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陽(한양)과 京城(경성), 두 개의 조선을
걷는 시간
펴낸곳 _ note & knot(노트 앤 노트)
※knot(노트) : 매듭. 매듭을 묶다. 매듭이
지다. 매듭이 엉키다.
인생의 빈칸을 연결하는 책
노트앤노트 | travel. essay. story.
2023년 "깊이 파고드는 새로운 여행의 재미"
라는 모토를 내걸고 <한국자전거나라>에서
<트레블레이블>이란 이름으로 리뉴얼했다.
현재 우리나라 곳곳에 대한 지식 가이드 투어
프로그램을 개발해 운영하고 있으며, 외국
여행자들에게 한국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는 이용규, 김혜정, 장보미, 최윤정이
글로, 임현철이 사진으로 참여했다.
이 책은 2024년 4월 5일에 초판 1쇄 발행을
했다.
"우리는 왜 우리의 역사를 잘 기억하지 못할까"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인물과 장소를 중심으로 여행하듯 이야기를
풀어내는 역사 스토리텔링 가이드북을 말이죠.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라는 말은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면 이룰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는 말입니다.
서슬 퍼렇던 역사를 기억해보세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둘러 보았다면
도보 7분 거리의 '국립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에 들러보세요.
작은 골목과 기와집들이 나란히 이어진 북촌은
고즈넉한 동네입니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儉而不陋(검이불루) 華而不侈(화이불치)"
=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다."
"무항산 무항심" =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마음을 다스리기 힘들다"
경복궁의 근정전 앞 너른 마당을 '조정'이라고
부릅니다.
1883년 정동에 들어선 미국공사관을 시작으로
1884년 영국, 1885년 러시아, 1889년 프랑스,
1891년 독일 등 각국의 공사관이 자리 잡은
정동 일대를 당시 사람들은 '공사관 거리'라고
불렀다.
미국 공사관이 초라해서 마뜩찮았던 '호러스
뉴턴 알렌'은 1884년 조선 땅을 밟은 선교사
였다. 당시 고종은 선교사가 포교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전제하에 의료 시설과 교육
시설 짓고 운영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렇게
알렌은 선교사가 아닌 외국 거류민단을 위한
의사의 신분으로 조선에 거주한다. 알렌이
조선에 온 지 3개월쯤 지난 어느 겨울,
갑신정변으로 민영익이 개화파 이규완이
휘두른 칼에 찔러 크게 다치는 일이 벌어진
다. 알렌은 서양 의술을 이용해 조선 최초로
'수술'을 진행했고, 수술에 성공한 덕분에
민영익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이 일을
계기로 고종에게 큰 신임을 얻은 알렌은
고종에게 1885년 병원을 세우게 해달라고
청함으로써 조선 최초의 서구식 병원인
광혜원이 재동에 세워지는 계기가 된다.
그후 광혜원이 생겨 환자가 넘쳐나는데
외국인이 부족하자 알렌은 미국 북장로
회에 도움을 청했고, 그의 요청을 받고
조선에 온 선교사들이 언더우드와
스크랜튼이었다. 비슷한 시기, 감리교의
선교사, 아펜젤러 역시 정동에 자리 잡았다.
정동길을 지키고 선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은 아펜젤러가 만든 배재학당이 있었던
자리이다. 비록 아펜젤러는 일제 강점기 前,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지만 배재학당을
통해 근대식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가로 자라났다.
이화학당 건너편 예원학교 운동장은 언더우드
의 집(=사택)이 있었던 장소였다. 언더우드가
연희동 일대 부지를 사들여 새롭게 학교를
설립했는데, 이 학교가 바로 오늘날 연세대학교
의 모태인 '경신학교'이다.
정동제일교회의 역사는 1885년에 시작되었다.
언더우드가 자신의 집에서 집 없는 조선 아이들
을 위한 교육을 시작했다면, 아펜젤러도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시작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치
는 않았는데, 1888년에 포교금지령이 떨어져
남성은 아펠젤러의 사택에서, 여성은 이화학당
에서 은밀하게 예배 드렸다고 한다. 그러나
1894년에 발발한 청일전쟁을 겪었던 고종의
생각이 서양 세력과 가까워져야 한다는 것으로
바뀌자 상황은 달라지게 된다. 1897년에 지어
진 정동제일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회
다. 그리고 그 교회 안에는 1918년에 봉헌된
우리나라 최초의 '파이프오르간'이 있다.
찬송가로 대표되는 서양 음악이 조선 땅에 알
려지면서부터 유행가의 형태가 사뭇 달라졌는
데, 이전까지의 판소리와 타령 같은 유행가가
찬송가에 우리말 가사를 붙인 창가로 바뀌게
된다.
모두가 한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1919년 3월 1일, 그날의 중심에도 정동제일
가 있었다. 커다란 파이프오르간 뒤에서 유
관순 열사를 비롯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찍어냈다는 것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화다.
역사적인 그날, 셀 수 없이 많은 교인들이
거리에서 만세를 외쳤고 이로 인해 정동제일
교회는 결국 폐쇄되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
니라 정동제일교회의 교인이자 이화학당의
학생이기도 했던 유관순 열사가 옥고를 치른
끝에 시선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렀던 곳도
이곳 '정동제일교회'라고 한다.
정동제일교회를 등지고 걷다가 그 여자를 떠
올려본다. 프랑스와 독일 국경에 있는 알자스
- 로렌 지방 출신인 그녀는 독일어와 프랑스
어는 물론이고 러시아어까지 능통했던 지식
인이자, 외국인들 입맛뿐만 아니라 고종의
입맛과 마음까지 사로잡았던 '마리 앙투아네
트 손탁'이다. 손탁은 1885년 러시아 공사
였던 베베르를 따라 조선 땅을 밟았다. 언어
감각이 탁월했던 그녀는 조선어도 빠르게
습득해 명성황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전해진다. 손탁은 사람을 접대하는 능력뿐
아니라 음식 솜씨도 훌륭해 정동의 외국인
들이 그녀가 만든 음식을 사랑했다고 한다.
그러자 고종 역시 타국에서 온 외국인 귀빈
을 접대할 때마다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다
고 한다. 그후 고종은 맡은 일을 늘 잘해내
는 손탁에게 한옥 한 채를 선물했는데, 이
집이 손탁 호텔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1902년, 손탁 호텔은 새로운 부지에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큰 규모로 재개장하게 된다.
지금의 이화여자고등학교 100주년 기념관
부근에 있었던 손탁 호텔은 2층짜리 서구식
건축물이었는데, 약 25개의 방에 묵을 수
있는 투숙객들로는 외교 사절과 귀빈 등
일부 예약 손님들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손탁 호텔은 늘 정동 사는 외국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는데, 그 이유가 이 호텔
1층에 있었던 커피숍 때문이었다고 한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자
러시아 공사 따라 조선(=대한제국)에 왔던
손탁의 입장이 난처해진다. 결국 그녀는
호텔을 처분한 다음 1909년, 프랑스 도시
칸으로 돌아갔고 1922년 7월 7일 프랑스
칸에 있는 자택에서 숨졌다고 한다.
손탁호텔은 그후 철거되어 없어졌고
지금은 이화여자고등학교 백주년 기념관
주차장 입구 앞에 이 자리에 손탁호텔이
있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대한민국의 오래된 미래, 정동'
정동은 140여 년 前만 하더라도 조선의
모든 '최초'가 몰려드는 별세계였다. 이
좁은 골목길 위에 조선인과 이방인이
각자의 문화를 꺼내놓고, 더불어 사는
방법을 고민했었다. 정동의 외국인들은
자신들과 다른 한국인들의 생각에 놀랐
고 한국인들도 시민이 아닌 백성으로
머물고 있었던 자신들의 신분 한계를
깨달았다. 정동길 곳곳에는 지금도
백성에서 시민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했던 그들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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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강의 야욕으로부터 조선을 지키기 위해
고종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가의
체급을 올렸다. 하지만 국가 이름을 바꾸
고 왕을 황제로 바꾸었다고 해서 없던
국력이 저절로 생기는 건 아니었다.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1897년부터 근대화
를 위한 대대적인 개혁이 일어났다. 바로
대한제국의 연호, 광무(光武)를 앞에 붙인
'光武改革(광무개혁)'이 그것이다. 광무개
혁의 핵심은 황제 권력을 강화하고 그 힘으
로 국방, 경제, 산업,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외세 도움 없이 자주적인 근대국가를 만드
는 것이었다. 고종은 황제의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헌법, '대한국 국제'를 발표
했고 황제의 경제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근대적 토지 조사 사업을 펼쳤다. '식산흥업
(殖産興業)'이라는 상공업 진흥정책을 펼쳐
방직, 제지 공장 등을 직접 세웠고 민간 제조
회사의 설립을 지원했다. 또 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상공 학교',
'외국어 학교' 등을 세웠다. 이뿐만 아니라
유학생을 직접 선발해 외국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게다가 근대 문물, 다시 말해 시공간의
제약을 줄여주는 전차, 철도, 전화, 전기 등을
한반도에 뿌리내리게 하는 데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쥐고 가야 하는 국방과 외교를 소홀히 하지
않았기에 육군무관학교도 세웠고 황제를
호위하는 근위부대도 양성했다. 그리고
세계 속에 대한제국을 선보이기 위해 190
0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
에도 참가했다. 고종 황제는 자주적인
근대국가를 만들기 위해 여러 방면에서
고군분투했지만 애석하게도 열강들은
그 노력을 가만히 두고만 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