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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 슈투카 편대)
오늘은 이미 예고해드렸듯이 주인장님께서 제작 중이신 독일공군의 "융커스 87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에 대해서 좀 자세히 소개해드리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동안 2차대전 주요 전투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는데 이렇게 좀 자유스러운 소재로도 글을 올리는 것이 좋을 듯 해서....
루프트바페 (독일 공군)은 2차대전 내내 전설적인 에이스들을 배출해내면서 연합군의 에이스들과는 비교가 안되는 격추 기록을 남기면서 연합군에게 공포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물론 1941년 영국 본토 상공에서 벌어진 항공전 (Battle at Britain)에서 주역은 독일의 메서슈미트 전투기와 영국의 허리케인 전투기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독일군에게 점령을 당한 유럽 대륙의 주변국들과 소련에게는 메서슈미트 전투기 못지않게 두려운 존재가 바로 급강하 폭격기 슈투카였습니다.
(그림에서 보듯이 슈투카의 크기는 일반적인 전투기보다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몸집에다가 랜딩 기어가 아예 접히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 구조였습니다. 게다가 날개도 후에 등장하는 미국 공군의 코르세어 전투기처럼 꺾여져있는 특이한
모습이었습니다.)
슈투카는 다른 쌍발 폭격기들처럼 다량의 폭탄을 투하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기껏해야 1,000kg 폭탄 한발을 달고 가서 투하하거나 그보다 작은 사이즈의 폭탄들 몇개를 양 날개에 달고 폭격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일반 전투기들은 장착할 수 있는 대형 포로 무장하여 지상의 적들에게 탁격을 가할 수 있었지만, 접히지 않고 고정된 랜딩 기어(착륙용 바퀴)와 디자인에서 오는 한계로 비슷한 사이즈의 적 전투기들에 비해서 훨씬 느린 속도로 비행할 수 밖에 없다보니 메서슈미트의 호위 없이 적의 전투기를 만나게 되면 속수무책으로 격추당할 수 밖에 없는 약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슈투카의 최고 속도는 시속 310km였는데 대표적인 적국의 전투기인 호커 허리케인이 최고 시속이 547km였습니다.)
(단 한발의 슈투카 폭격으로 침몰한 소련 전함 마라 호, 훗날 다시 건져내서 수리 후에 사용하였지만 어쨌든 당시 침몰로 326명의
소련 해군들과 함께 침몰한 것은 놀라운 전과입니다.)
하지만 약점 투성이처럼 보이는 이 급강하 폭격기가 동부전선에서 보여준 엄청난 전과의 예를 들어보면 무언가 엄청난 놈이었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2차대전에서 전설적인 슈투카 에이스로 기억되는 한스 유리히 루델 대령은 1941년 북해에서 수행한 폭격에서 단 한발의 1,000kg 폭탄으로 25,000톤급 소련 전함 마라(Marat)를 침몰시켰습니다. (어느 정도 크기있지 감이 안올 것 같아서 참고로 말씀드리면 독일 최고의 전함 비스마르크 호가 약 50,000톤급이고, 일본의 야마토나 무사시가 60,000톤급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적은 군함이지만 군함 중에서 가장 큰 사이즈인 "전함"을 단 한발의 폭탄으로 침몰시켰다는 것은 슈투카야 말로 다윗의 돌팔매 만큼이나 효과적인 공격 무기였다는 반증입니다.)
루델 대령의 슈투카는 소련의 전함 마라 호 위로 천천히 날아가서 위치를 잡은 후에 급강하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갖고 있던 단 한개의 1,000 kg 폭탄을 투하한 후에 급격히 상승하며 전함에서 멀리 날아가버렸습니다. 폭탄은 엄청난 속도로 가속하면서 마라 호의 갑판을 뚫고 들어가서 갑판 밑에 함포 포탄들이 잔뜩 들어차있는 전함 중심부에서 폭발하였습니다. 엄청난 1,000ikg 대형 폭탄의 폭발은 순식간에 거함의 뱃속에서 엄청난 폭발을 하면서 수많은 수병들을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찢어버리고, 함포 포탄들과 함께 커다란 불덩어리를 토해내게 됩니다. 수차례 함포와 어뢰를 맞아도 침몰하지 않을 커다란 전함은 단 한발의 폭탄으로 순식간에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공할 슈투카의 위력이었습니다.
(전설적인 에이스 한스 유리히 루델 대령의 슈투카, 그의 놀라운 이야기는 오늘 글을 마치기 전에
좀 더 소개해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1939년 폴란드 침공과 이듬해 프랑스 침공에서 독일군이 보여준 '전격전" 전술에서 슈투카는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역활을 하게 됩니다. 첫째, 신속히 적의 대공포 진지와 통신시설을 포격하여 무력화시키는 효과와 함께 둘째로 "제리코의 나팔"이라고 불렸던 끔찍한 굉음을 내며 폭격을 하여 공격을 받는 나라의 군인들은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까지 끔찍한 공포에 빠져들게 만드는 심리전의 효과도 거둡니다.
(슈투카의 폭격시 들리는 특유의 굉음 녹음 자료. 직접 폭격을 받지 않더라도
듣기만 하여도 끔찍한 소리였습니다. 사실 독일군은 사이렌을 부착해서 의도적으로
이 소리를 증폭하여 더 큰 효과를 얻게 됩니다.)
여기서 "제리코의 나팔"(Jericho Trumpet)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바로 구약 성경에서 나오는 유대 지도자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유대인들에게 일제히 불게 했던 나팔에서 유래된 별명입니다. 일제히 나팔을 불자 여리고 성은 일제히 무너져 버리고 유대인들에게 함락된 것입니다. 원래 슈투카는 2차대전 발발 이전에 스페인 내전에 병력 지원을 해주면서 배치되어 그 위력을 시험할 기회를 갖게 됩니다. 당시 공중 폭격이라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스페인과 영국,프랑스 지상군들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이 끔찍한 굉음을 들으면서 폭탄이 투하되기 전부터 이미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1941년 이후부터는 이 사이렌을 떼어내서 굉음은 덜해지지만 이미 연합군들에게는 "제리코의 나팔"이란 별명으로 악명을 떨친 후입니다.
슈투카의 탄생
(에른스트 우데트, 1차대전 독일 공군 에이스이며
훗날 2차대전 루프트바페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됩니다. 그가 바로 수투카 개발을 제안한 장본인입니다.)
(에른스트 우데트의 포커 D. VII)
슈투카의 탄생을 설명함에 있어서 에른스트 우데트에 대해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1차대전 독일 공군 역사상 2번째로 많은 적기를 격추시킨 에이스 (첫번째 에이스는 너무나 유명한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이지요. 그는 확인된 격추 기록만 73대인데 1918년 대공 포화로 격추되어 사망합니다.) 로 1인자인 붉은 남작이 종전 직전에 전사한 것과 달리 62대의 격추 기록을 세우면서도 살아남아서 패전후 패배감에 빠져있던 독일 국민들에게 "살아있는 영웅"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특히 1차대전만 해도 아직 항공전은 기사도 정신으로 낭만이 남아있던 시절이라 프랑스 공군의 에이스 조르즈 기네메르(52대 격추)와의 "결투" 이야기는 전쟁 후에도 많은 사람들의 입으로 회자되게 됩니다. 즉 양국의 최고 에이스들이 공중에서 결투를 벌이던 중에 우데트의 기관총이 고장을 일으키게 됩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아무리 뛰어난 에이스라도 상대방의 일방적인 사격으로 벌집이 되어 격추되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프랑스의 최고 에이스였던 조르주는 우데트를 그냥 보내주고 다음 대결을 기약합니다. 즉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상대방을 이기겠다는 기사도 정신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는데...... 물론 2차대전에서는 독일 폭격기에 추락하는 연합군 폭격기에서 탈출한 조종사들이 곧바로 독일군 전투기의 기총 소사로 낙하산에 매달린채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에 비하면 중세시대 원탁의 기사 전설과 같은 이야기들이지요.
(1차대전 53대 격추로 프랑스 공군 에이스 랭킹 2위에 올랐던 조르즈 기네메르, 그는 독일의 에이스 우데트와
영화의 한장면 같은 낭만적인 결투의 전설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제대 후에 직업 곡예 비행사로 순회 공연을 하게 되는데 지상에 걸어놓은 손수건을 비행 중에 자신의 비행기 날개로 걷어 올리는 기막힌 묘기를 보일 정도로 뛰어난 비행사였습니다. 그는 또 수많은 미녀 배우들과 염문을 뿌리면서 영화에도 출연하면서 전쟁 중에 그가 쌓았던 명성과 남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천부적인 비행 조종 기술, 그리고 타고난 플레이보이 기질과 엔터테이너적인 재능으로 독일 사교계는 물론 유럽 대륙에서 유명 인사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훗날 제3제국의 2인자가 되었던 헤르만 괴링은 1차대전 독일 공군에서 22대 격추
기록을 가진 에이스로 전공을 세웁니다.)
1930년대 초에 그와 같은 독일 공군 조종사로 참전하여 22대 격추 기록 (독일 공군 에이스 순위 48위)으로 비록 우데트와 비교해서 차이는 크지만 전쟁 영웅의 반열에 올라있던 헤르만 괴링으로부터 나치 당에 입당할 것을 권유 받으면서 그의 비극적인 최후는 시작됩니다. 괴링은 자유분방한 전쟁 영웅이자 사교계의 매력남이 되어있던 우데트를 나치의 선전 도구로 사용하여 그를 사랑하는 많은 독일 국민들의 호의적인 시선으로 나치로 끌고 오겠다는 의도에서 우데트에게 당시 최신 항공기로 알려진 미국제 복엽기 커티스 호크 2를 두대나 사줄테니 나치에 입당하라고 꼬드깁니다. 1차대전 중에 우데트는 최고의 에이스 "붉은 남작"이 이끌던 "플라잉 서커스" 편대에서 활약하던 중에 "붉은 남작"의 전사 후에 후임 편대장으로 괴링이 오면서 결국 그와는 옛 상관과 부하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괴링이 우데트에게 나치 입당을 조건으로 사주었던 2대의 커티스 호크 2 중에 한대, 우데트는 이 비행기를 조종하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기간에 스타디움 상공에서 축하 비행을 하였습니다.)
우데트는 정치에 대해서 별로 뚜렷한 시각도 없이 하루 하루 쾌락 속에서 인생을 즐겼던 그에게 아돌프 히틀러의 사상이나 독일의 미래는 안중에도 없었지만 자신보다 훨씬 못한 격추 기록을 가졌던 과거 상관 괴링이 히틀러라는 인물을 만나서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인정되는 모습을 보면서 당장 눈앞에 최신형 항공기 두대와 함께 그동안 가져보지 못했던 명예욕도 발동하게 되어 선뜻 입당을 하게 됩니다.
(괴링이 우데트의 나치 입당을 위해서 사주었던 미제 항공기 커티스 호크 2 두대 중에 한대. 현재 폴란드
항공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올림픽 마크가 되어있는 것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행사에서 우데트가
이 비행기를 타고 비행을 할 때 마킹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비행기는 슈투카의 개발에 직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원래 복엽기인데 날개는 다 떨어진 채로 전시 중입니다.)
괴링은 우데트가 갖고있는 재능을 발휘하기 위해서 가장 알맞은 역활을 주게 되는데 바로 새롭게 창설하는 나치 독일의 공군 "루프트바페"의 항공기 조달 책임을 맡기게 됩니다. 그는 괴링이 사준 커티스 호크 2를 조종하면서 이 비행기가 갖고있는 당시로서는 뛰어난 급강하 비행 능력이 향후 소형 폭격기로써 큰 효과를 거둘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는데 그런 아이디어는 융커스 항공기 제작사에 바로 커티스 호크 2의 설계를 참고한 새로운 단엽기 급강하 폭격기의 개발을 의뢰하게 됩니다. (참고로 그에게 영감을 준 커티스 호크의 제작사인 커티스社는 불과 몇년 후인 1940년에 SB2C 헬 다이버 급강하 폭격기를 개발하여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의 항공모함을 두대나 침몰시키고, 전쟁 말기에 최대 거함 야마토를 침몰시키는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미국 커티스社가 개발한 SB2C 헬다이버 급강하 폭격기. 조종이 용이하지 않은 탓에 조종사들은 이 폭격기의 모델명 SB2C를
"Son-of-a-Bitch-2nd-Class"라고 비아냥거렸고, 후익부가 큰 모습을 빗대서 "Big-Tailed-Beast"라고 불렀지만 태평양 전쟁
에서 이 폭격기들이 세운 전공은 유럽 전선에서 슈투카가 세운 그것 못지 않습니다.)
그는 융커스 항공기 제조회사에 개발을 의뢰하여 드디어 1935년에 시제기를 제작하여 시험 비행을 하게 됩니다. 그결과는 성공이었지만 참관했던 대부분의 공군 고위 장성들은 지상 1km에서 급강하로 포탄을 떨어뜨리고 다시 상승하는 고난도 비행 기술을 평균 기술 수준의 일반적인 공군 조종사들에게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하며 이 폭격기 개발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하지만 우데트는 이런 그들의 태도를 무시하고 개발을 계속 진행합니다.
(슈투카 개발 제안자로 2차대전 발발 전까지 루프트바페의
주력기 선정에 큰 역활을 했던 애른스트 우데트는 메서슈미트
Bf109 전투기 선정에서도 그의 능력을 발휘하지만 이후 정치
생리에 맞지 않는 성격과 히틀러의 독소전쟁 발발을 보면서
제3제국의 파멸을 예측하며 알콜 중독과 우울증이 심해져서
1941년 만취 상태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1941년 11월 우데트의 장례식장에서 조사를 하고 있는 헤르만 괴링 원수, 그는 이 어리석은 전쟁 영웅을
이용해먹고 그것도 모자라 그의 정신마져 갉아먹은 장본인이었습니다. 우데트가 죽기 직전까지 그를
정신적으로 심하게 괴롭힌 것들은 나치 조직에서 섞이지 못하는 자신의 본성과 독일은
소련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너무나 확실한 미래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이었습니다. )
사실 메서슈미트 전투기의 경우 독일의 전투기 발전을 수십년 앞당긴 메서슈미트 박사와 같은 천재적인 과학자들이 가장 큰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지만, 슈투카의 경우에는 우데트의 뚝심같은 고집이 아니었으면 독일 공군의 고위층들의 부정적인 시각으로 인해서 결코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폭격기였습니다. 그는 비극적인 최후와 그 자신의 문란한 사생활로 많은 오명을 남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죽음 후에 2차대전이 독일의 항복으로 끝날 때까지 연합군들과 상대국의 시민들에게 끔찍한 공포와 엄청난 살육을 자행한 폭격기를 남겨놓게 됩니다. 특히 그가 슈투카의 아이디어를 얻은 커티스 호크 제작사인 커티스 社가 몇년 후에 개발한 헬다이버 폭격기가 태평양 전역에서 보여준 엄청난 전과를 보면 그의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에 놀랄 수 밖에 없습니다.
초기에 제작된 슈투카 시제기는 영국 롤스로이스 엔진이 장착되어 독일 공군의 고위층으로부터 한층 더 부정적인 시선을 받게 됩니다만, 후에 융커스 엔진을 사용하면서 이런 문제는 해결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괴상하게 생긴 이 폭격기가 과연 실전에서 얼마나 공헌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의문이 가시지 않던 상황에서 실제 테스트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지게 되는데 바로 독일이 스페인 내전(1936년~1939년)에 독일 전투기와 폭격기들을 지원해주기로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메서슈미트 전투기와 함께 투입된 슈투카는 메서슈미트가 전투기로써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을 때 매우 효과적인 폭격기로 뜻밖에 큰 효과를 거둘 뿐만 아니라 폭격 중에 들리는 굉음으로 적군들에게 끔찍한 공포심을 유발하게 만들어서 그동안 불만을 가져온 공군 지도부의 슈투카에 대한 시각을 확 바꿔놓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스페인 내전 후에 바로 폴란드 침공이 시작되자 슈투카 부대를 편성하여 전격전의 선봉에 서게 만듭니다.
여기서 슈투카의 폭격 방법을 짚고 넘아가야 하겠습니다.
(위에 슈투카의 급강하 폭격 방법을 보면 지상에서 1,500피트 (약 450m)에서
폭탄을 투하하고 방향을 꺾어서 올라갑니다. 실제로는 위의 각도보다 더 가파른
수직 각도에서 급강하를 하였다고 하는데 아무런 유도 장치가 없는 폭탄을 가지고
급강하 폭격을 하는 것은 조종사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극히 위험한 비행이었습니다.)
조종사는 급강하 중에 평소의 5배에 가까운 압력을 받으며 기절할 수도 있는데 그런 경우에 대비해서 슈투카는 자동 폭탄 투하 장치 및 자동 상승 장치를 적용했다고 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육지보다 해상에서 급강하 폭격을 하는 경우에는 거리 측정이 힘들어서 상승 싯점을 놓치고 그대로 바다에 쳐박히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쨌든 독일 공군의 슈투카 부대 훈련 결과에 따르면 폭격 명중률이 95%에 달했다고 하는데 실전에서도 명중률은 60%를 넘었습니다. 첨단 유도장치가 장착된 현대전의 유도 폭탄들의 명중률이 75%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위험 천만한 방법이긴 해도 그 정확성만은 섬뜻할 정도로 우수하다는 것입니다.
(완성 직전에 슈투카)
슈투카의 활약
1939년 드디어 독일군은 자국의 군사 작전에서 슈투카를 사용할 기회를 얻게 되는데 바로 2차대전의 시작인 폴란드 침공입니다. 특히 슈투카는 적국의 전투기들이나 폭격기들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군이나 피난민 행렬들을 폭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결국 그만큼 수많은 군인들 뿐만 아니라 무고한 시민들까지 살육하는 저주받을 임무에 사용되는 폭격기가 되었습니다. 폴란드 침공 중에 슈투카는 31대의 손실을 입는데 대부분이 늦은 속도로 인해서 폴란드 지상군의 대공포 공격으로 격추되었습니다.
1940년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자 북해에서 벌어진 영국 해군과 독일 해군의 해상전에서 지상전과는 달리 영국 해군이 우세함을 보이곤 하였는데 하지만 한참 승기를 잡았을 때 수평선에서 나타난 슈투카 편대들은 거대한 독일 전함도 어쩌지 못했던 영국 전함들에게 마치 다윗이 골리앗 이마에 돌팔매를 꽂듯이 명중률 높은 폭격으로 엄청난 치명타를 입히는 일이 발생하곤 하였습니다.
(1940년 프랑스 침공 당시에 프랑스 공군이 운용한 미국제 전투기 커티스 H-75)
그런데 프랑스 침공 작전 중에 슈투카가 갖고있는 근본적인 약점인 상대국들의 어떠한 전투기종보다도 현저하게 느린 속도가 치명적인 문제임을 보여주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1940년 5월에 쎄당 전투에서 12대의 슈투카가 커티스 H75 전투기 (미국제 커티스 P-36 호크 전투기의 프랑스 공급 모델) 편대와 마주치게 됩니다. 즉각적으로 프랑스 공군은 공격을 시작했고 무려 12대의 슈투카 중에서 11대가 격추되는 일방적인 게임으로 마감하게 됩니다. 비록 미국의 단엽 전투기 1세대라고 평가되고 최고 시속도 호커 허리케인보다 80km 이상 느린 전투기였지만 그럼에도 슈투카보다는 100km 가깝게 더 빠른 전투기였습니다. 일방적으로 밀려가던 프랑스조차도 일단 메서슈미트의 호위를 받지 않는 슈투카 편대는 매우 쉬운 먹이감이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하지만 이런 결과를 보고도 독일 공군 사령부는 여전히 자신들이 무적이라고 자만감에 빠지기 시작하고, 이런 그들의 자만감은 엄청난 댓가를 치루게 됩니다.
(폭격 임무를 완수한 슈투카가 복귀하면서 찍은 피폭 현장, 폭격을 받은 군함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습니다.)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시작되면서 슈투카 부대는 메서슈미트 전투기들의 확실한 호위를 받으면서 영국 본토로 날아가서 영국 공군 비행장에 세워진 전투기들을 정확한 폭격으로 산산조각을 내버리곤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비행단 조종사들이 모여있던 건물을 폭격하여 건물안에 수십명의 전투기 조종사들을 한순간에 날려버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일단 제공권이 전투기들에 의해서 확보된 상황에서 슈투카 만큼 정확성 높은 폭격을 가할 수 있는 근접 폭격기가 없었으므로 영국 공군들에게 슈투카는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레이더 기술이 지금처럼 발달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레이더만으로는 충분히 사전 경보 태세를 갖출 수 없어서 영국 본토 곳곳에 쌍안경을 들고 육안으로 공중 감시를 하는 초소들에 의존할 정도로 방공 태세가 취약하던 시기였던 탓에 바다를 건너 해안에 나타난 독일 공군기들이 목표 지점에 폭격을 하고 다시 돌아갈 때까지 지상에 영국 전투기들이 이륙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 탓에 하늘에 나타난 독일 슈투카들이 마음껏 폭격을 해대는 모습을 보면서 발만 동동 구르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실제 1940년 시작된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영국 주력기는 호커 허리케인 전투기였습니다. 하지만 1938년부터 생산이
시작된 신형 전투기 스핏파이어(사진)도 다수 투입되는데 영국의 걸작 전투기 스핏파이어는 최고 속도 시속 600km로
슈투카에 비하면 무려 200km 가까이 더 빠른 전투기였습니다. 한마디로 슈투가와는 상대가 안되는 존재였습니다.
1942년 유럽 전선에서 미국의 P-51 무스탕 전투기가 등장할 때까지 스핏파이어는 독일 전투기들에게 우위를 점하는
최고의 연합군 전투기로써 그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으로 자만에 가득차게 된 루프트바페의 수장 괴링은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것은 1940년 8월 13일에 메서슈미트 편대의 호위 없는 단독의 슈투카의 대형 편대 임무를 하달하는데 영국 상공에 도착했을 때 영국은 주력기였던 호커 허리케인보다 더 최신형이었던 스핏파이어 부대가 출동하여 최고 속도에서 100km 이상 차이가 나는 느림보 슈투카들을 마음 놓고 사냥하는 일방적인 공중전이 벌어집니다. 영국 공군은 마침 이때가 칠면조 사냥 시즌이 시작되는 시기라고 해서 "8월 13일의 신나는 칠면조 사냥"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8월부터 불과 6주 동안에 총 59대의 슈투카가 영국 전투기들에 의해서 격추되었습니다. 같은 기간 슈투카의 폭격으로 영국은 6척의 군함들과 14척 수송선들이 침몰했고 6개의 비행장과 3개의 레이다 기지가 파괴되었으며 대부분 지상에 있던 49대의 영국 군용기들이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한편 1940년말부터 41년까지 이어지는 북아프리카 전역에서의 전투들에서 슈투카는 지중해에서 영국령 이집트로 향하는 영국 보급 선단들에게 U 보트 잠수함과 함께 집요한 공격으로 수많은 민간 선박들과 선단을 호위하는 군함들을 함께 수장시키는 전공을 세우게 됩니다. 특히 1940년 11월 이태리 깊숙한 군항이었던 타란토 항구를 함재기 소드피시 복엽기들로 급습하여 다수의 이태리 군함들을 침몰시키는 전공을 세웠던 영국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 호를 1941년 1월 시실리 섬 동쪽에서 이태리 폭격기 사보이아-마르체티와 함께 슈투카 편대가 공격하여 반파시키면서 두달 전 타란토 폭격의 보복을 하였습니다.
(아래 사진 둘 -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실제 사용되었던 뱀 그림의 마킹을 한 슈투카와
그대로 고증을 따른 하세가와 키트)
(영국 해군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 호, 복엽기들이 함재기로 올라와있는 것이 주로 미국 해군 항모의 모습에 익숙했던
우리에게 좀 낮설어 보이지만, 유럽 해상전에서 소드피시와 같은 복엽기들이 뇌격기로 충분히 그 역활을 다하였습니다.
그 좋은 예로 소드피시의 어뢰 공격이 침몰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던 나치 독일 최대의 전함 비스마르크 호의 격침 사건
(1941년) 입니다.)
하지만 북아프리카 전역에도 영국 본토에서와 마찬가지로 우수한 스핏파이어 전투기들이 투입되기 시작하자 슈투카는 더 이상 영국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무용지물로 전락해버립니다.
(1942년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독일이 항복하기 직전에 슈투카의 도장과 마킹)
1941년 독소전쟁이 시작되면서 그 전 해에 폴란드 침공 당시 슈투카가 보여줬던 전격전에서의 중요한 역활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그해 겨울까지 중부 지역에서는 모스크바까지 남주 지역에서는 스탈린그라드까지 파죽지세로 밀고가는 독일 지상군들에게 효과적인 지원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련의 넓디 넓은 면적의 대륙에서 전쟁을 수행하다보니 슈투가의 전방 공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진하는대로 최대한 전선에서 가까운 위치에 간이 비행장을 건설하곤 하였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상공에서 폭격을 가하는 슈투카, 1941년)
동부전선에서 T-34와 KV-1과 같은 독일 전차들보다 우수한 방어력을 가진 전차들이 등장하면서 슈투카는 보다 강력한 화력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슈투카에 장착된 폭탄은 1,000kg 대형 포탄인 경우 단 한개만 장착할 수 있고, 그보다 작은 폭탄 두개를 양 날개에 장착한다고 해도 결국 쿠르스크 전투와 같이 드넓은 대지 위에 새까맣게 깔려서 전진해오는 소련 전차들을 상대하는 것은 역부족이었습니다. 기껏해야 한두대 전차들에게 폭탄을 명중시키고는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슈투카 에이스 한스 율리히 루델 대령의 Ju 87G 버젼, 37mm 기관포가 장착된 버젼입니다.)
여기서 적의 전차들을 단 한대라도 더 파괴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당시 슈투카 에이스로 국민 영웅이 되어있던 한스 율리히 루델 대령이 37mm 기관포를 하나씩 양날개에 부착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여서 1943년 1월에 Ju 87G 버젼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애초에 계획된 무장이 아닌 탓에 기관포는 한개당 6개의 포탄으로 한정되고, 결국 양쪽 합해서 12발의 포탄을 발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비행 중에 지상에 전차들을 단 한방이라도 맞추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고, 제대로 맞추지 않고 비껴 맞추는 경우에는 전차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지 못할 가능성도 매우 높은 것입니다.
게다가 기관총이 아니라 기관포이다보니 사격을 하는 순간에 그 반동으로 비행기 조종 자체가 어려운 현상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폴란드와 프랑스 침공에서 많은 경험을 쌓았던 슈투카 조종사들은 이후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맞닥뜨린 영국 전투기들과 동부 전선에서 마주친 소련 전투기들에게 먹이감이 되어서 실제로 1943년 경에는 루델 대령과 같이 우수한 에이스들은 얼마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고군분투 하게 됩니다.
(1943년 쿠르스크 전투에서 파괴된 소련 KV-1 전차)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같은 해 3월에 루델 대령은 37mm 기관포를 장착한 자신의 슈투카를 몰고 그의 편대원들과 함께 믿을 수 없는 전설을 만들게 됩니다. 여기서 그에 대한 전설을 간단히 흝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동부 전선에서 혹독한 추위와 폭설에 직면한 슈투카는 랜딩 기어 바퀴 대신 스키 모양의 장치를 부착하고
눈 위에도 이착륙 할 수 있도록 대비하였습니다.)
슈투카 최고의 에이스 한스 율리히 루델
(한스 율리히 루델(1916년~1982년))
스탈린에게까지 알려진 그의 전공으로 소련의 독재자는 그를 가리켜 "인민의 적"으로 부르고 10만루블의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의 전공이 너무 훌륭한 나머지 "Knight's Cross of the Iron Cross with Gold Oak Leaves, Swords and Diamonds" 라는 긴 이름의 훈장을 새로 만들어서 그한테만 수여했습니다. (너무 이름이 길어서 해석을 안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연합군의 경우, 전쟁이 끝나지 않아도 일정 기간의 출격을 소화하고 살아남은 조종사는 고향으로 보내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인력 수급이 상대적으로 원활했던 탓에 이런 제도가 가능했지만 독일의 경우에는 출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전쟁이 끝나거나, 아니면 부상이나 사망으로 조종이 불가능해진 경우뿐이었습니다. 그런 탓에 루델은 연합군 에이스들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엄청난 대기록들을 세우게 됩니다. 그는 오직 수투카만을 조종해서 세운 기록들입니다.
- 518대의 적 전차 파괴
- 700대의 적 트럭 파괴
- 150개의 대공포 포대 파괴
- 100개 이상의 교량, 철도, 벙커 파괴
- 소련 전함 마라 호 격침, "시월 혁명 호" 반파
- 70여대의 상륙용 함정 파괴
- 4개의 무장 열차
- 임무 수행 중 적 전투기 11대 격추
* 그중에는 소련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최고 에이스 레브 셰스타코프(65대 격추)도 포함
그리고 끝으로 무려 2,530회 출격
여기서 놀랄 일은 그가 임무 수행 기간인 1939년~1945년 동안 무려 32회의 격추를 당했는데 느림보 수투카를 몰면서도 한번도 적 전투기에게 격추된 적은 없고, 대공 포화로 인한 격추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32회의 격추 후에는 꿋꿋하게 적진을 헤치고 다시 돌아와서 임무에 복귀했다고 합니다.
1943년 1월 그의 제안으로 수투카에 37mm 기관포 2문을 장착한 후에 당장 그와 그의 편대원들은 기관포로 소련의 상륙정들 격침시키기 시작하는데 당시 무려 70척의 상륙정이 그에게 희생되었다는 기록을 작성합니다. 정작 원래 목적이었던 대전차 공격은 장착 후 2개월 후인 3월에 소련 벨고로드 전투에서 소련군 전차들을 파괴하면서 기관포 장착이 효과가 있음을 스스로 입증하게 됩니다. 특히 그가 공격한 직후에 후방 사수가 그에게 기관포 사격을 당한 전차가 마치 폭탄처럼 폭발하면서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보았다고 전했습니다.
1943년 10월에는 연초에 루델의 제안으로 서둘러 기관포를 장착한 버젼(D형)을 좀 더 개선한 G형을 배치하게 됩니다. 9대의 루델의 편대는 새로운 버전의 수투카를 몰고 공격을 시작하여 첫날 루델은 4대의 소련 전차를 파괴하는 전공을 세웁니다. 특히 T-34의 경우 후방에 엔진과 냉각 시스템이 탑재되어 있다보니 상대적으로 얇은 장갑으로 덥혀있어서 그곳에 사격을 하는 경우 쉽게 전차를 파괴하고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련 전투기 La 5)
1944년 3월말 루델은 소련의 La 5 전투기 편대의 공격을 받게 되었는데 자신의 편대원 중에 한대가 격추되어 불시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격추된 조종사들을 구하기 위해서 그자리에 착륙하였으나 지면 상태가 엉망이어서 다시 이륙할 수 없는 조건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자신과 그의 편대원들은 독일군 진영을 향해서 달려기 시작하였는데 소련군은 그들을 추격하였습니다. 결국 독일군 진영 바로 앞에까지 도착한 사람은 그와 그의 후방 사수 두사람 뿐이었고, 그 앞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엄청난 소련의 추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두사람 모두 강물로 뛰어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강 저편에 독일군 진영까지 무사히 도착한 사람은 루델뿐이었고 결국 후방 사수는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비록 그의 무모한 행동으로 그의 부하들은 전부 죽었지만 그말을 전해들은 다른 그의 편대원들은 그에 대한 신임과 사기가 드높아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에 그는 또다시 임무 수행 중에 기관총 탄환이 바닥을 뚫고 들어와 그의 허벅지를 관통하는 중상을 입습니다. 하지만 그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깁스를 한채로 다시 비행을 나섰습니다. 1945년 1월 제3제국의 몰락이 불과 몇달 앞으로 다가온 싯점에 위에 영어로 써놓은 거창한 긴 이름의 훈장을 히틀러에게 직접 받게 됩니다.
그리고 또 다시 출격을 나간 그는 2월에 프랑크푸르트 상공에서 대공포화에 다리를 잃는 중상을 또 다시 입게 됩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도 무사히 귀환한 후는 의족을 달고 다시 출격을 나갑니다. 얼마 후 히틀러의 자살 후 드디어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을 하게 되었을 때 그는 소3대의 슈투카와 4대의 포케볼프 전투기들을 이끌고 자신들의 현재 위치인 소련군 점령지역 보헤미아에서 2시간 동안 비행하여 미군 점령 지역으로 날아와 착륙한 후에 우선 자기의 슈투카와 부하들의 전투기들 모두를 브레이크롤 잠그고 랜딩 기어를 부러뜨려서 연합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만든 후에 항복합니다. (소련군에게 포로가 되면 죽음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살기 위해서는 미군에게 항복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겠지요.)
(한스 울리히 루델의 자서전 표지, 그는 평생을 금주,금연에 철저한
금욕주의자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
11개월의 전쟁 포로 수용소 생활 후에 석방된 그는 1948년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떠난 후에 1953년에 다시 독일로 돌아와서 비록 다리 하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스포츠를 하고,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하면서 살다가 1982년 66세를 일기로 사망합니다.
그는 분명히 나치 독일의 루프트바페 역사상 최고의 슈투카 에이스이자 엄청난 전쟁 영웅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가 임무를 완수하면서 그와 그의 편대원들이 모는 슈투카들에 의해서 살육된 수많은 군인들과 무고한 주민들의 죽음을 생각하면 그가 몰았던 슈투카는 "저주받은 살인기계"에 불과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허긴 전쟁이라는 것이 결국 모두 있어서는 안될 살육 그이상 그이하도 아니겠다하는 생각을 합니다. 과연 그는 눈을 감으면서 전쟁 중에 자신의 슈투카가 살육한 수많은 생명들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마무리
글이 너무 길어진 듯 합니다만 그냥 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슈투카는 분명히 다른 루프트바페의 전투기들이나 폭격기들과는 구별되어지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대전 초기에 가장 약한 적들에게는 끔찍한 공포와 대량 학살을 안겨준 장본인이고, 자신보다 빠르고 우수한 성능의 연합군 전투기들을 만나게 되면 무력하게 파괴되었던 존재였습니다. 어쩌면 전쟁에 사용된 물건 중에서 가장 추악한 면을 가진 항공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사이렌까지 울려 가면서 섬뜻한 공포를 주곤 했던 이 비겁한 폭격기는 한편으로는 박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체격은 정상적인 폭격기보다 작으면서, 그와 비슷한 체격의 전투기와는 전혀 다른 임무를 하는 이 수투카는 나치 독일의 추악한 모습을 보여준 아이콘들 중에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름이 하필이면 "슈투카"일까요?
Sturz Kampf flugzeug
sturz -> 급락하다
kampf -> 전투
flugzeug -> 비행기
(꽤 도움이 되는 슈투카관련 다큐입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한번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글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이 항복을 한 후에 연합군의 이태리 상륙과 파시스트 독재자 무솔리니의 몰락으로 이어지겠습니다. 드디어 또 한명의 전차전의 영웅 조지 패튼 장군과 셔먼 전차의 활약이 시작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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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우.. 재미있게 잘보고 갑니다. 갑자기 스튜카가 만들어지고 싶네요.ㅎㅎ
감사합니닷!!
원조 악마의 십자가 수투카~ 괴링같은 똘아이가 지휘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인재와 전투력을 가진 루프트바페였습니다..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히틀러와 괴링이 했던 삽질 덕분에 연합군들이 승기를 잡을 수 있었겠지요.
아. 완전 공포스럽습니다. 독일군 비행기 중에 제일 멋지게 생겼다고 생각해요. 아! 멋지게 한번 만들어봐야지! 늘 흥미로운 글 감사합니다!
항상 관심 감사합니다!
아..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생생한 정보를 주시다니... 이번 연재도 감사합니다.
이 기종도 Favorites 중 하나입니다.
도움 된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수투카가 큰 비행기 인줄 알았는데요..
^ ^ !
아이고 슈투카 괜히 팔아버렸네 ㅠㅠ
^ ^ !
제가 중학교 시절에 조립만으로 만들었는데....실적이나 그런것은 몰랐고,갈매기 날개에 커다란 기관포가 마음에 쏙 들어 왔었습니다.(죽음에 십자가~!)
현용 느림보 저공 비행 아음속기 A-10 (단독으로는 위험하고...escort 받으면서 대지 공격 능력으로는...) 과 유사한 점이 많아 보입니다.
준만 형님 글 참 흥미롭고, 재밌어용~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수정한다는 게 기껏 써놓은 글을 삭제해버렸네요..^^
부족한 모델링 스킬을 배우러 왔다가
님께서 올리시는 방대한 배경지식에 흠뻑 빠져버린 1인입니다.
평생 글쟁이로 산 제가 부끄러울 정도의 글솜씨입니다.
감사합니다^^
준만형~~!!! 이거 논문 아닙니까? 수투카 논문...
이런거 무쟈게 자료수집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가히 쓸수없는 글인데... 늘 넋을 잃고 글을 읽다가 정신을 차리곤 한답니다.
덕분에 슈투카를 더 멋지게 만들 의지가 더욱더 샘솟아요!!!
과찬의 말씀이구요.....원래 어느 정도 알던 내용들 인터넷이나 예전에 읽던 책에서 확인만 하고 쓰면 되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