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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복음 16,16-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서로 말하였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그들은 또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묻고 싶어 하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서로 묻고 있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은 어떤 업무나 일의 방향을 생각하고 내리는 의사결정입니다. 교구의 교구장님이나, 나라의 대통령 또 회사의 최고 경영자나, 집안의 가장, 본당의 신부님이나 회장님 또 단체의 장은 모든 일에 의사를 결정해야합니다. 이는 참으로 어렵고 힘든 순간이 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의사결정자가 결정한 것으로 그 일이 종결지어지기 때문입니다.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은 여러가지 정보를 통해서 닥쳐올 위험과 변수에 대비하여 의사결정을 하고 수많은 정보와 경험이나 사례의 경우 중에 가장 최고의 해답을 얻어서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고 경영자의 의사결정을 더욱 존중하고 그 결정에 믿고 따르는 것은 경솔하게 결정할수 없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사결정은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합당하고 좋은 정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결정하는 것에 최고의 정답은 있을 수 없으니 그래서 최적해(最適解)를 구한다고 합니다. 그 최적해는 정답이 될 수 없지만 정답에 가장 접근한 것으로 모든 사람이 그 최적해에 의지해서 목표달성 수준을 정하고 최선을 다할 수 있습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각 사람은 그 맡은 일에 대하여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사결정자나 위임을 받은 사람들은 일이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일을 잘 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흔히 임중도원(任重道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책임은 막중하고 그 일을 수행하는 데 어렵고 아득하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지금 제자들을 떠나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답답합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일을 수행하는 데 책임은 막중하고 갈길은 멀게 느껴지고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 대하여 도무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이제 당신이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사흘 뒤에 다시 살아나셔서 제자들과 같이 40일 간을 계시다가 승천하시고, 협조자 성령을 보내 주신다고 손에 모든 것을 쥐어 주시듯 말씀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건 제자들이 감당할 수 없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정답을 말씀하시면 제자들은 믿지 않을 것이고, 또 믿으면 게으름을 피울 것이고, 그 어려움을 인간적인 측면에서 방해할 것입니다. 여하튼 예수님은 참 어려운 일을 계속 결정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이시기 때문에 조금도 망설임 없이 모든 결정을 진리로 완벽하게 맺으십니다. 그것은 당신의 희생을 명명백백하게 보여주심으로써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지금 너무 답답해 합니다. 예수님께서 위임하시는 일을 해낼 재간이 없고 너무 막중한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도 그런 순간을 날마다 맞이하고 있습니다. 책임은 막중하고 해야 할 일은 너무 많기만 합니다. 집안을 일으키기도 해야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도 해야하고, 사회생활도 잘해야 하고, 정치에 참여하기도 해야하고, 사람들에게 잘 보여야하고 지금처럼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잘 살아나야 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결정할 때도 하느님처럼 명쾌하게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할일은 막중하고 갈길은 아주 멀고 힘겹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떠나 보내서 너희가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참 세상의 일은 그렇게 대치되어 나타납니다. 제자들은 울며 애통해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였으니 이제 자신들을 방해할 사람이 없게 되었다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리고 고아가 된 제자들은 그 책임감과 주님을 잃은 애통함으로 가슴을 찧으며 아파합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제자들도 예수님과 같이 복음을 전하다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뻐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살면서 애통해야 하나요? 아니면 기뻐해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당연히 기뻐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측면에서 기뻐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돌아가신 주님을 생각하면 기쁜일이지만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내 죄 때문에 돌아가신 주님을 기뻐해야 하다니요?' 하고 부정하고 침통하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사순절도 보내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고 기도드리고 피정도 하고 또 미사에 참례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할일이 많다고 걱정하느냐? 너희를 두고 내가 아주 떠나갈까봐 걱정하고 근심하느냐? 내가 네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애통해 하느냐? 그러지 말려므나. 내 죽음이 네게는 아픈 상처로 있겠지만 근심하고 걱정하고 괴로워 하지 말아라, 이제 그 모든 것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사랑임을 알고 기쁨으로 변해야 한다. 나는 너희의 기쁨을 위해서 지금 다시 십자가에 달린다 하여도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이란다. 내 사랑하는 친구야...." 하고 상상하면 안되나요? 이런 상상이 성경의 말씀에 위배되나요? 이런 마음이 주님을 잘못 모시는 것인가요? 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정말 기뻐하면서 주님께서 맡겨주신 그 일을 정성을 다해서 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任重道遠의 길이지만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따라가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고통과 어려움을 주님께 모두 맡기고 근심하지 말고 그분을 사랑하면서 따라가야만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짊어지시고 죽기까지 우리의 슬픔과 근심을 큰 기쁨으로 바꿔주신 주님! 아직도 당신의 그 아픔과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주어진 짐 때문에 당신을 보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시는 저희에게 당신의 성령을 보내시어 주님의 사랑으로 기뻐하게 하소서. 당신의 그 깊은 사랑을 가슴 가득히 담고서 할 일이 아무리 많고 힘들어도 아니 아무리 더디고 험할지라도 기쁜 마음으로 당신을 따라가게 하소서.
-선교사랑방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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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 묵상 참 은혜롭습니다. 글 속에 물 흐르듯이 주님 사랑이 젖어드는 것 같습니다...감사드립니다
내가 내리는 의사결정이 주님께 영광과 기쁨을 돌리는 지혜로운 판단이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결정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더디고 힘들어도 기쁘게 즐겁게, 신나게 주님을 따라가는 착한 어린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야고보아쩌씨님!
감사합니다. 좋은 묵상 잘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