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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4년 9월 8일(제36주) 오전 11:00
장소 : 인천은혜교회당
본문 : 요엘 2:12-17
제목 : 너희는 이제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요즘은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복수국적자들이 받는 기초연금에 대한 문제입니다. 1970-80년대 대한민국이 어려울 때 많은 사람들이 잘사는 나라들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런데 30-40년이 지나 나이가 많아지니까 고국이 그리워져서 한국으로 돌아왔고 복수국제제도를 통해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기초연금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분들은 그동안 대한민국에 세금을 내지 않았는데 기초연금을 받는다는 것이고 재산이 많아도 기초연금을 받는 것이 쉽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형평성 차원에서라도 국내 거주 기간 등 기초연금 지급 조건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기사를 보면서 그래도 나이 들어서 돌아올 고국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겠는가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위로와 소망이 되지 않을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선포한 요엘은 이스라엘의 12소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요엘이라고 하면 얼른 생각나는 곤충이 하나 있습니다. 메뚜기입니다. 요엘과 메뚜기,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요엘의 때에 메뚜기 떼의 습격이 있었습니다. 무서운 습격이었습니다.
요엘서 1:4절을 보면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팥중이, 메뚜기, 느치, 황충이 등 다양한 종류의 메뚜기 떼가 대단한 기세로 몰려왔습니다. 이 메뚜기 떼는 농작물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1:7절을 보면 메뚜기 떼는 포도나무를 멸하고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 그 모든 가지를 하얗게 만들었습니다. 1:9절을 보면 제물이 없어서 제사를 드리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대단한 사건입니다.
옛날에 우리나라 농부들은 먹을 것이 없어도 파종할 곡식 종자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굶어죽어도 곡식 종자는 베고 죽는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제물은 우리나라 농부의 종자보다 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물이 떨어져 가장 기초적인 소제와 전제를 드리지 못한 형편이 되었습니다.
갑작스런 메뚜기 재앙이 유다 땅을 휩쓸어 전국토가 황폐하게 되어 백성들이 불안과 공포에 떨며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요엘 선지자를 저들에게 보내셔서 이 재앙의 궁극적인 원인이 유다 백성들의 불신앙과 죄악에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선포하는 것이 본문 12-13절 말씀입니다. “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욜 2:12-13). 이 말씀은 유다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결코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어루만져 치료해주시며, 그들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그들을 도와주십니다.
요엘 선지자가 언제 활동하였으며 그가 활동했던 시대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학자들은 요엘 선지자의 활동연대에 대해 여러 가지를 학설을 주장하고 있지만, 학자들의 가장 큰 지지를 받고 있는 주장은 유다 왕국의 8대 왕 요아스(B.C. 835-796년)의 통치 초기일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 시기는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이스라엘 왕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를 왕위에서 몰아내고 요아스를 왕으로 세워 유다의 정치적 종교적인 개혁을 감행하던 즈음의 시기입니다. 그런데 이 때 갑작스런 메뚜기 재앙과 한재가 겹침으로 유다 전체가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 때 찾아온 메뚜기 재앙은 여느 때와는 다른 아주 엄청난 재앙으로 다가왔습니다.
여러 차례 메뚜기 떼가 지나가면서 엄청난 자연 재해를 입게 됩니다. 메뚜기 떼의 재앙은 우리가 직접 경험을 하지 못했기에 그 피해를 가늠하기 어렵지만 중동지방이나 아프리카에서의 메뚜기 떼의 재앙은 당시로서는 최고의 자연 재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엘 2:3절은 이 재앙을 피해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들의 예전의 땅은 에덴동산 같았으나 그들의 나중의 땅은 황폐한 들 같으니 그것을 피할 자가 없도다.” 이러한 재앙은 그 자체로서 엄청난 고통이었습니다. 말로 헤아릴 수 없는 절망과 고통 속에 빠져 있는 백성들을 향하여 요엘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본문 12-13절에서 “12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참담한 자연재해 앞에서 낙심하고 절망하고 어떻게 해야 될지 알지 못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말은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회개가 해결책이 되고 회개할 때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탕자가 다시 아들의 지위를 회복하고 거지와 같은 생활에서 아들의 풍요함을 맛볼 수 있었던 것은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니느웨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고 용서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요나 선지자의 말을 듣고 온 나라가 철저하게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라고 하였습니다. 회개가 답이고 회개가 축복이고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이 내일의 희망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은 봉독한 말씀을 가지고 “너희는 이제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이제라도 회개하라
오늘 이 시대는 어떻게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믿는 성도인 우리들은 어떻게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회개함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라고 시작합니다.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에서 ‘이제라도’ 라는 말은 사실 조금 늦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재앙이 있기 전에 회개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왔으면 좋았을 텐데 왜 진작 회개하지 못하고 왜 진작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못했느냐는 말입니다.
모든 만사에는 다 때가 있습니다. 회개에도 때가 있습니다. 유다의 요시야 왕은 8살 때 왕이 되어 31년간 유다를 통치하였습니다. 요시야 왕이 사람을 시켜 성전을 수리하는 가운데 성전에서 여호와의 율법 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율법 책을 읽고서 그는 자기의 옷을 찢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기록된 것과는 너무나 다른 잘못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라의 모습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시도했습니다. 철저하게 이방신들과 우상들을 깨트리고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잘못된 관습과 전통을 깨트려버렸습니다. 사사시대 이후에 처음으로 유월절을 지키기도 했습니다. 그 요시야 왕에 대한 성경의 평가가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는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왕하 23:26). 이렇게 철저하게 율법에 의지하여 종교개혁을 실시하고 백성들을 여호와께로 돌이켰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고 기회가 지나갔습니다. 이제라도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말은 이미 기회가 지나갔다는 말입니다.
자연 재앙이 일어나기 전에 회개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왔으면 이런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고 얼마나 좋았을까요? 너무 아쉬운 말입니다. 성도는 때가 지나가기 전에 회개해야 합니다. 부자가 지옥에 가서 회개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라도 회개하라’는 말은 그러나 아직도 희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라도 회개하고 이제라도 여호와께로 돌아오면 여호와께서 받아주시고 다시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는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제라도 회개하고 이제라도 돌아오면 됩니다. 회개에 너무 늦었다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라를 구원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나는 구원할 수 있고 나는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유다의 국가적 민족적 위기와 재난의 상황에서 회복하기 위해서는 금식하며 회개해야 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나봇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은 결과 여호와 하나님은 그에게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심판 선언을 들은 그 악한 아합 왕이 금식하면서 진정한 회개의 모습을 보였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선고한 심판을 연기하셨습니다(왕상 21:27-29).
또 니느웨에 요나를 통해 심판을 선고하셨지만 니느웨 거민들이 요나의 선포를 듣고 온 나라와 온 백성, 왕으로부터 크고 작은 모든 자들이 금식하고 회개하였을 때 선고한 심판을 내리지 않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욘 3:3-10).
이와 같이 진실한 금식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뒤바꾸는 큰 힘이 있습니다. 금식이란 생존에 꼭 필요한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 행위입니다. 그냥 굶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범죄한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죄악된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는 참된 회개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동안 범죄로 일관한 삶을 산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자만이 참된 회개에 이를 수 있습니다.
금식기도는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본격적인 구속 사역을 시작하시기에 앞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마 4:2). 또한 일사각오의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아하수에로 왕 때에 왕후 에스더는 자기 민족이 멸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모르드개를 통해 수산에 있는 온 유다인들을 모아 자신을 위해 금식할 것을 부탁하고 자신도 금식하며 기도하여 민족을 구했습니다(에 4:16).
모세도 하나님께 십계명을 받을 때에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고(출 34:28), 에스라 선지자는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하와 강가에 모이게 하고 무사 귀환을 위해서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하게 하여 응답을 받았습니다(스 8:21-23).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믿음의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질병이나 경제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들이 있다면 금식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려 보십시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믿음의 감격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2절을 다시 보면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운다’는 말은 슬픔의 외적 표현이라면, ‘애통’은 내적인 슬픔 곧 가슴으로 슬퍼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유다 백성들이 심판의 재앙을 초래한 자신들의 죄를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면서 울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죽음의 선고를 받은 후에 하나님께 목숨을 구하면서 심히 통곡하며 기도할 때 그의 생명을 15년 연장 받을 수 있었습니다(왕하 20:3).
시편 126편 5절을 보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지금의 상황이 비록 힘들고 고통과 고난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농부가 묵은 땅을 갈아엎어 씨앗을 뿌리듯 피와 땀과 눈물로 기도하면서 씨앗을 뿌린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쁨의 열매를 얻게 하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6:21절에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눅 6:21)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한 슬픔을 참지 못하고 우는 자들을 축복하시며, 웃는 자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는 자’란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도를 인정하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겸손한 자세를 지니는 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자신의 죄를 자복하며 우는 자가 다시 웃게 된다는 약속은 그들 안에 있던 슬픔의 요소들이 제거되고 기쁨으로 바뀌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환난으로 인하여 슬퍼하거나 자신의 죄로 인하여 슬퍼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위로를 가져다주십니다(마 5:4).
13절을 보면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여호와께 올라오라’고 하였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살면서 시간이 되고 때가 되면 하나님 앞에 나와 제사를 드리며 종교의식을 행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습관적이었고 관습적인 것이었습니다. 형식적이었고 종교적 행위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온갖 죄로 더러워져 있고, 악을 행하여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도 전혀 없었고, 위기의식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영적위기입니다.
바늘로 손끝을 찌르면 아파야 하는데 무감각하여 아픈 줄 모릅니다. 불에 데면 뜨거운 줄 느껴야 하는데 뜨거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것이 진짜로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우리들의 영적인 상태가 이런 상태는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요엘 선지자는 말합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옷을 찢는다’는 말은 형식적인 회개를 말합니다.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남보다 더 아픈 척하고 진실한 척 하면서 회개의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라는 것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알고보고 계시는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외식하며 진실한 척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옷을 수천 벌 찢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화인 맞은 듯한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무감각한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를 원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찢고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합니다.
탕자가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그 많은 재산을 허랑방탕하다가 다 탕진하였습니다. 금의환향이 아니라 거지꼴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가서 아버지와 가족들과 동네사람들을 무슨 면목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기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나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탕자는 이제라도 돌아갑니다. 이제라도 돌아갔을 때 자기가 생각했던 모습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집니다. 아버지의 극진한 환대를 받고 아들의 지위가 회복되고 잔치가 벌어지고 모두가 함께 즐거워합니다.
믿음에서 너무 늦은 때는 없습니다. 늦었다고 할 때가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회개해야 소용이 없다고 생각될 때가 회개해야 할 때입니다. 그 때가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 돌아가면 절대 늦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탕자보다 더 부족하겠습니까? 우리들이 아무리 타락했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에 달리 강도보다 더 타락했겠습니까?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 용서받고 구원받았다고 하면 우리들이 여호와께로 돌아가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시 회복할 수 있고 다시 용서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제라도 잘못한 것에 대하여, 죄를 지은 것에 대하여 회개하기를 축원합니다.
2.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본문에서 강조점은 ‘여호와께로’입니다. 유다 백성들의 삶은 겉으로 볼 때는 회개하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13절 말씀을 보면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고 했습니다. 옷을 찢는 회개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옷을 찢는다는 말은 나름대로 철저하게 회개한다는 의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요시야 왕이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 제일 먼저 한 일이 그의 옷을 찢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엘 선지가가 13절에서 하는 지적인 옷을 찢는다는 말은 형식적인 회개를 의미합니다. 습관적으로 옷을 찢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회개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을 보면 여전히 세상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이런 습관적이고 보이는 형식적인 회개가 아니라 마음을 찢는 회개를 하면서 여호와께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잘못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이방여인들로 아내를 삼고 며느리를 삼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율법에서 철저하게 금지시켰던 일이었습니다.
솔로몬 왕이 이런 일을 행하다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긴 일이 증거 하듯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모아놓고 너희 가운데 있는 이방여인을 다 돌려보내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이방여인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부부가 되어 오래 동안 함께 살면서 정이 들었고 아이까지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자기 부인을 버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회개는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을 찢으면서 돌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내가 좋아했고 사랑했고 정이 들었어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은 나를 따르려면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마음을 찢는 참된 회개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서 지금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으며 무엇을 따라가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행여 주님과는 반대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에서 돌아서서 방향을 전환해서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것은 정말 마음을 찢는 일처럼 쉽지 않는 일이고 힘든 일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에서 방향을 틀어서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그것이 회개이며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이 됩니다. 이런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옷을 수천 벌 찢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화인 맞은 듯한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무감각한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를 원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찢고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51편 17절에는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마음을 찢으며 진정으로 고치고 회개하여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1) 게으른 믿음생활을 고쳐라
옛날에 게으르기로 소문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 날도 역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밭으로 일하러 가고, 그 게으른 농부만이 텅 빈 집에 남아 하루 종일 빈둥거리고 있었습니다. 나른 한 오후, 언제나처럼 대청마루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농부는 게슴츠레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환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간 큰 도둑놈이 담을 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도둑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농부는 잠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어어, 도둑이네... 저놈 담장을 넘어 마당에 들어오기만 해 봐라.” 중얼거렸습니다. 그런데 ‘쿵’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농부가 다시 힘겹게 졸린 눈을 떠 보니 도둑이 담에서 뛰어 내려 마당까지 살금살금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농부는 누운 채로 “집안에 들어오기만 해 봐라...” 중얼거렸습니다. 농부가 깊은 잠에 든 줄 안 도둑은 농부의 옆을 지나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농부는 여전히 누운채로 중얼거리기를 “저놈이 안방으로 들어가네... 뭘 가지고 나오기만 해 봐라...” 얼마 후 도둑은 안방에서 값이 나가는 물건들을 한 보따리 짊어지고 나와 대문으로 사라졌습니다. 게으른 주인은 대문을 열고 나가는 도둑의 뒷모습을 보며 여전히 잠꼬대처럼 중얼거렸습니다. “이놈 다시 오기만 해 봐라...”
이 모습이 바로 우리의 믿음의 게으름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말만 잘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게으른 자라고 해서 그의 혀까지 게으르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게으른 자일 수록 핑계가 많고 변명이 많습니다. 몸은 게을러도 혀는 게으르지 않습니다. 혀는 게으르고 놀리고 몸은 부지런히 놀려야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혀는 부지런한데 몸이 게으른 믿음생활을 고쳐야 합니다.
믿음생활의 나태와 게으름은 영적 질병입니다. 다윗은 “새벽을 깨우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새벽을 깨워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일까요? 이른 새벽부터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을 새벽을 깨우지 못합니다.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김남준 목사님의 [게으름]이라는 책을 보면 “게으름은 시간을 죽이는 악이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육의 양식을 얻기 위해 부지런한 것만큼 영의 양식을 얻기 위해서도 부지런해야 합니다. 새벽을 깨우시고 영적인 부지런함으로 영성을 회복하고 영적 새 힘을 얻고 주님과 깊은 사귐의 시간을 갖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영적인 게으름을 타파하고 영적인 부지런함을 통하여 아름다운 영적인 노래가 가득한 믿음생활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형식적인 믿음생활을 고쳐라
예수님은 욕을 잘 하시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한번 욕을 하시면 듣는 사람이 엄청 기분 나쁠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감정을 격하게 하는 욕을 하셨던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12: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마음이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마태복음 24: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개새끼 정도는 욕 측에도 끼이지 못할 정도입니다.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들의 어감으로는 “독사의 새끼”보다는 “개XX”가 더 심한 욕처럼 들립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욕을 한 대상은 누구일까요?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이렇게 심한 욕을 먹게 된 원인은 바로 형식적이고 습관적이고 외식적인 믿음생활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척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척 했습니다.
마태복음 24:5절을 보면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하고...”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경문이란 ‘보초소’라는 작은 상자를 말하는데 여기에는 네 구절의 율법이 적힌 종이가 들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율법을 왼쪽 팔 안쪽이나 이마에 붙였는데 어떤 바리새인들은 자신을 더욱 경건하게 보이고자 크게 만들어 잘 보이게 했고 옷 술은 이방인과 구별시키기 위해 옷에 화려한 술을 달은 것을 말합니다. 모두다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것입니다. 그들의 겉모양은 그렇게 경건하고 의로와 보여도 그 속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고 회칠한 무덤같이 속에서는 썩어져 가는 송장냄새가 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구역질을 내듯 독사의 새끼들이라 욕을 하신 것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하나님님 앞에서 진실한 척 하면서도 그들의 마음은 악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면서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야 한다고 외침에도 당시 사람들도 형식적인 믿음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형식적인 믿음생활 속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은혜의 충만함을 찾을 수 없습니다. 에스겔이 본 골짜기의 환상에서 비록 말씀으로 마른 뼈들이 서로 들어맞고 살이 오르고 힘줄이 생겼다고 해서 그들이 곧 살아 움직이는 큰 군대가 된 것은 아니었잖습니까?
성도들의 믿음생활은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보이려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믿음생활을 고치고 주님과 참된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믿음의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습관적인 믿음생활을 고쳐라
우리들은 교회에 나오는 것부터 시작해서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주 익숙합니다. 몸에 잘 배어있습니다. 익숙함의 장점도 많이 있지만 익숙함의 단점은 습관적이 되고 매너리즘으로 변질 된다는데 있습니다. 언제나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이 새로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요한계시록 14:3절을 보면 구원받은 십사만사천명의 노래가 나오는데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새 노래’란 새로 작사 작곡된 노래가 아니라 새로운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를 말합니다.
오늘 주님 앞에 나온 우리들은 어떤 마음으로 나오셨습니까? 주일이 되었고, 예배 시간이 되었고, 안 나오면 벌 받을 것 같은 불안한 마음 때문에 나오셨나요? 예배당에 왔다고 하나님께 인사하듯 기도하고, 아무런 마음의 감동도 없이 찬송을 불렀고, 설교 시간이 되었으니 아무런 생각 없이 설교를 경청하고, 삶 속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과는 상관없이 헌금시간이니까 그냥 바치고, 십일조를 드리고 있지나 않으십니까? 습관적으로 하고 있지 않으냐는 말입니다.
이렇게 믿음생활을 해서 생활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은혜 좀 많이 받으셨나요? 왜 나는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고, 헌금도 구별하여 드리는데 왜 마음에 평안이 없고 믿음은 자라지 않고, 은혜는 체험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지 못할까? 라는 생각이 든다면 나의 믿음생활의 태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습관적으로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말씀을 듣고 있지나 않은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너무 익숙하면 새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모든 믿음생활에 감사와 감격이 넘치기를 원하면 습관적인 믿음생활을 고쳐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도 자라고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 형식이 아닌 마음의 개혁으로 우리의 영적생활을 새롭게 세워서 더 큰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져 나가는 은총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엘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따라가던 사람들이 우상에게 등을 돌리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죄의 길로 행하던 발을 완전히 돌이켜 의의 길로 행하게 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참된 회개란 죄악된 과거의 삶을 단절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삼상 7:3). 죄를 고백하고 울고불고 해도 하나님께 돌아가 의의 열매를 맺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정해야 하고, 자기의 마음을 찢어야 하고, 이전에 행하던 죄의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죄를 사해주시고 그 땅을 고쳐주십니다(대하 7:14). 긍휼히 여겨주시고 너그럽게 용서해주십니다(사 55:7). 생명을 얻게 해주시고(행11:18),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행 2:28). 습관적인 믿음생활을 고쳐 여호와께 돌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성도가 가야할 여호와께서 계신 곳
오늘 설교제목이 무엇이었죠? ‘너희는 이제 여호와께로 돌아오라’였습니다.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그 방법의 첫 번째가 ‘이제라도 회개하라’였습니다. 여호와께 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 ‘이제라도’ 라는 말은 이미 ‘늦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늦었지만 여호와께 돌아가면 그것이 결코 늦지 않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길게 예를 들며 설명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호와께서 어디에 계시는 것일까요?
저는 그것이 출애굽기 19-20장에 있는 내용이라고 해석합니다. 출애굽기 19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난 지 삼 개월 될 때 이스라엘의 대표자 모세와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는 내용입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신 말씀이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입니다. 우리가 여호와께로 간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대신의 계명이 있고 대인의 계명이 있습니다. 그 말씀으로 가는 것이 바로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은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벌어지는 일들이 재앙입니다. 요엘 선지자가 선포한 것이 바로 메뚜기 재앙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엘 은 이렇게 무서운 메뚜기의 습격에 대해서 말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나라도 여러 형태의 메뚜기 떼들의 습격을 만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의 무능과 독선이라는 메뚜기, 북한 핵의 위협이라는 메뚜기, 지나치게 거친 시위라는 메뚜기 떼의 습격을 만나고 있습니다. 지금은 물가폭등이라는 무서운 메뚜기 떼가 우리나라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라는 말을 심각하게 들어야합니다. 이 말씀에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 어떤 메뚜기를 만나고 있습니까?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이 말씀을 역시 심각하게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에 따르시기 바랍니다.
예레미야 4:1-2절은 “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은 재앙을 내리십니다. 사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되어 지고 있는 일들을 보세요. ‘이대로 가면 하나님께서 큰 재앙을 내리시지 않을까?’ 많이 염려가 됩니다.
요엘서에 기록된 메뚜기 재앙에 대해서 이것은 사납고 강한 군대가 메뚜기 떼처럼 쳐들어오는 것을 예언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본문 앞의 4-11절까지에 “그의 모양은 말 같고 그 달리는 것은 기병 같으며...” 라고 하면서 군대가 쳐들어오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은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실 지도 모릅니다.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또 어떻게 될까요? 말라기서 4:6절이 짧으면서 강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저주하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사람들이 노아에게 물었을 것입니다. ‘영감님, 지금 무얼 하시는 것입니까?’ 노아가 대답했겠지요. ‘예, 하나님께서 이 땅이 부패하여 포악함이 가득한 것을 보시고 이 땅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셨답니다. 그 때 살아남기 위해 나는 이 방주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방주가 다 만들어지면 여기 들어옵시다. 그래서 같이 삽시다.’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말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영감님, 머리가 어떻게 되신 것 아닙니까?’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홍수 심판을 받아 모두 죽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도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면 ‘거기서 의인 십 명을 찾으면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회개는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이고 여호와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삶으로 새롭게 변화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을 향해 있던 자가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것,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내 마음대로 내 고집과 내 뜻을 따라 살던 것을 바꾸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사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 회개에 늦은 때는 없습니다. 이제라도 여호와께로 돌아오면 됩니다. 그럴 때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신 여호와 하나님은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이제라도 회개하고 여호와께 돌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