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자산 성지
드디어 전주 시내로 들어왔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한 순례길의 저녁 무렵에 초남이 성지를 돌아 전주 한옥마을 안에 있는 숙소인‘승광재’로 간다. 승광재는 조선 26대 황제인 고종의 후손이자‘비둘기 집’이라는 노래를 부른 가수로 잘 알려져 있는 ‘이석’님 머물고 있는 곳이다. 안타까운 역사적 현실이다. 한때는 조선을 통치했고 평민은 감히 바라볼 수도 없었을 황손이 이젠 한옥체험 숙박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프다.
시간이 늦은데다가 폭염으로 온몸이 흠뻑 젖은 터라 잠시 쉬었다가 편안한 차림으로 한옥마을을 한 바퀴 휘돌아본다. 그때 눈에 확 들어온 것은 옛날식 팥빙수! 한옥마을에서는 맛나기로 소문난 곳이어서 그런지 따가운 여름 햇살도 아랑곳하지 않고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먹고픈 유혹에 남편 팔짱을 끼고 대열 끝에 합류한다. 긴 시간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집이다.
저녁 6시가 되어 가는데도 폭염의 기세는 따갑다. 그래도 시원한 팥빙수 덕분에 기운이 솟아 바로 치명자산 성지를 찾아보기로 한다. 차를 끌고 갈까 하다가 천변을 걸어가면 바로라는 말에 용기를 내어 시원한 커피를 들고 천변을 걸어간다.
앗! 이럴 수가.
치명자산 성지에 도착하니 벌써 어둑어둑해진다. ‘어떡하지? 내일 다시 올까? 설마 성지인데 사람들이 많겠지? 더우니까 밤에 올거야.’둘이서 서로 위안을 삼으며 십자가의 길을 시작한다. 1처, 2처, 3처, 한 곳씩 지날 때마다 십자가상이 어둠이 묻혀 보이지 않고 모기와 벌레들만 윙윙거린다. 이젠 돌아갈 수도 없다. 땀은 비 오듯이 흘러내리고 모기에 물린 자국은 가렵기만 하다. 14처를 다 마치고 앞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어둠이 몰려왔는데도 성당은 보이질 않는다.
‘어쩌지? 어떻게 내려가지?’
걱정이 앞서기 시작한다. 산이어서 금방 어두워진다는 것을 계산에 넣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남편이랑 걱정을 하면서 한 구비를 돌아드니 그리운 성당이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이곳에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처, 동정부부였던 큰아들 유요한과 이 루갈다, 둘째 아들 유문철 요한, 제수씨, 조카 등 일곱 분의 모셔져 있다.
천만다행인 것은 사방이 어둡고 시간이 늦었음에도 성당이 열려있다는 거다. 그동안 대부분의 성지에서 월요일이라고 성당을 닫아 둔 곳이 많았는데 감동이다. 사방이 까만 산속에 성당마저 문이 잠겨 있었더라면 실망이 컸을텐데 고마움이 앞선다. 예쁘게 모자이크로 만들어진 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한다.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를 하고, 이젠 발끝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이어서 남편 손을 꼭 잡고 휴대폰 불빛을 길잡이 삼아 더듬거리며 치명자산을 내려온다. 남편 손을 그렇게 꼬옥 그리고 오랫동안 잡아 본 것이 언제였더라? 정이 새록새록 돋는 느낌이다. 하지만 남편이나 나나 둘 다 다리가 아픈 처지라 울퉁불퉁한 산길을 걷고 나서 다시 발목에 무리가 생길까 걱정이다.
이러다가 내일 성지순례를 멈춰야하는 것은 아닐까?
첫댓글 치명자산!!
이번 순례길 중 가장 힘들었던 곳이지만
오랫동안 안타까움으로 남은 성지이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은 믿음으로
한 가족이 모두 순교를 한 그곳
그분들의 넋이 그대로 잠들어 있는 그곳....
어둠 안에 밝게 빛나던 성당이 눈에 선합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요.
사물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어둠을 헤치고
내려와서 다시 천변을 걷고나서
전주 모주 한 잔~~ 행복이었습니다.
모기에게 희생제물로 바쳤던 피가 아깝더이다 ㅋㅋ
어둠속을 뚫고 찾아간 성당에서의 성체조배..
저에게도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돌아서면 늘 아쉬움만 남는답니다^^
두분의 맞잡은 손~~조금은 불편하신 다리로 아름다운 순례길 걸어 가시는 발걸음 축복 합니다.
하루빨리 튼튼한 예전의 발목으로 돌아오기를 바랄 수밖에요
그래야 발발거리고 돌아다니지요 ^^
밤길에 불편한 발로 부부가 함께 불 밝히며 순례하시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두 분의 발 밑에는 주님의 천사가 든든히 지키고 계셨을 겁니다.
두 분이 바친 기도에 저도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늘 기도해주시고
기억해 주시는 님들 덕분에
혼자라는 느낌보다 함께라는 기분이었답니다
'따로 또 함께' 가 아주 잘 어울리는 순례길이었네요.
누구나 혼자이면서도 또한 동행이 있음에 감사드리는 순간들.....
마음으로 함께 걷습니다