 기한의 시점은 언제부터 언제까지인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Terminus a quo
Terminus a quen
언제부터라고 이야기 했는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때부터이다.
??? 가 3번 나온다.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언제나는가? 예레미야의 말을 통해서 알았다.
렘 25장 11절 - 이 온 땅이 황폐하며,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70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렘29:10 -나 여호와가 이 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70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시험에서 이 구절들을 댈 수 있어야 한다
*대하 36:22 / 바사왕 고레스 원년
예루살렘 전을 건축하라고 했다.
*에스라 1:1-2 / 대하 36:
*에스라 6장 - 다리오왕이 조서를 내려, 고레스 왕 원년에 예루살렘 전을 건축하라는 명령을 확인하고 집행한다.
*고레스 원년은 538년BC이다. 이 년도를 비판하는 사람은 대하에서는 성전을 건축하라고 했지 성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전은 언제냐? 아닥사스다 20년이다. BC 455년이라 보고 있다.
이에 대한 답변은 이사야 44장에 나온다.
이사야 45장 13절 ·····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 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성전이라고 하면서 성을 포함한다)
13절······ 성전만 아니라 성을 포함한다. ‘명이 나는’ 병행 구절은 538년 고레스 왕의 원년을 찾으면 된다.
*기름 부음 받은 자 왕
구약에서 기름부음 받은 자는 제사장, 선지자, 왕이다. 여기서는 제사장이면서 왕인 사람을 말한다. 그가 누구인가? 메시야이다. 메시야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나간다.
|--------------------------|
69 이레 |
거리와 해자(해자는 성이 있으면 그 성 바로 다음에 참호를 만들어 물을 만들어 놓은 곳일 것이다.
성이 곤란한 동안에 중건된다.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 과격한 죽음을 뜻한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그 다음에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 ??
성읍과 성소를 훼파한다. 이는 디도장군이다.
27>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그가: 세대주의자들은 적그리스도라고 본다. 그리고 그 절반은(3년 반까지)제사와 제물을 금지한다.
◈ 세대주의자들은 적그리스도로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디도로 보았다. 디도가 성전을 멸망시킬 때의 상황을 본다.
◈ 어떤 사람은 메시야로 본다. 구약의 제물은 필요가 없어지며, 성전의 우상이 전이 되기 때문에 성전을 없애버리다. 그러므로 제사제도도 제물도 없어지게 된다. 속죄가 이루어진다.
†
|---7----|--------|---|예루살렘 멸망
538 |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회복이 진정한 회복이 아니라 메시야가 와야 진정한 회복이다. 궁극적인 회복은 메시야를 통한 속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회복이다. 그러므로 아이러니칼하다. 성을 회복시켜 달라고 하는데 오히려 망해 버린다. 이것이 전통적인 방법이다. 권교수님은 이 방법을 따라가고 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미운 물건이········
예수님이 이 표현을 무엇을 가리켜 사용하셨는가? 디도 장군을 통한 예루살렘과 연결시켜 사용하였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할 때, 세상의 종말도 동시에 말씀하셨다. 디도를 최후 멸망시 적그리스도의 예표로 본다. 다니엘서와 예수님의 말씀을 연결시켜서 이렇게 된다.
그런데 세대주의자들은 이 부분을 어떻게 보는가?
445|-----69이레------|[ ]----전3년반/후3년반--| |
[ ] 부분을 Gap, Parenthesis라고 하는데 69이레후 교회시대가 오고, 그 다음에 7년 환란이 온다. 7년 후에 천년왕국이 온다고 보는 것이다.
*카일은 어떻게 보는가?
|---7이레-----|------62이레----|--7년-| |
(너무 상징적이다)
어떤 학자들은
605|---------------|BC165마카비에 의해서 성전회복)
다니엘이 회복을 위해서 기도했다. 예루사렘의 회복이 느부갓네살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잘못이다.
◈월부드의 주장대로 Gap이 있는가? 없다. 연속적으로 나아간다. 광야 생활도 Gap 없이 생활했다.
그럼 왜 Gap이론을 만들어 내었는가?
이스라엘 회복 예언이 구약에 나오는데 이 이스라엘 회복은 교회와 이스라엘이 구별되기 때문에 교회를 통해서 회복된다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회 시대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스라엘에 의해 회복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이론은 성경적이 아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제사제도가 회복된다고 나오는데, 어디세 회복되는 것이 성경적이냐?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초림으로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천년왕국에서는 메시야 자신이 제사를 지내시고 제물을 드리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미 원형대로 단번에 영원한 제물이 되어 영원한 지성소에 들어가 버리셨기 때문에 이제는 원형이 완성되어 버렸다.
예수님 초림시에 자신을 통해 성전이 완성되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바울서신에서 성도들을 성전이라고 말한다.그러므로 갭 이론은 잘못 되었다.
에스겔서 47장의 물의 비유에서, 물이 나오는 그 성전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마시라고 했는데,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 성령이 천년왕국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서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은 이스라엘이고, 신약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교회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와 구별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럼 이스라엘과 교회의 구분이 없는가? 만약 있다면 아직도 이스라엘이 중요하다. 이스라엘과 교회의 구분이 아직도 있다. 롬9-11장에 보면, 육체적 이스라엘이 돌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거기서 말하는 이스라엘 회복은 육적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앞으로 영적으로 메시야를 받아 들여야 한다.
계11,12,13장의 내용이 천년왕국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러한 월부드의 문자적 3년 반은 세워질 수 없다.
그러면 그 기간은 무엇인가? 승천부터 재림까지 교회가 이 땅에서 양육받는 것이 1260일이다. 두 증인으로상징된 교회가 말씀 증거하는 기간이며, 하나님의 교회가 박해받는 기간이다. 마지막 기간에 가서 3년 박해가 세대주의가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강력한 박해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대환란으로 볼 수 있다. 어느 기간인지는 알 수 없다.
(질의 응답)
세대주의자들에 대한 공백기를 유대인의 입장에서보면 타당한지 않은가?
사53장을 읽고 예수를 믿는 자들이 유대인 중에서 생겨났다. 구약의 유대인 중심으로 생각하면, 구약의 유대인 나라가 다시 회복된다고 믿는다. 그것이 정당한 시각인가? 유대인 입장에서 공백기를 보면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에 오면 그리스도 안에서 포괄시켜 버리는 것이다. 이 포괄적 시각을 가지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질문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공백기를 설명할 수 있지 않은가?
7년 대환란이 있는가? 7년은 없고 대환란이 있다. 숫자적으로 맞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대환란을 준비하는 것이다. 대환란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대환란 때는 장소가 아무 소용이 없다. 단지 깨어서 기도하며 바로 사는 것이다. 장소로 도망가게 되면 다미 선교회나 어떤 사교집단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대비는 해야 한다. 그 대비의 방법은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이미 세상속에 역사하고 있다. 권력이나 사단을 통해서 역사한다. 개인적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수 있다.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지만 전세계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할 때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면 주의할 필요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이 적그리스도라고 하면 위험하게 된다.
♣제8장 계 20: 1- 6 해석
계시록 중에서 20:1-6절까지가 해석하기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후천년설주의자들은 주석을 거의 하지 않는다. 단지 조직신학자들만 주장한다. 주석은 무천년설, 역사적 전천년설, 세대주의에서 주석한다.
이 부분은 무천년설의 근거도 있고, 역사적 전천년설의 근거도 있다. 끝으로 갈수록 역사적 전천년설이 더 강하게 나타난다.
20:1
και ειδον αγγελον λαταβαινοντα εκ του
ου?ανου εχοντα την κλειν τη? αβυσσου και αλυσιν μεγαλην επι χειρα αυτου.
|
그리고 나는 보았다. 한 천사를 보았다.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이 문장의 헬라어를 공부해 두라)
▣ Walvoord의 입장
월부드는 ‘και ειδον’을 가지고 연대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았다. 19:11/ 17 / 19/ 20:1, 4, 12에 반복되는 것으로서 19장에서 20장은 연대기적인 연결이라고 하였다.
19장은 재림, 두진승軍, 멸망이 나오고, 20장은 사단결박, 만국미혹이 나온다.
19장에 보면, 군대가 멸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και ειδον이 항상 연대기적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문맥을 보아야 한다. 문맥을 얼른 보면 셋 중에서 하나가 망했다. 그 중에 사탄이 남아 있는데 이 사탄이 20장에서 묶이니까 19장에서 20장은 연대기적 순서라는 것이다.
◈반론
이 본문에 대해서 정말 그러하냐? 이렇게 진행된다는 것이 전천년설 입장이기도 하다.
계19장 17부터 보면,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 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로 하더라 |
19장 마지막에 사탄의 세력들이 포괄적으로 다 망한 것이 나오는데, 20장에 보면 만국 미혹을 못하도록 한다.(타 에트네)
19장에 만국이 멸망 받았는데, 또 20장에 만국이 나온다. 이렇게 볼 때, 19장에서 연속적으로 20장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20장은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역사적 전천년설이 대답해야 한다. 20장에 나오는 민족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라고 하는 것인다.
이에 대해서 전천년설주의자들은 말하기를 18절에 먹으라고 했지 실상은 먹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21절보면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고 하였다. 18절에 먹으라고 했고, 21절에 배불렀다는 것이다. 일단 먹으라고 했고 그리고 실제로 먹었다. 그것은 심판을 받았고 멸망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역사적 전천년설주의자들은 여기서 나오는 ‘모든’이란 전쟁에 가담했던 모든 사람들이고 전쟁에 가담치 않았던 사람들은 다시 살아나서 만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변두리 사람들이 있는가?
◈반론
13장에 다 짐승에 경배하며, 짐승 군대와 그리스도 군대와 중간은 없다. 신부 아니면 창녀이다. 이 둘 중에 하나지 그 가운데는 없다. 19 장에 다시 보면, 그를 따르는 모두가 짐승군대이다. 그러므로 그 모두는 짐승군대를 따르는 모두를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19장 18절(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 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에 나오는 사람들은 <정치세력>을 말하고 그 나머지는 만국이 되었다고 한다.
◈반론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 여기서 말하는 모든 사람들은 종들과 작은 자들 전체를 포괄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 다움에 또 반론이 나온다. 19장에 나오는 자들은 짐승군대, 불신자들이니까 다 망하고, 나머지 만국은 신자들이라고 한다. 그 반론은 20장 8절(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이다.
20장 3절(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에서 만국은 신자들이고 20장 8절(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에선 만국은 불신자들이라고 한다. 20장 신자들이 20장 8절에 가서 미혹을 당했다고 이야기 한다.
◈ 반론
그렇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백마탄 자군과 짐승 군이 싸워서 짐승군이 망하게 된다. 이들이 만민이 되었다. 천년 동안 신자들이 되었던 것이다. 그후 사단의 유혹을 받아서 사단 군이 되었다는 결론으로 나온다. 그럼 19장 5절에(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 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게 찬송하라 ······7)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8)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자기의 군대를 몰라보실 정도로 눈이 어두워 버렸다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앞의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그렇다면 20장3절에 나오는 만국은 누구냐?
<만국>을 가지고 이야기해 보자.
만국에 관한 한 무천년설이 점수를 하나 얻었다.
? 계시록이 19장에서 끝나고 20장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근거를 대보면 다음과 같다.
에스겔 38장에 보면, 곡과 마곡이 나온다. 곡과 마곡이 새들이 먹으라고 한 다음에 나온다. 그런데 39:17
(너 인자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는 각종 새와 들의 각종 짐승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모여 오라. 내가 너희를 위한 잔치, 곧 이스라엘 산 위에서 예배한 큰 잔치로 너히는 사방에서 모여서 고기를 먹으며 피를 마실지어다 |
이것은 계시록 19:17,18절(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왕들과 고기와 壯士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 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과 병행귀절이다. 에스겔서에서는 곡과 마곡 다음에 나온다. 그러나 계시록은 앞에 나온다. 그러므로 에스겔서 38장, 39장을 계시록 19장과 병행해서 볼 필요가 있다.
계 19:19(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계20:8 -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그 전쟁(톤 폴레몬)
앞에 나오는 전쟁은 16:14에 보면,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 전쟁을 위하여> 16장과 19장과 20장에 나오는 전쟁은 동일한 전쟁이 반복되어 진행되는 것을 밝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①16:14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②19:19의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③20:8의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
모두가 (순아고 + 톤 플로이온)으로 연결된다
15장에서 일곱대접이 16장에서 마감한다. 이런 의미에서 16장에 마감하는 부분과 19장의 마감과 20장의 마감 부분은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20장은 19장에서 매듭되고 난 뒤, 다시 20장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파우로 화이트의 주장이다.
<만민>부분을 보면, 연대기적으로 보는데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연대기적으로 보기 보다는 반복진행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 이것이 파울로 화이트의 주장이다.
그리고 한 천사가 그리스도, 미가엘, 보통 천사라고 보는 사람이 있는데, 한 천사가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말탄 자로 나오다가 천사로 나올 수 없다.
무저갱은 죽은 자들의 영역, 음부, 불순종한 영들의 감옥 중에, 사탄과 악령들이 갇혀 있는 곳이다.
20:7,10에 옥과 불과 유황못이 나오는데, 불못과 무저갱은 다른 곳으로 되어 있다. 그 불못에는 두 짐승이 들어 있다. 무저갱은 일시적으로 갇혀 있고, 불못은 영원하다. 무저갱의 열쇠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
큰 쇠고랑이 물리적이냐 상징적이냐? 월부드는 실제적인 것으로 보았다. 문자적, 물리적인 쇠고랑을 말한다고 했다. 이것이 물리적이냐, 상징적이냐 하는 것이 다른 것과 연결된다.
그리고 그는 그 용을 잡았다.
20:2(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천년동안 결박하여)
천사가 용을 잡았다. 요한은 분명히 보았다. 그런데 그 용이 사탄, 옛뱀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계시록 20:2이 단서가 된다. 20;2-6의 해석을 하는 단서가 된 것이다. 분명히 요한이 본 것은 용이다. 따라서 용은 사탄의 상징이다. 실제로는 용이지만 사탄이다. 이런 원리를 계20:1-6을 적용하면 묶인 것이 물리적으로는 용이지만 상징적으로 사탄을 결박한 것이다. 상징적인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 사탄의 전적인 활동을 결박한 것이라고 월부드는 보았다. 체포하고 결박하고 인봉하고 무저갱으로 들어가고 완전히 무활동을 한 것이다.
그 반면에, 래드는 사단의 과격한 활동 억제를 말한다고 보았다. 왜 과격한 활동 억제라고 한 것인가? 천년 왕국 때도 죄가 있고 죽음이 있는데, 만약 사탄이 완전히 무활동이라면 죄와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무천년설 입장에서 마이클의 입장이다. 초림에서 재림 때까지의 사탄의 활동을 말한다.
결박이라는 문제와 미혹이라는 문제가 생긴다. 여기에서는 전천년설이 이겼다.
이를 증명해보자.
아까, 만국으로 보면 무천년설이 이긴다. 그러나 결박으로 보면 전천년설이 이긴다.
계 12장 9절을 보면, 큰 용이 내어 쫓기니 ······ 땅으로 내어 쫓기니, 땅으로 추방되었다. 사탄은 땅에 있다. 19장 2절은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서 이루어진 사건, 즉 사탄이 땅으로 떨어진 사건으로 보고 있다. 사탄은 땅에 있으면서 땅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 활동 상황은 그 모습이 어떠하냐? 이것이 문제인데, 만약 이 기간이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라면, 사탄이 결박되어 있어야 하는데, 땅으로 쫓긴 후에 사탄이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가? 12절에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못하여 ···· 핍박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뒤에서 입으로 그 물을 강같이 토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결박된 사탄의 활동모습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박된 모습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천년설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은 힘을 잃게 된다)
용이 분노하여 돌아가서 ····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전면전을 펼치자는 것이다. 13장에 들어가면 바다짐승과 땅 짐승이 나타난다. 바다 짐승은 사탄의 조정을 받아서 용이 자기 능력을 그에게 주었다 활동하고 잇는 모습이 나타났다.
13장 6절에 훼방하였다.(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이 훼방하더라)
13절에 가면(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 불을 땅으로 내려오게 하는 굉장한 활동을 사탄이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12장과 13장의 사탄의 활동을 보면, 계시록 20:3의 모습이 아니라는것이다.
계시록 12장에는 사탄이 땅에 있다. 그리고 20장은 무저갱에 있다. 12장은 사탄의 활동은 얼마 못된 기간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20장은 천년이다. 그리고 12장은 활동하고 있으나 20장은 활동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탄의 결박에 있어서는 무천년설의 주장이 근거가 없게 된다.
무천년설주의자들은 사탄의 결박을 신약성경에서 찾으려 한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에 사탄이 하늘로서 떨어진 사건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있지만 너무 멀리 간다. 계시록을 해석할 때는 계시록 안에 있어야 한다. 계시록을 해석할 때는 계시록에서 출발하여 다른 성경에서 뒷받침을 해 주어야 한다. 사탄의 활동은 예수님 사역에서 엄청난 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계시록 20장에서는 사탄의 활동이 전면 금지되었다.
계시록에서 나오는 사탄의 결박을 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박된 것은 발악하는 모습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무천년설이 문제가 된다. 사탄은 삼킬 자를 찾고 있다. 사탄을 이기기 위해서는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결박 되어 있는 모습 보다는 활동하고 있는 부분을 많이 나타낸다. 그러면 초림 때의 예수님의 역사는 사탄이 땅으로 떨어진 것이다. 이 후를 말하는 것이다. 정직하게 주석할 때, 무천년설을 지지하기 어렵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초림부터 재림 어간에 사탄이 결박되었다고 하는 것을 계시록을 통해서 증명할 수 없다. 계시록에서 20:3에 사탄이 결박되어 있는 것은 초림시에서 재림시까지의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무천년설에서는 사탄의 활동이 제약을 받는 것을 무저갱에 갇혀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구약 시대는 천하만국을 대 미혹 했는데, 신약시대에 오면서 예수님 앞에서 벌벌 떨었다. 예수님의 사역이 결정적으로 승리했기 때문에 사탄은 치명타를 입었다고 말한다.
계시록 20장에 있어서 <사탄 결박>만은 역사적 전천년설의 근거가 무천년설의 근거보다 더 확실하다.
사단 결박부분을 계 12과 20장을 비교하면서 공부하였다. 천년의 의미를 월부드는 문자적이라고 하였다. 그 근거는에녹의 비밀서를 보면 인류 역사는 7천년으로 되어 있다느 ㄴ것이다. 그리고 천지 창조가 7일인데 7일 째는 안식이다. 두번재 근거는 어그스틴에 있다. 어거스틴은 문자적으로 보았다.
세번째는 다른 것은 ㅅ아징이잠 이것은 상징이 아니라고 하였다.
죠지 래드는 이것은 상징이라고 하였다.
‘윌칵은 천년은 한 편으로는 두 증인의 전도기간인 3년 반, 다른 한편으론···········
천년이란 기간은 특정한 기간임에는 틀림없다. 이 천년이 문자적이냐 상징적이냐라고 했을 때, 그 단서는 2절이?. 용을 보았는데 그용은 마귀라는 것이다. 그것은 상징이다. 그러므로 천년도 상징일 것이다. 144,000명, 12스다디온, 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천년은 상징적임을 알 수 있다. 계시록의 숫자 사용법이 상징적임을 알 수 있다.
20:3에 보면 (헬라어 구문)
그리고 그는 그를 그 무저갱으로 던졌고 잠갔으며 그 위에 인봉하였다. 그?은 그가 그 천년이 채워지기까지 만민들을 더 이상 미혹하지 못하게 하기 우함이었다. 그것들 후에 그는 반드시 잠시 풀려 난다.
이 부분에 대해서 월부드는 천년왕국전에 대환란이 있었고, 천년왕국 후에 대환란이 온다고 보았다.
래드는 20장을 볼 때, 교회사 전체, 초림부터 재림전체를 볼것이냐 보지 말아야 할 것이냐에 따라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언급하고 있다.
18장 바벨론 멸망, 19장, 20장 사탄 멸망은 반복적으로 되어 가고 있다. 12장에 메시야의 탄생이 있지만 이것만으로 초림부터 재림까지라고 할 수 없다.
윌칵 : 20-19장을 에스겔을 비교해 보라고 하였다. 에스겔서와 계시록의 서술의 순서가 틀린다. 그러므로 연대기적 순서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윌칵은 근접문맥이 아니라 멀리 갔다는 데서 (에스겔까지 갔음)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사단결박과 과련하여, 눅 22:3에 가룟 유다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팔도록 했다느 ㄴ것이다. 이로 볼 때, 사단의 활동은 계속된다는 것이 월부드의 주장이며, 그래서 무천년설적 입장은 잘못되었다고 한다.
래드는 사탄의 결박은 개인에게 적용되었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집단에게 적용되기 때문에 월부드의 식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계시록에서 먼저 사탄의 결박의 근거를 찾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윌칵은 <데오>라는 단어를 가지고 설명한다.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이가 사단의 권세아래 결박되었다. 그러나 신약이 되면서 구약과 같은 미혹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윌칵의 경우는 신약시대에 구원이 보편적으로 임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예수니이 오셔서 사단의 결박을 했다는 사실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만민을 미혹지 못하게 하는 사탄결박이냐고 했을 때, 윌칵의 이론이 지지를 받지 못한다.
여기까지가 지난 시간까지 했던 강의이다.
20:4
그리고 나는 보좌들을 보았고 그들은 그것들 위에 앉아 있었으며 심판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당한 자들, 그리고 그 짐승에게나 그것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않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 표를 받지 않은 자들의 혼들을 (나는 또한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살았고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렸다.
το θηριον ουδε την ειλονα αυτου και ουκ ελαβον 을 추가하도록 하라.
여기에서 핵심적을 강조하면, 문장 구조상 그들이 앉아 있었다고 할 때, 그들은 누구냐? 혼들을 보았다고 할 때, 그 혼들은 누구냐?라는 것이다. 그 위에 앉은 자들, 혼들, 경배하지 않는 자들 이렇게 3그룹을 말하는가? 두 그룸을 말하는가? 한 그룹으로 보느냐가 논쟁점이다. (권교수는 한 그룹으로 본다) 그들은 성도들이라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이고 그 속에 순교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라고 했고, ‘그들’은 살았다. 혼들과 경배하지 않은 자들을 묶어서 그들이라고 했기 때문에 한 그룹이다. 이 그룹 속에 순교자들이 특별히 들어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자들이 모든 자들인가?
계 5장에 보면, 예수님의 피로 사심을 받은 모든 자들, 각 족속, 방언 백성과 나라 가운데 사람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고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계시록 5장 9절과 10절에 근거하면 모든 성도들이 다스리는 것으로 나와 있다.
단 7장에 보면, 27절 나라와 권세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에게 붙인 바 될 것으로 설명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이 다스린다는 근거를 찾아 낼 수 있다. (대충 알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 시험 답안지를 정확하게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시험예제) 한 그룹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했을 때, 계시록 5장 9,10/ 단 7:27에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목베임을 받은 자>는 짐승에게 경배하지도 않고 절하지도 않은 사람들이다.
계13: 15절에 경배하지 않은 자들은 모두 다 죽였다.
17에 보면 달리 나타난다.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지지 못한 자는 매매를 못하게 한다고 하였다. 표 없는 자는 매매를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 한 그룹일 것이다. 목베임을 받은 자들이 순교자임에는 틀림없다. 모든 성도들은 한 그룹인데, 그 중에서 순교자들이 특별히 언급되어 있는 것은 순교자들을 격려하고 자극하기 위해서 순교를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20장 4절에서 두 번째 논쟁점은 εζησαν 이다.
1. “살아 있었다” 로 보면, 무천년설이다. 하늘에 살아 있었다. 하늘에서 왕노릇하고 있었다누가 살아있었느냐? 영혼들이 살아 있었다. 혼들이 살아 있었다. 죽은 자들의 혼들이었다. 중간기 상태의 혼들을 말한다. 그들이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었고 요한이 그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천년설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다스리고 있었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본문에서 세워질 수 없다. 이미 죽은 자들은 실제로 죽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20:5에 보면,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본문은 전체가 죽은 자들이다. 문맥을 보았을 때, 영적 죽음이 아니라 영적 죽음이었다. 첫째 부활은 천년왕국 때 살아나는 자들이다. 그 나머지는 천년 후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스린다는 것은 초림부터 재림까지 영혼들을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본문 박으로 나가면, 계시록 6장9절을 보면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예수 믿다가 죽은 자들은 제단 아래 있다. 혹은 보좌 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 살아났다.
(1)영: 중생
땅 위에서 중생한 사람들이 지금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무천년설)
정말 그렇게 볼 수 있는가?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죽은 자들은 실제 죽은 자들이었다. 아까 20장 5절은 실제 죽은자들이었다. 목베임을 당했다는 말은 실제 부활한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중생한 자들이 초림부터 재림까지 본문에 해당되기에는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2) 실제부활, 땅, 전천년설
실제로 보았다는 근거는 앞의 논박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권교수가 보기에는 이 부분의 해석이 맞다.
|
무 천 |
전천년설 |
만 국 |
+ |
- |
미 혹 |
- |
+ |
부 활 |
- |
+ |
본 질 |
+ |
_ |
신 학 |
+ |
- |
그러므로 예언적 과거로 보게 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완성적 과거로 보게 되면 된다.
사실은 εζησαν 이 문제가 된다.
전천년설을 택하느냐 무천년설을 택하느냐 하는 것은 교회에 큰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666이나 표를 실제적으로 보면 교회에 큰 피해를 주게 된다. 단지 그것은 상징이며 표이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표이다.
20장 6절로 넘어가자.
그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복되고 거룩하다. 그 둘째 사망이 그들 위에 권세를 가지고 있지 않고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들이 될 것이고 그 천년 동아 ㄴ그와 함께 다스릴 것이다.
다스리는 것이 언제냐고 했을 때, 첫번 째 부활이 육체적 부활이 거의 확실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앞으로 그렇게 된다고 말했기 때문에 문맥상 무처년설이 서기 힘들다.
둘째 사망이 올 수 없다는 것, 20:4에 최후 멸망이 나오니까,
첫째 부활
육적 부활, 신자 |
(둘째 부활)
육적 부활(악인)
|
첫째 사망
육적 사망 |
둘째 사망
영, 육 |
무천년설에서는 첫째 부활을 영적 부활, 중생으로 본다. 둘째 부활은 재림 때 육이 부활하는 것을 말한다.
첫재 사망은 육이 사망하고 둘째 사망은 영의 사망이라고 본다.
이렇게 볼 때, 전천년설은 일관성을 상실하는 느낌이 있다.
천년왕국의 본질로 가면 무천년설이 더 점수를 얻게 된다.
다스림이 어떤 것이냐?
이것이 본질이다. 다스림의 성격을 말한다.
여기에 있어서 역사적 전천년설이 난감해 하는 문제가 많다. 땅에서 그리스도가 다스린다고 했고 사탄이 결박되어 있다고 한다. 세계의 총통으로 다스리신다. 영육, 개인 사회 모두를 다스리신다. 그 때는 사탄이 결박되어 있다. 그런데 어떻게 죄나 사망이 가능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천년왕국에 죄가 있는냐? 하는 문제다. 이사야 65장에서 천년왕국이 출발한다. 17절에서 25절까지를 보면,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니 ···········날수가 차지 못하여 죽는
그래서 죽음이 있다. 사탄이 결박되어 있고 그리스도가 땅에서 다스리는데 어떻게 죽음이 가능한가? 이것이 첫번째 본질에 있어서 천년왕국을 주장하는 자들이 대답해야 할 문제이다.
성도들의 문제에 있어서 주님이 재림하면 부활하든 변화하든 영광스럽게 된다. 이렇게 영광스럽게 된 자들이 초기에 완전히 변화된 사람들인데 천년왕국때에 성도들이 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처음에 완전히 변화된 사람?과 한창 살다가 변화된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단계적 변화가 성도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가? 매일 신자들이 나타날 텐데 매일 변화되는 이러한 본질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한 신자들과 불신자들의 관계에서 설명해 보면, 부활체와 사망체가 어떻게 동시에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다. 영광체는 시공간을 초월하게 된다. 그런 반면 불신자들은 영광체가 아니다. 신자들과 불신자들의 본질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것이 역사적 전천년설주의자들이 풀어야 할 문제이다.
이 문제는
| → 올 시 대
초림 재림
↓ ↓
|--------------------
| |
--------------→|
옛 시 대 |
초림부터 재림까지는 올 시대가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옛 시대와 겹치고 있다. 옛시대의 특징은 죄와 죽음과 사탄이다. 올 시대는 의와 생명과 하나님, 평화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초림부터 재림까지는 겹쳐 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고 한편으로는 옛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긴장이 되고 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으나, 옛시대가 연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임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본다.
초림에서 재림까지에 있어서 신약의 초점은 재림에 있다. 재림이 되면, 모든 것이 회복되고 완성된다고 말하고 있지, 또 하나의 중간상태를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신약성경은 중간시대를 말하지 않고 있다. 주님 재림하시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 이것이 무천년설 입장이다. 그러나 역사적 전천년설의 입장은 주님이 재림하셔도 죄와 죽음의 문제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 된다.
주님의 재림이 되면 Silver Age가 되고 천년왕국이 지나면 Gold Age가 된다고 한다.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볼 때는 주님이 초림부터 재림까지가 백은시대라고 한다면 주님의 재림으로 황금시대가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신학으로 본다면, 신학이 이긴다.
역사적 전천년설 주의자들은 미래 천년왕국에 초점을 둔다. 그래서 고난을 이기라고 한다. 그래서 역사적 전천년설 주의자들은 현재의 하나님의 통치를 놓칠 수가 있다. 현재에 관해서 비관주의에 빠질 위험성과 피동성의 위험성이 있다. 그러므로 현재도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신다고 하는 것을 말해 주어야 한다.4,5장에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이다.
또한 무천년설 주의자들은 미래의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강조해야 한다.
♣ 9장 천년왕국설 개론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창1장에 온 땅을 다스리라고 하였는데 인류는 실패했다. 이것을 세대별로 나눈 것이다. 중계적 왕국이 나온다. 이것은 지상의 실제하고 예루살렘 중심이다. 사 33:17에 보면, 물질적 보좌 위에 계신 실제의 왕이며, 민족들이 참여하다. 이것은 역사적 다윗 왕국의 회복이며 연속이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하는 중간 왕국은 다윗왕가가 회복되고 예루살렘이 왕국이 되고, 입법, 사법, 행정이 회복된다.
이러한 천년왕국의 6대 특징은
1)영적인 성격
2)윤리적 행동
3)완전한 사회관계 회복
4)물리적 변화:지질변화,기후, 동물성질, 병치유가 된다.
5)정치변화가 일워지고 예루살렘이 세계의 수도가 된다.
6)종교적 정화가 된다. 멜기세덱ㅎㅇ 지도자, 모든 민족의 숭앙,
현시대는 이러한 것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문제점
1)현시대는 괄호
2)천년왕국의 유대성
3)해석방법의 차이
(1)구약은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예언
(2)이스라엘/교회
(3)구약예언은 항상 문자적으로 해석
(4)미래에 유대나라가 중심이 된다.
(5)하나님 중보적 왕국은 미래에만
초림 후천년설 재림 전천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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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천년설 | |
후천년설
포스트밀은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개인들의 가슴속에 성령의 구원적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세계관이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가 기독교화 될 것이다. 그리고 천년왕국이라고 흔히 불리는 의와 평화가 오랜 기간 말기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말세관이다. 후처년설이 강조하는 것은 복음의 능력이 있다. 그리고 성령의 구원사역을 강조한다.
이것은 개인과 성격의 변화, 인류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향상을 포함한다.
근거는 (1)구속된 세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보편성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전세계에 속한다. 그리스도는 온 땅의 왕이시며 주시다. 그래서 바다에서 바다까지, 백성과 방언과 모든 족속이 구원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구원받는 숫자가 멸망받는 숫자보다 더 많을 것이다. 감옥이 천국보다 훨씬 좁다는 것이다. 계20:11-15에 보면, 누구의 이름이 새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라는 편에서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이 몇이며 예외적이고 드물다는 것이다. 이런 것에 근거해서 구원받은 세계,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주님 재림하시기 전에 세계 대부분이 기독교화 될 것이다.
(2)그리고 그 구속의 원리들이 세계 속에 침퉁해서 퍼지고 있는 것이다. 노예제도가 없어지고 일부다처제가 없어진다. 기독교가 들어가면 그 원리가 쭉 퍼진다. 그래서 점점 더 좋아진다는 것이다. 교회 헌금이 증가되고 성경이 보편적이 되고 기독교 대학이 증가하게 된다. 지식과 사회정의, 교통, 통신, 기구의 혁명이 일어나는 것은 복음이 확장된 결과이다.
이러한 물질적 번영이 아무리 놀랍게 된다 할찌라도 그것은 계속해서 부산물이 될 것이다. 이 물질적인 번영이라는 것은 도덕적, 영적 번영의 소산물이다. 이 도덕적 영적 번영이라는 것은 이미 부분적으로 기독교화된 민족들의 특징으로 나타나 있는 도덕적 영적 산물이다. 이러한 축복들이 이교적 종교에 기원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명명백백하다. 많은 가난, 무지, 도덕적 퇴폐가 수천년 계속 되면서 이교도 국가들은 전진이 없다. 영적 부흥이 오면 물질적 부흥이 따라온다.
3.계시의 원리
성경의 상당 부분이 비유적, 상징적 언어로 주어졌다. 후천년설적 입장에서는 비유적, 상징적으로 계시록을 본다.
<상징적 해석> <문자적해석>
후천년설 무천년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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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전천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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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 프린스톤 핫지,(챨스 아키발드, 카스퍼 위스타 핫지)
겨자씨 비유, 누룩 비유를 근거로 삼는다. 요한 복음에도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누구든지 구원을 받도록 하였다고 하는데 근거를 가지고 있다.
반론>
그러나 오늘날 세계는 문자 그대로 무장한 군대들이 살고 있을 정도로 세계가 나빠지고 있다.
주님 재림하시기 전에 사탄이 온 세상을 미혹해서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 새 시 대 >
초림 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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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시 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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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천년설 주의자들은 좋아지는 것만 보고 악화되는 것은 보지 못했다.
2.성경 해석상 지나친 상징주의 해석이 문제이다.
Amil (안토니 A. 후크마)
계시록 해석은 진행적 병행을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는 천년왕국이 교회시대라고 하고 있다. 병행적 진행으로 본다. 그리스도의 초림 때 사탄이 묶였다.
통치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하늘에서 죽은 자들이 통치하는 것을 말한다고 보고 있다. 영혼들이 하늘에서 함께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천년왕국은 초림부터 재림까지를 말한다.
구약예언해석에 있어서는 무처년설에 있어서는 어느 것을 문자적으로, 어느 것을 비유적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와 미래가 있다. 현재는 이미 성취되었고, 미래는 완성될 것이다. 계실고 20장은 이렇게 볼 때, 이미 성취된 천년왕국이라고 보는 것이다. 무천년설적 입장이 맞다는 것이다.
무천년설적 종말론 개관
주님이 재림할 때, 그 징조가 점점더 심해져서 마지막 때에 결정적으로 나타난다. 그 다음에 재림하는데 한 번 밖에 없다. 그리고 재림 때에 신자들과 불신자들이 완전히 구분되며, 신자들은 완전히 변화되고 순식간에 휴거되어 버린다. 재림도 한번, 부활도 한번이다.
무천년설적 종말론의 함의
신구약관계: 은혜언약의 통일성
천국: 인류역사의 중심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주인이다.
전역사 우주의 전체적 구속을 목표로
비판은 20장의 해석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이다.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바빙크, 루이스 버롭, 하밀톤, 머리, 카이퍼, 헨드릭슨 등 화란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다.
10장 21세기의 교회 지도자는 첫 시간에 하였다.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차이점>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유대민족 중심의 천년, 역사적 전천년설은 하나님 백성 전체를 말한다. 세대주의는 예루살렘이 세계의 수도가 되며, 구약의 성전이 다시 회복되며, 제사제도가 회복되며, 다윗왕조가 다시 회복되며, 귀족계급이 유대인들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 민족들이 이스라엘로 모여든다. 그러므로 세대주의적 해석은 문자적 해석이다. 문자적 이스라엘로 보니까 지금의 교회와 다르다는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보니까 구약에서 신약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천년왕국에서 다시 회복된다는 입장이다. 세대주의자들의 해석이 왜 이렇게 나오는가?에 대해서 알아 두어야 한다.
※ 세대주의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알 수 있도록 하라.
“세대주의자들이 천년왕국은 유대인 중심으로 회복된다고 하는데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라”고 할 때, 그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세대주의에 대한 문제는 어떤 방향으로든 나올 수 밖에 없다.
신약과 구약의 관계성에 대해서 밝아질 수 있다.
11장 21세기 전망과 영성
21세기는 2001년 1월 1일 00시에 시작된다. 미국에 43개의 우량기업을 연구해서 베프트셀러를 만들어냈는데, 2년후에 40개가 난관에 빠졌다. 변화에 대해서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제의 성공의 내일의 잔존일 수는 없다. 의식전환이 일어나게 된다. 파라다임 쉬프트가 일어나고 있다.
21세기의 방향
①산업사회가 정보사회로 바뀐다.
②중공업이 하이텍크로
③국가 경제가 세계 경제로
④단기가 장기로
⑤중앙화가 탈중앙화로
⑥제도의 도움에서 자기도움으로
⑦대표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
⑧북에서 남으로
⑨양자택일에서 다자 택일로
⑩Hierachies---Networking
미래를 신빙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전 세계를 컴퓨터에 넣어 놓고 현재를 아는 것이다. 경향은 밑에서 위로 올라온다. 경향이라는 것은 말을 타는 것과 같아서 그 방향을 타면 훨씬 쉽게 된다.
1.정보사회
뒤뇌 집중 산업- 앞으로는 두뇌 집중산업이 된다. 정보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앞으로는 노하우를 아는 사람이 부자가 된다.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람이 못다루는 사람보다 더 잘살게 된다. 컴퓨터를 잘 하면 글도 잘 쓰게 된다.
2.중공업이 하이 테크, 하이 터치로 간다.
하이테크 사업은 자기가 좋아 하는 물건을 한 두개 주문해서 사는 세대가 될 것이다. 하이테크 시대를 잘 이해하면서 하이 터치 목회를 해야 한다. 하이테크를 잘 이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이터치는 함께 있고자 하는 필요성이다. 인공, 인정이 들어간 제품이 필요하다.
3. 국가 경제가 세계경제로 바뀐다.
싱가포르와 남한이 도전하고 있다. 앞으로 목회할 때는 지구촌 목회를 해야 한다. 세계가 안방으로 들어온다.
4. 단기에서 장기로 가고 있다.
환경에서 배우고 있다. 개발하고 난뒤 그 후유증이 나타나고 있다.
상황의 법칙:우리가 지금 무슨일을 하고 있는가? 기업을 하는 사람들이 매 순간마다 내가 지금 무슨일을 하고 있는가? 상황이 엄청난 속도로 변화되고 있기 때문에 재점검하지 않으면 뒤지게 된다.
5. 중앙화에서 탈중앙화로 바뀌고 있다.
지금은 탈중앙화로 나타나서 뛰는 사람이 이기는 세계가 되었다. 탈중앙화 현상에 학생사회에서도 일어나고 있고, 기업경영을 할 때도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21세기 목회할 때 많이 나타날 것이다.
6.제도의 도움에서 자기의 도움으로
7.대표 민주주의에서 참여 민주주의로 나타난다.
지금은 중요한 내 삶의 결정은 내가 뛰어 드는 것이다. 그래서 21세기가 되면 평신도들이 교회 경영에 많이 참여할 것이며, 소외된 계층들이 참여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상황 속에서는 컨트롤하는 사람보다는 촉진자로서의 지도자가 필요하다.
8. 피라밋 형에서 망사형으로 나아간다.‘ 지금은 PC통신으로 정보가 다 얻을 수 있다. 네트 웍 속에 뛰어 들어가야 한다.
9.북에서 남으로
10.다자 선택으로 나아간다.
호모 섹스세상으로, 일하는 시간도 9시간에서 5시간으로, 주일 예배도 다양하게 변화된다. 예술, 종교에도 다원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민족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결론
컴퓨터가 피라밋을 부술 것이다.우리가 사람들의 움직이는 것을 기록하고 사람들이 하는 일을 통제하기 위해서 필요로 했기 때문에 위계질서적인, 관료적인 시스템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컴퓨터가 우리들의 기관들을 수평적으로 재조직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지금은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는 ( ) 시대이다. 지금의 시대는 불확실하지만 이런 시대가 올 것이다. 그러므로 이 ( ) 시대에 엄청난 지렛대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분명한 센스, 개념, 비전을 가지고 앞으로 향해 나아가야 한다.
목회자는 미래 사회에 대해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 21세기에는 컴퓨터를 이용해서 일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그래서 컴퓨터가 네트워크로 사회를 재구성할 것이다. 앨빈 토플러의 책 지식 연료가 없으면 달려갈 수없다. 두뇌유출 현상, 생활 속도 가속적 추진력
새로운 유목민이 생김. 민족이동.
21세기 유행할 신학이 상담학이 될 것이다. 내적 치유가 중요하게 다루어질 것이다. 목사들이 해야 할 일이 굉장히 많아질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목회자들이 다듬어 주어야 할 것이다.
미국에서 제일 큰 교회는 소회된 자들을 모으는 교회이다. 소외된 자들을 모아서 잔치할 필요가 있다. 빌 하이벨스 교회는 소비자 지향의 목회를 한다. 하이텍크 목회요 하이터치 목회를 하고 있다.
제3물결
앞으로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새로운 다양성이 나타날 것이다. 칼빈주의, 알미니안주의, 세례, 재세례파 등에 대해서 많이 논쟁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교단이 중요하지 않다. 옛날에는 어느 찬송가를 부르느냐에 따라서 교회를 선택했다. 앞으로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앞으로는 복음주의라는 그룹과 자유주의라는 그룹이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시대에서 느낌의 시대로 바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소그룹들이 많이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다양해 지면서 극단화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정치적 문제, 도덕적인 문제, 호모섹스, 여성, 낙태에 대해서 찬성, 반대 그룹들이 많이 생겨날 것이다.
생겨날 방법
이론을 통해서 배우는 것보다는 (자전거를 타는 책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타면서 배우는) 실제로 배우면서 배우는 경향으로 나아간다. 신학도 합리적인 방식에서 실제적, 체험적, 관계적인 방법으로 나아갈 것이다.
예배도 감각적이 될 것이다. 드라마, 예술, 비디오, 모놀로그, 대화, 등 다양한 방법이 등장할 것이다. 그러니까 총체적 감각예배로 바뀌게 될 것이다.
성공의 척도는 삶이 변했느냐?이다. 무슨 학위를 가지고 있느냐?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할 능력이 있ㄴ느가 하는 것이다.
새로운 인습타파가 나타날 것이다. 습관적으로 하는 것을 부수고 새로운 것이 나타난다.
성직자만이 아니라 평신도도 할 수 있다는 경향이 나타난다. 모든 지도력을 의심하는 시대이다. 목회자는 강력한 지도자가 되도록 요구할 것이다. 강력한 지도력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리더십에 대한 책을 종합해서 읽어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분약에 대해서 10권 이상 읽어야 그 틀이 잡히게 된다. 미래에 대해서 10권만 읽어도 할 말이 많게 된다. 그리고 내적 치유에 대해서 자료를 수집하도록 하라.
지금의 방향은 역동성의 시대이다. 활력적이어야 한다. 실제로 업적을 남겨야 한다. 그리고 성령론도 역동적 성령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성령을 체험해야 한다. 말씀에 있는대로 체험을 해야 한다. 그래서 역동적 성령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목회 현장에서 심각한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지식은 목회에서 필수이다. 지식 없이 개척할 수없다. 지식이 새로운 연료가 되는 시대이다. 그리고 인격이 살아 있어야 한다. 가짜는 무슨 소리해도 듣지 않는다. 신뢰심을 가지게 되면 다 맡긴다. 그러나 신뢰심이 없으면 절대로 맡기지 않는다. 그리고 성령을 이야기할 때, 성령이 체험된 자라야 한다. 주의 영의 말씀을 증거할 때, 주의 영이 지배해야 한다. 체험이 말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말씀의 선로에서 탈선해 버리면 실패한다. 앞으로의 시대는 관계성의 시대로 변한다. 교회가 공동체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위에서 커트롤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자연스럽게 해야지 옛날처럼 때려서는 되지 않는다. 끈끈하게 맺어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사회는 일회용으로 나아가지만 교회는 끈끈한 공동체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돌아가는 사회를 의식하면서 실천하게 되면, 복음이 되는 것이다.
앞으로 사회는 뚫린 사회가 될 것이다. 그것을 채워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폴 시다의 <섬기는 지도자>라고 하는 리더십 교재를 읽어 보라. <변화시키는 지도자로서의 예수> <지도력 면에서 본 바울> 오스왈드 샌드스의 책을 보라.
<하워드 스나이더의 교회의 전망>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미래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10가지 주요동향
1)지역교회에서 세계교회
제3세계 교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 질 것이다.
2)부분 성장에서 전반복음으로 - 오순절의 복음의 중요한 것을 받아 들일 필요가 있다.
빈야드 운동에 대해서도 비판할 부분이 있지만, 성령의 역동성에 있어서는 본받아야 할 것이다.
중국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중국의 변화를 보아야 한다. 제도적 신학에서 공동체 신학으로 변화된다.
남성지도자제도에서 남녀 동반자제도로 확장된다. 여성들의 활동영역을 넓혀 나아가야 한다.
핵가족에서 가족의 다양화
기독교인의 정치적 행동주의로 나아간다.
지구촌 전체가 운명 공동체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II. 미래 영성 분위기
미국은 영적 갈증에 있다. 무신론은 불이 꺼졌다. 문제는 잡신론이다. 영적 갈증에 있지만, 그 방향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것을 체험하고 싶어 한다. 하나님을 느끼고 싶어 한다. 하나님을 찾는데 있어서 성경이나 교회만을 찾는 것이 아니고 신비한 것이 있다면 다 찾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뉴에이지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영적 갱신이 수백의 목회자들을 생동화시키고 있다. 미국의 목사들이 깨어나고 있다. 새로운 부흥운동을 예측하고 있다. 미국의 기독교 공동체 사회 속에 표적들과 기사들의 인기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1940, 1950년대의 지식주의에 대해서 나온 소리이다. 지식주의에서 초자연적 체험을 찾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성령의 능력이 있고, 그들의 삶이 과격하게 변화될 수 있는 교회가 성공할 수있는 교회이다.
우리는 두뇌적 논증에 별로 관심이 없고, 신학적 체계에 관심이 별로 없고 중요한 것은 삶의 변화, 중요한 것은 삶의 능력, 생명이다. 초자연적인 것과 만나는 것을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세대이다. 이런 영적 갈증은 우리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인도할 수 있는 비상한 기회이다.
과거의 패러다임은 올바른 교훈만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을 체험한 것으로 가르친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은 하나님을 체험했다면 올바른 교훈을 가지게 될 것이다.
명제적 진리가 항상 선행되어야 하고 이것이 종교체험을 지시해야 한다.
그러한 사고 방식은 조직신학의 산물인데, 이런 사회나 교회로 바뀔 것이다.
163
뉴에이지 운동은 기적이 일어남으로 믿게 된다. 그 운동은 범신론이며 그리스도는 많은 신들 중에 하나로 취급한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진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뉴에이지는 범신론에 대해서만 열려있고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닫혀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뉴에이지에 대한 대안은 기독교만이 유일한 진리라는 것을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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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영성
퓨리탄 영성- 말씀
경건
오순절 -치유, 기적
영성신학 특징에 나오는 논문을 보면, 무엇이 영적 해석인가? 복음주의적 영성재고, 동방교회의 신비신학-
영성신학은 체험적이다.
영성신학의 개요
니콜라스 - 전세계적 영성
물질적-뉴에이지
비종교적 영성-도덕적으로 건전한 진리의 적용하는 영성
종교적 영성 - 기독교적 영성
초대교회에서 지금까지 영성
초대교회- 명상
중세교회 - 신비적 체험
종교개혁 -말씀중심의 영성
복음주의 영성- 선교
20세기- 오순절과 은사주의
말씀에 근거한 신비적 체험이 필요하다.
니콜스는 참된 영성은 삼위일체적이어야 한다. 성부성자성령 어느 한 쪽을 배제해서는안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적 영성의 4요소
①기도 명상 회개
②개인적 삶에 적용
③교회적 삶에 적용
④세속사회와의 관계에서 적용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날 때,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교회와 전 생활 영역에 의해 나타나야 한다.
J. Houston - 영성신학의 창립자.
영성신학이 생기게 된 분위기
- 영적 고갈과 궁핍 속에서 살고 있다. 영적 박탈과 영적 가난의 상태가 영성신학이 생긴 분위기이다.
관념적인 것이 변화적인 것이 아니다. 관념적인 것이 들어와 있지만 삶은 변화되지 않는다. (왜 성령론은 말하는데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가? 성령을 이야기하는데 왜 사람들은 다 졸고 있는가? 그래서 영성에 대한 갈증이 생겼다. 영성에 대한 굶주림은 인격적인 것에 대한 굶주림이다. 그것이 나의 개인적인 삶 속에 들어와 있다. 인격적인 것이 대한 가르침, 2차적인 것에 대한 1차적인 것에 대한 갈증, 성령을 설명하는 것은 2차적인 것이고 체험하는 것은 1차적인 것이다. 실제로 적용성이 있는가? 영성이란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의식을 확대시켜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살아 있는 점차적으로서 성장한 관계, 이것이 영상이라는 것이다.
프락시스를 통한 시도, 그럼에도 여전히 영적 갈증을 느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해야 한다.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의 문제는 영성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허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신학은 증오의 신학이 되어 버렸다. 이런 분위기에서 영성이 생겼다.
단순히 머리로 아는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 속에서 만나야 한다.
계급적 권위주의에 대한 반발. 이것이 너무 굳어져 버린 것이다. 여기서 정서적 관계적 장애가 일어난다.
*기독교 영성 관심의 이유:
1) 개인차원에서의 실제적인 관심 - 지식적인 신학 저너머에 개인적 친근한 신지식 추구.
2) 교회의 신앙을 탈제도화하려는 시도
성직자는 교회고 평신도는 교회간다는 것에 대해 반발, 많은 기독교 행동주의에 속이 빈 것에 대한 반론, 아주 비싼 회의가 이루어지는데 전문가들이 이야기하는데 실제로 그런 사람이 강의하는데 반발로 나타나는 것이 영성신학이다.
3)종교다원주의적 차원 (종교적 차원) - 동양에서 좋은 것과 서양에서 좋은 것을 묶어놓는 것이 종교다원주의이다. 이것이 뉴에이지이다. 이것이 인간적인 핵심적 문제이다.따라서 지구촌 영성이 나왔다.
4)현대주의에 대한 불만 -
성경해석과 영성
영맥으로 요약된다.
신학교육과 영성
제임스 휴스턴 - 신학교육이 영적 생활을 진작시키는데 실패했다. 그래서 신학이 그 자체의 핵심을 놓치는 핵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경고한다. 그리고 우리는 재설계한다. 오늘의 영성에 대해서 재설계한다. 성삼위일체의 신비에 적절한 문법으로 설명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단순한 설명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신자의 영적 생활의 요소들은 신학연구에서 분리시키는 것은 부적절하다.
영성신학의관심-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세포로 하여금 최고의 건강과 최고의 작용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기도하는 교육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기도하는 격려를 받아야 한다.(제임스 휴스턴의 말)
기도하지 않으면 그만큼 인간되지 못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약화되면 인간성이 약화된다. 그러므로 영성신앙은 평범한 생활 속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이다.
성경신학과 성경해석(게하르트 마이어) - 오늘날 고린도 주석을 쓰야 하는가? 주석을 쓴다고 해서 무슨 변화가 오는 것인가? 이것이 정말 생명을 전달하고 삶을 변화시키는가? 영적 성경해석의 7대 테제를 주장했다. 영적인 주석이란 이미 널리 알려져 있고 많은 사람들이 받아 들이고 있다. 전통주석에 반작해서 영적 주석이 사용되고 있다. 영적 주석이란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을 우리와 오늘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말씀을 은하수 세계로 넘겨 두지 말라는 것이다. 셋째, 텍스트에 있는 해석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이다. 넷째,그것이 통제된 해석으로 나와 있어야만 잘 될수 있는 해석이다. 바른 해석이 무엇인가? 문법적, 언어학적 정확성이 있어야 하고 역사적 이해가 있어야 하면 교회 교리에 맞아야 한다. 영적 해석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다섯째, 그 시대 정신을 파악하는 한도 내에서만 비판적일 수있다. 여섯번째, 그의 권위에 대해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여기서 오소리티는 추상적인 교회적 권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개인적 권위를 말하는 것이다. 영적인 권위가 있는가? 주석하는 사람 자신이 영적 권위가 있는가?
일곱번째, 영적 해석은 순종의 해석을 통해서 완성해야 한다.
마이어의 비평은 역사비평적 성경해석에 대해서 반발하고 있다. 벵겔하우스는 경건주의자들이 세운 하우스이다. 거기는 독일에서 공부하는 자들을 지원해 주는 곳이다. 영국의 틴델하우스가 그 일을 한다. 영국의 복음주의 학생들은 틴델하우스에서 토론하고 책을 보곤 한다. 이 틴델하우스가 생기면서 영국 신학계가 바뀌어 버렸다. 이 사람들이 대학교수로 들어가자 영국 신학계가 복음주의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최고급 두뇌들을 바로 지원해 주어서 그 사람들이 앞으로 학교를 움직인다. 그 사람이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역사비평적 학문은 발달하는데 사람은 변하지 않았다. 왜 이런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말씀을 다루는데 권위가 있어야 하고 삶이 변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마이어 교수는 튀빙겐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영성신학을 스케치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계시록의 영성을 보는 것이다.
계시록의 영성은
거룩한 삼위일체와 사탄 삼위일체를 생각지 않고서는 영성을 생각할 수 없다. 성부는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4장에 보좌 위에 안자 있는 총사령관이다. 성자는 그 분 앞에서 인을 떼시는 집행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이 그 자격이 있는가? 있다.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어린 양이 사자이다. 어린양이시기 때무에 사자이다. 승리자가이기 때문에 인을 떼실 수 있다. 성령은 누군가? 어린양의 7 영인다. 어린양이 이 일을 하실 때 성령의 능력으로 하셨다. 이 삼위일체가 역사를 게획하시고 집행하시고 완성하신느 분이시다. 그 완성은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의 완성이고 백성이 아닌 사람을 심판하며 사탄 삼위일체를 파괴하느 ㄴ완성이다.
13장에 붉은 용이 있다. 이 용은 어린양을 친다. 그 어린남자 아이를 삼키려다 실패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바다 짐승이 나온느데 권력구조를 통해서 하나님께 동전한다. 그리고 땅 짐승 , 사상과 종교를 통해서 하나님을 도전한다. 이 사이에 엄청난 대립이 있다. 이 사이에 큰 대립이 있는데 이 대립구조를 놓치고 영성을 보면 엄청난 큰 것을 놓치고 영성을 보는 것이 된다.
거룩한 삼위일체와 사탄의 삼위일체의 대립 속에서 볼 때만이 깊은 영성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특징은 악령론적인 면을 체험하기 때문에 그 대립 속에서 영성을 이해한다. 거룩한 신부로서 영성이 필요하다. 이들은 어린 양의 피에 옷을 씨음 받은 자이고 더럽히지 ㅇ낳는 자이다. 순교하며 인내하는 자이다. 발람당을 따라가지 않고 죽기까지 충성하며, 능력으로 가슴으로 충성한다. 이쪽은 창녀이다. 더럽혀진 상태에서 그냥 살아가는 사람이다. 사상구조나 경제구조를 안고 있다. 그러므로 이 구조 속에서 부딪치면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다.
궁극적으로 18장에 가면 창녀 문화가 망하무고 어린양의 문화가 승리한다. 승리와 격려의 신학이다. 패배주의적 신학이 아니고 승리의 신학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계시록의 신학이다.
21세기의 영성은 말씀에 근거한 성령의 능력이 체험되는 영성이다. 그리고 적실성이 있어야 한다. 성경, 성령, 현실이 잘 관계되어야 한다.
계시록 20:1-6에 대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역사적 전천년설과 및 무천년설 고찰 |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령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천년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도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하리라. |
누구나 동의하는 대로 계시록 해석이 어렵지만 계시록의 내용 중에서도 천년왕국에 관한 계시록 20장의 해석은 더욱 더 어렵다. 본문은 “한편으로는 기인들과 광신자들의 낙원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권성수 교수의 입장.
필자는 앞서 언급한 대로, 20:1-3의 주석에 있어서 20:2의 ‘그 용, 그 옛 뱀, 즉 마귀 겸 사단’이라는 구절이 해석의 단서를 제공한다. 요한은 용을 보았지만 그 용은 문자적인 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을 의미한다. 따라서 용이 잡히고 묶이고 투옥되고 인봉되는 것 등이 사단이 체포/결박/투옥/인봉된느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활동이 제한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위에서 말한 월부드의 문자적인 해석원리는 지나친 입장이다. 계시록 자체가 제공하는 해석의 단서를 잡아서 그것을 다른 심상들을 해석하는 패턴으로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정당한 입장이다.
사단의 활동되는 기간이 천년이라고 한 것도 용이 사단을 상징하는 것과 같이 상징적인 것이다. 천년은 사단의 활동이 제한되는 기간 전체를 상징한다. 그 기간 동안 사단은 만민을 미혹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러면 그 기간이 실제로 언제인가? 이 질문에 결정적으로 답변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전천년설의 입장과 같이 19장과 20장의 연대기적 연속선 상에서 본문을 이해한다면, 사단결박의 기간은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 일정 기간이 된다. 19장과 20장을 연속선 상에서 보지 않고, 19장에서 주님의 재림과 최후심판이 일단락된 것으로 보고 20장에서 재림 이전의 사단 활동 제한으로 볼수도 있다. 여기서 관건이 19장이 연대기적이로 연속인가, 아닌가 하는데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19장 마지막에서 용(사단)과 적그리스도(바다에서 나온 짐승)와 거짓 선지자( 땅에서 나온 짐승), 이렇게 사단 삼두 중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19장 마지막에서 최종심판을 받고, 그 뒤에 20장에 가서 사단이 처년 간 투옥되었다가 잠시 풀려난 후 마침내 최종심판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19장 마지막에 이미 사단군 전체가 심판을 받았는데 그 후에 20장에 들어와서 사단이 미혹할 대상으로서의 만민이 아직 남아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보면, 19장과 20장이 연대기적인 연속선 상에 있는 것 같지 않다.
19장과 20장이 연대기적인 연속선 상에 있지 않다고 보면 무천년설의 입장에서 20장의 사단 결박을 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사단 결박과 동일시해야 한다. 그러나 무천년설의 입장에서 이렇게 볼 수 없는 증거가 계시록 자체 내에 있다. 계시록 12-13장의 내용에 의하면, 사단 집단은 주님의 초리모가 재림 어간에 활동이 제한된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고 어린 양 군대에 대한 전면전을 권력과 사상 면에서 펴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이 사단이 일정 기간 결박되어 과거처럼 만민을 미혹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분명하나, 그 기간이 언제인가에 대해서는 전천년설의 입장대로 주님 재림 후로 잡을 수도 없고, 무천년설의 입장대로 본문의 사단 결박을 복음서의 사단 결박과 동일시할 수도 없다. 두 입장이 그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지고 있지만, 그 나름대로의 문제점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어떤 결론을 내리지 못하기 때문에 본문을 강해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고,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은 아니다. 계시록의 재해석에서도 다루었지만, 우리는 주님이 재림하시기까지 희미하게 볼 수 밖에 없는 분야들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고, 콜럼버스가 완벽하지 못한 지도로써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ㅎ 더 나은 지도를 만든 것이다. 우리도 완벽한 해석이 없다해도 연사적 전천년설이나 무천년설의 입장에서 본문을 강해하면 강해하는 자와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이 복을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