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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영향력이 가장 큰 안철수 교수는
최근 자신의 저서를 통해
'리더십이라는 건 리더가 스스로 주장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쳐다보면서 따라갈 만하다고 판단하면 따르는 것이다. 라고
즉
따라갈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리더로 인정하고
그런 사람에게 대중이 선물로 주는 게 리더십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홍명보는 올림픽 최종예선 기간 동안 선수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난 마음속에 칼을 가지고 다닌다. 남을 해치는 칼이 아니라,
너희들이 다칠 것 같으면 내가 먼저 죽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팀을 위해 죽어라. 난 너희들을 위해 죽겠다."
또 다른 일화도 있다.
대한축구협회는 2010남아공월드컵 직후 허정무 감독이 연임을 고사하자 새 사령탑을 물색했다.
1순위는 홍 감독이었다.
당시 축구협회 고위관계자가 홍 감독을 3번이나 만났다.
"술도 마시고 밥도 먹으며 협박 반 부탁 반으로 대표팀을 맡아달라고 했다.
지금은 홍 감독 밖에 없다고 강하게 요청했다.
그 때마다 홍 감독은 거절했는데 이유가 똑 같았다.
'저희 선수들과 런던올림픽을 함께 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홍 감독은 선수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외치지 않는다.
선수들이 홍 감독을 보며 따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게 바로 홍 감독 리더십의 비밀이다.
실력도 갖추고 신중하고 의리도 있고 그런 감독이라는 것이다...
축구를 선택하고 축구를 하는 선수들에게 누구를 롤모델로 하냐고 물어보자
외국선수론
펠레.마라도나,지단,호나우드,요한크루이프,베켄바워
메시.호날도,카카,비디치,등등 쟁쟁한 이름등이 나온다
국내선수를 들라고 하면 누가 나올까?
박지성,차범근,이동국,
홍명보가 많이 등장한다.....
대한민국 축구역사상 축구도 잘하고 은퇴후에도 좋은일 하며 인정받고있는 사람은 단 3명
차범근, 홍명보,박지성 뿐이다
그 중에 수비와 중원을 책임지며 경기전반을 지배했던 선수는 홍명보 뿐이다.
한국 축구와 동의어였던 홍명보가 다시 한국축구 무대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끌었던 홍명보가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또 한 번 4강 신화의 주역이 됐다. 태극 마크를 반납한지 10년이 지난 홍명보는 감독이 되어 전설을 쓰고있다. 수비수지만 공격의 시발점 역할, 고비 때마다 터진 결정적인 골 등으로 '아시아의 리베로'로 불렸고, 비록 유럽 무대에서 뛰진 못했지만 각종 세계 축구 올스타전에 출전하며 아시아 축구의 대표자로 활약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브론즈볼을 수상하며 영예롭게 대표 생활을 마무리했다. 2002년의 주역들이 대거 유럽 무대에 진출했고, 박지성이 유럽 무대에서 놀라운 활약을 펼치며 한국 축구는 한 단계 진일보했다. 2002년에 세계의 벽이 허물어졌고, 한국 축구는 무대의 중심에 섰다. 한국 축구팬들의 눈은 온통 유럽으로 쏠렸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홍명보는 다시 한국 축구 최고의 영웅으로 돌아왔다. 1990년과 1994년, 1998년, 2002년 등 선수로 4년 연속 월드컵에 출전한 홍명보는 2005년 한국 대표팀 코치가 됐다. 딕 아브보카트 감독을 보좌하며 2006년 독일 월드컵에 코치로 참가하며 무려 5개 대회를 연속으로 경험했다. 이어 2007년에는 핌 베어벡 감독의 수석 코치로 아시안컵을 경험했다. 네덜란드 출신의 두 지략가 밑에서 알찬 경험을 쌓았다. 박성화감독과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도전했다. 코치로 나선 국제 대회 결과는 모두 조별리그 탈락이었다. 아시안컵에서도 3위에 그치며 우승이라는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하지만 실패 속에서 홍명보는 많은 것을 배웠다. 2009년 20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을 맡아 감독으로 첫 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낙하산 감독이 아니었다. 모두 세계의 벽을 절감하며 고개를 떨구고 돌아왔지만 끝내 마지막 대회에서 불멸의 4강 신화를 이끌었던 홍명보는 실패를 밑거름 삼아 역사를 만들었다. 이집트에서 열린 FIFA U-20 월드컵에서 8강 진출에 성공했다. 1983년 멕시코 대회 4강 이후 역대 두 번째 최고 성적이다. 금메달이라는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하지만 홍명보에게 실패란 좌절과 동의어가 아니었다. 홍명보의 최종 목표는 2012년 런던 올림픽이었다. 감독직을 시작한 이후 2009년 FIFA U-20 월드컵,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나선 선수단이 2012년 런던 올림픽까지 연속성을 가지고 운영됐다. 조별리그를 무패로 통과한 한국은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개최국 영국과의 8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승리했다. 늘 무뚝뚝한 표정의 홍명보는 10년 만에 다시 티 없이 맑은 웃음을 보였다. 그는 승리의 순간에만 함께 한 것이 아니다. 그는 가장 쓰라린 패배의 순간에도 그 자리에 있었다. 3전 전패로 탈락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네덜란드에 0-5 참패를 당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그리고 이란에게 치욕적인 2-6 패배를 당한 1996년 아시안컵에도 홍명보가 있었다. 홍명보 역시 천하무적의 초인이 아니라 똑같은 사람이었다. 패배에서 교훈을 얻고 배우고 발전하는, 포기 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또 준비하는,. 그것이 바로 홍명보가 대표팀의 주장이자 감독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그리고 '리더'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자질이다. 하지만 선수들이 정신적으로 실망스러울 때는 가차 없었다.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일본 가시와 레이솔 주장으로 활약하던 때도 '깜짝 호통'으로 선수들을 다잡았던 홍명보는 언제 어떻게 팀을 통솔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각각 다른 방식이 언제 효과를 발휘하는지 알고 있다. 경험과 고민의 힘이다. 내 생각은 다르다. 언제 이런기회가 다시 올것인가? 10년전 월드컵에 기회가 있었는데 독일에 져 기회를 놓쳤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 10년뒤쯤이나....다시못올 절호의 기회이다. 홍명보의 생각도 그렇 것이다 . 8월 8일 새벽에, 홍명보 감독이 어떤 지략을 펼쳐보일지 관심이 모아진다.
1990년대 한국 축구는 홍명보로 통했다.
축구팬들은 '선수' 홍명보를 빠르게 잊었다.
그 사이 홍명보는 지도자로써 자신의 길을 착실하게 걸었다.
이후 23세 이하 올림픽 대표팀 코치로 지도자 수업을 이어갔다.
선수로 나선 3번의 월드컵 출전에서
1년 뒤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2012년 런던에서 결국 신화가 쓰여졌다.
한국축구 최고의 순간에 언제나 홍명보라는 이름이 있다.
하지만 홍명보는
홍명보는 기술적 실수에 관대하다.
사람들은 브라질과의 경기를 앞두고 '할 만큼 했다, 져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