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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촌 할매의 납궁례(納弓禮)
답사지역: 경남 사천 관덕정
답사기간: 2001년 8월 26일
참가자: 온깍지궁사회 여러 회원
1. 납궁례
납궁례가 세상에 환히 알려진 것은 2001년 8월 4일 창녕에서 열린 제3회 온깍지 세미나 때였다. 그때 제1부는 윤준혁(부산시궁도협회고문) 고문님을 모시고 해방 전의 활쏘기 풍속에 대하여 듣는 시간이었는데 그 자리에서 윤준혁 고문이 젊은 활량들은 처음 듣는 '납궁례'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신 것이다. 납궁례란, 활을 쏘다가 나이가 들어서 활을 쏘기 어려운 상황이 오면 자신이 쓰던 궁시를 활터에 반납하고 활터에 일체 발길을 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비록 나이가 들어서 활을 못 쏘게 되어도 사람에게는 언제나 욕심이 있는 법인지라 언제 나을지 모르니 활을 아예 안 쏘겠다는 결심을 굳히기가 어렵기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은 납궁례를 못하고 이승을 하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가 재미있어서 그 자리에서 모두들 와 하고 웃었다.
활터에 있는 납궁례라는 풍속은 다른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풍속이다. 이와 같은 풍속이 있으려면 적어도 한 세대 이상 되는 전통이 선 분야이어야 하는데, 무술계에서는 그런 깊은 연륜을 갖춘 분야가 없는 형편이다. 뒤집으면 활터는 워낙 오랜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이기 때문에 이 희한한 풍속이 있는 것이다. 이건 정말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인데...
정말 소설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 무협소설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정보를 처음 준 사람은 마르스의 한병철이었다. 그도 그날 세미나에 참석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들었고, 세미나가 끝나고 저녁 먹으러 가는 도중에 귀뜸을 해온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무협지에 정통한 이태호(청주 우암정) 접장에게 물어보니 그것을 무협지에서는 금분세수(金盆洗手)라고 한다는 것이다. 금분세수란 말 그대로 황금 대야에 손을 씻는 것이다. 무림의 모든 문파를 대표하는 무사들을 초청해놓고서 황금으로 된 대야에 손을 씻고 무림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날로 그는 무림에서는 신화나 전설 속의 인물로 격상되며, 이후 무림에서 맺은 모든 원한과 관계는 깨끗이 청산된다. 그렇기 때문에 도저히 잊지 못할 원한이나 미련이 남아있다면 금분세수를 하기 전에 도모해야 한다. 그러나 떠나는 자에게는 칼을 겨누지 않는 법. 피로 싸운 관계이지만, 금분세수를 한다고 하면 모든 원한을 잊고 축하해주는 것이 통례인 것은, 무협지 속의 대혈겁 또한 인간의 일이기 때문이다.
2.향촌할매
그런데 그 다음날 부곡정에서 열린 제1회 온깍지복놀이한마당에 뜻밖으로 향촌할매가 나타나셨다. 전혀 예고도 없이 가족들을 대동하고 나타나신 것이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마르스의 취재에 응하고, 하는 바쁜 상황이 지나간 뒤에 우총무에게 정말 뜻밖의 말을 하신다. 즉, 내가 죽고 나면 내가 탄 시지며 상장 같은 모든 것은 아무래도 다 태워 버릴 것 같으니, 만약에 온깍지궁사회에서 필요하다면 모두 넘겨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석희 행수님한테도 이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자리에서 얼마든지 환영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만약에 그렇게 해주신다면 그것들 일체를 받아서 박물관에 기증하여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박물관 이야기는 좀 뜻밖이었는지, 기증자를 향촌할매로 하여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겠다는 얘기를 듣고는 아주 기뻐하셨다.
향촌할매가 이렇게 결심하게 된 뒤에는 건강 때문이었다. 3년전만 해도 몸이 아주 건강해서 스스로 각궁을 얹어서 쏘며 활터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2년 전에 향촌할매의 가게 임대 문제 때문에 집안에 골치아픈 일이 생겼다. 게다가 몸까지 안 좋아서 병원에 갔더니 그것을 암이라고 판정을 내린 모양이다. 그래서 일년 사이에 잘 알아보지 못할 만큼 수척해졌다. 한 일 년을 그렇게 끌다가 가게 문제도 해결되고 병도 암이 아닌 것으로 판정되었지만, 칠순 노인이 그 사이에 겪은 풍파는 대단한 것이어서 활을 아예 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날 마르스의 요청으로 활을 한 번 끄는 동작을 보여주는데도 36파운드짜리 개량궁을 온작까지 다 끄지 못하고 결국은 활을 내렸다. 활을 안 쏜 1년 사이에 궁력이 그만큼 줄어서 이제는 활을 계속 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제 향촌할매 스스로도 뭔가를 정리할 때가 온 것이라고 판단하고 온깍지궁사회에 그 생각을 전해온 것이다.
향촌 할매가 이렇게 온깍지궁사회에 뜻을 전하는 데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향촌 할매가 이렇게 어려운 고초를 겪고 있던 올초(2001.1.30.)에 온깍지궁사회에서 진주지역의 활쏘기 풍속을 취재하려고 창림정을 찾았고, 그때 취재에 응하여 사진을 찍고 대담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온깍지궁사회 홈페이지에 곧바로 올라서 전국 활량들의 감동을 자아냈다. 바로 이런 인연 때문에 향촌할매는 온깍지궁사회에 마음을 열고 자신의 소중한 기록과 자취를 넘겨주겠다고 한 것이다.
1970년의 향촌과 2000년의 향촌: 30년 세월인데도 궁체가 변함없다.
아마도 이 이야기가 다른 때 다른 곳에서 나왔다면 향촌할매의 납궁례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전날 납궁례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활의 유구한 전통과 다양한 풍속에 감동하여 그 여운이 잔잔히 남아있는 후학들 앞에서 향촌할매는 자신의 활 인생을 정리하겠다는 뜻을 우리에게 전해왔으니 어찌 묘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향촌할매 역시 활 인생을 정리한다고 하면서도 이 납궁례를 행할 생각은 못한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일을 성사시키는 데는 적잖은 어려움이 있다. 납궁례는 쉽게 말해 평생 해온 손짓 발짓을 이제부터는 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앞서 얘기했지만, 어쩌면 활을 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욕망 때문에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납궁례는 구사들 중에서도 아는 사람도 드물 뿐더러, 설령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그것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는 한 옆에서 그렇게 하라고 권하기는 참으로 껄끄러운 일인 것이다. 바로 이런 특성 때문에 감히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마침내 향촌할매와 가장 친하게 지낸 이행수님이 발벗고 나섰다. 우리끼리는 향촌할매가 납궁례를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일치를 봐놓은 상태였다. 이행수는 온깍지복놀이한마당이 끝난 뒤 향촌할매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저런 대회 소식을 전하고 안부를 물은 다음에 '일은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하는 이야기를 꺼내면서 활터 풍속에 납궁례라는 것이 있는데 어찌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은 것. 그랬더니, 향촌할매는 자신을 기억해주는 후학들의 정성이 고맙다며 크게 기뻐하시더라는 것이다. 우리의 걱정근심이 한 순간에 스러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세기의 희한한 풍속 납궁례는 성사되었다.
3.사천 관덕정
향촌할매의 허락이 떨어지자 온깍지궁사회는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우선 장소가 문제였다. 향촌할매는 현재 창림정에 적을 두고 활을 쏘지만 원래는 사천 관덕정에서 집궁을 하여 30년 넘게 그곳에서 활을 쏘다가 1983년도에 창림정으로 이적을 한 상태였다. 그러니 납궁례를 지금 소속인 창림정에서 해야 하느냐 집궁처인 사천 관덕정에서 해야 하느냐 하는 난처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원래 한량은 한 번 적을 정하면 죽을 때까지 그 소속으로 남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활을 전쟁 무기로 쓰던 옛날의 풍속이다. 옛날에는 편사를 했고 편사는 모의전쟁이며 그렇기 때문에 적을 옮기면 자신의 모정과 전쟁을 하는 수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포츠로 전환된 지금은 대한궁도협회의 관리로 일원화 되었기 때문에 그런 일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의미로 본다면 일의 시작처인 관덕정에서 하는 것이 뜻깊은 일이 될 것인데 창림정에서 국궁사의 한 획을 긋는 이 엄청난 풍속을 선뜻 양보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거창한 고민은 전화 한 통화로 끝이 났다. 이행수가 창림정 사두에게 8월 26일날 납궁례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그럴 수 없다'고 완강하게 거절하더라는 것. 내부 사정은 정확히 모르겠으나 그날을 전후로 해서 무슨 대회가 있어서 좀 바쁘다는 것이었다. 활터가 바쁘기 때문에 납궁례를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었으니, 그 말뜻은 어떤 것인지 몰라도 오히려 우리의 고민을 싹 걷어준 고마운 결단이었다. 그래서 이 희대의 풍속은 사천 관덕정으로 옮겨갔다. 사천 관덕정으로 접촉을 했더니, 관덕정에서는 모든 사원들이 대환영을 한다면서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친정집'이라는 말이 주는 포근함 그대로였다.
4. 준비
따라서 납궁례에 관한 일은 사천 관덕정과 온깍지궁사회에서 공동으로 주관하게 되었다. 사천 관덕정에서는 장소 제공을 비롯하여 행사에 관련된 모든 현장 준비를 담당하고, 온깍지궁사회에서는 납궁례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그 진행 절차와 시행 방법을 고증하고 계획을 세우기로 하였다.
▶장소
납궁례 장소는 응당 사천 관덕정에서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또 문제가 되는 것이, 향촌 할매가 집궁한 장소인 사천 관덕정은 현재 지방 문화재로 등록 관리되고 있고, 정작 활터는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렇기 때문에 옛 관덕정은 그대로 있지만, 건물만 있을 뿐 과녁도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납궁례의 취지가 전에 쓰던 건물에서 하는 것이 한층 깊기 때문에 옛 건물에서 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과녁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행사 진행 순서 중에 과녁에 배례를 하는 절차가 있기 때문에 과녁은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과녁은 온깍지궁사회에서 쓰는 솔포를 갖다가 임시로 설치하기로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전날 모여서 습사를 하고 계획을 상의하는 곳은 새 관덕정이지만, 행사는 옛 관덕정사에서 하기로 하였다.
▶진행방법
이 일을 주관하는 주체는 사천 관덕정과 온깍지궁사회이다. 그래서 모든 행사를 두 단체의 협의로 하기로 하였다. 관덕정은 행사에 소요되는 모든 것을 준비하고 온깍지궁사회는 납궁례에 대한 고증과 홍보, 그리고 방법에 대해 연구 종합하여 그날 행사를 이끌기로 했다. 그리하여 관덕정과 온깍지궁사회 임원들이 서로 전화를 통하여 긴밀하게 일을 상의하여 추진하였다.
납궁례에 관한 정보는 윤준혁 고문님이 대부분 제공하였다. 그것을 기본으로 하고 흔히 볼 수 있는 은퇴식에 준하게 준비하였다.
▶홍보
온깍지궁사회 홈페이지에 납궁례를 한다는 공고를 내었고, 또 디지털 국궁신문 운영자인 이건호 접장과 상의하여 행사 실시 일주일 전에 국궁신문 중요 기사로 한 차례 취급하여 될수록 많은 활량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납궁례는 거기에 관여하는 사람 몇몇만의 행사가 아니라 국궁계 전체의 행사이기 때문이다.
▶납궁례 기념패
지난 7월 1일은 성낙인 선생의 집궁회갑이었다. 그의 선친 성문영 공에 이어 아들까지 집궁회갑을 하는 특이하고 경탄할 만한 일이기에 온깍지궁사회에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성선생에게 집궁회갑 기념패를 만들어 드렸다. 그 분이 오늘날 활쏘기에 기여한 것에 견주면 실로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이제 막 출범한 우리 모임에서는 나름대로 그렇게 하는 것이 그 분에 대한 예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이다. 향촌 할매의 납궁례는 한 사람의 생일잔치나 은퇴식하고는 다르다. 납궁례라는 의식이 뿌리깊은 역사의 산물일뿐더러 그 어려운 결단을 하여 오늘의 우리에게 그 생생한 현장을 볼 수 있도록 베풀어준 향촌할매의 공덕은 실로 큰 것이다. 그래서 작은 선물이지만, 온깍지궁사회에서는 역시 납궁례 기념패를 하나 해드리기로 하였다.
5.전야
우총무가 아침에 청주에서 출발하여 점심이 조금 지나서 이석희 행수와 합류하고 사천으로 향하다가 남강 휴게소에서 윤득수 최예임 부부와 다시 합류하였다. 사천으로 들어서면서 사천시가 된 내력을 이행수가 설명하는데, 말인 즉슨 삼천포시가 사천시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속된 말에 '삼천포로 빠진다'는 그 '삼천포' 때문에 이미지가 나빠서 사천시로 바꾼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삼천포라는 이름은 지도에서 사라지게 되었으니, 이걸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길도 모르고 무턱대고 직진만 하는 이행수의 운전대에 운명을 맡기고 차 두 대가 움직였다.
그런데 웬 걸? 이번에는 한 번도 실수를 하지 않고 사천 관덕정 옛 건물이 있는 공원 입구에 도착했으니, '장님 문고리 잡는다'든가 '황소가 뒷걸음질 치다 개구리 밟았다'든가 하는 속담이 떠올랐다. 뒤따라온 윤득수 명궁도 이게 웬 일이냐고 눈이 휘둥그래졌는데, 더 놀란 건 이행수 자신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리!
행사 장소를 둘러보고 새로 짓는다는 새 관덕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앞서가던 이행수 차는 이리 갔다가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지고, 온 곳으로 되돌아갔다가 행인을 붙잡고는 입씨름을 하다가 다시 되돌아오기를 몇 차례 반복하다가 겨우 공설 운동장을 지나서 언덕을 넘고 골짜기 건너편에 입구 포장공사를 한창 하는 중인 관덕정에 도착했다. 관덕정은 바야흐로 공사중이었다. 전에 있던 관덕정은 공원 한 가운데 있고 과녁 바로 밑에 분수가 놓여있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그래서 민원이 하도 빗발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관청의 협조로 활터를 옮기는 중이었다. 활터의 살림살이도 절반밖에 옮기지 않은 상태였다.
우리가 도착하자 최위수 부사두님과 최삼수 총무님이 반가이 맞으신다. 납궁례 건으로 이행수와는 많이 통화를 해서 사정을 잘 이해하고 계셨다. 그래서 납궁례에 관한 것을 간단히 상의 드렸는데, 안타까운 것은 사두님이 병중이셔서 서울 모 병원에 입원해계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최부사두님께서는 유학에 대한 공부가 깊으신 분이어서 제례같은 절차에는 아주 밝으시다고 총무님이 설명해주신다. 자세한 것은 내일 아침에 상의드리기로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회원들이 속속 도착했다. 이건호 접장의 가족이 저물 무렵에 도착했고, 남상인 접장 부부와 박중하 접장이 곧 오고 나니 정이 시끌시끌 해졌다.
아무리 저물어도 활량들이 습사를 안 하면 안 되지 않겠나? 하는 경상도 특유의 사투리로 윤명궁이 강조를 하길래 3순 편사를 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석희, 윤득수, 김종숙, 박중하가 한 편이 되고, 남상인, 정진명, 최예임, 이건호가 나머지 한 편이 되어 습사를 시작했다. 물론 획창을 '벼언~'으로 하면서. 그런데 날이 어두워져서 2순을 마칠 수밖에 없었는데, 남접장의 편이 저만큼 앞서갔다. 저녁내기였는데 화살을 주워들고온 윤득수 명궁이 칠판에 숫자를 지우고 써가며 나름대로 셈을 하더니 결과가 갑자기 무승부로 변했다. 그 기막힌 셈법에 다들 감동을 하고 있는데 주위는 벌써 어두워졌다.
늦은 저녁을 먹고 여관을 잡고, 일행은 이행수의 인도로 노래방으로 향했다. 노래방 속의 풍경은 가관이었다. 한창 목소리를 높이는데 느닷없이 화면이 멈추고 노래가 끊기지를 않나? 그래서 이 방으로 옮겼다가 다시 원위치하고. 이러다가 한 시간을 보냈다. 이건호 접장의 두딸 원영이와 수영이는 지루했는지, 우총무가 음료수를 사다줘도 안 먹는다고 하며 몸을 비비꼬았다. 그래서 이접장은 중간에 식구들과 먼저 여관으로 돌아갔다.
11시가 다 되어서야 여관으로 돌아왔다. 내일 행사에 대한 간단한 논의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침 그때 조영석 교장이 도착했다. 그래서 국궁논문집 후원금을 8월 31날로 마감한다는 것과, 포천목궁이 보존회를 만드는 일을 추진 중이라는 것과 교직원궁사회가 곧 출범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우총무가 전했다. 그리고 일년에 두 번 있는 대회를 원만하게 치루기 위해서는 우총무가 맡고 있는 홈페이지 관리와 분리시켜서 그 일만 다른 사람이 맡아야 한다는 의견을 내었다. 우총무의 업무가 너무 많으니, 말하자면 홈 관리와 대회 운영을 분리하자는 것이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눈치빠른 윤득수 명궁은 이자윤 접장을 지목했다. 그러나 이접장은 대회 날 시지를 쓰지 않는가? 하는 의견을 우총무가 말하는 사이 이행수가 윤득수 명궁이 적임자가 아니겠느냐는 말이 떨어지고 윤명궁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박수가 터졌다. 그래서 대회를 담당하는 사람의 직책은 '권무'로 하기로 하였다. 윤권무의 소감은, 창원에서부터 우총무와 이행수가 같은 차를 타고 오면서 속닥거리는 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절대로 그런 얘기 한 적이 없다고 발뺌(?)을 했다.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지만.
이 회의만 하고 잠자리에 들 생각이었는데, 윤준혁 고문님이 주신 축문을 우총무가 정리하는 사이에 조교장이 전라도 쪽의 논문집 반응을 전하면서 사법 얘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그래서 축문 작성이 다 끝나고도 한참 뒤까지 이야기가 끝이 날 줄 몰랐다. 아마 두 시를 넘긴 모양이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무슨 행사가 있으면 조교장님한테는 행사일정을 하루 늦춰서 알려주고 우리끼리만 모여서 준비를 하기로 하자고 하여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다.
사내들이 이러고 있는 사이 여자들도 한 방에 모여서 포도를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는데, 그 때 이야기의 압권은 남상인 부부의 사랑 이야기. 남상인 부부는 중학교 때부터 사귀기 시작해서 결혼까지 이른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경희라는 사춘기 처녀가 오빠의 친구를 보고 반해서 '오빠오빠' 하며 따르다가 결국은 골인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 그리고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니, 부부간 금슬 좋은 것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나 칼로 물베기 운동을 하지 않으면 무슨 재미로 사누? 맨날 재떨이 날리고 밥 굶기를 먹기보다 더하는(?) 누구네 집하고는 대조되네.
그리고 이건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는 승질 내지는 질투나는 얘긴데, 저녁 밥 먹을 때, 남접장이 자정에서 일곱 연거푸 몰기를 해서 7몰기패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왜 하는 거야? 요새 우총무가 7연 땅몰기 하는 것을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라면 약올리는 것인데, 그런 걸 알 리 없는 이경희 여사의 자랑이니, 이건 정말 남편에 대한 순수한 자부심이렷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일곱 연몰기라? 나는 언제나 불을 면하나?
그건 그렇고. 이 날 윤고문님한테서 설명을 듣고 온 이석희 행수와 우리가 상의한 납궁례 절차는 대충 이러하였다.
먼저 간단한 소개가 끝난 다음에 납궁례를 행하는데, 사천 관덕정 사두가 좨주가 되어 행사를 진행한다. 좨주가 먼저 강신을 하고, 세잔을 하면서 절을 네 번 한다. 이때 첫 번째 절이 끝나고 엎드려 있을 때 독축을 한다. 그 다음에 납궁자가 잔을 올리고 네 번 절을 한다. 그리고 이어 소지, 납궁, 철상을 한다. 이러한 절차가 다음 날 최위수 부사두님과 상의하는 과정에서 조금 변경되었기에, 변경되기 전의 모습을 여기 적어두는 것이다.
6.납궁례 절차와 실제
아침. 이건호 접장이 행사가 걱정되는지 방마다 소리치며 돌아다닌다. 이접장이 소리치고 돌아다닐 시간이면 한 시간쯤 더 자도 되는 시간이다. 그러니 소리만 복도를 울릴 뿐, 일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상소리를 음악으로 알고 잠들을 자는가? 하여간에 한 시간을 더 끌다가 24시간 운영한다는 사천 해장국 집으로 갔다. 한 그릇씩 먹고 숟가락을 놓으려는데 좌총무가 도착하고 진해 벽해정의 이자윤 접장과 황성춘 접장이 도착했다.(황접장은 그 날 밤 온깍지궁사회에 가입했다.)
이제 바빠지시 시작했다. 여자분들은 맞춘 떡을 찾고 제수 음식을 사기 위해 장보러 가고 나머지는 짐을 챙겨서 관덕정으로 향했다. 관덕정 사우들이 많이 나와서 의자를 정리하고 젯상을 차리고 청소를 하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먹물과 붓을 꺼내놓고 이자윤 접장이 작은 글씨로 축문을 적어나갔다. 시간이 가면서 사람들이 속속 도착했다. 함양에서 노용신, 송길명, 박세철 접장이 도착하고 마르스의 한병철 접장이 도착했다.
최위수 부사두님, 이행수, 우총무가 모여서 진행절차를 상의했다. 윤고문님이 가르쳐준 대로 관덕정 사두가 좨주가 되어서 그 절차에 따라야 한다고 말씀드리자, 최부사두님은 납궁자 자신이 좨주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셔서 한 동안 좨주를 놓고 의견이 맞지 않았다. 그런데 윤고문님은 옛날 천양정에서 행한 납궁례를 보고 말씀하신 것이고, 최부사두님은 유학을 오래 공부하셨고 향교에 관여하셨기 때문에 이런 절차에 아주 밝으시다. 그래서 아무래도 관덕정에서 하는 것이고 최부사두님은 예법에 밝은 어른이시고 해서 부사두님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였다. 대신에 모든 절차을 최부사두님이 집전하여 주관하기로 하였다. 이때 상의한 것을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강신
-세잔
-초헌
-아헌
-종헌
-유시(첨잔)
-소지
-납궁
-철상
먼저 제수 진설. 납궁례는 자신이 집궁한 관덕정이라는 활터에 활을 반납하는 것이지만, 이 모든 것을 굽어보고 보살펴준 것은 하늘과 땅 그리고 선배 활량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리에 모시는 신 또한 넷이다. 천신, 지신, 가신(성주), 관신. 따라서 제수는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함께 하는 삼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채운다. 그래서 천과, 지과, 인과를 갖추어야 하니, 천과는 하늘에서 딴 과일로 대추, 밤, 곶감, 배, 사과가 되고, 지과는 땅에서 거둬올린 과일로 수박, 귤, 바나나 같은 것이 되고, 인과는 사람이 빚어만든 것이니, 유과가 거기에 해당한다. 그래서 젯상 맨 앞에 조율시리, 사과, 귤, 바나나, 수박, 유과 순으로 놓고, 그 뒷줄에 포, 팥시루떡, 돼지머리, 전 같은 것을 진설한다. 원래 고사를 지낼 때는 흰무리를 쓰고 팥을 쓰지 않는다. 귀신은 붉은 색을 싫어하기 때문에 팥을 쓰면 귀신이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건한 제사를 지낼 때는 일부러 팥떡을 놓는데 그것은 잡신이 꼬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촛불을 켜고 네 신께 올리는 잔 넷을 놓는다. 그리고 그 뒤에 궁시를 놓는다.
한 가지 곤란한 것은, 관신(貫神)에게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관덕정은 지금의 선인리에서 구암리로 활터를 옮기는 중이라 납궁례가 열리는 이곳 관덕정에는 과녁이 없다는 점이었다. 과녁을 치웠기 때문에 무겁은 그대로이지만 과녁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온깍지궁사회에서 활쏘기한마당 때 쓰는 솔포를 갖다가 치는 수밖에 없었다. 가운데 관만 있는 솔포를 쳐놓고 보니 고풍스런 맛이 오히려 납궁례의 분위기에는 더 잘 어울렸다.
이렇게 솔포 설치와 제수 진설을 마치자 행사가 시작되었다. 먼저, 사대에 의자를 내놓고 내빈을 앉으시게 한 다음, 사회를 맡은 우총무가 개회선언을 하였다. 그리고 행사를 주관하는 사천 관덕정의 최외수 부사두가 환영사를 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환영사 중에 온깍지궁사회라는 말이 들어있는데, '온깍지'를 발음하실 때 <온>의 아주 길 게 끌어서 발음하시니 짧은 뜻인 <반>과 아주 잘 대조가 되었다. 나중에 환영사를 받고 보니 '궁사'의 <사>도 <아래아(.)>를 쓴 <사>로 쓰셨다. 그것이 오히려 더 고풍스럽고 그럴 듯한 맛을 주었다.
그리고 이번 행사를 주최한 온깍지궁사회의 조영석 교장이 축사를 했고, 이석희 행수의 경과보고에 이어 최삼수 관덕정 총무가 향촌할매의 약력을 소개했다. 이어 온깍지궁사회에서 마련한 납궁례 기념패를 조교장이 향촌할매에게 전달하였고, 모시 한복으로 흰 치마에 노란 저고리를 곱게 입은 김미분(사천 낙홍정) 여무사가 꽃다발을 안겨두렸다. 그리고 최외수 부사두가 관덕정에서 드리는 꽃바구니를 전했다. 그럴 때마다 박수가 크게 터졌다. 기념패를 받고, 꽃다발을 받고, 향촌할매가 인사말을 했다. 종이에 적어온 내용을 작은 목소리로 읽으시는데, 굳이 일어서시려는 것을 사회자가 그냥 앉아서 하시라고 해서 앉아서 인사말을 했다.
이렇게 식전 행사가 간단히 끝나고 젯상이 마련된 관덕정 건물 안으로 장소를 옮겼다. 최부사두가 집전하는 대로 행사가 진행되었다. 박중하와 이문옥이 집사가 되어 향촌할매가 잔 올리는 것을 도왔고, 한복을 곱게 입은 김미분 여무사가 향촌할매를 부액하였다. 향촌 할매가 향을 피워서 강신을 한 신들께 절을 두 차례 올렸다. 향촌 할매의 몸이 수그러질 때 '배에~!'하며 홀부르기가 뒤따랐고, 바닥에서 몸이 들릴 때 '음~'하는 소리가 뒤따랐다. 이렇게 홀 부르는 것을 '창홀'이라고 하고 홀기 맡은 사람을 집례라고 하는데, 참석자가 많아서 잘 안 들릴 경우에는 두 사람이 같이 부르는데 그때는 동창과 서창이라고 한다. 내내 최부사두가 홀을 불러서 분위기가 더욱 엄숙하고 좋았다.
강신이 끝나고 세잔. 집사가 내려준 술잔에 술을 반 잔만 따라서 헹군 다음에 그 술을 다음 잔으로 넘겨 씻고 씻고 하여 네 잔을 씼었다. 그리고 퇴주그릇에 부은 다음에 절을 두 번 했다. 이때 고사에 쓰는 술은 맑은 술이 아니라 막걸리를 쓴다.
그리고 드디어 초헌. 엷은 쑥색 치마에 들인 듯 만 듯이 들인 노란 색 저고리를 곱게 입은 향촌할매가 술을 올리고 절을 네 번 한다. 모셔야 할 신이 네 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독축이 있기 때문에 절을 한 번 하고 엎드려 읍을 한 상태에서 이석희 행수가 축문을 꺼내어 유장한 목소리로 독축을 한다. '유~ 세차......'. 이때 카메라가 곳곳에서 터진다. 그렇지만 분위기는 아주 진지하고 엄숙해서 카메라 터지는 소리가 가신 뒤에는 그 많은 사람들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 고요한 공간을 가득 채운 것은 입추 지나서 더욱 애절해진 매미소리였다. 독축이 끝나고 홀부르는 소리 따라 나머지 절을 세 번 한다.
그리고 아헌. 향촌이 옆으로 물러서고 온깍지궁사회 교장 조영석이 술을 올리고 절을 두 번 한다.
그리고 종헌. 오연이 여무사가 전국의 여무사들을 대표해서 술을 올리고 절 두 번.
그리고 여태까지 홀을 부르느라 옆에 서 있던 최위수 부사두가 첨잔을 하고 절 두 번.
그리고 소지.
그리고 납궁. 향촌 할매가 젯상에 놓여있던 궁시 일체를 들어서 최위수 부사두에게 건넨다. 활과 함께한 54년 여무사의 삶이 이렇게 마감되는 것이다. 카메라가 한꺼번에 터진다.
그리고 철상인데, 철상하기 전에 몰기를 바라는 활량들이 이 뜻깊은 자리에서 절을 올린다. 김미분 여무사를 시작으로 최예임, 정진명, 이석희 부부, 이문옥, 이자윤, 황성춘, 박중하, 남상인이 절을 올렸다. 절을 하기 전에 입을 벌리고 있는 돼지에게 푸른 지폐를 꽂는데, 옆에서는 '더 많이 꽂아. 그래야 몰기허지' 하면서 박장대소 한다.
처음에 엄숙하게 시작을 해서 뒤로 오면 모두가 참여하여 흥겨운 잔치가 되는, 우리나라 전통 의례의 특징이 납궁례에서도 그대로 연출되었다.
이렇게 해서 청사에 길이 남을 세기의 납궁례가 끝이 났다. 이어 기념촬영을 하고, 이제는 지방문화재로 등록된 관덕정에서 모두들 수박과 떡을 먹으며 시작과 끝을 분명히 매듭지을 줄 아는 향촌할매의 높은 뜻을 기렸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이 하나 있다. 다름이 아니고, 납궁례를 할 때는 그 주인공의 생애 마지막으로 활을 딱 한 순을 낸다고 한다. 물론 이때는 삼현육각을 잡히고 호중을 하며 정식으로 한다. 지화자를 불러가며 마지막 시사를 축하하는 것이다. 그런데 향촌 할매는 몸이 많이 수척해져서 도저히 활을 끄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지난 번 복놀이 때 마르스의 취재 요청 때도 겨우 귀까지만 끌 수 있었다. 그 이상은 무리였다. 그래서 이 부분은 생략하기로 하였으니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앞으로 납궁례를 하는 분들은 이 부분을 넣어야 완벽한 예법이 된다.
내내 둘러보며 촬영을 한 한병철(마르스 사장)은 '가슴 벅찬 감동'이라는 말로 납궁례 소감을 말했다. 동아시아에서 어떤 나라에도 이와 같은 뜻깊은 행사가 없다는 것이다. 국궁이 지닌 그 깊은 세계를 새삼 확인하고 놀랐다며 꼭 활을 배우겠다고 했다.
행사가 끝나고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했다. 사천 냉면이 유명하다고 해서 모두 사천냉면 집으로 갔는데, 멀리서 온 신해준 접장이 점심을 샀다. 우총무가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 몰래 나가서 냉면값을 계산한 것이다. 이런! 이런!
7. 식이 끝나고
모두들 그냥 헤어지기 섭섭하다며 인근 수양정으로 가서 습사를 하자고 한다. 그래서 길이 먼 이건호 가족만 먼저 떠나고 나머지는 모두 수양정으로 향했다. 거기서 다시 함양 호연장의 활량들까지 합세하여 두 편으로 나누어 편사를 했다. 물론 '벼언~'하는 획창을 하며.
거기서도 기념촬영을 하고 출발했는데, 모두들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다. 다음 광주 대회를 기약하고 차에 올랐다. 오른 것까지는 좋은데 사천을 벗어나서 차가 밀리는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는 중에 문득 우총무의 전동이 행적이 묘연했다. 아무도 실은 사람이 없다는 것. 임자인 우총무가 안 챙겼으니, 당연한 일. 사진 찍는다고 설치다가 깜빡 한 것이었다.
우총무는 하룻밤 더 자고 진해 벽해정과 마산 용마정을 들러서 갈 요량으로 하루 일정을 더 잡았다. 그러자 인근인 창원의 윤득수 부부와 진해 벽해정의 이자윤, 황성춘 접장이 합류하여 어두워진 마산 용마정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늘 가던 그 해물탕 집에 갔을 때는 아홉시가 다 되었다. 거기서 또 무슨 이야기들이 많은지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큰 소리로 웃고 하다 보니 열 시가 후딱 넘었건만, 아무도 일어나자는 말을 꺼내지 않으니, 주인장이 우리 방문을 닫고 늦은 저녁을 먹을 때에야 비로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참! 여기서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진해 벽해정의 황성춘 접장 이야기이다. 수양정에서 습사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는데, 온깍지궁사회 회원들만 기념촬영을 하겠다고 했는데 미적거리면서 빠지지를 않는 것이다. 그래서 얼떨결에 사진을 같이 찍었는데, 납궁례를 구경하는 동안 마음이 이미 기울어 온깍지궁사회 가입을 결정한 뒤였다. 그래서 저녁을 먹으며 윤득수 명궁이 가입을 권했더니, 그 자리에서 기꺼이 동의했다. 그래서 황접장은 온깍직궁사회 회원이 되었다.
우총무는 이석희 행수 집에서 하루를 자고 윤준혁 고문님이 추진 중인 오륙도정으로 향했다. 오륙도정은 부산시 남구청의 체육공원 안에 만드는 중이다. 우리가 도착하니 김창현 접장이 수건을 목에 두르고 풀을 깎는 것을 돕다가 반긴다. 두 산줄기가 양쪽으로 아늑히 감싸안은 곳에 백운포라는 포구가 있고, 거기를 흙으로 메워서 터를 만든 것이다. 바다 왼편에 오륙도가 떠있고, 오른쪽에 한국해양대학교가 자리잡은 조도가 서있다. 정이름을 백운정이라고 하지 않고 오륙도정이라고 한 것은, 이미 백운정이라는 이름이 전국에 몇 개 있기 때문이라고 김접장이 설명한다.
윤고문님한테 전화를 하더니 오시는 중이라고 한다. 그래서 횟집에 올라가서 앉아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리나 멀리 윤고문님이 걸어오신다. 횟집으로 모셔서 납궁례 잘 끝난 이야기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윤고문님의 말에 의하면 이전에도 납궁례를 행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1938년경(39년인지 정확하지 않음)에 전주 천양정에서 이우봉(전에 행수에게 말하실 때는 이유봉이라고 했음)이라는 분이 91세 때 납궁례를 했고, 윤고문님이 거기 참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방 직전에 서울 황학정에선가도 한 사람이 있다고 얘기만 들었다고 하신다. 그러니까 반세기만에 다시 납궁례가 살아난 것이다.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서 고속터미널로 향하다가 그 길목에 있는 사직정에 들러서 사진을 찍었다. 마침 오동하 접장이 활을 쏘다가 맞이해서 반가웠다.
밤차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11시 반.
6.참가자
최위수(관덕정 부사두), 박영보(전임 사천시궁도협회장), 김기도(관덕정 사범), 박경구(낙홍정 사두), 최삼수(관덕정 총무), 배윤선(향촌할매 이질녀), 본정 사원 여러분(김형섭, 김용호, 조영문), 그리고 동네 어른들.
조영석, 이석희, 김종숙, 윤득수, 최예임, 정진명, 이문옥, 남상인, 이경희, 이건호 가족, 신해준 가족, 노용신 가족, 송길명, 박세철, 한병철, 박중하, 김미분, 황성춘, 이자윤, 오연이
7.사진
납궁: 관덕정 최위수 부사두에게 궁시를 건네주는 향촌할매
뒷줄 왼쪽부터 정진명, 노용신, 이문옥, 박중하, 이석희, 남상인, 황성춘, 이자윤, 박용운(수양정), 박세철
가운데줄 왼쪽부터 이건호, 최홍경, 최예임, 김종숙, 이경희, 배윤선, 김미분, 박경구, 김용호, 윤득수, 박만태(남강정)
앞줄 왼쪽부터 최삼수(선 분), 조영석, 최위수, 향촌할매, 오연이, 박영보, 김기도
8.납궁례 자료
9.뒷이야기
얼마 전 우암정의 장창민 접장이 집궁례에 대한 절차를 알고자 온깍지궁사회 홈페이지 응접실에 올린 적이 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답글이 전혀 올라오지를 않는 것이다. 그래서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 집궁을 하면서 어른들께 인사만 했지, 고사를 지낸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사람이 계속 배울지 어떨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궁례 역시 납궁례의 그것처럼 행하기 어려운 그런 행사이기 때문에 답글이 올라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납궁례로 그 고민이 싹 해결되었다. 납궁례의 절차를 조금만 바꾸면 그대로 집궁례의 그것이 되기 때문이다. 시작과 끝은 같은 것이다. 태어남과 죽음이 한 가지인 것처럼. 따라서 납궁례의 절차는 집궁례의 그것과 같이 하면 된다. 이 점은 한두 사람의 고민이 아니었던 것 같다. 햠양으로 향하던 박세철 접장의 일행이 이행수에게 전화를 걸어서 고생했다는 위로의 말을 할 때 이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납궁례를 보니 집궁례도 그렇게 하면 되겠다는 것이다. 정답이다.
이 납궁례가 얼마나 뜻깊은 행사인가 하는 것은 무술잡지를 운영하는 실무자인 한병철의 말에서도 알 수 있지만, 다시 보기 어려운 것이기도 해서 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면 누구나 구경하고픈 것이다. 그런 마음이 다음과 같은 감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납궁례를 참관하며'라는 제목으로 온깍지궁사회 홈페이지 방명록에 올라온 글이다.
'01.8.26.아침 숫처녀가 시집가듯 설레는 맘으로 생전 처음보는 납궁례를 참관하러 사천 관덕정으로 갔다. 김향촌할매가 고운 모습으로 평생을 자신과 함께 한 귀한 활과 전통을 자신이 집궁한 관덕정 사두께 정중하게(참으로 아끼는 물건을 전하듯) 바치는 의식은 참으로 경건한 순간이었으며, 우리 궁사들의 마지막 유종의 미로 나의 뇌리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또한 여러 준비과정에서 말로만 듣던 포관을 온깍지 궁사님들과 함께 설치하면서, 전통을 찾고 지키려는 고귀한 정성과 맘에 흠뻑 감동되었다 마지막으로 흔쾌히 부족한 저의 입회를 허락하신 조영석교장님과 이석희 행수님, 윤득수 명궁님, 정진명 우총무님 그리고 함께 자리를 같이한 여러 온깍지 궁사님들께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활을 놓을 때가지 견마지로를 다할 것을 다짐하며 감사와 존경하는 맘으로 이 글을 바칩니다.
2001.8.27일 진해벽해정. 황성춘올림.
10. 다시 뒷이야기
납궁례는 무술잡지 마르스에서 취재해갔다. 그리고 그 기사가 2001년 9/10월 호 스페셜 기사로 2쪽에 걸쳐 취급되었다.
11. 마지막 이야기
2001년이 저물 무렵에 향촌할매의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2002년 3월 21일, 행수의 핸드폰이 울리고 향촌할매의 이질녀로부터 부고 소식이 날아들었다. 오랜 병고를 끝내고 입산하신 것이다. 진주의 동생 집에서 눈을 감기 전 정신이 혼미해진 가운데서도 나는 마지막까지 하고픈 것 다하고 가니 여한이 없다며, 자신이 받았던 시지며 활 관련 유품은 온깍지궁사회의 이행수님한테 모두 전해주라는 말을 남기셨다고 하니, 마지막 두 해 동안 우리가 보여준 것이라고는 찾아가서 옛날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드린 것 뿐인데 그것이 죽음 앞에서도 잊지 못할 일이었다면, 그 동안 우리 국궁계가 원로 구사들 대접을 너무 소홀하게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송구한 생각이 들었다. 23일, 진주에서 화장을 하였으니, 한국의 무림에 아름다운 자태로 잠시 내려 앉았던 우아한 홍학 한 마리가 다시는 오지 못할 멀고 먼 길을 떠나간 것이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기를!
<정리: 우총무>
납궁례 자료
1. 환영사
歡迎辭
짜증스러웠던 한더위도 꼬리를 감춘 뜻한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고 結實의 季節에 泗川에서 잔뼈가 굵어질 少女時節 由緖깊은 이곳 觀德亭에서 執弓하여 女武士로서 全國各地를 누비며 天賦의 技術을 떨쳐 名聲을 높여 왔으며 지금은 晉州 倉林亭에서 持續 修練 中 어연간 五十四年 間의 경륜으로 七十三歲의 老後期를 갖게 된 金香村 弓士님의 納弓禮를 追慕하기 위하여 釜山 社稷亭 李석희 行首님을 爲始하여 京鄕各地에서 오신 온깍지弓士會 사友님들이 옛 故場의 향수를 찾아 本亭에서 納弓禮를 擧行하게 된 것을 眞心으로 歡迎해 맞이하는 바입니다.
이곳 觀德亭은 1918년도에 泗川邑 城址에 創建되어 晉州牧의 武科 修練의 射亭으로서 慶北 大邱 觀德 慶南의 泗川 觀德 全北의 南原 觀德 全南의 光州 觀德 濟州 觀德 등 五個 觀德을 中心으로 統營 閑山亭에서 科擧場으로 年 75명의 武科 及第를 輩出한 곳이라 오날의 行事가 더욱 뜻깊게 생각됩니다.
지금 本亭은 公園의 觀光散策 行人의 危險의 負擔을 덜기 위하여 龜岩里에 重建 中에 있으며 今年度 八月에는 慶南生活體育弓道大會를 開催할 것입니다.
오날 納弓하시는 金香村 弓士님은 女性의 美貌와 德品과 性品을 고루 가추신 어머니로서 할머니로서 이웃간의 和睦과 집안간의 友愛로 社會의 稱誦이 자자할 뿐 아니라 天倫에 의한 順理 다 지켜 오신 분입니다. 納弓禮를 畢한 後에도 浩然之原을 이루고 長壽 健康하옵시기를 祈願하오며 오날 弓道人의 規範行事를 가지신 온깍지弓士會 友님 各 家庭에도 幸運이 充滿하시기를 祈願하면서 歡迎의 人事에 가름하오며 끝으로 時間 나시는 대로 우리 故場에서 즐거운 하루가 되시기를 밀어맞이해 않습니다. 大端히 感謝합니다.
끝.
2. 축사
안녕하십니까?
먼저 이런 자리를 선뜻 마련해주신 관덕정 최위수 부사두님 이하 사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 올립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빛내주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오신 여러 접장님들께도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희 온깍지궁사회는 전통을 올바르게 계승하는 일을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고 출범한 단체입니다. 우리의 활쏘기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연륜을 자랑하는 만큼 참으로 다양한 풍속이 전국의 활터 곳곳에 살아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모습을 잘 보존하여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려고 합니다.
오늘 시행되는 향촌 할매의 납궁례가 다양한 활터의 풍속을 잘 증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자랑스런 풍속을 오늘을 사는 우리가 소홀히 한다면 우리는 후손들에게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한 평생을 활로 살아오신 향촌 할매의 모습은 뒤따르는 우리 무사들에게는 온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큰 자랑거리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이렇게 훌륭한 선배 접장님들이 수도 없이 많으며 오늘의 우리는 그 분들의 그런 노력과 애정 덕분에 이 즐겁고 좋은 무예를 이처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쉽지 않은 납궁례를 우리에게 허락한 향촌 할매의 용기를 진심으로 존경하며 건강하신 모습으로 여생을 즐기시고 오래오래 장수하시기를 빕니다.
온깍지궁사회 교장 조영석
3. 향촌 인사말
고맙습니다.
오늘 저의 납궁례를 마련하여 주신 최위수 이하 관덕정 접장님들, 그리고 온깍지궁사회 조영석 교장님,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저는 1947년에 이곳에서 집궁한 이래 54개 성상을 활로 보냈다 하지만, 국궁계를 위해서 크게 한 일이 없는데 이토록 귀중한 자리를 마련해주신 것은 모두 선배무사님들의 은덕으로 압니다.
비록 짧은 세월이었지만, 활 때문에 건강하게 살 수 있었고, 이렇게 영광스러운 날까지 맞게 되었습니다.
모쪼록 활을 토앟여 모두들 건강한 모습을 국궁을 위해 힘써주시기를 빌며 간단한 인사말로 대신합니다.
고맙습니다.
4. 김향촌 약력
김미이(金未伊) 여무사의 호는 향촌(香村)이고 아명은 향자(香子)로, 본명보다는 향촌이라는 호를 많이 쓴다. 1929년 경남 사천에서 경주 김씨 경팔(慶八)의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 몸이 매우 허약하였는데, 열 아홉 살 되던 해인 1947년에, 사천산성에 위치한 관덕정에서 활쏘기하는 것을 우연히 구경하다가 활쏘기가 건강, 특히 위장병에 좋다는 조삼동(당시 사범)과 목주영(총무)의 설명을 듣고 집궁하였다.(사천 관덕정은 1918년에 생긴 유서깊은 활터로 당시 전국의 정은 27개였음) 집궁후 열심히 습사한 결과 90일만에 몰기를 하였고, 활을 쏘면서 원래 허약했던 몸은 점차 건강해졌다.
4287년 마산의 추산정에서 실시한 궁술대회에서 여무사 부문 우승을 시작으로 입상 기록은 이루 다 헬 수 없을 정도이며 개인 우승만도 20차례나 하였다. 그리하여 1998년에는 전국대회 10회 우승을 축하하는 기념비를 창림정에 세웠다.
향촌은 궁체가 특히 아름다워서 대회장에 나가면 사람들로부터 나비 할머니 왔다는 이야기를 듣곤 하였는데, 이는 발시할 때 줌손을 과녁쪽으로 밀고 동시에 깍지손을 아주 가볍게 떼면서 뒤로 시원스럽게 내뻗는 동작이 마치 봄바람에 나비가 날갯짓을 하는 모양과 같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여무사 궁체의 모범이 되어 1954년에는 전주 천양정에서 주최한 대회에서 체법상(體法賞)을 수상하였다.
5. 축문
維
歲次 辛巳 七月 丙申朔 初八日 辛酉
온깍지궁사회
金香村 敢昭告于
顯 天神님
顯 地神님
顯 家神님
顯 貫神님
女武士 香村이 執弓한 지 어언 45년에 至하였으니 그 동안 四神님 前의 恪別하신 加護의 德澤으로 아무 탈 없이 丁亥年에 사천 觀德亭에서 執弓하여 구십일 만에 몰기를 하였고, 단기 4287년 마산의 추산정에서 실시한 弓術大會에서 여무사 부문 우승을 시작으로 이후 각종 전국대회에서 20여차례나 우승을 했으며 1954년에는 전주 천양정 대회에서 體法賞을 수상하는 등 선배 무사들의 厚德한 보살핌으로 弓術을 사랑해왔으나 現今에 와서 身上의 形便으로 不得已 納弓을 決心하고 四神님 前에 술과 음식을 禮로 차려 虔告하오니 많이 歆饗하시옵고 앞으로 여무사 김향촌이 無탈한 餘生을 보내면서 葬幸之道에 至하도록 引導하시고 지켜주옵시기를 懇切히 祈願하나이다. 尙
饗
첫댓글 사랑방에서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