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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의 개념
명상은 일반적으로 진아를 탐색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알려져 있다. 우선 명상을 말하기 전에 명상이 지향하는 목표인 진아 즉「참나」에 대해 살펴보자. 진아라는 명칭은 요가서적이나 불교, 또는 심리학, 철학 등등 형이상학 차원의 서적에서는 얼마든지 접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러나 진아의 실체에 대한 설명이나 유추할 만한 의미를 우리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진아는 실체를 가지고 있지만 물질세계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므로 물질세계의 표현방법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한계가 있지만, 다음의 설명으로 진아의 기능에 대한 어슴프레한 그림은 그릴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불교에 "놓아버려라"는 화두가 있다. 석가모니 재세시에 흑씨범지라는 사람이 오동나무 두 그루를 뿌리째 뽑아들고 세존께 공양하였다. 이 때 세존은 "놓아라"하시므로 범씨는 왼쪽 손에 들고 있던 나무를 땅에 내려놓았다. 세존께서 다시 "놓아라" 하시니 이번에는 오른 손에 들고 있던 나무를 땅에 내려놓았다. 세존께서는 그래도 또다시 "놓아라"하시므로 범씨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놓으라는 말씀입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착한 이여, 그대에게 나무를 내려 놓으라 함이 아니다. 마땅히 밖으로 육진(六塵)과 안으로 육근(六根), 육식(六識)을 놓아 다시 더 버릴 것이 없으면 이곳이 곧 네가 생사에서 벗어나는 곳이니라”라고 말한 고사에서 연유된 화두이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마태복음에도 실려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용을 보면 불교의 입장은 자율적이고, 기독교의 입장은 수동적인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두 종교가 생성되는 단계에서는 나름대로 짐을 벗어버리는 경지를 터득하는 방법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 짐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느끼는 욕망, 기대, 신념, 갈등, 사랑, 증오, 불안, 공포, 희망, 행복 등등 정신작용으로 드러난 모든 현상을 총체적으로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짐들은 바로 자아, 즉 자기를 인식하는 구성체 이기도 하므로 이 짐을 벗어버린다는 것은 바로 나이기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르게 표현하면 현상속에서 보는 나로부터의 탈피, 또는 나로부터의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아를 포함한 육체의식을 탈피하는 것은 명상수행의 단계로 본다면 생각을 끊을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고서야 이루어지는 일 이다. 육체의식을 탈피한다는 것은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 즉 염두(念頭)에 머물고 있을 때이며, 생각이 염두에 머문다는 상태는 곧 자신의 육체에 대해 느끼지 못하는 경지이다. 생각이 이처럼 끊어져 있을 때 삼매에 들 수가 있고, 이 두 가지가 수행자의 의지대로 수시로 이뤄 저야 만 한다. 삼매에 몰입된 상태에서 비로소 깨달음이 나오고, 깨달음이 있어야 생각에 변화가 오면서 짐을 벗어 던지게 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진아가 표출되는데 이 경지에 다다르면 인연으로 얽혀진 현재의 실상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정신작용에 대변혁이 오고, 가치관이 전도됨으로써 짐을 벗게되며, 그래서 자유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상을 한다는 것은 숙세동안 진아위에 더깨더깨 쌓여있는 거품을 제거하는 작업이며, 이 거품이 다름 아닌 사람이 짊어지고 있는 짐들인 정신작용이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진아를 찾아가는 명상수행을 「길 없는 길」이라고 표현하였다.
그의 말은 그의 자신에게까지는 옳은 말이다. 그 이유는 쿤달리니의 각성 없이 명상만으로는 명상과정에서 최대관문인 육체의식의 벽을 넘는다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진아에 대한 설명이 충분할 수는 없다. 진아는 분명히 실체가 있으나, 이를 아무리 열과 성을 다하여 표현한다고 하더라도 마치 커피 한잔 마시고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설명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명상이라고 한다면 두 가지 개념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서구적 명상과 인도의 명상 개념이다. 서구적 개념의 명상은 2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기독교가 묵상(黙想) 또는 관상(觀想)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어 온 것으로, 절대자인 신과의 합일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고 있다. 인도의 명상은 기원전 3천년 전까지 거슬러 요가라는 이름으로 계승되고 있다. 요가의 내용을 살펴보면 명상의 차원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체속의 영적인 체계까지도 확립하였으며, 진아를 찾아가는 과정 즉 생각의 흐름을 차단시키고, 삼매에 도달하는 과정까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명상을 요가를 위주로 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요가를 가리켜 정신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요가수트라는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되어서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되는 경지, 또는 주관인 마음이 완전히 없어져서 객관적인 대상으로 통일된 경지라고 하였다. 따라서 요가 명상은 정신을 통일하여 하나에 집중하면 생각이 끊어지고 그러면ꡐ나ꡑ라는 자아의식을 잊게된다고 하였다. 자아의식을 잊게되면 그 자리에서 진아가 솟아오른다는 것이다. 요가가 인도에서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기원전 3천년 이전이라고 하므로 지금부터는 5천년 이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도에서 체계가 세워지고 사회 전반에 걸쳐 인격 완성의 수행방법으로 정착한 요가는 아랍, 그리스를 통해 서양으로 전파되었다고 하며, 불교를 통해 중국, 한국, 일본에까지 전래되었다.
명상은 자기의 내부에서 진실한 본질을 찾는 작업이며, 본질 즉 진아를 찾아 자신의 신성과 영원성을 확인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이제 진아에 대한 마하리쉬의 견해를 들어보자.
"감각적으로 또는 생각을 통해서 체험하는 나는 진정한 '나'가 아니며, 스스로 나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모두 부정한 다음에 남는 순수한 각성이 진정한 나 즉, 진아 이다. 이 진아는 개체적인 자아와 혼동하여서는 안 된다. 개체적 자아는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마음이 거짓되게 만든 것이고, 진아를 체험하지 못하도록 오히려 방해하는 것이다. 진아는 항상 실재하지만 우리가 있는 그대로를 분명히 알 수 있는 때는 오직 스스로를 한계 짓는 마음이 사라졌을 때 뿐 이다. 마음이 사라져서 진아가 그 모습을 드러낸 상태가 바로 깨달음이다." 안타카라나 편에서 설명하였지만 코자르체에서 '나'라고 하는 자아의식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이 자아는 과거 현재의 모든 기억과 인상 등이 축적되어 만들어 낸 허구에 불과하다. 이 허구인, 자아의 작용인 생각이 끊어졌을 때만이 진아는 발현한다. 한계 짓는 마음이라는 "한계 짓는"에 대해서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한계 짓는다는 그 자체가 마음의 작용이므로 마음의 기능이 정지되면 한계 짓는다는 것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사라졌을 때"라는 의미는 불교에서 말하는 생각이 일어나기 전, 즉 생각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생각이 일어나기 전이든, 생각이 끊어진 상태든 같은 의미이지만, 이와 같은 상태는 오직 명상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명상의 1차 목표는 생각이 쉬는 자리
명상을 수행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진아를 실현시키는데 있다고 할 것이다. 불교식의 용어를 빌려 말하면 견성을 하자는 것인데, 견성을 하기 위해서는 몇몇 단계가 있다. 불교계에서는 견성을 하는데 돈오(頓悟)와 점오(漸悟)의 두 가지 학설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돈오는 단번에 확철대오 한다는 주장이고, 점오는 순서와 차례를 거쳐 깨달음을 키워나간다는 주장인데, 개인적으로 본인은 점오설이 옳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그러면 불교뿐만 아니라 인도 요가의 입장은 견성을 하기 위한 과정에서 우선 어느 정도의 경지를 추구하고 있는지를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마하리시를 통해 인도 요가의 입장을 들어보자. "어떤 대상에 대한 집중으로 여러 가지 생각들을 멀리하고 마음을 한 생각에 고정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마저 사라져야 한다. 깨달음이란 새롭게 얻는 것이 아니라, 항상 존재하는 것이지만 생각이라는 막에 가리워 져 있다. 따라서 이 막을 제거할 수 있다면 깨달음은 스스로 드러난다." 요가의 입장은 생각이 계속 이어지는 연상작용이 막을 형성해서 진아를 가리고 있으므로, 생각만 그치면 막이 제거되므로 깨달음이 드러난다고 하였다. 묵조선을 대표하는 굉지(宏智)의 입장을 들어 보자. "비사량처(非思量處․분별을 초월한 경지)에 머물되 거기에 끄달리지 않는다. 즉, 생각을 잊고 말을 끊으며, 행동이 떠나 생사거래에 그대로 맡겨두는 곳에서 비로소 비사량의 자취가 현성한다." 비사량은 단순한 사량의 부정이 아니고 절대 무심의 순수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것인데, 수행 방법이 처음부터 바로 생각을 끊는 것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 대혜(大慧)의 화두선의 입장도 들어 보자. "공안(公安) 공부에 의식이 충분하고 유일하게 공안에 집중되어야 한다. 의식의 집중과 극도의 긴장 속에서 궁극에는 그 의식이 무의식으로 통하고, 그 무의식은 그대로 의식 밖으로 뛰쳐나와 깨달음의 체험으로 이어진다." 화두선의 입장은 화두를 매개로 극도로 고조된 긴장을 통해서만 무의식으로 진입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비사량처, 즉 생각이 끊기는 자리를 나타내고 있다. 이상 요가와 묵조 그리고 화두선이 밝히는 자신들의 입장을 살펴보았는데, 묵조선만이 집중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지만, 사실상 모두가 집중이라는 방법에 의지하여 생각이 끊기는 자리를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세 가지의 실례는 현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표적인 명상단체들의 명상 방법과 목표를 설명한 것이다. 마하리시는 현대 인도의 대표적인 각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성자이고, 대혜선사는 임제종의 대종장으로 묵조선을 타파하고 활구선을 창시한 사람이다. 굉지선사는 대혜선사 시대에 묵조선의 거두였다고 추정되는 사람이므로, 이 세 사람의 의견은 인도의 요가와 불교의 선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자기 완성을 목표로 하는 명상의 거대한 집단들은 한결같이 집중법에 의한 생각 끊기를 목표로 하여 전승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들 집단들이 명상을 하는 방법이 출발점에서는 서로 차이가 많은 것 같이 보인다. 마하리시가 주장하는 집중이나 크리슈나무르티가 강조하는 응시가 다른 것인 것처럼 보인다. 응시는 생각의 흐름이나 정신적인 현상 등을 관찰하라는 의미이지만, 강력한 정신 집중이 없으면 불가능하므로 집중과 한가지이다. 집중도 코나 양미간 또는 두정(頭頂)등 차크라가 존재하는 자리를 대상으로 하지만, 생각의 흐름에도 집중하므로 응시와 차이가 없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생각을 끊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생각이나 마음에 집중하는 것을 선택한 것에 불과하다.
화두에 집중하는 화두선은 요가의 관념에 대한 집중과 차이가 없고, 처음부터 생각을 비우려는 묵조선의 입장도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생각의 흐름에 집중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명상하는 방법은 오로지 정신집중이라는 대명제에서는 일치하고 있으며, 단지 표현에서의 차이만 다를 뿐이다. 명상단체들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모두가 출가라고 하는 세속과의 격리방식을 채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단 명상하기로 결정을 하면 세속적인 모든 인연을 끊고, 이들 종교단체에 입문하여 인간적 욕망을 억누르는 한편, 무한한 고통도 감내해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생각이 끊기는 자리에 가기 위해서 면벽 9년을 실천하는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의 불교에서는 최근에도 오랫동안 앉아서 참선하는 수행자를 미화시키는 일을 볼 수 있었다. 참고로 면벽 9년이란, 달마대사가 벽을 대고 앉아 9년 동안 참선했다는 고사에서 연유한 말인데, 선도(仙道)의 입장을 보면 불교와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도는 면벽이라는 개념을 벽에 대고 앉아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홍진 세상과 초연함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9년은 시간 개념이 아닌 수련의 개념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죽염을 구우려면 죽통에 소금을 9번을 구어야 하듯 아홉 번을 연성해야 대약을 이룬다는 것이 선도의 입장이다. 어쨌든 요가나 불교에서는 면벽 9년 식의 수행을 당연하다는 듯 엄청난 고통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까지도 면면히 이어지는 이 엄청난 고행 외에는 비사량처에 도달하는 방법이 없는 것인가?
쿤달리니만 각성시킬 수 있다면 이런 고행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인도의 요가는 쿤달리니만 각성시킨다면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하였고, 요가서적에는 쿤달리니의 각성방법이 체계가 세워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쿤달리니의 각성이 지극히 희소하다. 쿤달리니를 각성한다고 해서 각성 자체만으로 큰 깨우침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생각이 끊기는 자리에 도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쿤달리니의 각성이 안된 상태라면 면벽 9년 식의 수행밖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해야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현재 시행되고 있는 수행방법이 개선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선방에는 많은 사람들이 둘러앉아서 새소리, 바람소리나 그 감촉, 또는 일승의 발자국 소리에다 죽비 터지는 소리까지도 들어가면서, 앉아있어서는 육체의식을 초월하는 것은 고사하고 정신 집중조차 되겠는지 궁금하다. 처음 입산한 수행자가 참선을 배우기 위해서 한번 거치는 의식이라면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매년 두 번씩 해마다 연례행사로 그렇게 앉아 있다는 것이 걱정스러울 따름이다. 설화집 등 옛 이야기책을 보면 기도하거나 좌선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가, 또는 비몽사몽간에 어찌 어찌 하였다는 내용을 어렵지 않게 보게되는데, 이 같은 사례는 견성의 길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다.
혼몽한 정신상태에서의 현신이나 합일 따위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수행자들을 위해 생각이 끊어지는 자리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사람에 따라 체험하는 감각은 모두 다르게 나타난다고 하여도, 내가 강조하는 정신상태는 변함이 있어서는 안되므로 참조토록 하기 위함이다. 명상에 들어 생각이 미세해지거나, 생각을 끊게 되면 생각이 멈추는 자리에 다다르게 된다. 이 자리에 들어서면 생각이 없는 텅 빈 공간을 체험하게 되면서 곧 이어 '나'라고만 인식되는 빛덩이가 나타나게 된다. 이 '나'라고 인식되는 것은 자성이 아닌 자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자아는 생각이 끊어진 상태에서의 자아이며, 마치 어두운 밤의 바다 한가운데서 계속 켜져 있는 등댓불처럼 여겨진다. 이때 수행자의 정신상태는 혼몽스러운 상태가 아닌, 청명한 바로 그것이며, 자신의 육체는 바위처럼 고목처럼 느껴지는, 무생물과 같은 상태여서 자신과는 아무런 연결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끊어졌으므로 생각은 있을 수 없지만 다만 아직ꡐ나ꡑ라는 빛덩이만은 의식되고 있다. 이 경지를 견성이라고 하거나 대오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종종 볼 수 있지만, 생각이 끊어지는 자리는 견성도 아니고 대오도 아니며, 단지 육체의식을 초월한 것 뿐 이다. 이 상태가 방해받지 않고 계속되면 삼매로 이어진다. 삼매에서는 이제 나라고 인식되는 것조차 소멸되는, 완전히 무의식의 상태로 있게 된다. 그야말로 완전한 무의식이므로 보는 것도 느껴지는 것도 없으며, 밝다든지 컴컴하다는 등 어떤 감각도 있을 수 없다. 수행자는 삼매에서 나올 때는 선물을 안고 나오게 된다. 이 선물이 다름 아닌 깨달음이다. 따라서 삼매가 회수를 거듭할수록 그 깨달음의 경지는 비례해서 깊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각을 끊는 방법을 수행자가 터득하고 있어야, 자신이 원할 경우 언제든지 삼매에 진입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어쩌다가 생각이 끊어지는 자리에 운 좋게 왔다면, 다시 언제 또 운 좋은 때를 만나게 될 것인가? 그러므로 생각이 끊어지는 이 경지는 수행자라면 당연히 쟁취해야 할 첫 번째 관문이라고 할 것이다.
명상 수련하는 방법
명상 수련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아보자. 우리나라 불교의 참선 수련은 처음부터 화두를 드는 것으로 시작한다. 요가에서는 집중이나 응시를 강조하고 있으나 명상의 초보단계에서는 정신 집중도를 높이기 위한 방법을 활용하고 있다. 응시를 강조하고 있는 크리슈나무르티의 명상의 과정에 대한 견해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림, 이미지, 관념에 정신을 고정시켜 놓고 모든 사고를 배제한다. 명상하기 위해 앉았을 때 정신을 어떤 하나의 목표, 즉 그림이나 이미지 또는 관념에 집중시키려고 하지만 그 정신은 여기 저기로 방황한다. 수행자는 그것을 물리치려고 노력한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여러 가지 사고와 싸우면서 시간을 소비한다. 이런 과정을 명상이라고 한다." 크리슈나무르티가 마음자리에 대한 응시를 강조하면서 명상의 과정은 그림, 이미지, 관념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내용은 명상의 초기에는 정신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우선 집중하기 쉬운 그림이나 이미지 또는 관념을 매개로 한다는 것을 시사한 것이다. 따라서 요가의 각 문파들은 기초단계에서는 그림이나 이미지, 관념들을 집중의 대상으로 채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요가의 명상은 처음 시작할 때에는 제3의 눈, 또는 영안(靈眼)을 개발한다든지, 히말라야의 눈 덮힌 설산을 이미지 작업하는 방법들을 폭넓게 사용하고 있다. 앞에서도 설명하였지만 요가나 불교가 명상하는 목표는 생각이 머무는 자리라고 하였다. 따라서 요가의 집중이나 응시, 불교의 화두가 어느 쪽이 보다 효과적이고 능률적인 방법인지는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환경이나 인식에 따라 다르고 또 사람마다 정신적인 조건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수련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불교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요가식의 방법으로 수행을 하였고 명상의 목표점을 지나왔다. 따라서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생각의 집중이 명료하여지고, 그와 같은 상태를 어느 정도의 시간동안 유지할 수 있게 되면, 생각을 끊는다는 것은 가능하다.
나는 쿤달리니를 각성시키고 난 다음에 명상을 시작하였으므로 정신의 집중도를 단시간에 현저하게 높였지만, 스승이나 참고할 만한 지침이 없었으므로 엉뚱하게도 신선놀음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허비하였다. 내가 여기에 제시하는 방법들은 인도에서는 요가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이 시행하는 방법이고, 우리나라에 있는 요가 단체에서도 널리 쓰고있는 방법이므로 누구나 익힐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쿤달리니를 각성시키고 시도한다면 불과 2~3년이면 생각이 쉬는 비사량처에 도달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앞에서도 말하였지만 나의 명상수련은 아무리 오래 앉았다고 하여도 1시간 반을 넘긴 적이 없다. 그나마 매일 수련한 것도 아니며, 한 주일에 기껏해야 3~4일 정도였다. 나의 경우를 구태여 다시 언급한 것은 쿤달리니를 각성하고 난 다음에 명상을 시작한다면 명상은 결코 지루하거나 어려운 대상이 아니다. 얼마든지 유쾌하고 재미있는 수행이며, 견성도 이미 손에 쥔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소개되는 기초 명상법은 이 방법만으로도 고도의 경지, 즉 비사량처 까지도 직행할 수 있으므로 참조하기 바란다.
1) 영안의 개발
사람은 통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눈 외에도 또 하나의 눈을 가지고 있다. 이 또 하나의 눈을 제3의 눈, 또는 영안(Spiritual Eye)이라고 한다. 이 눈은 지혜의 눈이라고도 일컬어지는데, 물질세계의 배후에 있는 놀랄만한 세계를 드러내 전개시켜 준다. 영안의 개발은 명상을 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는 아니다. 그러나 명상을 수행한 사람들은 명상이 지루하고 따분하며 힘들고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런 인식을 불식시키는데 한 몫을 하고 있으며 내가 이 과정을 거쳐서 그 필요함을 알기 때문이다. 다행히 영안을 개발하게 되면 신바람나는 신선놀이를 즐기면서, 동시에 명상의 모든 과정을 단축시켜 빠른 속도로 완성으로 이끌어 간다. 요가 행자들이나 신비가들의 상당수가 명상의 초기단계에서 이 영안개발을 시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안의 개발은 눈썹과 눈썹 사이의 양미간에 대한 집중으로 시작된다. 우선 명상의 자세를 취하고 앉아서 눈을 감고 양미간에 의식을 집중한다. 양미간이라고 하지만 미간에서 위쪽으로 1㎝ 높이의 사이로 생각하면 된다. 처음에는 양미간에 집중하려고 하지만 의식이 이 지점을 분간하지 못하므로 손가락으로 자주 눌러주는 것이 좋다. 손가락으로 누른 자리를 의식이 기억한다면 우선 성공적이다. 이 자리를 눈을 감고 있지만 뜨고있을 때와 마찬가지의 기분으로 지켜보도록 한다. 이때 눈을 감고 있지만 눈의 방향이 집중점으로 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눈이 집중점을 향해 있으면 안구의 근육이 긴장되어 두통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명상중에는 의식이 집중하는 자리가 어디가 되었든 눈은 따라다니면 안 된다. 눈은 항상 정면을 보듯 제 자리를 고수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집중은 처음에는 5분 정도 하다가 해제하여, 마음을 편하게 한 후 다시 5분 정도 집중하는 식으로 한다. 5분 정도로 짧게 하라는 것은 의식집중이 초기 단계에서는 긴장을 유발시키고, 또 연상작용 때문에 방해를 받기 때문이다. 긴장되거나 집중이 흐려지면 5분이 아니라 30초나 1분 정도에도 멈추고 다시 반복하도록 한다. 생각이 연속으로 일어나면, 생각이 일어나는 현상에 집중하면, 생각이 멈추어지므로 미간에 집중하는데 도움이 된다.
생각만으로 집중하고 해제하기를 반복하면서 30분 정도 앉은 채로 시행한다. 처음에는 눈을 감았으므로 아무런 빛도 느낄 수 없는 암흑의 공간만을 보게된다. 그러나 집중이 계속되면 암흑의 공간에 선명하게 작은 빛의 구체(球体)가 나타난다. 이 빛들은 처음에는 나타났다 없어지기를 반복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약간 오래 머무르는 대신 제멋대로 이리 저리 움직인다. 움직이는 빛은 하나일 수도 있고 여러 개일 수도 있으며, 생멸과 움직임이 불규칙적으로 계속된다. 빛이 하나이면 그 것에, 여럿이면 그 중 가장 큰 빛에 집중하면 작은 빛들은 서서히 소멸한다. 하나 남은 광점을 이제 움직이지 않도록 의식을 집중하며 한자리에 고정시키도록 시도하여 본다. 이와 같이 나타난 광점들은 결코 상상력이나 의지로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 빛은 두뇌 내부에서 빛을 내기 시작한 아스트랄체의 눈이고 곧 영안의 싹인 것이다. 집중이 안정되어 가면서 한 곳에 고정시킨 광점을 계속 지켜보면 그 광점은 커지면서 별과 같이 보이게 된다. 이 광점을 의지로 더욱 크게 확대시켜 간다.
광점에 마음을 집중시키고 그 광점과 일체화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노력하면 광점은 점점 커져가게 된다. 이 확대된 빛은 결국 손바닥 크기나 또는 시야에 가득 차기도 하는데, 빛덩이는 커지면서 빛이 약해지고 서서히 투명해 진다. 그래서 텔레비전의 흰 화면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또는 암흑의 공간에 창문이 뚫린 듯이 여겨지기도 한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일은 나타난 빛과 자신이 일치되도록 항상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빛속에 의식이 뛰어들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2) 의식의 심화
영안개발법에 의해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아스트랄체의 눈은 명상중에 아름다운 색채를 갖는 빛의 그림이나 이상한 광경을 비추어낸다. 밀교에서 만다라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의 내우주의 비전이다. 영안을 각각 차크라에 돌리면 보이는 것은 만다라와 비슷한 빛의 만화경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것은 두뇌와 심장 영역에서 나타나는 빛이다. 이 빛을 보고 있는 수행자는 자신이 심장 영역의 빛을 보고 있다 든가, 두뇌 속의 빛을 보고 있다 든가 하는 의식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완전히 그 광경 속에 들어 있으므로 인식작용이 정지하고 있는 것이 상례이다. 먼저 심장 부근에 집중하면 핑크색이나 흰빛을 보게 된다. 사람에 따라 그 빛의 색깔이 차이가 나타난다고 하지만, 색깔차이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나타난 색깔이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색이기 때문이다. 이색깔 속에서 특히 색채가 짙다거나 밝게 빛나는 핵심적인 부분을 보게 되는데, 이 부분에 자아 의식을 뛰어들게 한다. 그렇게 하여 의식이 그 빛과 완전히 동화되면 그 자신이 그 빛 속에 완전히 빠져 버린 듯 느끼게 된다. 이 작업을 몇 차례든 계속하면 의식은 보다 정묘해 지는데, 여기서도 자신에 대한 질문을 꾸준히 하도록 한다.
'이흰빛은 무엇인가? 이 빛을 보는 나는 대체 누구인가? 누가 이 빛을 보는가?'하는 식으로 자신에게 질문을 해 보는 것이 좋다. 이 명상방법에서 다음과 같은 체험을 하는 경우도 있다. 눈을 감고 명상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어두운 공간이었던 것이 시야가 훤하게 밝아오고 그 속에서 자신의 육체와 비슷한 모양의 그림자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그림자 같이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이나 불상(佛像)의 형태로 보이는데, 서 있는 자세거나 앉아 있는 자세이기도 하다. 이것은 빛의 덩어리처럼 보이는데 세부적인 윤곽이나 얼굴의 모습 또는 표정 등은 판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상 자신의 아스트랄체를 보고있는 것이다. 계속 이 빛의 덩어리를 살펴보면 그 속에 핵과 같이 느껴지는 부분을 발견하게 되는데, 역시 그 핵속에 의식을 뛰어들게 한다. 이 단계가 되면 육체의식을 초월할 수 있는 기본적인 여건이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때 한없는 환희의 파동에 감싸이게 된다. 이와 같이 빛을 통하여 의식단계를 심화시키는 동안 인식은 점점 깊어가고 미묘해져 가서, 일상의 의식상태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깨달음과 같은 의미를 알게 된다.
명상중에 나타나는 현상들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므로 형태가 다르더라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과의 대화를 꾸준히 해 나간다면 그 현상에 대한 진실한 의미를 알게 된다. 차크라에 대한 집중은 요가서에서는 일곱 개 모두를 대상으로 하지만, 나는 사하스라라와 아지나, 아니하타 세 차크라를 추천하고 싶다. 이 세 차크라 외의 차크라에 대한 명상은 시간과 정력의 낭비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제 차크라에 대한 집중을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심장부위의 아나하타 차크라를 선택키로 하였다면, 심장의 자리나 또는 가슴 가운데 부분에 집중하면 핑크색이나 흰 색깔의 빛이 드러난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 색깔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데, 그 색깔이 자신의 색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어떤 색깔이 나타나든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자신이 보는 빛이 자기의 빛이므로 그대로 수용하고 전개된 빛을 자세히 관찰하면 빛중에서도 광도가 가장 밝은 빛의 중심을 발견하게 된다.
다음에는 의식을 빛의 중심에 일체화시킨다. 즉, 중심에 의식을 뛰어들게 하라는 것인데, 의식이 그 빛과 동화되면 자신이 빛속에 녹아드는 것 같은 황홀감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차크라에 집중하여 빛을 보게되면 항상 빛과 자신을 일체화시키는 작업을 계속하라는 것인데, 이를 반복할수록 의식은 보다 정묘하여 진다. 쿤달리니가 각성되었다고 해서 차크라 영시가 모두에게 가능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차크라 영시가 가능하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은 일이지만 영시가 안 된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나의 경우가 이에 해당되는데, 쿤달리니 각성후 영안을 개발하고 차크라에 집중하였지만 영시(靈視)에 실패하였다. 따라서 방법을 바꿔 명상을 하다가 상당한 시일이 지나고 난 후에야 영시에 성공할 수 있었다. 나는 차크라 영시에 실패하고 현실세계의 풍경을 대상으로 영상화 작업을 시도하였다. 이것은 풍경 사진을 여러 차례 보고 익혀서 그대로 머리속에 그리는 것인데, 사진을 충분히 보고 익힌 다음 눈을 감고 그대로 그려내는 식이다. 마음속에 그 경치를 그대로 재현하려고 하였지만, 처음에 만들어 놓은 것은 흑백 화면뿐이었다. 천연색 그대로 현상화 하려고 노력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방법을 달리하여 우선 한 가지 색깔만 그리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처음 그리려는 색은 초록색인데 마음이 푸근하여 내가 좋아하는 색이기 때문이었다. 초록색을 연상하는 것은 어느 정도 수련하자 가능하여 졌고, 넓은 초원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나는 초원을 골프장으로 만들었고, 얼마 되지 않아 이에 만족할 수 없어서 사람들이 공을 치는 모습까지 만들기에 이르렀다. 다시 풍경사진으로 돌아가 집중하자 천연색 그대로의 영상을 재현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지리산 뱀사골에 가게되었고, 계곡의 경치에 반해 그곳 전경을 그리게 되었다. 이때는 사진 없이 기억만으로도 재현이 가능해 졌는데, 이것이 숙달되자 그 경치의 부분적인 변화를 시도하였다. 이 부분적인 변화도 회를 거듭하자 가능해 졌는데 부분적으로 색깔도 변화시켜 보았고, 또 전체적인 색깔을 변경시킬 수도 있게 되었다. 부분적인 수정 뿐 만 아니라, 색깔 변화도 가능해지자 의식을 투입시켜 보았다. 의식을 투입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었지만 감각까지 느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상당한 노력 끝에 결국 나는 내 마음의 스크린에 그려진 지리산 뱀사골의 계곡에 앉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근 채 써늘한 계곡물의 온도와 바람소리, 그리고 바람이 뺨에 닿는 감각까지 느끼게 되었다. 이 정도의 명상의 경지라면 설화속에서나 나옴직한 선인들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다.
그때부터 나에게 명상하는 시간은 항상 즐거운 시간이었다. 경치가 좋은 사진을 보면 재현해 놓고 혼자만의 재미를 만끽하곤 하였다. 이상의 나의 경험으로 볼 때 쿤달리니를 각성하였다고 하여 아무 것이나 쉽게 이뤄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잘 되지 않으면 방법을 바꿔서 발전시키면 안되던 것도 쉽게 되었다. 당시 나는 요가에서 가르치는 집중이나 응시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였고, 화두를 잡았다가 적응하지 못했기에 영안개발과 비전에 몰두하였었다.
이 같은 영안개발과 비전을 성숙시키는 것과, 집중이나 응시로 방향을 돌렸을 경우의 비교는 나로서는 확답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쿤달리니 각성후 집중이나 응시에 매달렸다면 내가 들인 노력보다는 수고가 덜했을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생각이나 마음에 집중하는 것은 비전에 의한 명상법보다는, 재미는 없지만 지극히 단순하기 때문에 생각이 쉬는 지점에 도달하는 것이 빨랐을 것이라는 점에서이다. 그러다가 육체의식을 탈피해야 생각을 끊을 수 있고, 생각을 끊어야 삼매에 들 수 있다는 내용을 알게 되었다.
생각의 흐름을 중단하는 것은 벌써 오래 전에 이뤄진 일이고, 이제는 집중뿐만 아니라, 집중한다는 의식마저도 쉬도록 하면 되는 일인데, 이 일도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육체의식의 탈피였다. 육체의식이란 쉽게 말한다면 생각이나 몸의 감각이 작용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감각이 작용하므로 인식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인식작용이 이뤄지지 않기 위해서는 몸의 모든 감각이 동시에 작용이 중지되어야 한다. 아무리 미세하다고 하여도 감각이 감촉하면 바로 인식작용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수행한 비전에 의한 명상도 호흡이 상당히 미세하여야 하고, 감각에 대한 억제도 상당한 수준에 다다르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러나 비전 명상법은 고도로 집약되었긴 하지만, 의식이 작용하는 방법이었으므로 미세한 감촉은 이 의식에 의해 무시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적어도 몰입되었을 때 몸이라는 대상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이 완전히 멎어버린 상태에서의 육체의식은 의식이 작용하고 있을 때의 육체의식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한마디로 몸의 모든 감각이 정지되어야 한다. 몸의 감각이 정지된다는 것은 아프다는 병은 물론이고, 간지럽거나 뭐가 닿는다는 감촉마저도 없어야 한다.
그러니까 우선 완전한 건강상태를 유지해야 하고, 다음으로는 주위 환경으로, 모든 감각이 그 대상이 없으므로 활동이 멎어야 한다. 소리가 없는 적정(寂靜)한 공간이 필요하고 춥지도 더워서도 아니 되며, 옷마저도 입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이 세상에 완전히 건강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존재할 수 있을까? 나는 내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쿤달리니를 각성시키고 난 다음 나는 병원은 물론 약방도 신세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60이 넘도록 오십견이라는 어깨 통증은 물론 신경통, 근육통 같은 고통이나 아픔이 전혀 없다. 쿤달리니 각성이 아니면 육체의식으로부터의 초월은 애당초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완전한 건강과 여건을 조성하였지만 또 하나의 문제에 봉착했다.
나의 호흡은 이 당시만 하더라도 아주 미세하였지만 모든 여건이 갖춰지자 그처럼 미세한 호흡에도 의식이 걸렸다. 다시 자율신경 조절에 관심을 두고 수련하면서 호흡을 더욱 미세하게 하면서 스스로 호흡을 느끼지 못하게 되자 드디어 나의 의식은 멎어버리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육체의식을 초월한 경지를 설명한 것인데, 나는 생각을 끊는 것도 내 의지로 실현시켰고, 육체의식을 초월하는 것도 의지로 이루었으며, 이 두 가지를 접합시켜 생각이 멎어버린 상태 즉 비사량처를 이룬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생각을 끊는 자리와 육체의식을 초월하는 자리가 하나가 아니고 별개의 것이라는 점이다. 생각을 끊는 자리는 의식의 흐름을 막아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현상으로 집중이 고도화한 경지에서 이뤄지는데 이 경지에서는 감각기관이 정보를 제공하지만 의식으로 발전되지는 않는다. 이 현상은 명상중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활동하고 있는 동안에도 별다른 일이 없으면 유지되는데 이 경지에서부터 사물(사물)을 볼 때 자신의 의식이 개입되지 않는다. 이 과정을 거처야만 육체의식을 초월하는 단계로 발전 할 수 있다.
언제든 삼매에 들 수 있어야
요가의 명상과 불교의 참선을 수행하는 목표점은 앞에서도 지적하였지만 생각이 멈추는 비사량처이다. 생각이 멈추는 자리를 요가나 불교의 일각에서는 깨달음의 자리라고 하지만, 삼매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상승의 깨달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각이 멈추는 자리에서 삼매로 이어지려면 생각이 멈추는 자리가 동시에 육체의식을 초월하는 자리여야 한다. 생각이 멈추면 동시에 육체의식을 초월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육체의식에는 생각이라는 연상작용이 절대적인 요소이지만 여기에는 사고를 수반하지 않는 감촉도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생각이 멈추지 않는 상태, 즉 강력한 집중이 행하여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육체의식의 초월을 상상할 수 없다. 내가 만나본 수행자 한 사람이 자신은 화두를 들 때는 육체의식을 느끼지 못하였다는 말을 하였는데, 이 경우 집중된 정신력이 보다 약한 감각의 전달을 무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집중이나 사고 등 의식의 활동이 정지한 자리는 텅 비어있는 무의 상태이므로 아무리 작은 파동이라도 감각은 즉시 영향을 받게 된다. 예를 들어 생각이 끊어진 상태로 몰입되었는데, 이때 모기가 윙윙 날고있거나, 개미가 피부위로 기어다닌다든지 바람이 스치고, 미세하지만 소리가 들린다면 어떻게 될까? 의지로는 감각을 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이처럼 작은 감촉도 바로 생각이 빈 공간에 전달되어 의식이 형성된다.
관련 서적들을 보면 일반적으로 감각을 억제하는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을 보게되는데, 옳은 방법이라고 할 수 없다. 나는 아파트의 골격을 타고 들리는 미세한 음악소리를 감각억제방법으로 처리하려 하였다가 청각에 손상을 입을 뻔한 적이 있다. 따라서 감각을 억제하는 방법을 따르다가는 해당 감각에 상당한 손상을 입거나 마비될 수도 있으므로, 그런 감각을 느끼지 않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므로 감촉 대상물을 제거하여 감각을 활동하지 못하도록 하지 않는다면 육체의식을 초월하는 자리는 이루지 못한다. 생각이 멈춤과 동시에 감각까지 쉬어야 육체의식의 초월이 이뤄지고, 이 상태를 얼마간 지속되어야 삼매에 들게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매가 무엇인지 라자요가 경전을 통해 알아보자.
라자요가 경전은 삼매를 그 경지의 깊고 얕음에 따라 유종삼매(有種三昧)와 무종삼매(無種三昧)로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고, 그중 유종삼매는 네 가지로 구분하였다.
1) 유종삼매(사비자 사마디)
① 사비타르카 사마디
수행자가 최초로 들어가는 초보적인 삼매로 물질 또는 감각을 대상으로 집중함으로써 실현되는 삼매이며 사고(思考)를 수반한다. 집중 대상이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촛불이나 코끝 등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인데, 집중이 잘 된다면 대상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감각이 대상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이 아닌 추상적인 것으로 양눈썹 사이의 이마나 가슴속 또는 차크라 등을 가리킨다. 이 단계의 사마디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마음의 작용이 제어되지 않고 활발하게 움직이는 단계이므로, 집중 대상과 일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이다.
② 사비카라 사마디
정신집중을 추상적인 대상으로 하였을 때 이루어지는 사마디이며, 지식의 욕망을 수반한 사마디이다. 추상적인 대상이라고 하면 차크라와 두뇌속의 아스트랄체, 그리고 가슴속의 코자르체 등 의식구조나 진아 등을 말한다. 영적세계에 눈을 뜨게되고, 육체감각의 범주를 뛰어넘는 초감각적인 기능이나 작용을 체험하게되는 것이 이 사마디의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③ 나르비타르카 사마디
첫 번째 사마디인 사비타르카 사마디와 같이 물질적인 대상물에 집중하여 도달하는 경지인데, 사고(思考)를 수반하지 않는 환희의 사마디이다. 이 단계에서는 집중력이 심화되어 이것저것을 생각하는 상념파가 멈추게 되는데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집중대상 그 자체와 의식이 합일이 되는 경지이다. 이 단계에 도달하면 마음속 깊은 속으로부터 표현할 수 없는 황홀한 감정이 솟아오른다.
④ 니르비카라카 사마디
대상물이 진아와 현상을 식별하는 직감지를 수반하는 사마디이다. 이 단계에서는 단지 이것이 있다는 체험이 있을 뿐인데, 생각도 상상도 의심도 없으며, 환희가 가슴속에 가득 밀려든다고 한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순수한 의미만 있을 뿐이며 여기에서 직감지가 생겨난다.
2) 무종삼매 (니르비자 사마디)
무종삼매는 일체의 의식활동이 정지된 최상승의 사마디이다. 일체의 심적 기능이 정지되었을 때만 이루어진다. 진아는 그 자체의 본래 성질속에 안주하고 있으며, 절대이며 영원 바로 그것이다.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존재 그 자체이다. 여기서는 일체의 생각이 멎어버린 완전한 침묵이며, 따라서 이 경지에 대한 표현이 있을 수 없다. 라자요가 경전이 밝힌 이상의 삼매 중에서 유종 삼매의 ①과 ②는 전문적인 수행자들이 상당수 체험이 가능하지만 ③나르비타르카 사마디는 지극히 고귀한 몇몇의 수행자 만이 체험할 수 있는 경지이다. 이 나르비타르카 사마디는 상념파가 멈추는 자리인데 인간의 생리작용이 멈춘다는 것은 곧 육체의 한계를 뛰어 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쿤달리니를 각성하면 각성 자체로 육체의 한계점을 넘어서는 것이므로 연상작용이 멈추게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수 없지만 각성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 자리도 지극히 희귀한 경지가 될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경지는 유종삼매의 네 번째 단계와 무종삼매이다. 전자인 니르비카라카 사마디는 생각이 끊어지고 육체의식을 초월하면 한 마디로ꡐ나ꡑ라는 의식만이 존재하는 세계이다.
이 경지를 나는 한밤중에 망망한 대해(大海)에서 계속 켜진 채 빛을 발하는 등대불에 비유하였다. 이 현상은 바라보는 주관이 있고, 불빛이 '나 이다'라는 의식을 가지지만, 그 다음 주와 객이 일체화되지 않는 상황이다. 앞에서 이 경지가 견성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견성의 경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견성의 경우에는 우선 광채의 색깔이 다르다. 육체의식의 초월의 경우에는 황금색이었으나 견성에서는 투명하고 차가움을 느끼는 백금색 이었다. 그리고 바라보는 주관이 객체와 합일하면서 주관으로 변이된다. 그와 동시에 육체는 그림자처럼 흐릿해지고, 나라는 주관이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후자인 무종삼매는 니르비카라카 사마디인 육체의식 초월단계에서 일보 전진한 삼매를 가리키고 있다. 이 설명이 적당한지 나로서도 알기 어렵지만 육체의식을 초월한 경지는 무종삼매로 진입하기 위한 단계로 여겨진다. 그러니까 생각이 끊어지고 나면ꡐ나는 존재한다ꡑ는 의식마저 단절된 공의 세계로 빨려들어 간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무엇이고 언제 어떻게 오는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깨달음이란 우리가 온전한 정신으로 깨달아 아는 것들은 제외하고, 인간의 사고가 미치지 못하는 영적 차원과 그 이상의 차원을 대상으로 하고자 한다. 따라서 깨달음에는 두 가지의 유형이 있다고 하겠다. 첫째는 의식을 수반하여 깨닫는 깨달음이고, 두 번째는 의식이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의 깨달음이다. 의식을 수반하는 깨달음은 쿤달리니 각성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물라다라 차크라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쿤달리니 샥티가 사하스라라 차크라까지 여행하는 것은 하나의 경이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쿤달리니 각성 뒤 영계를 체험하면서 느낀 것도 깨달음이며, 불가사이한 능력이 나에게서 발현되는 것, 그 외에도 명상을 계속하는 동안 체험하는 숱하게 많은 일들이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은 육체의식을 초월하는 과정까지 계속된다. 두 번째의 깨달음은 의식이 완전히 단절된 삼매 이후에 일어나는 경우이다.
완전히 의식이 멎어버린 무종삼매에 들었다가 나오는 순간에 의식이 다시 들게되는데, 의식이 드는 바로 그 순간 가슴에 저절로 느껴지는 것이 깨달음이다. 이 최초의 느낌은 아는 것이 아니라 확신이며, 바로 가슴에 굳게 자리잡아 버린다. 이전의 깨달음은 어떤 현상을 감각하고 깨달아 알게된 것이지만 무종삼매의 깨달음은 전혀 대상도 없었고 나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고 인식도 없었는데도 주어진 것이다. 이 깨달음은 계속되는 삼매속에서 차츰 그 크기가 더해지고 그 농도가 짙어졌다. 무종삼매 이전의 세계는 깊은 명상속에서 터득한 것이라고 해도 내 의식이 받아들인 깨달음이었다. 따라서 생각은 많이 바뀌었다고 하여도 역시 체험으로 얻어진 것이어서 반드시 체질화되었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무종삼매 속에서 터득한 깨달음은 바로 이 지구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지극히 인간적인 모든 요소들을 서서히 벗겨내는 바로 그런 것인 것 같다. 그래서 석가세존이ꡐ놓아라ꡑ라고 한 말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내 마음에 와 닿게 되었다. 따라서 현재의 나를 형성하고 있는 관념이나 기억, 경험, 주변 여건 등등의 요소들이 서서히 엷어지며 없어졌으므로 근심이나 걱정, 두려움으로부터 자유스럽게 되었다.
여기서 분명하게 해야될 것은 삼매와 견성은 확실히 구분된다는 점이다.
삼매에서는 의식이 완전히 정지되어 인식이 없지만 견성 경지는 나라는 인식은 남아있었고, 나라는 인식 뒤에서 나를 지켜보는 또 다른 어떤 것을 의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증분(自證分), 증자증분, 증증자증분이라는 경지를 불경은 설하고 있다. 따라서 삼매와 견성의 형태가 다르듯 여기에 도달하는 방법도 다르다. 어쨌든 이와 같은 경지에 들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삼매에 들 수 있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어쩌다가 육체의식을 초월했다는 정도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자기의 의지대로 무종삼매에 들 수 있을까?
무종삼매에 들기 위한 대체적인 설명은 앞에서 여러 번 반복하였지만, 첫째는 완전한 건강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완전한 건강이란 통증은 말할 것도 없고 결리거나 가렵거나 또는 몸에 의식이 갈만한 어떠한 결함이 있어서도 안 된다. 뿐만 아니라, 누구나 걸리게 되는 감기나 몸살 같은 계절병도 용납이 안 된다. 과연 이 정도의 건강이 신이 아닌 현실의 인간으로서 가능한 일일 수 있을까 하고 놀라겠지만, 쿤달리니를 각성하면 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불가사이한 건강상태를 나는 20여 년 간 계속해 왔으며, 앞으로도 명상에 매진한다면 몸을 버릴 때까지는 유지하게 될 것이다. 둘째는 생각의 흐름을 중단시킬 수 있는 고도로 정련된 집중력이 필요하다. 이 문제도 쿤달리니를 각성시킨다면 집중력이 일반 수행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심화되고 미세해 질 것이다.
셋째는 감각을 통제할 수 있는 환경의 조성이다. 이 문제는 일부의 사람들에게는 의지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대부분의 주택이나 아파트는 방음장치가 잘 되어있고 동시에 열효율도 좋은 편이다. 부족하다면 조금만 노력하면 개선할 수 있다. 따라서 명상하기에 적당한 작은 방을 마련할 수만 있다면 모든 여건은 충분히 갖춰졌다고 하겠다. 결국 내가 주장하는 것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을 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쿤달리니에 매달려 각성부터 해놓고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쿤달리니를 각성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진아를 찾겠다고 하는 것은 마치 달을 따겠다면서 망태 메고 장대 들고 뒷동산에 오르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쿤달리니는 진아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큰바다를 건너는 쾌속선의 역할과 다름이 없다. 쿤달리니의 각성은 수 천년 동안 인간세계에서 격리되어 있었다. 우리가 기억할만한 불과 몇몇의 성인들만이 선택적으로 또는 참으로 운 좋게 각성이 되었다. 따라서 요가철학이나 도교철학에서 그 편린을 볼 수 있을 뿐 그 외의 모든 종교에서는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참으로 우연히 쿤달리니를 각성시켰지만 다행히도 내가 각성한 방식은 누구에게도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명상이나 참선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열반이다.
열반은 말이나 지식으로, 또는 선행이나 자선으로 이뤄지는 세계가 아니다. 오로지 인간으로 살면서 체득한 모든 것들을 회진시켜야 이르는 경지라면 쿤달리니의 각성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은 췌언에 불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