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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론 및 한국미술사 스크랩 동양화의 분류
조홍근 추천 0 조회 19 12.03.22 15: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동양화의 분류

 

 

 

산수화 ■

 

  자연계의 풍경을 수묵 또는 채색을 써서 모필로 그린 그림의 총칭이다. 서양화의 풍경화에 비견되나 이와 달리 자연 광경을 사진과 같이 단순히 옮겨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의경(사의)이란 용어로 표현되듯이 그리는 사람의 뜻 즉 자연관이 동시에 나타나 있어야 한다. 이에 관념산수라는 서양화에서와 다른 개념이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魏晋南北朝時代에 道家의 자연관과 儒家의 山水愛 등을 정신적인 배경으로 해서 산수화가 일어나서 五代末 宋初에 산수화의 대가들이 다수 배출되어 크게 번성하여 이후 이 분야의 그림이 중국회화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특히 송대의 翰林圖畵院의 성립이후 이곳을 중심으로 院體山水畵가 정립되어 北宗山水의 바탕 구실을 해왔다. 이에 상대적인 개념으로 일어난 南宗山水는 元末 四代家 등의 뛰어난 창작활동을 통해서 체계 잡혀지게 되어 화단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明代엔 북종산수를 그리는 浙派그림이 나타나 淸初까지 지속되었고 또한 남종산수는 명 이후 크게 번져 明末엔 吳派樣式의 산수화가 크게 유행하였다.

 

남종산수는 동양화의 산수화에 있어 가장 오랜 전통적인 분류법으로 당대 선종불교가 南北 兩宗으로 나뉘어져 北宗禪은 漸修를, 南宗禪은 頓悟를 그 宗旨로 했는데 이러한 불교사상이 회화정신에도 적용되어 남북종화의 명칭이 생겼다는 설도 있다. 명대에 이르러 동기창·막시룡 등이 남종화의 우위를 강조하여 上南貶北論을 내세움으로써 더욱 명확하게 되었다.

 

남종화는 唐代 왕유를 開祖로 하고 수묵과 옅은 채색으로 피마준(披麻?)을 써서 平遠山水를 위주로 詩書畵를 연결 종합한 그림으로 학덕이 높고 수양이 깊은 선비 등이 비록 묘사기법이 전문적인 직업화가에 뒤질지라도 내면세계를 소박하게 드러내는 높은 화격의 그림을 칭해온 것이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五代의 동원·거연, 北宋의 미불·미우인, 元末 사대가인 황공망·예찬·왕몽·오진 등을 들 수 있고, 명에 이르러 구기창 등이 대성하였다.

 

북종화는 이사훈을 시조러 하여 송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대체로 한림화서원의 명사를 비롯한 직업화가들이 물체의 사실표현에 치중하여 짙은 채색으로 외면적 형사(形似)를 이룩한 그림들로 부벽준(斧劈?)을 써서 산을 올려다보는高遠山水를 많이 그렸다. 강건한 필법이 세미하며 농채를 즐겨 사용해 청록산수와 같은 화풍도 파생되었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당의 이소도, 북송의 곽희, 남송의 마원·하규·유송년·조백구·이당, 명의 대진·주신 등이다.

 

(산수화의) 기법과 구도에 의한 남북의 차이는 무엇인가

남종화와 북종화의 차이는 지리적 구분은 의미가 없다. 선불교에서 북파는 점수(漸修: 점진적 깨달음)를 남쪽은 돈오(頓悟: 자연발생적이고 직관적인 깨달음)에 가까웠는데, 회화의 영역에 이 개념이 적용되어 북종화는 기본적으로 다색물감을 쓰고 여백을 별로 남기지 않았고, 초상화나 화조화를 주로 그려서 궁전을 장식하는 직업적인 궁정화가들의 기법을 대표한다. 남종화는 주로 학인관료들의 양식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여기(이것은 결코 아마추어를 뜻하지는 않는다)로서 그림을 그렸으며 수묵산수화로서 잘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구분은 畵院畵(궁정양식)과 문인화(사대부들의 그림) 화가들의 회화양식에도 적용된다. 물론 이러한 구분들을 엄격하게 적용할 수는 없다. 때에 따라 남종화 양식을 추구한 궁정화가도 있고, 생계를 위해 북종화 양식의 초상화나 화조화를 그려야 했던 문인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화의 전형이 완성된 원대 이후, 즉 명청대에는 절충적인 양식을 추구하는 화가들이 대거 등장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산수화는 고구려의 고분벽화를 통해 그 시원을 살필 수 있으니 6세기 무렵의 무용총안의 수렵도에는 산의 굴곡이 보이며 강서대묘에서는 산악표현에 있어 초보적인 준법(?法)이 나타난다. 비록 회화는 아니지만 백제의 산수문전을 통해 진일보한 산수화적인 공간구성을 살필 수 있고, 통일신라는 현존 자료가 없어 구체적인 양상을 살필 수 없으나 다른 분야의 예술의 발전과 더불어 크게 진보했을 것으로 사료되며, 고려 역시 비슷한 형편이다.

 

조선시대는 왕조 중간에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같은 이민족의 침입에 의해 많은 서화류가 소멸되었으나 그 이전에 비해 발전된 양상을 분명히 살펴볼 수 있다. 도화서(圖畵署)에 속한 畵員으로 대표되는 전문적인 직업화가와 여기로 그림을 즐긴 지식층의 文人畵家로 크게 나뉘어지는데, 화단엔 이 양자의 역할이 상호보완적으로 작용되어 각기 회화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문인화가들은 때로 표현력에서 서툼을 보이기도 했으나 중국으로 새로운 화풍의 수용이나 보급 유행시키는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새로운 화풍을 전개시키는 선두에는 늘 문인화가들이 선구자의 역할을 감행했다.

 

조선시대 회화는 화풍에 의해 시대구분이 가능한데 특히 산수화가 조선회화의 주류로서 그 변화를 분명히 보여준다. 학자들에 따라 前後로 兩分하거나, 前期만을 다시 나눠 3기로, 또는 각 기를 다시 양분하여 4기로 나누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4구분을 따랐다. 화풍에 의한 구분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기의 60년을 제외하곤 대체로 150년을 주기로 화풍의 변화가 초래된다.

 

조선 건국 후 약 150년간인 제1기는 세종대의 문화부흥으로 회화도 크게 번성한 것으로 사료되나 周知되듯이 임진왜란 등으로 인해 전래작이 드문 실정이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는 강희언(1419∼1464)이고 화원으로는 안견 및 이상좌의 활동이 크게 두드러졌다. 몇 안되는 현재작을 통해볼 때 이 시기는 중국의 남·북송 원체화풍(院體畵風)의 짙은 여운을 간직하고 있다. 고려 말 화풍의 지속으로 보여지나 조선회화의 흐름이란 측면에서 살필 때 중국화풍의 일반적인 답습이나 모방이 아닌 조선적인 특징을 이미 지니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제2기의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말에 걸치는 중기회화는 제1기와 사뭇 구별되는 화풍으로 중국 명대 절파화풍(浙派畵風)과 닮은 산수화가 크게 유행한다. 이러한 화풍은 당시 명으로부터 직접 수용된 것으로 보기 힘들며 고려 말 이래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화풍에 명의 화풍이 일부 가미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이미 15세기 중엽 강희언의 「고사관수(高士觀水)」에서 그 始原樣式을 살필 수가 있는데 16세기후반 사대부 화가 김제(1524∼1593)·이경윤(1545∼?)·이징(1581∼?) 및 화원으로서 이흥효(1537∼1593)·이정(1578∼1607) 등에 이어 김명국(1600∼1662이후)이 대성했다.

 

이 시대의 화풍의 특징은 산수임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이 크게 부각되어 산수가 마치 인물을 위한 배경처럼 보이며, 거칠고 짙은 농묵의 필선은 화면상에 강한 흑백 대조를 이룬다. 화면구성에 있어선 다소 산만하고 동적이다.

 

제3기인 후기는 일반역사에서 처럼 회화사에 있어서도 크게 중시되는 시기이다. 15·16세기 명에서 일어난 吳派系列의 남종화법이 조선화단에서 부분적으로 소화되기 시작하였는데 18세기에 이르러 조선적인 화풍으로 정착하게 된다. 특히 심사왕(1707∼1769)같은 사인화가는 당시 큰 유행을 보이는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외면한 채 남송산수에 전념하여 이를 토착·국풍화시키는데 크게 주력케 된다. 당시 산수화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 실제 경치를 소재로 한 진경산수의 대유행을 꼽게 된다.

 

우리 산천을 그림의 소재로 한 것은 이미 고려시대에서도 작품은 전하지 않으나 작품명을 통해서 확인되며, 계회도 등을 통해 점진적인 변천을 엿볼 수 있으나 정환(1676∼1759)에 이르러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진다. 골산(骨山)이 많은 한국산천의 표현에 있어 기존의 화본풍으로는 불가능한 이른바 수직선을 반복하는 독특한 방법을 창안하여 중국산수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한국화의 새로운 그림세계를 이룩하였다. 그의 화풍은 김윤겸(1711∼1775)·강세황(1713∼1791)·정수영(1743∼1831) 등의 士人畵家 외에 김응환(1742∼1789)·김홍도·김석신(1758∼?)·최북 같은 화원에게도 고루 영향을 끼쳐 한 시대를 풍미하여 그 여맥은 근대화단의 小亭·靑田 등에게서도 간주된다.

 

제4기는 1850년 이후 50년 남짓한 시기로 말기인데, 김정희(1786∼1856)가 이룩한 격조높은 文人畵를 추종하는 조희룡(1789∼1866)·전기(1825∼1854)·허련(1809∼1893) 등에 의해 본격적인 남종화가 주류를 이룬다. 화원으로서 출중한 기량을 지닌 장승업(1843∼1897)은 조선말을 장식한 인물이며, 한편 과감한 생략과 과장 등 신감각의 파격적인 소묘와 수채화를 방불케 하는 설채법(說彩法)으로 산수·화훼를 그린 김수철과 같은 화가들에 의한 이색적인 화풍이 화단에서 잠깐 비치기도 했다.

 

이상에서 살핀 조선시대 산수는 중국화의 영향하에 있었으나 이를 충분히 소화흡수하여 단순한 모방이나 아류가 아닌, 중국화와는 엄연히 구별되는 독자적인 민족양식을 이룩하였다.

 

 

■ 진경 산수화 ■

 

  조선후기를 통하여 유행한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그린 산수화이다. 진경 또는 동국진경이라고도 하였으며, 일본에서는 신조선산수화라고도 하였다.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 . 중기에 걸쳐 그려진 실경산수화에 비하여 화단에서 하나의 조류를 형성하며 성행하였을 뿐 아니라 높은 회화성과 함께 한국적인 화풍을 뚜렷하게 창출하며 전개되었다. 이러한 조류의 이념적 성향은 당시 집권층이었던 노론 문인사대부들과 남인 실학파들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실경의 소재는 조선 초기. 중기와 마찬가지로 명승명소. 별서유거. 야외아집류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금강산과 관동지방, 서울근교 일대의 경관이 가장 많이 다루어졌다.

 

화풍은 종래의 실경산수화 전통에 18세기에 이르러 새롭게 유행하기 시작한 남종화법을 가미하여 형성되었으며, 정선에 의하여 개척되었다. 정선은 산천의 특색을 남종화법을 토대로 표현하여 진경산수화풍의 정형을 수립하였다. 그의 진경화풍은 기존 화법과 남종화법을 우리 산천의 형상에 어울리는 필법으로 소화해낸 것으로, 실경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회화적 재구성을 통하여 경관에서 받은 가흥과 정취를 감동적으로 구현했다는 데 그 특색이 있다. 그리고 양식적으로는 부감법의 시각에 동적이 대각선이나 사선을 활용한 화면구성법을 비롯하여 습윤한 피마준법과 듬성한 태점, 괴량감 넘치는 짙은 적묵의 바위와 능란한 편필직필의 스케치풍 소나무 묘사법 등을 특징으로 구사하였다.

 

정선의 이러한 화풍은 강희언. 김윤겸 정황. 김유성. 최북. 정충엽. 장시흥. 김응환. 김석신. 김득신. 거연당. 신학권 등, 주로 중인층 문인화가들과 화원들에게 파급되어 정선파라는 유파를 형성하면서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풍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통신사절단을 따라 도일하였던 최북과 김유성을 통하여 일본 에도시대 남화가들인 이케, 우라카미 등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으며, 민화의 금강산도와 관동팔경도의 양식적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중. 후반을 풍미하였던 정선파의 화풍은 화원들에 의하여 형식화의 경향을 나타내면서 18세기 말엽에 이르러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였던 강세황은 정선의 화풍과 형식화된 영조시대 진경산수화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실제 경관과 부합되는 사실적인 기법을 강조했다. <송도기행명승도첩>을 통하여 서양화법을 수용하면서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화풍을 구현하였던 강세황의 이러한 경향은 김홍도에 의하여 구도와 필법이 더욱 치밀하고 박진감 넘치는 화풍으로 발전되었다.

 

김홍도의 이와같은 사실적인 화풍은 조선후기 진경산수화의 새로운 양식으로 18세기말에서 19세기 전반의 화단에서 이인문. 조정규. 임득명. 이유신. 엄치욱. 이재관. 유숙 등의 화원들에게로 이어지면서 계승되었다.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풍은 정선파와 김홍도파 이외에도 심사정. 이인상. 허필. 정수영. 윤제홍. 정철조 등의 문인화가들도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였다.

 

진경산수화는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정치권의 보수화 추세의 의해 김정희를 중심으로 사의적인 문인화풍이 득세함에 따라 쇠퇴하게 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서 1970년대에 걸쳐 특정경관이 아닌 생활주변의 일상적인 풍경을 그리는 사경산수화로 그 전통이 계승되어 양식보다 정신적 배경으로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표작으로는 정선의 <경외명승첩>,<금강전도>,<인왕제색도>를 비롯하여, 강희언의 <인왕산도>, 김윤겸의 <영남명승첩>, 김응환의 <금강산화첩>, 김석신의 <도봉산도>, 심사정의 <경구팔경도>, 이인상의 <구룡연도>, 정수영의 <한림강명승도권>, 강세황의 <송도기행명승도첩>, 김홍도의 <사군첩>, 이인문의 <단발령금강전도>, 임득명의 <서행일천리장권>, 조정규의 <금강산병풍> 등이 있다.

 

 

■ 인 물 화 ■

 

  인물화는 조화된 자연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옮겨 인간과 자연이 좀더 친숙해지기를 바라면서 그린 그림으로 방안 장식으로 사용했다. 인물화는 사람을 주제로 한 그림으로 서양화에선 대체로 종교인물화·역사인물화·풍속인물화·초상화 등으로 분류되는데 동양화에선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사녀화(仕女畵)·초상화(肖像畵)로 크게 3구분된다.

 

인물화 속에는 으레 신선이 나오고 예쁘고 귀여운 동자가 꽃이나 나무 아래서 갖가지 놀이를 펼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어린이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으며 전설 속의 인물이나 위인, 장군, 소설이나 고사 설화의 주인공을 상상해서 그린 작품, 초상화나 자화상도 있다. 이 외에 전쟁 및 사냥그림, 풍속도, 계회도, 우옥도, 행열도를 비롯한 여러 가지 민화에도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인물화 중에서도 백동자도나 신선도는 비교적 숙달된 기법과 안정된 색채로 그린 것이 많다.

 

백동자도는 제목 그대로 백 명의 동자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많은 아이들, 특히 사내아이들을 그렸으며 이로써 아들에 대한 염원을 추구하기도 하고 태어나고 자라날 아이들이 건강하고 착하고 올바른 사람으로 되기를 기원했다. 대체로 젊은 부녀자의 방이나 아이들이 노는 방의 장식화로 사용되었다. 백동자도의 화면에 있는 어린이들은 놀이에 열중해 있는 천진난만하고 순박한 동자들의 모습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고 그림 전체를 화려한 진채로 그려 격조와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신선과 동자가 함께 등장하는 그림을 신동도라고 한다. 동자 그 자체를 신성시하고 자수와 부귀의 상징으로 여기는 관념에서 비롯된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동자는 순진무구하고 티없는 순박함으로 인해 곧잘 선으로 상징되며, 신동도의 동자는 천상의 세계에서 학을 타고 내려오는 모습, 생황을 불면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여 환희의 기쁨을 알리는 모습, 장수의 상징인 불로초를 등에 진 모습, 신선을 안내하는 모습, 신선에게 공양물을 바치는 모습, 차를 달이는 모습을 하고 있다.

 

다른 분야보다도 먼저 발생한 인물화는 중국에 있어 漢이래로 제왕이나 공신·고승 등의 초상화와 신선·불·보살 등 도석인물화와 미녀·궁인 등을 그린 사녀도가 당대에 이르러 크게 성행되었다. 이들 인물화는 학자들에 의하여 몇 가지 분류로 나누어진다. 우아하고 고귀하며 신비롭게 그린 고개지·염립본·진홍완 등의 그림과, 색을 드물게 사용하고 빠르고 힘찬 붓으로 그린 오도자·양해·오위 등과 궁정인물들을 호화롭게 그린 장훤·주방 등으로 구분된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인물화는 삼국시대부터 성행하며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주인공의 초상을 비롯한 불교전래로 사찰벽면에 장식적인 그림의 인물화를 포함한 다량의 불화와 조사상이 그려져 인물화에 있어 큰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변상도나 일본에 유존되는 고려불화를 통해 그 양상을 대략을 엿볼 수 있다.

 

실존인물을 대상으로 실제와 곡같이 표현해야 되는 초상은 우선 고도의 묘사력이 요구된다. 외형 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인품 수양정도·학덕 등 정신적인 면까지 나타내야 하는 동양의 독특한 畵論을 바탕으로 한 조선시대 초상은 감상이나 여기로 그린 그림들과 크게 다르며 서양의 초상들과도 이점이 다르다. 화가자신이 다른 분야보다도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했고 임금의 초상 즉 어진(御眞)제작에 참가함은 화원이 큰 명예가 되었으며, 이로서 중인신분으로선 특례의 벼슬을 얻기도 했다. 고려이전에도 초상은 적지 않게 그려졌지만 전래품이 희귀하다 유교국가인 조선에 있어 궁중의 어진 외에 名賢·先朝들에 대한 공경에서 사당(祠堂)이나 서원(書院) 등에 봉안키 위한 초상들이 크게 요구되었다. 조선조 초상화는 신분이나 그 유형에 의해 御眞·功臣圖像·耆老圖像·一般士大夫像·女人像·僧像 등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문헌을 통해 어진제작에 참여한 화가가 60명에 가까이됨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현존례는 이모본(移摹本)을 포함하여 몇 되지 않는다. 국가에 공신이 발샐되었을 때 제작한 공신상과 평복차림의 사대부상이 디수 전래되며, 여인상 역시 그 예가 적다. 화원 외에 초상을 제작한 사대부가도 여럿 알려졌으니 자화상을 남긴 강세황·윤두서 외에 허의(1601∼?)·김창업(1658∼1721)·이광재(1674∼1740)·임희수(18세기 전반) 등이 초상을 그렸다.

 

조선회화중에서 현존하는 작품수나 그 수준에 있어서 초상화가 점하는 위치는 자못 높아 타분야에 못지 않은 개성과 특징을 보이는 秀作이 많다. 보다 실물에 가깝게 나타내려는 노력은 설채에 있어서도 불화에서도 사용되는 기법으로 화면 뒤쪽에서 칠해 앞으로 배어나오게 하는 복채법을 쓰기도 했다. 공신상의 경우 정장에 관모를 갖춘 형태로 의자상(椅子像)이 일반적이며 얼굴은 다소 우측을 향해 왼쪽 귀가 드러난 좌안면(左顔面)이 주류를 이뤄 중국이나 시대가 올라가는 고려말 초상과 구별되는 한 특징이기도 하다. 사대부상은 평복차림이 많은데 그림에 따라서는 얼굴표현의 섬세함과는 달리 의습 처리는 몇 개의 필선으로 간략히 나타낸 듯한 그림도 없지 않다.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격조 높고 우수한 작품들이 꽤 많다. 매우 정교하고 세밀하게 표현되어, 특히 안면부의 이목구비는 물론 주름과 점, 수염 한올한올까지도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어떤 경우는 천연두 자국으로 얽은 모습, 피부염이라도 앓은 듯한 상흔이나 검버섯, 딸기코까지 그리기도 한다. 생전의 실물묘사를 사진 혹은 진영이라 하고 사후의 것은 전신도라고 부른다.

 

 

■ 풍 속 화 ■

 

  풍속화는 사회 각층의 생활상을 주제로 한 그림의 총칭이다. 士·農·工·商 등 실생활 모습을 그리다 보니 사실적인 표현과 함께 후대 감상자로 하여금 그 시대를 시각적으로 나타내 보여주어 史料的인 가치도 크다. 문헌자료가 발달하지 못한 사회분위기·생활감정 등을 뚜렷히 알려 준다.

 

풍속화의 주인공도 인물이지만 초상화처럼 특정한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풍속화의 주제는 자연과 사회를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다양한 인간사를 표현한 것과 일상적인 모습을 그린 것의 두 가지로 대별된다. 먼저 넓은 의미의 풍속화는 인간의 여러 가지 행사나 일상생활을 표현한 그림이다. 즉 왕실이나 조정의 각종 행사를 비롯하여 다양한 계층의 관혼상제와 세시풍속 같은 것들을 묘사한 그림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와 달리 좁은 의미의 풍속화는 서민들의 잡다한 생활모습, 양반들의 유한, 농사풍경 따위를 다룬 것이다.

 

서양화에서도 16세기 이후 북유럽을 중심으로 종교적인 주제가 퇴색되고 전원생활·환전상·놀음판·무도회 등 일상생활을 그린 그림들이 나타났다. 이른바 Genre Painting으로 지칭되는 삶의 현장의 이모저모를 그린 일련의 생활그림들은 홀란드를 모태로 해서 탄생되었던 것이다.

 

풍속화는 인물화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상당히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한 대의 고분벽화와 당대의 궁중여인도가 발달한데 이어 송나라 때부터 서민의 생활을 다룬 그림이 대두되었다.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에 도시 상업문화의 발달과 함께 우끼요에의 형태로 풍속화가 유행하였다.

 

중국에 있어선 宋代에 이르러 대표적인 이 분야 그림들이 나타났는데, 경제적인 부와 사회의 번영을 배경으로 장택단(12세기)이 그린「청명상하도, 淸明上河圖」는 당시 변경성내( 京成內)의 활발하고 분주한 생활상이 잘 나타나 있다. 시대를 소급해 東晋의 고개지가 그린 「여사잠도권 ,女史箴圖卷」, 7세기 염립본의 「職貢圖」, 8세기 주방의「만사직공도, 蠻事職貢圖」, 12∼13세기 양해가 그린 「준업도 ,蠢業圖」, 이당의 「구애도 ,灸艾圖」, 왕문의 「자다도, 煮茶圖」와 淸代의 사수의 「職貢圖」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씨름·수렵·마구간·공양도 등 고구려인의 생활모습을 살필 수 있는데 대표적인 고분으로 중국 길림성 소재의 무용총과 각저총, 평남용강군에 있는 쌍영총 등이다.

 

조선 이전의 풍속화로 대표적인 것은 고구려 고분벽화로, 50여 기의 고분 중에서 4세기에서 6세기에 제작된 초기와 중기의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 시기의 고분들은 다실묘였기 때문에 벽화를 그릴 공간이 충분했고 다양한 내용을 담을 수 있었다. 이들 벽화의 내용에는 행렬도, 수렵도, 무용도와 같은 각종 행사를 그린 그림들과 부엌, 방앗간, 푸줏간, 마구간 등 당시 생활과 직결된 내용들이 묘사되어 있다. 대표적인 고분으로는 무용총, 쌍영총, 각저총 등이 있다. 고려 시대에는 고려 불화 아래쪽에 경작과 추수하는 그림 등에서 단편적인 예를 살필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여러 기록화들에 풍속적인 요소가 많이 그려졌였다. 한국적인 풍속화가 절정을 이룬 시기는 조선 후기로 당시 실학사상이 발달하면서 민족의 자의식을 고취하였기 때문이다. 즉 산수화 분야에서 한국적인 산수화라고 할 수 있는 진경산수가 발달하였듯이 인물화 분야에서는 풍속화가 대단히 유행하였다. 무엇보다 이 시대 풍속화의 백미는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묘사한 그림들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서민층의 대두와 함께 「속화, 俗話」로 지칭되는 風俗畵가 화단에서 크게 유행되었다. 이 분야에 있어 선구적인 화가들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전문적인 직업화가들이 아니라 문인화가들이다. 산수를 배경으로 한 일종의 기념적인 그림인 계회도에서 자게 등장하긴 하지만 의습에 있어 화본풍의 인물과 크게 다른 인물을 일찍이 살필 수가 있다. 정선에 이르러 實景山水에 있어 비로서 韓服을 입은 분명한 조선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실경산수의 유행과 동일시기에 풍속화도 크게 유행한다. 속화의 태동을 윤두서(1668∼1715) 및 조영우(1686∼1761)과 같은 사인화가들에 의해서 선구를 보였음을 현존작품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점차 일반인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동시대 일급화가등 대다수의 화가들이 두루 참여하여 크게 풍미하게 된다. 화원 등 전문화가에 비해 작품수는 적으나 사인화가들도 이 분야 그림들을 남기고 있다. 대표적인 화가로 김홍도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25폭 『풍속화첩』을 위시해 다수의 풍속화를 남겼는데 평민의 생활을 특유의 해학으로 묘사하였다.

 

등장인물의 개성이 선명하고 각기 생활현장에 전념하는 모습들로 사대부에서 상인에 이르기 까지 향토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그림자들이다. 신윤복은 간송미술관 소장의 30폭 『혜원전신첩』외에 다수의 그림이 유존하는데 한량·기녀·승려 등 다양한 주제의 등장인물을 통해 한국인의 풍류와 멋을 잘 나타냈으며그 당대로는 파격적인 女俗 등 대담하게 묘사하였고 특히 조선여인의 미를 그리는데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이 외에 김양기의 「투전도 ,投錢圖」, 김득신의 「破寂圖」·「歸市圖」, 김석신의 「仙遊圖」, 강희언의「士人三景圖」·「石工圖」, 백은배의「舟中戱女圖」·「對碁圖」, 유숙의 「大快圖」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속화는 18세기를 절정으로 해서 조선말기에 접어들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였다.

 

속화 외에 선비들의 계회도(契會圖)나 유교국가의 입신양명의 이상적인 일평생을 그린 「平生圖」나 궁중의 제반 행사를 그린 「진찬의궤도, 珍饌儀軌圖」·「行列圖」 通臣使관계 그림들도 이 분야에 속하는 그림들이다.

 

윤두서, 조영석에 의해 발달하기 시작한 조선 후기의 풍속화에서 쌍벽을 이루는 작가는 김홍도와 신윤복이다. 우선 김홍도는 주로 서민을 대상으로 하여 원형이나 X자형 구도를 이용한 짜임새 있는 포치와 강하고 생명력 있는 필치로 인물을 묘사하여 이후 김득신 및 민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신윤복은 주로 한량과 기생들의 로맨스를 소재로 하였으며 산수를 배경으로 부드러운 필선과 세련된 색채를 구사하여 에로틱한 장면을 표현하였다. 이렇게 일반인들에게 폭넓게 사랑을 받았던 풍속화의 전통은 조선 말기에 접어들어 김정희를 중심으로 하는 남종문인화의 성행으로 급격히 쇠퇴하고 만다.

 

 

■ 축 수 도 ■

 

  축수도란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동물들을 소재로 한 그림을 말한다. <동국세시기>에 보면 우리 나라 매년 정초가 되면 해태, 닭, 개, 호랑이를 그려 부엌문, 중문, 곳간문, 대문에 붙이는 풍속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둑을 막는 그림인 신구도에서 개는 용맹스럽고 다소 과장된 모습을 하고 있다.

 

전통미술의 소재로 등장하는 동물들은 그 종류가 실로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물은 호랑이이다. 호랑이는 단군신화에도 나올 정도로 우리 민족과는 밀접한 관련을 갖는 짐승으로 <삼국유사>를 비롯한 많은 문헌들에서 사납고 무섭게 묘사되기도 하고 혹은 은혜를 갚는 보은의 동물로도 묘사되기도 했다.

 

호랑이 이외에 축수도의 소재가 될 수 있는 동물들로는 사슴과 개, 토끼 등이 있다. 사슴 그림은 그 독음 때문에 복록을 의미한다. 사슴 그림에는 사슴이 한 마리나 두 마리, 혹은 떼지어 노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사슴의 마리 수에 따라 쌍록도와 백록도라 불린다. 사슴을 한 마리만 그릴 때는 보통 흰사슴을 그려놓고 백록도라고 하는데 백마리가 그려졌다는 백록도나 군록도와 같은 뜻을 지닌 그림이다. 사슴은 불행과 질병을 막아주는 주력이 있고 복록을 의미하는 동물로 보았기에, 백록도는 백마리나 되는 사슴이 온갖 복록을 가져다주는 길상화가 되는 것이다. 쌍록도는 암수 한 쌍의 사슴이 소나무나 단풍나무를 배경으로 정답게 불로초를 입에 물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부부상화의 의미가 한층 강조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사슴은 신선들이 타고 다니는 영물로 여겨져 민화의 신선도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사슴은 그 뿔이 봄에 돋아나 자라서 굳었다가 떨어지고 이듬해 봄에 다시 돋아나길 거듭하기에 장수, 재생, 영생을 상징하는 십장생의 하나로서 그 그림을 벽에 붙이기도 하고 베개에 수놓아 베고 자고, 주머니에도 수놓아 차고 다녔다. 또 하늘을 향해 뻗어 오르는 녹각이 신의 뜻을 감지하는 신성매체라하여 무당이나 족장 또는 임금의 머리장식에도 쓰였다. 사슴이 천년을 살면 청록이 되고 청록이 다시 500년을 더 살면 백록이 된다고 한다.

 

민화 속의 토끼는 귀엽고 연약한 모습으로 묘사되는 수가 많다. 호랑이의 담배 심부름꾼으로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올 정도로 익살스럽게 그린 것도 있다. 화조도에서는 꽃을 배경으로 하여 암수 한 쌍이 조연으로 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호랑이와 다정스럽게 숲 속을 거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또 달에 있는 계수나무 아래에서 절구질을 하는 모습을 그리기도 한다. 달나라의 계수나무는 높이 300장에 이르는 엄청나게 큰 나무인데, 계수나무 아래에 사는 한 쌍의 토끼를 옥토라 한다. 훤한 달밤에 두 마리의 토끼가 절구방아를 찧는 그림은 밤새도록 불사약을 절구질하는 옥토의 모습에서 유래된 것이다.

 

 

■ 판  화 ■

 

  우리의 판화 역사는 매우 오래다. 경주 불국사 석탑에서 나온 유물 가운데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신라 경덕왕 10년에 목판으로 찍은 것이어서 중국이나 일본의 것보다 연대적으로 앞서고 있다. 751년 이전에 제작되었는데 이때부터 목판의 판각은 자리가 잡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판화로는 고려 초기의 「어제비장전」이 있다. 983년 완성된 20권본과 996년에 완성된 30권본이 있으며, 불도의 깊은 뜻을 내용으로 한 본문과 보리 도량을 그린 판화로 그 묘사 기법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그 비슷한 연대인 1007년 고려 목종 10년에 발간된 총지사 「보협인다라니경」의 판화도 고려 초기의 발달된 판화 기법을 보여주는 유물로 현재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길이 10cm, 폭 5.4cm의 삽화로서 정교하면서도 단순하게 표현되었으며 「보협인다라니경」의 내용을 압축시켜 놓은 것이다. 이렇듯 고려 시대의 판화는 대개 사찰에서 스님들에 의해 제작되었는데 그 기법이 화려하면서도 장엄하고 판각이 섬세, 정교하여 중국보다도 발달된 목판본의 삽화를 보여주고 있다. 고려 고종 21년에는 목판 인쇄의 단점을 보완해서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새로운 인쇄 방법이 제시되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판화로는 「삼강행실도」, 「이륜행실도」, 「부모은중경도」 등이 있는데 이것은 인물, 풍속, 예악, 유학, 불화, 미술, 무예, 천문, 지리에 관한 것들을 도식화하여 삽화로 엮어 윤리 교과서의 내용을 설명하는 데에 사용하였다. 특히 동판으로 된 「부모은중경도」는 조선 후기의 것으로 경기도 화성군 용주사에 보관되어 있는데 글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그림을 그려 찍어낸 동판화이다. 조선중기에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서적간행이 어려웠다. 때문에 고려 시대의 것보다 화려하고 정교하지는 않으나 대담하고 단순하게 처리된 공간의 화면을 볼 수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발전된 일상생활에서의 필요성과 미적가치를 높인 민속적인 내용의 민화와 부적 그리고 능화판 등에 이용되었다.

 

능화판에 사용된 판목은 거제도, 울릉도 등 섬에서 나온 '거제수'나 배나무, 감나무 등을 베어 수년간 시궁창이나 바닷물에 담그고 또 소금물에 쪄서 진을 뺀 다음 비바람에 3년여를 바래기한 연후에 사용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판목에 글이나 문양을 새기고 옻칠을 입혀 놓은 것은 오늘날까지도 좀이 슬지 않고 단단하게 보존되어 있다.

 

고려 시대에 제작되어 해인사에 보관중인 「팔만대장경」의 조판방법도 이와 같이 제작된 것이다. 우리 나라 옛판화의 특색은 다색판화가 거의 보이지 않고 주로 검정색과 붉은 색으로 찍은 것들이 보인다는 점이다.

 

우리 나라 판화는 조선말에 이르기까지 발전을 거듭하였는데 개화후 활판술이 들어오면서부터 갑자기 쇠퇴의 양상을 보였다. 해방 이후의 혼란기와 6.25사변 등 국란을 겪으면서 서구문명이 밀려오고 우리 미술계도 중요한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한국의 현대 판화는 1950년에서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몇몇 작가들의 헌신적 노력에 의해 미술분야의 한 장르로 자리잡혀가면서 1958년에 '한국판화가협회'가 결성된다. 창립회원은 박성삼, 박수근, 변종하, 유강열, 이항성, 최영림, 장리석, 정규, 임직순, 김정자, 전상범 등이었다. 1963년에는 미술대학에서 판화수업이 시작되었고, 1968년에 '한국현대판화가협회'가 창립되었다. 이때의 창립회원으로는 유강열, 이상욱, 김상유, 김정자, 강환섭, 배륭, 윤명로, 김종학, 서승원 등이 있다. 이 모임이 오늘날 국제 판화전과 공모전을 여는 명실상부한 모임으로 자라나기까지 회원들의 많은 노력이 있었다.

 

 

■ 화 조 화 ■

 

  꽃, 새, 들풀, 풀벌레, 애완동물 등을 소재로 한 그림을 지칭하는 화조도는 화훼, 초충, 영모, 절지, 동물화 등을 포함한 넓은 의미로 오늘날 사용되고 있다.

 

부려공교(풍성하고 화려하면서 치밀하고 교묘한 것)한 화조화의 특색을 몇 가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연과 생물을 주도하고 정치한 관찰에 의하여 그렸으며, 색과 선도 주도하고 정치하였다. 둘째, 구성상의 역감에 따라서 색과 선도 역감에 넘쳤다. 셋째, 화면정위의 모양에서 특색이 뚜렷하다. 즉, 그림이 정세연려하면서도 침착하였다. 화조화에서는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새 한 마리, 벌레 한 마리까지 모두 유현한 뜻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즉, 일화일조를 통하여 삼라만상을 관조하는 것이 화조화의 예술세계라 하겠다.

 

화조화는 삼국 이래 꾸준히 발전하여 왔는데, 화단 전체 조류에 따라 서체와 황체가 교대로 성행하였다. 욕교반졸(교묘하게 하고자 하면 오히려 졸렬하게 됨)이라는 사상이 철저하였던 한국인의 회화관 탓인지 세기와 농채는 보기 드물고 조금은 거칠면서도 자연스럽고 생명력이 넘치는 맛을 주는 것이 우리 나라 화조화의 특징이다.

 

동양화, 특히 동양화 가운데에서도 화조화를 그릴 때 돌과 꽃과 새를 함께 그리는 것은 만고불변의 고담한 돌을 통하여 냉정하고 숙연한 아름다움과 생기발랄한 청기를 함께 표현하고자 함에서이다. 따라서, 화조화는 그 위치와 모습이 모두 골법적인 것을 선택하여야 하며, 그 주위의 자연에 둘러싸여 있지 않으면 안된다. 즉, 꽃이면 꽃, 새면 새 하나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어우러지고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에서의 꽃이고 새인 것이다. 그래서 화조화에는 동양인의 장수, 복록, 우수, 궁합, 범신 등 각종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다.

 

중국에서는 위진남북조시대에 시작되어 당말에서 북송대에 이르는 동안 성행되었다. 대표적인 화가를 열거하면 오대의 서희·황전, 북송의 서숭사·황거심, 원의 전무거, 명의 변문진·궁기, 청의 황신·운수평·양주팔괴 등이 있다.

 

송의 이홍린은 마도에서 원의 조맹부는 화조에서 채색의 사용없이 붓을 빨리 움직이면서 고른 선만으로 그리는 백묘법으로 그렸고, 서숭사는 선량의 효과로 필선을 숨기며 형태를 나타낸 몰골법의 화조도를 창시했다. 황전은 가늘고 고른 선으로 물체의 윤곽을 그리고 색을 칠하는 구륵법으로 그렸다.

 

고려이전은 전래된 작품이 없어서 구체적인 상황을 알기 힘드나, 고려말에 이르면 말이나 매그림 등 한가지 소재만으로 명성을 얻은 사인화가들을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간접자료로 도자기의 문양이나 송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이미 고려시대에 이 분야그림들은 크게 번성했으리라 여겨진다. 현존하는 조선중기 이후의 작품을 통해 산수화나 풍속화에 뒤지지 않는 한국적인 정취가 짙은 수작임을 알 수 있다.

 

화조도는 일반적으로 꽃과 새를 함께 그리는데 때로는 조그만한 편화로 새가 중시되는 경우, 꽃이 중시되는 화훼, 여러 종류의 꽃과 새를 함께 나타낸 장식적인 그림, 어해도의 상단이나 하단에 그린 꽃 등은 다양한 구성을 보인다. 조선후기에는 신명행이나 김수철같이 다양한 꽃그림을 많이 남긴 인물들도 있다.

 

이 분야 그림에 있어그 소재를 살펴보면 먼저 새그림에는 까치가 줄기차게 그려졌고 매, 독수리, 학, 꿩, 원앙새, 닭, 물오리를 포함은 물새들, 딱따구리, 메추리, 백로 등이 있다. 동물에 있어서는 개, 고양이, 양, 염소, 말, 호랑이, 용들이 있으며 이밖에 초충도에는 도마뱀, 풀벌레, 벌, 나비들을 찾아볼수 있다. 드문 소재이긴 하지만 원숭이나 쥐도 그려졌다.

 

이들 그림을 소재별로 살펴보면, 새그림은 15세기 유자미나 이종준의 傳稱作品을 통해 고려자기의 문양으로 크게 성했던 鶴을 살필 수 있다. 松鶴은 瑞祥的인 성격으로 후대 민화에 이르기까지 계속 그려졌다. 16세기에는 김정·신사임당·신세림·이경윤·영윤 여제 드을 열거할 수 있다. 새그림 소재중 까치는 비교적 여러 화가들에 의한 작품들이 전래된다. 중국에서도 喜鳥로 일찍부터 그려졌다. 조속의 「朝鵲圖」 외에 그의 아들 조지운을 비롯해 이함·조영우·심사정·홍세변 등의 사인화가들과 김홍도 등 다수의 畵員들도 까치그림을 남기고 있다. 매와 독수리는 특히 정홍래가 잘 아려져 있고 장승업도 수작을 남기고 있다. 이준(李濬)과 심사정의 딱따구리 그림이 있고, 이밖에 닭은 변상벽과 정선·신윤복 등의 그림이 전해진다.

 

소와 말은 일찍부터 그려진 소재로 특히 말의 경우 중국에서 당이래로 馬畵로 이름을 얻은 화가들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뿐만 아니라 신라의 천마도 등 삼국시대의 畵跡이 유존되고 있어 오랜 역사를 알 수 있다. 조선조에는 윤두서와 윤덕희 부자가 훌륭한 그림을 남기고 있다. 소그림 역시 인류가 남긴 가장 오래된 그림이기도 하지만 동양에 있어서는 농사와도 떼어 놓을 수 없는 동물이다.

 

그림에 있어서는 단순히 소만을 소재로 한 경우 외에 도석인물화나 풍속화에도 나타난다. 김제와 김식이 소그림으로서 유명하며 김두량도 목우도의 일품을 남기고 있다.

 

조선후기에는 김홍도의 풍속화나 신선도에서 자주 등장한다.

 

일찍이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살필 수 있는 犬圖는 조선시대에도 줄기차게 그려졌다. 宗室출신 이암(1499∼?)은 「母犬圖」를 위시해 개와 고양이를 소재로 한 몇 폭의 그림을 남기고 있다. 뒷 배경으로 성근 나무를 포치시키고 그 아래 개를 그리는 구도는 隨代의 그림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경윤(1545∼?)의 「긁는개」는 특히 김두량(1696∼1763)의 「黑狗圖」와 관련이 있다. 소폭의 화면에 섬세한 필치로 터럭 하나에 이르기까지 잘 나타낸 「흑구도」는 또한 서양화법과의 강한 연결을 시사한다. 수법에 있어서는 차이가 크나 구도나 개의 자세는 이경연의 그림과 공통점이 크다. 김두량은 이외에도 몇 폭의 개그림을 남기고 있는바 이 분야에서 자못 접하는 위치가 크다. 1795년 연기가 있는 이희영의 「견도」 및 한때 김홍도의 그림으로 전칭되던 「猛犬圖」 등은 모두 수작이며 이밖에 김홍도나 신윤복의 그림들도 전래되고 있다.

 

虎圖는 민화에 있어 까치호랑이가 잘 알려져 후기의 민화가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생각되기 쉬우나 사실은 어엿한 화가들의 그림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매년 避邪의 의미로 그려진 세화(歲畵)이며, 이 그림의 시원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냥장면이나 사신도의 백호도에서도 다소 변형된 형태이나 살필 수 있다. 이상좌傳稱作인 「우중맹호도」는 원초의 선승화가 법상의 호도와 연관이 보여진다. 고운(1495∼?)은 대소 두 폭의 호도를 남기고 있어 보기 드문 16세기 호랑이 그림의 면모를 보여준다. 18세기에는 정홍래(1720∼?)사 산수외에 매와 호랑이 그림에도 뛰어났다. 홍호도 호랑이를 잘 그린 인물로 전해진다.

 

강세황과 김홍도의 합작 호도가 있으며 김득신·이의량(1768∼?)과 유숙(1827∼1873)도 이 분야의 그림을 남기고 있다.

 

고양이 역시 생소하지 않은 영모화(翎毛畵)의 소재이다. 중국에서 宋 이래로 애완동물로 깜직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때로는 고양이와 노니는 어린이를 함께 그리기도 했다. 이에 대해 변고양이란 별명을 얻을 만큼 고양이의 그림의 대명사가 된 조선시대 숙종대의 변상벽은 생동감이 넘치는 사실적인 고양이 그림들을 남기고 있다. 고양이의 생리와 특징이 능숙한 필치로 잘 나타낸 그의 그림들은 단순히 畵本을 통해 익힌 것이 아니라 실물 뎃상을 통해 이룩한 묘사기법으로 생각된다. 심사정의 파초아래 오똑 앉아있는 모습의 고양이는 명대 대진(1388∼1462)의 그림에서 찾을 수 있어 그 연원을 짐작할 수 있고, 정선도 국화와 함께 그린 것이 있으며 이외에 신윤복이나 남계 우·장승업 등의 그림들과 김정희의 수묵으로 배경없이 그린 고양이 그림도 알려져 있다.

 

나비그림은 남계우(1811∼1888)가 「남나비」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나 일찍이 신사임당 그림을 위시한 草蟲圖중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18세기 이명기도 공개된 작품은 없으나 문헌에 의하면 彩蝶에 능했고 이밖에 이교익(1807∼?)·조희룡·서병건(1850∼?)등이 이 소재의 그림으로 이름을 남긴 화가들이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중기이후의 그림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 분야에 있어서도 진경산수나 풍속화 등에서 분명히 보았던 한국화적인 정취가 짙은 수작이 많다.

 

 

■ 화 훼 화 ■

 

  꽃과 풀을 소재로 하여 그린 그림이다. 꽃과 풀을 새, 그릇, 채소,벌레 등과 함께 그림에 따라 화조화, 화훼초충화, 기명화, 절지화, 기명절지화, 채화, 소과화 등으로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초기에 화훼화가 기록에 보이지만, 신라시대에도 궁정 뜰에 아름다운 꽃과 풀을 가꾸고 새를 길렀다는 《삼국유사》 등의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장식용의 화훼화가 그려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당나라 태종이 신라 선덕여왕에게 보낸 모란꽃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보아, 우리 나라의 화훼화의 기원은 7세기부터 볼 수 있다.

 

우리 나라의 화훼화는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고 섬세하지 않고, 소박하고 은근하여 우리 나라 회화가 지니고 있는 일반적인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중국의 화훼화에는 연꽃 . 모란꽃 . 난초꽃 . 수선화 . 등꽃 . 매화 . 국화 . 석류 . 비파 . 해당화 . 수국 등이 많이 그려지고 있으나, 우리 나라의 화훼화에는 이밖에 부용꽃 . 치자꽃 . 양귀비꽃 . 자양화 . 진달래 . 벚꽃 . 패랭이꽃 . 맨드라미꽃 . 초롱꽃 . 부들 . 명아주 . 분꽃 . 봉선화 . 제비꽃 . 장다리꽃 . 민들레 . 씀바귀 등도 그려지고 있다. 즉, 야생화를 담채로써 몰골화법으로 그렸다.

 

삼국시대에의 화훼화는 주로 고분벽화에서 주로 볼 수 있으며, 《삼국유사》의 선덕여왕에 관한 기록에 의해서 신라의 궁정작화기관인 채전에서 장식화로서 화훼화를 그렸을 것이라 생각된다. 고려 시대에는 화원에 화원을 두고 인물화 . 불교화 . 산수화 . 경적화 . 사생화 등을 그렸는데, 사생화에 화훼화가 포함되었다. 조선시대의 화훼화는 훨씬 활발하게 그려졌다. 그러나 한국적인 화훼화가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이후로, 그 전에는 중국 화훼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화훼화는 꽃과 풀을 사실적으로 충실히, 그리고 아름답게 그려야 한다는 당위성으로부터 출발하였기 때문에 사의화할 수 없었다. 이러한 회화사상과 화법은 시간을 거듭할수록 딱딱하게 굳어지고 정형화되어 새로운 세계로의 진로를 가로막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의 화훼화가 시종여일하게 시대정신을 외면하고 옛화법만 따랐던 것도 새로운 실험정신을 거부하였던 반지성적인 풍토와 안일하게 전통에만 매달렸던 작가들의 제작태도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우리 나라의 화훼화는 구륵전채법보다는 몰골담채법을 써 소박하고 은은하게 그렸으며, 시대가 내려올수록 한국고유의 들꽃을 주로 많이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 사 군 자 ■

 

  동양화에 있어서 四君子는 매·란·국·죽(梅·蘭·菊·竹)을 지칭한다. 아직 눈발이 날리는 이른 봄에 가장 먼저 꽃망울을 터뜨리는 매화와 서리내리는 가을에 향기를 뿜는 국화, 곧은 줄기에 마디가 있는 대나무, 그윽한 향과 청초한 외형의 난초 등은 상징적인 의미와 함께 동양에 있어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던 식물들이다. 이들에서 난·국을 제외하여 松을 넣어 歲寒三友라 칭하기도 하고, 사군자에 松을 포함시켜 五友로 불리우기도 한다.

 

이들은 문인화의 소재로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수법이 비교적 단순하고 용이하여 지식인들이 손쉽게 즐길 수 있었으나 높은 화격에 도달한 작품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중국에 있어 墨梅畵는 11세기말 선승 중인에 의해 창시되어 이간·가구사·조맹부 등이 뛰어났다. 墨蘭은 남송대의 정소남이 묵란법을 창시하여 원대 관도승·양보지, 명대 마수정 및 여류화가들도 많이 그렸다. 菊花는 송대 범석호·유준호를 시조로 북송의 황전·서희 등이 유명했다. 墨竹은 사군자중 가장 먼저 발전했고 당의 오도자와 소열로부터 시작했다. 송의 서희·문동·소동파, 원대의 고극공·이간·조맹부, 명대의 서위·주단·, 청대의 석도·정섭·김농·이선 등이 있다.

 

중국 송에서 墨梅가 창시된 지 1세기도 채 못되어서 고려의 정지상(?∼1135)이 매를 잘 그린 인물로, 또한 고려말 차원부(1320∼?)도 梅에 뛰어난 사대부로 문헌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전래작이 없어 고려시대 묵매의 실상을 파악하기 힘들다. 다만 고려의 화적으로 매만이 아닌 송죽매를 함께 그린 해애의 「세한삼우도」가 일본에 유존되고 상감청자에 매화문이 등장하고 있어 이를 통해 묵매도 적지 않게 그려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15세기작으론 공개된 것이 전무한 실정이나 당시 제작된 청화백자의 표면에서 뛰어난 솜씨의 매화문을 살필 수 있어 이를 통해 묵매의 양식이나 수준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16세기에는 신사임당(1504∼1551) 傳稱作인 「姑梅花」과 아들 이우(1542∼1609)의 「雪中梅」, 딸 이부인(1529∼1592)의 「月梅」등이 전해진다. 어몽룡(1566∼?)은 묵매 한가지로 명성을 얻었는데 조선묵매의 한 정형을 이룩하였다. 신부인과도 강한 공통점을 보이는데 굵은 노지(老枝)는 중심부를 비워 비백(飛白)으로 나타냈고, 잔 가지는 수직으로 그리며 태점(苔點)으로 꽃눈을 나타내는 양식화된 기법을 조속(1595∼1668)·조지운(1637∼?)부자, 허목(1597∼1682), 오달제(1609∼1637), 정조(1752∼1800)에 까지 이어진다. 梅는 대련(對聯)으로뿐 아니라 화첩(畵帖)으로 꾸며지기도 했으며, 월매·설중매·수중매 등 여러 형태를 한데 모은 墨梅帖이 만들어졌다. 후기에 이어 말기에 접어 들면서 淸畵風의 유입과 더불어 묵매뿐만 아니라 채색을 사용한 紅白梅를 10폭병(幅屛)과 같은 大幅으로 그리기도 했으며, 또한 물들인 색지를 사용하여 화사한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이송우(1805∼?)나 조희룡(1789∼1866)·양기훈(1845∼?)를 들 수 있는데, 신분이 낮은 중인들도 점차 이 분야 그림을 즐겨 그리는 양상을 보인다.

 

墨蘭은 중국에 있어서도 사군자 중에선 비교적 늦은 13세기 후반경에 발생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변계량(1369∼1430)의 『춘정집, 春亭集』에 옥서침이란 인물이 蘭竹을 잘 그린 것으로 나타나 있고, 세종(1397∼1450)과 성종(1457∼1494)이 난죽을 그렸거나 제발(題跋)을 남긴 기록 등으로 미루어 늦어도 15세기경에는 그려졌음은 분명한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이 시기 그림은 전래된 것이 없어 이정(1541∼?)이나 이징(1581∼?)의 現存作이 시대가 올라가는 그림 축에 낀다. 17세기 이후에는 백자표면에 장식화로 빈번하게 등장되는 것으로 일본인들은 秋草文이라 지칭하는 식물이 있는데 蘭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난이 자주 그려짐은 18세기에 이르러서인데 강세황(1713∼1791)이나 중인출신 임희지(1765∼?)가 수작을 남기고 있어 김정희(1786∼1856)는 유명한 「부작란도 ,不作蘭圖」를 비롯해 「墨蘭帖」을 다수 남기고 있다. 특히 그는 예서(隸書)의 書法과 묵난 치는 것을 同一視보는 화론을 바탕으로 타인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탁월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조희룡·이시응(1820∼1898) 등 적지 않은 추종자들이 그의 화법을 따랐다. 민영익(1860∼1914)은 당시의 청말화풍의 직접적인 영향아래 죽·난 모두 독특한 화풍을 이룩하였다. 자유분방한 필치로 끝이 잘린 듯 뭉뚝하게 나타냈고 적절한 화면구성의 묘로 몇 무더기 난을 한 화면에 등장시키기도 한 大小 다수의 묵란을 남기고 있는데 당시 및 후대의 영향이 컸다. 방윤명(1827∼1880)이나 김응원(1855∼1921)도 이시응의 화풍과 친연성이 큰 묵란을 남기고 있는데 모두 秋史에서 연원을 찾게 하는 묵란들이다.

 

菊은 송이전에 다른 꽃들과 마찬가지로 채색을 사용하여 菊 한가지만이 아닌 여러 꽃들과 함께 그려졌다. 四君子의 하나로는 늦게 발생되었으나 수묵 외에 채색으로도 줄기차게 계속 되었다. 우리나라에선 청자 등 도자기의 문양으로 일찍부터 등장되었으나 수묵화로는 청화풍의 유입 이후인 조선후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렇다 할 墨菊이 등장하였다. 조선조 화가중에선 사군자의 다른 식물들과 달리 국 한가지만을 전념한 인물은 찾기 힘들다.

 

東晋의 시인 도잠(365∼427)의 일화를 주제로 한 일종의 古事人物畵로는 조선에서도 일찍부터 그려졌으나 현존하는 菊으로 시대가 가장 올라가는 것은 이선해(1539∼1609) 傳稱作일 것이다. 정선(1676∼1759)의 「국일한묘, 菊日閑猫」는 翎毛畵의 범주에 드는 그림으로 設彩가 두드러짐 작품인데 화면에서 菊과 고양이가 同價를 보이고 있어 국의 그림을 살피는데도 중요한 자료로 제시될 수 있다. 심사정(1707∼1769)은 채색뿐 아니라 묵국도 여럿 알려져 있으나 화본풍이 짙다. 국을 포함한 어엿한 수묵 사군자만을 그린 화첩도 전래되고 있다. 이인상(1710∼1760)도 드문 예이긴 하지만 「병국, 病菊」과 같은 이 분야 그림을 남기고 있다.

정조(1752∼1800)의 野菊으로 보여지는 大作 墨蘭이 공개된 바 있고, 강세황도 국을 남겼으며, 19세기로 접어들면서 김수철은 묵국은 아니나 담채로 개성있는 필치의 국을 다수 그렸으며 유숙(1827∼1873)의 秀作도 알려졌다. 사군자와는 별개로 일종의 草蟲圖에 속하는 것으로 나비를 곁들인 설채의 소폭채국(小幅彩菊)도 다수 그려졌다. 20세기초 근대화단에서도 수묵 외에, 줄기와 잎은 수묵으로 나타내고 꽃은 황색을 加彩하여 그려지기도 하였다.

 

죽은 사군자 중 가장 먼저 그려진 것으로 일찍이 고려조의 안치민·정홍진·김군수·이인로(1152∼1220) 등과 같은 문인이나, 석행·석혜근 등의 승려가 묵죽으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조선조에선 세종(1397∼1450)·손순효(1427∼1554)·안정(1494∼?)·윤언직·유진동(1497∼1501)·인종(1515∼1545)·신세림(1521∼1589) 등이 묵죽으로 조선전기에 이름을 얻고 있으나 전래작들이 없으며 다만 박팽년(1417∼1456)의 전래작이나 신사임당 것이 알려져 있으나 眞僞에 문제가 있다.

일본에는 수문(1403∼?)이 1424년에 그린 10폭의 『묵죽화책, 墨竹畵冊』이 현존되는데 그를 조선인으로 간주하면 현존조선묵죽 중에서 가장 시대가 올라가는 그림인 셈이다. 조선묵죽의 어엿한 정형은 이정(1541∼?)에게서 비롯된다. 대폭의 수작이 여럿 전래되고 있으며 그림에 간기(干紀)를 남기고 있어 82세까지 붓을 놓지 않았음이 확인된다. 문헌상에 나타나있는 것뿐 아니라 그림을 통해서 후대에까지 화풍이 이어져 후배 화가들의 묵죽에 그의 영향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통죽(筒竹)·풍죽(風竹) 등 여러 종류의 죽을 함께 그린 聯幅도 알려져 있다. 18세기에 있어 가장 뛰어난 인물을 유덕장(1694∼1774)이다. 그의 집안은 6대조인 유진동 외에 증조부인 유혁연(1618∼1680)이다.도 죽에 뛰어나 묵죽의 연원이 꽤 오랜 가문임을 알 수있다.

신위(1769∼1847)는 이정·유덕장과 더불어 조선三代墨竹畵家로 지칭된다. 이들 모두는 詩書畵에 두루 능한 사대부들로 어엿한 경지에 도달하였다. 조희룡이나 민영익도 이 분야에서 두드러진 명품을 남기고 있다. 또한 이들 외에 다수의 문인들이 여기로 묵죽을 많이 쳤다.

 

이상에서 간략히 살핀 사군자는 조선조 문인들이 즐겨 그린 소재로 다른 소재의 그림과 같이 他國과 구별되어지는 독특한 양상을 예외없이 보여준다. 이 분야 그림에선 묘사력보다는 格調가 중시되었으나 여기(餘技)의 범주를 넘어 무수한 習作을 거친 뒤에야 비로서 高格을 이룩할 수 있다. 지덕을 겸비한 인물만이 가능한 문인화는 조선에 있어선 산수보다 더욱 중시되었다.

 

 

■ 영 수 화 ■

 

  민화에 나타나는 영수들은 길상적인 서수들로 수호와 축사의 뜻을 가진 것이다. 영수가 소재로 다루어진 그림으로 대표적인 것이 먼저 사신도이다. 사신은 동, 서, 남, 북 네 방향을 수호하는 상징적인 동물로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말하고 이들을 그린 그림이 사신도이다. 사신은 죽은 사람을 잡귀로부터 지켜준다고 믿어 묘지에서 집터에 이르기까지 생활 곳곳에서 나타난다.

 

민화에 등장하는 영수들로는 용, 봉황, 호랑이, 기린, 신구, 해태, 사불상, 불가사리, 천록, 삼두독수리 등을 비롯해 여러 가지가 있다. 이들 가운데 호랑이만은 상상의 동물이 아니지만 나머지는 여러 동물들의 신체의 일부분을 합성시켜 만든 모양으로 그리고 있다.

 

용은 땅짐승, 날짐승, 물짐승들의 외형을 골고루 가진 모습이며, 봉황은 닭의 머리, 뱀의 목, 제비의 턱, 거북이의 등, 물고기의 꼬리모양을 하고 있다. 기린은 오색의 사슴의 몸을 가진 상상의 동물로, 뿔로 다른 짐승을 해치지 않고 생물을 아껴 백수의 영장이라고 한다. 신구라 불리는 거북은 장수의 상징으로 여기기도 하고, 상하의 껍질이 하늘과 땅의 힘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여 우주를 상징하기도 한다. 현무는 암수가 한 몸인 거북과 뱀이 모인 동물인데, 암수가 한 몸이란 한 것에서 민간신앙에서는 남녀상사의 신으로 모시기도 한다. 해태는 수성의 짐승으로 불을 막아 주는 영수라고 하며, 그 성질이 올곧아 곡직을 판단할 수 있는 짐승으로 상징된다. 불가사리는 쇠, 구리, 대나무 뿌리를 먹으며 악귀를 쫓는 다는 전설 속의 동물로, 곰의 몸에 코끼리의 코, 코뿔소의 눈, 호랑이의 발, 쇠톱같은 이빨, 황소의 꼬리를 가졌고, 온 몸에 바늘 같은 털이 나 있다고 한다. 사불상은 사슴의 뿔과 낙타의 목, 소발굽, 나귀꼬리는 가진 짐승으로 중국 흑룡강 유역에 산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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