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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사람의 턱뼈는 점차 작아지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입 속 공간도 작아져 사랑니가 자랄 공간이 부족해지게 된 것이다. 600만 년 전 인간과 침팬지가 공동 조상으로부터 갈라진 후 인간의 진화는 계속돼 왔다. 특히 문명이 본격적으로 발생한 1만 년 전부터는 이전보다 100배 정도 빠른 속도로 인류의 진화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최근 200여 년간 인간의 문명을 급격히 변화시키고 있는 각종 과학기술의 발달은 앞으로 인류 모습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은 외부 환경에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신체, 혹은 사회 구조를 가진 생물들이 살아남아 더 많은 후손을 남기게 된다는 게 요지다. 그런데 자연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던 인간은 과학기술을 통해 외부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게 가능해지면서 자연선택의 개념은 도전받고 있다. ‘자연’만이 가장 적합한 개체를 선택하는 진화를 넘어 인간 스스로 진화의 방향을 결정할 힘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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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에 대한 인간의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기계와 인간이 합쳐진 사이보그 형태로 인간이 진화할지 모른다는 주장도 있다. 신체적 결함도 기계의 힘을 빌려 얼마든지 극복하고, 머지않아 뇌 속의 생각마저 컴퓨터에 업로드할 수 있을 것이기에 그런 쪽으로 인간이 진화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하지만 진화는 특정 형질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후손을 더 많이 남겨야만 진행되는 것인데, ‘내 마음을 컴퓨터 속에 저장한 사람’이 ‘내 마음을 내 마음속에 간직한 사람’보다 더 많은 후손을 남길 수 있을 만큼 유리한 형질을 가질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다윈은 '인간의 유래'라는 책에서 본격적으로 인류의 진화를 다뤘다. 다윈은 결코 원숭이가 사람이 됐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사람도 다른 생물들처럼 이전에 살았던 조상 격인 생물로부터 진화했을 텐데, 사람과 공동 조상을 가졌을 확률이 가장 높은 생물은 사람과 비슷한 원숭이였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인류의 화석 가운데 보존 상태가 좋고 가장 오래된 화석은 약 35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우리처럼 두 발로 걸었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다. 인간의 조상은 약 180만 년 전부터 두뇌 용량이 커지면서 석기와 같은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고 신체 구조도 현생 인류와 비슷한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 이런 특징을 가진 인류의 화석에 대해선 ‘호모’라는 이름을 붙인다.
우리와 두뇌 용량, 신체 구조가 거의 비슷한 호모사피엔스는 지금으로부터 2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출현했다. 이들 중 일부는 아프리카를 떠나 여러 대륙으로 퍼져 나갔다. 유럽으로 진출한 호모사피엔스가 그곳에 살고 있던 다른 종인 네안데르탈인과 마주쳤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에 대해서는 보다 발달된 도구와 언어를 가지고 있던 호모사피엔스가 그렇지 못한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켰을 것이라는 주장과, 그보다는 서로 교류하면서 서서히 섞여 현생 인류로 변했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인류의 진화가 시작된 후 문화라고 불릴 만한 것은 약 5만 년 전부터 출현했다. 동굴 벽화를 비롯해 정교하게 만들어진 석기·골각기·조각품들이 세계 각지의 유적에서 쏟아져 나온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촉발시켰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사람을 다른 동물과 차별화하는 중요한 특징들이다.
대략 1만 년 전부터는 농경 문화와 동물의 가축화가 시작되고 많은 사람이 한곳에 모여 살게 되었다. 결핵·독감과 같은 전염병이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소수의 사람끼리 살다가 한꺼번에 많은 사람과 가축까지 집단 생활을 하면서 전염성이 강한 병균들이 번창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농경의 시작과 함께 기존의 다양했던 식단이 쌀·밀가루와 같은 몇 가지 곡물로 제한되면서 충치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도시와 국가가 형성돼 ‘내 편’ ‘네 편’이 갈리기 시작하고 이때부터 전쟁의 흔적이 많이 발견된다. 이런 부정적 측면들이 있긴 하지만 인류는 큰 무리로 모여 살면서 뛰어난 지적 능력을 발휘해 문명을 형성할 수 있었다.
다윈은 '인간의 유래'를 이렇게 끝맺는다. “우리는 인간의 훌륭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은 뛰어난 지성과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돕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귀한 인간이지만 신체 구조의 기원이 하등동물에게 있다는 것만큼은 여전히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진주현씨는
서울대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생물인류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저서로는 '인간과 유인원, 경계에서 만나다: 제인 구달과 루이스 리키'가 있다.
진화론과 갈등해온 창조론, 1990년대 ‘지적 설계론’ 확산
다윈과 교회
김윤성 한신대 교수,종교문화학과 | 제100호 | 20090208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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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출판 이후 한동안 진화·창조론의 격돌은 없었다. 본격적인 충통과시켰는데, 테네시주에서 일이 터졌다. 고교 교사 존 스콥스가 미국시민자유연맹을 대신해 총대를 메고 교실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다 주정부에 고소를 당한 것이다. 그래서 1925년 유명한 스콥스 재판, 일명 원숭이 재판이 열렸다. 스콥스는 주법을 어긴 혐의로 벌금형을 받았지만 배심원들에 의해 무죄 판정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대중은 성서에만 근거해 진화론을 비판하는 기독교인들이 편협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반면 재판의 후유증으로 주 교육위원들과 교과서 출판업자들은 오히려 진화론을 꺼리게 됐고 이런 상황은 30년 넘게 이어졌다.
1957년 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발사하자 상황은 급반전됐다. 미국은 과학 교육을 대대적으로 강화했다. 61년 진화론이 교실로 돌아오고 창조론이 교실 밖으로 밀려났다. 이때부터 진화·창조 논쟁의 제2라운드가 시작된다. 양측은 여러 주에서 소송을 제기했다. 지금도 계속되는 이 소송들은 두 패턴으로 나뉘지만 결과는 비슷하다. 창조론자들이 주정부를 향해 진화·창조론을 나란히 가르치게 해 달라고 요구한 소송들은 대개 창조론자들의 패배로 끝났다. 반면 창조론 교육을 재개하려는 창조론자들과 주변 관료들에 맞서 학부모·시민단체·과학계가 제기한 소송들은 대개 후자의 승리로 끝났다.
그 사이 창조론 진영에는 변화가 생겼다. 60년대에 과학으로 창조를 증명하려는 ‘창조과학’이 출현한 것이다. 창조과학은 우주의 나이는 6000년부터 1만 년이고. 창조는 엿새 동안 이루어졌고, 모든 생물은 처음부터 지금의 종 그대로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극단적 입장의 ‘젊은 지구 창조론’에 반발해 대진화(종의 분화)만 부정하는 유연한 ‘늙은 지구 창조론’이 등장했다. 90년대엔 후자로부터 ‘지적 설계론’이 갈라져 나오면서 창조론 진영은 다양해졌다.
지적 설계론자들은 대진화를 부정하는 한편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은 진화를 통해 생겨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토론을 가르치라’는 모토 아래 교실에서 진화론과 지적 설계론을 함께 가르칠 것을 요구해 조지 W 부시 정부 시절 큰 세력을 얻었다. 물론 극단적 창조론도 만만치 않아 2007년 켄터키주에 거대한 창조박물관을 건립하는 등 그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국내에서 진화·창조 논쟁은 81년 창조과학회 설립 이후 본격화됐다. 미국과 달리 국내에선 창조과학이 일부 근본주의 진영 뿐 아니라 개신교계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물론 자유주의나 신(新)정통주의 입장에서 현대과학을 수용하는 진화론적 유신론자들도 있지만, 그들은 소수다. 대세는 근본주의적 창조론이고 그중 강경한 ‘젊은 지구론’이 강세다. 미국에선 법정 소송들을 통해 양측이 치열한 토론을 벌여온 것과 달리 한국의 과학자들은 창조론자들을 무시하고 창조론자들은 자기들끼리만 논쟁한다. 사이버공간의 말싸움은 난무하나 제대로 된 토론은 찾아보기 힘들다.
생명은 어디에서 시작됐는가. 영혼은 육체보다 우월하고 인간은 선택받은 창조물인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답한다. 19세기 중반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입증한 뒤에는'그렇지 않다고' 믿는 사람이 늘어났다. 진화론이란 불빛은 신학의 시대를 끝내고 과학의 시대를 열었다.
다윈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200년을 건너뛰어 우리는 어떤 얼굴을 만날까. 그는 지질학자로 출발했지만 지식의 소통과 융합을 이룬 생물학자, 혁명적 사상가로 진화했다. 수많은 학문 분야를 망라한 통섭자였다. 생물학자 프란시스코 아얄라는 그를 이렇게 기린다. “다윈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99%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알던 1%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19세기 초반 진화론은 유럽 사회의 ‘이단 사상’이었다. 다윈은 남미 대륙을 탐험한 비글호(영국 해군 측량선) 항해 후 1837년 자연선택 이론을 처음으로 구상했다. 하지만 '종의 기원'은 20년이 더 지나서야 발간됐다. 더욱이 '인간의 유래'를 출간한 것은 다시 12년이 흐른 뒤였다.
무엇이 그를 극도로 신중하게 만들었을까. 학자들은 “다윈 스스로 진화론이 지닌 폭발성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특히 외부 환경에 따라 종의 생존이 결정된다는 논리는 유물론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종의 기원'은 플라톤 이후 쌓아온 서양의 정신세계를 뒤흔들었다. 이를 간파한 사람은 유물론자였던 카를 마르크스였다. 그는 1869년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비록 조잡한 영국식 문체로 설명하고 있지만 이 책은 우리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박물학적 근거를 충분히 제시하고 있다.” 당시 주류 사회에서 유물론은 진화론보다 훨씬 배척받는 위험한 사상이었다. 다윈은 항상 종교에 관한 언급을 자제하면서 집필 활동을 과학에만 국한했다. 그는 충돌을 싫어한 ‘점잖은 혁명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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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은 강인한 탐험가였다. 도전과 탐험을 통해 사고의 지평을 넓혔다. 인생 최대의 모험은 4년9개월간 지구를 한 바퀴 돈 ‘비글호 항해’였다. 바다 위에서 17개월 동안 6400㎞를 항해하고, 낯선 미지의 대륙 3200㎞를 달렸다. 22세의 부잣집 청년이 지적 모험심 하나에 의지해 편안한 생활을 마다한 채 좁은 선실에서 극심한 멀미와 싸웠다. 1832년 브라질 밀림 지대, 1835년 갈라파고스 제도를 탐험했다.
다윈의 발자취를 따라 2004년 한 달간 갈라파고스 제도를 탐사한 한 과학자는 “다윈의 인내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절감했다”며 “적도의 태양은 푹푹 쪘고 마실 물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고 묘사했다. 폭염과 독충·가시덤불, 험한 지형에 모두 녹초가 됐다고 말했다. 다윈은 어릴 때부터 곤충 채집, 새 사냥에 몰입하던 소년이었다. 케임브리지대 졸업 전 카나리아 제도(諸島·모로코 근해) 여행 계획을 세웠으나 선박 사정이 나빠 포기하기도 했다.
다윈은 뛰어난 저술가였다. 50세에 역사를 뒤흔든
다윈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정약용 같은 학문의 통섭자였다. 지질학자로 출발해 동물학·식물학·조류학 등을 통달했다. 진화론에 결정적 힌트를 준 것은 정치경제학자인 맬서스의 '인구론'이었다. 식물의 변이에 관한 의문이 있으면 정원사나 농사꾼, 가축에 대한 의문이 있으면 사냥터지기나 개주인·마부에게 묻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벌레를 연구할 때면 ‘벌레의 영혼’을 갖고, 병상에 누워서도 덩굴식물을 관찰했다. 그의 연구 대상은 바로 자연과 생명이란 광범위한 주제였다. 그가 뿌린 학문의 씨앗은 인류학·사회학·심리학·의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 미치고 있다. 오죽하면 요즘에도 ‘다윈학(學)’이란 용어를 사용할까. 다윈 탄생 200주년을 맞아 새삼 그의 영혼을 기리게 된다.
김윤성 교수는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종교학과에서 박사를 마쳤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으로도 활동중이다. '인지적 종교연구, 그 한계와 전망', '칼 마르크스 종교비판의 재이해' 등의 논문, <종교 다시 읽기> 등의 공저, <다윈 안의 신>, <거룩한 테러> 등의 역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